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마이 가드(Oh My God!)
한힘 심현섭
밴쿠버 답지 않게 며칠 전부터 하얀 눈이 강산으로 내렸다. 눈이 오면 오기가 무섭게 녹아 없어지던 아쉬움을 씻기라도 하듯이 도로 곳곳에 밀어낸 눈들이 수북히 쌓여있다. 일을 끝내고 집사람이 차를 타고 오려면 내가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집으로 돌아와야만 하게 되었다. 차만 타고 다니던 터라 처음 밴쿠버 와서 한 두 번 타본 이후로는 몇 년 만에 처음이다.
경험이 많은 아내의 말만 듣고 달랑 2달라 짜리 투니 한 개를 들고나섰다. 무슨 일인지 오늘따라 지갑조차 안 가지고 나온 것이다. 하늘은 회색 빛으로 찌푸려 금방이라도 눈발을 날릴 태세이다. 섣부른 칼바람이 신작로를 휑하니 건너서 지나간다. 얼굴에 닿는 바람이 차서 어깨가 움츠러들고 걸음은 나도 모르게 빨라진다. 먼 산이 하얗게 웃고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로히드 타운 센타(Lougheed Town Centre) 스카이 트레인 역에 들어서 자동판매기 앞에 섰다. 아내가 가르쳐 준 대로 2존 $2불이라고 써진 화면을 누르고 하나 뿐인 투니 동전을 넣으니 표가 아래서 스르르 나온다. 순간 자세히 보니 내가 누른 것은 성인(Adult)용이 아니고 청소년용이었다. 성인용은 바로 옆줄에 있고 요금도 $3불이었다. 일 불의 차이가 난다. 주머니를 여기 저기 뒤적여 보니 동전 몇 잎이 있기는 한데 일 불에는 턱도 없이 모자란다. 설령 일 불이 된다한들 이제 어쩌겠는가. 다시 돌아가 돈을 가져올 것인가 배짱 것 그대로 타고 갈 것인가. 기로에 섰다. 공짜로 타고 다니는 놈들도 많다던데 그래도 표를 끊은 게 아닌가. 만일 적발이 되면 몰랐다고 펄쩍 뛰면서 오리발을 내밀면 통하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자연 뱃심이 두둑해져서 당당하게 2불 짜리 표를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그런데 앗불싸 올라가자 마자 얼마 안 되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역무원이 어떤 사람을 세워놓고 벌금 딱지를 끊고 있는 게 아닌가. 기차는 타 보지도 못하고 바로 걸려들게 생긴 것이다.
걸음걸이를 태연하게 천천히 하면서 주위를 의젓하게 살피며 나는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사람이라는 표정을 한껏 지으며 딱지를 끊는 사람들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지나갔다. 그리고는 될수록 그들과 멀리 멀리 떨어진 끝으로 갔다.
아득하게 보일 때까지 천천히 걸어가서 그들을 바라보는데 기차가 때마침 들어온다. 냉큼 재빨리 올라타면 내가 무슨 약점이라도 있기라도 한 것으로 비칠지 모르니까 남들에게 양보하면서 서서히 들어갔다. 출입문에서 떨어진 구석자리에 가 앉았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버나비 호수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돌리기에는 내가 가야 할 길이 멀었다. 어디서 어떤 일과 만날지 모를 일이다. 잠시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다.
미끄러지듯이 흘러가는 스카이트레인 역이 몇 개 지나갔다. 다시 출발하려는데 어떤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급히 닫히는 문을 열어 제끼며 들어온다. 기차는 바로 떠나고 숨이 찬 이 사람은 좌우를 살피더니 내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아하 이 사람이 바로 아까 그 역무원에게서 연락을 받고 나를 찾으러 온 모양이구나. 알기도 잘 안다. 그렇다면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오리발을 내밀어야 하는 데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말이 오 마이 가드(Oh My God!)다.
이 사람이 내게 오면 표를 보자고 할 것이고 표를 보고 나면 왜 청소년 표를 샀느냐고 할 것이다. 이때 서슴없이 외치는 외마디 '오 마이 가드, 오 마이 가드'를 마음 속으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내게로 와서 내 옆자리에 조용히 앉자마자 바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내가 고의 아니게 단 일 불 때문에 이런 고역을 정말 치러야 하나 생각하니 갑자기 일 불이 큰돈으로 다가왔다. 적은 일 불도 모자라는 일 불은 이렇게 크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듣자하니 걸리는 경우에는 벌금이 만만치 않다던데 표를 사긴 샀더라도 온전하지 않으니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다. 다만 믿는 것은 '오 마이 가드!'뿐인데 그런 오리발이 정말 통할까 불안하기 짝이 없다.
또다시 나타났다. 저 쪽 칸에서부터 양쪽으로 기웃거리며 한 사람이 이 쪽으로 걸어온다. 멀리서 보기에는 표를 보자고 하는 듯이 보인다. 저 사람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시간이 걸릴텐데 그 전에 차가 서면 재빨리 뛰어내려야 하겠다. 그 사람은 계속 양쪽 자리를 기웃거리며 다가오는데 차가 역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다.
