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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다경(茶經)으로 본 백제의 백제의 세 수도(首都)와 삼국의 최대 요충지’라는 제목 아래 쓴 글입니다.
그런데 워낙 길어서 몇 편으로 나누어서 글을 올릴까 합니다. 뒤에다 (1)혹은 (2)하는 식으로 번호를 붙여서 말입니다.
1. 다경(茶經)에 들어난 ‘대륙삼국 설’
가. 다경(茶經)에 대한 이해
좌계가 “고구리, 백제, 신라가 중국대륙에 있었던 것 같다.”라는 생각을 처음 품게 된 것은 의외로 사서(史書)가 아니라, 다경(茶經)이란 책을 통해서 였습니다.
이는 당(唐)나라 초기에 당(唐)나라 초기 사람인 육우(陸羽)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 ‘세계 최초의 다서(茶書)’로 경전(經典)으로 칠 정도인지라, 다인(茶人: 차(茶)를 달이는 명인(名人))이 되려면, 반드시 읽어야하는 책입니다. 이 다경(茶經)은 상(上), 중(中), 하(下) 3권(卷)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상권(上卷)은 세 편(篇)으로 나누어 집니다. 그런데, 그 상권 가운데 ‘차(茶)의 근원’을 이야기하는 ‘일지원(一之源)’ 편(篇) 말미(末尾)에 차(茶)의 품질(品質)과 관련해서 아주 이상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차(茶)의 상등품은 상당(上黨)에서 생산되고, 중등픔은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왕가(王家)에서 전매품(專賣品)으로’ 생산되고, 하등품은 ‘고구리(高句麗) 왕가(王家)에서 전매품(專賣品)으로’ 에서 생산된다.”
((상자 생 상당(上者生上黨) 중자 생 백제 신라(中者生百濟 新羅) 하자 생 고리(下者生高麗))
물론 위 한자 원문(原文)에는 백제(百濟), 신라(新羅), 고리(高麗: 고구리를 뜻함)라고 되어 있지만, 여기에 삽입구(揷入句)인 ‘왕가(王家)에서 전매품(專賣品)으로’란 말을 해석의 편의를 위해 좌계가 끼워 넣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백제, 신라, 고구리의 왕가(王家)에서 전매품(專賣品)으로 관리하였음이 다경(茶經) 전체에 암묵적으로 들어나기 때문에, 해석의 편의상 집어넣은 것입니다.
나. 차(茶)의 식물학적 특성과 내륙국(內陸國)의 상징인 ‘상당(上黨)’
(1) 차(茶)의 ‘식물학적’ 특성
여기서 상당(上黨)이라함은 오늘날 창쯔(長冶)로 태행산맥 동남부에 있는 옛 지명입니다.
이곳에서 최고급의 차(茶)가 생산되는 것은 차(茶) 나무의 본성(本性)으로 보아도 너무나 당연합니다.
식물학에서 양(陽)의 식물은 ‘벼’와 ‘파’처럼 뿌리가 수많게 동시에 나는 것인데, 이런 식물들은 그 ‘줄기’가 ‘위’로 급속히 뻗어가는 특징이 있고, 음(陰)의 식물은 ‘차(茶)’와 인삼처럼 뿌리가 길게 ‘아래’로 뻗어가서 특이광물이나 다른 나무에 그 뿌리를 뻗어 특이한 영양소를 흡수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따라서 차(茶)와 인삼은 물이 잘빠지는 사질토(沙質土)에서 잘 자랍니다. 이런 면에서 상당(上黨) 지역은 물이 잘빠지는 사질토(沙質土)이고 차(茶)가 성장하는 따뜻함도 동시에 갖추고, 비(=우(雨)가 자주 오는 지역이라야만, 상등품의 차(茶)가 생산되는 것으로 아주 고대(古代)때부터 정평(定評)이 나 있었던 것이지요.
(2), 왜? - 상당(上黨)은 내륙국의 상징, 백제, 신라는 해안국의 상징
중요한 것은 이런 상당(上黨)의 차(茶)가 중국내륙에서 생산이 되기 때문에, 중국은 춘추전국 시대 때부터 내륙국(內陸國)을 칭하는 국제적 용어가 상당지국(上黨之國)이라고 말할 정도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는 중등급인 “백제 신라 차(茶)가 해안지방에 있었다.”는 것을 적어도 차(茶)를 아는 사람에게는 당연함을 전제(前提)로 하여야함을 뜻합니다.
이처럼 상당(上黨)은 그 차(茶)로써 내륙국(內陸國)의 상징이 되고, 또 백제(百濟), 신라(新羅)는 차(茶)로써 해안국(海岸國)의 상징이 되는 것임을 일단 이해해야할 듯 합니다.
왜 이처럼 “상당(上黨)이란 차(茶) 생산지가 춘추전국시대 때부터 ‘내륙국(內陸國)’의 상징이 될 정도인가?”하는 점은 중국대륙의 생태 환경 때문입니다.
중국은 황사(黃砂)가 심해서, 야채(野菜)도 기름에 튀겨 먹을 정도로 ‘기름 수요’가 많은데, 이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폐(肺)에 있는 먼지를 씻어낼려는 욕구이며, 그러다 보니 자연 성인병(成人病)에 노출되었는데, 차(茶)가 이런 ‘기름기’에 의한 성인병에 대한 예방(豫防)및 치유 효과가 크기 때문에, 차(茶)를 먹지 않고서는 건강을 보전하기 어려운 풍토(風土)인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그때마다 변하는 내륙국(內陸國)의 국가 이름보다는 상당지국(上黨之國)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욱 실감이 나는 것이지요.이처럼, 중국대륙에서 상당차가 내륙차의 상징, 그리고 백제,신라차가 중국대륙에서 해안차의 상징으로 되어 있는 것이 육우(陸羽)가 저술할 당시에 모든 다인(茶人)들이 생각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 육우(陸羽)은 당(唐)이 입국(立國)할 때의 사람이거든요.
춘추전국 시절부터 사용된 상당지국(上黨之國)이란 용례(用例)
이제 상당(上黨)이 ‘내륙국’의 상징인 것을 먼저 살펴봅시다.
그래야만, 백제, 신라가 중국대륙에서 해안국이라는 것이 대비해서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좌구명(左丘明)의 국어(國語) - 월어(越語) 상(上)에 오자서(伍子胥)가 쓴 말로 나타납니다.
상당지국(上黨之國)이란 표현을 오자서(伍子胥)는 오왕(吳王) 부차(夫差)와 월왕(越王) 구천(句踐)과의 싸움에 끼어들어 오왕(吳王)을 도운 아주 유명한 사람이지요.
오자서의 상당지국(上黨之國)을 말하는 월어(越語) 앞부분의 사정(事情)부터 간추려보기로 합시다.
오(吳)나라에게 대패(大敗)하고 멸망직전에 있던 월왕 구천은 문종(文種)을 보내서 “나라만 망하게 하지 말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 조건이 극단적인 파격적 조건입니다. 구천의 딸을 오왕(吳王) 부차의 비첩(婢妾)으로, 일체의 월(越)나라 대부(大夫)와 사인(舍人)의 처첩(妻妾)은 그대로 월나라의 대부와 사인의 처첩으로 삼음은 물론, 모든 보물(寶物)도 몽땅 월나라에게 줌은 물론, 오(吳)에 항거한 죄(罪)로 패주(覇主)인 부차(夫差)가 명하는 대로 모든 월나라의 군(軍)을 지휘하도록 할 것이니, 내륙국(內陸國)을 공격해서 오(吳)나라가 중원의 패권(覇權)을 잡는 선봉을 맡을 것이니 나라만 멸망(滅亡)시키지 말아달라.’는 것이지요.
이에 오왕 부차가 문종(文種)의 말을 쫓아 월나라와 강화코져 한 것이지요..
그러자 오자서(伍子胥)가 이의 부당(不當)함을 간(諫)하고 나서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불가합니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종래 서로 구적시하며 쉴사이 없이 싸움을 벌여 왔습니다. 오강(吳江)과 전당강(錢塘江) 포양강(浦陽江)이 오월 두 나라를 감싸고 있어 두 나라의 백성이 어디로 옮겨가든 모두 이들 3 강 유역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오나라가 있으면 월나라가 없게 되고 월나라가 있게 되면 오나라가 없게 됩니다. 이 같은 세불양립(勢不兩立)의 형세는 결단을 내려 바꾸어야만 합니다. 저 오원(吳員)이 듣건데 ‘육지의 사람은 육지에 사는데 익숙하고, 물위에 사는 사람은 물위에 사는데 익숙하다’고 했습니다. 상당지국(上黨之國)은 우리가 설령 공격해 승리한다 할지라도 그곳에서는 살수도 없고, 그들의 병거를 타고 교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월나라의 경우는 우리가 일단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면 능히 그 땅에서 살 수 있고, 그들의 전선도 탈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이익과 직결된 것이니 이 기회를 잃어서는 안됩니다. 군왕은 반드시 월나라를 멸망시켜야 합니다. 이처럼 유리한 시기를 놓치게 되면 설령 후회할지라도 결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들어나는 것은 상당(上黨) 차(茶)는 ‘내륙국(內陸國)’의 상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비한 백제차, 신라차는 당연히 중국대륙의 해안차이고, 따라서 당연히 중국대륙의 해안임이 들어납니다.
해안국(海岸國)의 명차(名茶)의 상징인 백제와 신라 차(茶)
다인(茶人)들이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고, 일반인이기 때문에, 이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띱니다. 즉 당시 중국대륙에서 차(茶)를 마시는 사람들이 모두다 “백제와 신라는 중국대륙의 해안가에 살고, 그것이 최고급이 아니라 할지라도, 고급차이다.”라는 인식이 있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항주(杭州)경주(慶州)에는 지금도 용정차(龍井茶)가 있고, 또 복건성(福建省)에는 철관음(鐵觀音)이라는 유명한 차(茶)가 있습니다.
결국 다경(茶經)에서 신라 차(茶)라고 하는 것은 해안지방인 절강성의 용정차(龍井茶)와 복건성의 철관음(鐵觀音)이라는 것이지요.
또 백제(百濟) 차(茶)라는 것은 오늘날 운남성(雲南省)에서 ‘발효(醱酵) 차(茶)’로 유명한 ‘보이차(普洱茶)로 볼수 있습니다. 바로 이해(耳海)가 있는 곳이고, 백제가 멸망한 후, 대리국(大理國)이 들어선 점창산(點蒼山) 아래인 것이지요.
또 사천(四川) 몽산(蒙山) 정상(頂上)에서 난 차로 만들어진 ‘몽정석화(蒙頂石火)’와 ‘몽정감로(蒙頂甘露)’ 명차 중 명차로 치고 있습니다.
중국 대륙 전체를 통털어 명차(名茶)가 되어야만 다경(茶經)을 쓴 육우(陸羽)가 “중등품이다! ”라고 판정할 수 있는 것이고,
차(茶)는 그 본성상 뿌리가 깊히 내려 무기물질의 암반(巖盤)에 접속되어 그 기운(氣運)을 끌어들여야만 명차(名茶)가 되기 때문에, 명차 생산지가 같은 지역 안에서도 특정 장소로 한정(限定)될 수밖에 없는 특이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다경(茶經)에서 거론하는 신라 차(茶)는 오늘날 용정차(龍井茶), 철관음(鐵觀音)이 나는 절강성, 복건성 지역이외의 지역을 생각할 수 없으며, 또 백제 차(茶)는 보이차(普洱茶)가 나는 운남성(雲南省) 이해(耳海) 주변과, 저 몽정석화(蒙頂石火),와 몽정감로(蒙頂甘露)가 나는 사천성 몽산(蒙山)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왕가(王家)가 전매품(專賣品)으로 직영-재배 함’이 들어나는 다경(茶經)
중요한 것은 육우(陸羽)가 중급차로써 거론(擧論)하는 백제(百濟), 신라(新羅) 차(茶)라는 것이 백제및 신라 ‘왕가(王家)에서 전매품으로 직영(直營)하는 차(茶)’ 임을 암묵적(暗黙的)으로 가정(假定)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
다경(茶經) 하권(下卷)의 여덟째 편(篇)인 ‘차(茶)가 나는 곳’이란 의미의 ‘팔지출(八之出)’에서 ‘선주(宣州) 항주(杭州) 목주(睦州) 흡주(歙州)의 차는 하등품이다.’ 혹은 ‘윤주(潤州)와 소주(蘇州)의 차는 더욱 하등품이다.’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여 신라 수도(首都)가 있었던 ‘항주(杭州)-경주(慶州)의 지역 안에 있는 항주(杭州), 소주(蘇州)의 차(茶)’와 신라 차(茶)를 엄격히 구분하여, 이들은 하등품, 차하등품으로 치고 있기 때문에, 신라 차(茶)라는 것은 ‘왕가(王家)가 직접 전매품(專賣品)으로 직영 재배해서 생산함’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신라(新羅) 차(茶)를 또 별도로 구분한 것은 신라 왕가(王家)가 직영(直營)하는 - 오늘날 말로 전매청(專賣廳)에서 ‘생산 판매’하는 차(茶)였음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똑 같은 논리로 백제(百濟) 차(茶) 역시 중등품은 백제 왕가(王家)가 직영하는 전매청(專賣廳)에서 오늘날 ‘이해(耳海) 근처’의 보이차(普洱茶)와 ‘사천성(四川省) 몽산(蒙山)’에서 나는 몽정석화, 몽정감로가 생산되었던 것이지요.
2. 대륙삼국설의 핵심 - 백제의 세 수도(首都)의 위치 추적
이 싸이트(site)에서는 중국의 정사(正史) 25사를 비롯한, 우리 나라 사서(史書)를 기반으로 엄연한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해서 대륙삼국설을 주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륙삼국설을 ‘역사적 사실’로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삼국의 수도(首都)의 위치를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중국대륙 위에 정확히 ‘자리매김’을 해야 안정화시킬수 있다고 좌계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히 백제의 수도의 위치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신라와 고구리는 초기에는 수도(首都)의 이동이 격렬히 일어났지만, 그 후에는 지속적으로 한곳에 있었던 반면, 오히려 백제의 수도(首都)가 초기의 하남(河南) 위례성에서 백제 중기때 급격히 두 군데 - 중국 사서(史書)에 의하면, 고마성(固麻城)과 거발성(居拔城)으로 있었는데, “그곳이 현 중국대륙에 어디인가?”하는 ‘자리매김’을 하여야만, 삼국시대 때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변화가 가장 심한 것’을 안정화시키지 않으면, 삼국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정리가 잘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가. “유물, 유적으로는 대륙삼국의 위치 확인이 어렵다.”
그런데, “대륙삼국이 중국에 있었다.”는 것을 유물,유적으로써 확인하기는 어려운 사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륙삼국의 수도(首都) 위치를 비정함에 있어서, 일단 이해하여야할 것이 “왜 중국대륙에서는 고대에서부터 ‘봉건적 제국(帝國)’이 들어섰는가?”하는 기초적인 질문입니다.
흔히들 학자들은 저 전설상의 우(禹)임금 때부터, 홍수(洪水)라는 어마어마한 자연재해, 그리고 중원(中原) 주변에서 몰려드는 -대부분 폭력을 동반하는 ‘민족이동’ 앞에 어쩔수 없이 인력을 사회적으로 대량 동원할 수 밖에 없는 자연적 사회적 조건을 꼽습니다.
그래서 ‘봉건적 제국(帝國)’이 신화시대 때부터 들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좌계가 “왜 굳이 이런 뻔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하는가?”하면, 이처럼 인력(人力)의 대량동원이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환경에서는 “백제 수도가 여기에 있었다.” 혹은 “고구리 국내성이 여기에 있었다.”는 등등의 흔적 - 이른바 유물(遺物) 유적(遺蹟)이 잔존(殘存)해 있기가 어려운 환경이라는 점을 들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백제 개로왕 시절 ‘흙을 쪄서 사성(蛇城)을 하남 위례성에 쌓았다.“고 하더라도, 백제가 이 하남 위례성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 다음, 한동안의 하남 위례성이 유지가 되었겠지만, 언젠가 그 지역에 강물이 홍수(洪水)가 났을 경우, 어찌 대응해야 하겠습니까?!
다시 말해 홍수에 의해 둑이 터진, 그 진흙땅을 메꾸거나 혹은 새로운 뚝을 쌓을때, 이미 쌓은 사성(蛇城)의 흙을 옮기는 것이 훨씬 편하고, 또 고구리가 망한 후에, 화북지역에 새로운 성곽을 쌓을 때, 이미 있던 ’국내성‘의 성곽을 옮겨서 새로운 성(城)을 쌓는 것이 훨씬 편함을 뜻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실제 “이곳이 백제 고마성(固麻城)이다.”라고 실증할 대부분의 유적은 그대로 새로운 유적의 재료(材料)가 될 수밖에 없어서 ‘즉각 사라진다.’는 이상한 환경이 바로 중국대륙임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이런면에서 강단사학에서 실증(實證) - “유물유적이 있는가?”하는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얄미운 논리이고, 또 어찌보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한가한 태도’일런지도 모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료(史料)의 엄격한 해석은 ‘대륙삼국’의 수도(首都) 위치를 추정하는데 더욱더 중요할 듯 싶습니다.
나. 하남(河南) 위례성(尉禮城)은 ? - 한(漢) 제국(帝國)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1) 삼국사기의 정확성
한자 문화권에서 강물을 나타내는 말들이 하(河), 강(江), 수(水) 등등이 있으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河)는 무조건 황하(黃河), 그리고 강(江)은 무조건 양자강이라고 보는 것이 하나의 관례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남(河南)은 오늘날 황하 남쪽에 있었던 지명으로 보는 것이 결코 이상한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정확히 하남(河南) 위례성은 어디인가?
