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붉은 빛을 띠고 있는 적송의 가지가지에 새하얀 눈이 수북이 쌓여 있는데, 그건 마치 붉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네들이 하얀 쓰개치마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었어요.
눈을 이리저리 부벼봐도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요. 그때 알았습니다. 아, 결국 이곳이 나를 데려다 살게 하겠구나, 하고 말예요. ”
안면도는 원래 섬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육지와 맞닿은 반도였는데, 조선 인조 때 이곳 지방의 뱃길을 좀더 이롭게 하려고 지금의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 신온리 사이를 갈라놓아 결국 섬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안면도에 가게 되면 볼 것이 많습니다. 한번 보고 ‘좋다.’라고 외치는 정도가 아니라, ‘처음 보는 것들이라 아주 좋다.’라고 외칠 지경의 대단한 풍물들이 많습니다.
안면춘란, 새우란, 해당화까지 거론하지 않아도 당장 해안선을 따라 완만하게 펼쳐진 황금빛 모래와 맑은 물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그 모래와 물 사이엔 크고 작은 기암괴석들과 작은 무인도들이 봉곳하게 올라와 있습니다. 해질 무렵 붉게 물든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해를 보노라면 세상천지에 이런 곳이 있었는가 싶은 정도입니다.
하지만 모래, 물, 붉은 구름, 해... 이런 것은 그저 안면도의 사족일 뿐입니다. 이것들은 단 하나의 안면도 명물을 조금이라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소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안면도의 가장 큰 아름다움은 사실 다른 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적송(赤松). 안면도의 큰길을 따라 죽 뻗은 몸채로 꼿꼿이 서있는 적송숲을 본 사람이라면 단연, 안면의 아름다움은 적송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안면의 소나무는 특별히 칭하여 안면송이라고 부른 것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안면도 중에서 안면읍의 적송림은 특히 전국적으로 유명합니다. 이곳에서 나는 적송 목재는 일찍이 고려조 말기에서부터 조선조까지 대궐이나 사찰 등을 짓는데 최고의 목재였다고 합니다.
바로 이곳 안면읍에 도시인으로 살다가 이 적송에 이끌려 신선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빛 맑은 아내와 함께 수염이 하얗게 되도록 농사를 짓고, 적송을 가꾸는 재미로 살고 있는 손창섭씨 내외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적송림이 안면도로 유혹하다
보통의 경우 해안지방에는 해송(海松)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독 안면도는 해송이 아닌 적송(赤松)이 있습니다. 손창섭씨가 노후의 안락을 이곳 안면도로 선택한데에는 이 적송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나라의 공기 좋고 물 좋다는 곳은 두루 다니며 고기를 낚고, 세월을 낚는 것으로 중년의 여가를 보냈다는 손창섭씨는, 어느 겨울인가 안면도의 적송이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눈이 많이 내린 어느 여명, 낚시도구를 차에서 내리려 하는데 멀리 보이는 적송숲의 멋진 풍경에 넋을 잃어 낚시도구를 내리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온통 붉은 빛을 띠고 있는 적송의 가지가지에 새하얀 눈이 수북이 쌓여 있는데, 그건 마치 붉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들이 하얀 쓰개치마를 쓰고 있는 모습이었어요. 눈을 이리저리 부벼봐도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때 알았습니다. 아, 이곳이 나를 데려다 살게 하겠구나, 하고 말예요. ”
손창섭씨는 그때의 강렬함을 못 잊어, 지금도 집 앞 조경을 할 때 가장 힘을 들이는 부분이 적송 정원입니다. 실제, 손창섭씨가 살고 있는 주택 거실에서 앞 마당쪽 창을 바라보면 잘 가꾸어진 적송 여섯 그루가 보입니다. 그 여섯 그루는 가장 몸매가 빼어난 것을 그가 직접 골라 심어 놓은 것입니다. 지금도, 손창섭씨는 그 여섯 그루의 적송을 다듬을 땐 그 적송에게 소리내 묻는다고 합니다.
‘대답해 다오. 도시인으로 자라온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 이처럼 농부의 모습으로 바꿔버린 이유를... 여인네의 속삭임처럼 이곳 안면도로 나를 유혹한 그 이유를....’
