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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4.25. 16:00
집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가끔씩 가는 공원이 있다. 그 공원(centenial park)엔 작은 호수가 있고 거기에는 항상 검은 백조(black swan)가 상주하고
있는데 나는 이 흑조를 볼 때마다 학창 시절배웠던 귀납법적 오류가 생각난다. 미국백조도 희고 한국백조도 희고 아프리카 백조도
하얀색이어서 모든 백조는 하얗다고 결론 지었더니 지구 남반구에서 검은 백조가 발견되어 백조는 하얗다는 등식은 이제 성립하지 않게
되었다.
논리학 관점에서 무엇이 없다고 증명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우리집에는 바퀴벌레가 없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려면 집의 체적을 바퀴벌레의 체적으로 나눈 만큼의 공간을 조사해야
하는데 집의 면적이 10평으로 잡고 계산하여도 바퀴벌레 크기의 1억배에 해당하는 공간을 검사해서 확인해야 없다는 증명이 가능하다. 반대는 너무
쉽다. 죽은 바퀴벌레 한 마리만 발견되어도 '우리집에 바퀴벌레가 없다'라는 명제는 거짓이 된다. 하지만 같은 집에서 10년 째
살면서 단 한 마리의 바퀴벌레도 본 적이 없다면 여전히 귀납적 오류의 맹점이 존재할 지라도 바퀴벌레가 살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 할
수 있다. 만일 어떠한 이유로 10년 후에 그 집에서 바퀴벌레가 발견되었다면 이 명제는 이제 거짓이라고 부르며 논리학에서 이것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부른다. 10년을 기다리고 성급이란 수식을 얻는 것은 가혹하게 들린다. 수 천년을 기다리고도
성급하다고 한다면 너무 가혹할 것이다.
인류는
신(神)의 현시(顯示)을 수 천년 째 기다리고 있지만 스스로 체험했다고 주장한 것을 제외하고는 신이 존재한다는 공식적인 증거는 아직까지 없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 그렇게 빈번하게 등장하던 기독교의 신(Yahweh)은 현 시대에 와서는 일부 열렬 신자들의 마음속에서나 이따금씩 들려 아들이 대학에 붙게 해 달라 든가 이번에 승진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요청같은 것만 간간히 들어 줄 뿐이다. 그러나 교통사로로 사고로 잃은 사람에게 다리가 새로 돋거나 죽은 사람을 살려달라는 요청에는 수 천년 째 단 한 건도 들어주지 않고 있다. 신은 능력을 상실한 것인가 , 숨은 것인가, 사라진 것인가, 죽은 것인가.
만일 내가 "천지우주를 창조한 신은 존재한다. 그는 신장 20센티미터 몸무게 50그램으로 피부는 녹색이며 흰수염이 있고 인자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지구로 부터 50광년떨어진 소행성에 살고 있다." 고 주장했다면 모두들 미쳤다고 하겠지만 내 주장을
틀렸다고 증명 하는 것 또한 불가능 할 것이다. 그리고 대개 이러한 주장은 묘사가 더 세밀할 수록 더 미친놈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수 천년전에 텍스트의 형태로 기록이 되었고 집단의 정치적 통치이념으로 지속되어 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증명의 필요한 논리영역에서 증명이 필요없는 믿음의 영역에 들어오는 순간 나의 작은 녹색신은 영원히 죽지않고 살 수 있다.
무언가 없다는 것은 증명의 의무가 없다.
유니콘이나 불을 뿜는 용, 네스호(Loch Ness)에 살고 있는 괴물(Nessie)이 있다고 진실로 믿는 사람이 있다면 증명의 의무는 그들에게 있다. 그들을 설득시키기 거나 상상의 동물은
없다고 증명하기 위해 당신의 인생과 정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만약 이들 상상의 동물을 실제로 믿는 사람이 지구 인구의
절반이 넘는 다면 이것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초 인류의 가장 큰 위협은 전쟁도, 핵무기도, 지구온난화, 질병도 아닌 종교라고 본다. 종교의 문제는
토론이 거의 불가능 한데 그 원인은 믿음의 도메인에서 기술된 텍스트를 가지고 논박의 무기로 사용하는 한 이성적 해결은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어짜피 당신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토론하여야 한다.
