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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중국 선종사
4. 달마達磨 그후
1) 혜가慧可의 진실
보리달마의 선법은 혜가慧可 외 도육道育, 승부僧副, 담림曇林, 이총지尼總持 등에게도 전해진다. 780년 전후에 성립된『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는 ‘당나라에는 나의 법을 얻은 자가 셋이 있는데, 한 사람은 나의 골수를 얻었고, 한 사람은 나의 뼈를 얻었으며, 한 사람은 나의 살을 얻었다. 나의 골수를 얻은 이가 혜가惠可이고, 나의 뼈를 얻은 이는 도육道育, 나의 살을 얻은 이는 이총지尼總持이다.’(大師云。唐國有三人得我法。一人得我髓。一人得我骨。一人得我肉。得我髓者惠可。得我骨者道育。得我肉者尼總持也。(《曆代法寶記》大正新脩大正藏經 Vol. 51, No. 2075)라고 기록하고 있다.
달마가 혜가에게는『능가경』을 전해주었다고 하는데, ‘나에게『능가경楞伽經』 네 권이 있으니 이도 또한 너에게 부촉하고자 한다. 이것이야말로 여래의 가르침의 핵심이니, 이를 가지고 중생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들게 하라(師又曰。吾有楞伽經四卷。亦用付汝 卽是如來心地要門。令諸衆生開示悟入。)’고 했다고『경덕전등록』은 기록하고 있다.『능가경』은 붓다의 가르침의 본질을 다섯 가지로 구분한 오법五法, 의식에 의해 형성되어 있는 현상의 세 가지 성질인 삼성三性 그리고 팔식八識과 이무아二無我 등을 설하고 있다.
이들 내용이 돈황에서 발견된 초기 선종의 어록과 사서史書에 자주 등장하고 있어,『능가경』이 선종 초기 많이 읽히는 인기 도서였음을 알 수 있다. 달마는 또 제자의 청에 의해 주석서인『능가요의楞伽要義』를 썼다고 전한다. 혜가 또한 제자들과『능가경』해설서를 저술하였고, 이후 5조 홍인에 이르기까지 모두『능가경』해설서를 저술하였다고 한다.『능가경』은 선종의 소의경전이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담림의 서문에는『능가경』에 대한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왜 서문에는『능가경』에 대한 내용이 없었을까? 그 이유는 이렇다. 달마가 활동할 당시에는『능가경』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들의 연관성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달마와『능가경』의 결부結付는 다음 세대인 법충(法沖, 597~665?)에 이르러서야 구체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속고승전』「혜가 전기」에 따르면, 보리달마가 구나바드라 번역의『능가경』을 선택하여, “내 생각으로는 중국에서 번역된 경전 가운데 이 이상은 없다. 여기에 의지하여 실천한다면 그대는 반드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하면서 이 경전을 혜가惠可에게 주었으므로, 혜가와 그 동료들이 항상 이 경전으로써 마음의 의지처로 삼았다는 기록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달마와 그 제자들의 말을 수집 기록한『2입4행론二入四行論』속에서는 담림曇林이 기술한 맨 앞부분에『능가경』에 의거한 듯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 것은 도시 웬일일까? 그것은 물론 담림의 편집으로서 혜가에게 계승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으나, 주목되는 점은 그러한『능가경』과 달마 · 혜가의 결부가 오히려 후대의 설이며, 법충의 시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뚜렷한 전통으로 된 듯한 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단자에 의해 후에 보완된 역사였던 것이다. (柳田聖山 著 / 楊氣峰 譯,『초기선종사, 능가사자기·전법보기』 p. 24.)
사상적으로도 맞지가 않은데, 달마의『이입사행론』은 대승의 공관사상空觀思想에 기초하고 있는 반면『능가경』은 반야사상般若思想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달마는『유마경』을 중심으로 한 공空사상에 서 있었던 반면,『능가경』은 반야사상을 중시하는 종파인 삼론종三論宗과 깊은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유식계통의『능가경』은 달마와 관계가 없고, 그러므로 해서『능가경』을 혜가에게 주었다는 설정 또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다. 물론 반야사상과 공관사상이 모두 대승사상의 핵심으로 동일 선상에 있지만, 공空이란 일체의 현상계가 존재하는 법칙이고, 이러한 공의 실상을 파악하는 일이 반야여서 차이가 있다.