이점은 장수왕이 승려-간첩 도림을 보내서 ‘백제의 재정(財政)을 탕진’하게 하고, 이윽고 공격을 받아서 하남 위례성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개로왕 21년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들어납니다.
“ ..... 곧 나라 사람들을 다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그 안에 누각,대사(臺榭)를 지었는데, 장엄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한 큰 돌을 욱리하(郁里河)에서 가져다가 곽(槨)을 만들어 부왕의 유을 넣어 묻고 을 따라 제방을 만들었는데, 사성(蛇城)의 동쪽으로부터 숭산(崇山)의 북쪽에 이르렀다.“
여기서 숭산(崇山)은 오늘날 쿵푸로 유명한 소림사가 있는 명산(名山)인 바로 그 산이고, 이하남 위례성은 바로 동한(東漢)의 수도가 있었던 낙양(洛陽) 바로 동쪽의 지역이 되는 것이지요.
(2)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의 정확성
좌계는 최근 북사 열전, 백제전을 읽다가, 백제의 수도가, “동서(東西)로는 450리, 남북으로는 900여리가 되는데, 그 수도(首都)들을 이름하여, 거발성, 고마성이라고 각각 칭한다. (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百餘里. 其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 는 구절을 읽고, 이것이 단순히 두 백제 수도 즉 거발성과 고마성 뿐만이 아니라, 기실은 ‘하남(河南) 위례성’에도 해당되는 일반적인 원칙인데, 개로왕때, 하남 위례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제외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여, 백제의 세 수도(首都) - 하남 위례성, 웅진(고마성), 사비(거발성) 모두가 대략 450리, 남북이 900여리되는 일반적 원칙과 또 이런 수도(首都)들을 중국 륙내에 일정한 원칙 아래 건립하였음을 알고, 그간 대륙 삼국에 대한 혼란이 깨끗이 정리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3. 백제의 수도(首都)는 항시 2개의 도성(都城)을 지니는 특징을 지닌다.
일단 말씀드려야할 것이, “백제의 수도(首都)들은 항시, 각각 두 개의 왕성(王城)을 가진다.”는 대원칙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이는 사실, 고구리와 신라도 똑같은 원칙 -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의 원칙이 있음이 들어나는데, 이는 추후 시간이 있을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이런 이상한 원칙 -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의 원칙이 있는가 하면, 그것은 이 세 나라가 모두 화백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고, 배달화백(倍達和白)과 영산화백(靈山和白)을 담당하는 왕성(王城)이 각기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왕성(王城) 하나는 ‘배달화백’을 할수 있는 호수(湖水)나 큰 강(江)이 반드시 필요하며, 또 하나의 왕성(王城)은 산(山), 적어도 육지(陸地)에 들어서야하는 특징이 있어야 합니다.
가. 개로왕의 흉서(凶逝) 사건을 통해본 ‘백제 수도 설립의 원칙’
삼국사기에는 하남 위례성이 ‘찐 흙으로 사성(蛇城)을 쌓아서, 숭산(崇山)에 이르게 하였다.“고 한 내용을 기초로 보면, 이 지역이 오늘날 ’소림사‘로 유명한 하남(河南) 숭산(崇山)이니깐, 결국 그 지역은 하남(河南)의 몽양시(蒙陽市)가 됩니다. 바로 등주시(鄧州市) 왼쪽 편에 있는 도시이지요.
그 위에 당연히 황하(黃河)가 흐르는데, 중국 사서는 이 황하를 건너있는 지역인 백제의 왕성(王城)이 들어섰다고 한결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양서와 남사의 기록으로는 - 송준희 선생께서 ‘역사지리의 기준’으로 설정한 - 요(遼)라는 땅의 동쪽 에 백제(의 직할지)가‘역시’ 들어섰는데, 진평(晋平) 이군(二郡)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우통전에도 기록)따라서 하남 위례성에 백제 왕성(王城)이 있고, 그 자리가 현 몽양시(蒙陽市)이고, 또 진평이군(晋平二郡)에 또 다른백제 왕성이 있게 되면,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의 백제 수도의 원칙에도 맞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북사(北史)에서 말하는 ‘동서 450리, 남북 900여리’에 정확히 맞습니다.
특히 삼국사기에 개로왕(蓋鹵王)께서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서 북성(北城)에서 7일동안 치열한 전투를 하고 패배하자, 황하를 건너 남성(南城)으로 왔다가 홀로 탈출하다가 잡혀서 흉서(凶逝)하게된 과정과 일치하는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나. 백제 수도에는 “왜 반드시 몽산(蒙山), 몽수(蒙水)가 있었는가?!”
따라서 하남 위례성이 곧 하남 몽양시(蒙陽市)가 분명한데, 우리는 여기서 결정적인 특징을 뽑아낼 수있습니다.
한문(漢文)에서 ‘물의 흐름 북쪽’ 즉 수지북(水之北)을 양(陽)이라고 합니다. 현 서울의 고대적 명칭이 한양(漢陽)인데 이는 한강(漢江)이란 강물의 북쪽이 되는 것이 그 용례(用例)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남 몽양시 위에는 평정산시(平頂山市)가 있는 곳 위에 석인산(石人山)이 있습니다.(현하남 정주시 바로 죄측)
(좌계가 볼 때에는 개로왕께서 흉서(凶逝)를 당하신 아차산(阿且山)이 바로 이 석인산(石人山)입니다.
현지에 내려오는 석인(石人)이 자리잡게된 설화가 있는데, 이는 ‘개로왕 흉서’사건에 대한 백제인의 반발감이 석인 전설으로 여겨집니다. 이 점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산(山)이 있게 되면, 물이 있게 되고, 이 강물이 황하(黃河)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자연 몽양시(蒙陽市) - 몽수(蒙水)의 흐름의 북쪽에 있게되니깐 몽양시(蒙陽市)로 이름하게 된 것이지요.
백제의 수도 - 하남 위례성인 몽양시 이외에도 웅진(고마성)에도 역시 몽산(蒙山)이 발견이 되고, 또 사비(거발성)에도 역시 몽산(蒙山), 몽수(蒙水)가 발견이 됩니다.
그렇다면, “왜 백제 수도에는 항시 이런 몽산(蒙山), 몽수(蒙水)가 반드시 들어가게 되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좌계는 이것이 주역(周易)의 영향이라고 봅니다. .(이 주역(周易)은 고한인(古韓人) 즉 고조선 사람들에 의해서 확립되었다고 생각됨)
고조선 이래 산곡지간(山谷之間)에 살던 사람들은 ‘산(山)에서 물이 내려오는 것’이 우주순환 상생의 상징으로 보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산수몽(山水蒙)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 반대로 ‘하늘에 물이 있으되 산(山)에 비(=우(雨))로써 전혀 안내려 오는것’이 수산건(水山蹇)괘가 되는 것입니다.
이 건(蹇)이란 글자는 ‘막힐 색(塞)자’와 ‘발 족(足)자’가 합성되어 있는 모양을 취하는데, 이는 ‘말발’로 화백회의를 하는 것이 막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수 있는 것이지요.
몽(蒙)은 ‘어린애들이 사물을 익히듯이 익혀나가는 모색, 창조’의 길을 뜻합니다. 율곡선생의 격몽요결을 떠올릴수 있는 것이지요.
백제는 백가제해(百家濟海)- “백개의 나라들이 이지구의 바다를 구제하자.”는 캣취-프레이즈로써 입국하였는데, 이런 백가제해(百家濟海)의 꿈을 막 시작하는 곳에 수도(首都)를 정하고, 인간 사회와 대자연의 순환상생을 상징하는 몽산(蒙山)과 몽수(蒙水)를 쓰는것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아직 어려....저 찬란한 고조선 문명을 더 배워야해....”이런 독특한 겸손함이 있는 아주 문화스런 표어(標語)였던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고구리,백제,신라는 모두 화백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영산화백(靈山和白)의 상징인 산(山)과 박달(泊達)화백 (=배달화백(倍達和白))의 상징인 물,호수가 하나의 흐름으로 된 산수몽(山水蒙)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지요.
다. 이왕성(二王城) 가운데, 주성(主城)은 배달화백(倍達和白)을 하는 왕성(王城)이다.
중요한 것은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의 원칙 가운데, “어느 것이 주성(主城)인가?!”하는 점입니다.
삼국사기에 묘사한 것이나, 중국 사서에 묘사한 것을 보면, 배달화백을 한 왕성(王城)을 주성(主城)으로 늘 표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의외로 세 국제기구급-국가 즉 삼한관경(三韓管境)을 하는 세 관경국가(管境國家)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기준(基準)이 됩니다.
나중에 배달화백에 대해서 피력할 기회가 오면 상세히 말씀드리겠지만, ‘배달화백을 하는 왕성’은 고구리, 백제, 신라가 협동하여야만 비로서 제 ‘기능’을 발휘할수 있는 왕성(王城)입니다.
왕권(王權)이 침투할수 없는 소도(蘇塗)를 더욱더 혁신(革新)시킨 성지(聖地)가 바로 주왕성(主王城)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주왕성(主王城)은 결국 주인이 백제도 아니고, 신라도 아니고, 고구리도 아닌, 천독(天毒)이라 칭하는 일반 백성들이 화백민주주의를 실현하고, 그 고구리,백제,신라의 왕가(王家)는 보조할 뿐이었던 것이지요.
왕성이 2개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역 - 산택통기(山澤通氣)의 감각을 살려서, 배달화백을 하는 주왕성을 주택성(主澤城), 또 이의 안정성을 보장해주는 ‘보조 왕성(王城)’을 조산성(助山城)으로 나누어야하지만, 산성(山城)이 지나치게 ‘전시(戰時)의 개념’이 있으므로, 조육성(助陸城)으로 대체해서 구분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백제 - 나아가 고구리,신라는 항상정으로 호수(湖水)에 주성(主城)인 왕성(王城) 있고, 또 육지(陸地)에 보조 왕궁이 짝지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남 위례성 현 하남 몽양시(蒙陽市)는 저 석인산(石人山)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물을 안에 끌어들어 성내(城內) 호수(湖水)를 만들고, 여기서 ‘배달화백’을 한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라. 개로왕은 왜 하남 위례성 즉 남성(南城)에서 전투하지 않았는가?
1) 배달화백을 하는 주왕성(主王城)에서는 왕(王)도 ‘군사지휘권’이 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고구리 “장수왕께서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아주 신기한 말을 합니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다하더라도, 누가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기를 좋아하겠는가? 나는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죽을 것이다. 너는 여기에서 함께 죽어도 이로움이 없을 것이니,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계승하지 않겠는가?“라 말합니다.
이는 전투가 일어나기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는 고구리 군이 ‘북성(北城)을 - 이는 진평이군(晋平二郡)을 뜻한다- 쳐서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 -이는 하남 위례성 즉 몽양시(蒙陽市)를 뜻함 -으로 옮겨 공격하므로 성안이 위급하게 되자, 나와 도망하였다.’라고 삼국사기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신기한 것은, 개로왕(蓋鹵王)께서 남성(南城)에서는 ‘군사 지휘권’이 전혀 없고, 오직 북성(北城)에서만 ‘군사 지휘권’이 있음을 들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왕(王)임에도 불구하고, 소규모의 친위대만 데리고 탈출하다가, 결국 오늘날 석인산(石人山)이라 칭하는 ‘아차산(阿且山)’에서 이상한 법정(法定)의 판결에 따라 흉서(凶逝)하게 됩니다.
(석인산(石人山)에는 ‘돌사람’이 만들어진 설화가 있는데, 이는 개로왕의 죽음에 백제인들이 반발해서 만든 설화로 보이는데, 나중에 이곳에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신기한 것은 개로왕께서 이 남성(南城) 즉 주택성(主澤城)에서 하루도 싸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장수왕이 군(軍)을 이끌고 쳐들어 온다는 사실을 듣자, 개로왕께서는 “나를 따르는 사람은 북성(北城)에서만 전투하고, 이 전투에 패하면, 나의 군사지휘권을 따를 사람이 없으니 아들 (문주왕(文周王)보고) 보고 미리 피신하라.”라고 전투 전에 이미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노골적으로 ‘호수에 있는 주왕성(主王城)’에서는 백제왕이 군사지휘권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2) “백제의 하남 위례성이 고구리(高句麗)의 장안성이다.”
그리고, 중국사서에는 “고구리에는 장안성(長安城)이 있었다.”라고 말하는데, 그 장안성이 바로 ‘하남 위례성’을 고구리가 장수왕때 인계받아서 말하는 용어가 아닌가 하는 것이 좌계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하남 위례성과 장안성은 천독(天毒)이 관장하는 곳이어서, 굳이 “고구리것이다 백제것이다.”할수 없겠지요. 단지 고구리,백제,신라의 왕가(王家)는 단지 이런 배달화백을 하는 왕성을 - 관리하는 왕성 - 책임지는 보조 왕성에서만 군사지휘권을 유지했다고 봅니다.
4. 백제 수도(首都)있는 곳에 반드시 ‘거대한 연료(燃料) 매장지’가 있다.
가. 평정산의 석탄(石炭)
개로왕께서 사성(蛇城)을 지으실 때, “흙을 쪄서 샇았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떤 연료를 써서 흙을 쪘을까?”하는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남 위례성이 들어선 현 몽양시(蒙陽市) 남쪽의 평정산시(平頂山市)는 지금도 중국 하남에서 최대의 석탄(石炭) 생산지입니다.
이 석탄을 연료로 흙을 찐 것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무를 연료로 해서 ‘흙을 쳤다’면 헐벗는 산이 생기고, 그 결과 홍수(洪水)의 피해를 자초하기 때문에, 있을수 없는 일이지요.
이런 점에 보아서도 하남 위례성은 오늘날 하남 몽양시(蒙陽市)가 틀림없다고 좌계는 봅니다.
나. 소서노(召西奴) 어라하(於羅瑕)의 수도선택 기준 중에 하나는 ‘연료(燃料) 매장지’였다.
문제는 백제의 세 수도(首都)에는 항상적으로 ‘거대한 연료(燃料) 매장지’가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 좌계는 소서노(召西奴) 어라하(於羅瑕)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어라하(於羅瑕)는 왕을 칭하는 말인데, 좌계 생각에는 고주몽과 결혼 생활하는 동안에 이미 삼한관경(三韓管境)을 위해, “이미 백제를 건국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지을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예(禮)씨 부인과 유리왕께서 오자, 자연스럽게 고구리를 맡기고, 이미 건설된 백제 수도에 ‘자리잡은 것’으로 봅니다.
아무튼 천하의 거상(巨商)이셨던 소서노 어라하(於羅瑕)께서는 고주몽-동명성왕을 만나기 전에 이미 중요한 연료-매장지를 파악하고, 이를 무역품으로 다루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연료 매장지’에 백제 수도들을 한꺼번에 건설하셨으리라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지요.
몽정차(蒙頂茶)를 통해본 사천(四川) 백제(百濟)
아무튼 우리는 백제 수도(首都)의 세 수도에는 모두 몽산(蒙山) 혹은 몽수(蒙水)가 있는 신기한 공통점을 (-이는 나중에 밝혀짐-) 알 수가 있는데,
백제 왕가(王家)의 차가 다경(茶經)에서 최고급품인 상당차(上黨茶)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중국천하에서 명차(名茶)임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백제 수도(首都)에는 반드시 몽산(蒙山), 몽수(蒙水)가 있는 점을 통해서, 우리는 몽정차(蒙頂茶)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 촌안(籿顔) 박영환 교수의 몽정차(蒙頂茶)에 대한 소개
현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이자 현 동국대 강사로 계시는 촌안(籿顔) 박영환 교수는 사천성 몽정차(蒙頂茶)에 대해서 상세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천성에는 몽산(蒙山)이란 산이 있는데, 이는 아안(雅安)현에서 명산(名山) 현에 걸치고 있는 산인데, 이 곳의 정상(頂上)에는 기이한 봉우리가 많은데, 그 속에 아주 오래된 차나무 (=古茶樹)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위치가 오늘날 천장공로(川藏公路)의 출발점인 성도에서 서쪽으로 147키로미터가면 일차 정착점인 아안(雅安)인데 바로 여기가 몽산(蒙山)입니다. 아미산(峨眉山) 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다인(茶人)들에게 늘 회자되는 말이 “양자강중수(揚子江中水) 몽정산상차(蒙頂山上茶)”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몽정차(蒙頂茶)는 유명하다는 것입니다.
(참고: 중수(中水)는 물흐름 가운데를 나타내는 차(茶)용어인데, 이는 강소성 금산(金山)에서 흘러나오는 양자강 초기 지류(支流)인 중령천(中泠泉)의 중수(中水)를 뜻함)
몽산은 사철 안개가 많고, 비가 자주와 차(茶)가 잘자랄 조건이 되는데다가 독특한 몽산(蒙山)의 토질(土質) 때문에 이 차(茶)를 극상품으로 쳤다는 겁니다.
이조(李肇)의 당국사보(唐國史補)에는 ‘검남(劍南)에는 몽정석화(蒙頂石花)-,소방,산차가 있는데, 으뜸이다.“라는 기록이 보일뿐만 아니라,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그의 “차의 고향은 바로 몽산이로구나 차중고구시몽산(茶中故舊是蒙山))”라고 할정도 였다는 것이지요.
