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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주 동서교역의 역사 II. Report (피사로, .hwp
<제10주> 동서교역의 역사 II. Report: 피사로, 코르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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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제적 자유와 평등] <피사로&코르테스&?> 대기환경과학과, 20030880, 정재호.
보낸날짜 2010-11-01 22:16:24
※콘키스타도레스 [conquistadores]
신대륙 발견과 더불어 중남미 대륙에 침입한 16세기 초의 에스파냐인(人) 모험자들.
정복자(Conquistador)의 복수명으로 소수의 병력과 화포(火砲)와 말을 사용하여 잉카 ·아스텍의 문명을 파괴하고 원주민을 대량학살, 노예화하였다. 그러나 서로 시기하여 싸움을 벌이기 예사여서 행정능력을 잃었으므로 군사와 행정을 분리하는 본국 식민지정책의 확립으로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멕시코의 H.코르테스, 페루의 F.피사로 등이 그 대표자들로 손꼽힌다.
①에르난 코르테스 [1485~1547.12.2]
에스파냐의 아즈텍왕국 정복자. 쿠바에서 식민지 원정대에 근부하였으나 독자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유카탄반도를 원정하였고 아즈텍왕국을 점령하였다. 아즈텍에 에스파냐 식민지를 건설하고 총독을 지냈다.
스페인의 시골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급 귀족 출신으로 살라망카대학에서 수학 후 19세때인 1504년 대서양을 건너 에스파뇰라섬에서 근무하였다. 1511년 총독인 디에고 벨라스케스 휘하에 근무하면서 쿠바를 점령하였고 이 전투에서 상당한 공적을 세웠다. 코르테스는 유카탄반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탐험대장으로 내정되었다. 하지만 그의 승승장구를 두려워한 총독 벨라스케스가 이를 번복하자 1519년 병사 508명과 말 16필을 11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독자적으로 유카탄반도에 상륙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베라쿠르즈라는 도시를 건설하였고 유카탄반도의 마야족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부족들을 점령해 나갔다. 말이나 대포에 관해서 전혀 모르는 인디오들은 공포 속에서 코르테스에게 항복하였다. 코르테스는 원주민을 통해 황금으로 가득 찬 아스텍왕국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왕국을 정복하기 위해 진군하였다. 하지만 아즈텍의 왕은 코르테스 일행의 행색을 보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으로 착각하였고 그들을 환대하였다. 코르테스는 아즈텍왕국을 기습공격하여 왕인 몬테수마 2세를 인질로 잡고 에스파냐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케 하였다. 그리고 아즈텍의 우상을 파괴하고 왕국의 실력자들을 살해하였으며 그들의 왕국인 테노치티틀란에 교회를 세웠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은 임무를 넘어선 반란으로 간주되어 쿠바에서 원정군이 왔으나 코르테스는 이들을 격파하였다. 그 동안에 아즈텍에서는 인디오의 반란이 일어나 많은 에스파냐 정복자들과 전투를 벌였으며 이때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학살당하였다. 후일 에스파냐 인들은 이것을 ‘슬픔의 밤’(1520.6.30)이라고 불렀다.
이듬해 9월 유럽의 정복자들에 의해 옮겨진 천연두가 창궐하자 아즈텍 원주민들이 죽어나갔고 코르테스는 철저한 파괴와 유혈 가운데 테노치티틀란(멕시코)를 탈환하였다. 인구 500만명의 왕국이 에스파냐 600여명의 정복자에게 완전하게 점령되었다. 1522년 에르난 코르테스는 테노치틀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526년 월권혐의로 파면되었고,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나 왕을 설득하여 재차 멕시코로 건너가 캘리포니아만(灣) 등을 발견하였다. 1540년 귀국한 후에도 계속 카를로스 1세(카를 5세)의 냉대를 받아 실의 속에 죽었다.
②프란시스코 피사로 [Francisco Pizarro, 1475?~1541.6.26]
군인의 사생아(私生兒)로 태어나 글도 배우지 못했던 피사로.
