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봄 신령이 지핀 듯
오후 4시경이면 삐걱거리는 영어로
손님들 비위 맞추고, 여러 가지 색상의 매트와 프레임을 고르느라 머리며 눈이 까막까막했다. 요때쯤 커피
한 잔이 날아들었음 싶었다. 커피 하면 딸려오는 미스터 빈 생각. ‘커피 데이트’를 청하던
그가 가게 쉬는 동안 왔다가 허탕치고 갔을까? 에이, 그냥 던진
빈 말이었을거야. 아메리카노라도 마셔야겠다며 가게를 나섰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벗어두고 매화 무늬 깃발로 갈아입은 거리는 꽃단장을 마친 새색시 같았다. 밴쿠버의 겨울을
점령해온 장맛비가 어디로 몰려가버렸는지 연일 보송송한 날씨가 이어졌다. 겨울을 나느라 홀강해진 나뭇가지가
볼그레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으면 연지나무에도 물이 올라 통통해지겠네.
대학 엠티 가서 생나무 울타리에 핀 새초롬하고 오목조목한 꽃을 보고 홀딱 반해버렸다. 옹골차게 입
다문 봉오리도 어여쁘고, 붉은 꽃잎 안에 노랑 수술을 품고 함박웃음 짓는 것도 아름다웠다. 무더기로 피어있으면서도
천하지 않고 단아한 그 꽃의 이름을 묻자 누군가 처녀꽃이라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진짜 이름은
연지꽃이었다. 하지만 기생 이름처럼 너무 야하고 천박해서 그냥 처녀꽃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도서관 가는 길목에 그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지 않은가? 풍토가 다른
이방에서도 여전히 화신을 전하는 전령사 노릇을 하고 있는 그 꽃이 무척 반가웠다. 바람 난 총각처럼
날마다 처녀꽃 보러 마실을 갔다. 그럼 어여쁜 아가씨는 살가운 미소로 그네의 시린 겨울을 달래주었다. 마지막 붉은 꽃송이가 지고 초록동이가 되어갈 무렵 갤러리 윈도우에 ‘프레이머 구함’이라는 사인이
나붙었다. 마치 처녀꽃이 떠나며 남긴 정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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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콤하던 바람끝이 들큰해졌다. 곧 연지나무
꽃망울이 도톰해지고, 화사한 봄볕이 간지럽히면 까르르 웃으며 톡톡 터지겠지. 그럼 푸석한
그네의 심장도 촉촉해질까.
첫사랑이 사라진 후 실종된 봄이 다시 돌아올지도. 그네는 봄의
고삐를 당겨보고 싶었다.
걸음이 ‘빈 하우스’에 멈췄다. 쌉쓸한 커피향이
그네를 유혹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빨강머리 아가씨가 반겼다. 캘린더에서
튀어나온 모델인가 싶을 정도의 미모였다.
“굿 애프터눈. 근사한 날씨죠?”
“그렇네요. 봄날씨처럼. 음~ 여기~ 다른 일하는
사람이… .”
두리번거리는 그네를 보고 눈치 빠른 미녀가 얼른 말을 받았다.
“ 제이콥을 찾나요? 그는 지금
없는데, 메시지를 남기면 전해 드리지요.”
깊은 바다물빛 눈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 빛났다. 그 섬광이
장난기인지 질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아니에요. 아메리카노
두 잔 주세요.”
당황한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벽을 향해 돌아섰다. 등이 화끈거렸다. 틀림없이 바리스타
아가씨의 의혹에 찬 눈길이 그네 등에 꽂혀 있을 게다. 여자의 직감은 연적을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니까. 윽, 게임 완전
끝이다. 동글납작한 노랑둥이가 저 미끈한 백인 미녀를 어찌 당해내냐?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데
“커피 준비되었어요.”
빨강머리가 생글거리며 커피를 내밀었다. 그네의 고개가
푹 꺾어지고 어깨도 축 처졌다. 링에 오르기도 전에 상대 선수의 몸집을 보고 겁에 질린 레슬러처럼.
“이건 탄자니아 산 킬리만자로
AA예요. 제이콥이 당신 오면 주라고 부탁을 했어요.”
동정까지 받는 것 같아 패배감에 이어 수치감이 더쳤다. 머릿 속 회로가
엉켜 버렸는지 원두커피 두 잔 값이 얼만지 계산이 안 되었다. 20 달러짜리 지폐를 주고 커피를
낚아채어 황급히 나왔다. 어깨 너머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잔돈..
