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5장은 유대지도자들과의 논쟁으로 시작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빵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은 걸 보고 관습을 어긴 행위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그들의 지적에 대해 예수님은 이런 논리를 펴십니다. ‘율법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규정도 있고, 부모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규정도 있는데, 너희는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부모에게는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다. 그건 관습을 빌미로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십니다. 10~11절을 보겠습니다.
10 예수께서 무리를 가까이 부르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듣고 깨달아라.
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이어서 17~20절도 보겠습니다.
17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뱃속으로 들어가서 뒤로 나가는 줄 모르느냐?
18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19 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오는데, 곧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다.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예수께서 지적하신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잘못을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우선 종교적인 의무를 핑계로 부모공경의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문제는 단지 위생상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식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지적한 것은 왜 의식을 제대로 지키지 않느냐고 따진 것이고, 이에 대해 예수님은 종교의식을 지키는 행위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고 헌금 많이 내는 신앙의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인의 마음 자체이고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악한 생각을 다스리지 않고 겉으로 하는 종교의식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마음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다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21~28절을 보겠습니다.
21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22 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에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4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26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시니,
27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28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야,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때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한 가나안 여인이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쳤답니다. 가나안의 평범한 여인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마도 이 고백은 가나안 여인의 고백이 아니라 마태복음서 기자의 고백일 것입니다. 이 본문의 원본인 마가복음에는, 이 여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유대인들에게 알리는 것이 마태복음의 주목적이기에 원본에는 없는 표현을 마태복음 기자가 덧붙였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수님답지 않은 말씀을 연이어 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포기하지 않고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며 그의 딸을 고쳐주셨답니다.이 본문에 기록된 그대로 예수께서 실제로 말씀하셨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방인에 대해 이 정도의 거부감을 가졌던 분이 여인의 말 한 마디에 감동을 받아 태도를 바꾸었다는 건 개연성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격한 표현을 쓰셨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일반적으로 ‘주께서 여자를 시험하시려고’ 라는 기록이 이어지는데, 본문에는 그런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본문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던 초대교회가 이방인에게 문을 열게 된 계기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아직 이방인에 대한 거부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문이 열리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기존의 유대교와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고, 세계종교로 발돋움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5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예수께서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셨다는 기록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32~38절을 보겠습니다.
32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저 무리가 나와 함께 있은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 그들을 굶은 채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33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인데, 이 많은 무리를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무슨 수로 구하겠습니까?"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기를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니, 그들은 대답하기를 "일곱 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물고기가 몇 마리 있습니다" 하였다.
35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서,
36 빵 일곱 개와 물고기를 손에 드시고, 감사를 드리신 뒤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37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런 다음에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
38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밖에도, 남자만 사천 명이었다.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이 기록이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와 같은 사건이냐 다른 사건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쓰여진 문자 그대로 모두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래도 좀 열려있다는 사람들은, 같은 사건인데 전달 과정에서 약간 변형되어 두 가지 기록이 모두 담기게 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쨌거나 오병이어 이야기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런 일이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다고 믿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자연법칙을 깨뜨리는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도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많은데, 그런 분들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합리적인 사고와 논리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