용병(傭兵,mercenary)생활을 마친 뒤 신대륙으로 건너가 '발보아'(Vasco Balboa, 1475-1517)와 함께 1513년 태평양을 발견한 27명의 에스파니아 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발보아의 사후 그의 후계자가 되어 파나마(Panama)를 건설하고 콜롬비아(Colombia)를 탐험하였으며, 잉카(Inca)제국의 정보를 입수하여 일시 귀국, 에스파니아 왕실의 원조와 코르테스(Hernando Cortez,1485~1547)의 조언을 받아 완전한 준비를 갖추고 1531년 부하 180명(기마 27두)과 함께 에쿠아도르(Ecuador,에스파냐어로 '적도'를 의미)에 도달하였다.
다음해 잉카의 내란상태를 탐지하고 황제 아타왈파(Atahualpa, 在位 1525-1533)와 회견하는 자리에서 기습적으로 황제를 체포, 아타왈파가 황금을 댓가로 풀어달라고 제의하여, 엄청난 양의 황금을 제공받았으나, 반란이 겁이 난 피사로는 1533년 아타왈파를 '우상숭배'와 '근친혼', 그리고 '일부다처제'의 죄를 물어 火刑(the stake)에 처하도록 하였다.
아타왈파는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지만, 잉카에서의 화형은 '영혼소멸'이라는 신앙이 있어 화형을 면코자 기독교로 개종하고 교수형(絞首刑, death by hanging)을 당하였다.
겨우 180명의 무법자가 수만 명의 잉카군대를 물리쳤다니...적의를 가지고 온 적군에게 비무장상태로 순순히 체포된 항제 '아타왈타'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여태 말(Horse)도 총도 본 적이 없던 것... 그리고 그들이 숭배하는 신이 흰색이었던 것 또한...
피사로는 잉카의 수도 쿠스코(Cuzco)를 점령하고 잉카제국의 기능과 부(富)를 모두 에스파니아왕에게 바쳤다. 1535년부터 새 수도 리마(Lima의) 건설을 시작하였으며, 무학문맹(無學文盲)이면서도 정확한 판단력으로 막대한 부(富)를 축적한 피사로. 한 개인의 탐욕이 한 제국을 멸망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역시 동료와의 싸움에서 비참한 최후를 당하였다.
★피사로
1475년에서 1541년까지, 잉카 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의 탐험가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페루의 잉카 제국을 정복한 무학 문맹의 모험가로서 1475년 스페인의 트루히요에서 태어났다. 많은 점에서 멕시코의 정복자 코르테스(1485년에서 1547년까지, 스페인의 멕시코 정복자)와 유사하다.
피사로는 명예와 부를 구하여 신세계(아메리카 대륙)를 찾아왔다. 1502년부터 1509년까지 현재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있는 카리브 섬에 삶의 본거지를 정하고 살고 있었다. 1513년에 태평양을 발견한 발보아(1475년에서 1517년까지, 스페인 탐험가로서 1500년경에 도항하여 파나마 지역을 횡단, 산미겔 만에서 처음으로 태평양을 발견한 유럽인)가 지휘하는 탐험대의 일원이 되었으며, 1519년경에는 정착된 일상생활을 영위하였다.
1522년 피사로가 47세 때 안다고야라고 하는 잉카에 한번 들어갔던 경험이 있는 탐험가로부터 잉카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사정을 소상하게 알게 되었다. 마침 그때 코르테스의 멕시코 정복 소식을 듣고 이를 의심치 않으면서 흥분하고 있던 피사로는 즉시 잉카 제국의 정복을 결심하게 된다.
그의 첫 번째 정복 기도는 1524년에서 1525년에 걸쳐서 서둘러 결행되어 실패로 끝났다. 그의 두 번째 계획은 1526년에서 1528년에 걸쳐 결행되었는데 페루 해안에 도착한 그는 금과 라마(아메리카 낙타)와 인디언 몇 사람을 데리고 귀환하는 데 그쳤다. 1528년에 스페인에 돌아간 그는 다음 해 찰스 5세 황제로부터 페루 정복을 인정받고 원정에 필요한 기금을 지원 받았다. 피사로는 곧 파나마로 돌아와 원정대원을 모집하는데, 그때가 1531년으로 피사로는 벌써 56세가 되어 있었다. 그가 모집한 병력은 겨우 2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가 정복하려고 하는 잉카 제국의 인구는 600만 명을 넘고 있었다.