제이..
다음..
받아..”
돌아보니 아가씨가 지폐를 깃발처럼 흔들고 있었다.
왜 빈하우스를
찾아갔을까? 바로 건너편의 커피숍을 두고서. 그건 그네도
모른다. 학창시절
버스정류장에서 힐끔거리던 남학생이 어느 날 보이지 않으면 궁금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했었다. 그 정도의 호기심? 그럼 그 빨강머리
글래머에게 느끼던 감정은 뭐지? 우수한 유전자 앞에서 느끼는 맥없는 열패감 정도로 해두자.
친구들이 연애는 게임이라 했다. 연애의 첫
단계는 호기심으로, 그러다가 불타는 정열에 온 몸을 태우고 차츰 식어가는데, 처음의 그
짜릿함을 유지하려면 밀고 당기는 테크닉이 필요하다고. 그럼 그네는 연애의 첫 계단에
발을 올려 놓은 건가? 혼자서 설레고 혼자서 삐치는, 혼자서 웃고
우는 바보 놀음을 시작한 건 아닌지.
킬리만자로 AA는 그네의 커피 인생에 제이콥이라는
존재를 각인시킬 만큼 풍미가 뛰어났다. 야자수 아래에서 나누는 사랑의 밀어처럼 감미로운 맛과 킬리만자로 고산지대에서
추위와 바람에 깊어진 감칠맛, 진한 열대 과일의 신맛이 골고루 배어났다. 달고 시고
쓰면서도 감칠 맛나는 그것은 사랑을 꼭
닮았다. 맛들이면 결코 헤어날 수 없는 중독성까지도.
사랑을 해본 사람은 사랑 없인 못 산다. 환절기마다
감기처럼 다가와 열 오르게 하고 눈물 콧물 쏙 빼놓은 후 달아났다가, 다음 번엔 더 독한 바이러스로
쫓아와 또 고열에 호된 몸살을 앓게 한다. 백신도 없는 사랑 바이러스
공격에 모두가 속절없이 당한다.
그리 풍미 좋은 커피를 마시고도 커피가 고프다. 결핍감을 안고
돌아오는 그네의 뒷모습이 마른 화병에 꽂힌 튤립 같았다. 커피를 맛본 사장이
“거참 커피
맛이 오묘하네. 과일향도 나고 화산 내도 나는 것 같으면서 달큼한 게. 최고다, 최고! 역시 아티스트야. ”
엄지손가락을 꼽으며 감탄을 했다. 아티스트와
커피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령관 같던 사장이 녹녹해졌다.
“미스 연, 일찍 퇴근해서
올 스프링 아트쇼 들러 시장조사 좀 해봐요. 나 같은 노타리보다는 미스
연같은 신세대가 그림의 풍향을 쉬 감지하지 않을까? ”
모처럼 인정을 받는 것 같아서, 또 따끈따끈한
신상 아트를 만날 생각에 쭈글한 기분이 펴졌다.
파커 1000번지는 등 뒤에 철로를 짊어지고
있는, 밴쿠버 최고령 목조 건물이었다. 미로처럼 생긴
건물 구조도 교묘하지만 벌집처럼 박혀있는 방마다 예술에 신들린 사람들이 사는 예술의 메카였다. 팔딱팔딱 뛰는
아이디어로 빚은 유리, 섬유, 피혁공예품들과
신기에 가까운 조각, 비릿한 페인트, 싱싱한 화초가
벽에 걸린 크로스오버 아트 등이 내뿜는 에너지를 한껏 들이마셨다. 거칠 데 없는 자유와 광기어린
정열이 뿜어내는 열기가 혈액을 타고 온 몸을 순환했다. 핏줄에 갇혀있던 신명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영화에 미친 아버지와 엄마의 유산 같은. 알아주지도
않고 돈이 되지도 않은 예술에 빠진 이들은 무당처럼 신 들리거나 광대처럼 신명을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예술가는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여야 했다. 생활과 관습의 굴레에 매여있는 말은 미답의 광야를 향해 내달릴 수 없었다. 그네는 너무
오래 우리에 갇혀 맴돌고 있었다. 봄 신령 지핀 듯 달뜬 그네가 우뚝 멈춰선 것은 마지막 방, 컵친스키 스튜디오
앞이었다.
첫댓글 선생님 글이 너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