흥미있는 것은 육우(陸羽)가 “백제 왕가의 차가 중등급이다.”라고 한 저명(著明)한 평가를 “아니다!” “백제차가 최고이다.”라고 말하는 기록도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대 여양왕(黎陽王)은 몽산백운암다시(蒙山白雲巖茶詩) 중에서 “만약에 육우로 하여금 공론을 주체하게 한다면, 마땅히 (몽정차(蒙頂茶)를) 인간 제일차라 할 것이다.”라는 것이 그것이지요.
이 말은 “백제 수도(首都) 있는 곳에 반드시 몽산(蒙山)과 몽수(蒙水)가 있다!”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한 말입니다.
지금도 몽산(蒙山) 정상 기슭에 일곱 그루 선차(仙茶) 나무가 서 있는데, 여기에 열평 남짓한 정방형의 돌 난간을 세우고 황다원(皇茶園)이라고 칭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황다원(皇茶園)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당나라부터 청나라 때까지 약 천년간 공차(貢茶)’로 지정되어 매년 황실에 바쳐졌기 때문입니다.
황다원(皇茶園)에서 나는 차(茶)는 정공(正貢)이라 해서 황제(黃帝)에게 바쳐지고, 배공(陪貢) 즉 조정(朝廷) 대신들에게 바쳐지는 것은 이 몽산(蒙山)의 다섯 봉오리에 서있는 차나무에서 재배된 것을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나. 사천(四川) 대두왕성(大豆王城)에 대한 기록
삼국사기에는 하남 위례성에서 일찍 떠난 개로왕의 아들이자, 백제 제21대왕인 문주왕(文周王)께서
“원년(元年) (475년)에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고, 2년 (476년) 2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修理)하고 한북(漢北)의 민호(民戶)를 옮겨 살게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한북(漢北)은 설혹 ‘하남 위례성’를 관리하는 ‘진평이군’은 고구리(高句麗)에 넘어갔지만, 여량산맥 우측 - 따라서 황하(黃河 =한수(漢水))의 북쪽에 있는 사람을 옮겼음을 뜻한다고 봅니다.
이런 장거리 이민(移民)을 단행하면서 “왜 산성(山城)을 수리해서 옮겼는가?”가 일단 말이 안됩니다.
그런데 한문(漢文)에서 두(豆)는 제기(祭器)를 나타내기도 하는 용어입니다.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의 원칙에 의하면, 이곳이 바로 영산화백(靈山和白)을 담담하면서, 백제왕의 군사지휘권이 있는 왕성(王城)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바로 그 성(城)이라는 것이지요.
대두왕성(大豆王城)을 가르키는 것이지요.
이는 그 뜻이 ‘큰 제사를 주관하는 이왕성(二王城)가운데 왕권(王權) - 군사지휘권’이 있는산성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고대에 큰 제사(祭祀)일수록 명차(名茶)를 반드시 올려야하는 법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곳이 백제의 또다른 수도 가운데, 비록 주성(主城)은 아니지만, 왕권과 ‘군사지휘권’을 지닌 왕성인 것이지요.
사천 몽산(蒙山) 아래에는 아미산(峨眉山)이 있습니다.
아미차(峨眉茶) 역시 당(唐) 나라때 이미 그 명성을 떨쳤는데. 아미산의 흑수사(黑水寺) 뒤에는 아직도 천년 수령의 고차수(高茶樹) 한그루가 세월의 무게도 아랑곳없이 떠-억하니 버티고 서 있는데 이역시 사천(四川) 백제 왕가가 전매품으로 관리했으리라고 보여집니다.. 역사에 의하면 이곳 승려들이 이 차수에서 찻잎을 채취한 뒤 그 유명한 ‘설아(雪芽)’ 차를 만들어 이역시 역대 중국 황제에게 공차(貢茶)로 바쳤다고 합니다.
따라서 육우(陸羽)가 말한 ‘백제 왕실 차’라는 것은 바로 이 몽산(蒙山) 꼭대기 정상에서 나는 차(茶)잎으로 만드는 차를 주로 하고, 남쪽 인근에 있는 아미산(峨眉山)의 설아차(雪芽茶) 역시 ‘백제 왕실차’라고 했음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대두(大豆) - 큰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명차(名茶)는 모두 백제 왕실에서 직접관리하여야하니깐 말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차는 백제 왕성 뒤편 - 후원(後園)에서 키워지는 몽정차(蒙頂茶)였겠지요.
황다원(皇茶園)이라고 한것은 나중에 ‘대체’된 명칭이고, 이는 ‘백제 황실’에 의해서 관리되는 차라는 뜻이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백제 수도(首都)가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으로 건설되고, 또 영산화백(靈山和白)을 주도하고, 왕(王)의 군사지휘권이 있는 육지의 왕성이 바로 이곳임이 들어납니다..
문주왕 입장에서는 부왕(父王)이 흉서(凶逝)를 당하자, 고구리 군이 공격하기 곤란한 천혜요새 촉(西蜀)으로 옮길 현실적인 필요성이 있기도 하였으리라고 보여집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제도에 뚜렸한 인식이 없었던 것이기에, 그냥 “사천(四川)에 있는 웅진(熊津)이란 곳에 천도(遷都)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 대체된 - “시조(始祖)를 기억하자”는 감로(甘露) 설화
몽정차(蒙頂茶)하고 관련해서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 황다원(皇茶園)메서 정공(正貢) 즉 황실에 바치는 나무가 “감로(甘露) 기원전 53년- 기원전49년에 감로사 승려 보혜(普慧)선사 오리진(吳理眞)이 심었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로(甘露)라는 것은 서한(西漢) 서한 선제(宣帝) 유순(劉詢)의 연호(年號)인데 BC 53- BC50년간에 해당합니다.
이 시기가 소서노(召西奴) 어라하(於羅瑕) 및 온조(溫祖)께서 백제를 건국한 해, BC 18년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좌계 생각에는 소서노(召西奴) 어라하(於羅瑕)께서 이미 ‘기원전 53년’에 백제를 건국하시고, 여왕 신분을 지닌채, 고주몽 동명성왕과 결혼생활을 하다가 유리왕이 오자, 아들 온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사천 백제(百濟)의 건설을 할때 그 주역(主役)이 오리진(吳理眞)이 아니였겠는가?! 하는 생각이고, 그것이 남아있는 설화가 몽정감로(蒙頂甘露)와 관련되어 ‘시조를 잊지말자.’는 전설로 남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더욱이 이 몽정차(蒙頂茶)는 몽정석화(蒙頂石火)와 몽정감로(蒙頂甘露)로 나누어지는데, 흥미있는 것은 ‘몽정감로’에 대해서 그들이 지니고 있는 특이한 상념(想念)입니다.
감로(甘露)라면, 인간의 번뇌와 업보를 씻어주는 천상의 음료를 흔히 뜻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감로(甘露) 기원전 53년- 기원전49년에 감로사 승려 보혜(普慧)선사 오리진(吳理眞)이 심었다.”로 이야기할 때에는 꼭“ “감로(甘露)에는 시조(始祖)를 기억한다.”라는 뜻이 범어(梵語)에 있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즉 “보혜선사 오리진(吳理眞)이 이 몽정차(蒙頂茶)이기 때문에 그를 기억하기 위해서 굳이 감로(甘露)라는 명칭을 썼다.”고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소서노(召西奴), 혹은 온조’에 대한 기억을 잊지말자.”라는 뜻을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 대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감로가 ‘시조(始祖)를 기억한다.’라는 뜻이라면, 감로사(甘露寺)는 ‘결국 이 사천 백제를 개척한 소서노와 온조를 기억하는 절’로 읽을 수도 있으니깐요.
어쩌면, 사천 백제의 대두왕성(大豆王城)이 백제가 멸망한 후에, 감로사(甘露寺)로 변형되어서 백제의 꿈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북사(北史)에 무뚝뚝하게 설명된 고대 아시아의 세계체제 - 예(禮)와 악(樂)
가. 아시아의 세계체제 - 예(禮)와 악(樂)
좌계가 관경삼국(管境三國) - 이른바 “고구리,백제,신라가 대륙에 있었다.”는 것은 육우(陸羽)의 다경을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백제의 수도가 셋이 병립(竝立)하는 나라였으며, 그리고 각 수도(首都)에는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의 체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북사(北史)를 통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북사(北史)는 좀 무뚝뚝하지만 (친절하지 않다는 말임), 고대 아시아의 세계체제 - 이른바 유학(儒學)에서 말하는 예(禮)와 악(樂)의 몇가지 실질적 맥락을 전제하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진(秦)에 의한 패권적 통일과정과 독재적 폭정(暴政)을 겪은 후, 중국대륙에 있는 사람들은 “아시아(=天下)의 세계체제는 예(禮)와 악(樂)으로 재정립되어야하겠다.”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황제(皇帝)와 제후(諸侯)의 관계입니다.
황제는 제후(諸侯)에게 ‘자율적인 통치권’을 주는데 -이를 고대언어로 “분봉(分封)한다.”고 말한다. - 맹자(孟子)가 말하듯이 “토벌(討伐)은 하되 정벌(征伐)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일체의 기준(基準)이 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독점적 공표권(公表權)을 지니는 것을 뜻합니다.
하다 못해, 도량형(度量衡)의 기준은 물론, 천문과 역법(曆法) 모두 세상의 기준이 되는 것은 일인 황제가 독점하는 것이지요.
예(禮)라는 것은 상하(上下)의 위상(位相)이 다른 것을 구분해서, 하위 범주의 것이 상위의 범주 것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지요.
황제는 조공(朝貢)을 받지만, 분봉(分封) - 즉 자율권을 주며, 제후(諸侯)를 응징함에 있어, 군사적, 외교적 동원권(動員權)을 지니는데, 그 이전에 조정은 하지만, 이 세상의 기준이 되는 일체의 것에 대한 공표권(公表權)은 독점해야된다는 것이지요.
즉 “질서의 하위범주와 상위범주가 엄연히 다르다.”는 인식이 그것이지요.
이러한 공표권(公表權) 가운데 가장 중요시여기는 것이 바로 제천권(祭天權)입니다.
‘황제(皇帝)와 엄격히 선별된 수행원들 만이 저 태산(泰山)에 올라가서 엄숙하게 제례(祭禮)를 지내는 것이지요.
황제는 ‘하늘에 대한 공표권(公表權)까지 최고 상위 범주로써 독점하고 있는 것’을 통해 예(禮)의 최상위 임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예(禮)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의 세계체제는 이미, 내부의 허약함에 의해 혼란으로 빠지고, 이윽고 진(秦)에 의해서 철저히 부셔진 쓰디쓴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전혀 다른 세계경영의 원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악(樂)입니다.
이 악(樂)이 바로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화백민주주의’ 특히 ‘박달(=낙랑(樂浪))화백인데, 중원대륙 - 그 최대영역은 바로 북으로는 진시황제의 만리장성과 동으로는 황해, 남으로는 남지나해가 그 한계인 것이지요. - ’안‘에 있던 고조선 문명을 화하(華夏)인들의 우매함으로 회피했다고 봅니다.
그러다가 이윽고 진시황제의 혹정(酷政)을 당하고 서야 비로서 다시 ‘세계체제로써의 악(樂)’이 절실히 필요해서 조선오군(朝鮮五郡) 혹은 한사군의 사회적 실험을 거쳐서, 이윽고 중국대륙 안에 관경삼국을 두는 식으로 발전시켜왔다고 좌계는 봅니다.
나. 예(禮)와 악(樂)의 교류의 분기점 - 조선오군(朝鮮五郡) 혹은 한사군(漢四郡)의 설치
말하자면 예(禮)와 악(樂)을 중국인-화하(華夏)와 사이(四夷)포함 -교류시키지 못해, 진(秦)의 폭정이 일어났다는 반성이 있었지만, 중화 패권주의가 한(漢)나라 초기에 다시 일어나자, 고조선-부여 연합세력에게 패전을 한 직후에, 조선오군(朝鮮五郡),- 속칭 한사군(漢四郡 - 이는 설치비용을 한(漢)에서 대었다는 뜻임)을 설치함으로써, 한(漢)이 장악한 중원 외부의 사이(四夷)들이 - 무력을 동반한 대량이동을 오히려 막을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가 이런 서한(西漢)이 끝나고, 왕망이 이끄는 신(新)의 ‘유교 근본주의적 쿠테타’ 역시 짧은 실험을 거쳐 처절한 실패가 되자, 동한(東漢)때 부터는 서한(西漢)의 장안(長安)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합니다. 이는 중원대륙 주변의 사이(四夷)들이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는 독특한 ‘국제질서’ - 또 다른 세계경영의 원래를 수용하면서 고구리, 백제, 신라를 좀더 측근에 두기 위한 의도적 천도로 봅니다. 그래야만 중원을 향해 러쉬(Rush)하는 외래종족을 콘트롤(control)하기 용기하기 때문이지요. 쉽게 말해서 세 관경국가의 덕(德)을 보기 위해서, 낙양(洛陽)근처에 하남 위례성을 둘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좌계가 말하는 핵심은 하남(河南) 위례성(尉禮城)의 ‘예(禮)’라는 것은 예(禮)와 악(樂)이 교류되는 완벽한 모델로써의 예(禮)이기 때문에, “위례성(尉禮城)이라고 이름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다. 북사(北史)에 들어난 예(禮)의 한계선(限界線)
세계체제로써의 예(禮)의 관리영역과 세계체제로써의 악(樂)의 관리체제가 달랐고, 그 교집합(交集合)이 바로 대륙삼국이었음을 북사(北史)가 말하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이 점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의 관련된 부분을 발췌해서 해석해 보면 자명해 집니다.
(1) 대륙 백제의 존재를 나타내는 구절
부분의 주해(註解) 1)
‘ 其國東極<新羅>, 北接<高句麗> 西南俱限大海, 處小海南’
가) 대해(大海)와 소해(小海)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남구한대해(西南俱限大海)라는 용어입니다. 이는 “서쪽과 남쪽으로 (각각) 큰바다(=대해(大海)를 ‘모두 함께(=구(俱))’ 그 한계로 하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 중국의 남쪽바다와 중국의 서해(西海) 즉 오늘날 청해(靑海)를 뜻합니다.(청해는 지금도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그 다음 “(백제라는 나라는) 소해(小海)의 남쪽에 자리잡고(=처(處)해)있다.”라는 구절과 이어져 있습니다. 이 때의 소해(小海)는 동해(東海) 즉 ‘황해(黃海)의 한 부분이어서 작은 바다’인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산동반도 위의 발해(渤海)를 소해(小海)라고 한 것이지요.
크기로 보면 청해(靑海)가 발해(渤海)보다 훨씬 작지요.
그러나 천하(天下)를 나타내는 말 자체가 사해(四海)이고, 이 사해(四海) 가운데 서해(西海)가 청해(靑海)이기 때문에, 위상(位相)으로 보아서는 더 큰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체제의 예(禮)’라는 위상(位相)입니다.
발해가 물리적으로는 더 크지만, 이런 크기는 동해(東海) 안에 하위 범주이기 때문에, 사해(四海)의 한단계 위상이 높은 서해(西海)보다는 적은 것이지요.
(이점 한문(漢文)을 해석할 때 가장 유의해야할 점이다. 크고 작음은 ‘물리적 크기’에 달려있지 않고, 항시 “상위범주는 대(大), 하위 범주는 소(小)로 표현한다.)
나) 극(極)과 접(接)
한자(漢字)의 극(極)은 힘(力)과 변화의 변곡점(變曲點)이 되는 개념입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이웃한 것이 아니라, 백제라는 나라가 활동하기에는 반드시 신라가 동쪽에 있어야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부분의 해석 1)
“백제(百濟)라는 나라는 항시 동쪽으로 신라를 극점(極點)으로, 그리고 북으로는 항시 고구리를 접해서 있는 ‘유기성 있는 나라’인데, 그나라는 황해(黃海)와 서해(西海)라는 사해(四海)라는 큰 위상의 대해(大海)를 모두 함께 한계로 하고 있었는데, 그 자리는 산동반도를 한계로 하는 발해 남쪽에 자리잡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밖의 백제’는 없는가?”하는 점입니다.
이점 백제 팔족(八族) 대성(大姓)을 이야기하는 문맥 조금 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부분의 주해(註解) 2)
其王每以四仲月祭天及五帝之神. 立其始祖<仇台>之廟於國城, 歲四祠之. 國西南, 人島居者十五所, 皆有城邑.
가) 예(禮)하고는 다른 악(樂)의 제천(祭天)의 개념.
(1) 사중월(四仲月)
사시사철 가운데 가운데 달을 말함. 즉 음력(陰曆)으로 2월, 5월, 8월, 11월을 뜻하고, 제사대상은 천독(天毒) 즉 일반 백성을 뜻하며, 이는 일종의 축제(祝祭)임.
(2)오제지신(五帝之神)
화백민주주의를 아시아에 펼치기 위해 노력했던 신화시대의 인물들을 뜻함.
(학자(學者)마다 그의견이 다름)
(3) 시조(始祖) 구태(仇台)와 세사사지(歲四祠之)
동이족의 시조(始祖)개념은 역사적으로 “누가 먼저”의 개념이 아니라, 두 집단이 만났을때, 공동조상을 비로서 선정(選定)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 구태(仇台)는 소서노의 전남편으로써 오늘날 만주(滿洲)에 계속 남아있다가 최후로 통합되었던 집단이 상징적으로 내건 인물이다. 즉 광개토태왕 비문에서도 신예한인(新穢漢人)을 조상으로 선정하는 풍습이 있음.
즉 신참(新參) 부족들을 ‘왕따’시키지 않는 제사임.
