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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밤
잠을 찾습니다
인썸니아(Insomnia)
사냥용 뿔피리 상아각적
죽음의 의사 "잭 케보키언"
니체와 치매
《인썸니아》는 불면증을 뜻하는 의학 용어이다. 2002년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솔직히 말하면 상당히 지루했다고 생각하며 본 영화이다. 재미가 없어서 돈 아까워 잠이 안 왔다. 진심 인썸니아를 불러오는 영화였다. 세월이 흘러 다시 보니 명대사들로 넘쳐난다. 내 삶과 닮아있어 공감이 간다.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로빈 윌리엄스(1951~2014)의 세상에 없는 따뜻한 웃음도 그리워진다. 그는 어떤 배역이든 완벽하게 소화할 줄 아는 자였다. 소처럼 위가 네 개 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밝은 삶의 뒤안길엔 죽을 만큼 서늘하게 깊은 그늘이 있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몰랐다.
Days never end.
'낮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Nightmares are real.
악몽은 현실이다.
No one is innocent.
누구도 무고한 사람은 없다.
내 안의 두려움은 언제나 존재했다. 씨족을 지키기 위해 수천 년 전 "므두셀라 (Methuselah) 나무 아래, 잠과 싸우는 전사, 그의 잠을 훔쳐 오고 싶다. 잠은 죽음이다. 밤이 두렵다. 원수 같은 시간이 생살을 파먹는다. 생명의 바다인 양수를 들이마시고 살아 퍼덕이는 나를 재우고 태반 속에 고이 싸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다. 주문을 외워야겠다. 잠이 나를 불러야 하는데 어느 날부터 내가 온갖 약과 최면으로 잠을 불러야 한다.
인디언 주술사인 레인 메이커’(rainmaker)가 된다. 100년 만에 최악의 가뭄에 비를 부르듯 간절하게 내가 잠을 초대해야 한다. 내 잠을 갉아먹는 좀벌레 같은 악몽에 시달리는 고단한 잠이 되지 않기를 기도해 본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조용히 신을 벗고 뜨거운 대지의 솥뚜껑 같은 땅에 원을 그리면서 걷고 또 걷는다. 그는 비를 내려달라고 빌지 않았다. 그냥 비가 오는 의식을 치르자 천둥이 치고 마른하늘에 폭우가 쏟아졌다. 그는 비가 올 거라고 믿었을 뿐이다. 잠이 오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멈추지 말고 주문을 외워야 한다. 잠의 칼날이여! 대지를 뚫듯이 내 대갈통을 후려치길!
황금으로 만든 호랑이 Cara의 송곳니, 희귀한 아이스맨 외치의 RhD 음성 O형 피, 그린란드 상어의 푸른 심장, 검은 과부 거미의 진득한 타액과 고대 어류 둔클레오스테우스의 거대한 투구와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매머드의 가슴 털을 태워 만든 마법의 묘약을 베개에 뿌려야겠다. 나는 현세에 너무 많은 업을 쌓았다. 잠과 시비 털고 싸우는 맹목적인 습관과 싸워 이겨야 한다. 심장이 나에게 호통을 친다. 그만하라고, 제발 혼자만의 싸움을 멈추라 한다. 언젠가는 오겠지? 그 언젠가가 언제일까? 새가슴이 작다고 비꼬지 마라. 넌 언제 그렇게 부푼 가슴으로 웅장한 삶을 살아 본 적 있는지?
별과 별 사이를 줄긋기 하며 달린다. 엄마가 똑바로 선을 그으라고 야단친다. 깡충깡충 뛰어다닌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하루 동안 쏟아낸 똥 같은 말들은 오늘도 부패해 이승을 떠돌다 나를 괴롭힐 것이다. 가장 끔찍한 인간인 난 오늘도 경솔하고 천박한 행동의 기름때를 구석구석 뇌 사이에 키웠다. 날마다 반성한다. 끔찍하게 추한 나를 태워버리자! 언제나 인생 초보자, 어디로 가야 할까? 절망의 끝에서 춤추는 몸에 마취제를 쏜다. 거대한 코끼리를 잡아 상아로 피리를 만든다. 상아각적, 피리에 독화살을 끼워 나에게로 날리는 밤, 잠이여, 너의 황홀한 파티로 제발 나를 초대해 달라!
