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슬
그가 자유를 얻자 내겐 지옥이 시작됐다. 나는 교사 임용고시에서 실패한 후 입시 학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가 교도소에서 출소하던 날 학원 게시판에 그의 사진이 담긴 전단이 붙었다. 그의 얼굴은 물론 신체 치수와 집 주소까지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성범죄자 신상공개에 따른 조치였다. 전단 맨 아래쪽엔 여성가족부 장관 직인이 찍혀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여성과 가족을 보호하려는 조치 같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가족부의 보호를 받지 못한 나는, 더는 숨길 수 없게 된 내 처지를 알게 되었다.
교도소에서 출소하며 자유를 얻은 양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를 상상했다. 끔찍하고 역겨웠다. 3년 전, 사건이 터졌을 때 온갖 손가락질이 우리 집과 나와 엄마를 향했다. 어느 이웃도 앞에 나서서 나와 엄마를 지켜주지 않았다. 모두가 침묵했다. 집 안으로 빈 병이 날아들었고 죽은 고양이가 날아들었다. 엄마에게 이사 가자고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엄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날마다 허물어져 내리던 나는 나 스스로 교수대에 올라섰다. 그러나 막상 교수대에 올라서니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내려다보였다. 아주 복잡한 미로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엄연히 타인이었다. 내가 나를 포기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그 사람 때문에 내 삶을 포기하는 것은 억울하고 분했다. 무엇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은 그는 성범죄자고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다시 내 앞에 등장했다.
퇴근길에 집 앞 골목 입구에 있는 편의점에 들렀을 때 저쪽에 여중생 세 명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 한 아이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처음 보는 아이였으나 그 아이는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다짜고짜 나를 째려봤다. 그러고는 성범죄자의 딸이라며 내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말해주었다. 아이 얼굴엔 증오가 가득했다.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머금은 입꼬리와 한순간 표독한 눈빛, 더는 바라볼 수가 없어 편의점에서 뛰쳐나왔다. 신상공개 조치는 단 하루 만에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의 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경악스러웠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끔찍하게 투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늘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자 편의점 간판 옆에서 CCTV 카메라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카메라마저 너는 성범죄자의 딸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 발길은 성범죄자가 사는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두 다리는 누구보다 나 자신의 처지를 올바르게 인지한 거 같았다. 뛰다시피 하며 친구 집으로 갔다. 새벽녘에 집에 들어가 옷만 갈아입고 나왔다.
세상은 그를 괴물 취급했고 절대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고병원성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로 여겼다. 차라리 절도범이거나 사기범죄자, 또는 살인자였다면 그나마 나을 뻔했다.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인권조차도 그에게는 없었다. 누구도 그의 인권을 지켜주지 않았다. 아니, 그에게 인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거기까지는 괜찮았고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와 더불어 나와 엄마의 인권도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와 한 가족으로 얽힌 사슬은 질기고 끈덕졌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는 유전학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나의 아버지였다. 그가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나까지 덩달아 괴물 취급당했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둘러친 사슬은 나와 엄마를 옴짝달싹 못 하게 옭아맸다.
집주변에서도 학원에서도 사람들 눈치를 살펴야 했다. 사람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어느 시인은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말했지만 난 사람이 제일 무서웠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기만 해도 괜히 마음이 불편했고 몸은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주변의 시선이 나를 갉아먹어 팔다리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자꾸만 작아져 내 모습이 작은 애벌레가 될 것 같았다.
이틀 후 한밤중에 애벌레가 꿈틀거리듯 몸부림치며 집에서 탈출했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 집과 정반대 쪽에 작은 원룸을 얻었다. 집을 나오기는 했어도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아픈 엄마를 집에 두고 나와야 했다. 함께 나가자고 했지만, 엄마는 특별한 이유 없이 집에 남겠다고 했다. 사람들 시선이 두렵지 않으냐고 묻자 너만 잘 살면 된다고 했다. 그와의 의리를 지키려는 것인지, 측은지심인지, 아니면 열다섯 평짜리 알량한 전세금을 지키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엄마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엄마를 지켜주지 못하고 도망치는 내 꼴이 우습기도 했으나 망설이지는 않았다. 일단 살고 보자는 생각뿐이었다.
