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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리스도께서 비추시리라
(에베소서 5:1~14)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빛이시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하면서 ‘빛’이라는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요한일서 1장 5절에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하였다. 수학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과 빛을 똑같이 놓고 한 말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빛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하나님을 유추하도록 한 말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에서 제일 처음 창조하신 것이 빛이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창조는 빛으로 시작한다. 빛이 있어야 볼 수 있다. 우리는 태양빛 아래서 사물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보고 있다. 태양빛은 창조의 넷째 날 만들어진 것인데 첫째 날 창조하신 빛은 무엇인가? 이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게 하는 빛이다. 빛이 있어야 둘째 날, 셋째 날……,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볼 수 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를 ‘빛’으로 소개하였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하였다. 빛이 세상에 왔다고 증거하였다.
예수님 자신도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하셨다. 하나님도 빛이시고 예수도 빛이신데 예수는 무엇을 보게 하는 빛인가? 이것이 오늘 말씀드리려는 주제다.
눈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볼 수 없다. 빛도 있어야 하고 눈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빛이 비치는 것을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눈이 있어야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을 인식이라고 한다. 빛이 비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하지만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다.
이 인식의 한계, 즉 하나님이 줄로 재어준 구역, 내게 눈을 열어서 보게 하신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실로 아름답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일생 하나님 얘기를 하고 예수 얘기를 해도 “나는 하나님을 잘 모른다. 예수를 잘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이다. 좀 알았다 해서 다 알았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일생 이것을 추구해 왔지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것이 진실이다. 하나님은 빛이시지만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는 좁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셔야 우리가 그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경험 안에 들어온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감사하고 살게 된다.
빛이 비치면 어두움이 물러간다. 어두울 때 일은 다 사라지게 된다. 밤길을 걸으면서 부딪치고 넘어졌던 일들은 빛이 비치는 낮에는 일어날 수 없다. 요한복음에서는 죄를 어두움의 현상으로 보았다. 죄는 어두워서 생긴 일이다. “너는 왜 그랬느냐?” 하고 탓할 일이 아니라 빛이 없어서 생긴 일이라고 인식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 대해서나 나면서 소경된 자에 대해서나 누구를 탓하지 않고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잘못을 고치라고 하지 않고 자신을 비추셨다. 실족하고 부딪히는 일은 어두움에서 생긴다. 빛 안에 있다 보니 실족하고 부딪히는 어두움의 일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빛이 환히 비치면 어두움의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빛이시다.”라는 말은 어떤 도덕 교과서보다 분명하고 강렬한 말씀이다.
회개(悔改)가 뉘우치고 고친다는 의미라서 행동을 고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헬라어의 회개(메타노에오)는 마음을 바꾼다는 의미다. 메타는 ‘뒤로 돌아선다’, 노에오는 ‘안다’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앞을 보고 있다가 뒤로 돌아서면 우리에게 전혀 다른 것이 보인다. 다른 것이 보이면 다른 것을 알게 된다. 돌아서서 알게 되는 것, 이것이 회개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했는데 이것이 회개다.
빛의 열매
요한복음은 말씀, 빛 등으로 예수를 증거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방의 사상과 구별되지 않았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빛이 비친다는 것이 세상에도 있을 수 있고 다른 종교에도 있을 수 있다.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며 로고스가 있었다고 했는데 ‘로고스’는 이미 헬라 사람들이 ‘말씀, 이성’이라는 의미로 쓰던 말이다. 그렇게만 말해서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을 수 없다.
요한은 예수를 말하려고 로고스라고 한 것인데 예수를 말씀이라고 해도 오해가 생기고 빛이라고 해도 오해가 생긴다. 그래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 이것을 빛 안에서 보니까 진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게 하시려는 것이 이것이었다고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말씀만으로, 빛만으로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보니까 ‘이것이 바로 독생자의 영광이구나. 아버지께로 나온 바로 그 영광이구나.’라고 알게 되는 것이다.
