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그리움
이진표
60년 만이다. 1959년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40여 년 교직에 몸담다 퇴직 후 첫길이다. 그간 몇 번 지나쳤지만 들르지 못하고 60년 만에 가는 걸음이라 감회가 새롭다.
남강다리를 지나니 사방에 정들었던 고향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먼저 촉석루가 5월의 햇볕에 빤짝인다. 높이 솟은 서장대는 언제나 외롭다, 남강은 의암을 휘감아 흐르고, 저 멀리 뒤벼리 절벽이 강물에 잠겨 밀린다. 세월은 흘렀지만 마음속엔 모두가 그대로다,
먼저 모교를 찾았다. 교문부터 낯설다. ‘진주사범학교’란 교명을 달고 묵묵히 학교를 지켜온 화강암 문설주가 진주교육대학교로 문패를 갈아달았다. 졸업하던 그해 봄, 교사발령장을 받아 들고 임지를 찾아 손 흔들며 떠났던 교문이다.
운동장에 들어서니 모두가 낯설다. 감개무량하다. 본관은 물론 특별실이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다. 음악실 미술실 공작실 등 특별실은 찾을 수 없다. 사범교육은 전인교육을 지향했기에 교육학뿐만 아니라 특별히 예능기능을 연마케 하여 초등교사로서 자질 함양에 심혈을 기우렸다. 음악실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그칠 때가 없었고 미술실에는 밤늦게 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손바닥에 물이 고여 끝내 못이 앉을 때까지 매달리던 철봉대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새로워지는 변화 속에 유독 ‘스승이 되기 전에 참된 사람이 되자’란 글귀를 안은 돌비석만 운동장 모퉁이를 지키고 있다. 모교의 상징이다. 변할 줄 모르는 그 비석 앞에 서니 가슴이 뭉클하다, 사범 3년 내내 마음에 새겨온 가르침이다. 그렇지만 얼마나 참된 사람이 되었는지 돌아보게 한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운동장을 돌아 나오니 어디선가 그때 부르던 교가가 들리는 것 같다. ‘우리는 남보다 더 부지런히, 배우고 가르침을 익혀야 한다. (중략) 귀여운 아들딸인 젊은 일꾼을, 참으로 지성으로 길러야 한다.’ 교사로서 나아갈 길이었고 신념이었으며 초등교사 40여 년을 지켜온 밧줄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교가를 들으면 가슴이 찡하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교문을 떠나 진주성으로 향했다. 그 옛날의 진양성이 아니다. 진주성 성역화사업으로 변모를 일신했다. 촉석루만 그대로 자리를 지킬 뿐 여러 구조물이 새로 들어섰다. 강변 옆 이끼 낀 성벽은 400여 년 전 격렬했던 그날의 아픔을 안은 채 고색창연하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을 둘러보고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 앞에 고개를 숙이니 7만 군관민이 왜적을 물리친 그날의 함성이 들리는 것 같다.
순의단을 뒤로 하고 촉석루에 올라섰다. 저 멀리 흐르는 남강은 어릴 적 자주 가던 남강이 아니다. 물새 놀던 백사장도 보이지 않는다. 연말이면 소망을 실은 촛불 종이배가 밤 강물에 밀려 꽃밭을 이루던 강변도 볼 수 없다. 논개와 의암은 그 옛적 그대론데 ‘강낭콩꽃보다 더 푸르다.’*던 남강은 그 모습이 아니다. 남강도 늙는가? 그리움은 아직도 생생한데. 진주대첩이 있었고 논개와 의암이 있어 충절의 고장이라 불리지 않던가. 의암에 올라서니 그 어느때 들었던 정식(1683-1746)의 시가 떠오른다.
그 바위 홀로 서있고 그 여인 우뚝 서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울 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단 소리 들었으리오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그리움일랑 강물에 띄워 놓고 남강다리 위에 홀로 섰다. 여름철 홍수가 나는 날이면 물 구경하러 나온 시민들이 떠내려 오는 초가집 잔해와 짐승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했다. 그런가 하면 가뭄에 강물이 줄어들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피라미를 잡으러 보쌈 들고 강가에 나왔다. 고무신에 물 담아 잡은 고기 모아 놓고 해지는 줄 모르며 놀던 놀이터였다.
겨울에는 어머니 빨래터, 장작불 피워 놓고 하얗게 둘러 앉아 빨래하는 여인들의 빨래 방망이 소리는 추위도 모르고 그칠 날이 없었다.
저 멀리 소싸움 하던 백사장이 떠오른다. 전국에서 이름 있는 황소들이 각축하는 남강소싸움은 진주의 명물이었다. 구경 온 사람들은 백사장을 덮었고 추석에 열리는 장사씨름대회 역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속에 뛰어다니던 모습이 선하다. 지금은 남강소싸움과 장사씨름대회 역시 모래밭 따라 사라졌지만 그때의 그리움은 한 폭의 민화로 마음에 남는다.
석양에 전통사찰 비봉산 의곡사를 찾았다. 어릴 때 추억이 많은 사찰이다. 절 근처에 살았기에 자주 가서 놀았다. 진달래 피는 4월이면 계곡을 찾았고 초파일에는 하루 종일 절에서 지내다 연등을 밝히는 저녁때야 돌아오곤 했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학기 말 시험 때가 되면 책 몇 권 챙겨 시원한 절간으로 찾아갔다. 절 뒤 계곡에서 돌 깔고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어두워져야 책을 덮었던 그리운 야외 독서실이다. 그러나 지금 의곡사는 그때의 산 중 고찰의 정취를 느낄 수 없고, 비봉산 계곡 역시 기대했던 정경을 볼 수 없다. 돌아오는 내내 뒤돌아보며 아쉬워했다.
지난 60년, 모두가 변했다. 10년이면 산천도 변한다 했던가. 여섯 번이나 지났으니 오죽 하겠는가. 비봉산 기슭에 진달래 피고 남강 백사장의 물새 소리는 세월에 묻혔다. 그러나 그리움은 그대로다. 또한 모교의 상징인 ‘스승이 되기 전에 참된 사람이 되자’는 가르침과 남강에 흐르는 ‘논개의 충절’은 세월이 흘러도 지울 수 없는 큰 울림으로 마음에 남는다,
그렇다. 고향 그리움은 세월을 무색케 한다.
이진표
1940년 생
진주사범학교 졸업 초등교장 정년퇴임
2005년 (창작수필) 등단 허수아비(수필집)
창작수필 문학상 수상
남강문학협회 서울지부장 및 본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