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경쟁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어제의 나!”
-
사파이어 이진나
-
결혼을 하고 한달이 채 안되어 친정 아버지 생신날이 되었다. 첫 사위를 맞이하고 치루는 처음 가족행사라 많은 친척들이 모여 왁자지껄 즐거운 저녁식사 파티를 막 시작하려 할 때, 갑자기 “악” 소리가 나며 주인공인 아버지께서 쓰러지셨다.
-
순식간에 생일 파티는 아수라 장이 되었고 119에 실려간 아버지는 마치 비극적인 드라마의 한장면 같이 그 순간을 마지막으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다.
돌아가시는 순간 가슴을 움켜쥐시며 괴로워 하시면서도 맏딸인 나에게 눈을 떼지 못하시며 무언가를 간곡히 이야기 하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 모습을 12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마도 세상에 남겨질 철 없는 여자 셋 걱정 때문에 쉽게 눈을 못 감으셨던 것 같다.
-
온실속 화초처럼 미술을 전공하시고 그림만 우아하게 그리던 친청 엄마, 피아노를 전공한 나, 성악을 전공한 내 여동생. 정말 부족함 없이 풍요롭게 능력 있는 아빠의 품속에서 하고 싶은 것 맘껏하며 누리고 살아왔던 나의 가정에 처음으로 닥친 불행이었다.
-
영원히 내 곁에서 버팀목이 되어줄 거라 한번도 의심치 않았던 나에게서의 아버지의 죽음이란 지금도 믿겨지지 않는 쇼크였다. 결혼과 동시에 아버지를 잃은 큰 슬픔을 겪은 난 종종 하늘을 쳐다보며 아버지께 “남아있는 동생과 엄마 걱정은 마세요”라 하며 부족하지만 아빠의 몫을 해보겠노라고 다짐 또 다짐을 하며 하루하루를 지내왔다.
-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친정엄마와 동생 사이에서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고, 새로 생긴 나의 가정에 적응도 해야 했고 직장생활도 해야 했다.
한집안의 가장에게만 매달려 있는 인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아버지의 죽음으로 뼈져리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여자인 나도 남편에게만 기대지 않고 직장생활을 해야한다고 생각을 했다.
-
안정적이라는 교사생활에 위안을 받으며, 따박따박 받는 월급에 감사해 하며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삶을 무미건조하게 살아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연연생인 두 딸이 생겼고,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시집살이를 버거워하며, 하나, 둘 삶에 찌들어 남편탓, 남 탓하며 꿈도 없고 낭만도 없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을 때,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였던 지금의 스폰서가 암웨이를 들고 나타났다.
-
너무도 하찮은 일일 것이라는 생각과 그 일이 아니어도 이미 교사생활과 교회반주로, 일주일을 단 하루도 쉬지 못해 너무 바빴던 나는 내가 할 수도 없고, 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고 보지 않았고, 귀를 막고 듣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친구가 계속 권하는 미팅에 더 이상 거절을 하지 못하고 예의상 들으러 간 첫 사업설명회에서 소위 말하는 뚜껑이 날아가 버렸다.
-
워낙 여행을 좋아해서, 결혼 전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 했던 나에게, 여행을 평생 다닐 수 있다는 말이 들려왔고, 그로 인해 호기심이 생겼다.
나와는 달리 매사에 신중하고 빈틈이 없는 남편과 6개월 이상 철저히 알아본 암웨이 사업은 너무 놀라웠다. 이것을 왜 이제 알았나, 왜 사람들은 이 마케팅의 대단함을 모를까 의아해 하며, 어쩌면 삶에 지쳐 잃어버렸던 하고 싶은 많은 꿈들을 이룰 수 있다는 흥분되는 생각에 설레여 밤잠을 못 이루는 날들을 보냈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열정에 기복이 생겼고, 적당히 여유를 부릴 만큼 들어오는 수입과 적당히 즐길 수 있는 시간적 여유, 적당히 유지되는 삶에 발목이 잡혀 꿈을 향한 애절함도, 이루고자 하는 절실함도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발만 담궈 놓고, 온몸을 담구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2~3년씩 사업을 같이 했던 파트너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도 했고, 몇 명 되지 않은 파트너들의 사업이 정체되어 그룹이 늘어나지 않고 한 그룹만 점점 커지는 바람직하지 않은 사업구조로 진행이 되기도했다.