1990년에 대구에 내려왔을 때 1989년부터 울산교회가 아주 뜨겁게 시작되어 있었다. 그 전에 대구에서는 목사님이 그리스도인 줄 알고 사는데 울산 형제들은 그것을 넘어서서 “나도 그리스도고 너도 그리스도다.”라며 서로 황기름, 정기름, 이기름으로 부르면서 교제를 했고 대구에 와서는 “이 좋은 말씀을 듣고 대구 형제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며 호통을 치는 분위기였다. 너무 뜨거워서 나는 소화가 잘 안되어 목사님을 찾아가서 물었다. “황기름, 정기름, 이기름은 무엇입니까?” 목사님은 “그러게 말이야. 형제들의 거친 표면 때문에 걸리는 형제들이 있다. 나도 그러했고 나를 통해서 온 형제들도 처음에는 모든 것을 알만큼 환한 빛이 비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 빛 안에서 모든 것을 알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것은 밖에서 비친 빛이기 때문에 사라지게 된다. 모든 것을 다 안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모르겠고 캄캄해지고 자기도 답답하고 다른 사람도 답답한 때가 온다. 그런데 또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처음에 본 것이 내 속에서 하나 하나 보여져서 한 마디 한 마디를 해도 자기 자신으로 말하는 사람이 된다. 그때는 권세가 있고 아무도 아니라 할 수 없는 말을 하게 된다.”라고 대답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나에게서 이런 저런 문제가 다 정리되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에게 빛으로 보여진 그것이 우리 자신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를 다루시고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빛이 있으라.” 하신 것이 끝이 아니라 그것이 시작이 되어 사람이 드러남으로써, 사람이 지어짐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세상에 왔다.”고 했는데 이 빛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써 이 증거가 온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마치 씨가 땅에 떨어져 열매가 되어 씨를 온전하게 증거하는 것처럼 씨 안에는 모든 것이 있지만 땅을 통해 그 씨가 표현됨을 통해서 씨의 증거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 육체 속에서 모든 것이 판가름난다. 하나님도 말씀이시고, 사탄도 우리에게 어떤 말로 우리 속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진리인가? 말만 가지고는 드러나지 않아서 다툼밖에 안 된다. 그런데 그 씨가 땅에 떨어지면, 육체 속에 드러나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나타나는지, 아니면 세상의 영광이 나타나는지가 드러난다.
하나님도 빛이시지만 창세기 3장에 보면 사탄도 빛이다. 사탄은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하였다. 선악과를 먹어도 눈이 밝아진다는 것이다. 빛이 비쳐도 보게 되지만 선악과를 먹어도 눈이 밝아진다. 이 둘이 어떻게 다른가?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선악과를 먹고 나면 남의 눈에 티가 잘 보인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하시며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셨다.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선악과에 대한 경고라고 볼 수 있는데 정말 생명이 있다면 내 눈에 티가 괴롭지 남의 눈에 들보가 있다 해서 괴롭겠는가? 선악과가 비치면 다른 사람이 잘 보인다. “너는 왜 그러냐?” 하게 된다. 그러나 생명 안에서 생명의 빛이 비치면 우리 자신이 발견되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내 손으로 만든 것은 다 헛것이구나. 빛이 비치면 말라비틀어질 것이구나.’라고 알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빛이 비칠 때 우리 자신에게서, 하나님이 주신 육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영광으로 나타나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하게 된다. 이런 결과로 우리에게 드러날 때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된다.
씨는 열매가 될 때 그 씨가 무엇인지 온전히 증거된다. 창조는 빛에서 시작하지만 사람이 드러남으로써 완성되었다. 마찬가지로 에베소서 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시리라.” 하신 말씀은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케 하신 영광스러운 신부”로 완성된다. 그리스도께서 비추신 것으로 끝이 아니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신다. 그리스도가 비칠 때 우리에게 어떤 결과가 오는가? 우리가 영광스러운 교회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9절에는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 하였다. 착함이라는 말은 선이라는 말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의는 좋은 일,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다. 로마서 3장 21절에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했는데 공동번역에는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진실은 인생에게 정해진 올바른 위치이다.