『속고승전』「혜가장」에는 혜가는 40세에 달마를 만나 6년간 공부하였지만 46세에는 달마를 떠났다고 되어 있다. 더군다나 혜가를 직접 계승하는 사람들도 없어 그의 계통은 끊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자에게 법을 이었는지도 불분명하여, 달마-혜가로 이어지는 달마의 선법은 애초에 다음으로 이어지지도 못하였던 것이다. 혜가가 달마를 떠나고 나서『능가경』을 만났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2조에서 5조 홍인까지의 선사상 역시 반야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후에 중국 정토교淨土敎를 대성한 자로 알려진 선도善導(613~681)나, 화엄종 2대 조사라는 지엄智儼(?~668)의 완전한 전기가, 중세 불교의 대표적인 고승의 전기집인『속고승전續高僧傳』속에 보이지 않는 것은 대관절 무엇을 의미하는가? (중략) 뒤에 선종 3대 조사로 불리는 승찬僧璨의 전기도 역시『속고승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름이 나타난 것은 후에 전통 선종 계열에 속하지 않는 법충法沖(597~665?)의 활동을 전하는 대문이다. 법충이라면 오늘날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시대에 살면서『속고승전』을 편찬한 도선道宣(596~667)조차도 처음에는 그 존재를 모르다가, 만년에 가서야 비로소 그 눈부신 활동을 알게 되자 부랴부랴 그 전기를 보완했던 것이다. (柳田聖山 著 / 楊氣峰 譯,『초기선종사, 능가사자기·전법보기』 p. 19.)
덧붙이자면 제3조라고 불리는 승찬僧粲에 관해서도『속고승전』「법충장」에 혜가의 법사法嗣로 한 번 거론되었을 뿐 그렇다할 기록이 없다. 4조 도신道信 역시 불가사의[神異]한 승으로 묘사되는 두 명의 선승에게 선을 익혔다고 되어 있을 뿐, 어떤 종류의 선이었는지 그의 선사상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불분명의 연속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단순히 선종의 “불출문기不出文記”, 즉 글을 남기지 않는 속성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를테면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선종의 사자전승師資傳承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 선법이나 사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래의 논자들은 대부분 달마에서 승찬까지만 楞伽師로 인정하지만 『속고승전에서 달마의 선을 虛宗으로 칭하고 있어 홍인이나 혜능 이전에 이미 반야선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虛宗은 반야공의 뜻으로 종래 쓰여 왔다. (박 건주(전남대 종교문화연구소),「근래 道信禪師 禪法 연구에 대한 반론(2)」.)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면,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혜가 사상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그로부터 능가종楞伽宗이 발전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혜가 이후 달마-혜가의 교시를 전승하였다고 자임自任하는 능가사楞伽師들이 등장하였고, 그들이『능가경』을 주석하면서 달마와 혜가의 입을 빌려 자파의 입장을 기록하였다는 추론은 가능하다. 근래 일본 학자들 사이에는 안심 사상 또한 달마가 아닌 혜가의 것이었고, 안심법문을 통한 전법 또한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현재 일본 학자들 중심으로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니 가까운 시일에 복면을 벗은 혜가의 얼굴을 기대해 본다.
2) 마하지관摩訶止觀에서 이입사행으로
일본의 학자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 1921~2006)은 달마의『이입사행론』은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8)의 명저『마하지관摩訶止觀』때문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선종 초기『이입사행론』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 데에는 천태계의 실천적 수행론인『마하지관』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경쟁관계에 있었던 달마계의 사람들은『마하지관』에 비견되는 사상을 찾으려고 하였고, 그 과정에서 대항마로 찾은 것이 달마의 선사상이라는 주장이다. 자파의 독자적 선사상을 세우기 위해 발굴되고 체계화한 것이 달마의『이입사행론』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종의 4조라고 불리우는 기주 쌍봉산의 도신(道信, 580~651) 및 5조홍인(弘忍, 601~674)의 무렵이며, 그들이 그곳을 중심으로 하여 활동하였다고 하여 東山法門이라고 불리우는 초기 중국선종의 역사는 바야흐로 천태의《마하지관》에 대한 대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말하자면 천태계의 止觀의 실천과의 상위점을 지의보다도 오랜 보리달마의 교설에서 찾은 것이 중국선종의 출발이었다. (야나기다 세이잔/추만호, 안영길 엮음,『선의 사상과 역사』p. 88.)
말하자면 4조 도신道信과 5조 홍인弘忍으로 대표되는 동산법문東山法門 사람들이 천태계의 수행법인 지관법에 대응하기위해, 지의보다 앞선 인물인 보리달마의 교설 중에서 그 해답을 찾았고, 그 돌파구가 된 것이『이입사행론』이었다는 것이다.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지의보다 앞선 인물인 보리달마의 사상을 채택하여 그들의 선종사에 접목하였고, 정치적인 상황까지 유리하게 작용하여 초기 선종사가 성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隋 왕실의 보호를 받아 욱일승천하는 것과 같이 번영하고 있던 초기의 천태교단이 唐代에 들어와 급격히 쇠퇴했던 것에 비해서, 당초에는 거의 유력한 지지자를 갖지 못했던 달마계통의 선종이 당 왕조 제4대인 측천무후(624~705)의 혁명이 일어날 무렵에 이르러, 때마침 장안에서 번영을 구가하고 있던 화엄의 철학과 서로 결합하면서 일시에 성대하게 되는 것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야나기다 세이잔/추만호, 안영길 엮음,『선의 사상과 역사』p. 88.)
