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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회 이현래 목사 메시지
실체 복음
2023. 1. 12
내가 말을 실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정신 차리고 들어야 한다. 노망했다는 말은 안하지만 일부에서는 옛날 목사님이 변했다고 하거나 신경세포에 변화가 생겨서 다른 말을 한다고 한다. 신경외과 원장이 그렇게 권세 있게 말해서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니 여러분도 잘 들어야 한다. 잘못 들으면 큰일난다.
사람이 듣기에 따라서 같은 말을 해도 들어가는 구멍이 다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악하지 않은데 속에서, 나오는 것은 악하다고 하셨다. 똥도 소화가 잘되면 냄새가 별로 없지만 소화가 잘 안되면 냄새가 독하게 난다. 약을 먹으면 냄새가 더 지독하다. 내가 약을 먹어서 그런지 하여간 보통 똥 냄새와 다르게 냄새 맡기 어려울 정도로 고약하다.
성경에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라고 하셨다.
공장이 잘 돌아가야 하는데 요즘 내가 말하는 것이 남이 안하는 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보면 알겠지만 모두가 예수, 그분을 만난 사람들의 증거다. 베드로, 바울……, 모두 그분을 만난 사람들의 증거다. 그래서 그 증거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세대가 바뀌고 나면 증거에 또 증거가 되니까, 증거를 받은 사람들이 또 증거한 것이니까 시대가 갈수록 점점 원형은 희미해지고 증거가 더 심해진다.
그렇지 않겠는가. 증거라는 것은 똑같을 수 없다. 증거이기 때문에 초대교회와 종교개혁 때와 20세기가 다른 것이다. 같은 것을 보아도 증거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것이 시대를 지나면 또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과 접해 있어서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이 증거를 들으면 교회를 위해서 증거를 듣게 된다. 그러다 보면 세상과 충돌하기 쉬우니까 될 수 있는 대로 타협의 길을 찾게 마련이다. 그래서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를 하기 어렵다. 여러분도 해 보시면 경험하겠지만 세상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교회를 해야 되지 전혀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 교회를 할 수 없다. 세상과 접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자꾸 변질되어 가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증거는 간단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증거했다. 그러나 그 간판으로는 세상에 나갈 수 없었다. 특별히 위대한 사람, 높은 사람들을 신의 아들이라 하는 희랍 세계에 십자가에 못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사람을 전하려면 십자가만 들고 나가면 먹혀 들겠는가. 그래서 뭔가 간판을 다르게 붙여야 했던 것이다.
무덤에 가면 모두 십자가뿐이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달라고 했으나 빌라도는 “아니다. 나는 내가 쓸 것을 썼다.” 하고 붙여 놓은 것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이다(요19:19-22).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Ἰησοῦς Ναζωραῖος βασιλεὺς Ἰυδαίων)’, 이것을 약자로 INRI라고 쓰기도 하지만 그것을 알아보기는 어렵다.
예수가 유대인의 왕으로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인류의 죄를 위해서 죽었다거나 인류의 죄를 위한 희생양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은 예수는 인류의 죄를 위해 죽은 사람으로 선전되었다. 그러면 십자가에 못박혀 못내려오고 죽었다는 것보다는 좀 낫지 않은가.
유대인의 노여움을 사서 참람죄로 죽었다면 유대인들이 좋게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러했다. 그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는 말을 한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으니 그 말을 한 것이다. 가야바의 법정에서 분명히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셨다. 그래서 가야바는 “더 이상 물어볼 필요가 없다. 이런 놈을 살려두면 우리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그들의 하나님이 누군가.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감히 입으로 부를 수 없어서 글자만 써놓고 읽지 않았다고 한다. 자음만 있고 모음이 없어서 학자들이 그 말을 연구하고 연구한 끝에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름이다. 우리가 부모님 함자를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무슨 자, 무슨 자입니다.”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했으니 용납이 되겠는가.
시골뜨기 청년이 나와서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소곤소곤했던 것이다. 공석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아마 제자들에게 그런 말을 했을 것이고, 제자들은 신바람이 나서 그 말을 밖에 나가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소문이 그렇게 퍼졌다.