빛의 열매는 선과 의와 진실로 드러난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내가 즐거워하면서 하는 일이 되고, 올바른 관계에 놓인 사람이 되고 올바른 위치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빛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결과들을 말하는 것은 우리가 빛 안에 있다면 선이든, 의든, 진실이든 어떤 잣대를 들이대도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은 도덕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의 어떤 착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잣대를 들이댄다 해도 우리는 세상이 볼 때 아무도 아니라 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진 사람이 된다. 그것이 빛의 열매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비추신다
14절에는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였다.
오늘 김영관 형제님 가족이 부른 노래는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춰 봐도.” 하며 고래 잡으러 가자는 유행가와 같은 가락인데 노래방에서 부른 것과는 다르다. 하나는 어둠 속에서 한 것이고 하나는 빛이 비쳐서 한 찬송이다. 그리스도께서 비추셔서 같은 노래가 전혀 달라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비춰 주시는가? 바울은 예수에 대해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 3절에서 ‘빛이 있으라.’ 하신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빛이다.
이 빛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빛이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서 반사되어 비치는 그 빛은 하나님이 지으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그 사람을 알게 하고, 동산 안에 있던 사람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축복인가를 알게 하는 빛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존재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빛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지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이 영광이 예수의 얼굴에 비추어 우리가 그를 보니까 ‘우리 존재가 저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는 존재구나.’라고 우리 존재의 가치를 알게 되고, 우리가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럽고 만물 앞에 권세 있는 존재인가를 알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하였다(고후4:7). 전에는 질그릇밖에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나는 흙으로 만든 그릇이다. 이것을 어디에 쓰겠느냐!”라며 한탄했는데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보고 나니까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속에 가졌다.”고 하게 되었다.
질그릇밖에 볼 수 없었던 사람이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질그릇 안에 담겨진 보화를 보게 되었다. 보화가 담긴 것을 보고 질그릇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고귀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려는지 알면 어두움 가운데서 사사로운 탐심을 가질 수 없고 헛된 영광을 꿈꾸지 않는다.
질그릇 안에 담긴 보화, 이것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흙으로 지었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되도록 지으신 이 영광을 보게 된 것이다.
8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 교회 사랑방에는 무슨 말이든 다 쓸 수 있으니까 목사님을 찬양하는 도가 넘쳐서 목사님을 하나님이라 하기도 하고 ‘보혜사 성령이신 목사님’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어떤 사람이 보고 놀라서 이것을 캡처해서 6-7만 명이 모이는 카페에 공개해서 발칵 뒤집혀지는 일이 있었다. 내가 답변을 하게 되어 “다 개인적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자신이 그렇게 느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대답했지만, 그들은 불충분하다며 이현래 목사님께서 직접 답변하실 것을 요구했다. 공개질의서를 보내서 “대구교회에서는 목사를 신격화하느냐? 어떻게 해서 목사를 성령이라고 하는 소리까지 나오느냐?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을 왜 제재하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목사님은 자기 마음을 담아서 답변을 쓰셨고 그 내용이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있다.