집에서 나왔다고 해서 불안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시선은 어디에든 있었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의 시선, 그 시선이 나를 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걸음걸이도 말소리도 자꾸만 작아졌다. 편의점에서 만났던 여중생 또래의 아이가 학원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붙잡아 놓고 헌법 제13조 3항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는 연좌제 금지 조항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내가 성범죄자의 딸이라는 것을 공개하는 꼴이니 세상의 불공정한 시선에 대놓고 저항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내가 사는 이 사회의 참모습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자 내가 사는 이 사회에 관하여 몹시 불순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출소하고 일주일 후 편의점에서 보았던 여중생이 내 수업에 들어왔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수업시간 내내 그 아이는 물론 다른 아이들 얼굴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나를 계속 주시했겠지만 나는 누구와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수업을 끝낸 후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가뭇없이 까마득했다. 비로소 나는 내 죄명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애벌레의 몸부림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성범죄자의 딸이라는 이유가 죄명이었다. 그로 인해 어디선가 내 신상이 적나라하게 공개된 것 같았다. 또 그로 인해 내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고 있었다. 그 아이가 내 주변에 거미줄을 치듯 여기저기에서 내 신상을 공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학원을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후에 방값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다. 편의점에서 그 아이를 만난 이후 난 날마다 방 안에만 있었다. 학원에 가는 일 말고는 항상 그랬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어떤 전문가가 침묵의 나선이론에 관해 설명했다. 언론매체가 여론을 부추겨 여론을 한쪽으로 쏠리게 만드는 현상이라고 했다. 획일화의 압력 같다고 했다. 마치 나선 모양의 소용돌이처럼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현상 같다고 했다.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어떤 드라마나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 그 대화에 끼기 위해 그 드라마나 영화를 보게 되는 현상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승자에 속하고 싶은 생각에 어쩔 수 없이 대세에 순응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이는 선거가 끝나고 나면 실제보다 많은 사람이 선거에 이긴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말하는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성범죄자 신상공개에 대해 생각했다. 인권 존중이라는 원칙에 따라 살인자도 공개하지 않는 신상을 왜 유독 성범죄자만 공개하게 되었을까? 언론이 여론을 부추기지는 않았을까? 언론은 무기징역보다 신상공개가 더 가벼운 벌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가해자의 가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성범죄자의 딸인 나는 침묵해야 할까? 맞서 싸워야 할까?
그 아이를 만나 내 처지를 이야기하고 설득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맞서 싸울 수 없다면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소연이라도 해보자 싶었다. 그 아이는 계속해서 내 수업에 들어왔다. 나는 내 잘못이 아니라는 뜻을 전달하고 싶었다. 사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치사하게도 유전무죄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돈이라도 있으면 아주 멀리 도망치고 싶었지만, 수중에 돈이 없다는 것은 꽉 막힌 쥐구멍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생쥐가 할 수 있는 일은 뒤돌아서서 고양이를 무는 방법밖에 없었다. 잘못한 것이 없다는 뜻을 똑바로 전달하기 위해 일부러 그 아이와 여러 번 마주쳤다. 그러자 그 아이가 오히려 당황하는 눈치였다. 수업이 끝나자 그 아이가 내게 다가왔다. 다짜고짜 반말이었다. 뭐가 그렇게 당당하냐고 물었다.
“내 잘못이 아니잖아.”