이런 새롭게 통합된 백제인의 조상을 제사지내는 것도 일년에 네 번 즉 세사사지(歲四祠之)하기 때문에, 결국 천독(天毒)들과 오제지신, 신예한인(新穢漢人)와의 공동 조상을 일괄해서 같이 지냄을 뜻함.
나) 중굮 황제의 ‘예(禮)의 한계선’을 나타내는 구절
그런데 위 구절의 말미에 있는 ‘國西南, 人島居者十五所, 皆有城邑.4이 무척 의미심장한 구절임.
부분의 주해(註解) 3)
(1) 국서남(國西南)
이는 “백제가 ‘산동성 이남에서 남지나해, 청해에 이르른다.”고 그 영역(領域)을 이미 말했기 때문에, 결국 오늘날 대만(臺灣)이 있는 - 탐라도, 탐미다례 등등으로 표현한 그 섬임. 곳으로부터 서남(西南)쪽을 뜻함.
(2) 인도거자십오소 개유성읍(人島居者十五所, 皆有城邑)
인도거자십오소(人島居者十五所)는 ‘사람이 사는 섬(=도(島))을 뜻함. 이런 섬들이 모두 성읍(城邑)들이 있을 정도로 큰 것음 뜻함.
따라서 이는 오늘날 대만(臺灣), 해남도(海南島), 필리핀 군도등 성읍들이 있을 정도로 큰 섬들이 15개나 있었음을 뜻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중국대륙’을 떠난 ‘백제 영역’은 ‘중국 황제가 예(禮)란 세계정치로 간섭할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그 성읍(城邑)의 이름등등을 상세히 말할 필요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즉 중국 황제가 세계경영으로 ‘예(禮)’의 차원이 중국대륙 ‘안’이나, ‘밖’의 큰섬은 이와는 다른 ‘악(樂)’의 차원에서 다스리는 곳인데, 그것이 악(樂)의 독자적인 영역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전혀 질적(質的)으로 다른 제천(祭天) 방법을 먼저 서술한 것임.
부분의 해석 3)
백제왕은 (중국의 황제(皇帝)가 제천(祭天)을 독점함에 비하여, 전혀 다른 세계경영의 축인 ‘악(樂)으로써의 제천(祭天)’을 행하는데), 그것은 사시사철 가운데 달인 2월, 5월,8월에 천독(天毒: 백성을 뜻함)과 이들이 주권(主權)행위 함을 도운 전설적인 오제(五帝)들과 신예한인의 ‘새로운 시조’인 구태(仇台)를 모시고 한달동안 내내 축제를 지내는 전혀 다른 방법이었다.
그런데, 예(禮)의 차원의 한계선인 나라의 서남향 방향으로 성읍(城邑)이 들어설 정도로 큰 섬 - 탐라(耽羅)를 비롯한 해남도, 필리핀 등등 15개가 있는데, (이는 중국 황제의 예(禮)의 통제선 밖이므로 상세(詳細)히 거론치 않기로 한다.)
라. 관경삼국(管境三國) - 고구리,백제,신라가 결국 삼위일체의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
좌계가 북사(北史)를 읽으면서 놀란 것은 이 글을 쓴 사람들이 좀 무뚝뚝하지만, 결국 이 고구리,백제,신라는 결국 삼위일체의 나라인 것을 솔직히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1) ‘삼위일체의 나라’ 임을 나타내는 구절
- ‘其人雜有<新羅>·<高麗>·<倭>等, 亦有中國人’
“이는 백제라는 나라는 신라(新羅)와 고려(고구리를 뜻함)과 왜(倭 - 소왜(小倭), 대왜(大倭)를 다일컬음.)과 국경없이 섞여살았으며, 중국인들이 왕래하는 것도 또한 허용하였다.”
라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역유중국인(亦有中國人)은 ‘중국 황제가 다스리는 예(禮)에 통치선 - 당(唐)나라의 관점에서보면 만리장성을 북쪽 한계로 한 대륙 ’안‘에 살기 때문에, 관경삼국(管境三國)이 들어와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고, 그 밖의 영역 - 말하자면 한반도, 일본열도, 그리고 필리핀, 월남지역에도 이들 관경삼국(管境三國)이 있었음을 들어내는 것인 것이지요.
2) ‘소도(蘇塗) 큰길(健吉)’과 ‘얼’과 ‘물’의 관계
- 王姓<餘氏>, 號[於羅瑕], 百姓呼爲[健吉之], <夏>言 王也. 王妻號[於陸], <夏>言妃也.
문제는 북사(北史)에 나오는 백제 왕(王)의 이름입니다.
위의 글을 해석하자면 다음과 갈습니다.
“왕성(王姓)을 여(餘)씨였는데, 부르기를 ‘어라하(於羅瑕)’라 했고, 백성들은 이를 부르기를 건길지(健吉之)라고 했다. 화하(華夏)말로는 이는 왕(王)을 뜻한다. 또 왕(王)의 부인(夫人)을 말하기를 어륙(於陸)이라고 했는데, 이를 화하(華夏)말로는 비(妃)를 뜻한다.”
이 이야기에서 좌계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백성들이 ‘백제 왕’을 건길지(健吉之)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미 북사(北史)의 기록자는 관경삼국(管境三國)이 실제로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나라이고, 또 백성 즉 천독(天毒)들이 제천의 대상이 됨은 물론, 자유롭게 삼국을 자유여행, 자유이민하면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이 고구리 왕이든 백제 왕이든 신라왕이든 할것없이 무조건 통칭해서 건질지(健吉之)로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좌계는 ‘큰길(=대로(大路))’의 음차(音借)라고 봅니다. 즉 삼한(三韓)때부터 중국대륙에 있던 소도(蘇塗)가 있었고, 이는 왕권(王權)이 침투할수 없는 ‘천독(天毒)의 성지(聖地)’였는데, 이것이 ‘별읍(別邑)’이고, 삼한 시절에는 왕(王)과 관료들이 사는 읍(邑)과 엄격히 구분이 되었는데, 수많은 별읍들이 네트워크(network)된 ‘큰 길’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 소도(蘇塗) 큰길(健吉)이라고 관경삼국(管境三國)의 백성(천독(天毒))들은 분렀음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삼한(三韓)때는 고구리,백제,신라 왕들이 이곳에 못들어오는 룰(rule)이 있었는데, 고주몽 동명성왕께서 ‘악(樂)’이란 ‘세계체제’의 체제혁명을 하시어, 왕(王)들이 소도(蘇塗)-큰길(健吉)을 누비고 다닐 수 있는 것으로 혁신(革新)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세 관경국가(管境國家)의 백성 즉 천독(天毒)들은 ‘소도 큰길’에 나타나는(=출현(出現))‘ 지(우두머리를 나타내는 존칭어미)’를 붙어서 불렀다는 것이지요.
더욱 흥미있는 것은 “왕을 어라하(於羅瑕), 왕비(王妃)를 어륙(於陸)”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국어의 ‘얼(정신(精神)’을 나타내는 말을 그 근본으로 하고 있음이 자명(自明)한데, 언어학자들은 ‘얼’이 고대에는 드라비다 언어를 비롯해서 ‘이루(Ilu)’와 곤련있는데, 이는 ‘물(=수(水))’라는 것이지요.
좌계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백제의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 가운데, 배달화백(倍達和白)을 하는 주왕성(主王城)은 호수(湖水)나 큰 강물, 포구(浦口)가 있는 곳은 백제왕이나, 고구리 왕이나, 신라왕이나 모두 함께 천독(天毒) 들의 주권행사에 의해, 배달화백을 통해, 중국의 여러 국가들의 국가영역(國家領域)까지도 조정하는 것이기에 ‘아무런 군사적 지휘권’이 없음이 이런 어원(語源)에서도 들어난다는 것이지요.
즉 예(禮)에 의한 ‘세계경영’은 중국대륙 ‘안’에만 있지만, .....
“예(禮)와 악(樂)이 서로 겹치는 부분이 중국대륙 안에서 ‘소도(蘇塗)-큰길(健吉)’이고, 이는 일체의 중국의 하천(河川)과 호수를 연결지음은 물론, 중요한 산맥과 고개를 넘는 것도, 천독(天毒)들의 권리였다.”는 것을 북사(北史)에서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하이웨이(high-way)를 타듯이 삼한(三韓)의 천독(天毒)들은 자유자재로 중국대륙을 소도(蘇塗) 큰길(健吉)을 돌아다녔다는 것입니다.
단, 중국에서 황제(皇帝)권이 있는 나라의 홤제 혹은 칙명(勅命)을 받는 장군(將軍)들 만이 다닐수 있음이 허용된 것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기본-전제를 북사(北史)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있는데, 아주 놀라운 것이 백제의 수도와 이를 보조하는 ‘국제 통영의 다섯개의 위성도시’를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를 적용시키보면, 백제의 세 수도(首都)의 성격이 명확하게 들어남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7. 북사(北史)의 백제의 수도(首都)및 위성도시에 대한 언급
가. 북사(北史) 열전(列傳)과 삼국사기의 ‘일원적(一元的) 해석’
아무튼 장수왕의 공격에 의해서 개로왕은 수도(首都)를 웅진(熊津)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백제 수도(首都)있는 곳에 몽산(蒙山), 몽수(蒙水)가 있다.”라는 원칙아래 사천성(四川省)의 몽산(蒙山) - 즉 지금의 아안현(雅安縣)이 ‘배달화백을 하는 주왕성(主王城)’은 아니지만, 왕권(王權) 즉 군사지휘권이 있는 대두왕성(大豆王城)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뭏든 삼국사기에는 백제 제 21대 문주왕(文周王) 편(篇)에
“원년(元年 :475년 ) 10월에 서울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라고 되어 있습니다.이 “웅진(熊津)이 도대체 어디냐?”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북사(北史)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수도(首都)는) 동서로 450 리이고, 남북으로 900여리가 되는데, 수도(首都)들 명칭이 거발성(居拔城), 고마성(固麻城)이라 한다.(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百餘里. 其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
가) 동서사백오십리(東西四百五十里)남북구백여리(南北九百餘里)와 거발성(居拔城)과 고마성(固麻城) 기서 동서 450리(里), 남북 900여리라는 것은 바로 백제의 수도(首都)들의 크기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백제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이 원칙으로 되어있는데, 주왕성(主王城)은 항시 배달화백을 하는 ‘물’이있는 성(城)입니다.
그런데 동서(東西)로 450리 남북으로 900여리된다는 것은 배달화백을 하는 주왕성(主王城)에는 호수(湖水)나 큰 강(江)이 있어야 하므로, 다음 세 가지 경우가 있게 됩니다.
(1) 동서(東西)로 황하(黃河)가 흐르는 경우. - 하남(河南) 위례성
첫째는 이미 하남 위례성(尉禮城) 즉 몽양시(蒙陽市)와 진평이군(晋平二郡)의 예에서 보다시피, 하천(河川)의 흐름이 동서로 흐를 경우입니다.
동서(東西)로 흐르는 하천 상하(上下)에 두 왕성(王城)이 각기 있으면 되는 것이지요. 소위 개로왕의 북성(北城), 남성(南城)입니다.
그리고 배달화백을 하는 주왕성은 몽수(蒙水)로부터 끌어들인 물로 인공호수를 만들면 되는 것이지요.
황하는 잦은 홍수가 일어나기 때문에, 배달화백을 하기에는 적절치 않습니다. 따라서 안에 인공호수를 만들어 ‘배달화백’을 했겠지요.
(2) 다양한 강물이 모여 동서로 흐르는 사천(四川) 백제의 경우 - 고마성(웅진(熊津))의 경우
둘째는 이미 본 사천(四川) 백제처럼 여러 강물이 한군데 모여 동서(東西)로 빠질 경우입니다.
이때에는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이 ‘아안현(雅安縣)’의 대두왕성(大豆王城)으로부터 북동(北東)쪽으로 길게 빠지는 방향으로 뻗어있는 형식으로 고마성(固麻城)이 들어섭니다.
(3) 큰 호수(湖水)들이 중첩되어 북서(北西) 방향으로 있는 산동(山東) 백제의 경우 - 거발성(사비성)의 경우.
남북 900여리는 북서 방향으로 뻗어있는 호수(湖水)들 - 미산호(微山湖)、소양호(昭陽湖)、독산호(獨山湖), 남양호(南陽湖)동편으로 자리잡고 있기에 동서 450리만 해결되면 됩니다. 따라서 이 호수들 동쪽의 450리가 백주 수도 - 직할지가 있었던 곳인 것이지요.
이런 세가지 성격의 백제 수도 가운데, 북사(北史)는 이미 하남 위례성의 북성(北城)은 고구리에게 넘어가 ‘하남 위례성’의 국제적 명칭이 ‘장안성(長安城)’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나무지 두 수도만 말하게 됩니다. .
그것이 ‘其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라는 표현이지요
이는 “(그 백제 수도(首都)들이란 고마성(固麻城)이라고 말하고, 또한 거발성(居拔城)이라고 말한다.”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나. 백제 수도(首都)들의 외곽 위성도시의 특징
그런데 매우 흥미있는 것은 그것이 고마성(固麻城)이든 거발성이든지 똑같은 외곽-위성도시를 지니고 있다는 설명이 북사(北史)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두 수도(首都) - 나아가서는 백제의 세 수도(首都) - 심지어는 고구려, 신라까지도 이런 외곽 위성도시를 갖출 가능성을 느끼게 하는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관경삼국(管境三國)은 ‘아시아의 세계체제’를 움직이는 ‘악(樂)’ - 이는 ‘박달화백’ , 배달화백을 뜻한다.-을 맡은 삼위일체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다섯가지 위성도시 조건에 합당하면, “이는 북사(北史)에 의거, 확실히 백제 수도가 틈림없다.”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엄밀한 해석을 해볼 필요가 있는 구절입니다.
其外更有五方: 中方曰<古沙城>, 東方曰<得安城>, 南方曰<久知下城>, 西方曰<刀先城>, 北方曰<熊津城>.
가) 기외경유오방(其外更有五方 )과 중방(中方), 기호지세(騎虎之勢)
(1) 외곽 다섯가지 위성도시(衛星都市)
백제 수도 즉 거발성(居拔城)과 고마성(固麻城) “밖에 다시(=외경(外更)’ 오방(五方)이 있다.”는 이상한 표현입니다. 이는 오늘날로 말하면 동서 450리 남북 900여리가 되는 수도는 그것이 거발성(居拔城)이든 고마성(固麻城)이든지 상관없이 모두 5개의 위성도시(衛星都市)를 지닌다는 사실입니다.
(2) 중방(中方)= 강의 하류(下流)를 지키는 ‘옛날 모래가 있던 성(城)’
흥미있는 것은 이런 외곽 위성도시 가운데, “중방(中方)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中)은 그 개념이 ‘가운데’라는 것도 있지만, ‘흐름 가운데(=중류(中流)’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이는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의 원칙아래 주왕성(主王城)이 배달화백을 하는 왕성이기 때문에 대부분이 하천(河川) 주변에 자리잡고, 특히 백제(百濟)는 ‘백가제해(百家濟海 - 이는 모든(=백(百))나라가 연합하여 바다를 구제(救濟)한다.“는 해상지향형이기 때문에, 더욱 수도를 관류(貫流)하는 흐름 바로 밖의 어떤 성(城)을 중방(中方)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런 중방의 이름을 무조건 고사성(古沙城)이라고 모든 도성에서 붙었는데, 이는 ‘옛날 모래가 많은 성(城)’이어서 더욱 하류(下流)에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이흐르면 모래가 쌓이니깐 말입니다.
즉 거발성(居拔城)과 고마성(固麻城) 모두 끼고있는 강의 하류(下流)에는 반드시 고사성(古沙城)이라는 외곽 위성도시가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3) 백제의 수도의 동편 방향에 있는 외곽도시는 결국 수도(首都)에 대해서 득안(得安) - 편안함을 얻게하는 역할을 하는 도시라는 뜻입니다.
(4) ‘굿’(=축제)를 뜻하는 ‘구지하(久知下)’
또 남쪽 방향에 있는 것은 거발성(居拔城)이든 고마성(固麻城)이든지 간에, 모두 외곽 위성도시를 구지하성(久知下城)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굿’(=샤만(shaman)들이 집단 치유를 위해서 하는 ’축제‘를 뜻함)의 고대 음가(音價)인 듯 합니다.
구지가(龜旨歌)에서 들어나듯이 고대에는 ’굿‘이 아니라 ’궂‘이었던 것이지요.
하(下)는 권위있는 대상 앞에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전하(殿下)는 ’전(殿)에 계시는 분(=임금)의 권위‘를 인정하고 “저는 그 밑에 있습니다.”라는 뜻이지요.
이런 면에서 ‘뭇 사람들이 굿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축제(祝祭)가 열리는’이란 뜻을 품고 있는 위성도시임을 밝힐 수 있다고 봅니다.
(5) ‘칼을 먼저 써도 되는’ 도선성(刀先城)
그런데 거발성(居拔城)이나 고마성(固麻城)에서나 모두 서쪽에 있는 외곽 위성도시는 도선성(刀先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칼을 먼저 써도 된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따라서 접근금지의 성역(聖域)임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6) 곰-나라인 웅진(熊津)
또한 고마성(固麻城)이든 거발성(居拔城)이든지 간에 북방에 있는 외곽 위성도시를 일컬어 모두 웅진(熊津)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런 다섯 개 방향의 위성도시를 백제 수도에 두는 것이 백제 수도의 역할을 - 다시 말하면 사천(四川)백제이든, 산동(山東) 백제이든지 간에 중국황제의 예(禮)의 영역 안에 ‘소도(蘇塗) 큰길(健吉)’을 회통시키는 중차대한 역할을 더욱 돕는 것인가하는 점을 따져보기로 합시다.