그래서 가야바가 확인해 보려고 예수를 불러들인 것이다. 확인해 본 결과 더 이상 물어볼 필요가 없어서 정치적인 죄를 들어서 빌라도에게 고발했지만 내용은 참람죄였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 했던 것이다. 당연한 말이다. “저놈이 하나님 아들이라 했으니 물어보자.”고 한 것이다.
거기는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다 진실하다. 가야바도 진실하고 빌라도도 진실하다. 예수도 진실하고 십자가에 매달아놓고 물어본 사람들도 진실하다. 다 진실하다.
증거라는 것은 다르다. 이런 것을 빼놓고 증거하고 있는 셈이다. 안좋은 것은 성경에 나온 것이 없다. 예수님 보고 잘못했다는 사람도 없다. 물론 한때는 베드로 같은 사람도 예수를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죽는 데도 같이 가겠습니다.” 했던 베드로가 겁이 나서 모른다고 했겠는가. 너무나 어이가 없고 ‘우리가 알던 사람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나서 모른다고 한 것이다. 베드로는 진실하다. 거짓말을 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거기 있었더라도, 내가 유대인이라도, 제자였다 해도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세상이 시끄러워지니까, 신화니 어쩌니 이런 말이 나오니까 그 모든 것을 해결할 방법은 그분의 실체를 아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분의 실체가 무엇인가? 과연 예수라는 분은 어떤 분이었는가. 우리가 아는 대로는 하나님밖에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분이다.
그래서 그분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가 어떻게 다 알겠는가.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 물어볼 필요도 없고 의문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런 말이 들리니까 불트만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벗겨봐야 뭐가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다. 불트만은 그것을 벗겨봐서 아무것도 없으니까 마지막 한 말이 “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확실한 역사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어느 논문에 그렇게 나와 있다.
불트만을 정확하게 안다는 사람들은 “그런 말이 아니라 신화라는 예수를 실존적으로 해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러나 마찬가지다. 실체를 알았다면 실존적으로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물로 포도주를 만든 진짜로 알았다면 실존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모르니까 그것을 실존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모르지만 예수님이 우리 인생에 들어오면 우리 인생은 잔치집이 된다.” 이것이 실존적인 해석이다. 나도 그렇게 해석했다. 그러니까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신화적인 옷을 입었다고 하는 말이 가까이서 들리니까 나는 감히 예수님의 실체를 알아보려고 나섰다. 그냥 나선 것도 아니고 호기심에 나선 것도 아니다. 원래부터 그런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 말이 주변에서 들려오니까 직접적으로 예수를 알아야 했다.
예수는 신화적 인물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증거를 가지고 다시 한 말이 아닌가. 예수님 자신을 아무리 말하려고 해도 결국은 증거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사도들의 증거, 고백, 경험, 그리고 케리그마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말한 예수니까 실체와 꼭 같을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 당시의 사람들이 신화적 시대의 사람들이니까 신화적인 옷을 입혀서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때 당시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신화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면 그런대로 알아들었다. 우리도 그렇지 았았던가. 아이를 키우다 보면 갑자기 열이나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누가 왔다 갔는데 그런 일이 생겼구나. 삼시랑이 노했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금줄을 친 것이다. ‘삼시랑이 노하기 때문에 들어오면 안된다.’라는 의미로 금줄을 쳐놓으면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깊이는 몰라도 그래야 된다고 생각한다. 꼭 같은 방법이다. 사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에 대해서 그런 말은 있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신약 성서를 더듬어 보니 내가 꽉 잡을 수 있는 예수가 없었다. 그분들은 다 어떤 증거가 있어서 말했을 텐데 나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실상을 알아보자. 도대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했는데 알아볼 자리는 여기밖에 없었다. 불트만이 말한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밖에는 역사적인 예수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누구든지 십자가에 매달아놓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신화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알아보려고 추적을 한 것이다. 그냥 호기심으로 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도 마지막에는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죽으셨다. 이것을 다 끝났다고 번역하기도 하고 “다 이루었다.”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끝난 것이 다 이룬 것이고 이룬 것이 끝난 것이다. 비슷한데 중요한 것은 내가 거기서 ’아, 이분도 확실히 사람이구나.‘라고 알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그 상태에 가면 죽으니까 깊은 내용은 모르고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몰라도 죽는 것만은 확실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도 만날 수 있는 예수가 있네.’라고 알았다. 증거가 아니라 그냥 사실 그대로 실물을 보고 ‘아, 나도 믿을 수 있네. 믿을 만한 예수가 있네.’라고 알았다. 그래서 내가 말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기회로 삼아 뭉그적거리는 사람,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나왔다. 그래서 ‘야, 그렇지는 않을 텐데, 그것은 아닐 텐데’라는 생각 때문에 계속 더 접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다.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하다 보니까 단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만 갖고는 그분을 확실하게 알았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가? 아무리 강도가 죽어도 동정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 만인이 다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예수, 그분이 죽은 것을 보고는 만민이, 누구나 다 싫어한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면서 안식을 얻었다. 왜냐하면 나도 바닥이니까, 출발도 바닥에서 출발했고 그때 나로서는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똑같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바닥이다. 오늘 부르실지 내일 부르실지 모른다. 나는 항상 그렇게 살아왔다.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딴짓을 하게 된다.