그들의 사상이 천태계통과는 구별되는 하나의 새로운 중국불교의 흐름이라고 깨닫게 된 것도『마하지관』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인도선의 최종적인 완성이 천태의『마하지관』체계이기는 하지만, 아직 인도적인 신이神異의 잔재를 불식시키지 못하였는데, 이를 완전하게 극복하고 승화시킨 것이 중국 선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종의 공헌은 중국선의 완성에 있다고 야나기다 세이잔은 말한다.
당시는 호흡이나 관법 수행 등 소승선법은 번뇌를 끊게 할 뿐 아니라 더불어 신통력을 얻고 건강과 장수를 누리는 수행법으로 여겨졌다. 이런 점에서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중국인의 기질과 맞아 발전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 발전시킨 달마의 선법은 이러한 신통신앙神通信仰을 과감히 타파하고, 신이를 걷어 내었을 뿐 아니라, 실용주의에 입각한 인간중심의 종교로 탈바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원래 중국선종의 주장과 인도의 선정사상禪定思想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선을 익히는데 수반하는 초현실적인 신통신앙神通信仰과 그것으로부터의 벗어남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중국선종사中國禪宗史의 흐름은 이러한 신비한 신통사상의 극복과 인간의 것으로서의 선사상禪思想의 역사적 형성에 지나지 않는다. (야나기다 세이잔/추만호, 안영길 엮음,『선의 사상과 역사』p. 160.)
달마는 벽관이라는 좌선 중심의 새로운 불교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소승선에서 대승선으로 가는 전환점에 위치해 있었고, 어느새 새로운 불교 운동의 주역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를 발굴 발전시켜 나갔던 선종은 중국 선법에 남아있던 신비적 요소를 탈색시키는 한편 달마를 초조로 하는 인간 중심의 불교를 일으킨다. 이후 선종은 명실공이 세계 불교를 대표하는 최고의 종파로 부상하였다.
3) 능가사楞伽師와 동산법문東山法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07년 둔황 막고굴莫高窟에서『전법보기』『능가사자기』그리고 달마의『이입사행론』등이 발견되었다. 그 중 713에서 716년경 사이에 성립된 정각淨覺의『능가사자기』는 달마가 혜가에게『능가경』을 전해주었다는 것을 밝히고,『능가경』을 전지傳持한 8대 24인에 이르는 사람들의 전등 유래와 그들의 어록을 수록하고 있다.
『능가경』은 구나바드라(Guöabhadhra,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394~468)가 443년에 번역한 것이다.『능가사자기』에는 구나바드라 삼장三藏을 초조로 하여, 2조 보리달마菩提達摩 - 3조 혜가 - 4조 승찬 - 5조 도신 - 6조 홍인 - 7조 신수神秀 - 8조 보적普寂 · 경현敬賢 · 의복義福 · 혜복惠福 등으로 전승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선종 초기, 이른바 순선純禪시대 북종선 계열 선사들의 계보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들 능가사楞伽師들은『능가경』을 소의경전으로 삼아 두타행을 행하였다고 전하는데, 능가사들에 대한 기록은『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이나『속고승전』의 기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보다 앞선 개원開元 원년 (712~) 두비杜朏가 편찬한『전법보기傳法寶紀(712?)』에는 숭산 소림사의 석보리달마를 선종의 초조로 기록하면서, 홍인 다음에 6조 법여法如, 7조 신수神秀로 법통이 이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종이 남북으로 나뉘기 이전, 북종선北宗禪의 전성기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전적典籍들은『전등록』성립 이전 초기 선종사의 계보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능가사자기』는 홍인의 10대 제자로 혜능(慧能: 638~713)의 이름이 올라있는 유일한 책이다. 그 기록은『능가사자기』「홍인」장에서 볼 수 있는데, 홍인은 신수와 혜능 그리고 그 외에 홍인의 제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다만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제자로는 신수를 꼽았고, 혜능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어느 한 지방에 국한돼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신수에 비해 평이 좋은 편은 아니다. 어쨌든 선종禪宗 제6조이자 남종선南宗禪의 시조가 된 혜능에 대한 당시 평가를 볼 수 있어 흥미롭다.