8. 사천(四川) 백제의 고마성(固麻城)과 ‘오방성(五方城)-외곽 위성도시 ’
가. “웅진(熊津)이 백제의 수도였다.”는 오해
놀라운 것은 “웅진(熊津)이란 외곽-위성도시가 ‘고마성’이든 ‘거발성’이든지 간에 똑같이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일단 외곽도시 “웅진(熊津)- 소위 ‘곰-나루’가 도대체 위성도시로써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따져보는 일입니다.
(2) 웅진(熊津)의 역할은 ‘모국어(母國語)를 유지하면서 국제교류(國際交流)하는 곳’이었다.
웅진(熊津)은 좌계가 볼때에는 이 ‘곰-나루’는 좌계가 이미 ‘(*) 동방천서(東方天書), 바이칼, 빙하기, 곰(熊, gomme)의 깊은 상관성’에서 밝혔듯이 ‘헬륨 가스(gas) 열기구’를 띠우면서 , 이런 열기구 밑에 ‘모국어(母國語)를 결승(結繩)으로써 시각화시켜 서로 빨리 익히기 쉽도록 서로 대화하는 곳’으로 보입니다. 결승(結繩)을 다루다가 혹시 잘못해서 떨어지더라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반드시 밑에 하천(河川)이 있는 그런 훈민(訓民)들이 모이는 곳인 것이지요.
이처럼 ‘모국어(母國語)를 쌍방향적으로 결승(結繩)으로써 시각화시키면서 다양한 언어를 쓰는 민족들이 ’물(강江)‘이란 안전지대 위에서 국제교류를 하는 것이 웅진(熊津)의 성격이기 때문에, 이러한 웅진(熊津)은 백제 수도 - 그것이 거발성(居拔城), 고마성(固麻城) 뿐만 아니라, 하남 위례성(尉禮城) - 나아가 대왜(大倭), 혹은 대한(大漢)인이 살던 한반도에도 필요한 것이지요. 한반도에도 웅진(熊津)이 있는 것은 이런 이유라고 봅니다.
즉 중국대륙 밖에서도 수없이 있을수 있는 겻이지요..
물론 백제의 수도(首都) - 그것이 고마성(固麻城)이든, 거발성(居拔城), 그리고 하남(河南) 위례성에는 ‘북방(北方)-외곽도시’로써 필수적으로 설치되는 외곽도시 였음이 분명한 것이지요.
하남 위례성에 사성(蛇城)이란 것도 - 이런 결승(結繩)을 황하 주변에 거대한 스크린으로 보여주는 ‘결승(結繩)을 하는 마차(馬車)들이 몰려드는 통행로’로 보입니다.
따라서 현 한반도 공주(公州)가 웅진(熊津)인 것은 사실이겠지만, “역기가 백제의 수도(首都)였다.”는 것은 사료적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나. 사천(四川) 백제의 수도명칭이 고마성(固麻城)!
흔히들 웅진(熊津)이 ‘곰-나루’고 이는 ‘고마성’의 ‘고마’와 같기 때문에, 한반도 웅진이 ‘고마성’이라고 말합니다.
1) ‘고마(固麻)’의 기본적인 뜻은 ‘고맙다’이다.
그러나 ‘고마(固麻)’에는 ‘고맙다’는 기본적인 뜻이 있다.
그런데 이 고마성(固麻城)과 관련해서 우리가 유의해야할 것은 바로 ‘고마 웁다’ 혹은 ‘고마 와 같다.’는 표현입니다. 모두 곰여신 웅녀(熊女)에서 파생된 개념이긴 하지만, 그 뜻은 어쨌던 감사함과 고마움을 뜻하는 용어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 사천성 중경(重慶)의 이름 자체가 전래(傳來)되는 ‘쌍중희경(雙重喜慶)의 도시(都市)’라는 개념 -즉 ‘반가움과 경사(慶事)스럼이 겹치는 도시’를 축약해서 명명된 지명임을 유념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백제의 수도가 이왕성(二王城)임을 기억하면, ‘겹친다’는 뜻으로 쌍중희경(雙重喜慶)이라고 할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미 보아왔듯이 사천(四川)에는 백제의 수도가 있으면 반드시 있어야하는 몽산(蒙山)이 있고, 백제왕실에서 전매품으로 재배하는 몽정차(蒙頂茶), 또 아미산의 명차 - 설아차(雪芽茶)가 있고, 이는 백제가 멸망한 직후의 사람인 육우(陸羽)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 백제 수도 고마성(固麻城)은 현 사천성(四川省)일 수밖에 없는 이유
1) 其國東極<新羅>’의 함의
‘북사(北史)’에 들어난 백제 수도 고마성(固麻城)은 현 사천성에서 찾아야합니다.
왜 그런가?
북사 자체에 “백제는 동쪽에 신라라는 극점(極點)을 지니고 있다.(其國東極<新羅>)”라고 되어 있고, 본래 마한(馬韓)을 승계한 것이 백제이고, 양자강의 길목인 ‘영흥도’를 ‘길목의 왕(王)’이란 뜻의 ‘목지국(目支國)’을 마한에서 관장하고 있다면, 자연히 마한(馬韓)사람들 및 백제인들은 양자강의 뭇 지류(支流) 위에서 퍼지듯이(spray) 포진(布陣)해 있음이 들어 나고 있을 수밖에 없고, 양자강의 원류(原流)가 흐르는 사천성(四川省)에 백제의 수도가 있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2) ‘國西南, 人島居者十五所, 皆有城邑.’의 함의와 ‘연결할수 있는 지역’
또하나 고마성(固麻城)을 현 ‘사천성(四川省)’에서 찾아야할 이유는 이 ‘북사(北史)’에서 백제 8족 대성(大姓)을 말한 직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라의 서남(西南) 쪽으로 ‘사람이 사는 섬이 15개가 있는데, 모두 성읍(城邑)이 있었다.(國西南, 人島居者十五所, 皆有城邑)”는 표현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섬들 - 대만(臺灣), 해남도(海南島), 필리핀 군도 등등이‘백제 영역’ 안에 있었기 때문에, 현 중국대륙의 해남도(海南島) 근처의 광동성은 자연히 백제 땅이 된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백제 해군의 중요 주력부대’가 해남도 주변 광동성에 있었기 때문에, 이와 연결할 수 있는 사천성(四川省)이 고마성(固麻城)이 지정학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지요.
9. 사천성(四川省) 고마성(固麻城)에 대한 백제 수도의 오방(五方) - 외곽도시의 적용.
가. 입지조건
사천성(四川省)은 그 이름 자체가 강(江)이 네 개 모인 것 즉 - 금사강(金沙江), 민강(岷江 - 아래로부터 합류하는 대도하(大渡河) 포함, 퉈강(=순강(蕣江)), 또 자링강(=가릉강(嘉陵江))을 합쳐서 장강(長江) 즉 오늘날 양자강이 동쪽으로 흐르게 하는 지역입니다.
나.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의 조건에 합당
그런데 이미 보아왔듯이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의 원칙에서 보면, 현 중경(重慶)이 바로 ‘고마성(固麻城)’이고, 또한 현 아안현(雅安縣)의 몽산(蒙山)이 있는 대두왕성(大豆王城)이 바로 2개의 왕성이 되어 약간 동북쪽으로 수도가 놓이게 되는 형상을 띠게 됩니다.
양자강을 다 아룰르면서, 저 운남성, 광동성의 입구쪽으로 닥아설려면 자연히 백제 수도의 특징 남북이 900여리가 될 수밖에 없고, 또 동서는 450리로 해도, 충분하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충분한 것은“이 서촉(西蜀)지방에 유비가 일으킨 촉한(蜀漢)에 전세(傳貰)내 주고도 백제 수도로써 운영할 충분한 넓이”라는 것이지요.
다. 사천(四川) 백제에의 오방(五方)-외곽도시 적용
1) 삼협(三峽) - 동방(東方)의 득안성(得安城)과 중방(中方)의 고사성(古沙城)
흔히들 중국에서 서촉(西蜀)으로 들어가는 장강(長江)의 입구가 삼협(三峽)인데, 험준하기 짝이 없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중류(中流)가 흐르는 중방(中方)인 고사성(古沙城)을 외곽도시로 둘수 있는 장소인 것이지요.
또한 사천(四川)으로 모인 강물이 동(東)으로 흐르기 때문에 이 삼협(三峽)에 동방(東方)에 있는 득안성(得安城)을 설치할 수가 있는 지형입니다.
득안성(得安城)을 삼협에 설치하고, 중방인 고사성(古沙城)을 똑같이 기호지세(騎虎之勢)로 자리잡게 하면, 사천(四川) 백제 자체에 ‘안정화를 얻게 하는’ 득안(得安)케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2) 이빈(=의빈(宜賓))은 ‘국제적인 축제’를 하기 좋은 구지하성(久知下城)
금사강(金沙江)은 브이(V) 자 모양으로 동남(東南)으로 흐르다가 꺽여서 중경(重慶)을 향하여 서북(西北)쪽으로 흐릅니다.
따라서 중경(重慶)에서 보면, 이 강(江)의 흐름은 결국 남서(南西) 쪽에 있는데, 외곽도시인 남(南)쪽으로 봐도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금사강(金沙江)이 민강(岷江)가 만나는 지점에 바로 이빈시(=의빈(宜賓))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흔히들 ‘여기부터 양자강(=장강(長江))의 머리(=두(頭))로 여기는데, 중요한 것은 이 시의 명칭입니다. 의빈(宜賓) - 이는 ’마땅히 맞이하여야 할 손님‘이란 뜻이지요.
고마성 남방(南方)의 위성도시 명칭이 구지하(久知下) 즉 저 남해도 주변의 광동지방에서 오는 다양한 외래 종족들을 손님으로 맞이하여 ‘굿’ - 다시말하여 ‘국제적인 축제’를 벌리기 좋은 도시이지요.
3) 조어성(釣魚城) - ‘곰-나루(웅진(熊津))’을 설치하기 좋은 북쪽지역
가릉강(嘉陵江)은 중경(重慶)에서 북북서(北北西) 방향으로 흘러들어오는 강이어서, 고마성 북방(北方) 외곽도시가 들어설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한 강입니다.
또 이 강의 이름이 주역(周易)의‘형통(亨通)하게 하는 것은 기꺼히 만남이다.(亨者 嘉之會也)’의 뜻과 연결되어 있어서, 여러 민족이 ‘모국어(母國語)를 쌍방향으로 결승 형태로 하기 좋은 즉 ’기꺼운 만남‘을 이룰수 있는 강(江)이란 뜻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경에서 약 70키로 떨어져 있는 곳에, 가릉강(嘉陵江)과 배강(涪江),거강(渠江)이 만나는 물돌이 되는 지역이 있는데, 길고 긴 천연적인 절벽이 있고, 이 위에 세워진 조어성(釣魚城)이란 유명한 요새(要塞)가 있습니다.
‘도자기 로드’를 통해 유럽의 모든 부(富)를 획득한 송(宋)과 원(元)나라가 격전(激戰)을 치룬 아주 유명한 장소이지요.
바로 여기서 백제가 ‘곰-나루’ 즉 ‘모국어를 쌍방향적으로 결승(結繩)으로 표현하면서, 자연스럽게 외국어를 배우는 장소’였던 것이지요.
이 조어성은 세 강의 합류지점이기 때문에, 남, 북, 서의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고, 지세가 아주 험준하다. 여기는 산수가 험준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수로와 육로교통이 연결되어 사천성의 각지로 연결되는 교통요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러 민족이 모여들기 가장 적합한 장소이기도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백제의 수도의 거리인 ‘남북 900여리로 잡아보면, 대두왕성(大豆王城)인 아안현(雅安縣)과 고마성(固麻城)인 ’중경‘의 중심을 잡더라도, 이는 백제 수도 ’안‘에 들어오는 영역이지 결코, 외곽도시라고 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지요. 이는 백제 수도에 모두 외곽도시에 웅진(熊津)을 두었지만, 백제 왕실에서 직접 관리하는 가장 중요한 웅진(熊津)임이 들어납니다.
따라서 백제 사람들은 웅진(熊津) 하면, 일단 떠올리는 것이 바로 이 조어성(釣魚城) - 웅진이었고, 삼국사기는 “고마성(固麻城)으로 천도한 것을 웅진(熊津)으로 천도한 것”으로 대체기록 된 것으로 보입니다.
나. 사천(四川)에 숨어있는 고대의 또다른 ‘하이테크’의 재료
이런 사천(四川) 백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의‘하이-테크(high-tech)’재료 가운데, ‘대나무’가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깊습니다.
사천성(四川省)에서 대나무(=竹)가 왕성하게 자라는 지역입니다.
대가 무척 크고 빨리 자라서, 자고로 “화북에서는 석탄(石炭)을, 남방에서는 목탄(木炭)을, 그리고 서촉(西蜀)에서는 죽탄(竹炭)을 쓴다. ”고 할 정도로 사천성의 ‘대나무’는 연료로써 유명한 것이지요.
가) 항주-경주가 쓴 숮은 사천성 죽탄(竹炭)이다.
“항주-경주가 숱을 썼다.”는 것도 사실, 이 사천성이 죽탄(竹炭)을 그대로 양자강에 뗏목으로 흘러내렸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목탄(木炭)이었다면 금방 항주(杭州) 주변의 산이 폐허가 됨)
나) 무한(無限)히 올라갈 수 있는 비계(飛階)
이 대나무로 비계(飛階)를 쌓는 것은 오늘날 중국에서 4-50 층 빌딩에서도 대나무-비계(飛階)를 사용하여 올라가 공사를 할정도로 대나무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다) 석유(石油)와 ‘천연 개스(Gas)’를 시추하는 쇠공이를 끌어올리는 ‘대나무-올실-로프’의 위력
놀라운 것은 ‘조셉 니담’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보면, 이 대나무를 가늘게 올실을 내어서 꼬은 것은 거의 강철(鋼鐵) 강도가 나기 때문에, 사천성(四川省)에서 고대에 석유를 시추할때에 시추하는 쇠덩어리를 이 ‘대나무-올실’로 만들어진 ‘로프(rope)’로써 사용하였다는 록이 있을 정도로 대나무의 위력은 놀라운 것입니다.
조셉니담이 제공한 사진(寫眞)을 보면 6-7층 동양식 고층건물 옆에 3-4배로 이 시추공이를 올릴수 있는 비계(飛階)가 있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시추공이 암반을 쪼개면 ‘돌가루’가 생기는데, 이를 빨아들이는 작용도 ‘대나무를 연결’해서 했다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라)천장공로(川藏公路)의 고대 무역제품은 차(茶)뿐만이 아니라, 죽(竹)도 있었다.
오늘날 천장공로(川藏公路) - 고대에 “‘티베트’의 말과 사천성을 통해서 공급되는 중국의 차(茶)를 교역하는 차마지로(茶馬之路)가 있었다.”고 말하지만, 티베트에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차(茶)뿐만이 아니라, ‘대나무-올실-로프’도 있었던 것입니다.
티베트의 천애절벽을 서로 연결하는 색도(索道)는 모두 ‘대나무-올실-로프’였던 것이고, 또 초한지에서 보다시피, 서촉(西蜀)의 잔도(棧道) 역시 ‘대나무-올실-로프’가 있어야만 가능했던 것이지요.
2) 국제적으로 가장 유명한 ‘조어성(釣魚城)-곰나루’가 되었던 까닭
가) 가장 높은 곳에서의 결승(結繩)을 통한 대화
원래 조어성(釣魚城) 주변은 자연절벽이 있는데 다가, 대나무-비계(飛階)로써 그 높이를 백여미터 가량 올릴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인공적인 높이를 더한 대나무-비계에서 수만길을 내려오면서 ‘번지-점프’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결승을 통한 대화’를 하였으니 가장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겠지요.
나) 가라(물고기, 나라)와 조어(釣魚)의 메타포
‘낙시대에 줄이 달여있고, 그 끝에 물고기가 있는 것’이 바로 조어(釣魚)의 모습이라면, 이처럼 천길-만길 ‘대나무-올실-로프’에 의지 떨어지는 것은, 결국 사람이 마치 ‘물고기’처럼 매어달려 있는 모습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어학자들은 ‘가라’가 ‘드라비다’언어로 ‘물고기’인 동시에 ‘나라(국가)’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언어의 상호 유통’을 통해 결국 나라를 낚었던 것이지요.
다) 가장 많은 종류의 언어가 소통된 지역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남만(南蠻)지역과 ‘티베트’지역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이 수많은 종족의 사람이 소통되는 지역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모국어를 결승형태로 서로 대화하면서 상대방 언어를 배우는 고대 최고의 ‘언어 교육장’이 바로 ‘조어성-곰나루’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 의해서, 이 사천(四川)의 ‘조어성(釣魚城)-곰나루’는 국제적 곰나루였고, 사천 백제의 수도(首都) 즉 왕실의 직할지에서 관리할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다. 마지막으로 사천(四川) 백제의 서방(西方) 외곽도시인 ‘도선성(刀先城)’은 무엇을 지키는 절대 금지구역(禁止區域)이었나?
1) 성도(成都) 주변의 천연 개스(gas)와 석유 채굴지를 지키는 도선성(刀先城)들
그것은 바로 오늘날 성도(成都) 주변에서 나는 석유(石油)와 ‘천연 개스(gas)’입니다.