'
신은 존재하는 가?' 라는 질문을 서구적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존재론적 질문으로 받아들이면 존재와 비존재는 양립할 수 가 없다.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다.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의 기독교사상이 독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석의 염재신론(念在神在)은 있는
것과 없는 것, 참나와 얼나, 대아(大我)와 소아(小我), 소아와 한아, 빈것과 찬것의 논리를 섞어서 뭉개 버리고 있다. 신의 소재에 대한 해답을 '당신이
생각하는 곳에 있다'라고 정의하면 신의 소재는 논리와 믿음의 중간의 영역에 포진된다. 실존의 문제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식으로
표현하면 문학에서나 있는 논리 파괴이지만 동양적 사고에 기초한 다석은 개체가 스스로의 의식상태를 들여다보고 자각할 때 주객의 구분이
없어지는 하나=하나님 이 된다고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석은 명백한 무신론자이다. 그의 설명방식은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신, 신속에 내제되어 있는 인간을 하나로 보고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가 노자(늙은이 다석역)를 해석하는 방식또한 철저한 실존의 유의 세계(도가 없는 세태)에서 무에 대한 이야기(도=하나님,
얼나를 찾는 것)를 하고 있다. 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없으면서 동시에 어디에나 있는 범재신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무신론자 다석의 초점은 초월적인 신 중심에서 영혼(인간적인 신) 중심으로 이동한다. 다석은 신(초월적)은 없지만 영혼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다석이 정의한 영혼은 육체 밖(초월, extrospection)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
안의(introspection) 영혼을 찾는 과정(도)이며 쉼없이 도를 닦아야 신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점에서 다석의 사상은
동학의 2대창시자인 해월 최경상(海月 崔慶翔)의 사상과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늘님은 쉬는 법이 없이 밭을 갈고, 새끼를 꼬으며
자아의 깊은 성찰을 한다. 다석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만 있다면 방식이야 서양의 천주교가 되든, 불교가 되든, 이슬람이
되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신이 내 몸 밖에 있다면 내 몸을 근면하게 부려서 신의 메세지를 파악할 필요가 없어지므로 다석의
하늘님은 철저히 개인의 내면에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다석은 신이 없음에서 출발(수성:獸性)하여 신을 창조하는 과정(수성과 탐친치貪:탐욕, 瞋:노여움, 癡:어리석음 의
굴레를 벗는 것)을 역으로 밟고 있는데 이것은 서양의 종교인 기독교를 동양의 형식으로 분해 조립하여 재생산을 하였기 때문이다.
다석의 무신론은 두 가지 의미가 공존한다. 첫 째는 문자그대로 천지창조의 조물주가 없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얼나와 제나, 수성의
탐진치가 혼재한 상태를 신이 없음(태극(無極)-무신)으로 보고 있고 이를 극복하여 제나와 수성의 탐진치를 버리는 과정(무극無極-신을
발견함)을 참나의 하나(님)을 찾는 깨달음으로 보고 있다.
없(無)을 내가 말하는 데 수십년 전부터 내가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머리가 맘대로 트이지 않았다. 나는 없(無)에 가자는
것이다. 없는데 까지 가야 크다. 태극(太極)에서 무극(無極)에로 가자는 것이다. 이것이 내 철학의 결론이다. 그래서
태극도설(太極圖說) 을 말하였다. 이걸 주렴계(周濂溪)가 썼거나 예수가 썼거나 석가가 썼거나 문제가 안 된다. 이게 내 속에 있는
것이다.
신에서 영혼으로의 중심이동은
나름의 장점이 있는데 관심을 검증과 반박이 가능한 창조주의 개념에서 탈피하여 검증이 불가능한 애매모호한 영역, 즉 동양학,
물질에도 격이 있고(동학사상) 나비와 내가 하나가되고(노장사상) 도를찾아 군자가되는(유가사상)는 비무장지대에 교묘하게 안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석의 무신론은 빅뱅과 천지창조에 관심이 없다. 현대 종교인들이 현대물리학, 지질학,
천체물리학, 생물학, 진화이야기만 나오면 오금을 저리며 오줌을 지리는 것을 간단히 피할 수 있다.
