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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130권
묘지(墓誌) * 원문및 해석 동시편집자료입니다.
허조(許稠) 묘지명
正統四年歲在己未冬十有二月壬寅정통(명 영종 연호) 4년 기미 (세종21년, 1439)겨울 12월 임인일에 。議政府左議政許公의정부 좌의정 허공이。以病卒于私第병환으로 송도의 자택에서 졸하니。年七十一나이 71세였다。太常謚文敬태상에서 문경이라 시호를 내렸고。越明年春三月庚申명년 봄 3월 경신일에。有司具儀衛유사가 의위(의례와 호위))를 갖추어。葬于原平府治比向陽里之原원평부 북쪽 향양리의 언덕에 장사하였는데。嗣子承旨詡 사자( 대를 잇는 아들) 승지 후(詡)가。請銘幽堂 유당(유택)에 새길 명(찬양)을 청하였다。余與承旨나와 더불어 승지는。實再同榜 실로 두 차례나 동방이 되었던 만큼。義不可辭의리상 사양할 수 없었다.。
謹按公姓許氏삼가 살피건데 공의 성은 허씨요。諱稠字仲通휘는 조요, 자는 중통이니。慶尙道河陽縣人경상도 하양현 사람이다.。遠祖康安生徐冲먼 조상(시조) 강안이 서충을 낳고, 。徐冲生綽麟서충이 작린을 낳고。綽麟生愼작린이 신을 낳고。愼生世通신이 세통을 낳고。世通生赫富세통이 혁부를 낳고。赫富生得諝혁부가 득서를 낳고。得諝生諱裕득서가 휘 유를 낳았는데。大將軍벼슬이 대장군으로서。性嚴有法성격이 엄하고 법도가 있어。謹守家業삼가 가법을 지키면서。娶漢陽望族判太僕韓均之女그가 한양의 명망 있는 집안 판태복 한균의 딸에게 장가들어。生諱綏휘 유를 낳았는데。判典客寺事판전객시사로서 。恬靜寡欲조용한 성격으로 물욕이 적었으며。常具冠服늘 의관을 갖추고。齋居一室일실에서 재계하듯 거하였다。娶侍中安文成公諱珦之女시중 문성공 휘 안향의 딸에게 장가들어。生諱允昌휘 윤창을 낳았는데。嚴明方正윤창은 엄숙하고 밝고 방정하여。歷監察御史典法典理佐郞 감찰어사와 전법사((형조) 전리사(이조)의 좌랑을 역임하고。官至都官正郞벼슬이 도관의 정랑에 이르렀고。娶大司成李公諱稷之女대사성 휘 이직의 딸에게 장가들어 。生諱貴龍휘 귀룡을 낳았다。恭敏寬厚有大度공손하고 민첩하며 관대하여 큰 도략이 있더니。歷散騎常侍版圖判書산기상시(대사간) 판도판서(호조판서)를 거쳐。卒官奉翊大夫開城尹上護軍봉익대부 개성윤 상호군으로 졸했는데。娶通禮門副使李公諱吉之女통례문부사 휘 이길의 딸에게 장가들어 。生三子세 아들을 낳았으니,。長曰周맏아들 주는。資憲大夫判漢城府事謚簡肅 자헌대부 판한성부사로 시호는 간숙이요,。次卽公다음은 바로 공이요,。次曰倜막내아들 척은。前嘉善大夫中樞院副使전 가선대부 중추원부사였다。
公以洪武二年己酉四月十一日生공은 홍무(명태조 연호) 2년 기유 (공민왕 18년 1369) 4월 11일에 태어났는데, 。童丱嶷然如成人관례를 올리기 전의 아이 때부터 의연히 빼어나서 성인과 같았다. 稍長受業于陽村權文忠公조금 자라나서는 양촌 권문충공에게 。厲志力學 의지를 다하여 힘써 배우더니 。中癸亥進士擧계해년(우왕9년 1383) 17세에 진사거에 적중하고 又登乙丑司馬試또 을축년 사마시에 올랐다。戊辰以蔭補中郞將무진년에는 음직으로 중랑장에 보직되었고。庚午경오년에。獨谷成公石璘 독곡 성석린과。松堂趙公浚試禮闈 송당 조준이 예부에서 시험할 때。公擢丙科공이 병과( 대과의 등급)에 뽑혔는데,。兩公甚器重之두 공이 큰 그릇으로 여기고 심히 의중하였으며 。丞典儀寺전의시승이 되었었다。壬申我朝受命임신년에 우리나라가 천명을 받자。特除左補闕知製敎특별히 좌보궐 지제교에 오르고。尋丞奉常寺知製敎얼마 안 되어 봉상시 승 지제교가 되었다.。時禮樂散軼이때에 예악이 흩어지고 。太常職廢태상의 관직이 폐지되자。公務去因循공은 폐습을 힘써 버리고。悉遵典故모두 전고를 따르게 하였다。陽村亟稱之曰양촌이 자주 말하기를。異日典禮我國者훗날 우리나라의 예법을 주관할 이는。必斯人也“ 반드시 이 사람이리라.” 하였다.。癸酉五月丁外艱 계유년 5월 아버지 상을 만났고。明年十月又丁內艱 명년 10월에 또 어머니 상을 만났다。時俗治喪尙浮屠 당시 풍속으로는 상례를 치르는 자가 불법(佛法)을 숭상하였는데,。公一依文公家禮공은 한결같이 문공가례에 따라。哀禮俱盡슬픔과 예법이 함께 극진하였다。我國士庶우리나라 선비와 서인들이。遵用家禮 가례를 따른 것은。皆本之公 모두 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丁丑典成均簿정축년에 성균전부(成均典簿)가 되어。釐正釋奠儀式석전의식을 수정 간행하여。梓布中外 중외에 선포하였고, 。建文己卯 건문 기묘년에。再爲左補闕知製敎두 번이나 좌보궐 지제교가 되어。謇然有直名 엄연히 이름이 있었다.。庚辰太宗受禪경진년에 태종이 왕위를 물려받자 。拜司憲雜端사헌잡단이 되어。言事忤旨국시를 논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렸다。上怒欲寘重典임금이 노하여 중형에 처하려고 。廷詰甚厲친히 심하게 국문하였으나,。公抗詞不屈공이 항변하여 굴하지 않자,。上嘉鯁直임금이 그 강직함을 아름답게 여겨서。左遷完山判官 완산 판관에 좌천시켰다.。視事數月일을 맡 은지 몇 달 만에。治辦有聲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으나,。以疾辭 병으로서 사직하였다.。壬午秋임오년 가을에 。吏曹正郞缺이조 정랑에 결원이 생기자,。上以銓選任重難其人 임금이 전선이란 책임이 중대한데 마땅한 인재가 없자。親閱官簿친히 관부를 검열하다가。覽公名曰공의 이름을 발견하고 이르기를, 。得人矣 “적당한 사람을 얻었구나.” 하고는。遂授之 곧 맡겼다. 。冬除朝奉大夫內書舍人知製敎겨울에 조봉대부 내서사인 지제교가 되었으니。亦特命也 역시 특명이었다.。永樂癸未秋영락 계미년 가을에。以事貶知寧越郡 일이 있어 영월군에 좌천되었는데, 。冬辭疾겨울에 병으로 사임하였고,。甲申起拜護軍 갑신년 호군。直集賢殿집현전직이 되었다가。乙酉以本職兼世子左文學 을유년에 본직으로서 세자좌문학을 겸하였다.。上甞問世子僚友孰賢임금이 일찍이 세자에게 묻기를, “관료 중에 누가 현명하냐?” 하니。世子擧公以對세자가 공을 거론하여 대답하였다。丙戌改敬丞府少尹병술년에 경승부소윤이 되었고。丁亥直藝文館정해년에 예문관직으로。仍兼文學문학을 겸하였더니, 。世子朝京師세자가 명 나라 서울에 갈 때, 。授中訓司憲執義중훈대부 사헌집의로서。充書狀官서장관에 보충하여。行李之事 여행에 필요한 물품에 관한 일을 。一委糾察일체 담당하게 하였는데,。公約明令嚴 공이 약속이 밝고 명령이 엄격하자 。人皆懾縮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莫敢犯禁감히 금령을 범하지 못하였다.。公入朝凡事涉制度者공이 명 나라로 조회하러 들어가자,。悉問悉書모든 제도에 관한 사안을 모두 물어서 상세히 기록하였다.。東還道闕里동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궐리에 들러。謁宣聖廟 선성묘에 배알하던중。見江都相董氏 강도상 동씨와 ,魯齋許氏從祀노재 허씨가 종사되고,。楊雄被黜 양웅이 쫓겨 났음을 보고。皆建白于朝施行모두 우리 조정에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戊子通訓判司贍寺事무자년에 통훈으로 판사섬시사가 되고,世子右輔德 세자우보덕이 되었더니,。世子聞之 세자가 듣고서。謂左右曰 좌우에 말하기를。許文學復來耶“허문학(許文學)이 다시 오느냐.” 하였으니,。蓋素憚其嚴也 이는 평소에 그 엄격함을 꺼렸기 때문이었다.。是歲平壤君獄起 이해 평양군의 옥사가 일어나자。逮繫寔繁체포된 자가 실로 많았기 때문에。臺官不勝栲掠대관이 고문과 악형을 이기지 못하여 。誣引公以爲證 무고하게 공을 이끌어 들인 것이 증거가 되어 坐謫春州 춘주에 귀양보내고。未幾賜環얼마있지 않아 용서받고 돌아와 拜敬丞府司尹경승부사윤을 배하였다。
辛卯轉通政禮曹左右參議 신묘년 43세에는 통정대부(정3품상)로서 예조의 좌우 참의로 전직되었는데。公慨念麗季五禮儀注失傳공이 고려 말년에 오례의주가 실전되었음을 개탄하여。乃援唐宋典故곧 당송 때의 전고를 인용하여。朝廟禮樂조묘의 예악과,士庶喪制서사서인의 상제에 대하여 。酌右損今옛것을 참작하고 지금 것을 감손하면서。悉加撰定모두 가감하여 찬정하니是常提調儀禮詳定所이로부터 늘 의례상정소의 제조가 되었다.。上書請建學堂글을 올려 학당을 세울 것을 청하고。厥後又請置學四部뒤에 또 사부에 학교를 설립할 것을 청하자。皆從之이를 모두 따랐다。歷兵,吏二曹參議병조와 이조의 참의를 거쳐.。甲午。遣公廵視平安道山城갑오년 46세에 공을 보내어 평안도의 산성을 순찰하고。凡厥措置모든 조치를。多從公議 공의 의론에 많이 따랐으며。面陳平安民生艱苦임금 앞에서 평안도의 민생고를 진술하자。上特减租稅임금이 특히 조세를 면해 주었다。他日請見啓曰그 뒤에 뵙기를 청하여 아뢰기를。講武雖不可廢“무술은 비록 폐할 수는 없었으나。然馳騁險阻험준한 곳에 말을 달림이란。危不可測위태함을 측량할 수 없었으니。願上愼勿親獵전하께서는 친히 사냥을 하지 마소서.” 하고。不覺流涕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因極言講武塲猥多之弊이어 강무장(강무와 장렵)의 너무 많은 폐단을 말하였더니。上嘉納임금이 그의 말을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乙未春을미년 봄。尹漢城府階嘉善한성부윤으로 가선의 직계에 오르고。冬提學藝文館겨울에는 예문관 제학이 되고。