그 아이가 한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금세 나를 비꼬듯 쓴웃음을 지으며 자기 이름을 말했다. 휘수라고 했다. 그러고는 교실에서 나갔다. 왜 자기 이름을 알려주고 갔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내가 아는 이름인가 싶어 기억을 떠올렸지만,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학생 카드에서 휘수라는 이름을 찾았으나 없었다. 내 반에 새로 들어온 학생 이름은 채비였다. 이튿날 그 아이 뒤에서 채비라고 부르자 뒤돌아봤다. 내가 휘수가 누구냐고 묻자, 채비는 여중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섬뜩하게 비웃으며 대답했다.
“네 아빠에게 물어봐야지.”
그러고는 또 가버렸다. 곧바로 채비를 쫓아갔다. 채비는 빈 교실로 들어가더니 창밖을 내다봤다.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히며 눈물처럼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채비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더는 다가갈 수 없었다. 채비의 뒷모습이 사르르 떨고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모습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울고 있는 채비의 뒷모습에서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어질하면서도 우는 채비의 모습을 보자 왠지 안심이 되기도 했다. 일단 그냥 돌아섰다.
채비가 아직은 내 신상을 학원 아이들에게 공개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채비와 이야기해볼 여지가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이튿날도 채비와 나는 수업시간 내내 서로를 바라봤다. 수업이 끝나고 엄마에게 전화했다. 휘수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묻자 한동안 아무런 대꾸가 없다가 전화를 끊었다. 느낌이 싸했다. 다시 전화해서 피해자 이름이냐고 묻자 그렇다고 했다. 사건이 벌어졌을 때 피해자가 삼십 대 주부라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았다. 그땐 모든 것을 외면하고 싶어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었다. 혹시 아이가 있었냐고 묻자, 초등학생 딸이 있었던 것 같다고 대답했다.
눈앞이 깜깜했다. 그 초등학생이 자라서 중학생이 된 모양이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선 나도 모르게 성범죄자의 딸과 피해자의 딸이 대립했다. 왠지 성범죄자의 딸이 가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내가 마치 성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나도 분명히 피해자라고 여러 번 되뇌었다. 그러자 창밖을 보며 사르르 울던 채비가 자꾸만 생각났다. 나와 채비는 정반대의 처지였지만 왠지 동질감이 느껴지는 것은 내가 나를 철저히 피해자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도 진정 피해자였다. 여성가족부의 보호로부터 외면당한 채 거미줄에 걸린 피해자였다.
채비에게 전화했다. 채비네 집 앞 공원에서 채비를 만날 수 있었다. 어둠이 모든 물체의 그림자를 막 잡아먹고 있는 시간이었다. 잠시 후 가로등에 불빛이 들어오자 가로등 주변에서 그림자들이 다시 살아나려고 스멀스멀 애썼다. 나도 저 그림자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살아남기 위해 채비를 찾아왔다. 또 살아남기 위해 채비 앞에서 무릎 꿇었다. 채비가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잘못한 게 없다면서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물론 난 잘못한 게 없다고 대꾸했다. 그래서 아버지란 사람 대신 용서를 빌러 왔다고 대답했다. 난 속으로 잘못한 게 없으니 오히려 떳떳하게 용서도 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릎도 꿇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 채비가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대신이라고? 넌! 뭐가 그렇게 떳떳한 거야? 난 이렇게 거지 같아 죽겠는데.”
채비가 울기 시작했다.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변명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채비 말이 맞았다. 가해자의 딸은 떳떳하다고 외치는 형국이고 피해자의 딸은 억울하다며 우는 형국이었다. 내가 나 좀 살려달라고 빌자 채비는 울며 어디론가 뛰어갔다. 채비가 사라진 빈자리에선 그림자들이 여전히 살아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순간 가로등 불빛이 나가버렸다. 그림자는 제대로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시커먼 어둠과 뒤섞여 버렸다.