서구에서 들어온 성경을 읽으면서 정약용이나 다석같은 동양의 유학자들 품었을 최초의 의문들 중 하나는 아마도 천지우주와 모든 생명체를
창조한 신이라면 인간의 원죄를 속죄하기에 얼마든지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 고작 생각해 낸 것이 자신의 아들을 보내 처참하게
죽임으로써 속죄를 시키는 방법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동양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방식은 서양처럼 스크립쳐에 새긴 텍스트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혁명가 예수의 사상을 이성적으로 해석하였기때문에 기독교가 침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개화의 거센
압박, 열강의 틈속에 처한 한반도의 국제 정세, 성리학의 종말, 가렴주구의 폭정등이 외부환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중국철학 사상을
스스로 창조한 적도 거의 없고 일본처럼 외래사상을 철저하게 토속화하지도 못한 민족에게 신식문물, 의학과 과학이 종교와 함깨 들어오면 정신 차리고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훗날 이승만과 박정희 같은 독재자들은 덕택에 현재 한국은 아시아 주권국가 중 유일하게 기독교가 살아남은 오명을 얻었다
(필리핀은 기독교(카톨릭)국가지만 425년동안 식민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주권국가의 범주에서 제외하였다.) 역사가 길어도 사상적 뿌리가 깊지 않으면
이러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음을 경계하여야 한다. 현재 아프리카 대륙에서 급속도로 확산되는 이슬람은 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예수도 다석처럼
무신론자였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확신은 도마복음(The Gospel of Thomas) 144장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아버지, 왕국, 천당의
개념(11장)은 신의 개념이 아니라 기존의 유대를 타파하여 의식의 혁명을 통해서만 진리로 간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예수는 메시아도
아니었고 점진적 개혁을 하자는 우파도 아니었다. 예수는 급진 좌파 혁명가였고 혁명의 방법은 폭력이었다(10장,16절).
도마복음속의 예수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합리적인 세계에서 논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기(113장)때문에 철저하게 밟혀졌다가 최근
나그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속에서 발견되었다. 도마복음에서 예수는 합리적 이성의 힘이 평화를 불러올 것으로 믿고 있다(48장). 이성과 종교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사실을 예수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설파하는 예수의 화법은 상당히 비유적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여러분이 만일 진화를
이해하고 DNA의 나선구조를 발견하고 양자역학을 이해하고 빅뱅을 증명하였는데 두 살짜리 꼬마가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묻는다고
가정해 보자. 설명을 위해 아이 앞에 칠판을 가져다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field equation)을 풀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실에 가깝고 청자가 알아먹을 수 있도록 설명할 차악의 방법은 비유를 드는 것일 것이다. 예수의 어록은 온통 비유의 천지이지만 현실 적인 문제를
답하는 그의 어법은 독설에 가까울 정도로 정확하며 시니컬하며 분석적이다. 도마복음 53장을 보자.
그의 제자들이 물었다. "할례는 쓸모가 있는 것 입니까? 아닙니까?"
예수가라사대 "만약에 그것이 쓸모가 있는 것이었다면 진작에 아비들이 이미 아이가 할된 채 어미 뱃 속에서 나오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할례는 모든 면에서 이로울 것이다".
His disciples said to him, "Is circumcision useful or not?"
He
said to them, "If it were useful, their father would produce children
already circumcised from their mother. Rather, the true circumcision in
spirit has become profitable in every respect."
그
러면 왜 예수는 스스로 무신론자이면서 다석처럼 신은 없다고 말하지 않았을 까. 예수는 혁명가 이었다. 예수와 같은 급진혁명가는
세상의 곪은 살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생각을 심어 새살이 돋아나게 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의 말대로 묵은 포도주를 새
푸대에 담을 수 없는 없는 노릇(47장)이었지만 신을 완전히 없애는 대신 구약의 신만 죽이는 선에서 끝을 내었다. 당시처럼 제정이
분리가 되지 않은 시대에 신이 아예 없다고 말해서는 혁명을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현재도 교인들은 똘똘 뭉치지만 무신론자들은
사실 모여서 할 것이 없다. 혁명을 하려면 차라리 말 잘듣는 신도들을 데리고 하는 것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신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는다. 다석의 말대로 깨달아 신을 발견하는 순간 신은 죽어버리기 때문이다(無極). 게다가 방글라데시나 인도네시아처럼 무슬림이 인구가
전체의 98퍼센트인 나라에서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데 이슬람 문화를 배제하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초기 인터넷보급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땅을파서 케이블을 매설을 하는 것보다 이미 집집마다 깔려 있는 유선전화망을 활용하는 편이 효율적이었을
지도 모른다. 성리학의 이념으로 건국한 조선의 세종이 한글을 만들면서 불경인 석보상절(釋譜詳節)로 한글 보급을 꾀한 이유도 그것이다. 예수는
너희들이 이제껏 알고 있는 율법의 하나님은 가짜이며 보편적 인류애를 강조하여 대 히트를 쳤었다. 비록 예수의 사상은 후대에 사도 바울에
의해 곡해되어 중세 유럽을 천년 암흑기로 끌고 들어갔지만. 주지할 사실은 기독교가 인류역사를 바꾼 것은 예수때문이 아니고 대속신앙,
삼위일체, 예수재림, 종말, 원죄등을 발명한 사도바울이다. 사도바울은 예수가 신에서 영혼의 단계로 끌어올린 것을 다시 신의 단계로 끌고
내려갔다. 예수 사후 기독교가 인류에 이렇게 까지 해악을 끼칠 줄은 예수는 미리 내다보지 못한 듯 하다.