나는 일생 동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을 가르쳐 왔으나, 뛰어난 사람은 모두 죽고 말았다. 뒤로 나의 도를 전할 자는 불과 10여명일 것이다. 나는 신수와 더불어『능가경』에 대하여 이야기했는데, 그는 깊은 도리를 터득하는 점이 뛰어나 있었으므로 틀림없이 많은 사람에게 유익한 사람이 될 것이다. 자주資州의 지선智詵과 백송산白松山의 유주부劉主簿는 불법과 아울러 학문적 능력이 있다. 화주莘州의 혜장惠藏과 수부隨州의 현약玄約은 기억되기는 하나 그 소식을 알 수 없다. 숭산嵩山의 노안老安은 뛰어난 도의 실천자였다. 누주潞州의 법여法如와 소주韶州의 혜능惠能과 고려의 승려인 양주揚州의 지덕智德, 이들은 모두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인물인데도 아쉽게도 어느 한 지방에 국한돼 있다. 월주越州의 의방義方은 변함없이 강연하고 있다. (柳田聖山 著 / 楊氣峰 譯,『초기선종사, 능가사자기·전법보기』 pp. 126~127.)
이들 기록들을 살펴보면, 초기 선종에서는『능가경』을 (5조 홍인 이후에는『금강경』을) 매우 중요한 경전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능가사자기』라는 제목만을 보아도 초기 선종에서『능가경』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이들은『능가경』을 매개로 하여 선과 삼론종과의 교류에서 발생한 선종의 한 일파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의 학자 호적(胡適, 1891~1962)은『능가경』에 의거하여 수행한 달마와 혜가 계통의 초기 선자禪者들을 “능가사”, 그들의 선법을 “능가종楞伽宗”이라 칭한다. 초기 선종禪宗의 선법을 달마선達摩禪 혹은 능가선楞伽禪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정작 심인상전心印相傳하며 법을 전한 그들은 능가종이란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능가종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승찬(僧璨, ? ∼606)과 법충(法沖, 597~665?)이 있다. 승찬은 혜가에게서 받은 능가선을 도신에게 전한 인물로 3조에 올라 있지만 이렇다 할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삼론종 출신으로 능가종의 종지인 무소득중도의 정관인 ‘무득정관無得正觀’에 뛰어난 두타행 실천자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1
법충 또한 선종사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강남의 선종과 강북의 삼론종을 섭렵하고 융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법충 역시 삼론종 출신으로 혜가의 제자로부터 “남천축일승종南天竺一乘宗”을 배우고 용수의 일승一乘을 깊이 연구하였다고 한다. 일의일발一衣一鉢의 두타수행자로『능가경』을 강의하며 남과 북에 널리 홍포하였으며, 망언妄言, 망념妄念, 무득정관을 종宗으로 하여『능가경』의 반야공관의 입장에서 반야사상을 실천하였다고 한다. (鄭性本 著,『선의 역사와 사상』 p. 174.)
『능가종』은 쿠마라지바 문하였던 금릉 도량사 金陵 道場寺의 혜관惠觀(?~453?)이 구나바드라 삼장의 구술을 필기한 것인데, 그 뛰어난 문장과 내용은 매우 밀도 높은 것이었으나 일반인에게는 난해했으며, 오직 명상의 지혜로만 인식되고, 그때까지 이 경전을 연구하는 이는 없었다. 특히 법충은 이 경전을 종래와 같이 훈고 주석의 방식에 의하지 않고 직접 그 정신을 파악하려 하였는데, 남천축南天竺의 1승종을 자기 입장으로 삼았다 한다.
남천축 1승종이란, 말할 나위 없이 위대한 대승의 논사(학자) 나가르주나Nāgārjuna(龍樹)의 종지를 가리키며, 일체개공一切皆空의 경지를 실천하는 지혜란 뜻이다. 말하자면 법충은 나가르주나 또는 쿠마라지바 같은 오랜 반야사상 전통 속에서『능가경』정신을 실천에 옮기려고 한 것이었다. (柳田聖山 著 / 楊氣峰 譯,『초기선종사, 능가사자기·전법보기』 pp. 23~24.)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능가사자기』나『역대법보기』등 기록들을 종합해보아도 3조 승찬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상이나 저술에 대한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다만 혜가의 법을 4조 도신(道信, 580∼651)에게 부법付法한 사실만을 기록하였을 뿐이다.『능가사자기』에도 ‘서주舒州 사공산思空山 찬粲 선사는 혜가의 후계자로, 사공산에 은거하며 좌선하면서도 비밀한 법을 전하지 않다가, 오직 도신에게만 법을 전했다’고 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야나기다 세이잔은 그의 저서에서 승찬과 도신의 사법嗣法 관계는 의도적으로 편집된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柳田聖山 著 / 楊氣峰 譯,『초기선종사, 능가사자기·전법보기』 p. 215.)