이튿날 채비는 학원에 나오지 않았다. 왠지 안심되면서도 어둠 속으로 뛰어간 채비를 생각하자 걱정되었다. 채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조용히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채비가 걱정됐다. 무슨 오지랖인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다만, 나도 모르게 가해자가 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학생 카드에서 채비네 집 주소를 찾을 수 있었다. 채비네 집으로 찾아갔다. 인터폰을 누르자 아줌마가 받았다. 목소리가 아주 가늘었다. 채비 엄마 같았다. 학원 선생님인데 채비가 학원에 나오지 않아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아줌마가 혼자 왔냐고 물었다. 혼자라고 대답하자 주변에 남자가 없냐고 다시 물었다. 주변을 살펴달라고 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채비 엄마는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염치없는 일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게 분명했다. 찾아오지 말아야 할 곳을 찾아온 느낌도 들었으나 용서를 빌고 싶었다. 주변에 남자도 누구도 없다고 하자 그제야 문을 열어줬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아줌마는 재빨리 문을 닫았다.
아줌마의 첫인상은 햇빛을 보지 않은 풀잎처럼 하얗고 가늘었다. 한 줌 바람에도 쓰러져버릴 풀잎. 한눈에 보기에도 피해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채비 엄마는 그렇게 온몸으로 아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줌마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채비 엄마라고 했다. 채비 엄마는 말하는 순간에도 자꾸만 흔들렸다. 이 가느다란 채비 엄마 앞에서 가해자의 딸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가해자의 딸이라는 신분마저도 가느다란 풀잎을 찍어낼 칼날이 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칼날을 입에 문 괴물이라도 된 것 같아 나는 내가 무서웠다.
채비 엄마가 국화차를 끓였고 잠시 후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았다. 채비 엄마는 마음을 진정하는데 좋은 차라고 말하며 애써 웃어 보였다. 채비가 학원에 나오지 않아 전화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말하자, 학원에서도 그런 일로 가정방문을 하느냐고 물었다. 원래는 하지 않지만 채비하고는 친한 사이라서 찾아왔다고 얼버무렸다. 그 순간 환하게 웃는 채비 엄마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 내가 말을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채비 엄마가 정말 친한 사이냐고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몹시 당황스러웠다. 이 순간 채비라도 들어서면 어쩌나 걱정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채비가 들어오면 연락해 달라며 인사했다. 내가 갑작스럽게 일어나자 뭔가 이상했던지 이번엔 채비 엄마가 몹시 당황스러워했다. 나는 다시 인사를 하고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넌 뭐가 그렇게 떳떳한 거냐고 물었던 채비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또다시 내가 가해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변명할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이튿날 채비가 학원 앞에서 나를 불러냈다. 채비가 다짜고짜 내 뺨을 때렸다. 나는 화를 낼 수 없었다. 지금 채비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채비가 울면서 물었다.
“뭐라고? 친한 사람? 넌 정말 그렇게 떳떳해?”
난 떳떳해서가 아니라 용서를 빌기 위해 찾아갔었다고 말했다. 채비가 울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비웃으며 말했다.
“넌! 넌 도대체! 어떻게 그 일을 용서할 수 있어!”
내가 머뭇거리자 채비가 내게 정말 이기적이라고 말했다. 나에게 그 인간을 닮아 끔찍하게 염치도 없고 무례하다고 말했다. 나는 채비 엄마에게 큰 잘못을 한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느다란 채비 엄마를 본 순간 너무 염치가 없어 그냥 돌아왔다는 말도, 채비 엄마가 가만히 있어도 바람과 맞서고 있는 풀잎처럼 흔들거리더라는 말도, 채비 엄마에게 그 염치없고 무례한 일을 다시 떠올리게 할 수 없었다는 말도, 그런 사람 앞에서 차마 가해자의 딸이라고 고백할 수 없었다는 말도, 용서조차 빌 수 없더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미안하다고 말했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채비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엄마는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했다.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혹시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다. 채비는 내 말에 대꾸하는 대신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만 거듭하고는 울면서 돌아갔다. 채비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으나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혹시 채비를 아는 친구가 있나 찾아봤지만, 학원엔 채비 친구가 없었다.