내 진실한 원형은 바닥까지 내려간 인간이다. 그래서 예수가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마음에 평안이 왔다. ‘아, 예수도 이런 자리가 있구나!’ 그래서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다. 쉽지 않은가. 뭐가 어려운가. ‘아, 저것이 내 운명이구나. 인생의 운명이구나.’라고 아는 것이 어려운가. 우리가 그와 똑같은 입장에 있지 않더라도 인생의 운명은 결국 그렇게 내 뜻대로 못하고 죽는 것 아닌가. 누가 죽고 싶어서 죽겠는가. 거기서 예수도 그런 것을 보고 ‘아. 내 인생도 마지막은 저거네.’라고 알았다. 이렇게 아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모두 이것을 회피한다. 보라고 해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상하다. 뻔한 우리 인생인데 왜 안보려고 할까. 내 운명을 그대로 내놓은 것인데 왜 안보려고 할까?’라고 생각했는데 재승 형제가 나와서 “사람이 다 싫어하는 곳입니다. 가장 싫어하는 곳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그때야 알았다. ‘아, 싫어서 그렇구나.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데 결국은 싫어서 그렇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좋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다. 좋아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여기서 큰 것을 깨달았다.
아담에게 “너는 이것을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는다.”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먹었다. 아담이 멍청해서 먹었겠는가. 성경은 사탄에게 속았다고 한다. “이것을 먹으면 네가 하나님 같이 된다.”라는 말에 속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주의자들은 속았다는 것을 거부한다. 사람은 머리가 있는데 어떻게 속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랬는가? 자기 속에 그런 것이 있으니 속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확실히 안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문제가 크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좋다.”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동산을 지키고 경작하라고 맡기셨다. 이것이 최고의 자리 아닌가. 인생 최고의 영광이고 최고의 자리인데 왜 그것을 싫어했을까? 그것은 바로 이 자리 때문이다. ‘나는 이런 사람인데, 꼼짝도 못하는데, 내 최후는 이런데 내가 동산지기면 뭐하느냐.’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심히 좋다 하신 것이 도대체 어떤 상태인지 몰랐다. 그러니까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뭔지도 몰랐던 것이다. 여기서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뭔지 알고 보니까 ‘아, 하나님이 심히 좋다 하신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구나.’라고 알았다. 이것이 현실이다. 하나님이 좋다 하신 것을 나도 좋다고 하면 행복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좋다 하셨는데 내가 싫으면 그것이 불행이다.
여기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 아주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아담이 먹지 않으면 안될만큼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자기 위치를 이탈한 것이지 그냥 이탈했겠는가. 아담이 우리만 못해서 이탈했겠는가.