그러나 한편으로는『능가사자기』에서 ‘소연정좌蕭然淨坐 불출문기不出文記’라 하여 ‘마음을 하나의 사물에 집중시켜 관觀하는 구체적인 좌선 실천법인 정좌간심법正坐看心法’을 하며, 고요하게 좌선하였을 뿐, 글을 남기지 않았고, 산중에 은거하였으니, 도선이 그의 자세한 전기를 기록하지 못하였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승찬이『신심명信心銘』의 저자라는 것 역시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또『전법보기』등에 전하는 ‘승찬과 도신의 만남은, 깊은 산중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 계맥系脈에서 구전된 것에 의해 기록된 것일 가능성이 있는 이상, 이 내용을 모두 짜 맞춘 것으로 논단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神秀와 玄賾 및 淨覺으로 이어진 계통에서 <능가경>의 傳持로서 달마선법 계승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함이었다고 한다면 왜 혜가의 영향으로 <능가경>에 注疏한 여러 楞伽師들 가운데 어느 一人을 선택하여 3조로 하지 아니하고, <능가경> 관련 아무런 행적이 없는 승찬을 3조로 하였을까. 기왕이면 <능가경>의 傳持와 현창의 행적이 분명한 이를 등장시키는 것이 그 목적을 위해서는 당연하지 않을까. 더구나 달마 이래 <능가경>의 傳持를 강조하였다는 사실은 <능가불인법지>와 <능가사자기> 보다 약간 앞서 나온 것으로 인정되는 <傳法寶記>에서 이미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柳田聖山은 <전법보기>도 「명확히는 그것(<능가경>과의 관계)을 말한 것은 아니다.」라 하였으나, <전법보기> 달마와 혜가의 장 및 저자 논찬에서 뚜렷이 <능가경> 부촉과 傳持의 사실을 명기하고 있다. <전법보기>의 작자는 그 논찬에서 달마 이래 선법의 성격과 특장에 대해 말하길, 달마가 전한 법은 언어문자를 떠난 心證의 법이고, 한 법과 한 찰나간도 진실을 여의지 않는 자리이며, 모든 有爲가 고요하여 일어남이 없는 자리라 하고, 이 까닭에 혜가와 승찬이 행함에는 자취가 없고, 행하였으되 현창하는 기록이 없었으며, 法匠은 潛運하고, 學徒는 묵연히 수행하기만 하였다고 한다(「是故, 惠可僧璨理得眞, 行無轍迹, 動無彰記. 法匠潛運, 學徒黙修.」).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法匠의 潛運行은 혜가나 승찬 모두 처음은 탄압이나 폐불 등 외적 사정에 발단한 것이기도 하다. <전법보기> 승찬의 장에 의하면 승찬은 혜가에게 입실한 후 얼마 되지 않아 北周 武帝의 폐불을 만나 산곡에 은거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승찬은 이 때 10년의 은거 후에도 南下 하면서 계속 산간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法匠의 모습이 바꾸어져 널리 行化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道信으로부터이다. (박 건주(전남대종교문화연구소),「근래 道信禪師 禪法 연구에 대한 반론(1)」.)
논자는 이어, 야나기다 세이잔의 ’견해는 어디까지나 자파自派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의도적 저술이라는 가설에 입각하여 추론한 것에 불과’하며 상당부분 억측이라고 말한다. ‘초기 선종 사서에 자파自派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의도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저자들이 모든 사실을 왜곡하거나 조작하여 기술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편, 승찬의 법을 이은 4조 도신은 황매黃梅의 쌍봉산雙峰山을 중심으로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실천불교를 선양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전법보기』에는 도신의 수행법을 하나는 좌선이고, 다른 하나는 작무作務(さむ, 선사에서 선승이 행하는 농작업 ‧청소 등의 노동 일반, 불도 수행으로 중시된다)라고 하면서, 농선農禪을 병행하는 자급자족의 수행체계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도의 걸식 위주 수행이 아닌 좌선과 노동을 병행한 거주형태의 중국적인 승단 조직이 최초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훗날 선농을 병행하는 백장청규에 기반이 되었다. 중국 선종의 슬로건인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의 자급자족 수행체계로 발전한 것이다.
달마-혜가계의 선법을 계승한 후예라고 자임한 능가사들이 하북(河北)과 하남(河南) 그리고 산동의 연주(兗州) 등지에서 ‘남천축일승종’의 입장에서 무득정관(無得正觀;般若思想)의 정신을 선양하고 있을 즈음, 양자강의 중류에 가까운 기주(蘄州) 쌍봉산(雙峰山; 湖北省 黃梅山)에서도 대승선을 실천하는 새로운 선수행자의 집단이 형성되었다.
