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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알래스카 원주민을 포함하여 미국 본토의 원주민은 아시아에서 이주해 왔다.
이들은 최소한 1만2천년전에서 4만년 전에 이곳에 당도하기 시작하였다.
[2] 콜럼버스가 이 곳에 오기 전, 미시시피 문명 등은 발전된 농업, 대형 건축, 국가 수준의 사회를 이룩하였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고 나서, 수백만명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외부로부터 유입된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으로 숨져 갔다.
[3]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시작되는 에스파냐 사람의 식민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고,
1607년에 시작되는 영국인의 입식자(入植者)가 차츰 세력범위를 넓혀 영국은 1733년까지
13개의 식민지를 대서양연안에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 식민지도 식민의 동기가 북쪽과 남쪽에서는 크게 달랐다.
유럽의 7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이긴 영국이 식민지의 통제를 강화하자 13개 식민지가 조지 워싱턴을 중심으로 결속, 궐기하고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대영 제국으로 부터 독립하여
미국을 수립한 것이 국가로서 미국의 시초였다.
미국은 1774년 7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프랑스의 지원에 힘입어 178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다.이어서 1787년에 미합중국 헌법이 발포되고,
1789년에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지도 아래 연방국가가 발족하였다.
미국은 독립 후에도 프랑스·에스파냐 등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여,
1848년에는 31주, 면적으로 거의 현재의 규모에까지 발전하였다.
원주민 인디언을 몰아내고 서부를 개척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서쪽으로의 발전은 이른바 프론티어 운동으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렇게 발전한 신세계의 내부에서는 식민지 건설 당시부터
싹터온 남북의 대립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미국의 남부와 북부는 식민지 초기 시대부터 종교나 경제 체제를 달리하고 있었는데,
그후 이 차이는 양립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고,
노예제 문제 등으로 갈등이 깊어진 미국은 1861년 남북전쟁이라는 내전을 치르게 된다.
남북간의 내전은 1865년에 북부의 승리로 끝났는데,
이것은 북부의 생산력, 특히 공업력이 남부의 농업에 대하여 거둔 승리이기도 하였다.
미국의 산업혁명은 19세기 중엽까지로 끝나고,
남북전쟁 후는 국내 자원의 개발과 교통기관의 발달에 힘입어 미국의 산업자본주의는
약진을 이룩하였으며, 급속히 독점화의 경향을 보였다.
산업이 발달한 결과 각지에 공업도시가 발달하였으며,
현저한 빈부(貧富)의 차, 슬럼가(街)나 범죄의 발생이 사회문제화되고 노동운동이 격화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멕시코 전쟁으로 얻었던 땅을 뺏길 위험에 처하자 독일 등에 선전포고 하고,
전승국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세계 제1의 부(富)를 갖게 된 미국은 전쟁 후에도 번영을 유지하였으나,
공업의 번영에 비하여 농촌은 불황으로 허덕였으며,
유럽 여러 나라의 전후(戰後)의 불황과 어울러서 1928년에는 대공황(大恐慌)이 엄습하였다.
1932년에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1882∼1945)는 경기를 회복하기 위하여
국고금을 대량 사용하는 뉴딜정책을 채택하여 불황으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정책을 통해서 연방정부의 권한은 크게 확대되고,
미국의 자본주의는 차츰 변질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역시 전승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은 참전국 중에서 전화(戰禍)를 입지 않은 유일한 나라이며,
경제력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전쟁 후에는 피폐한 여러 나라의 부흥과 후진국 원조 등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이후 소련과의 냉전 체제에서 급부상한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을 이끈다.
1960~70년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대패를 기록한 뒤,
1990년대~2000년대에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과 전쟁을 하였다.
미국 역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George Washongton, 1732~1799)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정치가이자 미국의 제 1대 대통령인 사람이다.
그는 독립혁명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건국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워졌으며 미국의 버지니아 주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22세때 아메이카에서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위해
프랜치-인디언 전쟁에서 민병대 부대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 뒤 버지니아 주 대표로 뽑힌 그는 1774년에 대륙회의에 참여하였고,
대츅회의는 식민지의 13주 대표들이 영국에 맞서서 식민지의 권리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모인것이다.
1775년 제 2차 대륙회의에서 독립군의 총 사령관으로 뽑혔고,
이듬해 시작된 독립전쟁을 시작하였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프랑스, 에스파냐 등
유럽국가들의 도움을 받아 1781년 영국 군대를 크게 물리쳤으며,
1783년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독립을 얻고 미국은 남쪽의 플로리다, 북쪽의 5대호 지방에 이르는 연토를 확보하여
새로운 나라로 등장하였으며, 워싱턴은 독립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헌법제정 위원회 의장을 맡아 연방 헌법을 만드는 데에도 이바지 하였다.