이 천연개스 속에는 좌계가 이미 말했듯이 ‘헬륨 가스’가 있어서, 열기구(熱器具)를 만드는 필수품인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천연개스와 석유 채굴지에는 도선성(刀先城)들을 설치해서 ‘절대금지 구역’으로 백제가 관리했음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북사(北史)는 “서방(西方)에 도선성(刀先城)을 위성도시로써 설치했다.”고 만 했지, 그것이 단 하나의 성(城)이라고 언급은 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럿이 있을수 있다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백제 수도가 들어서는 곳에 반드시 거대 연료 매장지가 있다.”는 원칙과 잘 어울립니다.
2) 청성산(靑城山)
또 하나 도선성(刀先城)으로 지켜야할 곳이 바로 청성산(靑城山)입니다.
이 산은 ‘늘 푸르러서’푸른 성(城)과 같다’는 뜻에서 붙여진 성(省)이름인데, 도가(道家)성지(聖地)로 유명한 산입니다.
그런데 백제에서 ‘헬럼 가스(gas) 열기구’를 띄울 때에는 그 모습을 붕(鵬)새, 혹은 천룡(天龍), 봉황새 등의 모양으로 만들어서 띄웠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전설적인 ‘하늘을 나는 짐승’모양을 해야, ‘궁금증에 의해서 추적당하는 폐단’을 없앨수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혹 어떤 사람이 “천룡이 나는 것을 보았다.”, “봉황새가 나는 것을 보았다.”하여도, “그런 성산(聖山)에는 ‘원래 그런 신물(神物)이 산다.” “거룩한 조짐이다.”라고 정보 추적에서 보호되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열기구가 착륙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호수(湖水)가 있어야, 연착륙 즉 soft-landing할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청성산은 월성지(月城池)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헬륨 가스 열기구’를 띄울수 있는 적지(適地)입니다. 그러기에 이 청성산(靑城山) 주변에 도선성(刀先城)을 지어서 ‘백제의 최대 하이-테크 를- 이는 고구리, 신라의 공동 하이-테크’이기도 하지만 - 지킬수 있는 것이지요.
‘먼저 칼을 써도 되는’ 도선성(刀先城)은 ‘헬륨 가스’ 채취원, 또 열기구 비행장하고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사실 산이름 자체가 ‘푸른 성(=청성(靑城)’인 것은 어쩌면 백제가 최대의 산성(山城)으로 삼은 것이 원인이 돼서, 내려오는 이름인지도 모릅니다.
10. ‘고마(固麻)의 길’ : 사천성(四川省) 고마성 - 운남(雲南) 천룡사 - 광동성
가. ‘고무나무 즙액’을 독점(獨占)하는 중요한 백제의 수도
결국 좌계가 이야기하는 핵심은 “백제는 ‘고마(固麻)의 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천성 고마성에서 그 서방(西方) 도선성(刀先城)인 청성산(靑城山)에 외부 모습이 붕새, 봉황, 혹은 천룡으로 된 ‘헬륨-가스-열기구’를 타고, 운남(雲南) 점창산 이해(耳海)에 중간에 휴식을 취하고, 이윽고 광동성 혹은 해남도(海南島)가는 ‘하늘의 길’이 있었다는 점이지요.
그리고 이런 ‘하늘의 길’이 있었기 때문에, 백제는 ‘헬륨-가스-열기구’를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고무나무-즙액’을 오늘날 월남, 인도등등의 대륙에서 독점할수 있었던 것이고, 백가제해(百家濟海)할수 있는 광동성 해운(海運)의 길도 열수 있었던 것이라고 봅니다.
나. 운남(雲南) 보이차 - 백제 왕실이 직접 관리했던 대륙 삼국의 요충지
오늘날 보이차(普洱茶)의 명산지는 바로 운남 점창산으로 둘러쌓인 이해(耳海) 주변의 천룡사(天龍寺)에서 납니다.
문자 그대로 ‘아미산’발 천룡(天龍)이 머무르는 중간 기착지이지요.
그런데, 차(茶)는 지질(地質)의 영향을 받는 식물이고, 지질(地質)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옛날이나 지금이나 명차(名茶)가 나는 곳은 한정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다경(茶經)에서 육우(陸羽)가 말하는 백제 왕실차는 결국 세가지입니다. 하나는 사천(四川) 백제의 왕성(王城)이 있었던 아안현(雅安縣)의 몽정차(蒙頂茶), 또 아미산(峨眉山)의 설아차(雪芽茶), 그리고 ‘고마의 길’의 중간 비행장인 운남(雲南)의 보이차를 뜻하는 것이지요.
결국 다경(茶經)이라는 책을 통해서 들어나는 것은 사천(四川) 백제가 있었다는 사실이며,
이 책이 고구리, 백제가 망한 직후에 육우(陸羽)가 저술한 것이기에, 당시대 때 중국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고구리, 백제, 신라의 수도(首都)들이 중국대륙에 있었다.”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또 화백회의라는 세계체제의 악(樂)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관경삼국(管境三國)의 왕실에서 내놓는 차(茶)를 일반백성 - 즉 천독(天毒)들이 마시면서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으리라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천독(天毒) 안에는 북사(北史) 이야기대로 중국인(中國人)도 있었기 때문에, “ 고구리, 백제, 신라 왕실 차가 ‘고급 차(茶)이다.”라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었다는 것이지요.
아마...육우(陸羽)가 다경을 쓸 때에는 “고구리, 백제, 신라 차(茶)를 마셔보지 않은 사람은 문화인이라 할수 없다.”라는 인식까지 있었으리라고 좌계는 봅니다.
3. “송준희 선생님은 산동 백제 (거발성)의 두 왕성(王城)을 다 찾으셨다.”
좌계가 이 싸이트(site) ‘우리역사’ 칼럼 ‘백제’에 관한 글을 전부 읽어보고 놀란 점은 운영자이신 “송준희 선생께서 북사(北史)에서 말하는 거발성(居拔城) 즉 산동 백제의 두 왕성(王城)을 다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
백제의 수도는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의 원칙아래 건립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사비성(泗泌城)은 북사(北史)에서 말하는 거발성(居拔城) - 이는 수도(首都)의 명칭이고, 오늘날 산동(山東)임 -의 두 왕성이 호수(湖水)를 끼고 있는 것이 바로, 사성(泗城)이고, 육지에 있으면서, 왕권(王權)과 군사지휘권이 있는 곳의 성(城)이 비성(泌城)의 합성어로 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산동성(山東省)은 하남성(河南省)의 오른 쪽으로 줄지어 이어지는 호수(湖水)를 경계(境界)로 하고 있습니다.
치우 천자의 묘가 있는 동평(東平) 에 자리잡은 동평호(東平湖) 그리고, 이어서 남남동(南南東) 방향으로 미산호(微山湖), 소양호(昭陽湖), 독산호(獨山湖), 남양호(南陽湖)가 연이어 있어서 하남(河南)과의 자연스런 경계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연이은 호수들이 그 방향이 남북 방향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저 북사(北史)에서 말하는 도성의 크기가 동서 450리, 남북 900여리되는 조건을 가지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동평호(東平湖)와 미산호(微山湖) 사이에 오늘날 운하(運河)로 되어 있지만, 고대에는 이곳에서 태산(泰山)과 몽산(蒙山)에서 흘러들어오는 문수(汶水)와 중국 4대강의 하나인 제수(濟水)가 흘러 들어와서 수호지(水湖志)로 유명한 양산박(梁山泊) - 고대 표현으로 거야택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동평호(東平湖) - 거야택(鋸野澤) - 미산호, 소양호, 독산호, 남양호 가 줄을 이어서 ‘호수(湖水)로 된 긴 경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정확히 남북 900여리, 동서 450리가 되는 백제 도성의 조건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가. 사성(泗城)의 위치
문제는 그럼 “주성(主城)인 사성(泗城)은 어디인가?”
산동에서 제일 큰 산은 중국 황제들이 제천(祭天)을 하는 태산(泰山)과 또 연이어져 있는 호수들과 병행해서 달리는 몽산(蒙山)이 있습니다.
몽산산맥(蒙山山脈) 중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사수(泗水)인데, 이 사수(泗水)가 공자의 사당이 있는 곡부 위를 감싸고 훌러 내려와서 독산호(獨山湖)로 들어가는데, 마치 물로 해자를 두르듯이 백마하가 이 사수(泗水) 남쪽에 흘러들어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이에 사성(泗城)이 있을 수밖에 없고, 백제가 멸망할 때, 등장하는 백강(白江)이 바로 이 백마하(白馬河)인 것이지요.
이 사수(泗水)와 백마하(白馬河) 가운데 두 도시가 바로 곡부(曲阜)와 그 밑에 사성(泗城)이 있는 것이지요.
이는 줄줄이 이어져 있는 동평호(東平湖), 미산호(微山湖), 독산호(獨山湖)소양호(昭陽湖), 남양호(南陽湖)을 통해서 박달(泊達)화백 즉 배달화백을 할 수 있는 곳이지요.
특히 이런 호수들 오른쪽 지명이 연주(兗州)인데, 이 연(兗)이란 글짜가 ‘대(大)+태(兌)’의 합성어로 볼수 있고, 태(兌)는 배달화백 때 타고 나가는 ‘수상(水上)연단(演壇)’이기 때문에 그 깊은 관련성을 아직도 지명이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 비성(肥城)의 위치
그런데, 동평(東平)호가 황하(黃河)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에는 계백장군께서 결사대를 조직해서 나당(羅唐)연합군을 마지막으로 막은 황산(黃山)이 있고, 그 주변에 바로 비성(肥城)이 있습니다.
계백장군께서는 나당연합군이 황하(黃河)로부터 산동 백제로 들어오는 입구 동평호(東平湖)가 황하로 빠지는 곳도- 따라서 나당 연합군이 수군(水軍)으로 황하를 타고 들어올 수 있다. - 막으면서, 왕성인 비성(泌城 -혹은 肥城)을 습격하는 적(敵)들을 5000명의 결사대로써 기동타격대를 만들어서 필요한 곳에 그때마다 공급할수 있는 ‘최후의 저항’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뭏든 산동백제 - 북사(北史)에서 말하는 백제의 거발성(居拔城)이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면, 송준희 님께서 결국 거발성의 두 왕성 사성(泗城)과 비성(肥城)을 모두 찾으신 것으로 좌계는 생각합니다.
2. 놀라운 산동(山東)의 군사및 문화 지리
좌계가 이 산동성의 지명과 지리(地理)을 살펴보고 몹시 놀란 것은 그 지명이 문화적 사상적으로 몹시 의미가 있으며, 또 군사학적으로도 놀라운 가치가 있다는 점입니다.
가. 예(禮)와 악(樂)의 완벽한 조화를 추구한 백제의 거발성
(1) 곡부(曲阜)와 사성(泗城)
일단 사수(泗水)와 백마하(白馬河)로 둘러쌓인 곳에 공자의 사당인 곡부(曲阜) 밑에 사성(泗城)이 있었다고 할수 있는데, 이는 ‘백제(百濟)- 북사(北史)에 의하면, 고구리와 신라와 실질적으로 삼위일체의 나라이다.-가 세계경영을 하기 위해서 고대 아시아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는 공자의 사당 - 곡부(曲阜) 따라서 예(禮)의 상징을 업고, 연이어 이어져 있는 호수(湖水)들을통한 낙랑(樂浪) - 즉 박달화백 내지 배달화백을 하여 ’악(樂)의 상징‘이 그 밑인 사성(泗城)에 있어서 예와 악의 완벽한 조화를 아시아인들에게 각인시키기 안성맞춤인 지리-배치(配置)라는 것이지요.
(2) ‘황제의 제천(祭天)의 터’인 태산(泰山)과 천독(天毒)들의 제천의 터인 호수(湖水)들
또한 놀라운 것은 중국 역대 황제들이 제천(祭天)하는 태산과 동시에 천독(天毒)들이 제천(祭天)하는 호수들이 나란히 있다는 것입니다.
북사에 의하면, 일반 백성 즉 천독들이 지내는 제천이 그들이 주권자(主權者)로써의 능력을 발휘하는 호수(湖水)가 임이 들어납니다.
其王每以四仲月祭天及五帝之神. 立其始祖<仇台>之廟於國城, 歲四祠之.
“백제왕은 (중국의 황제가 태산(泰山)에서 제천을 독점적(獨占的)으로 함에 비하여, 전혀 다른 세계경영의 축인 ‘악(樂)으로써의 제천(祭天)’을 행하는데), 그것은 사시사철 가운데 달인 2월, 5월,8월에 천독(天毒: 백성을 뜻함)과 이들이 주권(主權)행위 함을 도운 전설적인 오제(五帝)들과 신예한인의 ‘새로운 시조’인 구태(仇台)를 모시고 한 달 동안 내내 축제를 지내는 전혀 다른 방법이었다.”
이런 묘사는 그들이 배달화백을 하는 장소인 호수(湖水)가에서 제천함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지요.
또 배달화백이 ‘중국 황제가 예(禮)의 한계선’ 밖인 한반도, 일본, 필리핀 등등의 배달화백에서 ‘말발’들이 ‘마땅히 멀리 있어야하는 파트너(partner - 이를 의료나(宜遼那)라고 최치원 선생이 고증(考證)한 표현이다.)’를 통해서 몰려들기 때문에, 연(連)이어져 있는 5대호의 제천행사는 계절마다 그 중간 달에 늘 있는 무척 성대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산동백제는 이런 천독(天毒)들의 연(連)이은 5대호가 있기 때문에, 일체의 제천이 모두 산동백제에서 이루어짐을 뜻합니다.
이 역시 두 가지 제천(祭天)을 거발성 백제 - 산동 백제에서 완벽한 조화감을 지니게 하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백가제해(百家濟海) - “백가지 나라들이 연합하여 바다를 구제한다.”는 이 이야기는 바다가 사해(四海) 즉 천하를 뜻한다는 면에서 “‘백나라가 첨로(담로라고도 함)로 연합하여 천하를 구제하자”는 뜻이어서 여지없이 국제기구급 국가의 위상을 들어내고, 이러한 예(禮)와 악(樂)의 완벽한 조화를 들어내도록 지명과 성곽도시를 배치한 것은 ’문화스런 세계경영‘을 하는 백제에게는 아주 걸맞는 지역으로 보입니다.
나.‘봉선(封禪)의 교류’를 하는 또 다른 산택통기(山澤通氣)
그런데, 제천(祭天)을 한학(漢學)에서 말할 때, 봉선제(封禪祭), 줄여서 봉선(封禪)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 이 봉선(封禪)의 정확한 어원(語源)이 무언가?”하는 점입니다.
(1) 동한(東漢) 반고(班固)의 ‘봉선(封禪)’에 대한 개념은 문제가 있다.
(가) 반고의 봉선(封禪)에 대한 설명
동한(東漢)의 반고(班固)는 백호통(白虎通) 권삼(卷三)에서 《封禪에 대해서 다음과 갈이 말합니다.
▲원문 : 王者易姓而起, 必升封泰山, 何? 報告之義也. 始受命之日, 改制應天, 天下太平, 功成封禪, 以告太平也.
△번역 : 왕자가 역성(易性) (혁명을 일으켜) 일어나면 반드시 태산에 올라 봉(封)을 행하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보답하여 아뢴다(報告)는 뜻다.
천명(天命)을 처음으로 받은 날에 개제(改制)하고 하늘에 응하니, 천하가 태평하고, 공이 이루어져 봉선(封禪)을 행하니 그럼으로써 태평(太平)을 고하게 된다.
▲원문 : 所以必於泰山, 何? 萬物之始, 交代之處也. 必於其上, 何? 因高告高, 順其類也. 故升封者, 增高也.
△번역 : 반드시 태산에서 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태산은) 만물의 처음이요 (만물이) 교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태산) 정상에서 (봉선)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높음으로써 높음에 고하니, 비슷한 부류를 따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올라 봉을 행하는 일은 그 높음을 더욱 높이는 일이다.
▲下禪梁甫之基, 廣厚也. 皆刻石紀號者, 著己之功跡以自效也. 封者, 廣也. 言禪者, 明以成功相傳也.
△번역 : (태산) 아래로 내려와 양보(梁甫) 기슭에서 선(禪) 제사를 지내는 것은 두터움을 더욱 두텁게 하는 일이다. (태산 꼭대기에서 지내는 封이건 태산 아래 양보 기슭에서 지내는 禪이건) 모두 돌을 새겨 號를 기록하는 일은 자기의 공적을 드러냄으로써 스스로 본받기 위함이다. 封이란 넓다는 뜻이다. 禪이란 밝음으로써 서로 전(傳)하는 일이다.
(- 이하 봉선(封禪)에 대한 반고의 저술은 계속됨 -)
(나)봉(封)과 선(禪)의 어원(語源)
반고의 이러한 봉선(封禪)에 대한 개념 정리는 그 명확한 어원(語源)과 유래(由來)가 들어나지 않는데 그 문제가 있습니다.
선(禪)은 명상(冥想)이란 개념이고, 이는 인도어 ‘디야나(dhyana)’를 음차(音借)한 용어입니다. 그런데 ‘화백’을 ‘사회적 명상’이라고 정의(定義)내릴 수 있는데, ‘물’에서 하는 배달화백의 경우에는 태(兌)라는 수상(水上) 연단(演壇)을 타고서 호수 가에 있는 천독(天毒)들의 말발을 받아서 회의를 진행시킵니다.
그런데, 이런 수상 연단(演壇)의 모습을 태(兌)로도 나타내지만, 단(單)으로도 나타냅니다.
이 글자는 금문(金文)으로 보면 ‘수레를 끌고 나가는 모습’인데, 태(兌)와 똑같이 ‘끄는 고리’를 묶을 수 있는 것이 연단(演壇) 머리 양쪽에 있습니다. 즉 태(兌)는 팔(八)자 모양이 그것이고, 단(單)은 입 구(口)가 두 개 있는 것이지요. 태(兌)라는 1인용 평저선(平底船) 밑에 수레 받침을 놓은 것이 바로 단(單)인 것이지요.
