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의 본관은 광주(光州)로, 선대는 경기도 광주(廣州) 일대에서 세거(世居: 한 고장에 대대로 삶)하다가 고조부 연(演) 때부터 도성의 서쪽, 즉 인왕산 기슭에 터전을 잡았다. 정선은 1676년 아버지 시익(時翊)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幽蘭洞)에서 태어났다. 현재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경복고등학교가 위치한 북악산 서남쪽 기슭 인근이었다. 19세기 유본예(柳本藝)가 쓴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유란동은 북악산 밑에 있다. 언덕 바위에 〈유란동〉이라는 석 자를 새겼다. 이 동네는 청송 성수침(成守琛)이 살던 곳으로 꽃구경을 하기 좋은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선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와 같이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 많은 것은 그의 근거지가 바로 인왕산 일대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인 김홍도(金弘道, 1745~?)나 신윤복(申潤福, 1758~?)이 화원 출신이었던 반면에, 정선은 가난한 양반 가문의 막내였다. 그는 열 살을 지날 무렵부터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일하러 가는 형편이었으나, 그림에 대한 재능과 열정만은 잊지 않았다. 정선은 유란동에 살면서 인근에 살던 안동 김씨 명문가인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의 문하에 드나들었고, 이들에게서 성리학과 시문을 수업 받으며 이들 집안과 깊은 인연을 쌓아갔다. 안동 김문의 인사들은 그를 후원했고, 정선은 감사의 뜻으로 안동 김문(金門)의 주거지인 <청풍계(淸風溪)>를 여러 번 그렸다. 현재에도 청풍계가 위치했던 곳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청운초등학교 건너편 어느 주택 안 담벼락에 남아있는 이 글씨에서 청풍계의 옛 자취를 느껴볼 수가 있다. 정선은 안동 김문의 후원과 더불어 국왕인 영조(英祖, 1694~1776)의 총애를 받았다. 영조는 정선보다 18년 연하였지만, 83세까지 장수하면서 정선과 60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했다. 정선은 40대 이후에 관직에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1721년(경종 1) 46세 때 경상도 하양(河陽)의 현감을 맡아서, 5년간 근무한 후 1726년(영조 2) 임기를 마쳤다. 이때의 작품으로는 성주 관아의 정자를 그린 <쌍도정도(雙島亭圖)>가 전한다. 1727년 정선은 북악산 서쪽의 유란동 집을 작은 아들에게 물려주고, 인왕산 동쪽 기슭인 인왕곡(仁旺谷)으로 이사를 했다. 정선은 8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으며, 그의 대표작인 <인곡유거(仁谷幽居)>는 이곳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화상처럼 그린 그림이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정선이 남긴 400여 점의 그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 1751(영조 2)년에 그린 것으로 비 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의 순간을 포착하여 느낌을 잘 표현하였다. 정선의 그림 가운데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많은 이유는 그의 근거지가 인왕산 일대였기 때문이었다. 138.2 x 79.2cm , 국보 제 216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
예술에 상당한 조예를 지니고 있었던 영조는 정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꼭 호로만 부를 정도로 그 재능을 아끼고 존중했다. 이것은 영조대에 정선이 여러 관직을 지낸 것에서도 나타난다. 1729년 정선은 영조의 부름을 받아 한성부 주부가 되고, 1733년 6월에는 청하현감에 임명되었다. 청하현감 시절 그림으로는 <청하성음도>, <내연산삼용추(內延山三龍湫)> 등이 있다. 1740년경에는 훈련도감 낭청(郎廳)을 지냈으며, 1740년 12월부터 1745년 1월까지는 경기도 양천의 현령을 지냈다. 정선은 65세부터 70세까지 현재는 서울에 편입된 경기도의 양천현령을 지내면서 서울 근교의 명승들과 한강변의 풍경들을 화폭에 담았다. 이후 10여 년 동안은 관직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금강전도(金剛全圖)>, <인왕제색도> 등의 명작을 남겼다. 79세인 1754년에 종4품인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을 거쳐 1756년에는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까지 올랐으니 관운도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정선이 그린 300년 전 서울 풍경들

정선이 그린 그림 중에는 18세기 한양과 그 주변 풍경을 담은 작품들이 돋보인다. 인왕산에 있던 자신의 집을 배경으로 한 <인곡유거(仁谷幽居)>와 이곳에서 쉬고 있는 정선 자신의 모습을 그린 <독서여가(讀書餘暇)>를 비롯하여, <백악산(白岳山)>, <대은암(大隱巖)>, <청송당(聽松堂)>, <자하동(紫霞洞)>, <창의문(彰義門)>, <백운동(白雲洞)>, <필운대(弼雲臺)>, <경복궁(景福宮)>, <동소문(東小門)>, <세검정(洗劍亭)> 등은 300년 전 서울의 풍경화 그 자체이다. <청송당>의 그림에 그려진 큰 바위는 현재 경기상고 안에 그대로 남겨져 있고, <필운대>의 그림과 배화여고 건물 뒷 편에 위치한 현재 필운대의 모습을 비교하면 정선의 그림이 진경산수화임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최근에 인왕산에 위치했던 아파트가 철거되고 이 지역을 원형으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정선의 그림에 그려진 <수성동(水聲洞)>의 계곡과 다리의 모습이 원형대로 남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