1789년 4월 조지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뽑히면서 나라의 경제정책을 세우고,
외교정책을 다듬으며
1797년 3월까지 대통령을 맡았다. 그는 미국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American War of Independence, 1775년 ~ 1783년)
혹은 미국 혁명 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은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중에서 동부 해안 13개주가 영국의 조세정책 등에 반발하여 식민지 독립을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미국은 1776년에 13주가 있는 상태애서 건국했다고 보며, 이 전쟁은 프랑스 혁명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미국 독립 전쟁의 원인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영국의 미국 식민지에 대한 과도한 조세 정책이다. 1763년 7년 전쟁의 결과를 논의하는 파리 강화 회담에서 영국은 식민지에 대해 조세 정책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설탕법, 당밀법 등으로 당밀, 설탕, 철, 소금 등의 수입품에 대해서 관세를 부과하였으나 간접세인 탓에 큰 반발이 따르지는 않았다. 문제가 된 것은 인지세법인데, 이는 신문, 일간지, 트럼프 카드 등 미국 식민지에서 출판되는 모든 출판물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는 간접세지만 관세가 아니라 내부세라는 점에서 식민지인들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왔다. 이에 식민지인들은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대표 없이는 과세 없다)"는 구호를 내걸고 영국의 과도한 조세 정책에 반발하였다. 즉, 미국 식민지에서는 영국 의회에 대표를 보낸 적이 없으니 이러한 법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국은 이를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인지세법이 간접세의 추구라는 조세 원칙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인지세법을 철폐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의 또 다른 원인으로는 영국의 인디언 보호구역의 설정을 들 수 있다. 프랑스-인디언 전쟁에서 미국은 인디언과 연합한 프랑스와 전쟁하는 영국을 적극 지원하였다. 영국 승리 후, 식민지 미국인들은 비옥한 중서부지역으로의 진출을 기대하였지만 영국 정부는 이 지역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설정하였다. 그런데 인디언 보호구역의 설정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인들은 자꾸 중서부지역으로 넘어가려하였고, 이 과정에서 식민지인과 인디언들의 분쟁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은 식민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어쩔 수 없이 군대를 파견해야 했고, 재정적 비용에부담을 느껴 병참법을 제정한다. 병참법은 영국 군대 비용의 일부를 미국 식민지인이 부담하게 하는 것으로 많은 반발을 불러왔다.
또한 1770년 3월에는 보스턴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미국 식민지인들이 보스턴에서 시가 행진을 하던 영국군과 충돌이 발생한 것으로, 보스턴 시민 5명이 사망하였다.
이러한 불만이 누적되어 마침내 1773년에는 미국 독립 전쟁에 결정적인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하였다.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가 아메리카 식민지를 지지하였고, 특히 프랑스는 해군과 육군을 파병하여 직접 군사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 전쟁을 위해 너무 많은 돈을 써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게 되고, 결국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미국은 영국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조지 워싱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1774년 제1차 대륙회의의 폐회 연설에서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워싱턴과 벚나무 일화와 마찬가지로 전기작가의 거짓말이다. 헨리는 무슨 말을 하긴 했으나, 그마저도 곧바로 머뭇거리며 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고, 그 말이라는 것도 흔히 알려진 것처럼 날이 서고 도발적인 명연설은 절대 아니었다[1]. 하여튼, 이를 계기로 민병대를 조직하여 훈련시키고 군수물자를 비축하기 시작했다. [2]
1775년 제2차 대륙 회의에서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로저 셔먼, 로버트 리빙스턴, 토머스 제퍼슨의 다섯 사람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 작업을 수행했다. 그리고 대륙군을 창설하고, 조지 워싱턴 장군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각 주에 군사와 물자지원을 요청하였다. 제2차 대륙회의는 1775년 5월 부터 미국의 사실상 연방의회의 역할을 하였으며,[3] 이 1775년 제2차 대륙회의 부터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1778년에 사라토가 전투(Battle of Saratoga)에서 독립군의 첫 승리가 이루어졌고, 벤자민 프랭클린이 이것을 명분으로 프랑스의 참전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가 참전하게 되고,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프랑스와 독립군 연합부대가 영국군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게 된다. 결국, 1783년 파리 조약에서 영국 정부는 미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미국 독립 전쟁의 의한 사상자 수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대의 전형적인 전쟁들처럼, 질병으로 죽는 사람이 전사자보다 많았다. 천연두가 만연한 가운데 독립전쟁이 발발했는데, 이 전염병은 대략 130,000 명 보다 많은 사람을 죽였다.