따라서 수많은 단(單)들을 보이면서 배달화백을 진행하는 것을 선(禪)이라고 할수 있는 것이지요. 왜냐면 ‘선(禪)=시(示)+단(單)’이니깐요.
아무튼 이런 과정을 진행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여러 나라를 통합할 때, 수상 연단을 탄 사람들끼리 점차 ‘정견(政見)에 대한 의견차이’를 좁혀지면서 ‘정책 통합’과 동시에 ‘권력의 양보’가 진행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선양(禪讓)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진행과정은 천독(天毒)들이 호수(湖水)가에서 ‘말발’을 옮기는 것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서로의 아이디어(Idea)와 공덕(功德)이 상호 해치는 작용 - 경쟁적 피해가 일어나지 않고, 오늘날 말로 윈(win)-윈(win)하게 하는 특이한 효과가 있습니다.
따라서 선양(禪讓)은 박달(泊達)화백, 혹은 배달화백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지요.
(다) ‘눈가리고 아웅’식의 선양(禪讓)
그러다가 중국대륙에서 이런 선양(禪讓) 방법 - 다시 말하면 배달화백을 하는 방법을 잃 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진행방법은 모르고 “선(禪)이란 것은 서로의 공덕(功德)을 이루게 하면서도 그 공덕을 서로 전(傳)하는 것이다. (言禪者, 明以成功相傳也.)”라는 추상적인 개념만이 남아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추상성’ 때문에, 역대 중국의 황제가 선양(禪讓)을 받을 때는 소위 “천자(天子)를 끼고, 천하(天下)를 호령한다.(挾天子 號令天下)”는 식으로 천자(天子)를 존중과 동시에 협박하는 과정을 거쳐서 양위(讓位)를 받는데 3-4 번 반드시 양보(讓步)하는 척하는 ‘눈가리고 아웅’식의 선양(禪讓)으로 변모해 간 것입니다.
따라서 원래는 호수(湖水)에서 해야 하는 선(禪) 혹은 선양(禪讓)이 이상하게 산(山) - 태산(泰山) 옆에 있는 양보의 기슭(梁甫之基)으로 올라가 버린 것이지요.
(3) 당지(唐池)와 마이크(mic, microphone)에 불과한 중국 천자(天子)와 제(帝)
(가) 당지(唐池), 장당경(藏唐京), 대문구(大汶口) 문화
우리는 저 연(連)이어져 있는 다섯 개의 호수 동평호(東平湖)-미산호(微山湖)-독산호(獨山湖)-소양호(昭陽湖)-남양호(南陽湖)에서 천독(天毒)들이 모여 ‘진정한 선양(禪讓)이 일어나는
배달화백‘이 일어났다면, 이 호수(湖水)의 명칭을 새롭게 부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인식이 배달화백을 하는 주체가 일반 백성인 하느님, 천독(天毒) 그 자체임에 비하여 천자(天子)는 단지 이를 공표(公表)하는 대변인(代辯人)에 불과하다는 인식입니다.
말하자면, 중국 천자는‘마이크 (mic, microphone)’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고조선(古朝鮮)에는 장당경(藏唐京)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당(唐)이란 글자입니다. 이는 ‘경(庚)과 구(口)’가 합성되어 있는 모양인데, 경(庚)이란 글자는 ‘나팔’같은 확성기를 손(-수(手))으로 잡고 있는 모양입니다. 따라서 당(唐)의 원래의 뜻은 “큰 소리로 말하다.”는 것입니다.
당(唐)에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당산(唐山)은 ‘제천(祭天) 하는 성산(聖山)’이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저 산동(山東)의 오대호의 이름을 ‘제천(祭天)하는 호수(湖水)’라는 뜻에서 당지(唐池)라고 이름짓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아무튼 이런 당지(唐池)에서 일반 백성 즉 하느님, 천독(天毒) 자체의 의견을 저 태산(泰山)에서 ‘마이크’에 불과한 천자(天子)가 공표권을 지니고 발표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지요.
그런데 “고조선 혹은 그 이전인 환국(桓國) 때부터 장당경(藏唐京)들이 있었다.”고 한단고기(桓檀古記)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장당경 가운데, 이 산동(山東)의 당지(唐池)가 장당경(藏唐京)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좌계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산동(山東)에 중요한 고대문화 - 이른바 대문구(大汶口) 문화가 있고, 이 곳에 있는 물 - 문수(汶水)가 당지(唐池)인 ‘동평호(東平湖)’와 ‘미산호(微山湖)’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문(汶)이란 글자가 물 수(水)에 “표현을 하다.”는 뜻의 문(文)이 합성되어 있어서 더욱더 그 개연성을 크게 해줍니다.
(나) 봉선(封禪)의 교류를 이루는 또 다른 산택통기(山澤通氣)의 개념.
따라서 원래의 봉선(封禪)의 개념은 저 산동 당지(唐池)에서 일반 백성인 하느님, 천독(天毒)들이 배달화백을 하면서 제천(祭天)의식인 선제(禪祭)를 축제로써 지내고, 그 결과를 마이크(mic)역할을 하는 천자(天子)가 태산(泰山)에서 봉제(封祭)를 지내는 그런 개념이었다고 봅니다.
좌계는 주역(周易)의 산택통기(山澤通氣)의 개념을 “영산화백과 배달화백의 교류”라는 차원의 의미도 있지만, 이처럼 “봉선(封禪)의 교류”를 위해서 태산(泰山)과 당지(唐池)가 교류하는 개념도 있었다고 봅니다.
이런 개념 파악이 중요한 것은 현실적으로 “중국대륙의 모든 일반 백성을 천독(天毒)으로 뫼시고, 이른바 악(樂)이란 ‘배달화백’으로 통치하기 힘들다.”는 인식이 - 이는 환국(桓國), 고조선(古朝鮮)으로 이어지는 ‘악(樂)’-주도 문명의 뼈아픈 역사적 경험이기도 하다 -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화하(華夏) 사람들이 골수(骨髓) 깊게 자리잡은 예(禮)의 - 거창한 제례(祭禮), 의식(儀式)을 통한 세계정치를 뜻함 - 부분의 정점(頂点)인 천자(天子)를 악(樂) 주도문명의 천독(天毒)들의 ‘마이크(mic)로 쓰자! 는 세계정치의 혁신이 일어난 것이 바로 두 동명성왕(東明聖王) - 해모수 동명성왕과 고주몽 동명성왕이 이끄는 대륙 삼국의 재투입
사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 결론
산동 백제는 문화지리적 조건 자체가 ‘세계 경영’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에 백제가 들어서는 것은 백가제해(百家濟海) - 이는 “백나라가 결합해서 사해(四海)를 구제하자!”는 뜻임. 오늘날 유.엔(U.N) 과 그 실질적 내용이 같은데, 훨씬 발달한 세계정치의 개념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공자의 사당이 있는 곡부(曲阜) 바로 밑의 사성(泗城), 저 천자(天子)의 제천을 지내는 태산(泰山)과 천독(天毒)들이 제천하는 당지(唐池)가 다 있는 곳이니, 이를 껴안고, 중국대륙에서 700 여년간 백가제해(百家濟海)할만한 땅이었던 것입니다.
나. 박산(博山)과 치수(淄水)로 본 ‘탄현(炭峴)과 기벌포(伎伐浦)’의 문제
(1) 탄현의 위치
그런데,“백제의 사비성이 어디인가?”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 바로 백제 멸망시에 충신(忠臣) 성충(成忠)이 의자왕에게 “만약 다른나라의 군사가 쳐들어오면, 육로(陸路)로는 탄현(炭峴)을 지나지 말도록 하고, 수군(水軍)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하는 것이 옳겠습니다.”고 간곡히 당부한 그 위치인 탄현(炭峴)과 기벌포(伎伐浦)의 위치가 밝혀지면 사비백제 즉 산동백제의 설은 더욱 굳건해지겠지요.
그런데 태산(泰山) 동북향으로 보면 박산(博山)이란 산(山)이 있고, 또한 치수(淄水)라는 물이 있습니다. 현 산동성은 이 치수(淄水)와 박산(博山)을 합하여 ‘쯔뽀(=치박(淄博)시’가 들어서 있습니다.
‘백제 금동 대향로’와 같은 향로들에 보면 ‘연꽃잎이 하나의 산(山)으로 되어 있는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를 흔히들 박산(博山)-향로(香爐)라고 하지요.
아무튼 백제의 상징 자체가 이런 박산(博山)이고 박산(博山)-향로인데, 중요한 것은 이 박산이 결국 향(香)이 불타는 불(=화(火))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실제 산동성 박산(博山)은 산동성 최대의 석탄(石炭) - 매장지입니다.
석탄이 채굴되는 곳의 강물은 탄(炭)의 영향으로 그 강물이 ‘검습니다.’
그런데 치수(淄水)의 치(淄)란 글자는 ‘검다’라는 뜻이지요.
결국 이 박산(博山)의 석탄을 깬 영향으로 물이 검어서 치수(淄水)가 형성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박산(博山)의 석탄을 하도 깊게 파서 산 가운데가 인공적으로 ‘깊게 가라앉아서 (=심(沈)) 깊은 골짜기’가 이미 백제말기시대 때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탄현(炭峴)의 이름이 삼국사기 의자왕 조에 의하면 심현(沈峴)으로 되어 있는 것이지요.
백제 충신 성충(成忠)이 육로(陸路)로 들어오는 적군(敵軍)을 이 “탄현(炭峴) 혹은 심현(沈峴)에서 막으라! ”고 한 것은 화공(火攻)을 쓰면, 아무리 대군(大軍)이라도 몰살시킬 수 있다는 말과 다름이 아닙니다.
아무튼 이 박산(博山), 치수(淄水)에 의해서 또한번 “백제 수도 있는 곳에 대규모 연료 매장지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2) 기벌포(伎伐浦)의 위치
그렇다면, 기벌포(伎伐浦)는 어디인가?
(가) 오대호(五大湖)와 강물들의 흐름
산동의 연이은 오대호(五大湖) - 동평호(東平湖), 미산호(微山湖), 독산호(獨山湖)소양호(昭陽湖), 남양호(南陽湖)에는 주위로부터 다양한 강물들이 흘러들어 옵니다.
태산(泰山)과 몽산(蒙山)으로부터 다양한 문수(汶水)가 모여들어 중국의 고대문화 발상지의 하나인 대문구(大汶口)에서 합쳐져서 황화 쪽에 있는 동평호(東平湖)에 한가닥, 그리고 중간에 운하(運河)가 있지만 - 고대에는 문수(汶水)와 하남(河南)의 제수(濟水)가 합해진 호수 , 수호지(水湖志)의 양산박(梁山泊), 고대명칭인 거야택(鋸野澤)이 있는 곳이 있고, - 이 운하(運河) 지역에서 연이어 있는 사대호(四大湖)의 첫 호수인 미산호(微山湖)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사수(泗水)와 백마하(白馬河)가 독산호(獨山湖)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자(漢字)에서 양(陽)은 수지북(水之北)을 가르키는데, 이로써 미루어 보면, 소양호(昭陽湖)는 소수(昭水)가, 또 남양호(南陽湖)는 남수(南水)가 각각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들어온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처럼 줄지어 있는 산동 호수는 그 수량이 어마어마할 수 밖에 없고, 호수(湖水)와 강의 깊이가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 ‘기몽(沂蒙) -모친호(母親湖)’ - 비주(邳州)-대기수(大沂水)-낙마호(駱馬湖)-신기하(新沂河) - 연미(燕尾)
산동(山東)의 지리를 알아야만, “왜 백제는 이곳에 거발성(居拔城) - 즉 중요한 수도를 두었나?!”를 이해할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계속 산동 지리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아뭏든 연(連)이은 4대호와 나란히 길고 긴 몽산산맥(蒙山山脈)이 펼쳐지는데, 이 몽산산맥 중간 지점의 동쪽에는 아주 묘한 명칭의 호수가 있습니다.
이름하여 ‘기몽(沂蒙)- 모친호(母親湖)’!
이는 몽산산맥 오른쪽 중턱에 있는 호수인데, 왼편에 있는 몽수(蒙水)가 흘러들고, 또한 기수(基數)가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기몽(沂蒙)-모친호(母親湖)입니다.
그런데 기수(沂水)의 원천(源泉)은 이 호수의 동북방에 있는 기원(沂源)이라는 도시에 따로 있습니다.
결국 기원(沂源)과 기몽-모친호에 있는 물들이 합해져서 연(連)이어져 있는 4대호의 끝에서 흘러나오는 강물과 비주(邳州)라는 산동성 남쪽 끝의 도시 앞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대기수(大沂水)가 되어 산동성과 강소성을 구분짓는 애산(艾山) - 이는 연개소문과 설인귀가 전쟁을 했다는 장소로 이 싸이트에 소개되 어있음 -을 지나 강소성의 호수인 낙마호(駱馬湖)로 들어갑니다.
이 낙마호(駱馬湖)로부터 강물이 동류(東流)해서 신기하(新沂河)로 그 이름을 바꾸어 으로 동류(東流), 동해로 들어가는데, 이 하구(河口)를 연미(燕尾)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이 연미(燕尾)가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기벌포(伎伐浦)인 것이지요.
(다) 심강(沈江)
삼국사기에는 백강(白江)을 또다른 명칭으로 심강(沈江)이라고 하는데, 이는 위에서 보다시피 워낙 많은 강물들이 몰려들어서 그 깊이가 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강물이 바다로 빠져 들어가는 하구(河口)는 대부분이 넓게 퍼져있습니다. 그 가운데 갈대 숲으로 유명한 하구(河口) 섬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들어올 때“이 기벌포의 갈대를 잘라서 진흙길을 깔면서 행군했다.”는 기록을 보면 말입니다.
백제 충신 성충(成忠)께서는 “수군(水軍)은 이 기벌포(伎伐浦)에서 막아라.”라고 한 것은 강하구가 깊었다가 갑자기 낳아지는가 하면, 돌연 갈대숲이 되는등 변화무쌍하는 지역이 이 하구(河口)이어서, 현장지리를 모르는 적군(敵軍)은 배를 몰기도 힘들거니와, 갈대 숲 속에 ‘쾌속선(快速船)’을 숨겨서 공격하기 좋은은 물론, 갈대밭 자체가 화공(火攻)하기도 좋은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라) 기벌포(伎伐浦)라는 명칭에 대해
문제는 기벌포(伎伐浦)라는 명칭입니다. 여기서 기(伎)는 ‘연극인, 무용 및 음악인’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이들이 이 하구(河口)에서 엄청나는 ‘갈대’를 늘 벌초(伐草)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백제는 4대호에서 늘 천독(天毒)들을 위한 계절마다 한달을 잡아 늘 제천(祭天)을 했고 따라서 기(伎) - 연극인, 음악인 무용수들이 늘 4대호에 살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들이 기벌포의 갈대를 벌초(伐草)하기 위해 배를 타고 자주 들렸기 때문에, ‘기(伎)들이 벌초(伐草)하는 포구(浦口)’라는 이름이 지어졌으리라 추정됩니다.
아무튼 이런 지형적인 조건을 보면, 사비성은 바로 산동백제를 뜻하며, 이는 바로 북사(北史)에서 말하는 거발성(居拔城)이 이곳임이 분명해지는 곳이지요.
3. 작명(作名)으로 이상하기 짝이 없는 - 기몽(沂蒙)-모친호(母親湖)
가. “원래는 소서노호(召西弩湖)였을 것이다”라고 추정
그런데 산동(山東)의 최대 명산은 황제가 제천(祭天)하는 태산(泰山)이겠지만, 이 몽산(蒙山) 산맥 역시 아주 유명합니다.
공자(孔子)께서는 이 “몽산(蒙山)의 정상에 올라서 노(魯)나라가 작음을 알고, 또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天下)가 작음을 알았다.”는 논어(論語)의 유명한 구절이 바로 이 몽산 산맥의 정산인 1156미터의 구몽정(龜蒙頂)이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몽정 부근에는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산정(山頂)호수인 구룡담(九龍潭)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몽산산맥을 넘어서 황해(黃海)쪽의 산맥 중앙 산턱에 아주 큰 호수(湖水)가 있습니다. 그 이름이 ‘기몽(沂蒙)-모친호(母親湖)’입니다.
이는 한문(漢文)으로 된 작명치곤 좀 괴상한 명칭입니다.
“기수(沂水)와 몽수(蒙水)의 모친(母親)?? ” 참 이상한 표현입니다.
좌계는 이것이 원래 ‘소서노호(召西弩湖)’가 아니였겠는가 하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고구리(高句麗)와 백제(百濟)를 만든 여왕중 여왕이신 소서노(召西奴) 어라하(於羅瑕) 그분의 이름을 붙인 호수였는데, “ 고구리와 백제가 망하자, 이 호수 명칭이 바뀐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이 호수가 자리잡은 곳은 행정적으로 기수현(沂水縣)인데, 도시의 서북(西北)쪽으로 15키로 미터에 이르를 정도로 큰 호수입니다.
