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가 중간에 멈추어서 가지를 않았습니다. 오래 정차하다가 출발했고 방갈루르 센트럴 스테이션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갔고 Mr 정은 8시에 있는 마이소르 행 열차가 있어서 곧 가야 한다고 해서 작별인사를 하고 역에서 나와서 역 앞에 있는 큰 버스 정류장(Majestic Bus Station)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하려고 로컬 전화를 걸려고 하니 전화 부스에 많은 사람이 대기하고 있어서 버스 정류장에서 길을 건너가서 로컬 폰이 있는 곳으로 가서 조준상 목사님 댁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는 링가라자 푸람을 지나서 헨누르 버스 정류장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오토릭샤를 불러서 왔는데 오토릭샤 기사도 거기가 어디인지 잘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한번 더해서 내가 있는 곳이 State Bank of Mysore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조 목사님이 날 데려가려고 오는 동안 목사님 집에 드리려고 나는 양고기(Mutton)를 110 루피를 주고 1kg을 샀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리니 짚차를 타고 오셔서 은행 앞에서 나를 불렀습니다. 나는 조목사님의 차가 있는 곳으로 건너가서 인사를 나누고 차를 타고 조목사님 댁으로 향했습니다. 집에 도착해 보니 집이 2층이었으며 모두 사용하는 중이었습니다. 집세는 매월 6천 루피를 지불한다고 하니 우리 돈으로 대략 20만원 정도가 되는 금액이었고 좋은 집이었습니다. 집에 들어가니 사모님이 환영 하셨고 나는 짐을 풀고 간단히 인사를 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아침 식사를 내오셨는데 밥에 된장국, 그리고 멸치, 김치등 한국에서 먹던 음식이 그대로 나왔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여러가지를 선교사님과 사모님께 물어보았습니다. 비자문제는 이곳 대학을 다님으로 해결하고 언어는 여러 시행착오를 통해 타밀어, 힌디어 등등을 했는데 이제는 이곳의 언어인 깐나다가 많이 사용되는 것을 알고 까나다를 배운다고 하였습니다.
사역은 아직도 언어적응을 하고 있는 중이며 마을 공터를 이용해서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선교사님이 운영하고 계시는 사역에 성경공부(대상은 청소년)를 인도하고 있으며 정윤진 선교사님이 운영하시는 Asia 신학교에 칼빈주의 강의를 나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이들의 교육 문제는 방갈로르가 영국 지배를 오래 받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영어 사용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지인 영어 사용 초등학교가 있어서 그리고 보내면 되었는데 맨처음에는 걱정을 했었으나 이젠 오히려 조선교사님 부부보다 아이들이 영어를 더 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식사를 하면서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었고 식사가 끝나고 나는 세면을 했습니다. 그리고 조선교사님의 짚차를 타고 정윤진 목사님이 운영하시는 신학교를 보려고 가다가 중간에 다른 교파 선교사님 몇명을 만나 이야기했습니다. 신학교에 도착해 보니 Miss 김이 지나가서 불렀습니다. 지난 2월달에 인도를 방문했을 때 만났었기 때문에 오랜 만에 인사를 나누었고 이어서 정윤진 선교사님이 맞아 주었습니다. 우리는 신학교 정원에서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시간이 되어 조선교사님은 강의를 하러 갔고 나는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나 사무실로 가는 도중에 전에 만났던 인도인 교수가 언제 인도에 왔느냐고 묻기에 10일 전에 왔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정선교사님은 자신의 아들이 미국의 웨스트민스터에서 칼빈주의를 배운 것에 대해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아들이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정선교사님 모양으로 당차보였습니다.
잠시 나는 건전지를 사러 나갔습니다. 가격은 29 루피를 주었고 이어서 국제전화 ISD를 걸어 집에 전화를 했지만 받지않았습니다. 아내가 외출한 것 같아서 나와서 신학교로 다시 향했습니다. 돌아와 보니 정선교사님이 어디를 갔다왔느냐고 묻기에 건전지를 사러 갔다왔다고 대답을 하고 사무실로 들어가서 내 짐에서 카메라를 꺼내어 건전지와 필름을 갈아 끼웠습니다. 나오니 조선교사님의 차량 부근에 정선교사님이 있어서 어서 오라고 하셔서 그곳을 가서 말씀을 나누었는데 정선교사님은 나름대로의 나의 스케줄을 만들어 주려고 하셔서 나는 "내게 너무 신경을 쓰시지 말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선교사님은 조선교사님 편으로 편지를 조선교사님의 아들 항신이가 다니는 학교인 CCC에 보냈는데 조선교사님은 CCC에 서신을 전해주고 아들 항신이를 차에 태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사모님이 점심식사로 돼지고기 볶음으로 준비를 해 주셨습니다. 나는 식사를 한 후에 용변을 보고 돌아와서 조선교사님 부부와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잠시 후에 우리는 차를 타고 통합측 선교사로서 영락교회에서 파송받으신 이 목사님 댁으로 향했습니다. 이용범 선교사님 센터는 선교사님 사택 앞쪽에 예배할 수 있는 공간과 여러가지 행사를 할 수 있는 다용도 건물로 아담하게 잘지어져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식사 중이어서 건물을 돌아보고 사택으로 돌아오니 목사님이 성경책을 들고 제자훈련을 하러 나서고 계셨습니다. 목사님은 잠시 기다리라고 하셔서 우리는 사택에 들어가서 식탁 앞에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앉아 있으니 사모님이 쥬스 한잔을 내오셔서 우리는 그것을 마시면서 사모님에게 몇가지를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우선 어떤 비자를 갖고 계시는가 물었더니 사업(출장)비자를 갖고 계시며 1년 연장하여 체류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찰에서 비자 문제로 가끔 조사를 나온다고 하는데 한번은 건물들이 이렇게 건설되어 있어서 나왔던 경찰들이 놀랐다고 합니다. 이런 비상시국을 대비해서 교회와 사택을 법인체로 등록을 했고 사용료로서 매달 4,000 루피를 지불한 것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 4천 루피는 센타 운영비로 사용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비자 문제에 있어서 맨 처음에는 학생비자를 신청하여 5~6년 연장을 했고 그 학생 비자가 끝난 것을 시점으로 하여비지니스 비자, 즉 출장 비자를 받아서 사용하신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주로 영어로 사역하시며 급하면 타밀어 영어를 섞어서 사역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영어를 주로 사용하시며 타밀어 통역자를 사용하신다고 했습니다. 인도, 특히 남인도는 영어를 사용하면 어지간한 것은 모두 통과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뱅갈루르 시가 여러 언어군이 조금씩 섞여서 있는 곳이지만 각 언어별로 밀집된 지역을 형성하여 사람들이 살아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지역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회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면 결국은 자신들의 언어인 타밀이나 깐나다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