그 쌍봉산의 선문을 개창한 사람은 다름 아닌 중국 선종의 제4조로 일컫는 도신(道信; 580~651)인데, 그는 쌍봉산에서 30년간 주석하면서 독자적인 좌선을 중심으로 하는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실천불교를 전개하여 그 문하에 500여명의 수행승들이 운집하는 수선자(修禪者)의 교단을 이루었다. (鄭性本 著,『선의 역사와 사상』 p. 187.)
도신 문하에 500여명의 수선자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수행하였다고 하고 있어, 이로부터 명실상부한 선종 교단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도신의 제자 홍인(弘忍, 601~678) 역시 도신이 머물던 쌍봉산 동쪽에 있는 동산(빙무산馮茂山 혹은 빙묘산馮墓山)으로 옮겨 새로운 수선도량을 개창하였다. 이로써 개개인의 두타수행에서 집단적 수행집단을 이루었다고 하여 이들 교단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 부른다. 동산법문은 좌선과 노동을 같이하는 수선교단으로, 불교사에 있어 최초인 체계적이고 생산적인 승단 조직이다. 다만 동산법문이란 칭호는 홍인의 것이지만 그 초석은 도신에 의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도신은 중국선종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도신 이전까지 선종은 비주류로서 정치적 사회적 승인을 얻지 못했고, 배척 박해 등을 받는 입장이며 심지어 생명의 위험까지 감수하는 처지라서 달마로부터 승찬까지는 여전히 인도불교를 답습한 두타행 고행금욕 일의일발(一衣一)등 걸식위주 수행이었다, 도신 때 이르러서 승단의 체계적 조직을 이루었고 거주형태인 수행체계를 형성해서 선종의 승단조직 기초를 다졌다. (현견스님,「자급자족형 농선결합<農禪結合>이 백장청규 모태〈10〉도신선법, 중국선종의 창시자」[불교신문2903호/2013년4월10일자].)
도신의 선법은 달마의 안심법문을 잇는 ‘안심의 대도를 깨닫는 가르침’이다. 대승의 도를 닦으려면 우선 안심토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기 선종의 많은 문헌들이 안심을 가르치고 있고, 도신 또한 이러한 선종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그의 저술『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은 초심자를 위한 방편법문으로, 그 구체적인 실천법은 좌선을 통한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실천이자, ‘수일불이守一不移’의 좌선방편법이다. (鄭性本 著,『선의 역사와 사상』 pp. 193~197.)
일행삼매는 마음을 한 가지 방법으로 닦는 삼매로, 진여법계의 평등한 모습을 진실 그대로 관찰하는 삼매다. 천태지의의 '사종삼매四種三昧'의 실천법에서 기인한 것으로, 마하지관의 상좌삼매, 정토종의 염불삼매 등과 뿌리를 같이 하고 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매 순간마다 우리가 하는 활동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어떤 예배의 대상을 갖는 대신 우리는 매순간마다 우리가 하는 활동에 집중할 뿐입니다. 절을 할 때는 그저 절만 해야 합니다. 앉아있을 때는 그저 앉아 있기만 해야 합니다. 먹을 때에는 그저 먹기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한다면 보편적인 성품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합니다. 삼매는 집중이고 일행은 한 활동입니다. (스즈키 순류 지음, 최세만 옮김,『禪으로의 초대(Zen Mind, Beginner's Mind)』p. 102. 스즈키 순류(鈴木俊降, 1904∼1971)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영적 스승 중 한 사람으로, 그는 서구 최초로 조동선 선원을 설립했다. 『Zen Mind, Beginner's Mind』에서 ‘Zen Mind’는 아무 것도 없는 텅빈 마음을 뜻하며, ‘Beginner's Mind’란 모든 것에 대해 열려 있는 마음이다.)
한편, 수일불이守一不移란, 공정空淨(공하고 깨끗한)한 눈으로, 일체의 사물에 주의하기를, 밤낮으로 간단없이 이어가며, 오로지 힘써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마음을 하나의 사물에 집중시켜 관觀하게 하는 구체적인 좌선 실천법이다. 5조 홍인은 도신의 수일불이의 좌선법을 계승하여 ‘수심守心’, ‘수본진심守本眞心’의 선사상으로 전개하였다.