이탈한 아담에게 하나님이 첫 번째 물은 질문이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디 있느냐?”다. 너의 위치가 어디냐고 물은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이후로 하나님과 사람은 나무를 사이에 두고 있다. 성경을 보면 휘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하나님도 사람을 볼 수 없고 사람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누가 성막 속에, 지성소 안에 들어가는가? 죽은 피만, 죽은 자만 들어가지 산 자는 못들어간다. 죽은 피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그 말은 죽은 자는 죄가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했다. 왜 찢어졌을까? 하나님이 예수를 보려고 문을 여신 것이다. 이것도 이번에 인간다운 인간을 만나니까 안심하고 문을 여신 것이라고 알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이 숨어계실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자기가 볼 수 있는 사람,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숨어계실 일이 없다. 지금은 그런 사람에게는 숨어계시지 않는다. 지금도 숨어계신 하나님이지만 그런 사람에게는 숨어계시지 않는다.
이것이 새 언약이다. 그날이 오면 어른으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다 하나님을 알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세계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자리가 예수님의 실체를 아는데 가장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한다.
이적을 행하신 분도 알고 다 알아도 그분과는 내가 만날 수 없다. 이적을 행한 것은 놀랍지만 내가 만날 수 없다. 더욱 놀라우면 더욱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실존적인 예수를 아는 것이다.
오병이어를 어떻게 오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겠는가. 그것은 어떤 사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은 나눌수록 더욱 불어난다. 실재는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 불어난다.” 그러니 말이 되지 않는가. 그렇게 몇십 년을 해 왔다. 그래도 당연히 그럴 줄 알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옆에서 신화라는 얘기가 나왔다. 이것은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나는 그 실재를 알려고, 실체를 알아보려고 나선 것이다.
이것은 실체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증거를 가진 복음, 증거로 시작된 복음이 아니라 실체복음이다. 우리가 직접 확인하고, 그 사람이 내 운명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하나님이 심히 좋다 하셨던 사람이 저런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러고 살아야 진실한 것 아니겠는가.
모래 위에 집을 지어놓고 “나는 좋은 집을 지었다.”고 해봤자 소용없다. 비바람이 몰아쳐 오면 무너져 버린다. 그런즉 우리의 반석은 어디인가. 그분의 실체, 거기 우리 인생의 반석이 있다. 진실하니까 거기서부터 우리 인생이 시작되어야 반석이다.
집을 지으려면 반석이 나올 때까지 파야 한다. 안그러면 고층빌딩을 지을 수 없다. 2층 집만 지으려고 해도 기초공사를 철근을 넣어서 해야 한다. 인생의 기초가 확실치 않으면 무엇을 해도 확실치 않다. 무엇을 해도, 무슨 말도 애매하다. 여러분이 성경을 다시 읽어 보시면 알 것이다. 무엇을 해도, 무슨 말을 해도 애매하다.
아무나,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였다. 얼마나 좋은 말인가. 우리는 그냥 너무 좋아서 그냥 받아들였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는가? 어떻게 있는가? 생각해 보자. 교회 다니면 있는 것인가, 예수를 영접했다고 하면 그 안에 있는 것인가? 이것을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다. 안믿는 사람이 물으면 뭐라고 하겠는가.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요.”라고 하면 “그것이 무슨 말이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요?”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나는 거듭났습니다.”라고 확실히 대답할 사람이 있는가. 대답 못한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애매하다.
이 자리에서 예수를 만나고 보면 모든 것이 명백해진다. “나는 이제 확실하게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내 운명이니까 그 안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고는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라는 말은 애매모호한 말이다. 그리스도 있지 않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도 없다.
요즘 보니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완전히 새 것이 되어버린다. 아무것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 사람들인데 완전히 새로운 사람, 다른 사람이 된다. 그래서 MZ세대라고 한다. 밀레니얼 제로라고 세대가 없다는 뜻이다. 과거도 없고 과정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 과정을 거쳐온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이런 것이 아니라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왔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다 여러가지 고비를 거쳐서 여기까지 왔다. 그에 비해 MZ세대, 이 젊은이들은 그런 고비가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데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유심히 보고 있다. ‘저것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무엇을 알고 저렇게 말하는 것인가?’ 하고 자세히 보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진실하다.
이들을 모르는 사람들은 비꼰다. “자기들이 뭐라고, 우리는 이렇게 과정을 거쳐왔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슨 소리인가.” 하며 무시한다. 그래도 나는 ‘누가 진실한지 두고 보자.’ 하고 있다.