인생이 되는 것도 아니고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수면제, 항우울제, 정신과 약을 음미하며 먹어보았다. 미뢰 고문용 최고의 무기이다. 어린 시절 딸기맛 감기약을 먹는 동생이 부러워 아픈척했다. 달달한 위로가 필요한 시간, 쓴맛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난 점점 더 미쳐가고 가면은 더욱 두꺼워지지!
수면 안대를 샀다. 추워서 떨다가 죽어가는 레몬빛 병아리의 눈꺼풀이 부러워지는 밤, 소소리바람 같은 잠이 그리워진다. 숨을 쉰다는 것, 잠을 잔다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노동인지를 알아버린 오늘, 쉰이 넘은 나이, 지천명 하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의무적으로 오십이 넘으면 존엄사를 신청하도록 권면해야 한다. 하루라도 더 품격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운전면허 갱신처럼 인생 교육도 다시 해야 한다.
삶의 고수가 되는 길은 막연히 나이만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품질이 나쁜 삶은 살아내야 할 고문이다. 내 의도가 아니라 억지로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가혹한 고문을 받고 싶지 않다. 쉰이 넘으면 생사를 스스로 냉철하게 결정하게 해야 한다. 우주 삼라만상이 업을 따르는데 인간만이 수명을 늘리기도 줄이기도 한다.
2019년 뇌졸중으로 수술을 받은 내 사랑 아니 전 인류 여자들의 로망 알랭 들롱이 존엄사를 신청했다. 그는 이제 어느 별로 가게 될까? 이 불편한 세상 너머 저 편한 세상 X 아파트의 선착순 분양을 우연을 가장하여 그의 앞집으로 선택하고 싶어진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숙명이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 현명해져야 한다. 우와<~한 나이를 지나 우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이 필요하다.
제이컵 "잭" 케보키언(Jacob "Jack" Kevorkian, 1928년 5월 26일~2011년 6월 3일)은 미국의 병리학자이자 교육자, 의사, 사상가이다. 그는 '죽을 권리'를 주장해 유명해졌으며, 실제로 말기 환자들을 선별하여 안락사를 실행했다.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52세 남성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장면은 1990년대 방송에 나와서 논란이 되었다.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이 사건은 명백한 증거로 남아 그는 2급 살인죄의 명목으로 수감되었다.
그는 일명 죽음의 조력자이다. 130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안내한 충실한 인도자이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내겐 일종의 깨달음을 얻기에 충분한 명분이었다. 그의 해맑은 웃음과 자긍심이 넘치는 모습은 당당했고 자신은 봉사자라는 사명감에 넘쳤다. '죽음의 의사(Dr. Death)'라는 위대한 작위를 얻었으며 미시간 주 콜드워터 레이크랜드 교도소에 갇혀 8년 6개월간의 복역을 했다. 그러나 반성하지 않았고 굴복하지도 않았다. 실천하는 지성의 삶은 역시나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는 유명해지긴 했지만 사업에 실패했다. 삶과 죽음의 품질을 위해 헌신한 의사의 말로는 비참했다. 수많은 논쟁에 휘말렸으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신념의 인간이었다. 모두가 객사하는 외로운 시대에 존엄한 죽음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 자이다. 위대한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말로는 봉사하기 위해 정치를 한다거나 헌신한다 하는 자들로 넘쳐난다. 그는 수많은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죽음에 대한 조언을 했다.
의사의 조력에 의한 자살 혹은 안락사를 주장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리스어로 죽음의 기계라는 뜻의 "타나트론(Thanatron)이란 기계를 발명하였다. 생리 식염수, 진통제, 염화칼륨 등 45달러의 가성비 좋은 재료가 주입되면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훅 가게 만든다. 안타깝게 이 혁신적인 발명품은 빛을 못 보고 사장되었다.