나는 문 앞으로 이동해서 그 사람이 오기 전에 내려야겠다고 작심하고 서두르는데 기차가 마침내 섰다. 날랜 동작으로 내려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다가 뒤를 훌쩍 보았다. 아 이 사람이 사람들을 헤치며 쫓아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끈질긴 놈이다.
다시 마음 속으로 '오 마이 가드!'를 새기면서 가는 데 사람 하나 없는 빈 기차가 옆을 지나간다. 여기가 컴머셜(Commercial) 스테이션으로 종점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내리게 되어 있었다.
나는 여기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워터프론트(Waterfront)역으로 가서 시버스(Sea Bus)를 타고 론스데일 키(Lonsdale Quay)에 도착, 거기서는 린벨리(Lynn Valley)로 떠나는 버스를 타야 한다.
예전에 스위스에 간 적이 있었다. 스위스 쥬리히에는 전차가 다니는데 운전석이 완전히 격리되어 손님들은 자유롭게 오르내린다. 정류장에는 자동판매기로 표를 팔지만 아무도 표를 보자는 사람이 없다. 나는 태연히 전차에 올라타서는 시내 곳곳을 구경하고 다녔다. 창가에 앉아서 밖을 보고 있다보면 전차가 막 떠나려는데 뛰어오는 사람이 있다. 그대로 올라타면 갈 수 있는데 번번이 표 파는 곳으로 가서 동전을 넣고 표를 사다가 전차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표도 없이 태연히 올라타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왜 그다지도 웃음이 나고 그 사람이 어리석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정말 스위스에서는 표 없이 타도 되는가. 검사하는 사람은 없는가. 검사하는 사람도 없는 데 저렇게 모두 표를 사는가. 궁금했다. 오래 쥬리히에서 살았다는 교민을 만나 물어보았다. 십 여 년을 넘게 살았지만 어쩌다 검사하는 경우 걸리는 사람은 못 보았다는 것이다. 검사원이 맨 앞자리에 올라와서 신분을 밝히면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표를 손에 들어 보여주고 그 자리에서 다시 내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한번만 표를 사면 계속 써 먹을 수 있다는 계산이 아닌가. 나는 그때 갑자기 엉뚱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스위스는 잘 사는 나라이고 나는 못 사는 나라에서 어쩌다 여기까지 온 것이다. 전기도 풍부한 나라라는데 나 한 사람이 더 전차에 걸쳤다고 전기가 들면 얼마나 더 들어가겠는가. 곡간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도 있는데 넉넉한 집에서 인심을 좀 써야 하지 않을까.
사실 육이오 때에도 스위스에서 우리에게 보태준 것이 뭐가 있나. 기껏 병원선 하나 달랑 보내 주었는데 그 뒤 우리가 팔아준 스위스 시계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내가 쥬리히 전차를 무임승차하고 돌아다니면서 나름대로 철학처럼 마음 속에 새기던 말들이다. 만일 걸리더라도 좀 당당하게 맞서야겠다고 다짐을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게 뭣인가. 한 이 삼 십 년 지나기는 했지만 그 당당하던 뱃심은 어디가고 표를 안 산 것도 아니고 사정상 일 불 모자라는 표를 샀다고 이다지도 불안과 공포에 싸여야 한단 말인가. 아 세월은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구나 하고 한탄하게 된다.
시버스에 타려는데 역무원이 입구에 서있다. 이제는 꼼짝없이 '오 마이 가드'를 외쳐야 할 판이 되었구나 하고 체념을 하는데 옆에 오던 휠체어를 탄 사람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닌가. 그와 함께 들어왔다. 이제 마지막 남은 관문은 버스다.
론스데일 키에서 린벨리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하는데 이때 표 투입구에 표를 넣으면 끝이다. 운전수가 볼 수 없도록 표를 뒤집어서 재빨리 집어넣어야 한다. 사람들 중간에 서서 섞여 들어가야 안전할 것 같아 약간 무리해서 비비고 들어섰다. 표를 넣고 자리에 와 앉아 있는데 버스가 떠나지를 않는다. 저 운전수가 나를 의심하고 있는 중인가. 이때 운전수가 일어나 뒤쪽으로 걸어온다. 애구머니나 저 기계가 마침내 내 표가 잘못 된 것을 알아내어 운전수에게 알려준 모양이구나.
자, 다시한번 '오 마이 가드'를 외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내 앞까지 왔던 운전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콜라병 하나를 집어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고 버스는 아무 일 없이 출발했다.
창 밖으로 하얗게 눈을 이고 서있는 그라우스 마운틴(Grouse Mountain)이 올려다 보인다. 점점이 켜진 가로등 사이로 버스는 흐르듯이 달려가고 집집마다 저녁 시간의 아늑함이 따뜻하게 전해진다. 한 순간 부족한 일 불이 신을 부르게 만들었고 신은 나에게 일 불의 위대함을 일깨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