“나는 말하나 안하나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사와 신도 관계가 아니라 가족같이 지냈습니다. 나는 오라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찾아갔지만, 전도하러 다닌 것도 아니고 교세를 넓히려고 다닌 것도 아니고, 내 가족 내 형제를 찾아서 다녔습니다. 20년을 그렇게 다니며 살았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 형제들을 제재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 말라고 했고 심지어는 그런 말을 하느니 차라리 나에게 돈 만원을 헌금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런 말이 또 나오느냐는 문제이지요. 나는 10년을 목회했는데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워치만 니를 알게 되었고 ‘주의 형상을 닮아’라는 책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백 세, 눈이 먼 이삭, 어쩔 수 없이 자기를 다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야곱, 그리고 팔십 세의 모세……,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들을 원하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나에게 생수와 같았습니다. 복음이었습니다. 나는 길을 돌렸습니다. 능력이 있어야 되는 길에서 인격이 있어야 되는 길로, 지식이 있어야 되는 길에서 생명이 있어야 되는 길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던 길에서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길로, 내가 나를 채찍질 하는 길에서 주님이 나를 다루시는 길로 ...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 같았습니다. 내 말이 없어지니까 하나님 말씀이 나왔고, 내 손이 없어지니까 하나님 손이 나타났습니다. 우편배달부의 사역에서 주님의 편지의 사역으로, 먹으로 종이에 쓴 사역에서 영으로 심비에 새기는 사역으로, 생명과 신분이 전환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나는 내가 아직 모르는 것, 경험이 없는 것, 실제로 알지 못하는 것은 전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질그릇에 보화를 가졌습니다. 나는 보화를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이 보화만 보고 좋아했고 어떤 사람들은 질그릇만 보았습니다. 물론 내 증거가 부족해서 그렇겠지만 처음부터 다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가면 형제들이 질그릇과 보화를 다 같이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인생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옥석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교리를 분명히 하려하지 않고, 질그릇과 보배를 분명히 할 것입니다. 나는 보배를 더욱 빛나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사람들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질그릇일 뿐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셨다.
나에게는 이것이 완전한 대답이 되었고 우리가 세상에 내놓을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진 보화, 그것은 우리 인생이 능력의 세계에서 인격의 세계로, 지식에서 생명으로, 하나님의 다루심 안에 있는 세계로, 하나님이 찾아오신 세계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이 축복을 우리가 세상 앞에 전하는 것이니까 이 보화를 전하면서 질그릇 안에 이 보화를 담았다는 것을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릇이 너무 찬란하면 오히려 보화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요즘 포장지가 너무 좋아서 화장품을 담은 통을 보면 보석상자 같다. 통을 버리기 아까울 정도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질그릇에 보화를 담으셨기 때문에 언제라도 보화가 드러나도록 하신다.
‘질그릇에 보화를 가졌다.’ 이것이 다른 말로 성육신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은 규화목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규화목이 되어 버리면 나무인지 돌인지 모르게 되지만 우리는 언제까지나 질그릇에 보화를 가진 사람이다. 그릇에 보화를 담은 사람이고 밭에 씨가 뿌려져서 열매가 난 사람이다. 열매를 거두어 가면 우리는 다시 밭이다. 보화를 드러내고 나면 우리는 바뀔 수 있는 질그릇에 불과하다. 이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이 사실을 알수록 육체의 연약함, 죽음의 제한을 가진 이 인생을 참으로 감사하게 된다. 육체를 가진 인생으로서 ‘내가 좀 더 건강했으면, 내가 좀 더 길게 갈 수 있다면, 죽지 않을 수 있다면…….’ 하는 아쉬움도 이 영광을 보면 다 내려놓게 되고 무엇도 부럽지 않은 사람으로 살게 된다.
부럽지 않아야 우리에게서 유혹이 끝나게 된다. 사탄이 찾아와서 아담도 시험했고 예수도 시험했는데 우리인들 시험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언제 그 시험이 끝나는가? 우리의 존재가 그리스도의 빛 비췸 안에서 내 인생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 때 질그릇이지만 무엇도 부럽지 않은 사람이 된다. 어떤 것도 부럽지 않다면 어떤 것에도 유혹받지 않는 사람이 된다. 인생이라는 연약한 질그릇을 택하신 것은 보화를 더욱 보화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육체의 연약함, 죽음의 제한을 감사하게 된다.
밭에 보화를 묻어 둔 것처럼 질그릇에 보화를 담아서 훔쳐갈 수 없도록 하셨다. 좋은 그릇에 담아서 금방 눈치 챈다면 훔쳐가지 않겠는가. 그런데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자리에 보화를 두셔서 사람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업을 누리게 하셨다.