수업이 모두 끝나자 원장이 불렀다. 내가 원장실로 들어섰을 때 원장은 어두운 창밖을 보고 있다가 돌아섰다. 원장은 단도직입적으로 게시판에 있는 그 사람이 아버지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원장을 쳐다봤다. 원장이 다시 다그치듯 아버지가 맞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억울하다며 따져 물었다.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러자 원장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핸드폰 화면을 내게 내밀었다. 핸드폰 화면엔 나와 남학생이 함께 찍힌 사진이 있었다. 남학생의 뒤통수와 내 얼굴이 찍힌 사진이었다. 마치 내가 남학생 가슴에 안긴 자세를 하고 있는 것처럼 찍힌 사진이었다. 며칠 전 남학생과 복도에서 대화하고 있었다. 남학생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며 내게 묻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뛰어가다가 나를 밀쳤다. 마주 보고 있던 남학생 쪽으로 떠밀렸다. 엉겁결에 남학생을 안았는데 그 순간을 누군가 찍은 것 같았다. 아마도 채비 같았다. 채비가 일을 조작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내가 성범죄자라도 된 것 같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원장은 비난하는 말투로 내게 지금의 상황을 주지시켰다. 다른 학원에서도 나를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했다. 원장은 혹여 내가 다른 학원에 취직하면 그 원장에게 직접 연락하겠다고 했다.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소리 높여 말하자 원장은 오히려 그 핏줄이 어디 가겠느냐며 조롱했다. 내 안에서 눈물과 비웃음이 뒤섞였다. 이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것만 같았다. 원장실에서 서둘러 나왔다. 뒤에서 원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심을 쓰듯 혹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마지막 급여는 통장으로 이미 넣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제야 연좌제가 핏줄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이 핏줄을 끊어야 끝나는 전쟁이란 것도 알게 됐다. 그러나 또다시 나를 교수대에 올려놓을 수는 없었다. 나 스스로는 끊을 수 없다면 그에게서 끊어야 할 것 같았다.
처음엔 억울하고 분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눈물은 사라지고 헛웃음만 나왔다. 채비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란 사람을 원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란 사람을 지금까지 수도 없이 원망했지만, 나아지는 것도 바뀌는 것도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세상을 원망하고 있었다. 내 처지를 이해해주지 않는 이 사회가 원망스러웠다. 나처럼 연좌의 사슬에 묶인 가해자들의 가족은 침묵할 수밖에 없는 사회란 생각이 들었다. 침묵함으로써 거대한 나선 모양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갈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왜 가해자의 가족은 보호하지 않는 것일까? 이놈의 세상! 세상이 미쳤다며 원망하고 화를 내면 반응이 있을까? 세상은 화풀이할 대상치고는 너무 크고 견고했다. 항상 그랬다. 간혹 썩은 자리에 구멍을 내어주기는 했으나 그 구멍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구멍은 금세 봉합되었다. 적어도 나의 경우엔 항상 그랬다. 채비에게 망가진 내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 따져 묻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도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너처럼 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왠지 그래야만 덜 미안할 것 같았고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용서를 빌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었다.