丙申參判禮曹병신년에 예조참판 。提調奉常寺봉상시제조가 되었는데。奉常之事봉상시의 일에 대하여 。悉心指畫마음껏 지휘하고 계획하여。謬者正之그릇된 점은 바로잡고 。廢者擧之폐기된 것은 회복하여。巨細畢張 크고 미세한것을 신장시키기를 마치니。皆中儀式모두가 의식에 맞았다。公言京畿徭(구실 요)賦(구실 부)繁重공이 말하기를, “경기도의 세금이 너무나 번거롭고 과중하여 。民不聊(귀 울 료{요})生백성이 살 수 없다.” 하여。請量减양감할 것을 청하였고。又言船軍國家藩(덮을 번)垣(담 원)또 아뢰기를, “해군이란 국가의 울타리인데。而今興一役이제 공사만 생겨도 。調廢不已폐기하곤 하니。請加存恤돌보아 줄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及爲相정승이 되어서는。再三陳請皆從之2ㆍ3차례 청하자 모두 따랐다.。戊戌春무술년 봄에。開城留後司副留後개성유후사 부유후가 되었고。又兼觀察京畿또 경기도 관찰사를 겸하였더니。夏辭疾여름에 병으로 사임하였다。秋上受禪가을에 임금이 선위를 받자。尹恭安府加嘉靖(편안할 정) 공안부윤에 가정대부(종2품상)가 더해지고。尋判書禮曹階資憲얼마 안 되어 예조 판서로서 자헌대부(정2품하)의 직계에 오르게 되어。公獻議曰공이 헌의(의논을 올려 말)하기를,。家國天下“집과 나라와 천하에 。彝(떳떳할 이)倫所在윤리가 있는 곳에는。莫不各有君臣上下之分각기 군신과 상하의 명분이 없을 수 없거늘。近來以下伺(엿볼 사)上근래에는 아랫사람으로 윗사람의잘못을 엿보아서 。得一小釁(틈흔) 한가지 작은 흠집만 발견하면 。羅織告訴이를 얽어서 고소하니。此等之俗이와같은 풍속은。漸(점점 점)不可長 점점 조장되는것이 불가합니다.(그대로 방치할 수 없을 것입니다)昔唐太宗朝옛날 당 태종 때에。有奴告主叛(배반할 반)者종이 주인의 모반을 고발한 자가 있었는데。不受仍斬(벨 참)之이를 받아들이지 않고받아들이지 않고 그노비를 참수한 바 있습니다. 願自今臧(착할 장)獲(얻을 획)如有告主者원컨데 지금이후로 만약 제 주인을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倣(본뜰 방)此區處이를 모방하여 처단하기를 바랍니다。又朱文公言於孝宗朝曰또 주문공이 효종에게 아뢰기를。凡獄訟무릇 옥송에。以下犯上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범한 자와。以卑(낮을 비)陵(큰 언덕 릉{능})尊者낮은자가 존장을 능모하는 ( 업신여기는 자)。雖直不右(오른쪽 숭상 우)비록 곧은 것이라도 옳게 받아들이지 말고 。不直罪加凡人之坐곧지 않은것은 죄를 가하여 모든사람이 좌죄된것을 이와같이 하라 하였으니 。願自今吏胥(서로 서)告官吏원하건대 이제부터 아전으로 관리를 고발하였거나。部民告守令,監司者부민으로 수령과 감사를 고발한 자는。所告非關社稷(기장 직)枉(굽을 왕)法殺人그 일(과발된일)이 사직이나 잘못 법을 적용하여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면。則勿治 다스리지 말고。誣告重論무고한 자는 중한 죄로써 논하여。以杜陵上之風"윗사람을 능모하는 풍습을 두절시키소서” 하였더니。允之임금이 윤허하였다.。己亥取生員成以儉等一百人기해년에 생원 성이검 등 1백 명과。及第曹尙治等三十三人급제 조상치 등 33명을 뽑았고。庚子。取生員閔瑗等一百人경자년에 생원 민원 등 1백 명과。及第安崇善等三十三人급제 안숭선 등 33명을 뽑았다。辛丑參贊議政府신축년에 의정부 참찬이 되며。太宗謂上曰태종이 주상에게 이르기를。斯人眞宰相也 "이 사람이 진실로 재상이요.” 하고는。侍宴豐壤離宮풍양 이궁의 연회에서 공이 시좌하였는데。太宗前公桂(계수나무 계)肩(어깨 견)태종이 공에게 다가와 그 국궁한 어깨를 받쳐 일으키며(앞으로 공의 어깨를 잡고)。顧謂上曰왕(세종)을 돌아보며 가로되。此予(나 여)柱石也“이사람이 나의 주석이오" 하니。公驚感隕(떨어질 운)泣(울 읍)공이 놀라고 감격하여 눈물을 떨어뜨렸다.。壬寅五月임인년 5월에。太宗賓(손 빈)天태종이 (승하)돌아가자。大臣議百官喪制대신이 백관에게 상례를 의론할 때。衆曰여러 사람이 말하기를。旣葬釋(풀 석)衰(쇠할 쇠)“이미 장사를 지낸 다음에는 상복(최복)을 벗고。淡(묽을 담)服陪祭原廟便 담복으로 원묘에 배제함이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公駁(얼룩말 박)曰 공이 반박하기를。君臣一體군신은 한 몸이어늘。今聖孝篤至이제 왕의 효도가 돈독하고 지극하니。衰絰(질 질)三年상복과 수질로써 3년을 지내시는데。獨群臣旣葬卽吉可乎유독 여러 신하가 장사를 지냈다고 해서 길복을 입는 것이 옳겠는가。請治事服淡 일을 맡을 때는 담복을 입고,모시고。陪祭着衰終制제사를 올릴 때는 상복으로써 끝내게 하소서.” 하였더니。上卒從公議임금이 마침내는 공의 의론을 따랐다。及朝廷賜祭使臣명 나라에서 사제하였을 때, 사신이 見百官衰而陪祭백관들이 상복으로써 배제(陪祭)함을 보고서。嘆其合禮 예에 맞음을 탄복하였다.。公遇諱辰공이 휘 신을 만나면。齋(재계할 공손 재蔬(푸성귀 소)悲泣나물밥으로 재계하여 슬피 울었다.。
秋判書吏曹그해 가을에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請建久任之法구임법(한직책에 오래 보임되게 하는법)을 세울 것을 청하여。京官主錢경관(중앙정부관원)으로서 전곡을 주장(장악)하는자는 ,穀者三朞(돌 주년 기) 임기를 3년으로 하고。守令六朞지방 수령은 만 6년으로 할 것을 건의 했으며。又請古者罪人不孥(자식 종 노)또 청하기를, “옛날에는 죄인으로서 諸律에 결려 붙잡히지 않거나 연좌되지 않은자는 。諸律不緣坐者모든 법에 연좌되지 않은 자는 。勿錮̀(가둘금)가두지 않았으니 그대로 하기를 청하자 。皆從之임금이 모두 따랐다. 。癸卯進階正憲계묘년(세종5년 1423)에 정헌대부(정2품상)로 진계하였는데 。命公修撰續六典공에게 명하여 《속육전(최초의 법령집 원육전과 속육전 중 후자)을 수찬하라 하였다.。公謂是書공이 말하기를, “이 책은。乃培養國脉국 脈을 배양하는 근본이니。不可苛(매울 가)刻(새길 각) 가혹하다하여 。凡一時峻(높을 준)法당시 준엄한 법률을。並改依律論罪아울러 고치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이를 고치는 것은 율법에의해 논죄하겠다고 하였다.。宣德丙午春求解선덕 병오년(세종8년 1426 58세)에 해직할 것을 구하였으나。又爲參贊世子賓客또다시 참찬에 세자빈객이 되었고。冬復判書吏曹 겨울에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有諫官坐事當杖者간관으로 직무가 죄에 걸려 장형을 받게 된자 있게되자 。公啓諫官공이 임금에게 계문하여 간관은。人主耳目임금의 이목(耳目)인 만큼。乞(빌 걸)優(넉넉할 우)容 관대히 처리하기를 바랍니다.” 하였더니, 。上命贖(속 바칠 속)銅 상께서 구리를 바치는 것으로 속죄케 하였다.。公每當臺(돈대 대)諫(간할 간)被譴(꾸짖을 견)공이 매양 대간들의 견책을 입을 때마다。盡力救解힘을 다하여 구해하였다. 。丁未進階崇政정미년(59세)에 숭정대부의 품계에 나아가고。戊申復辭무신년(1428. 60세)에 다시금 사직하였으나。判中軍都揔(거느릴총)制府事판중군도총제부사가 되었다。上言我國東北有敵상언하기를, “우리나라가 동북에 적이 있는 만큼 。宜及平安마땅히 평안도에 힘써。謹修備禦삼가 비어책을 닦아야 하며。請先城沿邊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연변(국경)에 성을 샇고 。以及內地 이어서 내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하고。後又請置修城典船色뒤에 또 수성전선색(성곽의 전함을 수리하는 직책)을 두어。專治城(성 성)堡(작은 성 보),戰艦(싸움배 함) 성보와 전함을 전담하여 다스리게 하니。皆從之모두 따랐다.。
己酉기유년(1429. 61세)에 。上詣(이를 예)國學謁(신분높은분 뵘)宣聖임금이 국학에 가서 선성을 뵙고。親試學生 학생에게 친시(임금이 친림한 문과)를 베풀며。命公讀卷공에게 독권관(채점관)이 되기를 명하니。取及第趙注等三人 조주(趙注) 등 3명을 급제자를 뽑았다。