다음 해인 1532년 9월 피사로는 페루 해안에 도착, 그와 행동을 같이 했던 부하 병력 177명과 말 62두를 지휘하여 내륙으로 진격해 갔다. 이 소부대를 이끌고 안데스 산의 고지를 넘어 들어가 카하마르카의 소도시에 도착했다. 이 카하마르카에는 잉카 제국의 지배자 아타왈파 황제의 4만 명으로 구성된 무력 군대가 있었다. 아타왈파 황제는 부왕 카바구 사후에 형과 제국을 이분하여 통치하다가 형을 타도하여 전 잉카 황제로 자칭하고 있었다.
피사로 군은 1532년 11월 15일 카하마르카에 도착했다. 다음날 피사로의 요구에 의하여 아타왈파 황제는 대군을 배후에 남겨둔 채 겨우 5000명의 가신만을 데리고 피사로와의 회견을 위해 찾아왔다. 피사로 부대는 해안에 상륙한 당초부터 적개심을 노출하여 극단적인 잔인성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아타왈파 황제가 왜 피사로 군을 카하마르카까지 아무런 방해나 저항을 받지 않고 가까이 올 수 있게 했는지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만약에 잉카의 인디언 군이 좁은 산길에서 덮치면 피사로 군은 말을 사용하지도 못하고 간단히 전멸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피사로를 카하마르카에 도착하게 한 이후의 아타왈파 황제의 행동은 더욱더 놀라운 것이었다. 적의를 가진 적군이 접근하여 온다는데 황제 스스로 비무장 상태로 있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매한 짓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매복 공격은 잉카 군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수단이라고 하는 사실에서 미루어 보더라도 황제의 행동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피사로가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놓쳤을 리가 없다. 아타왈파 황제와 그의 비무장 보위대에 대하여 피사로는 공격을 명령했다. 싸움이라고 하기보다는 대량 학살이 개시되었고 그것도 겨우 30분 만에 끝났다. 스페인 군은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았으며 유일한 부상자는 피사로 자신뿐이었다. 피사로는 황제를 생포하기 위하여 그를 보호하려다가 가벼운 부상을 입은 것이었다.
피사로의 전략은 빈틈없이 적중했다. 잉카 제국은 고도의 중앙 집권 체제여서 모든 권위는 반신으로 추앙되는 잉카 또는 황제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그 황제가 포로가 되어 버렸으니 인디언 군은 침입해 오는 스페인 군에 반격을 가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졌다. 황제는 자신의 신병 석방을 요구하며 그 대가로 금은의 거액 재산을 피사로에게 헌납했다. 그 금액은 놀랍게도 당시의 값으로 2800만 달러 이상의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개월 내지 3개월 뒤에 피사로는 황제를 처형하고 말았다.
1533년 11월 아타왈파를 체포한 지 1년 만에 피사로는 한 번의 대접전도 없이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 입성했다. 거기에서 피사로는 자신의 꼭두각시로서 신 잉카 국왕을 두고 1533년 리마 시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페루의 수도가 되었다. 1536년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던 잉카 국왕이 도주하여 스페인 군에 대한 반란군을 지휘해서 한때 스페인 군을 리마와 쿠스코에서 포위하기도 했으나 그 다음해에 스페인 군은 반군을 진압했으며 다시 전 지역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이 반란은 1572년에야 완전히 진압되었는데, 그러한 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에 피사로는 동지와 불화를 겪는다. 피사로의 잉카 정복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운 피사로의 가장 친한 협력자 알마그로가 결국은 피사로와의 불화로 1537년 반란을 일으켜 전리품의 자기 몫을 요구하다가 끝내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의 처형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1541년 알마그로를 지지하는 일단이 리마에 있던 피사로의 궁전에 난입하여 66세의 노 지도자를 살해했다. 피사로가 쿠스코 시에 입성한 지 8년만의 일이었다.