채비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채비 집으로 찾아갔을 때 집엔 아무도 없었다. 문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누군가 내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아마도 깜박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막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몸이 굳어 빨리 일어날 수 없었다. 나를 깨운 아저씨가 누구냐고 물었다. 채비 학원 선생님이라고 대답하자 아저씨가 돌연 정색했다. 아저씨는 말없이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노크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냥 기다렸다. 한참 후에 문이 열리더니 아저씨가 들어오라고 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서자 아저씨가 문을 잠갔다. 아저씨는 채비 아빠라고 했다. 내가 죄송하다고 말하자 채비 아빠는 돌연 나를 째려보며 자기가 무섭지 않으냐고 물었다. 채비 아빠는 아주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은 아주 건조하고 섬뜩했다. 채비 아빠가 내게 가까이 다가와 양손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한순간 ‘악!’하고 소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잠시 멈칫하던 채비 아빠가 다시 다가왔다. 뒷걸음으로 물러서다가 뒤로 넘어졌다. 이번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채비 아빠가 멈춰 서서 한동안 나를 바라봤다. 채비 아빠가 뜻밖에도 눈물을 흘렸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채비 아빠가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돌아섰다. 채비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순간 물러선 것을 후회했다. 일시적인 감정이었겠으나 그것이 성추행이든 성폭행이든 강간 미수든 강간이든 그냥 당했으면 차라리 속은 후련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채비 아빠가 소파에 앉으며 내게 일어나라고 했다. 내가 일어나 소파 한쪽 끝에 앉자 내게 얼마나 무서웠냐고 물었다. 그제야 채비 아빠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날 그 염치없었던 일에 대해 내게 반문하는 물음이었던 거다. 죄송하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채비 아빠는 그날 내 아버지란 사람이 저질렀던 그 염치없고 무례한 일에 대해 적나라하게 이야기했다. 내게 사실과 직면하라는 경고 같았다. 조금 전 내가 처했던 상황보다 더 끔찍한 상황에 채비 엄마가 놓여 있었다고 말했다. 강간 미수 및 성폭행 사건이었다. 엄마는 내게 쉬쉬했지만, 나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채비 아빠는 이야기하는 내내 담담하려고 애썼으나 순간순간 목소리가 떨렸고 눈물을 닦아내기도 했다. 그 떨림에 따라 내 가슴도 떨렸다. 채비 아빠가 이야기를 끝내고 깊은 한숨을 몰아쉬자 나도 그제야 떨리는 가슴을 진정할 수 있었다.
채비 아빠는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잠시 후 담배 연기를 내뿜더니 세상이 모르는 일이 한 가지가 더 있다고 했다. 어쩌면 나도 모르고 있을 일이라고 말했다.
“그날 채비가 방 안에 있었소.”
순간 나도 모르게 ‘아!’하고 외마디 신음을 토했다. 다시‘아!’하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채비는 거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자 방에서 나왔다고 했다. 채비는 이상한 아저씨가 엄마를 끌어안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했다. 채비 엄마가 들어가라고 소리치자 다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고 했다. 내 아버지란 사람은 소리치면 딸아이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협박했다고 했다.
그 뒷이야기는 나도 알고 있었다. 아래층 아줌마가 채비네 집에 왔다가 채비 엄마가 채비에게 소리치는 소리를 듣고는 문들 두드렸다. 불과 몇 분 전, 일 층에서 아래층 아줌마와 채비 엄마 그리고 아버지란 사람이 함께 승강기를 타고 올라왔다. 아래층에서 먼저 내린 아줌마는 처음 보는 사람이 채비 엄마와 함께 올라간 게 왠지 꺼림칙했었다고 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올라와 봤던 것이다. 아래층 아줌마는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소리쳤다. 아줌마는 비밀번호를 누르는 흉내를 냈다. 당황한 아버지는 그대로 달아났다. 그때 아래층 아저씨가 계단에서 길목을 막았다. 아줌마가 소리치는 바람에 아래층 아저씨가 집 앞에 나왔다가 마주쳤던 거다. 아버지는 가까스로 일 층까지는 도망쳤지만, 일 층 현관에서 고등학교 유도선수 아이들에게 에워 쌓였다. 결국,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채비 엄마는 채비를 지켜주기 위해 채비가 방 안에 있었던 일을 숨겼다고 했다. 채비를 언론에 노출할 수 없었다고 했다. 내 아버지란 사람도 잠자코 있었다고 했다. 염치없게도 아버지란 사람은 아이가 있었던 상황이 자기에게 좋은 상황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을 거라고 했다. 나는 어린 채비를 생각하자 이야기를 듣는 내내 꼼짝할 수 없었다. 일어나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 내게 뭐가 그렇게 떳떳하냐고 물었던 채비의 눈빛이 또다시 떠올랐다. 채비는 나와 달랐다. 나는 사슬에 얽힌 주변 사람이었지만, 채비는 사건 피해자였다. 채비를 만나 나도 너와 같은 처지라며 하소연하려던 내가 참 염치없고 부끄러웠다.