庚戌경술년(1430. 62세)에。贊成議政府의정부 찬성이 되며。壬子復拜吏曹判書階崇祿임자년(1432. 64세)에 다시 이조 판서를 배하면서 품계는 숭록대부(종1품 상))가 되었다.。累典銓事 여러 차례 전조(이조)의 일을 전형의 일을 하였으되 。鑑(거울 감)裁(마름질 재)公明공 비춰보고 재결함이 공명하였으며。補一官한 사람의 관원을 보임할 때에도 。必與僚佐詳品除授반드시 동료 관원과 더불어 상세히 품의를 정하여 제수하였다.。關節屛(병풍 병 막다)蹟(자취 적)뇌물(뇌물)은 그 발걸음을 막고。孝子順孫효자 순손과,忠賢之㣧(사람 이름 윤)충신, 현인의 아들(후예_은。率先甄(질그릇 견)錄 우선하여 발탁해 길들여 쓰니 。或謂烏有孝順어떤 이가 말하기를, “어찌 효자와 순손이 。若玆(이 자)多耶(어조사 야)이렇게 많을 수가 있겠는가.” 하니。公曰 공은 말하기를。閒(틈 한{사이 간})雖有假 “그 사이에 가끔 거짓이 있다 하더라도。不已勵(힘쓸 려{여})俗乎풍속을 장려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지 않은가” 하였다. 。上甞引問임금이 일찍이 공을 불러서。群臣賢否여러 신하 중에 누가 어질고 어질지 못한가를 물었는데,。一時聞人일시의 문인(유명인)으로。多其所擧 거명된 이가 많았으나。公秘不洩(샐 설) 공은 이를 비밀로 누설하지 않으니。人莫之知 사람들이 누가 거명되었는지 알지 못하였다。癸丑春계축년(1433, 세종15년 65세) 봄에。上將討婆猪江野人李滿住等임금이 장차 파저강(婆猪江)의 야인(여진족) 이만주(李滿住) 등을 치려고 。召大臣議대신을 불러 의논을 하였더니。衆曰當討모두 말하기를, “ 마땅히 정토해야 합니다.” 하자。公駁(얼룩말 박)曰공이 반박하기를。此輩(무리 배)頑(완고할 완)梗(대개 경 가시나무)“그 무리가 완강하여 。一與之讎(짝 원수 수)한 번 원수를 맺으면。世世報復대대로 보복할 것인 만큼 。不可輕擧 가볍게 거병해서는 안됩니다.” 。後因邊將策(채찍 책)뒤에 변방에 장수를 보내 지킬계책을 아뢰니 。上欲招撫忽(소홀히 할 홀)剌(어그러질 랄{날})野人임금이 홀랄야인(여진의 또다른 씨족)을 불러 초무(불러서 어루만짐)고자 하였다.。公又駁曰 공이 또 반박하기를,。獷(사나울 광)俗喜人怒獸“ 거친풍속에 사람해치기를 즐기고 (되놈의 풍속은 기뻐하면 사람 노릇을 하고 화내면 짐승 같은 노릇을 하여)。谿(시내 계)壑(골 학)無厭(싫을염) 산골짜기와 구렁이에서 사나운 짐승처럼 살기를 마다 않으니(욕심이 계곡처럼 깊어 싫증이 없으니)。請勿招撫(어루만질 무) 불러 무마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으나。皆不允모두 듣지 아니하였다.。公甞議事都堂공이 일찍이 도당(의정부)에서 일을 의논할 때。有近臣傳旨어명을 전하는 근신이 있기에。公附啓昔我太宗공이 아뢰기를, “옛날 태종께서。甞畜(쌓을 축)海靑 일찍이 해동청(海東靑)을 기르시다가,。乃謂不可垂憲‘이는 본보기가 될 수 없다.’ 하고는。卽命縱(늘어질.놓을 종)之곧 놓아 주었으니。今旣不獻中朝이제 이미 중국에 바치지 않을 바에야 請勿捕(사로잡을 포)養잡아서 기를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冬判中樞겨울에 판중추(判中樞)가 되었고, 乙卯以本職知成均館을묘년에 본직으로서 지성균관(知成均館)이 되었다.。正統丙辰정통(正統) 병진년에 。兼判禮曹예조 판서를 겸임하였는데,。時科擧專試詞章당시 과거시험에서 오로지 사장(詞章)만을 시험하기에。公慨然欲振起經學공이 경학(經學)을 일으키기 위하여。累請初塲講經초장(初場)에는 경서를 강할 것을 여러 차례 청하였고。至是又請不允이때에 또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丁巳春정사년 봄에。以宿疾乞(빌 걸)骸(뼈 해)묵은 병으로 물러갈 것을 청하였으나。批(칠 비)答不允비(임금대답)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前後辭疾者不記전후 병으로 사직한 일은 기록하지 아니하였으나。辭必命除朝參사직을 할 때마다 조회 참석을 면하여 주었다。冬公不豫겨울에 공이 병이 더하자。上遣內醫二人診療임금이 내의(內醫) 두 사람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고。存問交道문병하는 자가 길에 이어졌다。公力疾扶起공이 억지로 병을 견디고 몸을 일으켜。屛人手䟽주위 사람을 물리치고 상소문을 직접 초안을 작성하여。請戒外患외환(外患)을 경계하고。崇謙德겸손한 덕을 높이며。重政權정권을 중시하고。納直言올바른 말을 받아들이며。敬大臣대신을 공경해야 할 것을 청하였으되。語頗(자못 파)切直말이 절실하고 곧았으나, 。疾篤不果上병이 위독하여 올리지 못하였다.。
戊午取進士申叔舟等一百人무오년에 진사 신숙주(申叔舟) 등 백 명과。及第河緯地等三十三人급제 하위지(河緯地) 등 33명을 뽑았고。夏進拜議政府右議政領集賢殿經筵監春秋館世子傅여름에 의정부 우의정에 進拜되어 영집현전경연감춘추관 세자부로서 階大匡輔國崇祿품계는 대광보국숭록대부(정1품상)에 올랐다.。。公甞援家禮祭四代공이 일찍이 《가례(家禮)》에 의거하여 사대(四代 고조부까지)를 제사하였으므로 。累請士夫得祭高祖 거듭 사대부로서 고조(高祖)에게 제사할 수 있도록 청하였으나。不允윤허를 받지 못하였다。先是島倭來寓(머무를 우)濱(물가 빈)海州郡이에 앞서 왜인(倭人 도외)이 바닷가 고을에 붙어 살면서。販魚塩者常數千人 생선과 소금을 판매하는 자가 늘 몇천 명이나 되었더니。屢啓狼(이리 랑{낭})子野心여러 차례 아뢰기를, “그들은 승냥이(낭자야심: 이리새끼는 그 마음이 산야에 있어 길러도 길들지 않음)와 같은 야심을 지니고 있으니。請悉發還모두 돌려보내야 합니다.” 하니,。從之이 의견을 따랐다。冬十一月大雷電겨울 11월에 큰 우레와 번개가 일자。公引咎(허물 구)請免공이 인책하여(자기허물임) 면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不允윤허하지 않았다。己未賜几杖기미년(1439 71세)에 궤장(几杖 노인용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받고。尋陞左議政領春秋館곧이어 좌의정으로 승진하면서 영춘추관사가 되고。餘如故나머지는 전과 같았다。冬十月遘(만날 구)疾겨울 10월에 병이 나니。上又遣醫問視임금이 또 의원을 보내 문병하는데。丁巳有加정사년(2년전)보다 더함이 있었다.。公以疾彌(두루 미)留辭공이 질병이 계속되어 낫지 않으므로 사임했으나 。不允윤허하지 않고。特官子訥司醞署令공의 아들 눌에게 특히 사온서령벼슬을 주고。超資三級세 품급을 올려 주었으니。盖所以慰悅之也이는 공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病革醫請候병이 위독하자 의원이 진찰하기를 청하였으나。公謝不見공이 사절하고 만나보지 않으면서。且曰生于大平世또 말하기를, “태평세상에 태어나서。長于大平世태평한 세상에서 자라。沒于大平世태평한 세상에서 죽으니。俯(구푸릴 부)仰(우러를 앙)天地閒 천지간을 우러르고 굽어보아도 。浩然獨無愧(부끄러워 할 괴) 호연하여 홀로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斯非吾所及이것은 내가 미칠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吾年七旬位首相 나이 70에 벼슬이 수상에 이르러。逢時盡言좋은 때를 만나 하고자 하는 말을 다하였고。克遂(이를 수)志願소원을 이룩하였으니。死無遺恨(한할 한)죽어도 유한이 없다。第願見都承旨하지만 도승지를 보기를 원한다.” 하였다。語聞命都承旨金墩(돈대 돈)往視그 말이 위에 들리자, 도승지 김돈(金墩)을 시켜 가서 보게 하였더니。公辟(임금벽)人密語공이 사람을 물리치고 비밀리에 말하였으니。盖國家重事也국가의 중대한 일들이었다.。自始病迨(미칠 태)卒처음 병이 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憂國之言不絶口나라를 걱정하는 말이 입에 끊이지 않았고。未甞語及私일찍이 한 마디도 개인적인 일은 언급하지 않고。怡(기쁠 이)然而逝(갈 서)편안히(편안하고 태연함) 서거하였다。常戒子孫늘 자손에게 경계하여。喪事悉遵家禮상사에 《가례를 따르라고 하였。訃聞上震(벼락 진)悼(슬퍼할 도)부고가 이르자, 임금이 심히 슬퍼하여。率百官擧哀백관을 거느리고 애도 하고。輟(그칠 철)膳(반찬 선)罷(방면할 파)朝三日좋은 반찬을 물리치고 조회를 사흘동안 파했으며。遣使弔慰重賻사신을 보내어 조문 위로하고 부의금을 중히 하였고。東宮亦如之동궁도 이와 같이 하였으며。遠近聞者莫不痛(아플 통)惜(아낄 석)원근을 불구하고 들은 자는 모두 애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發引朝中卿(벼슬 경)士郊(성 밖 교)送甚盛발인(發靷)할 때 조정안의 경사(卿士)들이 교외까지 나가 장송하니 매우 성대하여。公之哀榮공의 애영(애달픔과 영광스러움)에。可謂無憾(한할 서운감)가히 유감이 없다 할 것이다.。公天資正大而剛(굳셀 강)毅(굳셀 의)공의 성품은 바르고 크며 씩씩하고 。淸愼而仁恕(용서할 서)맑고 삼가면서도 어질고 관대하였으며。爲學泝(거슬러 올라갈 소)濂(내 이름 렴{염})洛(강 이름 락{낙})。학문에는 염락(廉洛 정자ㆍ주자의 학문을 말함)을 거슬러 올라 ,沿(따를 연)洙(강 이름 수),泗(물이름 사)수사(洙泗 공자)에 따르고。不務該(그 해)洽 (윤택하게 할 흡)해흡(해박하여 두루미침)함에 힘쓰지 않았다.。鷄鳴端(바를 단)坐닭이 울면 일어나 단정히 앉아 。日誦小學中庸마다 《소학》과 《중용》을 암송하고。精思力踐정밀하게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여。夜分暫(잠시 잠)睡(잘 수)밤이 깊어서야 잠시 취침을 하였다。題其室曰敬菴(풀 이름 암자암)공은 서실을 경암이라 하고。克養有素 소박함을 잘 함양하면서 。言動中禮말이나 움직임이 예법에 알맞게 하고。縱(늘어질 종)値(값 치)倉(곳집 창)卒비록 창졸간에 일을 만났으나 , 。不失規矩(곱자 구)법도를 잃지 않았으며。事父母克孝부모섬기기를 능히 효도로써 하고。奉祭祀盡誠제사받들 때는 성의를 다하였다.。初母夫人처음에 모부인이 。蠶衣製繅(고치 켤 소)以賜公일찍이 친히 누에를 쳐서 명주옷을 지어서 주었는데, 。祭輒(문득 첩)衷(속마음 충)服 그 제사 때면 문득 충복으로。誦唐詩慈(사랑할 자)母手中線一聯(잇달 련{연})당시(唐詩) 중의 인자하신 어머니의 손수 하신 바느질을 / 慈母手中線 이라는 한 연의 시를 외면서