약 25,000 명의 미국 독립군이 군 복무 중에 죽었다. 그 중 약 8,000 명은 전사했다. 17,000여 명은 질병으로 죽었는데, 그 중 8,000 명은 포로가 된 채로 죽었다. 독립군의 사상자는 약 8,500명에서 25,000 명 사이로 추정된다. 따라서 미국인 총 사상자는 50,000 명 정도까지 추정된다.
171,000 명의 해군이 전쟁 중 영국군으로 참전했고, 그 중 25-50%는 강제 징집되었다. 1,240 명이 전사했고, 18,500명이 질병으로 죽었다. 가장 큰 원인은 비타민 결핍이 원인인 괴혈병이었다. 레몬주스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독부가 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전쟁 중 약 42,000명의 해군이 탈영했다.
대략 1,200명의 독일인이 전사했고 6,354명이 사고나 질병으로 죽었다. 16,000명의 남은 독일인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졌지만 5,500명 정도는 여러가지 이유로 미합중국에 잔류했다. 대부분 미 합중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였다.
1. 남북전쟁의 원인
남북전쟁을 벌일 당시의 미국은 남부, 북부로 나우어져 있는데, 남부는 농업, 북부는 공업이 발달하엿습니다.
남부는 농업에 관련된 일들을 흑인 노예들에게 맡겼는데 공업이 발달한 북부가 이 노예제도가 비기독교 적이라고 비판하고 나오자 남부가 크게 반발하여 점점 남북전쟁의 원인이 불거지기 시작하엿습니다. 남북전쟁 바로 직전 노예제를 비판하던 링컨이 노예제를 지지하던 더글러스를 따돌리고 16대 대통령이 되자,그러지 않아도 점점 균형이 북부쪽으로 기월어가던 판에 링컨의 대통령 당선이라는 치명타가 날아오면서 남부의 사우스 캐롤라니아 주, 미시시 주, 루이지애나 주, 앨라배마 주, 조지아 주, 플로리다 주, 텍사스 주는 연방을 탈퇴하여 독립국가를 만듦을 시작으로 남북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2. 남북전쟁의 결과
4년간의 남북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낫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전쟁이 4년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한 것처럼, 남부 북부 모두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는 엄청났습니다. 특히 전쟁에 이긴 북부가 제일 심해서 사망자는 북부가 37만여명, 남부가 26만여명이 나와고 상이군인 및 민간인 부상자가 북부 27만여명,남부는 10만 명에 이르렀으며, 북부가 쓴 전쟁비용만 해도 32억 달러가 되어 미국의 빚은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다시 하나의 통합국가를 만드는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3. 남북전쟁 - 연방 vs 반연방, 북부 vs 남부, 반노예 vs 노예
남북전쟁은 기본적으로 노예문제를 둘러싼 전쟁이다. 분명 북부인들 가운데는 인권차원에서의 노예해방론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전쟁은 노예의 인권이 본질인 싸움은 아니며, 노예의 경제적 가치와 기존의 묵혀진 남부와 북부의 대립인 것이다.
유명한 링컨은 노예 해방의 아버지인 것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그는 근본적으로는 남북의 분열을 더욱 걱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링컨의 이러한 발언에서 잘 나타난다.
" … 만약 노예를 해방하지 않고도 연방이 존속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연방을 위해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면 역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부는 해방하고 일부는 그대로 두어야 연방이 존속된다면 역시 또 그렇게 하겠습니다."