양자역학보다 더 신비로운 세계를 열었지만 동료 의사들의 냉대를 받았다. 환자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시설인 "오비토리움(obitoriums)"을 프랜차이즈화해야 한다는 위대한 사상은 묵인되었다. 지옥의 묵시록처럼 세월의 검은 융단으로 덮여버렸다. 그냥 관심의 대상일 뿐 상용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의 얼굴은 위대한 장인의 손에서 도려낸 탈처럼 상하가 분리되어 웃는 것처럼 야릇하게 늙어갔다.
사형수들의 장기나 뇌를 꺼내 인류에게 마지막으로 봉사할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참신한 아이디어도 제시했다. 광기 들린 무녀처럼 신들린 아이디어를 마구 쏟아냈다. 전쟁에서 죽은 자의 피를 빼 산자에게 넣자고 미국 국방부(Pentagon)에 전달했다. 베트남전에서 활용하고자 했으나 동료 의사들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그가 옳은지 아닌지는 해석하기 나름이다. 절대적인 옳고 그름은 신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는 어떻게 죽었을까? 수많은 이들을 평온하게 재우고 미친 실행력을 발휘하다가 미국 미시간 로열 오크 윌리엄보몽 병원에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살아생전 그는 니체를 좋아했다.
노련한 발골사의 칼질처럼 고통은 오늘 밤도 늑골을 정교하게 파고든다. 지옥의 맛이 밀려온다. 죽음이 조금도 망설여지지 않은 날, 비로소 죽음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나라에서 태초의 빗물에 머리를 감는 해오라기, 깃털 끝에 쉼표를 달고 오는 하루! 난 또 하루를 도돌이표로 답했다.
악몽이 헤집고 파고든다. 이틀째, 교육청 직원들이 집안을 수색하고 젊은 30대 남자 직원의 호통 소리가 이소골을 파고들었다. 전에는 좋아했던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어느새 공포로 바뀌었다. 특정 아나운서나 유튜버의 목소리에 내가 띠꺼움을 느끼는 이유가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걸 우연히 알았다. 3년 전 코로나 때 겪은 충격으로 그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인과응보가 조금도 없는 이승에서 난 지독한 정신병을 홀로 앓고 있었다.
용서가 그리 어려운가? 신이 질문을 던진다면 난 뭐라 답할까? 트라우마의 고삐를 단단히 잡고 토리노의 말처럼 끌어안아야겠다. 니체의 고뇌가 내 뇌의 일부가 되는 밤이다. 그냥 살았다. 내가 아는 자중 나보다 열심히 산자는 없으나 나처럼 많이 망한 자도 없었으니 행복과 불행은 이상하게 같다. 더 이상의 불행이 없으므로 더 이상의 행복도 없다.
어느 날 암이 찾아와 말을 건다면 난 내 심장처럼 구멍 뚫린 엽전 한 닢 같은 삶을 구걸하는 앎을 얻으리라! 구체적인 내 몸의 어느 부분이 고장이 났는지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을 달고 다니는 미래가 올 수도 있다. 자율주행 기기가 내 몸에 달려 원치 않는 나를 달리게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정신 줄잡자. 다짐하는 밤, 치매에 걸리는 순간 내가 원하지 않는 요상한 삶을 떳떳하게 살게 될 것이다. 기억이 곧 나이다. 팔순이 넘어 "까까 사주세요."라고 누군가에게 어린아이처럼 양손 내밀고 싶지 않다. 내 품위는 스스로 지키고 살다 가고 싶다.
1초에 30만 킬로를 달리는 태양의 발 빠름을 우리는 영원히 따라 잡지 못한다. 지구가 심장에 품은 모든 석유를 다 써도 우리는 광속으로 달리지 못한다. 설령 광속으로 달린다고해도 죽음 보다 빨리 달리진 못할 것이다. 안드로메다의 유혹은 어쩌면 인류의 최고 구라! 갈 수 없기에 꿈꾸는 것일까?
머리통을 던지면 수박처럼 붉게 터질까? 석류처럼 구슬이 쏟아질까? 무화과처럼 갈라질까? 민들레처럼 멀리멀리 날아갈까? 잘 모르겠다.
인생의 비극에 굴복하는 한 끝까지 불행해진다.