여기는 거짓말이 없다. 이것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자리다. 그들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과정을 거치고 있는 그 안에서는 말도 못할 사람이고 입도 뻥긋 못할 사람들이다. 같은 교회 안에 있어도 입 한번 벌릴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탈교회 하니까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자기들끼리 모이면 밤을 새운다고 한다. 방언을 해도 그렇게 하기 어려운데 그들끼리는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자리가 미어터진다고 한다. 그러니 어떻게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래서 ‘사람은 여기서 새로워지는구나. 이 자리가 있으면 누구나 새로워지는구나.’라고 알았다.
우리는 구세대라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지금 사람들에게 과정을 거치라고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늘 말하지만 우리는 짚신부터 신었다. 그 뒤에는 고무신을 신었다. 그것도 흰 고무신은 깨끗이 닦아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가 어디 출입할 때나 신고다니던 신발이다. 운동화도 그렇다. 빨아서 색깔이 하얗게 되지 않으면 분필가루를 발라서라도 하얗게 만들던 시대가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신발을 신어왔기 때문에 신발의 역사, 신발의 과정을 다 거쳤다.
요즘 아이들은 나이키나 프로스펙스밖에 모른다. 우리가 감사하라는 뜻으로 옛날에 짚세기 신던 얘기를 하면 듣기 싫어한다. ‘꼰대들 또 저 소리한다.’라고 생각한다. 지금 3만불 시대에 얼마나 풍요로운가. 그런데 그 풍요를 잘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옛날에 강냉이 죽을 먹을 살 때를 얘기해 주면 아이들이 얼마나 더 행복할까 해서 얘기를 해 주면 듣기 싫다고 한다. ‘저 꼰대들 또 저 소리하네.’ 하고 아예 안듣는다. 들으려고 생각도 안한다. 나도 처음에는 모르고 얘기했더니 아예 먼산 보고 안듣는다. 우리 아들도 그러했다. 그런 말을 하면 ‘우리가 지금 너무 잘 살고 있구나.’라고 생각할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다. ‘저런 얘기를 왜 또 하나?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세대 차이만 느꼈는데 이것은 세대 차이가 아니다. 그래서 판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 동안에 판이 많이 바뀌었다. 그래서 늘 더 좋은 판으로 옮겨졌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마지막은 영 안이 밝아진 것이다. 그래서 열두 아들들을 앞에 놓고 일일이 다 예언하고 죽었다.
그런데 모세를 바로 앞에 보낼 때는 그것으로는 안되었다. 아무리 영안이 밝아도 바로가 이백만이나 되는 그 백성을 내주겠는가. 그래서 모세에게 “내가 너를 신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사람이 신처럼 된다는 것은 얼마나 차원이 높은 것인가. 영 안이 밝은 것과 비교가 안된다.
실제로 모세는 신이 되어서 바로를 굴복시키지 않았는가. 어떤 사람이 왔다고 바로가 굴복했겠는가. 신을 만나지 않으면 절대로 굴복할 바로가 아니다. 그런데 신을 만났기 때문에 등을 밀면서 “빨리 나가 줘.” 하고 내보냈던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렇게 쓰셨다. 판이 완전히 다른 판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왜냐하면 판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목동 다윗이 왕이 될 때는 다른 판에서 된 것이다. 다말과 라합, 룻과 같은 특이한 여자들을 거치면서 바뀐 판이다. 그 판에서 다윗 왕이 나왔다. 그래서 우리는 판이 바뀌어도 거부감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잘 나가던 목사가, 그리고 좋은 양식을 먹여주던 목사가 갑자기 곤두박질치니까 늙어서 그렇다느니 뇌세포가 이상해졌다느니 하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갑자기 낭떠러지기에서 떨어지니까 갑자기 떨어진 사람을 따라갈 수 없고 따라가기 싫기 때문이다. 올라갈 때는 좋았는데 내려갈 때는 싫기 때문이다.
