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년보다 일찍 시작된 여름 더위는 식을 줄 모르고 빠르게 올라 연일 최고를 기록하며 전 날과 경쟁하듯 온도를 높이고 기세는 좀처럼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종일 에어컨을 틀어놓고, 차가운 음식을 먹어도 보고 몇 번씩 물을 끼얹어가며 마음을 다스려보지만 폭염은 밤까지 이어져 그야말로 잠 못 이루는 밤이다. 아침이 오기가 무섭게 일찍부터 내리쪼이는 강렬한 태양빛에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가 막막하다. 기다리는 비는 오지 않고 도심은 자동차의 열기까지 더해져 걸어 다니기가 힘들다. 언제나 더위가 가실까. 막연한 기다림은 몇 달째 계속된다.
자녀들이 성장하여 떠나고 둘이서만 남은 공허함을 달래고 더 이상 쓸모없게 된 물건들도 정리하여 요즘 트렌드(trend)라는 미니멀 라이프(minimallife)를 실천하기 위하여 집의 규모를 줄여서 작은 집으로 가기로 결정을 하였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통념은 사는 집의 규모는 점점 늘려 가는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겨서라고 상상하게 되는 것 같다. 지인들조차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 선뜻 분명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옳은 결정일까? 스스로에게 질문도 해본다. 그렇지만 여러 번 고민 끝에 이사하기로 하고 여름 방학기간의 반을 여행으로, 나머지 반을 집 옮기는 준비와 정리에 쓰기로 하였다. 집을 구하고 이사날짜를 정하고 일사천리로 준비에 돌입한다. 집의 크기를 계속 부풀리기만 하다가 좁은 공간으로 가려니 별생각 없이 편안하게 쌓아두고 살았던 살림살이 정리에 전투정신이라도 발휘해야 할 것 같다.
책이며 오디오, 음반, 사진첩과 옷과 신발, 그릇, 각 종 주방기구, 침대, 캠핑용품, 다양한 운동기구 하며 손때 묻고 먼지가 앉아 쿰쿰한 냄새까지 풍겨오는 물건들을 정리하자니 땀은 비 오듯 하고 연신 재채기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 머릿속은 세월을 저만치 거슬러 과거로 간다. 수많은 물건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또렷하게 말을 건다. 그때의 나로부터 지금의 내가 될 수 있도록 자양분이 된 전공 서적은 내 삶의 전부가 되었고, 빛바랜 사진 속 어색한 표정 뒤에는 그 시절 설렘과 감동과 좌절도 있었다. 물건 속 누군가와 몰두했던 지난날, 함께 한 많은 이들의 소식도 궁금하다. 다시 오지 않을 아쉽고 그리운 시절. 버려야 할 물건과 간직해야 할 추억 사이로 혼돈스러운 시간이 흘러간다.
결연한 의지로 이 물건을 버려야 할지를 순식간에 결정하며 분류하기를 반복한다. 책과 침대와 소파, 탁자 등 우리에겐 쓸모가 적어졌거나 좁은 공간에 가져갈 수 없는 것들, 당장 입지 않은 옷은 기부하기로 한다. 인정사정없이 마구 버리자. 며칠 만에 드디어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짐 정리가 끝났다.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이제야 집의 모습이 한층 여유롭고 세련된 모습을 갖추었다. 물질의 풍요로움이 마냥 달콤하고 편리했던 지난날, 생각 없이 물건을 이것저것 사들이고 소유했던 욕심 가득한 나를 보며 한없이 부끄럽다. 이제는 ‘쌓아두고 남겨두지 않으며 비우는 삶을 살자’고 마음먹는다. 기분은 오히려 홀가분하고 풍요로워진다.
이사한 지 한 달이 되는 날. 지난밤 편한 잠자리에 고마운 아침. 툭 트인 창가에 서면 아름다운 경치와 푸른 하늘이 가깝게 맞닿아 있고 선선한 바람과 눈부신 햇살은 밝고 맑은 에너지로 하루를 여는 기쁨을 내게 선물한다. 산책길에 만나는 코스모스는 언제 그렇게 더운 여름이 있었을까 잊은 채 하늘거리며 인생의 가을 녘을 함께 걷는 말동무가 되어준다. 많지도 적지도 않게,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그렇게 가자. 뛰어가지 말고 단단하고 간소하게 걸으며 가자고 다짐한다.
첫댓글 비울수록 가득해 진다지요.
명정혜 선생님 제 마음까지 산뜻해 지는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그 여유가 부럽습니다.
가득해진다지요/ 산뜻해지는 글
명정혜 선생님 글쓰기에
비하면 저는 신생아 인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