많은 사람이 평하기로 피사로는 용감하고 결단력이 있으며 빈틈과 허술한 점이 없었다. 한다. 여러 가지 단서나 실마리가 되는 사실에서 본다면 피사로는 신심이 아주 깊었던 것 같다. 그러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탐욕, 잔인성, 야망, 배신 등의 면모를 보였는데, 많은 정복자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지나친 잔인성 때문에 그의 군사적 업적의 중요성이 간과되어 버려서도 안 된다. 1967년 이스라엘이 병력 수, 장비 등 여러 가지 점에서 월등히 우세한 아랍 제국에 대하여 극적인 승리를 거둘 때 많은 사람들은 놀랐다. 확실히 인상적인 승리이기는 했으나 역사상에서는 수량적으로 큰 차이가 있으면서도 열세가 우세에 이긴 예는 몇 번이나 이겼고 또 칭기즈 칸은 적어도 몽고보다 30배나 큰 중국 대륙을 정복하여 지배했다. 하지만 피사로가 600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잉카 제국을 겨우 180명의 병력으로 정복했다는 것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경이적인 군사상의 위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피사로가 극복한 수학상의 격차는 코르테스가 600명의 병력으로 약 5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멕시코 제국을 공격했을 때에 직면한 어려움보다 더 극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칭기즈 칸에게 피사로의 업적에 필적할 만한 승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잉카와의 압도적인 병력상의 격차에 직면하면서도 감히 정복을 기도한 피사로의 무모함은 두 사람(칭기즈 칸, 알렉산더) 모두에게는 없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당시 스페인의 소화기 덕분에 적에게 압도적인 전술상의 우위를 활보할 수 있었으므로 피사로가 그러한 무모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만으로는 결코 이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원시적인 소하기는 화승총으로서 그 사정 거리는 짧았으며 재장전하는 데도 꽤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게다가 무서울 정도로 큰 발사음이 터지기 때문에 실전에서는 양호한 활이나 화살보다 별로 큰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피사로는 카하마르카에 침입했을 때 항상 3명의 병사에게는 화승총을, 20명에게는 석시를 갖게 하였다. 인디언의 태반은 칼과 창이라고 하는 구태의 무기로 무장되어 있어 때로는 많은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기병과 소화기는 있었지만 이 싸움에서 전세를 갈라놓은 것은 병기의 우세보다는 스페인군의 지휘관의 지도력과 결단이 주요인이었다. 물론 피사로에게 행운도 뒤따랐다. 하지만 옛 격언에 운은 용감한 자의 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피사로를 대량 살상을 전문으로 하는 단순한 도살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도살자라 할지라도 역사상 피사로처럼 중남미에 큰 충격을 던져주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전복시킨 잉카 제국은 현재 페루와 에콰도르의 태반과 칠레의 북반부 그리고 볼리비아의 일부에 이른다. 그 인구는 남미의 다른 지역의 인구를 전부 합친 것보다 많은 것이었다.
피사로의 정복으로 스페인의 종교와 문화가 중남미 전 지역에 밀려 들어왔다. 잉카 제국이 함락되고 난 후부터는 남미의 타 지역도 유럽인의 정복에 저항하여 성공하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수백만 명의 인디언은 여전히 남미에서 지금도 저항 없이 거주하고 있으며, 남미 대륙의 어느 곳을 살펴보아도 인디언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유럽의 언어와 종교 그리고 문화가 전역을 지배하고 있다.
코르테스와 피사로는 각기 소수 부대를 지휘하여 아스텍족과 잉카 족이 세운 멕시코 제국을 단기간에 전복시키는 데 성공은 했으나 과연 이러한 정복이 유럽인에게 불가피한 것이었느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갖는다. 사실 아스테카 제국은 그들의 독립을 유지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첫째 그 위치에 있어서 스페인이 공격하기에 아주 좋은 곳에 존재하고 있어 설령 아스테카 군이 코르테스와 싸워서 이겼다 해도 곧 스페인 대군의 지원 부대가 도래하여 정복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이에 반하여 잉카는 자국의 방비에 극히 좋은 위치에 있었다. 스페인의 선단이 대서양 연안에 근접하는 것보다는 훨씬 곤란하였다. 또 인구도 조밀하고 잘 조직되어 있었다. 더구나 페루의 지세는 울퉁불퉁 산지가 많아 정복에는 어려운 곳이었다.