채비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비 엄마가 병원에 있어 가봐야 한다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내가 다녀간 다음 날 호흡 장애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내가 다녀간 이후 뭔가 이상했던 채비 엄마는 학원에 전화해서 내 집 주소를 알아냈다고 했다. 피해자와 같은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했다. 그러고는 내가 누구인지 채비에게 확인했다고 했다. 그러고는 쓰러졌다고 했다. 학원으로 찾아와 내 뺨을 때리며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한 채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채비가 흘린 눈물이 내 얼굴에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채비의 눈물은 뜨겁고도 차가웠다.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나와 눈물샘을 틀어막듯 눈을 꽉 감았다. 눈물을 닦은 후 눈을 다시 떴다. 그러고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도 함께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채비에게 용서를 빌 수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오히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 채비까지 사지로 몰아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냥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보름이 넘게 원룸 안에 갇혀 있었다. 나 자신에게 벌을 내리듯 스스로 갇혔다. 풀잎처럼 가늘었던 채비 엄마를 닮아가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무슨 일인지 밖에는 매일 비가 오는 것 같았다. 홍수가 나서 세상이 떠내려가는 꿈을 반복해서 꾸었다. 다 떠내려간 후에 밝은 세상이 다시 오기를 희망했다. 날짜 가는 것을 잊을 즈음 채비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 엄마가 나를 부른다고 했다. 밖으로 나왔을 때 거리엔 홍수는커녕 빗방울 하나 없었다. 세상은 언제나 그랬듯 항상 잘 흘러가고 있었다.
병원으로 달려갔다. 풀잎 같았던 채비 엄마는 더 가늘어져 있었다. 그 가는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앙상한 손가락 뼈마디가 온전히 느껴졌다. 채비 엄마는 다 용서한다고 말했다. 처음엔 그의 가족인 엄마와 나도 모두 용서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한 번은 엄마가 찾아와 용서를 빌었지만, 용서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와 엄마를 다 용서했다고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잘 못한 게 없지 않느냐고 했다. 오히려 나에게 얼마나 힘드냐고 물었다. 나는 그 가는 손을 쉽게 놓을 수 없었다. 학원 게시판에 그가 공개되었던 그 날 이후 처음으로 느끼는 타인의 온기였다. 가냘프면서도 뜨거운 온기였다. 채비 엄마의 뜨거운 온기가 참고 참았던 내 눈물을 마중이라도 한 듯 그제야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날이 밝아오자 채비 엄마는 웃으며 세상을 떠났다. 채비 생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채비가 나에게 자기 엄마에게 절할 기회를 줬다. 나는 절을 한 후 한쪽 구석에서 장례식 내내 자리를 지켰다.
채비 아빠는 내게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했다. 채비 엄마는 그 염치없었던 사건이 있기 이전에도 몸이 안 좋았었다고 말했다. 어차피 오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하늘이 원망스러운 것은 그 짧은 인생에 그런 끔찍한 일을 겪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채비 아빠는 하늘이 원망스럽다고 말했지만, 난 이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신상공개는 오히려 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용서하는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죗값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가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도 힘들게 하는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란 사람은 이런 식으로 용서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몸이 아픈 사람을 영혼까지 아프게 하고 결국은 죽게 했다. 영혼 살인죄, 그것이 본래의 죄명이었는지도 몰랐다.
