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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기독교 복음의 정신과 멀어진 한국교회가 걱정스럽다. 신앙은 있되, 참신앙은 없는 기독교인들도 염려가 된다. 언제부터였을까. 참신앙과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하지만 늦지 않았다. 한국 기독교의 뿌리를 되돌아보는 것에서 시작하자. 참된 복음이 살아있던 시절의 장소로 되돌아가 본다. 1.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탑과 외국인묘지공원 2. 소래교회 3.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과 절두산 순교 기념관 |
◇순교자 기념관 옆에 서 있는 기념 십자가 |
“푸우―” 거칠게 칼에 물을 품어대는 망나니의 모습에, 두려움에 떨던 서양인들이 하나 둘씩 쓰러져 가고 단 한 사람만이 남았다. 그는 화염에 휩싸였던 제네럴 셔먼호에서 밖으로 책을 던지던 바로 그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죽음을 앞둔 그는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칼을 휘두르는 망나니에게 그는 웃으며 붉은 비단으로 싼 무언가를 건냈다. <한문 성경>이었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이들에게 전도지와 ‘쪽성서’도 나눠주었다.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사람이 실성하지 않고서야 저 상황에서도 웃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도대체 이 책이 뭐길래, 저토록 열심히 나눠준단 말인가!” “도대체 죽음 앞에서도 초연케 할 수 있는 그 힘이 어디서 오는가!”
마침내 그는 대동강변의 하류 양도진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사건이 있은 후에도 오래도록 그에 대한 이야기는 마을을 술렁이게 했다. 사람이 아니었을 거라는 허황된 얘기에서부터 실성한 사람이었을 거라는 등의 이야기까지. 그러나 한참이 지나서 그들은 알 수 있었다. 그가 토마스 목사였으며 죽음에서도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야소성교’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한국 개신교 순교 신앙의 뿌리를 세우다
◇순교자 202명의 사진과 유품이 전시돼 있는 3층 전시실(위). 2층 예배당 안에는 1930년대 이전의 교회와 사회의 모습을 찍은 사진(아래). |
기념관 건물의 입구에 들어서면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목사의 처형 장면을 만나게 된다. 소나무의 푸르름을 자랑하는 대동강변의 한쪽에는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가 불타고 있고, 불타는 배에서 뛰어내리고 있는 서양인들, 그 배를 향해 활과 총포를 겨누고 있는 한국 군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강변에는 처형을 앞둔 토마스 목사와 그 앞에 놓인 성경책과 평양 주민들도 있다. 순교자 기념관 입구에서 토마스 목사의 순교 장면을 보는 것은 단순한 자극 이상의 의미다. 섬세한 묘사와 수묵담채화로 그려낸 <토마스 목사의 순교>는 역사책에서 문자로만 전해듣던 기독교 역사를 생생한 그림으로 그 감회를 새롭게 한다.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1988년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착공된 이 기념관은 366평 총 3층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전체는 직사각형의 건물이지만 건물의 안쪽 중앙은 원통형으로 돼 있어 사각형과 원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3층 건물이지만 중앙에 나선형으로 계단이 이어져 있어 천천히 걸어 오르는데 부담이 없고 나선형의 계단 벽에는 <토마스 목사의 순교>를 그린 혜촌 김학수 화백의 ‘한국 교회와 관련된 역사화’들을 볼 수 있어 각 층으로 오르는 길이 심심치않아 좋다. 한국 최초의 교회 소래교회, 개신교 순교자들이 순교당하던 모습, 언더우드 학당과 이화학당, 새문안교회, 이성봉 목사의 부흥성회, 제암리교회가 불타는 장면 등 한국교회 역사의 다양한 장소와 사건을 담아 한눈에 한국 개신교 역사를 훑어 볼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2층에 도착하면 좌측으로 예배당이 자리하고 있다. 100여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의 벽면에는 1930년대 이전의 교회와 사회 모습을 담은 사진 120점이 전시돼 있는데, 당시의 역사적 사건들의 생생한 사진들이 한국 선교 초기 사회와 역사를 한눈에 아우를 수 있게 돼 있다.