영
혼은 있는가? 단어의 정의가 필요하다. 영혼을 소울(Soul)로 번역하고 영성을 스피릿(Spirit)으로 번역한다면 나의 대답은
'영혼을 있지만 영성은 없다'이다. 흔히 영혼은
동물에게도 있지만 영성은 인간에만 있다고 한다. 이것은 거짓이며 인간만이 유일하고 존엄하다는 식의 논리는 단언컨데 전부 인간이
만든 날조이다.
인간이 도를 닦아 부처가 될 수 있다면 여타동물이 그렇게 못 될 법은 없다. 다석이 이야기하는 수성이란 짐승이 인간만 못해서
가져다 쓴 개념이 절대 아니다. 짐승도 절제를 하고 사회성이 있으며 종을 위해 희생하며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을 다석이 몰랐을 리
가 없다. 살면서 우리는 개만도 못한 인간을
너무 많이 보아 왔고 인간보다 훌륭한 개도 뉴스를 통해 많이 보아오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인간에게만 있다는 육신을 초월한
영성(Trasscendental spirit)은 애당초 없다. 예수가 말한 영혼도 다석이 말하는 얼나도 육체가 죽어도 죽지않고
영생하는 스피릿이 아니라 내뇌 정신활동안에서 일어나는 자각 즉 데카르트적 사고(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 영혼(soul)이다.
영혼은 육체에 완벽히 귀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천당도 지옥도 심판도 없고 당신의 숨이 붙어있는 한, 임마뉴엘칸트의 말처럼 스스로의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도덕률에 근거하여 살아야 한다.
그럼 영혼(soul)은 어디에 실재하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두뇌에 있다. 우리뇌의 뉴런(신경세포의 단위)의 개수는 1000억개
정도이다. 각각의 뉴런은 수상돌기(dendrite) 축색돌기(axon terminal)와 그 외 핵, 신경세포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축색돌기 말단에서 신경전달물질이 전달되어 생명체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활동이 이루어 진다. 이 축색돌기와(송신)
수상돌기(수신)의 간극을 시냅스라고 하는데 우리 뇌 속에는 약 100조의 시냅스들의 연결망이 있다. 이 100조개의 내뇌 회로의
연결망, 블루프린트가 우리의 의식, 자각, 기억등의 정보가 있는 우리 영혼(얼/자각)이 있는 곳이다. 이 시냅스는 유기적으로
증강되고 소멸되고 재생성된다. 이 회로는 뇌의 전역에 기능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도덕이 있는 곳은 주로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이에서 두정엽(occipital lobe)에
걸친 뇌의 부분이 관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은 뇌내 뉴런의 결합정보이다. 여기에는 태어 날때 부터 장착되어 있는 유전적
기본얼개(밈)가 있다.인간이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시비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 사단 칠정등의 기능은 마치 컴퓨터의
OS처럼 기본 탑재되어 세상에 나온다.
예수도
다석도 동학의 수운(水雲)도 궁극의 목표는 도=진리=무극=하늘님 을 찾는 것이고 찾아서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의 답은 인간성회복이 아닐까
한다. 이는 영혼을 고찰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수성의 탐친지를 버리는 것이 하나님이 되는 길이요, 군자가 되는 길이며
니르바나(Nirvana)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공통된 성현의 메시지이다. 사실 이들의 이론은 전혀 새롭지가 않다. 결국은
수 천년전 성인들이 한 말을 현재까지 주기적으로 되풀이 되고 인간들은 죽어라고 말을 듣지 않고 는다. 공자의 대동사회도 요순시대도
도래한 적이 없다. 종교가 있는 한 이것은 불가능 하다.
다석의 영향은 너무 초라하다. 수운은 천만 동학인을 태동시켰지만 동학사상은 현재 거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다. 동학이 퍼진 것은
사실 기독교처럼 단순한 진리, 인간은 평등하고 존엄하고 인류애를 갖자는 메시지라 전파가 빨랐지만 이를 실천하기 위한 심오한 성찰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반대세력에 의해 금방 궤멸되고 만다. 2천년전 예수의 메시지(도마복음)도 등장하자마자 사장되었고 변질된 것만
남아서 전해왔다. 사람들은 옛날 이나 지금이나 참 자아나 진리 도에는 관심이 없다. 염재신론으로 도대체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차라리 기독교처럼 최초의 인간은 아담과 이브이고 대홍수에서 노아가 살렸고 물위를 걷고 종말이 온다고 거창한 구라를 자극적으로
쳐야 세상은 미동이라도 하는 것이다. (그러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신은 죽었다. 아니 처음부터 없었다. 있다면 죽여야 한다. 신을 죽이자는 주장 또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유럽은 중세를 끝으로
지속적으로 신을 죽여왔다. 르네상스는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비논리를 죽이고 같혀있던 인간의 이성을 부활시키는 운동이었다.