며칠 후 햇살이 눈부시게 밝은 날이었다. 염치와 수치를 드러내놓기엔 딱 좋은 날씨였다. 나는 나를 온전히 드러내놓고 집 앞 골목을 걸어 들어가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은 달갑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날이 밝은 만큼 그림자는 더 선명했다. 나를 옭아맨 거미줄이 연좌의 사슬이든 핏줄의 사슬이든 끊어내기 위해 그 앞에 앉았다. 왠지 그가 참 작게만 느껴졌다. 그에게 채비 엄마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왜 하필 그렇게 아픈 사람에게 그 짓을 했냐고 원망하듯 물었다. 그가 고개를 들더니 야릇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저 끔찍한 미소로 채비 엄마를 욕보였을 것을 생각하자 숨이 꽉 막혔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나도 그 여자가 아프다는 걸 알고 있었지.”
끔찍하게도 그는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또 말했다.
“난 아픈 여자에게 매력을 느껴. 순백의 백지장 같잖아.”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주먹을 꽉 쥐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고개를 저으며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말해줬다. 한없이 나약한 인간이라고 말해줬다. 저항할 힘이 없는 연약한 여자를 선택했을 뿐이라고 말해줬다. 치졸하고 비열하다고, 악마라고 또박또박 말해줬다.
결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자 그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어깨를 미세하게 들썩거렸다. 그 얼굴 아래 방바닥에 약봉지를 내려놓았다. 들썩이던 어깨가 멈칫하더니 동상이라도 된 것 같았다. 옆에 있던 엄마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순간 내 심장에서 쿵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난 심호흡을 하고 나서 그에게 말했다. 늦기 전에 빨리 쫓아가서 용서를 빌라고 했다. 휘수 아줌마가 천국으로 올라가면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감히 지옥에선 올려다볼 수도 없을 것이라고 말해줬다. 옆에 있던 엄마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엄마가 불쌍했다. 함께 나가자고 했지만, 엄마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저런 사람도 남편이라고 곁을 지키는 엄마도 미웠다. 나는 그렇게 천륜이라는 핏줄을 끊고 집에서 나왔다.
집 앞 골목엔 여전히 햇살이 가득했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편의점 앞에 여중생들이 서너 명 모여 있었다. 자기들끼리 떠들다가 나를 알아보고는 바라봤다. 간혹 골목에서 마주쳤던 아이들이었다. 내가 그냥 지나치려 하자 그중 한 아이가 언니라며 나를 불렀다. 내가 멈춰 서서 고개를 돌리자 그 아이가 말했다.
“언니 잘못이 아니잖아요.”
저녁 무렵 조그만 이삿짐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아주 먼 곳을 향해 달렸다. 그때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나서 전화를 받았다. 엄마의 떨리는 숨소리가 들여왔다. 엄마에게서 그의 소식을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떠난다고 말하자 이렇게 말했다.
“네 아버지란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지켜야 했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엄마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나도 더 캐묻지 않았다. 엄마는 그의 곁을 지켰던 것이 아니라 그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또다시 쿵 하는 내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세상을 원망하던 그 오랜 시간 동안 엄마는 세상을 지키고 있었다. 엄마가 말했다.
“이놈의 거미줄은 참 끈질기구나.”
연좌의 사슬을 감당해 낸 것은 내가 아니고 엄마였다. 나는 침묵의 소용돌이 밖으로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지만, 엄마는 침묵의 소용돌이 속으로 스스로 빨려들어 가 세상을 지켰다. 엄마는 이제 다 끝났다고 말했다. 엄마가 끝냈다고 했다. 엄마는 또 이 밤이 다 지나고 나면 반듯이 새로운 해가 떠오를 거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창밖으로 까만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제 초저녁인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새로운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첫댓글 범죄자 가족에 대해 쓰셨네요 결국 가족도 피해자죠
가족에 대한 어떤 대책이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주변 가족들이 감당해야 하는 아픔에 공감가네요. 끝맺음에 많은 고민을 하셨을 것 같아요.
네ㆍ갈팡질팡 하다가 나름은 스스로 구원하는 길로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