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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홍제사 |
대법사에서 무안으로 나와 무안초등학교를 지나 홍제사가 있다.
홍제사는 조선시대 승병장인 사명대사(四溟大師)의 표충사당과 표충비각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사당 수호사찰이다. 불교를 배척하던
조선시대에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 선 사명대사의 비가 이곳에 자리한 것은 무안지방이 그의 탄생지라는 인연 때문이다.
원래 서산ㆍ사명ㆍ기허대사의 진영을 모신 표충사당이 있었으나 18세기 후반 재약산으로 옮겨져, 현재 삼비문(三卑門) 안에는 1742년에
조성된 표충비와 향나무, 비각 수호사찰인 홍제사만이 남게 되었다. 근래 사명대사의 성역화작업으로 가람이 정비되어 공원화되었으며,
밀양을 찾는 이들이 사명의 뜻을 기리기 위해 방문을 빠뜨리지 않는 호국도량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특히 표충비각 안에 있는 표충비(表忠碑)는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신비한 비석으로 유명하다. 이를 자연현상의 하나로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이들도 있으나, 지역민들은 나라의 우환을 근심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 하여 신성시여기고 있다. 따라서 이 비는 ‘땀 흘리는 비(汗碑)’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는데, 땀이 비석의 전면(全面)에 흐르지 않고 비신의 글자 획 안에서만 흘러나오기도 하여 과학적으로 풀지 못하는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일주문
삼층석탑
종무소
호국범종
설법보전
1981년부터 정상(淨相) 스님이 기업인 정주영의 시주로 건립한 주법당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건물이다.
설법보전은 2단의 화강암으로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원형의 초석과 기둥을 올린 주심포식 건물로, 3면에 심우도(尋牛圖)가 벽화로
장엄되어 있으며, 포벽과 서까래에는 여래도를 비롯한 당초문이 단청되어 있다. 건물 전면의 기둥에는 4기의 주련과 1기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편액은 구하(九河) 스님의 글씨로 정갈하고 담백한 필체를 느낄 수 있다.
아미타 삼존불
설법보전 내부
건물 내부에는 ㄷ자형의 불단 위에 금동아미타여래좌상ㆍ석조관음보살좌상ㆍ금동대세지보살의 아미타삼존이 봉안되어 있으며,
후불탱으로는 근래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과 신중탱ㆍ칠성탱ㆍ산신탱이 있다.
또한 1978년에 조성된 범종 1구가 있으며, 내벽 측면에는 근대 홍제사의 연혁을 알 수 있는 ‘홍제사창견연대’ 현판이 걸려 있다.
밀양 무안리 향나무
송운대사영당비(松雲大師影堂碑)가 있는 표충비각(表忠碑閣)의 경내에는 가지가 팔방으로 뻗어 있는 특이한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향나무는 늘 푸른 큰키나무로 상나무ㆍ노송나무라고도 불리며 4월에 꽃이 피고 둥글납작한 열매가 열려 이듬해 가을에 익는데, 목재는
조각품ㆍ가구ㆍ향을 만드는 재료로 쓰이고, 줄기의 심부분은 약재로 쓰이기도 한다.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이 향나무는 높이 1.5m, 가슴높이 둘레 1.1m로, 수관(樹冠)의 모양은 양산을 세워 놓은 듯한 특이한 모습이다.
원래 향나무는 곧게 자라는 성질을 가졌는데, 홍제사의 향나무는 원줄기를 자르고 옆가지를 팔방으로 뻗게 하여 지금과 같은 나무모양으로 다듬고 가꾼 것이다.
이와 같은 향나무는 전국에서 유일한 것으로, 1738년 사명대사(四溟大師)의 5대 법손인 남붕(南鵬) 스님이 표충비를 세우고 기념하기 위해
심은 것이다. 향나무의 수령은 약 300년 정도로 현재 경상남도지정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충비각
송운대사 영당(松雲大師 影堂)의 비각으로 일명 표충비(表忠碑)ㆍ삼비(三碑)ㆍ‘땀흘리는 비(汗碑)’ 등으로 불린다.
송운(松雲)은 사명(四溟)과 함께 사명대사의 호 가운데 하나이다. 1742년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남붕(南鵬) 스님이 삼강동 어귀(현재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세운 것으로 좌대를 포함한 총 높이 380㎝에 비신은 높이 275㎝, 너비 98㎝, 두께 56㎝에 달하는 거대하고 장중한 비석이다.