。悲泣(울 읍)슬피 울었으며。且命子孫또 자손에게 명하기를。死必以襲(엄습할 습) 자기가 죽으면 반드시 父事兄仁宗族 아비를 계승하고 형을 섬기며 친족에게 어질게 하라 하였다。公夫人之妹공의 부인의 누이가。蚤(벼룩 일찍 조)寡(적을 과)無子일찍의 과수가 되어 아들이 없는데다。病亟병이 심하자。請以公子爲後공의 아들로 그 뒤를 잇개ㅔ 해 주기를 청하면서 。將悉致家貲(재물 자) 그집의 재산을 모두 주겠다하니 。公辭曰공은 사양하기를。須分晜(형 곤)弟모름지기 형제에게 나누어 주어 。以惇(도타울 돈)天倫천륜(天倫)을 돈독하게 하시오.” 하고는。往復十餘 그말이 10여 차례를 오갔으나 竟(다할 경)不聽마침내 듣지 않았다. 治家以禮집안을 다스림에 예법러써 하니。內外雍(누그러질 옹)肅(엄숙할 숙)안팎이 옹화(화락한 기운이 어리고) 엄숙하였으며。尤(더욱 우)信朋友더욱 신의로써 벗을 사귀되 。有慶弔問遺(끼칠 유)勤至길ㆍ흉경조사에 위문하고 보내는 일을 지극히 힘써하니。其篤(도타울 독)於倫理者 그 윤리에 돈독한 것이 .。多類此이와 같이 많았다。生平不事生産평생 생산(살림살이)을 일삼지 않고。服食儉素의복과 음식이 검소하여。歲侵擧家啜(마실 철)粥(죽 죽)흉년이 들면 온 집안이 죽을 먹었다。好奬進士類선비 무리를 장려하고。暴(사나울 폭, 햇빛쪼일 폭)長韜(감출 도)短장점은 폭로하고 단점은 감추어주니。門無停(머무를 정)客문전에는 손님이 그치지않았으며。開誠接納 성심을 열어 사물을 접하고 교제함으로써 。今(이제 금)人愛且敬焉사람들로 하여금 사랑하고 공경하게 하였다.。歷事四朝네 조정을 거듭 섬기면서。憂國如家 나라를 근심하기를 집안같이 하여。克勤夙(일찍 숙)夜아침 일찍부터 늦은 밤까지 능히 힘썼다.。興官耆(늙은이 기)事관아를 일으키고 일하기를 즐기되。愼不輒(문득 첩)發신중히 하여 문득 말하는 일이 없고。商確深遠 상확(헤아려절충하고 확정함)심원하여。有大疑獄 큰 의옥(疑獄)이 있을 때는。上必咨(물을 자)决임금이 반드시 자문하여 해결하였으며。事大交隣國家機密사대 교린(종주국을 섬기고 이웃나라와 교류함)과 국가의 기밀에 관한일로 。靡(쓰러질 미)不詢(물을 순)問 순문(자문을 구해 물음)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公亦知無不言공도 또한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음이 없었다。遇時政有所可否시정에 대하여 가부를 말해야 할 경우를 만나면。不嫌(싫어할 혐)越位 자기 위치를 넘어서는 것을 꺼리지 않고。終夜倚(의지할 의)壁밤이 새도록 벽에 기대 앉은 채로 。計度不置헤아리고 촌탁하여 방치함이 없다가 。面敶剴(알맞을 개)切 임금을 면대하여 개절(급소를 찌르를 듯 적절함)히 아뢰면。或聽或否혹은 청허하고 혹은 불청하였지만。後多有驗(증험할 험)뒤에는 증험되는 일이 많았다.。若(같을 약)務農興學育材善俗농사에 힘쓰고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고 풍속을 아름답게(선도) 하는 일에 대해서는。尤(더욱 우)致意焉더욱 지극한 의지를 다하였다. 其他證據(의거할 거)今古 그 밖에 고금의 일(제도와 문적)을 증거하여。折(꺾을 절)群議定國是者그것을 자르고 가감하여 국시를 의정한 것을 。不可勝紀(벼리 기)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及爲相益自以輔君澤民爲己任 급기야 정승(재상)이 되어서는 스스로 임금을 돕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기임)를 삼아 。憂國之誠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至死不弛죽을 때까지 해이하지 않았으니。其忠勤如此그 충성과 부지런함이 이와 같았다。嗚(탄식소리 오)呼(부를 호)아, 슬프다。公本之以經綸(낚싯줄 륜{윤})之器공은 본디 경륜의 그릇으로 비롯하여。輔之以性理之學성리의 학문으로 임금을 보필한고로。故其發於論議 때문에 그 논의에서 발하는 것과 。措(둘 조)諸政事여러 정사에에서 조치하는 것이 。大經大法大忠大直대경대법이요 크게 충성스러움과 크게 곧음이었으며 。光明俊偉광명의 준수한 위용으로하고。炳(밝을 병)耀(빛날 요)一世 한세상을 밝게 빛냈으니。所謂宰相中眞宰相也이른바 재상 중에 진정한 재상이었다.。配貞淑夫人朴氏배위(부인)는 정숙부인 박씨는。寧海大姓영해의 대성。司憲府大司憲謚良靖(편안할 정)公諱經其考也사헌부 대사헌 시호 양정공 휘 경이 그 先考(죽은아버지)이고。都僉(다 첨)議贊成奇公諱有傑(뛰어날 걸)도첨의찬성 기공) 휘 유걸이。其外祖也그 외조부였다。性明以肅성품이 밝고 엄숙하여。壼(대궐 안길 곤)儀克備부녀자의 품절이 완비되었다。生二男 두 아들을 낳았는데,。長曰詡맏아들 후(詡)는。捷(이길 첩)丙午科병오과(세종8년 1426)에 문과(장원)에 오르고。又中丙辰重試及第또 병진년1436 중시(重試: 丙)자가드는 10년마다 문과 급제한 당하관에게 보이던 문과 시험)에 급제하여。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經筵參贊官寶文閣直提學知製敎充春秋館修撰官兼判軍器監事知刑曹事통정대부(정3품 상, 당상)로서 승정원 좌부승지에 경연참찬관 보문각직제학 지제교이며 충춘추관수찬관에 충원되고 판군기감사와 지형조사를 겸대하고 있다. 次曰訥通善郞司醞(빚을 온)署(관청 서)令다음 눌(訥)은 통선랑(정5품 하) 사온서령(通善郞司醞暑令: 궁중의 술을 담다앟는 관아의 종5품관)이다。三女세 딸이 있었으니。長適世子左弼善崔有悰(즐길 종)맏딸은 세자좌필선 최유종(崔有悰)에게 시집가고。次適平山都護府使鄭箴(바늘 잠)다음은 평산도호부사 정잠(鄭箴)에게 시집가고。次適及第尹彌(두루 미)堅다음은 급제(과거에 금제하고 아직 관직이 없는 것) 윤미견(尹彌堅)에게 출가(적가))하였다。承旨娶判興海郡事李興門之女승지(장남후)가 판흥해군사(判興海郡事) 이흥문(李興門)의 딸에게 장가(취)들고。署令娶戶曹佐郞閔普文之女 다음은 서령(눌)은 호조 좌랑 민보문(閔普文)의 딸에게 장가들어。生三男 세 아들을 낳았는데。長曰慥(착실할 조)맏아들은 조(慥)요, 。次曰憺(편안할 담)다음은 담(憺)이요,。次曰惇(도타울 돈)그 다음은 돈(惇)이요。四女皆幼 사녀를 낳았는데 네 딸은 모두 어렸다。弼善生一男敬同필선(최유종)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경동(敬同)이요。三女그 삼녀는。長適藝文檢閱安哲孫 맏딸은 예문관 검열 안철손(安哲孫)에게 시집가고,。次適幼學李克培다음은 유학 이극배(李克培)에게 시집가고。次適幼學崔潤文다음은 유학 최윤문(崔潤文)에게 시집갔으니。非一崔也이는 같은 최씨가 아니었다。平山生一男曰叔精평산부사(정잠)이 한 아들 숙정(叔精)을 낳았으니。西部錄事서부녹사(西部錄事)였고, 。三女皆幼세 딸은 모두 어렸으며,。及第生二男 급제(윤미견)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長曰涵(젖을 함)맏아들은 함(涵)이요。次曰澂(맑을 징)다음은 징이었고。二女두 딸은。長適繕工錄事黃事親맏이가 선공감 녹사 황사친(黃事親)에게 시집가고。次幼다음은 어리다。外曾孫若干人 그 외 증손(外曾孫)은 약간명이 있다.。
銘曰 명(銘)하여 이른다.。
瞻(볼 첨)彼(저 피)河陽 하양을 우러러보니
許爲顯姓 허씨가 드러난 성인데。
世有偉(훌륭할 위)人 대대로 위인이 나와。
愼德飭(신칙할 칙)行 삼가고 덕을 쌓아 행실을 신clr하였네。
委(맡길 위)祉(복 지)于後 복지는 후대에 미루니。
篤(도타울 독)生文敬 돈독한 삶이 오래도록 공경스럽고。
翼(날개 익)翼文敬 삼가고 그 공경을 오래도록하니 。
大啓厥(그 궐)慶 여경(후대경사)이 크게 열렀구나。
冰蘖(그루터기 얼)其操(잡을 조) 그 지조는 빙벽(참어름과 쓴 황벽나무를 씹는 고초)과 같고。規矩(곱자 구)其武 (굳셀 무) 그 계승함은 규구(제도와 규범)에 맞는데。
騁(달릴 빙)軌(길 궤)閩(종족 이름 민)洛(강 이름 락{낙}) 민락(민중) 땅의 주자학과 낙양 땅의 정자학의 궤도를 달려 。
振策(채찍 책)鄒(나라 이름 추)魯(노둔할 로{노})추로의 학문을 떨쳤도다。
歷事四朝
네 임금을 거듭 섬기며 。
樂攄(펼 터)所學 즐겨 배운 바를 널리 펴고。
黼(수 보)黻經綸(낚싯줄 륜{윤}) 문장과 경륜으로。
丹靑制作 단서를(임금의 글)를 제작하였네。
匪(대상자 비)龜而智。
折事危疑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일을 절충함은 점치는게 아니라 지혜로써하고。
匪(대상자 비)鑑而明 거울이 없이도 밝게。
辨人姸(고울 연)媸(추할 치) 분변함은 사람의 아름다움과 음사함이요。
玉扎(뺄 찰)牛溲(반죽할 수) 임금이 우수(소의오춤같은 인물)을 예우하여 。
藥籠(대그릇 롱{농})並畜(쌓을 축) 약롱(약상자속의 귀중인물)과 함께 기르시니。
隨(따를 수)材擇用 인재에 따라 골라 쓰도록。
咸(다 함)効醫國 두루 탄핵하여 나라의 병을 치료하였네。
朝有闕政 조정에는 깊숙이 숨겨진 。
政有或秕(쭉정이 비) 정사가 있고 정사에는 간혹 비정(악정)이 있는데 。
終始瀝(거를 력{역})膽 시종 이를걸러 쳐다보면서 。
讜(곧은 말 당)論靡(쓰러질 미)已 곧은 의론을 그만둘 줄 모르니。
太宗忠之 태종이 이를 충성스럽다 여겨。
曰予柱石 주석이라 일컬었도다。
