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의 국보와 보물 원문보기 글쓴이: 광나루
보물 1818호(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written by 한국의 국보와 보물 |
서울 성북 보타사-NEW |
▲ 보타사 자료를 만드지 10년이 되었고 최근에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있어서 다시 자료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
‘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서울 普陀寺磨崖菩薩坐像)’은 개운사의 암자(칠성암)인 보타사 대웅전 뒤쪽 암벽에 조각된 상이다. 전체적으로 넓은 어깨에 양감이 강조되어 신체가 당당한 모습이다. |
▲ 안암동 보타사는 서울 답사 행사로 1년에 한 번 정도는 갑니다. 보물 지정되었다는 플래카드가 보타사 입구에 걸려 있습니다. |
▲ 보타사를 들어서면 정면에 대웅전이 위치하고 있으며, 대웅전 좌우로 요사채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
머리는 보관을 쓰고, 천의를 걸친 채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아래쪽으로 내리고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편으로 좌우로 길게 뻗은 눈, 초승달 모양의 눈썹, 높게 솟은 콧등이 특징적이다. |
▲ 최근에 대웅전 뒷편을 트고 벽면을 유리로 교체하여 내부에서 대웅전 뒷편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을 볼 수 있습니다. |
보관은 높은 편인데 좌우로 관대가 돌출되고 보관 장식이 아래쪽으로 길게 늘어진 모습이다. 이러한 표현은 보물 제1820호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에서도 확인된다. |
▲ 보타사 대웅전 내부를 들여다 본 모습 |
▲ 대웅전 뒷편의 마애불로 가 봅니다. 마애불을 잘 볼 수 있도록 데크도 설치하고 대웅전 뒷편과 마애불 주변을 정비하였네요... |
▲ 예전에는 대웅전 뒷편 공간을 늘렸었는데(좌측 사진) 최근에 뒷편을 정리하고 유리로 교체한 모습입니다. |
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보물 1828호) |
▲ 예전 명칭은 보타사 마애불이었는데 보물로 지정되면서 '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으로 명명 |
이 상과 관련한 기록은 현재 전하는 것이 없지만 마애보살좌상 왼편에 새긴 신중패(神衆牌)가 조성시기 추정에 참고가 된다. 이 상은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함께 여말선초에 유행한 보살상의 한 형식을 보여주는 뛰어난 예이다. |
▲ 보타사 마애불 전경. 백불이어서 주기적으로 호분 칠을 해야 하는데 호분 칠을 한지 10여년 가까이 된 것 같습니다. ▼ |
|
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상(보물 1818호) |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모습 |
‘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상(서울 普陀寺金銅菩薩坐像)’은 왼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 바닥을 딛고 오른쪽 다리의 무릎을 세워 앉는 유희좌(遊戱座)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유희좌는 중국 북송대부터 유행하여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에 유행하기 시작하여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
▲ 금동보살좌상은 대웅전 좌측 요사채 내부에 모셔져 있습니다. 앉은 자세가 도발적인 모습입니다. ▼ |
|
통통한 뺨, 반개한 눈, 작고 아름다운 입술 등에서 여성적인 면모가 느껴지는 보살상의 얼굴 표현과 조선 전기 금동상으로는 규모가 큰 점에서 조선초 왕실이나 지배층이 발원한 상으로 판단된다. 어깨에 천의(天衣)를 숄처럼 걸치고 그 한 자락을 수직으로 늘어뜨리고 있는데, 국보 제221호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등 조선 초기 보살상에서 볼 수 있는 착의법이다. 또한 이 상은 보존 상태가 양호할 뿐 아니라 조선 초기에 중앙에서 유행했던 귀족적인 보살상 형식을 보여주는 예로, 조선시대 불교 조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
영철 버거는... |
▲ 보타사 갔다 나오면서 고대 주변에서 유명한 영철버거 한 개(1,000원에 음료 무한리필)씩 먹었었는데 한 동안 잘 나가더니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서 부도가 났는데 고려대 재학생/졸업생들의 클라우드 펀딩으로 다시 재기 중입니다. 최근 매장 방문 사진... ▼ |
|
서울 성북 보타사 위치도 |
지도 좌측 하단 개운사 입구 사거리에서 빨간선을 따라가면 끝 지점에 보타사가 위치.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안암동5가 7 |
지도 중앙 상단의 A 지점 위에 보타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변 지하철역들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