비석의 정면에는 송운대사영당비명병서(松雲大師碑銘幷序)를 새기고 뒷면과 옆면에는 서산대사 비명과 표충사사적기(表忠寺事蹟記)를 음각하였다. 정문 비문의 내용은 송운스님의 평생 행적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의 빛나는 구국충렬을 찬양한 것으로, 영조 때의 문신 이의현(李宜顯)이 글을 짓고 김진상(金鎭商)이 글씨를 썼으며, 영상을 지낸 지수제(知守齊)ㆍ유척기(愈拓基)가 전액을 썼다.
뒷면에는 서산대사의 공덕과 기허대사(騎虛大師)의 사적을 칭송한 비문을 썼는데, 비문은 이우신(李雨臣)이 짓고 글씨는 윤득화(尹得和)가 썼으며, 전액은 조명고(曺命敎)가 쓴 것이다. 또한 옆면에 새긴 표충사사적기는 영조 때 문형(文衡)인 이덕수(李德壽)가 지은 것이며 서명균(徐命均)이 비문을 쓰고, 조명교가 전액을 썼다.
이 비는 1738년(영조 14)에 남붕스님이 표충당의 영당 건립과 함께 추진한 사업의 일환으로, 당대의 명유(名流)들이 비문과 글씨를 짓는 등 사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참여한 조선후기 비의 걸작이다.
비의 조성은 당시 영정사(靈井寺) 스님인 범윤(梵玧)이 각자하고 시공ㆍ감독하였으며, 1805년(순조 5)에는 주지 경명(頃明)이 비각을 보수ㆍ단청하고, 1807년 봄에는 정일(鼎馹) 스님이 비각중수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1839년 천유(天有) 스님이 표충사 영당을 비롯한 사우(祠宇)를 영정사로 이전하면서 이 비각을 표충비각이라 이름하고 독자적으로 보전하기 위해 비각 오른쪽에 자그마한 원당과 그 아래쪽에 삼비문(三碑門)을 건립하여 정문으로 삼았다.
그 후 비각의 관리는 표충사 승려가 번갈아 파견되어 담당하다가 일제강점기에는 대처승이 허물어진 원당과 요사를 모두 헐고 포교당을 지어 비각을 보존하였다. 광복 후 구연운(具蓮耘) 스님이 비각관리를 맡아 비각과 법당을 중수하였으며, 가람을 보존하고 정비하여 수십년간 삼대사의 충혼을 받들어왔다.
이 비는 ‘한비(汗碑)’라 하여 나라에 큰 사건이 있을 때를 전후하여 비면에 자연현상으로 땀방울이 맺혀 마치 구슬처럼 흐르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곳 사람들은 나라의 우환을 근심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 하여 신성시하고 있다. 이러한 영험은 기후변화에 따른 외기(外氣) 현상이라고도 하고, 비석 자체의 함염(含鹽) 현상에 기인한 것이라고도 하여 과학적인 해명을 하고 있지만, 땀 흐르는 광경을 목격해 온 이곳 주민들은 그러한 설명을 믿지 않고 사명대사의 영험이라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비석의 사면에서 흐르는 땀이 여름날 농부의 이마에서 흐르는 구슬땀처럼 맺혀 며칠씩 계속 흐르기도 하고, 때로는 옆면 혹은 한 면에만 잠깐씩 흐르다 그치기도 하여 그 신비함을 보여준다. 또한 그 땀이 비석의 전면(全面)에 흐르는 것이 아니라 비신의 글자 획 안에서만 흘러나와 과학적으로 풀지 못하는 영험으로 명성을 높이고 있다.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표충비라는 이름보다 ‘땀 흘리는 비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표충각
표충각은 삼비문(三碑門)을 지나 표충비각으로 들어가는 삼문 왼편에 있는 사당(祠堂)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건물이다. 이 건물은 재약산 표충사를 축소한 것이며, 1838년(헌종 4) 표충서원이 천유대사(天有大師)에 의해 재약산 아래 영정사(靈井寺)로 옮겨지면서, 비각을 보전하기 위해 지은 원당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외부는 3단의 장방형 화강암을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원형의 초석과 기둥을 올린 주심포식 건물로, 외벽에는 단청으로 장엄하였으며 건물 전면에는 주련 4기와 ‘표충각’이라는 편액 1기가 걸려 있다.
표충각 내부
내부에는 건물 후벽에 붙은 제단 위로 사명대사(四溟大師)ㆍ서산대사(西山大師)ㆍ영규대사(靈圭大師)의 3대사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보통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사명ㆍ영규대사가 봉안되나, 이곳은 사명대사의 수호사찰이어서 사명대사의 진영이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영은 면 바탕에 채색되어 있으며, 크기는 높이 176㎝, 폭 126㎝이다.
표충각 내부의 좌측에는 박정희 전대통령과 육영수 전 영부인의 초상화를 모셔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