今聖相之 지금의 성상(세종)이 재상으로 삼아 。
昇以鈞(서른 근 균)軸(굴대 축) 나라의 주축을 고르게 바루도록 하니。
經邦謨(꾀 모)遠 방국을 경영하는 계획은 원대하고。
澤民心長 백성을 윤택하게하려는 마음 심장한데。
遽(갑자기 거)停相杵(공이 저) 갑자기 상저(절구질할 때 서로 소리로 권려하는 것인데 이웃에 초상이 나면 그 소리를 못냄) 소리가 그쳤으니。
云何彼蒼(푸를 창) 이르건대 저 푸른 하늘이 어째서인가。
欒(나무 이름 란{난})欒元嗣(이을 사) 애통으로 수척하고 파리한 원사(맏이로 대를 이을 사자)가。
圖永孝思 길이 효도하고 사모할 것을 도모하기에。
納銘玄墟(噓(불 허)의 俗字) 현허(아득한 구천의 유허, 즉 무덤)에 드러나니 。
昭(밝을 소)示無期 밝혀 보임에 그 기한이 없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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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130권
묘지(墓誌)
유명조선국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영집현전경연춘추관사 세자부 증시 문경 허공 묘지명 병서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領集賢殿經筵春秋館事 世子傅贈諡文敬許公墓誌銘 幷序 )
남수문(南秀文)
정통(正統) 4년 기미 겨울 12월 임인일에 의정부 좌의정 허공(許公)이 병으로 사제(私第)에서 졸하니, 나이 71세였다. 태상(太常)에서 문경(文敬)이라 시호를 내렸고, 명년 봄 3월 경신일에 유사가 의위(儀衛)를 갖추어 원평부(原平府) 북쪽 향양리(向陽里)의 언덕에 장사를 치를 때 사자(嗣子) 승지 후(詡)가 묘지명을 청하였다. 내가 일찍이 승지와 더불어 실로 두 차례나 동방(同榜)이 되었던 만큼 의리상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성은 허씨(許氏)요, 휘는 조(稠)요, 자는 중통(仲通)이니, 경상도 하양현(河陽縣) 사람이다. 먼 조상 강안(康安)이 서충(徐冲)을 낳고, 서충이 작린(綽麟)을 낳고, 작린이 신(愼)을 낳고, 신이 세통(世通)을 낳고, 세통이 혁부(赫富)를 낳고, 혁부가 득서(得諝)를 낳고, 득서가 휘 유(裕)를 낳았는데 벼슬이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성격이 엄하고 법도가 있어 삼가 가업(家業)을 지켰다. 그가 한양의 명망 있는 집안 판태복(判太僕) 한균(韓均)의 딸에게 장가들어 휘 유(綏)를 낳았는데,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로서 조용한 성격으로 물욕이 적었으며, 늘 의관을 갖추고 방에 단정히 거하였다. 그리고 시중(侍中) 문성공(文成公) 휘 안향(安珦)의 딸에게 장가들어 휘 윤창(允昌)을 낳았는데, 윤창은 엄격하고 정직하였으며, 감찰어사 전법전리좌랑(典法典理佐郞)을 거쳐 벼슬이 도관정랑(都官正郞)에 이르렀고, 대사성 휘 이직(李稷)의 딸에게 장가들어 휘 귀룡(貴龍)을 낳았다. 귀룡은 공손하고 민첩하며 관대하여 큰 도략이 있더니, 산기상시(散騎常侍) 판도판서(版圖判書)를 거쳐 봉익대부(奉翊大夫) 개성윤(開城尹) 상호군에 이르렀으며,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휘 이길(李吉)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낳았으니, 맏아들 주(周)는 자헌대부 판한성부사로, 시호는 간숙(簡肅)이요, 다음은 바로 공이요, 막내아들 척(倜)은 전 가선대부 중추원부사였다. 공이 홍무 2년 기유 4월 11일에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우뚝히 어른과 같았고, 조금 자라나서는 양촌(陽村) 권문충공(權文忠公)에게 학업을 배워 뜻을 가다듬어 학문에 힘쓰더니, 계해년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또 을축년 사마시에 올랐다. 무진년에는 음직으로 중랑장에 보직되었고, 경오년에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과 송당(松堂) 조준(趙浚)이 예부(禮部)에서 시험할 때, 공이 병과(丙科)에 뽑혔는데, 두 공이 매우 중하게 여겨 전의시승(典儀寺丞)이 되었었다. 임신년에 우리나라가 천명을 받자 특별히 좌보궐(左補闕) 지제교에 오르고, 얼마 안 되어 봉상시 승(奉常寺 丞) 지제교가 되었다. 이때에 예악(禮樂)이 흩어지고 태상(太常)의 관직이 폐지되자, 공은 폐습을 힘써 버리고 모두 전고(典故)를 따르게 하였다. 양촌(陽村)이 자주 말하기를, “훗날 우리나라의 예법을 주관할 이는 반드시 이 사람이리라.” 하였다. 계유년 5월 아버지 상을 만났고 명년 10월에 또 어머니 상을 만났다. 당시 풍속으로는 상례를 치르는 자가 불법(佛法)을 숭상하였는데, 공은 한결같이 문공가례(文公家禮)에 따라 슬픔과 예법이 함께 극진하였다. 우리나라 선비와 서인들이 가례를 따른 것은 모두 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정축년에 성균전부(成均典簿)가 되어 석전의식(釋奠儀式)을 수정 간행하여 중외(中外)에 선포하였고, 건문(建文) 기묘년에 두 번이나 좌보궐(左補闕) 지제교가 되어 엄연히 이름이 있었다.
경진년에 태종이 왕위를 물려받자 사헌잡단(司憲雜端)이 되어 국시를 논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렸다. 임금이 노하여 중형에 처하려고 친히 심하게 국문하였으나, 공이 항변하여 굴하지 않자, 임금이 그 강직함을 아름답게 여겨서 완산 판관(完山判官)에 좌천시켰다. 일을 맡 은지 몇 달 만에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병으로서 사직하였다.
임오년 가을에 이조 정랑에 결원이 생기자, 임금이 전선(銓選)이란 책임이 중대한데 마땅한 인재가 없자 친히 관부(官簿)를 검열하다가 공의 이름을 발견하고 이르기를, “적당한 사람을 얻었구나.” 하고는 곧 맡겼다. 겨울에 조봉대부 내서사인 지제교(朝奉大夫內書舍人知製敎)가 되었으니 역시 특명이었다.
영락(永樂) 계미년 가을에 일이 있어 영월군에 좌천되었는데, 겨울에 병으로 사임하였고, 갑신년 호군(護軍) 집현전직(集賢殿直)이 되었다가 을유년에 본직으로서 세자좌문학(世子左文學)을 겸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세자에게 묻기를, “관료 중에 누가 현명하냐?” 하니, 세자가 공을 거론하여 대답하였다. 병술년에 경승부소윤(敬丞府小尹)이 되었고, 정해년에 예문관직(藝文館直)으로 문학(文學)을 겸하였더니, 세자가 명 나라 서울에 갈 때, 중훈대부(中訓大夫) 사헌집의(司憲執義)로서 서장관에 보충하여 여행에 필요한 물품에 관한 일을 일체 담당하게 하였는데, 공이 약속이 밝고 명령이 엄격하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금령을 범하지 못하였다.
공이 명 나라로 조회하러 들어가자, 모든 제도에 관한 사안을 모두 물어서 상세히 기록하였다. 동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궐리(闕里)에 들러 선성묘(宣聖廟)에 배알하던 중 강도상(江都相) 동씨(董氏)와 노재(魯齋) 허씨(許氏)가 종사(從祀)되고, 양웅(楊雄)이 쫓겨 났음을 보고 모두 우리 조정에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무자년에 통훈(通訓)으로 판사섬시사(判司贍寺事)가 되고 세자우보덕(世子右輔德)이 되었더니, 세자가 듣고서 좌우에 말하기를, “허문학(許文學)이 다시 오느냐.” 하였으니, 이는 평소에 그 엄격함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이해 평양군(平壤郡)의 옥사가 일어나자 체포된 자가 실로 많았기 때문에 대관(臺官)이 이루 다 고문할 수 없었는데 무고하게 공을 이끌어 춘주(春州)에 귀양보내고, 얼마 안 되어 풀어 돌려보내서 경승부사윤(敬丞府司尹)이 되게 하였는데, 신묘년에는 통정 예조좌우 참의가 되었다.
공이 고려 말년에 오례의주(五禮儀注)가 실전되었음을 개탄하여 곧 당송(唐宋) 때의 전고(典故)를 인용하여 조묘(朝廟)의 예악과 서사대부의 상제(喪制)에 대하여 예법을 참작하고 현실을 시정하여 모두 찬정(撰定)하였으니, 이로부터 늘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의 제조(提調)가 되었다.
글을 올려 학당을 세울 것을 청하고, 뒤에 또 사부(四部)에 학교를 설립할 것을 청하자, 이를 모두 따랐다. 병조와 이조의 참의를 거쳤다.
갑오년에 공을 보내어 평안도의 산성을 순찰하고 모든 조치를 공의 의론에 많이 따랐으며, 임금 앞에서 평안도의 민생고를 진술하자 임금이 특히 조세를 면해 주었다.