역사에서는 만약이란 말이 있을 수 없지만 피사로의 잉카 제국 침략이 실패로 끝났다면 그 후 잉카 제국은 유럽의 무기와 전술 지식을 얻는 기회를 충분히 얻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 후대에 와서는 보다 강대한 제국이 되어 유럽 군과 싸운다 해도 그들을 격퇴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았을 것이다.
피사로는 역사의 방향을 변경시킨 사람으로 코르테스보다 조금은 상위에 있는 인물로 사람들은 평가하고 있지만 반면에 코르테스는 역사의 속도를 더 빠르게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중남미 인디언의 입장에서 볼 때 또한 세계의 정의에서 볼 때 그들은 모두 잔인하고 혹독한 유럽의 침략자임에는 틀림없다.
<참고자료>
[출처] 에르난 코르테스 | 네이버 백과사전
[출처] 잉카의 최후 - 피사로|작성자 오딘
[출처] 콘키스타도레스 [conquistadores ]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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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제적 자유와 평등] <피사로,코르테스> 무역학과, 20090379, 김은지.
보낸날짜 2010-11-01 22:21:52
피사로
1475경 카스티야(스페인) 엑스트레마두라 트루히요~1541. 6. 26 리마(지금의 페루에 있음). 스페인의 정복자.
1. 생애
피사로는 곤살로 피사로와 미천한 태생의 프란시스카 곤살레스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는 초년기의 대부분을 할아버지 집에서 보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한동안 돼지 치는 일을 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돼지 치는 일이 그 지방에서는 소년들이 하는 일반적인 일이었다. 피사로는 아마도 지역에서 일어난 장원영주들간의 싸움에 가담한 듯하며 그러한 싸움들이 끝나자 다시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갔던 것으로 보인다. 1502년 그는 새로운 스페인 식민지 총독과 함께 히스파니올라(지금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로 갔다. 피사로는 식민정착자로서의 안정된 삶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1510년에는 알론소 데 오헤다가 이끄는 콜롬비아의 우라바 원정대에 들어갔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신뢰할 수 있는 굳세고 과묵할 뿐 아니라 겉으로는 야심 없는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년 후 그는 대장으로서 탐험가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태평양을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알려져 있음)의 원정대에 참가했다. 1519~23년에 새로 건설된 파나마 시의 시장과 관리를 역임했으며 약간의 재산도 모았다.
2. 페루의 발견과 정복
피사로가 자신에게 불후의 명예를 안겨다 준 모험에 나선 것은 48세로 1523년이었다. 군인이었던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성직자 에르난도 데 루케와 협력하여 남아메리카 해안을 따라내려가면서 탐사 및 정복여행을 준비했다. 탐험의 첫 단계는 1524~27년에 진행되었는데, 이 시기에 피사로와 동료들은 많은 난관을 넘어야 했다. 결국에는 직조된 의복을 입고 있는 문명화된 인디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뗏목을 타고 있는 것을 본 후 그들은 더 많은 병력을 요청하기 위해 알마그로를 파나마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파나마의 새 총독은 더이상의 인명피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탐험을 포기하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을 받은 후 피사로는 칼로 땅에 선을 긋고 부와 명예를 원하는 사람은 그은 선을 넘어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 선을 넘은 '유명한 13인'은 해안을 따라 남위 9。까지 탐험을 계속했다. 탐사중에 그들은 잉카인들이 만든 많은 물건들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잉카 제국에 대한 분명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새 땅을 페루라 명명했는데 이는 아마도 강 이름 비루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파나마 총독이 그들의 유망한 탐험사업에 여전히 반대했기 때문에 그들은 정복사업의 허가를 받기 위해 피사로가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를 직접 알현하기로 결정했다. 1528년 봄 배를 타고 세비야로 갔는데 우연히 그때 그곳에서 멕시코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를 만났다. 피사로는 카를로스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왕으로부터 훈장과 갑옷을 하사받았다. 뿐만 아니라 1529년 7월 새로 발견된 해안을 따라 파나마 이남의 965㎞까지의 지역, 즉 누에바카스티야 지방의 총독 및 최고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피사로는 부왕(副王)의 모든 권위와 권력을 부여받았으며 알마그로와 루케는 그보다 낮은 지위에 올랐다. '유명한 13인' 모두 새로운 영토에서 상당한 권리와 특권을 부여받았다.