결국은 남북전쟁은 노예의 전쟁이 아닌 백인들의 전쟁중의 하나인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이해관계가 상충된 당사자는 남부 농업 자본가들과 북부 공업/금융 자본가들 입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던 1861년 당시만 해도 미국은 농업이 산업의 근간이던 농업국가였습니다. 따라서 대자본가들은 모두 드넓은 농장을 소유한 농업 자본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는 더군다나 교통/통신 수단 및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정치란 정보를 독점한 부자들의 소유물일 수 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나라의 정책도 농업 위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남부인들은 흑인 노예를 고용해서 대농장에서 면화와 담배를 재배하여 영국에 수출하고 생활 필수품을 수입했기 때문에 자유무역을 추구한 반면 북부는 철과 석탄 등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공업이 발달해서 영국의 값싼 공산품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보호무역을 주장했으므로 농업자본에 의해 좌우되는 정책 기조는 둘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게다가 산업의 특성상 북부는 보다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남부는 지방분권 및 지방자치를 원하는 등 미국 사회는 갈등의 연속선상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유럽 산업혁명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지만 아직 농업자본에 비해 열세에 놓였던 공업/금융 자본가들은 변화를 모색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내세운 이슈가 바로 노예문제 입니다. 왜냐하면 노예들이 해방되면 노예들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농업 자본은 쇠퇴할 수 밖에 없으며 해방된 노예들을 싼 인건비로 고용하면 공업 생산력이 증대되므로 노예들의 인권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즉, 흑인의 인권문제는 겉에 내세운 간판에 불과했으며 실제로는 돈이 갈등의 핵심이었던 것이지요. 흑인의 인권문제가 실제 문제였다면 불과 40여년 전인 60년대 까지 존재했던 '버스의 앞문은 백인만 사용할 수 있으며 유색인은 뒷문을 사용하여야 한다,' '버스에서 자리에 앉은 유색인은 백인이 요구하면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백인이 사용하는 길로 유색인이 다녀서는 안된다,' '백인이 사용하는 급수대는 유색인이 사용하면 안된다,' '백인 학생들을 위한 학교에는 유색인들은 다닐 수 없다,' '백인이 사용하는 화장실은 유색인이 사용할 수 없다,' '백인이 사용하는 식당은 유색인이 사용할 수 없다' 등등의 인종차별들이 북부가 승리하면서 끝난 전쟁 후에도 100 여년 동안 유지되었다는 것이 설명되질 않습니다.
이들의 갈등에 휘발유를 부은 사건이 바로 A.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입니다. 링컨의 당선은 사실은 민주당의 분열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민주당이 브리켄리지와 더글러스 두 후보 사이에서 분열 양상을 보이자 공화당 측은 정권 획득의 호기로 보고 대중적인 반감을 무마시키기 위해 오히려 노예제에 대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던 링컨을 후보로 내세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북부에서도 노동자 계층에서는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길 것을 우려하여 노예해방에 반대하는 여론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링컨은 유세 당시에도 '노예제를 가지고 있는 남부 제주의 노예를 즉시 무조건 해방시킬 생각은 없었으나, 앞으로 만들어질 준주나 주는 자유주의로 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취임 연설에서도 '나의 최고의 목적은 연방을 유지하여 이를 구제하는 것이지, 노예제도의 문제는 아니다' 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어진 휘발유에 불을 당긴 전쟁의 직접적인 동기는 주가 연방으로부터 분리/탈퇴한다는 것이 헌법에서 인정되고 있는가의 여부에 관한 헌법해석의 문제였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 연합은 독립을 요구하였고 이 요구를 링컨의 연방정부가 거부하자 남부연합 군대가 북부를 침공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한 것입니다. 전쟁 초반 수세에 몰린 링컨 행정부는 노예제 폐지를 예고하여 해외 여론을 자기 편으로 유도함으로써 당시 남부를 지원하던 영국과 대립 관계에 있던 프랑스 등 다른 나라들이 남부 연맹을 승인하는 것을 저지하고 이들의 지원을 등에 얻음으로써 전황을 일거에 유리하게 전개하는데 성공하면서 졸지에 링컨이 노예해방을 통한 인권 운동의 기수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남북전쟁의 원인이 노예해방에 있다고 '선전'하게된 주요 이유는 물론 자기네들 역사의 '미화'입니다. 마치 이라크 전쟁이 후세인의 독재정치에 시달리는 이라크 인민들을 구제하고 인류를 위험에 빠뜨릴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는데에 있다고 선전하면서 사실은 이라크의 원유들을 자기들 몫으로 챙기려는 현 상황과 같은 것이지요. 실제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링컨 대통령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점은 '내란을 유발한' 무능한 정치인이였다고 하네요. 그런데 1차대전을 기화로 미국이 강대국으로 자리잡게 되자 자신들의 역사를 '아름다운'것으로 치장하기 위해 링컨을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한 '인권 대통령'으로 미화시키면서 남북전쟁을 흑인들의 인권을 위한 고귀한 성전으로 재탄생 시켰다는 겁니다
남부는 흑인노예를 허락하는 제도의
면화생산이 전체 생산의80%차지하는 면화생산국이었고
북부는 반대로
흑인노예제도를 철폐하라는 사람들이 많고 그래서 링컨대통령이 그제도를 없애버린
공업이전체의 80%정도인 공업국가입니다.
북부는 처음에는 남부의사기와 뛰어난 전략등에 의해서
점차 밀렸지만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에가까운 곳에서의 전투에서
남부의 도시를 점령하여 리치먼드로 대부분의 병력을 투입
남부의 사령관은 3만의 병사들을 이끌고 끝까지 리치먼드를 지키려 노력하엿지만
결국 물자의 부족과 늦는 지원군 숫자의열세 물자보급속도의차이 무기의부족등..으로 패배하고
항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