그 뒤에 뵙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무술(武術)은 비록 폐할 수는 없었으나, 험준한 곳에 말을 달림이란 위태함을 측량할 수 없었으니, 전하께서는 친히 사냥을 하지 마소서.” 하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이어 강무장(講武場)이 너무 많은 폐단을 말하였더니, 임금이 그의 말을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을미년 봄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가선(嘉善)의 직계에 오르고, 겨울에는 예문관 제학이 되고, 병신년에 예조참판 봉상시제조가 되었는데, 봉상시의 일에 대하여 마음껏 지휘하고 계획하여 그릇된 점은 바로잡고, 폐기된 것은 회복하여 모든 일이 펴져 의식에 맞게 하였었다. 공이 말하기를, “경기도의 세금이 너무나 번거롭고 무거우므로 백성이 살 수 없다.” 하여, 양감(量減)할 것을 청하였고, 또 아뢰기를, “해군이란 국가의 울타리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공사만 생겨도 폐기하곤 하니, 돌보아 줄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정승이 되어서는 2ㆍ3차례 청하자 모두 따랐다.
무술년 봄에 개성유후사 부유후(開城留後司副留後)가 되었고, 또 경기도 관찰사를 겸하였더니, 여름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가을에 임금이 선위를 받자 공안부윤(恭安府尹)으로 가정(嘉靖)의 직계에 오르고, 얼마 안 되어 예조 판서로서 자헌(資憲)의 직계에 오르게 되어 공이 헌의(獻議)하기를, “집과 나라와 천하에 윤리가 있는 곳에는 각기 군신(君臣)과 상하의 명분이 없을 수 없거늘 근래에는 아랫사람으로 윗사람의 잘못을 엿보아서 조그마한 틈새라도 발견하면 이를 얽어서 고소하는 일이 예사이니, 이러한 풍속은 그대로 방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 당 태종 때에 종이 주인의 모반을 고발한 자가 있었는데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어 목을 베었으니, 이제부터 노예로서 주인을 고발하는 자는 이에 의거하여 처단하기를 바랍니다. 또 주문공(朱文公)이 효종(孝宗)에게 아뢰기를, ‘무릇 옥송(獄訟)에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범한 자와, 낮은 이로서 높은 이를 업신여기는 자는 비록 그 일이 옳았다 하더라도 돕지 아니할 것이요, 옳지 않을 때는 그 죄를 범인이 지은 죄 이상에다 둘 것입니다.’ 하였으니, 원하건대 이제부터 아전으로 관리를 고발하였거나, 부민(部民)으로 수령과 감사를 고발한 자는 그 일이 사직(社稷)이나 잘못 법을 적용하여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면 치죄하지 말 것이며, 무고한 자는 중한 죄로써 논하여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기풍을 막기를 바랍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기해년에 생원 성이검(成以儉) 등 1백 명과 급제 조상치(曹尙治) 등 33명을 뽑았고, 경자년에 생원 민원(閔瑗) 등 1백 명과 급제 안숭선(安崇善) 등 33명을 뽑았다.
신축년에 의정부 참찬이 되며 태종이 주상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참 재상이구료.” 하고는 풍양(豐壤) 이궁(離宮)에서 모시고 잔치하게 할 때, 태종이 앞으로 공의 어깨를 잡고 왕을 돌아보면서, “이는 나의 돌기둥이야.” 하자, 공은 놀라고 감격하여 눈물을 떨어뜨렸다.
임인년 5월에 태종이 돌아가자 대신이 백관에게 상례를 의론할 때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이미 장사를 지냈으니, 상복을 벗고 담복(淡服)으로 원묘(原廟)에 배제(陪祭)함이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공이 반박하기를, “군신은 한 몸이어늘 이제 왕의 효도가 돈독하고 지극하니, 상복과 수질(首絰)로써 3년을 지내시는데, 유독 여러 신하가 장사를 지냈다고 해서 길복을 입는 것이 옳겠는가. 일을 맡을 때는 담복을 입고, 모시고 제사를 올릴 때는 상복으로써 끝내게 하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마침내는 공의 의론을 따랐다. 명 나라에서 사제(賜祭)하였을 때, 사신이 백관들이 상복으로써 배제(陪祭)함을 보고서 예에 맞음을 탄복하였다. 공이 휘(諱) 신(辰)을 만나면 나물밥으로 재계하여 슬피 울었다.
그해 가을에 이조 판서로 구임법(久任法)을 세울 것을 청하되 경관(京官)으로서 돈과 곡식을 맡은 자는 3년으로 하고, 수령은 6년으로 하게 하고 또 청하기를, “옛날에는 죄인이라도 노비로 삼지 않았는데, 모든 법에 연좌되지 않은 자는 금고(禁錮)를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모두 따랐다. 계묘년에 정헌(正憲)에 승급이 되자, 공에게 명하여 《속육전(續六典)》을 수찬하게 하고 공이 말하기를, “이 책은 국맥(國脈)을 배양하는 근본이니 지나치게 까다로워서는 안된다.” 하고는, 당시 준엄한 법률을 모두 고쳐 법률대로 죄를 논하였다.
선덕(宣德) 병오년에 해결할 것을 구하였으나, 또 세자빈객이 되었고, 겨울에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간관으로 법을 범하여 장형(杖刑)에 해당한 자가 있거늘, 공이 아뢰기를, “간관은 임금의 이목(耳目)인 만큼 관대히 처리하기를 바랍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돈을 바쳐 속죄를 하게 하였다. 공이 매양 대간(臺諫)들의 견책을 입을 때마다 힘을 다하여 구출하였다. 정미년에 숭정(崇政)에 오르고, 무신년에 다시금 사직하였으나,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가 되었다. 상언(上言)하기를, “우리나라가 동북에 적이 있는 만큼 평화로울 때에 삼가 방비를 하여야 할 것이니, 먼저 연변에서 내지(內地)까지 성을 쌓아야 합니다.” 하고, 뒤에 또 수성전(修城典)과 선색(船色)을 두어 전적으로 성과 요새 및 전선을 다스리게 하니, 모두 따랐다. 기유년에 임금이 국학(國學)에 가서 선성(宣聖)을 뵙고 친히 학생을 고시할 때, 공으로 하여금 시권을 읽게 하여 급제 조주(趙注) 등 3명을 뽑았고, 경술년에 의정부 찬성이 되며, 임자년에 다시 이조 판서로 숭록(崇祿)의 직계에 올라 여러 차례 전형의 일을 맡았다. 공은 감식안이 공평하고 명백하여 한 벼슬자리를 보임하더라도 반드시 동료 관원과 더불어 상세히 품위를 정하여 제수하였기 때문에 뇌물이 없어지고 효자, 순손(順孫), 충신, 현인의 후예를 먼저 기록하였더니, 어떤 이가 말하기를, “어찌 효자와 순손이 이렇게 많을 수가 있겠는가.” 하니, 공은 “가끔 거짓이 있다 하더라도 풍속에 격려가 되지 않았는가.” 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공을 불러서 여러 신하 중에 누가 어질고 어질지 못한가를 물었는데, 당시의 이름 있는 사람들이 공의 추천에 의해 많이 등용되었으나, 공은 비밀에 붙이고 누설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계축년 봄에 임금이 장차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 이만주(李滿住) 등을 치려고 대신을 불러 의논을 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응당 쳐야 합니다.” 하자, 공이 반박하기를, “그 무리가 완강하여 한 번 원수를맺으면 대대로 보복할 것인 만큼 가벼이 칠 수 없습니다.” 하였더니, 뒤에 변장(邊將)의 계책을 써서 임금이 홀랄야인(忽剌野人)을 불러 무마하고자 하였다. 공이 또 반박하기를, “되놈의 풍속은 기뻐하면 사람 노릇을 하고, 화내면 짐승 같은 노릇을 하여 욕심이 계곡처럼 깊어 싫증이 없으니 불러 무마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모두 듣지 아니하였다. 공이 일찍이 도당(都堂)에서 일을 의논할 때 어명을 전하는 근신이 있기에 공이 아뢰기를, “옛날 태종께서 일찍이 해동청(海東靑)을 기르시다가, ‘이는 본보기가 될 수 없다.’ 하고는, 곧 놓아 주었으니, 이제 이미 중국에 바치지 않을 바에야 잡아서 기를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겨울에 판중추(判中樞)가 되었고, 을묘년에 본직으로서 지성균관(知成均館)이 되었다.
정통(正統) 병진년에 예조 판서를 겸임하였는데, 당시 과거시험에서 오로지 사장(詞章)만을 시험하기에 공이 경학(經學)을 일으키기 위하여 초장(初場)에는 경서를 강할 것을 여러 차례 청하였고 이때에 또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사년 봄에 묵은 병으로 물러갈 것을 청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전후 병으로 사직한 일은 기록하지 아니하였으나, 사직을 할 때마다 조회 참석을 면하여 주었다. 겨울에 공이 병이 더하자 임금이 내의(內醫) 두 사람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고 문병하는 자가 길에 이어졌다. 공이 억지로 병을 견디고 몸을 일으켜 주위 사람을 물리치고 상소문을 직접 초안을 작성하여 외환(外患)을 경계하고 겸손한 덕을 높이며, 정권을 중시하고 올바른 말을 받아들이며, 대신을 공경해야 할 것을 청하였으되, 말이 절실하고 곧았으나, 병이 위독하여 올리지 못하였다. 무오년에 진사 신숙주(申叔舟) 등 백 명과 급제 하위지(河緯地) 등 33명을 뽑았고, 여름에 의정부 우의정 영집현전경연감춘추관(議政府右議政領集賢殿經筵監春秋館) 세자부(世子傅)로서 대광보국숭록에 올랐다.
공이 일찍이 《가례(家禮)》에서 사대(四代)를 제사하는 것을 의거하여, 대부로서 고조(高祖)에게 제사할 수 있도록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왜인(倭人)이 바닷가 고을에 붙어 살면서 생선과 소금을 판매하는 자가 늘 몇천 명이나 되었더니, 여러 차례 아뢰기를, “그들은 승냥이와 같은 야심을 지니고 있으니, 모두 돌려보내야 합니다.” 하니, 이 의견을 따랐다. 겨울 11월에 큰 우레와 번개가 일자 공이 인책하여 면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기미년에 궤장(几杖)을 주고 곧 좌의정 영춘추관에 올랐으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겨울 10월에 병이 나니 임금이 또 의원을 보내 문병하는데 정사년보다 자주 보냈으나, 공이 병이 더욱 심하였다. 사직을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고 공의 아들 눌(訥)에게 특히 사온서 영(司醞暑令)으로 세 품급을 올려 주었으니, 이는 공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병이 위독하자 의원이 진찰하기를 청하였으나, 공이 사절하고 보지 않고 또 말하기를, “태평시대에 태어나서 태평시대에 자라서 태평시대에 죽으며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되 아무런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이 70에 벼슬이 수상에 이르러 좋은 때를 만나 하고자 하는 말을 다하였고, 소원을 이룩하였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지만 도승지를 보기를 원한다.” 하였다. 그 말이 위에 들리자, 도승지 김돈(金墩)을 시켜 가서 보게 하였더니, 공이 사람을 물리치고 비밀리에 말하였으니, 국가의 중대한 일들이었다.