사탄은 “왜 사람에게만 이 영광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왜 사람을 통해서만 나타내십니까?”라며 송사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 영광이 부러우면 너도 죽음 안에 머물면 된다.”고 하신다. 그러나 사탄이라는 존재, 천사라는 존재는 죽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영광을 가져갈 수 없다.
이 질그릇에 보화를 담으셨다. 아무것도 아닌 인생, 죽을 운명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두셨다는 것을 우리는 일생 감사하고 찬송하게 될 것이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 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한 그 사람을 보았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 모든 것을 다스리는 영광을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인생에 담길 보화가 무엇인지를 보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비추심 안에서 우리 존재의 이유와 가치를 되찾았다.
빛 안에서 살면서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을 할 수가 없다. 존재의 만족 안에서 탐욕은 사라지게 된다.
1절에는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하였다.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말이 어려운데 공동번역에는 “하느님을 닮으십시오.”라고 번역하였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왜 또 하나님을 닮으라고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 닮음이 우리의 기업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상속된 것이 무엇인가? 교회 건물인가, 세상의 영광과 물질인가? 우리에게 상속된 것은 ‘하나님 닮음’이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기업이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당당할 수 있는, 무엇도 부러워하지 않는 그 기업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 닮음이다.
닮는다 해서 비슷해진다는 말이 아니다. 그의 생명과 본성을 받아서 우리 육체를 통해서 그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만 주신 축복이다. 이 기업의 영광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의 길은 이 영광을 향해서 가는 것이다.
2절에는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라고 하였다. 왜 우리가 자신을 버린 향기로운 제물이 되신 분 안에 머물러야 하는가? 왜 예수의 죽음 안에 머물러야 되는가? 그것은 이 영광 안에 머무를 때 죽음 안에서 기업이 상속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당연히 상속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과 상속은 다른 문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사람이다. 죽을 운명을 가진 이 존재가 하나님의 상속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상속이 나타나자면 죽을 운명 안에 머물러 있어야 그 상속이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를 죽음 안으로 이끌고 계신 것이다. “나는 상속자다.”라고 외친다고 상속받는 것이 아니다. “나는 기업을 가졌다.”라고 외친다고 기업을 갖는 것이 아니다. 죽음 안에 있을 때 하나님 닮음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된다.
아브라함과 모리아산, 모세와 호렙산, 야곱과 얍복강……, 이런 자리가 다 죽음의 향기가 드러나는 자리다. 향기로운 제물, 죽음의 향기가 드러나는 자리다. 이 자리가 우리에게 기업이 주어지는 자리고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 나타나는 자리다. 모두 죽음의 향기가 나는 곳이다. 기업을 얻을 자가 된다는 것은 죽음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 머물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기업을 얻을 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머무신 그 자리에 우리가 머무는 것이다. 예수께서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이 되신 자리, 하나님 앞에 예물이 되신 자리에서만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 온전하게 나타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를 사람으로 지으신 것을 감사하게 된다.
이 연약한 운명을 원망하며 ‘왜 이렇게 아파야 하고 늙어야 하는가. 왜 육신의 고난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며 왜 먹고 살아야 하는가? 왜 불편한 육체 가운데 두셨는가?’ 하던 모든 것을 우리 육체 속에서 하나님 닮음이 나타날 때 참으로 감사하게 된다. “인생으로 지어진 것을 감사합니다. 사람으로 지으신 것을 찬송합니다. 내 인생에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완전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 찬송이 사탄을 잠잠케 하고 하나님을 승리케 하는 우리의 간증이다.
우리로 하여금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닮음이, 이 기업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 기 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육신의 제한을 가지고 생로병사의 길을 가면서 늘 아쉬워하고 원망하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빛이 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시고 인생의 축복이 무엇인지, 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셔서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는지 알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인생의 비밀이 여기서 다 풀리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내 인생의 모든 의문이 끝나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인생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 닮음이 우리 안에 가득 채워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