도신의 ‘수일불이’는 마음을 집중하여 한 물건을 간(看)하게 하고 있지만, 홍인은 한 물건에 집중하는 바로 그 마음을 내부의 자심으로 되돌려 본래의 진심을 지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홍인은 도신의 사상을 한층 진보시켜 외부에서 내부로, 사물에서 자심으로 되돌려, 수심(守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홍인의 수심설은 스승인 도신의 수일불이설의 이면(裏面)에 감추어져 있던 마음을 표면으로 내밀어, 청정한 본심을 망념과 사견으로부터 잘 지킬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 홍인은 ‘나는 지금 자네들이 스스로 본심이 바로 부처임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이런 까닭에 너희들에게 간절히 권하노니, 천경만론(千經萬論)이 각자 본래의 진심을 지키는 것(守本眞心)만 못하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의 청정한 불성을 자각하도록 노력하게끔 하고 있다.
(鄭性本 著,『선의 역사와 사상』 pp. 213~214.)
여기서 ‘본심이 바로 부처’라는 ‘본심시불本心是佛’은, 이후『육조단경』의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 스스로 부처의 도를 성취한다는 식심견성識心見性 자성불도自成佛道]로, 신회(荷澤神會, 685~760)나 종밀(圭峰宗密, 780~841)이 주장한 ‘즉심시불卽心是佛’, 그리고 마조(馬祖道一, 709~788)의 특허품인 ‘즉심즉불卽心卽佛’, ‘비심비불非心非佛’ 등으로 변주變奏되고 발전하는 시초始初가 되었다.
근래 도신의 선법은 달마에서 혜가를 거쳐 승찬으로 계승된 소위 달마선 내지 능가선과는 다르다는 견해도 있다.『능가사자기』에 수록된『입도안심요방편법문』에 보이는 선법은 능가선이 아니라 다른 계통의 이질적인 선법이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다.그러나『능가사자기』에 전하는 도신의 선법는 초심의 방편문에서 중간 정도의 단계로 이끄는 법문, 그리고 최상승의 심지법문까지 총 망라되어 있어, 어떤 한 부분을 가지고 전체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능가사자기』에는 반야사상 뿐 아니라 모든 불법이 어울러져 있어, 홍인의『수심요론』등에 나타난 선법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박 건주(전남대 종교문화연구소),「근래 道信禪師 禪法 연구에 대한 반론」)
柳田聖山은『능가사자기』가 홍인의『수심요론』을 거부하였다 하고, 이는 홍인이 「不出文記」 하였다고 한『능가사자기』자신의 입장에 의거한 것이며, 십대제자가 상호 의견을 달리한 것이 원인일 것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不出文記」하였다는 기록과『수심요론』의 존재가 모순되지 아니한다는 점을 모른 소치이다. 왜냐하면『수심요론』은 저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화록 내지 어록이고, 제자가 집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수심요론』의 선법이 신수와 혜능 등 십대제자 및 신수와 현색의 제자인『능가사자기』의 저자 淨覺의 선법과도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정각의 선지는『능가사자기』서문에 게시되어 있다. 모두 看心 및 守心과 知心空寂, 識心見性, 無心無得을 선지로 하여『능가경』의 「諸佛心第一」과 『수심요론』・『절관론』・『육조단경』에 일맥으로 통하고 있다.『육조단경』에서 말하는 선법의 요체는 「識心見性(心性을 알라)」이고, 거의 모든 내용이『능가경』이나 여러 대승경전에 의거하고 있다. 따라서 단지 반야공의 성격으로 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대승의 일체 敎義를 회통하여 心法으로 實修의 방편도를 설하고 있는 것이 달마선 내지 능가선이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는 반야공의 법문도 있고, 그 밖의 법문도 있게 된다. 근래의 논자들은 대부분 달마에서 승찬까지만 楞伽師로 인정하지만『속고승전』에서 달마의 선을 虛宗으로 칭하고 있어 홍인이나 혜능 이전에 이미 반야선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虛宗은 반야공의 뜻으로 종래 쓰여 왔다.『諸佛心이 제일이다』의 한 뜻은 實修의 면에서는 看心과 守心으로 開示된다. 오조홍인의『수심요론』의 요체가 守心이고, 看心은 신수나 혜능 모두의 공통이다. 신수 내지 북종의 看心도 후술하는 바와 같이 그 뜻을 제대로 안다면 『육조단경』의 「識心見性」과 다를 바가 없다. 오조 홍인과 혜능을 모두 반야선으로만 부각시키고 강조하지만『수심요론』의 守心이나『육조단경』의 「識心見性」이 반야경전에 강조되어 있는가. (박 건주(전남대종교문화연구소),「근래 道信禪師 禪法 연구에 대한 반론(2)」.)