처음 병이 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나라를 걱정하는 말이 입에 끊이지 않았고, 일찍이 한 마디도 개인적인 일은 언급하지 않고 편안히 서거하였다. 늘 자손에게 경계하여 상사(喪事)에 《가례(家禮)》를 따르라고 하였다. 부고가 이르자, 임금이 심히 슬퍼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곡을 하고 반찬수를 감하고 조회를 중지한 지 사흘이나 되었으며, 사신을 보내어 조문 위로하고 부의금을 중히 하였고, 동궁도 이와 같이 하였으며, 원근을 불구하고 들은 자는 모두 애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발인(發靷)할 때에 조정의 경사(卿士) 가운데에서 교외에 나간 자가 매우 많았으니, 공의 사후 영예는 유감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공의 성품은 바르고 크며 씩씩하고 맑고 삼가면서도 어질고 관대하였으며, 학문에는 염락(廉洛 정자ㆍ주자의 학문을 말함)을 거슬러 올라 수사(洙泗 공자)에 따르고 너무 해박함에 힘쓰지 않고 닭이 울면 일어나 단정히 앉아 날마다 《소학》과 《중용》을 읽어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여 밤이 깊어서야 잠시 취침을 하였다. 공은 서실을 경암(敬菴)이라 하고 평소에 수양이 깊고 말이나 움직임이 예법에 알맞게 하고 비록 창졸간에 일을 만났으나 법도를 잃지 않았으며,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제사받들 때는 성의를 다하였다. 공의 어머니께서 일찍이 친히 누에를 쳐서 옷을 지어서 주었더니, 공이 제사 때마다 입고서 당시(唐詩) 중의
인자하신 어머니의 손수 하신 바느질을 / 慈母手中線
이라는 한 연(聯)의 시를 외면서 슬피 울었으며, 또 자손에게 명하여 죽은 뒤에 이 옷을 반드시 습구(襲具)에 쓰게 하였다. 공은 형님을 아버지와 같이 섬기고 친족에게 어질게 대하였다. 공의 부인의 누이 하나가 일찍 과부가 되고 아들이 없어 병이 위급하자, 공의 아들로 후사를 삼고 재산을 모두 줄 것을 청하였을 때, 공은 사양하기를, “모름지기 형제에게 나누어 주어 천륜(天倫)을 돈독하게 하시오.” 하여, 10여 차례를 왕복하였으나, 마침내 듣지 않았다. 집안을 다스림에 예법이 있어 안팎이 화락한 기운이 어리고 엄숙하였으며, 더욱 벗에게 믿음이 있어 길ㆍ흉사가 있을 때는 조문과 부의 물품이 삼가하고 지극하였으니, 공이 윤리에 돈독한 것이 이와 같았다. 평생에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고 의복과 음식이 검소하여 흉년이 들면 온 집안이 죽을 먹었으며, 선비를 장진(獎進)하기를 좋아하여 장점은 드러내고 단점을 묻었으므로, 문전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으나 정성껏 접대하여 사람들에게 사랑하고 공경하게 하였다.
네 조정을 섬기되 국사에 대한 근심이 집안을 근심함과 같아서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부지런하였으며, 관가를 일으키거나 또는 일을 당해서도 근신하여 곧 처결하지 않고 심원한 계획을 세웠었다. 큰 의옥(疑獄)이 생겼을 때는 임금이 반드시 자문하여 결정하였으며, 모든 외교에 있어서는 국사의 기밀을 묻지 않은 사안이 없게 되고, 공도 역시 알고서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시정에 대하여 가부를 논할 일이 있다면 그 지위를 관계하지 않고 밤이 새도록 벽에 기대어 생각하고 생각해서 대면하여 간절히 진술을 하면 더러는 듣고 더러는 듣지 않았으나, 뒤에는 증험되는 일이 많았다.
농사에 힘쓰고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 뜻을 두었으며, 그 나머지로 고금의 일을 증거하여 여러 의논을 꺾고서 국시(國是)를 정한 일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급기야 정승이 되자, 더욱 임금을 돕고 백성에게 혜택을 입히는 것으로서 자기의 임무를 삼아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죽을 때까지 해이하지 않았으니, 그 충성과 부지런함이 이와 같았었다. 아, 슬프다. 공은 애초에 경륜의 재주에다 성리학으로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의논이나 정사에 있어서 대경대법(大經大法)과 큰 충절과 정직으로 광명하고 거룩함이 일세에 빛났으니, 이른바 재상 중에 참다운 재상이었다.
부인은 정숙부인(貞淑夫人) 박씨(朴氏)니 영해(寧海)의 대성(大姓)으로서 사헌부 대사헌 양정공(良靖公) 휘 경(經)은 아버지요, 도첨의찬성(都僉議贊成) 기공(奇公) 휘 유걸(有傑)은 외조였다. 성품이 밝고 엄숙하여 부녀자의 품절이 완비되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 후(詡)는 병오과(丙午科)에 장원하고 또 병진년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승정원 좌부승지 경연참찬관 보문각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수찬관 겸판군기감사 지형조사(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經筵參贊官寶文閣直提學知製敎充春秋館修撰官兼判軍器監事知刑曹事)였고, 다음 눌(訥)은 통선랑 사온서령(通善郞司醞暑令)이었고, 세 딸이 있었으니, 맏딸은 세자좌필선 최유종(崔有悰)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평산도호부사 정잠(鄭箴)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급제 윤미견(尹彌堅)에게 출가하였다. 승지가 판흥해군사(判興海郡事) 이흥문(李興門)의 딸에게 장가들고, 서령(暑令)은 호조 좌랑 민보문(閔普文)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조(慥)요, 다음은 담(憺)이요, 그 다음은 돈(惇)이요, 네 딸은 모두 어렸다. 필선(弼善)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경동(敬同)이요, 세 딸 중 맏딸은 예문관 검열 안철손(安哲孫)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유학 이극배(李克培)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유학 최윤문(崔潤文)에게 시집갔으니, 이는 같은 최씨가 아니었다. 평산(平山)이 한 아들 숙정(叔精)을 낳았으니, 서부녹사(西部錄事)였고, 세 딸은 모두 어렸으며, 급제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함(涵)이요, 다음은 증(徵)이었고, 두 딸에 맏은 선공감 녹사 황사친(黃事親)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어리며, 외증손(外曾孫)은 약간명이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저 하양을 바라보니 / 瞻彼河陽
현달한 허씨 집안 / 許爲顯姓
대대로 거룩한 분이 있어 / 世有偉人
덕과 행실을 삼가 닦았네 / 愼德飭行
그 복 후손에게 미쳐 / 委祉于後
문경공이 나셨다오 / 篤生文敬
훌륭한 문경공이 / 翼翼文敬
크게 그 경사 여셨네 / 大啓厥慶
얼음 같은 지조 / 冰蘖其操
법도에 맞는 행실 / 規矩其武
민락에 수레 달리고 / 騁軌閩洛
추로에 채찍을 날렸소 / 振策鄒魯
네 조정 섬기며 / 歷事四朝
배운 바를 즐겁게 펴셨네 / 樂攄所學
나라 경륜을 수놓고 / 黼黻經綸
제작으로 빛내었소 / 丹責制作
거북 아니어도 슬기로워 / 匪龜而智
위태하고 의심스러운 일 잘 결단하였고 / 折事危疑
거울 아니어도 밝아서 / 匪鑑而明
남의 선악을 잘 분간했소 / 辨人姸媸
옥찰과 우수 / 玉扎牛溲
한 약통에 쌓아 놓고 / 藥籠竝畜
재목 따라 골라 쓰니 / 隨材擇用
나라를 치료함에 모두 효과 있었다오 / 咸効醫國
조정에 빠진 정사가 있거나 / 朝有闕政
정사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 政有或秕
간담을 끝까지 피력하여 / 終始瀝膽
곧은 논의를 마지 않았소 / 讜論靡已
태종께서 충성스럽게 여겨 / 太宗忠之
나의 기둥이다 하였네 / 曰予柱石
지금 임금 정승 삼아 / 今聖相之
나랏일을 맡기니 / 畀以鈞軸
나라 경륜에 계획이 깊고 / 經邦謨遠
백성에 대한 사랑이 길었다오 / 澤民心長
갑자기 방아소리 멈추니 / 遽停相杵
저 푸른 하늘아 어인 일고 / 云何彼蒼
훌륭한 맏아들 / 欒欒元嗣
효심이 깊으니 / 圖永孝思
무덤에 명을 넣어 / 納銘玄墟
먼 장래까지 밝게 보이리 / 昭示無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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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락 : 정자와 주자를 말함.
◇ 추로 : 공자와 맹자를 말함. 여기서는 공맹의 도를 실천함을 뜻함.