나. 백제-열기구 비행장인 소서노호(召西弩湖)
좌계는 늘 삼국유사에서 “백제 전성기에 신인(神人)들이 (용(龍), 붕새 봉황등으로 모습을 한 ‘헬륨 가스(gas) 열기구’를 타고 오산(吳山: 회계산), 일산(日山: 울릉도),, 부산(浮山: 바이칼)로 날어다녔다.”는 그 출발지가 어디인가?“에 대해서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이 열기구-비행장은 착륙(着陸)의 안전성 때문에, 반드시 호수(湖水)가 필요하지만, 일반인의 눈에 안띠는 그런 장소여야하는 조건이 자연히 붙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좌계가 볼때에는 ‘백제의 열기구-비행장’이 바로 이곳 소서노호(召西弩湖)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영봉자(寧封子)의 용교비행(龍蹻飛行)의 도(道) - 고대의 열기구가 나는 비행장이 이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좌계가 “청성산(靑城山)의 용교비행(龍蹻飛行) 수수께끼 -영봉자(寧封子)와 황제(黃帝)”라는 제목으로 이미 상세한 내용을 올려 놓았습니다. 참조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몽산(蒙山) 산맥 한 가운데서 용(龍)이나 붕새, 그리고 봉황새가 날라가는 모습을 혹 등산객이 보아도 “참으로 상서(祥瑞)로운 것을 성산(聖山)에서 보았기 때문에, 대단한 길조(吉兆)다.!”하고 더 이상 궁금증을 발휘하지 않게 하는 위치이기 때문입니다.
다. 은작산(銀雀山)
또 하나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이 몽산 산맥 가운데 은작산(銀雀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손빈병법등등의 각종 병서(兵書)들이 발견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는 이 “은작산(銀雀山) - 나아가 몽산 산맥 전체를 무(武)의 성산(聖山)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백제 이전에 이미 - 무(武)의 성산(聖山)으로 인식이 되었기에, 이곳에 전략가들이 많이 배출된 것이라고 보고, 또 명전략가들이 이곳에 묻히기를 바랐던 성산(聖山)임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태공망 여상(呂尙)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세계정치와 정치전략, 군사전략을 톱합하는 ‘정치전략가’로써 주(周)의 역성혁명을 이루게 한 사람인데, 이 산동(山東)에 제(齊)라는 봉지(封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전략 사상은 오늘날도 육도(六韜 - 화살(책략을 뜻함)을 넣어두는 여섯가지의 화살 주머니(전략 분야를 뜻함)라는 책이 내려오고 있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이런 태공망의 병법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소서노호(召西弩湖) 주변의 몽산(蒙山)에 몰려들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 사실 제갈량도 기수(沂水) 주변이 그 고향인데, 제갈공명의 천재적인 전략은 모두 “백제에 기생하자”로 압축할수 있다고 봄, 즉 서촉(西蜀)으로 들어간 것 등등이 그것임.)
이 말이 중요한 것은 백제 전성기 때일수록 이곳에서 무(武)의 성산(聖山) 답게 철통같은 어떤 수비가 있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는 전부 저 소서노호(召西弩湖)에서 뜨는 백제의 열기구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4. 5방향- 위성 외곽도시의 배정
이제 이 거발성 백제(산동 백제)의 사성(泗城)이라는 주택성(主澤城)과 비성(肥城)이라는 보조 왕성(王城)인 비성(肥城)을 송준희 선생께서 찾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북사(北史)에서 묘사하고 있는 5방향의 - 위성 외곽도시를 배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 동방(東方) 득안성(得安城) - 백마관(白馬關)과 래(萊)
산동백제 즉 거발성(居拔城)의 주왕성(主王城)이 독산호(獨山湖)로 들어가는 백마하와 사수(泗水) 사이에 있는 사성(泗城)이기 때문에, 외곽 위성도시의 동방(東方)은 이 사성(泗城)의 동방입니다.
그런데, 운영자이신 송준희 님이 올리신 지도를 보니깐, 동방에 백마관(白馬關)이 있습니다. 좌계는 이게몽산(蒙山)을 지키는 관문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산동성 동쪽에 래주(萊州)가 있습니다.
좌계가 이 싸이트(site)에 와서 처음 글을 쓴 것이 “비류(沸流)의 미추홀은 래(萊)인 듯”이란 글이었습니다.
이는 양 직공도에 “백제는 래이(萊夷)이다.”란 개념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지만, 사천(史穿) 김성겸 님의 ‘한반도 대한국(大漢國 = 대왜(大倭) ) 설’을 읽고 나서는 “이 래(萊)가 한반도에 사는 대한국 혹은 대왜와의 접속을 위한 항구가 아닌가?“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대한국(大漢國)이 중국의 ‘대륙삼국’을 튼튼하게 백-업(back-up)시키고 있는 것이 지정학적으로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래(萊)는 삼한관경(三韓管境)을 득안(得安) - 안정화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이 래(萊)는 국제 공용 도시로써 백제가 관리한 것이지요.
나. 서방(西方) 도선성(刀先城)은 동명(東明)
황하는 궤(几)자 모양으로 흐르다가, 수평(水平)으로 잠시 흐르고, 이윽고 북동(北東)을 향해서 흐릅니다.
그런데 송준희 님께서 올려놓은 지도를 보니깐 막 북동(北東) 쪽으로 황하가 방향을 꺽어서 가는 지역에 동명(東明)이라는 지명이 있더군요.
좌계는 이 도시가 두 분의 동명성왕(東明聖王) 즉 해모수-동명성왕과 고주몽-동명성왕의 신사(神社)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1) 동명(東明)은 일반적으로 ‘태양(太陽)’을 뜻합니다.
그런데 동(東)의 금문(金文)에는 매우 특이한 글자가 나옵니다. 그것은 사람이 어떤 짐을 허리 위에 ‘동여매고’있는 모습입니다. 굳이 글자를 만들자면 ‘(身+東)’의 뜻이 되지요.
이는 자유롭게 국경 없이 “소도(蘇塗)-큰길(健吉)을 돌아다니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고구리 왕들은 서토(西土)의 왕에 대해서 “동주(東主)”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자유이민의 주인”이란 뜻이 강하다고 좌계는 봅니다.
또 부여의 동맹(東盟)도 “국경없이 천독(天毒)들이 이동하는 것‘을 보호(保護)하자”는 맹서로 봅니다.
아무튼 두 분의 동명성왕(東明聖王)께서는 중국대륙의 ‘세계정치’인 예(禮)의 치명적인 약점을 악(樂) 다시 말하면 배달화백으로 치유할수 있는 ‘세계체제의 혁신’을 이룬 성인(聖人)인 것이지요.
이런 성인의 신사(神社)를 황하(黃河) 한 가운데 차려놓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동명(東明) 신사(神社)는 결국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황하(黃河)가 키워낸 화하(華夏)-한족들이여! 너희들은 왜 진(秦)과 같은 이민족(異民族)의 혹독한 폭정 앞에서만 겨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냐?! 또 너희들이 직접 ‘중국대륙’을 다스릴때는 왜 그다지도 민족-희석화 작업을 하면서도 창조성의 원천인 다양성을 죽이면서도 빈부(貧富)의 격차가 벌어지게 하는가? 우리는 모든 종족의 문화와 그 그릇인 모국어를 유지시키면서도 천독(天毒)으로 모셔 백가제해(百家濟海)를 이루지 않는가?
왜 ‘이동하는 밝음(=동명)의 빛’을 잃었는가? 너희들이 이 빛을 받아들일 때까지 황하가 푸르러지는 것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이 아니겠는가?!“
하고 반성(反省)의 원점(原點)을 상기시킨 것이 바로 이 서쪽 외곽도시인 도선성(刀先城)인 동명(東明)인 것입니다ㅣ.
그리고 이 성지(聖地)이 조금이라도 불온한 훼손(毁損) 행위가 있게 되면, “먼저 칼을 쓸수 있는 도선성(刀先城)”을 세운 것이지요.
나중에 다시 검토하겠지만, 이는 하남 위례성(尉禮城)에서 보면, 동방(東方)의 외곽-위성도시가 됩니다.
중국대륙 - 당시 사해(四海) 천하(天下)의 안정성을 이 동명(東明) 신사가 보장하는 이른바 득안(得安)게 하는 득안성(得安城)이기도 한 것이지요.
다. 남방(南方) 구지하성(久知下城)은 낙마호(駱馬湖)가 있는 현 숙우시(宿迂市)이다.
백제의 수도 남방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흘러들어올때, 구지하(久知下) 즉‘굿’을 하면서 축제를 벌리는 도시가 있는데, 그 장소 자체가 낙마호(駱馬湖)로 보여집니다.
왜냐?
낙마(駱馬)는 낙타(駱駝)를 뜻하는데, 유목민들이 천상(天上)의 동물로 가장 존귀하게 치는 동물인 것이지요.
낙타는 코는 신기하게 구불 구불하게 되어 있어서 열사(熱沙)의 사막을 가거나, 혹한의 빙하(憑河)를 가거나 상관없이 외부의 찬공기를 그 구불구불한 코를 통해 들어오기 때문에, 찬 공기든지 더운 공기든지 식히고, 덥혀서 들어오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눈의 각막(角膜)이 두터워서 모랫가루, 빙하(氷河) 가루가 눈을 때려도, 멀쩡히 뜬채로 갈수 있는 동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육봉(肉峰)에 비축한 기름으로 장거리 여행을 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낙타(駱駝)가 신기하게도 좋은 음악(音樂)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유목민들은 낙타를 성(聖)스런 동물로 알고 있는 것이지요.
특이 먼 곳에서 항해(航海)나, 또 사막을 건너온 사람들에게는 낙마(駱馬), 낙타가 자신들의 처지(處地)와 너무나 흡사한 것이지요.
따라서 이 낙마호(駱馬湖)는 산동백제로 몰려드는 다양한 종족들에게 ‘굿’을 해주기 위한 최고의 명칭이 된 것이지요.
이 낙마호 근처의 도시 이름이 바로 숙우시(宿迂市)인데, 여기서 우(迂)는 우회(迂廻)에서 보다시피 ‘꺽어들다’라는 개념입니다.(숙천입니다)
이는 저 사대호(四大湖)로 몰려든 강들과 소서노호(召西弩湖)의 기수(沂水)가 비주(邳州)근처에서 합쳐져서 낙마호(駱馬湖)로 흘러들어와서 잠시 숙박(宿泊)하다가 갑자기 ‘꺽어져서’ 동류(東流)하기 때문에 숙우시(宿迂市)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이지요.
흥미있는 것은 우리가 ‘잠을 자는 것‘을 숙박(宿泊)이라고 표현하는데, 엄밀히 문자(文字)로 보면 ’박(泊)인 호수에서 잠자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수상(水上)생활, 혹은 선박을 타고 오래 항해 하는 사람들이 바다나 강이 아닌 호수(湖水)에서 잠을 자는 생활습관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용어입니다.
따라서 이곳 낙마호(駱馬湖)가 있는 숙우시(宿迂市)가 바로 구지하성(久知下城)이 되는 것이지요.
마. 중방(中方) 고사성(古沙城)- 신기하(新沂河) 주변의 모래
아무튼 이 낙마호(駱馬湖)에 있던 강물은 숙우시(宿迂市)에서 방향을 꺽어서 동류(東流) - 신기하(新沂河)로 바뀝니다.
그런데 백제의 외곽도시의 중방(中方)은 ‘강물의 흐름이 흐르는 방향’을 뜻합니다.따라서 이 신기하(新沂河) 주변에 고대에는 모래들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 고사성(古沙城)이 왜 “군사학적으로 위력이 있는가?!”를 일단 알아야할 듯 합니다.
인마(人馬)는 기본적으로 모래에서는 일반 육지에서보다 잘 달리지 못합니다.
특히 인공적으로 ‘모래 방죽’을 만드면 더욱더 그러합니다.
모래 방죽 사이에 흘르들어오는 하천(河川)을 만들고, 이 사이에 쾌속정(快速艇)을 깔아드면, 적군(敵軍)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지로 알게 되는 것이지요.
실질적으로 백제(百濟)와 삼위일체의 나라인 고구리는 비사성(卑沙城)이란 난공불락의 성(城)이 있었는데, 이 비사성(卑沙城)의 뜻은 ‘낮은 모래 성’입니다. 바로 거발성-백제 즉 산동백제의 고사성(古沙城)과 똑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었지요.
따라서 인마(人馬)가 겹겹이 쌓여진 ‘모래방북’ 때문에 시야(視野)가 가림은 물론, 쾌속하게 공격할 수가 없고, 수많은 쾌속정에 의한 기동부대를 숨길수 있는 곳이지요.
따라서 백제 충신 성충(成忠)이 “기벌포를 막으라”는 것은 기벌포 뿐만 아니라, 이 신기하 주변의 모래성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좌계는 봅니다.
기벌포(伎伐浦)와 신기하 주변의 고사성(古沙城)의 결합은 군사(軍事)-지리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것이지요.
바. 북방(北方) 웅진(熊津)
그런데, 이 산동(山東) 백제에는 고대 중국의 사대강이라고 치는 제수(濟水)가 흘러들어옵니다.
황하(黃河)는 홍수 때문에 수없이 방향을 바꾸는데, 제수(濟水)의 원천(源泉)을 뜻하는 제원(濟源) 시(市)가 현 하남성에 있긴 하지만, 제원시(濟源市) 자체는 황하 북쪽 - 말하자면, 하남 위례성의 좌측에 있는 소림사가 있는 숭산(崇山)에서 황하를 건넌 그 위치에 있습니다.
이곳 왕옥산(王玉山 혹은 王屋山)에서 발현하여 길게 내려가다가 산동의 문수(汶水)와 만나, 수호지(水湖志)에서 유명한 양산박(梁山泊)을 이루는데 - 옛날 명칭이 거야택(鋸野澤) 임. - 이 강이 산동성의 현 제남시(濟南市) 북쪽을 흘러갔기 때문에, 제남시란 명칭이 생간 것입니다.(거야택이 지금은 멸실)
따라서 산동 백제의 웅진(熊津)은 현재의 제남시(濟南市)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백제가 산동에 있을 때에는 “이 제수(濟水)가 오늘날 래주(萊州)- 만(灣)의 동영시 쪽으로 흘렀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좌계는 하고 있습니다.
즉 홍수에 의해서 격(激)하게 그 물길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흐름을 하고, 깊고 안정되게 흘렀던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저 산동 최대의 석탄 생산지인 박산(博山)에서 연원하는 치수(淄水)와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웅진(熊津)이 서북부에 있었다.”는 것은 결국 오늘날 제남시(濟南市)가 태산의 북서 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외국 사람들이 와서 결승(結繩)으로써 ‘모국어를 유지한 채’ 타국의 언어를 배웠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배달 - 화백회의가 필요하면, 더욱더 제수(濟水)를 타고 서쪽 으로 이동 - 양산박(梁山泊)과 동평호(東平湖)를 통해서 수상연단을 타면서 하면 되는 것이지요.
사. 결론(結論)
우리는 산동백제, 즉 북사(北史)에서 말하는 거발성(居拔城)의 외곽도시들을 재배치해 보았는데, 백제가 ‘세계경영- 이른바 백가제해(百家濟海) 하기 위해서는 이런 외곽도시의 배치가 분명히 필요함을 느낄수 있기 때문에, 다시한번 사비성이 곧 산동백제 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소서노(召西奴) 어라하(於羅瑕)의 세(3)-백제수도 동시(同時) 건설의 가능성
좌계가 북사(北史)를 바탕으로 백제의 세 수도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가장 놀란 것이 외곽- 위성도시의 타당성입니다.
아직까지 하남- 위례성 즉 하남(河南) 몽양시의 다섯 외곽-위성도시에 대해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백제(-이는 고구리, 신라가 자연 포함된다.)가 백가제해(百家濟海)를 - 이는 세계경영이라는 고대적 표현이다. - 함에 반드시 필요한 외곽도시를 하남 위례성에 사방에 걸쳐서 두루고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방향 위성 외곽도시의 명칭이 맨 처음, 하남 위례성을 개발할 때, 적절한 포진(布陣)이었는데, 그 다음 고마성-백제(사천-백제)를 개척할때에도 우연히 적절한 포진이 되고, 나중에 거발성-백제(산동 백제)를 개척할때에도 오비이락(烏飛梨落) 격으로 또한번 잘 들어맞았다고 과연 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좌계가 생각할 때에는 이는 우연치고는 지나친 우연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소서노(召西奴) 어라하(於羅瑕)께서 처음부터 사천(四川) 백제, 하남 위례성 백제, 산동 백제(百濟)의 문화지리, 군사지리, 경제지리를 보고, 공통의 특징을 잡아내서 다섯 외곽도시를 두지 않으면, 우연의 일치로 다섯 외곽도시가 정확하게 들어맞기가 힘들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리 동시에 백제의 세 수도(首都)가 계획 된 것이 틀림없다고 좌계는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각각 세 수도의 개척자들의 이름이 들어납니다.
하남 위례성 : 개척자 온조(溫祖)
산동 백제(거발성) : 개척자 비류(沸流)
사천 백제(고마성) : 개척자 오리진(吳理眞)
이 세분이 소서노(召西奴) 어라하가 고주몽 동명성왕과 결혼생활을 할때부터, 이미 세 수도에 대한 총괄적인 백제 건설 계획 - 따라서 당연히 세 수도의 다섯 외곽 위성도시가 있게 된다. -에 따라 세 개척자가 각각 맡은 수도를 개척하고 나서, 유리왕과 예씨가 오자, 이미 세워진 하남 위례성에 집결했다고 봅니다.
비류 왕자께서는 계속 산동 백제에 왕래하면서 혼신의 힘을 기울려 다섯 위성도시를 건설하였겠지요. 그 기점은 물론 동방(東方)의 위성도시인 득안성(得安城)인 래주(萊州)였겠지요.
이것이 밑(의)의 연음(延音)인 ‘미추’이고, 미추홀이었으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좌계선생의 글 정리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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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글 잘 모셔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