도신은 무덕 7년(624) 44살 때 쌍봉산에 들어가, 당 고종 영휘永徽 2년 72세로 입적하였다. 도신으로부터 홍인 → 신수로 이어지는 북종선, 홍인 → 혜능으로 이어지는 남종선, 그리고 법융 → 지암 → 해방으로 이어지는 우두선이 나왔다. 사천 지방에서 활동한 도신 → 홍인 → 자주지선資州智先 → 처적處寂 → 정중무상淨衆無相으로 이어지는 정중선 역시 도신으로부터 비롯한다. 도신의 제자 중에는 5조 홍인, 우두법융(牛頭法融, 504~857) 외에 신라에 선법을 전한 신라승 법랑法朗이 있다.
돈황본『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774)』가 발굴되면서, 정중종淨衆宗 개조인 정중무상의 구체적인 법계와 행적에 대해 알려지게 되었다. 무상의 속성은 김 씨이고 신라 왕족(혹은 신라 왕자)이다. 규봉종밀(圭峯宗密, 780~841)의『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나 송나라 때 편찬된『송고승전宋高僧傳』, 명나라 때 편찬된『신승전神僧傳』등에도 전기가 실려 있다.
무상은 오백나한 중 455 번째 나한 (아라한)으로 모셔져 있는데, 인도 출신의 선종 초조 보리달마를 제외하면 유일한 외국 승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서는 무상이 선종사의 거두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실재 스승이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마조계가 초기 선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티베트 불교에 미친 그의 영향력 또한 밝혀지면서 신라 출신 무상의 선사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대략 宋代(송대) 이후 20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선종사에서 잊혀진 인물이었던 無相(무상)이 근래에 들어와 이처럼 학계로부터 주목받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티벳에 최초로 중국의 선불교를 전파한 인물이 무상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티벳 선불교의 원조는 무상이라는 관점이다. 이 점은 선종사의 전개과정에서 頓(돈)·漸(점)의 문제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사실로서, 일본학자들의 연구는 대체적으로 이 부분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山口瑞鳳(산구서봉)의 [티벳佛敎와 新羅의 金和尙], [고대 티벳에서의 頓悟(돈오)·漸悟(점오)의 논쟁]이나 小전宏允(소전굉윤)의 [歷代法寶記(역대법보기)와 古代의 티벳佛敎]와 같은 논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연구들을 가능하게 했던 배경에는 금세기 초에 돈황에서 발견된 {歷代法寶記(역대법보기)}와 '티벳宗論(종론)'에 관한 문서들이 작용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무상선사가 주목받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상이 馬祖道一(마조도일:709∼788)의 스승에 해당된다는 점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통설은 마조가 南嶽懷讓(남악회양:677∼744)의 제자인 것처럼 알려졌으나 진짜 법맥은 그것이 아니라 무상의 문하에서 수업한 제자라는 사실이다. {원각경대소초}를 근거로 한 이 주장은 중국의 선학자 胡適(호적:1892∼1962)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마조야말로 철저하게 돈오사상에 입각한 남종선을 가지고 당시의 선종계를 풍미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마조가 신라 출신 무상의 제자라고 한다면 중국과 한국의 초기선종사는 상당부분 다시 쓰여야 할 정도로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趙龍憲, 원광대 대학원 불교학 박사과정 수료. 동양종교학과 강사,「淨衆無相의 楞嚴禪 硏究 정중무상의 능엄선 연구」. 정중무상에 대해서는 법보신문 [무상·마조 선사의 발자취를 찾아서]가 아주 자세하다.)
1. 참고로 현견 스님은 ‘당 도선(속고승전>과 송 찬영(贊寧) <대송승사략>은 승찬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고, <조당집>은 간단히, 오직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서 상세히 기술했다. 사료 결핍으로 학계에선 혜가가 승찬에게 법을 전한 것에 의문을 갖는데, 초기 선종 자료 중 승찬에 관한 자료가 적다. <속고승전(續高僧傳)>9권에 <석승찬전(釋僧粲傳)>이 있지만 선승이 아닌 교학승 승찬이라고 한다, 같은책 16권 <혜가전(慧可傳)>에서는 “혜가의 법을 이은 사람이 없다(末, 卒無榮嗣)”라고 하며, 같은 책 25권 <법충전(法沖傳)>에선 “혜가선사 이후 찬선사(可禪師後, 粲禪師)”라고 해 역시 승찬이 아닐 것이라는 것이며, 결론은 혜가와 도신 사이 전승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전법정종기(傳法正宗記)>와 모든 <등록>은 혜가의 법을 이었다고 하고 있다. 대만의 인순법사는 승찬이 혜가의 법을 이은 것이 분명하다는 입장이다.’라고 하면서 혜가 때는 선법을 믿으나 수행하지 않았고, 승찬 때 비로소 믿음과 수행을 겸비하게 되었다고 평했다. 현견스님,「망언망념<忘言忘念> 무득정관<無得正觀>’ 종지 전승 <9>혜가와 달마, 그리고 승찬 ②」[불교신문 2901호/2013년 4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