피사로는 자신의 형제 4명과 함께 1530년 1월 파나마로 돌아가 그 다음해 1월 페루로 떠날 준비를 갖추었다. 그는 한 척의 배에 선원 180명과 말 37마리를 싣고 출범했는데 곧 두 척의 배가 가담했다. 4월에는 잉카 제국의 황제인 아타우알파가 파견한 대사들과 접촉했다. 황제는 3만 명에 가까운 군대를 거느리고 카하마르카 시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잉카인들은 피사로의 소규모 원정대를 낮게 평가하여 양측의 우두머리가 카하마르카에서 만나자는 제안을 수락했다. 11월 15일 카하마르카에 도착한 피사로는 즉시 대포를 설치하고 그의 형제 에르난도와 다른 스페인인 한 사람을 접견을 청하러 보냈다. 긴장된 하루를 보낸 후 아타우알파는 옷 속에 짧은 곤봉과 새총을 숨긴 3,000~4,000명의 호위를 받으며 카하마르카 광장으로 가마를 타고 들어왔다. 피사로는 비센테 데 발베르데라는 성직자를 보내어 잉카로 하여금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카를로스 5세를 그들의 군주로 받아들일 것을 권고했다.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인들의 종교와 주권을 논박하고 성직자가 바친 성서를 훑어본 후 그것을 땅에 내던져버렸다. 발베르데가 이 일들을 피사로에게 보고하자 피사로는 즉각 공격을 명했다. 잉카인들은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쓰러졌으며 피사로는 직접 아타우알파를 붙잡았다. 아타우알파는 인질로 잡혀 있었으며 그가 감금되어 있던 방을 금과 은으로 가득 채우겠다는 약속을 이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풀려나지 못했다. 아타우알파는 황제의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동생 우아스카르 처형을 명령하고 스페인인들을 타도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1533년 8월 29일 교수형을 당했다.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에 카하마르카를 둘러싸고 있던 잉카 군대는 퇴각했다. 피사로는 왕도인 쿠스코로 진격하여 1533년 11월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쿠스코를 점령했다. 스페인인들은 우아스카르의 동생인 만코 카파크를 잉카 황제로 선언했다.
피사로는 여생 동안 페루에 대한 스페인인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고 자신과 형제들이 차지한 이권을 지키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왕으로부터 받은 권력을 남용했기 때문에 알마그로와의 사이에 불화와 반목이 생겨났다. 이 때문에 정복사업의 세 주도자 간에 그 전리품을 균등하게 나누겠다던 엄숙한 협정은 이행되기가 어려웠다. 알마그로는 한때 쿠스코를 점령했으나 피사로의 설득에 의해 피사로가 왕으로부터 광범위한 통치권력을 부여받았던 칠레로 떠났다. 알마그로는 칠레의 빈약함에 실망하여 페루로 돌아왔으나 피사로에 의해 체포·처형되었다.
그동안 피사로는 그가 1535년에 세웠던 리마에 있었는데, 그는 생의 마지막 2년간을 리마 시에 바쳤다. 알마그로의 이전 추종자들은 리마에 있는 그의 아들을 중심으로 뭉쳤지만 리마 시를 벗어날 수 없었으며 또 감시를 받았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제거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선수를 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1541년 6월 26일 피사로의 궁을 공격했다. 피사로는 바로 그날 죽었는데, 자신의 피로 십자가를 그리고 거기에 입을 맞추며 예수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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