조선말 동학운동또한 향벽설위(向壁設位 벽을 향에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부터 향아설위(向我設位밥상을 나에게 돌리고 나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식사행위)의 인본주의의 부활 인간의 이성을 부활시키는 운동이다. 종교와 이성은 절대로 양립할 수 가 없다.
인
간성 회복에는 종교나 성현의 말씀보다 과학의 공헌이 훨씬 크다 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과학을 종교와 같이 무언가를 막연하게 믿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과학기술이 대량살상무기나 인공지능을 개발시켜 비인간적인 세상이 올 거라고 겁을 먹고 과학만능주의라고 비아냥
거린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이 '과학'이란 단어를 '이성'이란 단어로 교체하면 거부감은 반감된다. 이성에는 윤리적 의미가 내포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철저한 이성의 산물이며 윤리가치판단에서 제외 된다. 따라서 과학을 윤리의 잣대에서 비판하는
것또한 모순이다. 과학은
의심하고 검증하고 증강되고 폐기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성은 가치중립적인 과학적 사실/비사실을 바탕에서 논리적 윤리적 결정을
한다. 반대로 종교는 비논리의 산물이며 의심없는 믿음을 강요한다. 종교가
즐겨사용하는 무기는 공포이다. 이성은 내뇌의 대뇌피질을 이용하여 다각적 사고를 하게 하지만 종교는 대뇌피질을 거치지 않고 공포를
관장하는 편도체(amygdala)에서 운동뉴런에게 직접 명령한다. 토끼가 사자를 보자마자 도망갈 수 있는 이유는 사자의 모습과
냄새정보를 받아들여 분석한 결과 사자라는 결론을 도출하(이성적)여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보자마자 도망가는 것이다. 전자의 과정을
거치면
이미 사자밥이 되었을 터이고 생존에 불리하였을 것이다. 편도체가 필요한 이유는 비이성적으로 사는 것이 죽는 것 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한국 노인의 절반 이상은 이상하게도 독재시대의 향수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머리속에 자리잡은 것은 공포가 아직도 그들의 이성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독재와 폭압을 좋아할 리 없다. 하지만
종북세력(실체가 있던 없던 상관없다)이 정권을 잡아 북한이 쳐들어 오면 이성이고 뭐고 끝인 것이고 이것의 공포는 한국전쟁이후
계속되고 있다(amygdala hijack).
생존하여 있어야 이성을 하든 종교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러한 프레임이 먹히지만 이 공포정치의 종말은 반드시 온다.
그리고 이것의 종말은 이성과 과학이 할 것이다.
우리는 스티븐 와인버그의 말처럼 평범한 종교의 원리를 간과하면 안 된다.
착한 사람은 종교가 없어도 착할 것이고 나쁜 사람은 종교가 없어도 나쁠 것이다.
그러나 착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할 때는 종교가 원인이 된다.
첫댓글 좋은글 잘 읽고갑니다. 다석의글중 "우리가 상대세계에 갇히어 절대세계를 못보며 절대세계에 가야만 온전히 참을 찿을수 있다"는 인류 최고 지성다운 말씀이 생각납니다.
동,서,고,금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인간들을 짐승단계에서 참진리인으로 끌어 올리신분입니다.
성천(유달영박사)님은 인도에 태어나셨으면 부처아닐수 없고 현대의 노자라 하셨습니다.
식과색에 쩔어사는 우리와 그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에게, 이제- 하루살이, 날라리 연예한류는 그만두게하고 사상의 한류를 온세계에 펼쳐나가 지구를 정화시킵시다,그 중심에 다석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서양얘들이 뻑가는 노,장,부처,그리고 예수를 속속들이 잘 알기 때문이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종교에 대해 다소 거칠고 과격하게 적었지만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종교로 잃은 이성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종교를 죽이고 이성을 살리는)은 자발적으로 해야지 지난세기 공산주의자들이 했던 식은 아니겠지요. 저는 그 방법으로 다석사상이 되던 유불선이 되던 과학이 되었던 혹은 문화나 예술이 되던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