텔레비전에 대한 명상
직장에 가면 컴부터 켜고 집에 오면 티비부터 켤 것이다.
‘또 하나의 가족’이라 하지 않던가.
“‘쩐의 전쟁’ 보나?”
“전 텔레비전을 안 봐요.”
라고 말하면 좀 멋있게 보인다.
나는 한동안 안 보기도 하고 또 가끔 본다.
이너넷에서 본 뉴스를 밥 먹을 때 또 보고
주몽은 안 봤지만 스컬리 나오는 X- file은 죽 보았다.
어쩔 때는 공중파 채널 다섯 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자학에 가까운 티비 시청을 할 때도 있다.
근데, 세상 대개가 그렇듯
소프트웨어만 문제가 아니라 하드웨어도 좋으면 좋다.
그 텔레비전
하하, 부자들은 진즉 샀겠지만 LCD 42인치 엑스캔버스를 샀다.
싸고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싸고 좋다는 생각으로 산 것이다.
요즘 비싼 것은 타임머신 기능도 되지만, 그냥 소박한(?허허) 150만원대
가격대비 성능, 그만하면 됐다.
중학교 2학년 속리산 수학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아부지가 처음 금성 17인치를 사놓고 득의양양하게 저녁밥상에 앉아
동물의 왕국을 보던 때가 생각난다.
아들이 묻는다. 이 비용에 채널 5개면 효용이 적지 않냐고?
그래, 케이블도 신청해야겠다.
물건을 산다는 것
불확실성에 대한 인내
LCD 판넬 값이 계속 떨어진다는 것,
더 이상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은 죽기를 기다리는 것.
기회비용에 대한 검증이 끝나고 매몰비용을 받아들이는 것
뭐 하이마트도 가 보고, 오미에서 가격비교 다 해봤지.
50인치는 너무 크고, 아니 집 평수가 크다면 생각해 봤겠지만
남들은 이미 사오백 만원 헐 때 산 사람들도 많지만
PDP 나 프로젝션을 안 산 것에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저질렀네.
마눌이 시집 올 때 가져온 20년 가까이 쓴 아남 25인치(이놈 생김새가 거의 정사각형)가 레드 컬러를 잃어버려서
한 동안은 옆구리를 장구 치듯 두들기면 좀 나오던데,
이게 노란색만 나오는 흑백이 된 거라.
아내가 김희애 연애하는 이야기를 보겠노라고, 새로 사자고 혀서
하여튼 이걸 벽에다 턱 걸고
토 일요일 CSI 수사대서 호레이쇼 경감이 마이애미 바닷가서 뽀다구나게 범인 잡는 것을 공들여 보고
미켈란젤로 안토니 영감의 흑백영화 '정사'를 처음으로 마져 다 보고
다큐 ‘북극의 나누크’도 떼고
어제는 수퍼잭을 장만하여 노트북에 다운받은 PRISON BREAK 스코필드의 그윽한 눈길을 한 번에 10회에 걸쳐 보았다.
잠이 오는데 커피와 담배를 부어가면서 세 시 반까지
나는 이렇게 잘 사는데
아내와 나는 매일 새로운 것들을 들여와 쟁인다.
집에는 고기가 그득그득하고
얼마 입지 않은 옷들은 금방 헌 옷이 된다.
소비로 말하자면 우리가 그들을 죽어도 이길 수 없는데,
우리는 지른다.
정말 황지우 시처럼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
쓰레기를 안 만드는 상황
인간과의 관계에서 엔트로피를 안 만드는 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음
남편과 아비로서의 품격과
나를 둘러싼 물질과 물질적 욕망에 대한 것들의 다스림
있는 것들을 잘 활용하고
조금 모자라게, 없이 사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친구들 우리 집 오라
레스링이나 축구 나오는 테레비 공짜로 보여줄게.
<더 차일드> 재미없습니다.
오늘밤에도 스코필드를 죽어라 보겠습니다.
친구들, 금방 날이 더워지네.
공부도 때가 있다는 아버지 말이 생각나는 초여름 입구에서
안녕
첫댓글 물질과 나의 관계성을 적절하게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賢人'이라고 하셨죠? 이미 흑백이 되어버린 오래된 TV를 LCD로 교체하신 선생님의 선택은 탁월하십니다. 그 선택이 다양한 기쁨을 주었으니 더더욱 그러하군요. ^^ 전 7년전 16:9 평면나올때 지금 LCD가격보다 조금 더 주고 구입한 이 물건이 여배우 뚱뚱하고 골프채널 거리감을 알 수 없을 만큼 퍼져나오는 통에 이미 애물이 된지 오래이나..... 쓰레기양산의 과소비를 범할 수 없어 걍 지내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凡人'도 아닌 어리석음(愚人)에 통탄할 밖에요. 그 잘못의 원인을 남편에게 고스란히 떠넘기고 잔소리하며 몇년째 살아갑니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하네요.^^
지금은 TV 보다 더 큰 것을 바꾸고도 덤덤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샘은 무한한 상상력 자극하는 명상을 하셨습니다. 분명 생산적 소비인데요..(샘도 인정하시려나??) 덕분에 저와 함께한 물질로서의 TV, 관계 생성으로서의 TV를 동시에 떠올렸습니다.^^ 운전 중에는 TV를 소재로 한 시놉시스까지 썼으니.. 샘의 글은 대단한 명상입니다. 단편 영화 하나 만들고 싶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