실체를 알려면 내려가야 한다. 예수도 그 화려한 역사를 떠나서 십자가에서 내려가셨다. 최하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자리까지 내려가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마저도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은 것이라고 포장했다. 아주 그럴싸하지 않은가. 온 인류앞에 내놓아도 그럴싸하다. 그래서 그렇게 포장을 해 놓은 것이다. 진짜 못내려오고 죽은 그 사람을 우리 주님이라고 생각하면 자기가 살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싫어하는 것이 마땅하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피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문제다. 피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생겼는데 어떻게 피하겠는가. 그래서 정신을 차리라고 하는 것이다. 누가 정신을 똑똑히 차린 것인지 두고 봐야 한다. 누구 뇌세포가 정상인지 알아야 한다. MRI를 찍어봐야 안다는데 그러려면 조영제 주사를 맞아야 한다. 그냥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카메라로 찍는 것이면 백번이라도 찍겠는데 조영제를 맞아야 하니 못찍는다.
그러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시대다. 특별히 대구교회에 다니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내 말을 들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잘못하면 속는다. 혹시라도 그런 의심이 생기면 믿지 말고 버려야 한다. 할 수 없지 어쩌겠는가.
사람 생각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놀랍다. 그런 생각을 가지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독재자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그래서 자기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놓고 300년 종교전쟁을 일으켰다고 하고, 십자군 전쟁을 말하고 히틀러의 독재를 말한다고 한다. 자기가 그렇게 될 것인데 남 보고 그렇다고 한다. 우리는 정말 희한한 세계를 살고 있다.
그래도 이런 것을 통해서 더욱 분명해지니까 취소할 수도 없다. 취소하면 좋겠는데 나로서는 취소가 안된다. 백두산이 곧 폭발할지 모른다 해서 백두산을 없앨 수 있겠는가. 폭발을 예고하면 뭐하겠는가. 폭발을 막을 수 있는가. 못막는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백두산이 폭발하면 그것이 어디까지 떨어질지 모른다. 대한민국 지도가 존재할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예수 사건, 이것이 진실한 사건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싫어도 할 수 없다. 싫다고 안하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헛일을 하는 것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거짓말하는 자들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 하겠는가. 자기 위치에 있지 않으면 저절로 거짓말이 된다.
예수님이 “너희는 모르는 것을 말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증거한다.” 하셨다. 무식해서 그렇겠는가. 공부를 못해서 그렇겠는가, 머리가 나빠서 그렇겠는가. 그렇지 않다. 세계가 다른 것이다.
늘 같은 말인데 오늘은 실체라는 것 때문에 말씀드렸다. 증거만 갖고 말하면 안된다. 증거는 참고는 되지만 증거만 가지고 말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머리 좋은 사람이 나오면 또 하나 나오고 머리 좋은 사람이 나오면 또 하나 나오고, 이렇게 신학이 자꾸 생기는 것이다. 증거를 갖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의 증거를 가지고 살면 안된다. 그 증거대로 살아지지도 않는다. 우리가 바울처럼 살 수 있는가? 못산다. 증거받은 예수 그대로 살 수 있는가? 못산다. 참고로 할 일이지 주장할 일도 못되고 남에게 내놓을 일도 못된다.
실체를 확인하고 말해야 한다. 모든 말을 다 실체를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말해야 한다. 그래야 나도 편하고 남도 편하다. 이것은 결국 객관적 사실이지 나의 주관적 사실이 아니다.
이제는 나도 해방될 때가 왔다. 중매장이 입장에서 해방될 때가 온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에 공급한 것은 나 아니면 안된다.
다른 사람이 하면 또 다르게 된다. 그 사람만큼 달라진다. 그렇게 늘 달라지다 보면 뭐가 되겠는가. 모두 증거를 가지고 하니 뻔하지 않은가. 교리나 신학은 증거를 보존하려고, 증거가 변질되게 하지 않으려고 생긴 것이다. 그러나 변질되지 않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 변질된다.
이 실체가 있으면 혹시 변질된다 해도 도로 그 자리고 도로 그 자리 아닌가. 바꿔질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아, 이것은 실체 복음이구나. 증거 복음이 아니라 실체복음이구나.’ 이렇게 알았다.