-
생각만큼 되어가지 않는 사업에 답답해만 했을 뿐, 나는 고집, 아집, 자존심으로 변화하려 하지 않고 남이 변화하길 바라기만 했고, 나는 적당히 지키는 원칙을 남은 정확히 지키길 바라고, 나와 다른 사람을 틀리다고 단정짓고 비판했으며, 친구였던 스폰서에 대한 예우도 머리로만 흉내 내어 하는 척 하는, 가슴으로 뜨겁게 느끼며, 예우할 줄 모르는 모순 투성이인 나를 발견하지 못했었다. 리드해서 끌고 가는 사업이 아닌, 본을 보이는 사업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다.
-
정말 성공하고 싶었기에 반복되는 미팅을 통하여 변화하고자 발버둥을 쳤고, 독단적이고 교만한 카리스마에서 진정 따듯한 카리스마가 무엇인지 배우고 느끼고 깨닫게 되었다. 또한 내가 변화하는 데에 시간을 필요로 했듯이, 파트너들의 변화도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아는 나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또한 나의 경쟁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어제의 나’ 임을 깨닫게 되었다.
-
사업을 시작하고 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파운더스 플래티늄이 되었을 즈음,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남편이 회사로부터 4년 동안의 해외지사 발령을 통보 받은 것이다. 회사로부터 엄청난 대우와 혜택이 있었음에도 암웨이의 비젼이 나의 미래에 훨씬 더 큰 가치로 충분히 다가와 있었기에, 상의 끝에 처음 2년은 남편만 떠나게 되었고, 나는 서울에 남아서 사업을 계속하였다
-.
하지만, 남편의 건강이 나빠져서, 스폰서와의 상의 끝에 나와 아이들 모두 해외로 떠나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2년 동안 사업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처음 해 보는 해외 생활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100평 가까이 되는 럭셔리한 집, 운전기사와 가사 일을 도와주는 도우미, 그리고 아이들은 세계 각지에서 온 친구들과 멋진 국제학교를 다니는 호사를 누렸다.
-
- 하지만, 이 혜택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암웨이 사업을 떠나 있는 나의 마음이 점점 불안하고 공허해졌다. 신데렐라의 꿈은 12시의 종소리와 함께 사라졌듯이, 결국 남편의 해외 지사 생활도 끝이나 나의 삶은 귀부인에서 무수리로 순식간에 전락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늘 암웨이에서 배웠던 직장인의 한계를 뼈져리게 느낄 수 있었고, 더 이상 남의 결정에 내 삶이 규정되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사업은 내가 떠나있던 기간 중에도 커지고 깊어져서, 성장이 되어 있었고, 살아서 움직이는 멋진 팀으로 거듭나 있었다. 매번 사업설명에서 들어왔던, 매달, 평생, 증가되는 수입의 특성을 나의 네트워크를 통해 실감하며, 귀국 후, 더 신나고 재미있게 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다.
-
배운 사람들이 더 배우려고 하고 누려본 사람들이 더 누리려고 하는 것처럼 잠시 2년 동안 해외에서 누려 본 생활이 약이 되어 나의 자극제가 되고, 강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사업을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덧 사파이어가 되었고, 내 삶과 시간을 내 의지대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더 구체적으로 꿈꾸게 되었다.
-
로버트 기요사키가 이 사업은 교육사업이므로 배우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줄 알지만, 사실은 아는 것을 버리는 것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고 말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시작하며, 양손에 다 쥐고 어느 것 하나 놓지 않고 다 해보려고 욕심을 부렸던 미련함에서 벗어났고, 내 인생의 시급하고도 중요한 경제적인 자유, 멋진 노후, 아이들의 멋진 미래를 위해 성공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으로 변화하려고 했다.
-
처음 나에게 암웨이 사업은 ‘나는 너무 크고 대단한데, 암웨이 때문에 내가 하찮고 작게 보일까봐 부끄러웠던’ 초라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의 모습으로 인해 이 대단한 암웨이 사업이 평가절하 될까봐 나를 끊임없이 변화하게 하고 가꾸게 되는 대단한 사업이 되었다.
-
이제는 Thinking Big 그룹의 대단한 시스템 속에서 몸담고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음을 내가 증명할 차례다. 스폰서에게, 그룹에, Thinking Big에 받은 것 이상을 되돌려 줄 수 있는 의리있는 리더로 거듭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