내가 꿈꾸었던 삶의 백분의 1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섯 개의 화살처럼 여섯 아들 낳고 각자의 왕국을 주고 싶었다. 바보 같은 노인이 되어 누가누가 잘하나의 주인공 어린이처럼 치매를 기다리며 열심히 손으로 노를 저으며 노래하듯 살아야 하는 내 삶의 두터운 장벽을 부수고 날아가고 싶다. 깨도 깨도 내 포춘 쿠키 속엔 언제나 야릇한 단어들만이 존재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싶다. 오랜만에 모임에서
P 교장선생을 만났다. 그동안 수행자의 삶을 고백했다.
"마누라가 나를 도둑이라고 112에 신고해서 열두번을 경찰서에 갔다 왔어. 평생을 안 해본 짓을 다해보네. 진술서 쓰고 풀려나고 반복하기를 여러 차례 하느라 그동안 바빠서 모임도 못 나왔네 "
나도 그러했다. 코로나 겪고 끌려간 경찰청 창살 쇠창살, 도를 닦았다. 수십 번 변기에 앉아 연습해 본다. 경찰청 창살 쇠창살.... 치매가 오면 다 잊으리라! 정녕 잊으리라! 죽어도 아니 잊고 알츠하이머가 손님처럼 온다면 해맑게 웃고 다 용서하고 털고 가리라! 지금은 아니 잊고 치매가 손님처럼 백마를 타고 오신다면 그때서야!
"내가 남편이고 얼마나 마누라를 사랑하는지 수백 번 설명해 주느라 힘들었어. 지금은 달래고 얼러서 이제 내말 잘 듣고 하루에 딸기랑 오이, 토마토, 두부.. 소꿉놀이하듯 차려주면 세 살 난 아이처럼 순하게 말도 잘 들어. 둘이 꼭 손잡고 산책도 매일 하고 머리도 감겨주고 나라에서 돈도 줘! 이렇게 예쁜 치매 마누라랑 120살까지 꼭 같이 살고 싶어!"
예쁜 치매! 새로운 단어를 배웠다. 치매도 순한 맛과 매운맛, 핵폭탄 맛이 있나 보다. 난 노망이라는 밉상 단어밖에 안 떠오른다. 정말 그럴 것 같다. P 교장선생님의 말은 띵언이었다. 지붕 아래 누군가가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를 배웠다. 혼자가 된다면 날마다 삶이 공포 영화가 될 것 같다. 그에겐 치매 걸린 노인이지만 착한 아이처럼 존댓말 따박따박쓰고 때까치처럼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꼬마같이 순해진 아내가 사랑스러운 존재인 보다.
그의 말은 행복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새로운 시대 신인류의 종교 지도자 같았다. 난 그를 우러러봤다. 그는 진짜 바보 같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 구루였다. 존재를 잃어버린 그녀는 어떠할까? 그가 원하는 그 삶은 그녀가 그토록 살기를 원했던 삶인지 아니면 두려워했던 삶인지? 궁금해진다.
2024년 2월 5일 가톨릭 신자인 드리스 판 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가 자택에서 부인과 동반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93살 동갑내기인 아내와 70년을 함께 산 그는 2019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안락사를 결심했다. 원치 않는 연명을 거부하는 그의 초연한 모습이야말로 노을의 붉은빛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하는 내 열망과 닮아있다.
시간이 좀 더 흐른다면 나에게도 결정의 순간이 오겠지! 죽음이 노크를 한다면 문을 열고 기다릴 것인가? 이불 속에서 버틸 것인가? 내가 먼저 사자를 초청할 것인가? 나날이 낡아지는 육신을 수리하며 살 것인지? 던져버릴 것인지? 조금이라도 제정신일 때 우리에게 결정할 권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것들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지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첫댓글 잠을 청 하려다가 다가선 글 내 잠을 몽땅 훔쳐가 버리십니다.
어쩌면 이토록 멋진 글을 쓰시나요
그리고 이른 글을 써시려 고뇌 하시니,
인디언 기우제 부디 계속 드리십시오.
좋은글 또 접할수 있게 말임니다.
선생님의 아름다운 댓글에 심쿵합니다 선한 감동의 글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휴일되세요 선생님의 글도 보고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