예배당을 나서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오르면 6·25전쟁 당시 순교한 이들의 사진, 성경, 편지 등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총 202명. 교파와 직분을 초월해 순교한 이들의 사진과 그 아래 쓰여 있는 간단한 약력을 읽으면서 매우 낯익은 이들을 찾을 수 있었다. 6·25 당시 전북 신태인교회 목사로 총살당하여 그 시체가 연못에 던져졌다는 김병구 목사, 한국 최초의 신학교수였던 남궁혁 목사, 주기철 목사와 함께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다가 공산군에게 살해당한 백인숙 전도사, 민족대표로서 반공결사회 조직의 혐의로 총살당한 신석구 목사 등 한국 교회 역사에서 획을 그었던 순교자들의 사진과 유품을 만날 수 있다. 전시장의 바깥에는 순교당한 이들의 교회와 약력 등이 간략하게 정리돼 있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신앙을 지키다 하나님의 곁으로 떠났는지 짐작케 한다.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보기 흉하다. |
기념관을 찾는 이들의 수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방학 때인 요즘 많게는 하루 7,8백 명, 적게는 2,3백 명의 기독교인들이 찾고 있다니 이미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곳을 알고 있다 생각해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1991년도 대한민국건축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는 이 곳은 현재 건물 외벽이 많이 벗겨진 상태다. 관리가 다소 소홀한 탓이라고 여겨지는데 그것은 실내도 마찬가지여서 소장상태가 제일 중요한 기념관 전체에 축축한 공기가 감돌았다. 한국 교회 전체가 더 많은 관심과 투자로 한국 기독교를 지탱하는 뿌리가 돼 온 순교자들의 얼과 뜻을 기념해야 할 것 같다.
6.25전쟁 외에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순교한 이들은 수없이 많다. 한국 최초의 교회 소래교회가 세워진 이후 순교한 이들은 총 2,600여 명으로 추산한다. 한국 교회 초기 백성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을 하고 신사참배를 안 한다는 이유로, 6·25 당시는 공산주의를 거부한다고 순교했던 수많은 이들. 그들의 모든 희생과 가치를 건물 속의 몇 장의 사진과 유품으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기리기 위한 순교자 기념관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더 없이 의미 있는 장소가 될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흉상과 친필서판 |
절두(切頭)의 시린 아픔
개신교인들에게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이 있다면 풍광 좋은 한강변 절두산에는 신앙의 이름으로 스러져간 천주교인들의 순교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구교, 신교라는 이름으로 엄격히 분리한다면 “다른 교파”이겠으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귀한 생명을 내어 던진 이들의 넋을 어찌 ‘남’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한강변 당산 철교쪽 길 옆으로 절두산 순교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쇄국정책을 강행하던 대원군은 병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 어린 박해의 칼을 휘둘렀고 대략 1만여 명 이상의 천주교인들이 신앙인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1967년 세워진 이 곳은 순교기념 박물관을 비롯, 순례 성당, 성모동산과 성모동굴, 성인 김대건 신부의 동상, 순교자들의 묘 등을 만날 수 있다.
◇절두산 순교 기념관. 잘 정리된 조경이 돋보인다 |
총 3층으로 이루어진 순교 기념관은 순교 박물관과 순례 성당으로 나뉘어 있는데 박물관 전체 면적은 100여 평으로 현재 전시된 유물에 비해 협소한 편이다. 총 3천여 점의 유물, 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평소에는 약 8백여 점만이 전시된다. 순교기념관으로 들어서면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이 있다. 김대건 신부의 그림과 자필 편지,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실학자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유품, 안중근 의사 관계자료 등과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形具) 등을 비롯해 한국 초기 천주교가 들어오던 당시의 값진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 또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와 순례 성당을 돌아보는 것도 감회를 더해 준다. 특히 기념관으로 향하는 길에 조성된 순교 기념공원은 조경이 잘 되어 있어 많은 시민들의 휴식처요, 신앙인들에게는 묵상의 공간이어서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당긴다.
“방학을 맞아 아이들과 천주교의 순교자들과 한국 교회의 역사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 왔다”고 말한 김 아무개 씨는 “아직은 어려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커가면서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취재가 있던 날도 방학을 맞아 부모님과 함께 박물관을 찾은 많은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성당에서는 정기적으로 미사도 열려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찾·아·가·기 |
한국 기독교 순교 기념관은 남부터미널에서 용인의 양지까지 간 후, 그 곳에서 이천가는 완행버스로 15분 가량 가면 기념관 입구에서 내릴 수 있다. 입구에서 1.6KM가량 걸으면 된다. 자가용으로 갈 경우,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양지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와 바로 좌회전해서 10여 분 가량을 가면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팻말을 만날 수 있다.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은 지하철 2호선 합정역에서 하차 후 합정 로타리에서 도보로 15분 거리다. |
취재수첩 |
개신교를 대표한다 할 수 있을 한국 기독교 순교기념관은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비해 많은 차이를 보였다. 용인에 위치한 순교 기념관은 방학 중 하루 7,8백 명이 찾을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도 관리 상태가 좋지 않아 내부가 습기로 축축하고 외벽도 많이 손상돼 있었다. 이에 비해 절두산 순교 기념관은 최근 순교 기념관을 박물관으로 용도 변경하는 등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 보수하는 가운데 있고, 영상교육관(가칭)을 착공하고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등 순교 성지를 찾는 안내객들을 위한 다양한 볼거리 제공과 명실상부한 순교 성지로서의 자리매김을 위해 노력하는 등 많은 차이가 있어 개신교에서도 더 많은 관심과 후원이 필요하다. 한국 기독교 순교기념관 031)336-2825 절두산 순교 기념관 02)3142-4435 http://www.jeoldusan.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