도시에서 걸린 병, 시골에서 낫다
손창섭씨는 원래 서울 양재 사람이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경치좋은 곳에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서 노후를 좀더 안락하게 보내거나, 예술 활동을 왕성하게 하여 좀더 창의적인 창작을 하고자 시골 한 켠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쉬운데, 손창섭씨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작은 택시회사에서 부장직책을 가졌던 게 손창섭씨의 서울생활 가장 높은 직책이었습니다. 손창섭씨는 그저 흙을 만지고, 나무를 보듬고, 모래사장을 걷고 싶었을 뿐입니다.
큰 개들이 아침 햇살에 졸린 눈을 못참고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직접 재배한 고추를 말려서 만든 고추장으로 참기름 들기름 썩어 밥을 먹는 게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던 차 늘그막에 아내를 설득해 평소 점지해 뒀던 이곳 안면도로 이사를 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라온 아내에게 시골생활은 공포자체였습니다. 길들여진 도시문화를 모조리 버리고 새하얀 피부를 태워가며 흙을 밟고 채소를 길들인다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안면도에 터전을 잡고 산지 1년, 아내의 심경에 격렬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도시에서 잘못 만들어진 몸이 이곳 안면도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도시에 살면서 천식을 앓아왔습니다. 좋다는 병원은 다 다녀보고,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지만 본시 도시생활에서 잘못 만들어진 몸이기 때문에 나을 리 만무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습니다. 목이 아프고, 참을 수 없는 기침이 계속 나왔던 이유가 도시의 먼지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는 몰랐습니다. 안면도에 온지 불과 1년도 안돼 아내는 병원에 다니지도 않고 약도 쓰지 않았는데 병이 낫는 것에 자신의 병은 시골의 맑은 공기만이 영약이 됨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내는 이제 서울로 돌아갈까 하고 농담하듯 물어보면 질색하며 손사래를 쳐댑니다.
농사지어 돈벌고, 곁가지 팬션일로 돈 벌고
서울에서 오래 살아왔으니 서울에서 돈버는 방법을 알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시골에서 살아오지 않았으니 시골에서 돈 버는 방법을 모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손창섭씨는 돈을 벌기위해 안면도로 온 게 아니랍니다. 그렇다면, 무얼 해서 먹고 사느냐 물었습니다. 손창섭씨는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좀더 익숙해지면 농사짓고 먹고 살거라 대답합니다.
턱없이 부족하면서 어제는 무엇을 먹었고, 오늘을 무엇을 먹고, 내일은 무엇을 먹을 것이냐 다시 물었습니다. 손창섭씨는 벌어 논 돈을 조금씩 쪼개서 먹고, 틈틈이 손님이 하루 이틀 묵으면서 돈은 던져주면 그걸 가지고 먹고 산다고 합니다. 소위 말하는 전문 펜션업을 하고 있는 것이냐 물었더니 그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냥, 이곳 경치에 홀려 하루밤 묵게 해 주다가 어찌어찌 팬션 일을 하게 됐을 뿐이라고 합니다. 펜션업이 아니라 곁가지 펜션일 일 뿐이라고 합니다.
시골에서 겨울꽃 키우기와 고추말리기
손창섭씨는 처음 이곳에 와 시골의 생활방식을 몰라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혹시,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내려와 살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제대로 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실패한 시골생활 하나를 넌지시 전해줬습니다.
“겨울 농사를 지어보려고 비닐하우스를 손수 지었는데 그거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 딴엔 바람에도 쓸리지 않고, 눈에도 내려앉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비닐하우스를 만들어서 꽃을 심었는데 어찌된 것인지 다 죽어 버렸습니다. 알고 보니, 그런 농사는 비밀하우스 안에 또 다른 비닐하우스를 만들어서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붉은 고추를 그냥 햇빛에 말리면 잘 건조해 져서 먹을 수 있게끔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비닐하우스를 이용해서 말려야 했던 것입니다.”
손창섭씨는 이 말을 하며 입맛을 다셨습니다. 못내, 지난날의 시행착오가 꽤나 아쉬웠던가 봅니다. 조금만 공부를 하고 내려왔다면 촌스런(?)일을 멋지게 해 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인 듯 합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한해가 지나면 그 지나온 시간만큼 손창섭씨는 시골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살기위해서라도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산장아저씨처럼 멋들어지게 수염을 기른 손창섭씨의 내년 농사를 기대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