◇ 갑자기 방아소리 멈추니 : 진(秦) 나라 정승 백리혜(百里奚)가 죽자 백성이 슬퍼하여 방아소리를 그쳤다는 데서 나온 말인데, 여기서는 문경공의 죽음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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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領集賢殿經筵春秋館事世子傅,贈謚文敬許公墓誌銘 幷序
[南秀文]
正統四年歲在己未冬十有二月壬寅。議政府左議政許公。以病卒于私第。年七十一。太常謚文敬。越明年春三月庚申。有司具儀衛。葬于原平府治比向陽里之原。嗣子承旨詡。請銘幽堂。余與承旨。實再同榜。義不可辭。謹按公姓許氏。諱稠字仲通。慶尙道河陽縣人。遠祖康安生徐冲。徐冲生綽麟。綽麟生愼。愼生世通。世通生赫富。赫富生得諝。得諝生諱裕。大將軍。性嚴有法。謹守家業。娶漢陽望族判太僕韓均之女。生諱綏。判典客寺事。恬靜寡欲。常具冠服。齋居一室。娶侍中安文成公諱珦之女。生諱允昌。嚴明方正。歷監察御史典法典理佐郞。官至都官正郞。娶大司成李公諱稷之女。生諱貴龍。恭敏寬厚有大度。歷散騎常侍版圖判書。卒官奉翊大夫開城尹上護軍。娶通禮門副使李公諱吉之女。生三子。長曰周。資憲大夫判漢城府事謚簡肅。次卽公。次曰倜。前嘉善大夫中樞院副使。公以洪武二年己酉四月十一日生。童丱嶷然如成人。稍長受業于陽村權文忠公。厲志力學。中癸亥進士擧。又登乙丑司馬試。戊辰以蔭補中郞將。庚午。獨谷成公石璘。松堂趙公浚試禮闈。公擢丙科。兩公甚器重之。丞典儀寺。壬申我朝受命。特除左補闕知製敎。尋丞奉常寺知製敎。時禮樂散軼。太常職廢。公務去因循。悉遵典故。陽村亟稱之曰。異日典禮我國者。必斯人也。癸酉五月丁外艱。明年十月又丁內艱。時俗治喪尙浮屠。公一依文公家禮。哀禮俱盡。我國士庶。遵用家禮。皆本之公。丁丑典成均簿。釐正釋奠儀式。梓布中外。建文己卯。再爲左補闕知製敎。謇然有直名。庚辰太宗受禪。拜司憲雜端。言事忤旨。上怒欲寘重典。廷詰甚厲。公抗詞不屈。上嘉鯁直。左遷完山判官。視事數月。治辦有聲。以疾辭。壬午秋。吏曹正郞缺。上以銓選任重難其人。親閱官簿。覽公名曰。得人矣。遂授之。冬除朝奉大夫內書舍人知製敎。亦特命也。永樂癸未秋。以事貶知寧越郡。冬辭疾。甲申起拜護軍。直集賢殿。乙酉以本職兼世子左文學。上甞問世子僚友孰賢。世子擧公以對。丙戌改敬丞府少尹。丁亥直藝文館。仍兼文學。世子朝京師。授中訓司憲執義。充書狀官。行李之事。一委糾察。公約明令嚴。人皆懾縮。莫敢犯禁。公入朝凡事涉制度者。悉問悉書。東還道闕里。謁宣聖廟。見江都相董氏,魯齋許氏從祀。楊雄被黜。皆建白于朝施行。戊子通訓判司贍寺事,世子右輔德。世子聞之。謂左右曰。許文學復來耶。蓋素憚其嚴也。是歲平壤君獄起。逮繫寔繁。臺官不勝栲掠。誣引公以爲證。坐謫春州。未幾賜環。拜敬丞府司尹。辛卯轉通政禮曹左右參議。公慨念麗季五禮儀注失傳。乃援唐宋典故。朝廟禮樂,士庶喪制。酌右損今。悉加撰定。自是常提調儀禮詳定所。上書請建學堂。厥後又請置學四部。皆從之。歷兵,吏二曹參議。甲午。遣公廵視平安道山城。凡厥措置。多從公議。面陳平安民生艱苦。上特减租稅。他日請見啓曰。講武雖不可廢。然馳騁險阻。危不可測。願上愼勿親獵。不覺流涕。因極言講武塲猥多之弊。上嘉納。乙未春。尹漢城府階嘉善。冬提學藝文館。丙申參判禮曹。提調奉常寺。奉常之事。悉心指畫。謬者正之。廢者擧之。巨細畢張。皆中儀式。公言京畿徭賦繁重。民不聊生。請量减。又言船軍國家藩垣。而今興一役。調廢不已。請加存恤。及爲相。再三陳請皆從之。戊戌春。開城留後司副留後。又兼觀察京畿。夏辭疾。秋上受禪。尹恭安府加嘉靖。尋判書禮曹階資憲。公獻議曰。家國天下。彝倫所在。莫不各有君臣上下之分。近來以下伺上。得一小釁。羅織告訴。此等之俗。漸不可長。昔唐太宗朝。有奴告主叛者。不受仍斬之。願自今臧獲如有告主者。倣此區處。又朱文公言於孝宗朝曰。凡獄訟。以下犯上。以卑陵尊者。雖直不右。不直罪加凡人之坐。願自今吏胥告官吏。部民告守令,監司者。所告非關社稷枉法殺人。則勿治。誣告重論。以杜陵上之風。允之。己亥取生員成以儉等一百人。及第曹尙治等三十三人。庚子。取生員閔瑗等一百人。及第安崇善等三十三人。辛丑參贊議政府。太宗謂上曰。斯人眞宰相也。侍宴豐壤離宮。太宗前公桂肩。顧謂上曰。此予柱石也。公驚感隕泣。壬寅五月。太宗賓天。大臣議百官喪制。衆曰。旣葬釋衰。淡服陪祭原廟便。公駁曰。君臣一體。今聖孝篤至。衰絰三年。獨群臣旣葬卽吉可乎。請治事服淡。陪祭着衰終制。上卒從公議。及朝廷賜祭使臣。見百官衰而陪祭。嘆其合禮。公遇諱辰。齋蔬悲泣。秋判書吏曹。請建久任之法。京官主錢,穀者三朞。守令六朞。又請古者罪人不孥。諸律不緣坐者。勿錮。皆從之。癸卯進階正憲。命公修撰續六典。公謂是書。乃培養國脉之本。不可苛刻。凡一時峻法。並改依律論罪。宣德丙午春求解。又爲參贊世子賓客。冬復判書吏曹。有諫官坐事當杖者。公啓諫官。人主耳目。乞優容。上命贖銅。公每當臺諫被譴。盡力救解。丁未進階崇政。戊申復辭。判中軍都揔制府事。上言我國東北有敵。宜及平安。謹修備禦。請先城沿邊。以及內地。後又請置修城典船色。專治城堡,戰艦。皆從之。己酉。上詣國學謁宣聖。親試學生。命公讀卷。取及第趙注等三人。庚戌。贊成議政府。壬子復拜吏曹判書階崇祿。累典銓事。鑑裁公明。補一官。必與僚佐詳品除授。關節屛蹟。孝子順孫,忠賢之㣧。率先甄錄。或謂烏有孝順。若玆多耶。公曰。閒雖有假。不已勵俗乎。上甞引問。群臣賢否。一時聞人。多其所擧。公秘不洩。人莫之知。癸丑春。上將討婆猪江野人李滿住等。召大臣議。衆曰當討。公駁曰。此輩頑梗。一與之讎。世世報復。不可輕擧。後因邊將策。上欲招撫忽剌野人。公又駁曰。獷俗喜人怒獸。谿壑無厭。請勿招撫。皆不允。公甞議事都堂。有近臣傳旨。公附啓昔我太宗。甞畜海靑。乃謂不可垂憲。卽命縱之。今旣不獻中朝。請勿捕養。冬判中樞。乙卯以本職知成均館。正統丙辰。兼判禮曹。時科擧專試詞章。公慨然欲振起經學。累請初塲講經。至是又請不允。丁巳春。以宿疾乞骸。批答不允。前後辭疾者不記。辭必命除朝參。冬公不豫。上遣內醫二人診療。存問交道。公力疾扶起。屛人手䟽。請戒外患。崇謙德。重政權。納直言。敬大臣。語頗切直。疾篤不果上。戊午取進士申叔舟等一百人。及第河緯地等三十三人。夏進拜議政府右議政領集賢殿經筵監春秋館世子傅。階大匡輔國崇祿。公甞援家禮祭四代。累請士夫得祭高祖。不允。先是島倭來寓濱海州郡。販魚塩者常數千人。屢啓狼子野心。請悉發還。從之。冬十一月大雷電。公引咎請免。不允。己未賜几杖。尋陞左議政領春秋館。餘如故。冬十月遘疾。上又遣醫問視。丁巳有加。公以疾彌留辭。不允。特官子訥司醞署令。超資三級。盖所以慰悅之也。病革醫請候。公謝不見。且曰生于大平世。長于大平世。沒于大平世。俯仰天地閒。浩然獨無愧。斯非吾所及。吾年七旬位首相。逢時盡言。克遂志願。死無遺恨。第願見都承旨。語聞命都承旨金墩往視。公辟人密語。盖國家重事也。自始病迨卒。憂國之言不絶口。未甞語及私。怡然而逝。常戒子孫。喪事悉遵家禮。訃聞上震悼。率百官擧哀。輟膳罷朝三日。遣使弔慰重賻。東宮亦如之。遠近聞者莫不痛惜。發引朝中卿士郊送甚盛。公之哀榮。可謂無憾矣。公天資正大而剛毅。淸愼而仁恕。爲學泝濂,洛。沿洙,泗。不務該洽。鷄鳴端坐。日誦小學中庸。精思力踐。夜分暫睡。題其室曰敬菴。克養有素。言動中禮。縱値倉卒。不失規矩。事父母克孝。奉祭祀盡誠。初母夫人。蠶衣製繅以賜公。祭輒衷服。誦唐詩慈母手中線一聯。悲泣。且命子孫。死必以襲。父事兄仁宗族。公夫人之妹。蚤寡無子。病亟。請以公子爲後。將悉致家貲。公辭曰。須分晜弟。以惇天倫。往復十餘。竟不聽。治家以禮。內外雍肅。尤信朋友。有慶弔問遺勤至。其篤於倫理者。多類此。生平不事生産。服食儉素。歲侵擧家啜粥。好奬進士類。暴長韜短。門無停客。開誠接納。今人愛且敬焉。歷事四朝。憂國如家。克勤夙夜。興官耆事。愼不輒發。商確深遠。有大疑獄。上必咨决。事大交隣國家機密。靡不詢問。公亦知無不言。遇時政有所可否。不嫌越位。終夜倚壁。計度不置。面敶剴切。或聽或否。後多有驗。若務農興學育材善俗。尤致意焉。其他證據今古。折群議定國是者。不可勝紀。及爲相益自以輔君澤民爲己任。憂國之誠。至死不弛。其忠勤如此。嗚呼。公本之以經綸之器。輔之以性理之學。故其發於論議。措諸政事。大經大法大忠大直。光明俊偉。炳耀一世。所謂宰相中眞宰相也。配貞淑夫人朴氏。寧海大姓。司憲府大司憲謚良靖公諱經其考也。都僉議贊成奇公諱有傑。其外祖也。性明以肅。壼儀克備。生二男。長曰詡。捷丙午科。又中丙辰重試及第。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經筵參贊官寶文閣直提學知製敎充春秋館修撰官兼判軍器監事知刑曹事。次曰訥通善郞司醞署令。三女。長適世子左弼善崔有悰。次適平山都護府使鄭箴。次適及第尹彌堅。承旨娶判興海郡事李興門之女。署令娶戶曹佐郞閔普文之女。生三男。長曰慥。次曰憺。次曰惇。四女皆幼。弼善生一男敬同。三女。長適藝文檢閱安哲孫。次適幼學李克培。次適幼學崔潤文。非一崔也。平山生一男曰叔精。西部錄事。三女皆幼。及第生二男。長曰涵。次曰澂。二女。長適繕工錄事黃事親。次幼。外曾孫若干人。銘曰。
瞻彼河陽。許爲顯姓。世有偉人。愼德飭行。委祉于後。篤生文敬。翼翼文敬。大啓厥慶。冰蘖其操。規矩其武。騁軌閩洛。振策鄒魯。歷事四朝。樂攄所學。黼黻經綸。丹靑制作。匪龜而智。折事危疑。匪鑑而明。辨人姸媸。玉扎牛溲。藥籠並畜。隨材擇用。咸効醫國。朝有闕政。政有或秕。終始瀝膽。讜論靡已。太宗忠之。曰予柱石。今聖相之。昇以鈞軸。經邦謨遠。澤民心長。遽停相杵。云何彼蒼。欒欒元嗣。圖永孝思。納銘玄墟。昭示無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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