‘실체, 예수의 실체’, 이 한 마디만 기억하면 된다. 그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든, 죽은 사람을 살렸든 어찌되었든지 실체는 이것이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은 작은 사건이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것은 큰 사건인가? 그렇지 않다. 때에 따라서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실체는 같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사람이 바뀐 것이 아니라 항상 똑같은 사람이다. 그 사람이 우리에게는 신비로운 사람이었는데 그렇지 않다. 실체는 똑같은 사람이다. 단지 무슨 이유론지 소유가 달랐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하시면 임마누엘이 된다. 하나님이 하시면 나도 그렇게 쓰실 수 있다. 필요하면 나를 그렇게 쓰실 수 있다. 모세만 그렇게 쓰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쓸만한 사람이 되면 언제든지 데려다 쓰신다.
나도 적지만 그런 일을 경험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리가 없는데, 전혀 다른 말을 했는데 반응은 전혀 달랐다. 놀랐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 가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할 수 없이 내가 죽을 자리에서 살아난 이야기를 했다. 그것이 도움이 되겠는가. 오늘 내일 하는 분에게 그런 말을 하면 “당신은 좋겠소.”라고 하지 않겠는가. “주여, 믿습니다.”라는 말보다 못한 말이다. 나는 그렇게 못하니까 할 수 없이 내 이야기를 했는데 그분의 입에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말이 그렇게 훌륭한 말도 아니고 그런 분에게 도움이나 위로가 될 말이 아닌데도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까 나를 그때 다른 사람으로 쓰신 것이다.
충주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교회에서 시끄럽고 복잡하니까 안되겠다고, 다른 것도 다 내보내기로 했다고 CCC는 나가라는 것이었다. 나도 미리 알고 갔는데 “제직회의에서 다 결정했습니다. 다 내보내기로 했습니다.”라며 나가라는 것이었다. 그 교회는 백오십 년이 넘은 교회로 그 지방 감리교의 중심교회다. YMCA, YWCA, RCY, CCC 별 것이 다 있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있게 해 달라는 말은 안하고 “나는 이러저러한 일을 하려고 왔습니다.”라며 10분 정도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감리교 목사여서 그런지 대번에 “그러면 우리 다시 한번 일해 봅시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6개월 동안 그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그는 나에게 그 오래된 교회를 맡기고 해외연수를 갔다. 전도사가 갓 신학교를 졸업하고 왔는데 나이도 어리고 도저히 교회를 맡기고 갈 수 없다며 생전 모르는 사람에게 6개월 동안 주일날 설교를 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나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엑스폴로 74 때 우리 지구에서 3천 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것이 기적 아닌가. 다른 사람들이 다 놀랬다. 청주 지구 간사가 “놀랍습니다. 목사님 지구에서 3천 명이 왔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니 그것이 맨정신으로 되었겠는가.
이런 일을 몇번 경험했다. 그때는 기이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각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렇게도 쓰실 수 있고 저렇게도 쓰실 수 있다. 예수도 그러니까 넉넉히 쓰시고도 남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헷갈린다. 헷갈릴 이유가 없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된 일이 아닌가!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보니 실체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렇게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사람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미련은 완전히 잊어도 상관없다. 그렇다고 불경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주 질서가 바로 되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고 사람은 사람이 되고, 필요할 때 연합되어야 한다.
사람도 아니고 신도 아닌 존재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며 세상이 시끄럽다. 교회가 그런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으면 시끄럽다.
확실히 사람인데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다. 하나님이 보시고 심히 좋다 하셨으니까 사람은 잘못 태어난 것도 아니고 잘못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하나님 말씀의 일점 일획이라도 헛말이 없다.
성경을 보니까 한 말도 헛말이 없다. 모든 말이 확실하게 알아진다. 여러분이 성경을 보면 옛날에 본 것과 확실하게 다를 것이다. 옛날에는 안개속이었다면 지금은 대낮같이 밝다.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낮에 다니는 자는 실족하지 않는다.” 하셨다. 항상 열두 시다.
말을 하려면 끝이 없으니까 오늘은 여기서 중지해야겠다. 잘 들어주셔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