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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이사야 61:1~3
“무거운 죄 짐을 지고 인생길을 고달프게 걷던 자가 1)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2) 영광의 찬송을 부르려고, 3) 하늘의 기쁨을 맛보려고, 4) 영광의 주를 뵈려고 예수님께 나옵니다.” 라는 내용의 이 찬송은 ‘회개와 용서’ 주제로 한 찬양으로 미국 뉴햄프셔 주 댄버리(Danbury)태생의 목사이며 찬송 작가인 윌리암 트루 슬리퍼(W.T.Sleeper; 1819~1904)가 1887년에 작사하였습니다. 그는 버몬트 대학과 앤도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순회 찬양선교 사역에 헌신하다가 우스터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바쁜 목회 생활 가운데서도 찬송 작시에 정열을 기울여 많은 찬송시를 남겼습니다. 곡은 미국 뉴욕 출신 무디의 음악 동역자 조지 콜즈 스테빈스(G.C.Stebbins; 1846~1945)가 1887년에 만들었습니다. 스테빈스는 뉴욕의 버팔로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음악교사와 시카고 제일침례교회 음악감독으로 활동하였고, 복음찬송가의 거장들인 조지 루트, 필립 블리스, 아이라 생키 등과 교류하다가 1900년부터 무디 복음전도 팀의 찬양팀장으로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 전도에 헌신하였습니다. 찬송가 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을 비롯한 10편의 찬송가가 우리 찬송가에 실려 있습니다.
오늘 찬송가 272장은 1~4절까지 각 구절마다 뚜렷한 이분적(二分的) 내용을 담고 있는데 예수께 나아오기 이전의 삶과 다른 하나는 그 이후의 삶입니다. 전자는 완전한 흑암(고통, 낭패, 죽음, 멸망, 죄악, 빈궁한 삶)의 세계요, 후자는 광명(영광, 하늘의 기쁨, 평화, 사랑, 부유한 삶)의 세계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흑암과 광명의 세계 이외에 어떤 중간의 세계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난 삶 자체는 곧 심판과 죽음의 밤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와 기쁨, 생명과 평화,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멸망의 포구를 빠져나와 평화의 바다를 맞이하라고 권면하는 매우 은혜로운 찬송입니다.
1절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갑니다
병든 내 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
죄악을 벗어버리려고 주께로 갑니다
1절은 고통의 멍에와 죄악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해결책은 예수께로 나가는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의 멍에를 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공부의 멍에, 부모들은 자녀의 멍에, 남편들은 직장의 멍에, 아내들은 가정의 멍에에 짓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멍에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러운 멍에이지만, 어떤 때는 이 멍에가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이 들게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멍에 외에도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멍에가 있는데 그것은 죄의 멍에입니다. 죄는 우리에게 복된 삶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고, 끝없는 욕심과 불평과 원망과 근심 속에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죄는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것 같이 보이나 결국 인생을 더욱 빈궁하게 만들어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죄를 짓도록 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전술입니다. 사탄은 인간의 마음속에 이런 욕망과 정욕을 집어넣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자유와 기쁨을 맛보지 못하게 늘 분주하게 하고 더 많은 것을 채우도록 유혹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은 죽을 때까지 죄의 노예, 사탄의 함정에 빠져 매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25과 6:32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면서 마태복음 11:28~30에서 이렇게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이제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고 “물질과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 참 자유의 기쁨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요 14:6) 그리하면 세상이 줄 수도 알 수도 없는 참된 평안을 얻게 되고, 나아가 이사야 61:1~3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61:1~3입니다. “여호와께서 예수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시는 신령한 은혜와 참된 평안과 자유의 기쁨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이 시간 모든 죄의 고통의 멍에를 예수께 맡기고 주께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모든 축복과 은혜와 영광을 맛보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절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갑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갑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 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갑니다
2절은 낭패와 실망 벗어나 영광의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예수께로 나가는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완악하고 고집이 세어서 자신의 의지와 욕심을 내려놓고 예수님께로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의 뜻과 욕심 가운데 제 마음대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 결과 많은 실패와 좌절을 통하여 큰 낭패와 실망을 당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두 손 들고 항복하며 주님께 돌아옵니다. 그때 꺼져가는 심지도 꺼지지 않게 하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아들을 기쁨으로 맞아주시듯 죄악을 좇아 세상을 살던 우리들을 기쁨으로 맞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신 그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용서해주시는 예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슬프던 마음이 위로 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을 기쁨으로 부르는 주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에게 베푸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란 무엇일까요?
첫째, 의롭다함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우리의 죄를 없애 버립니다. 다윗은 이 속죄의 기쁨을 시편 32:1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자기가 범한 모든 불법들을 하나님에 의해 깨끗이 치워 버림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곧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신(시 103:12)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도는 이래서 행복합니다. 이 죄사함이 인간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때문에 느낄 수 있습니다.
둘째, 죄 용서함 받은 것입니다(엡 1:7, 골 1:14).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하셨다고 확신하십니까? 과거에 예수 믿기 전의 죄는 물론이거니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내가 또 짓게 될지 모르는 장래의 죄까지도 완전히 용서하신다는 하나님의 보장을 확신하고 계십니까? 이 믿음을 꼭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치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히 10:17). 뿐만 아닙니다. 예수 믿고 나서도 내가 약하여 번번이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예수만 의지하면 하나님은 끝까지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게 되면 우리는 드디어 사죄의 기쁨이 넘쳐서 ""할렐루야! "" 주를 찬양하게 됩니다.
셋째, 자유함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갈 5:1).
어디로부터의 자유입니까? 율법의 요구에서, 죄의 권세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갈 5:1, 롬 6:1, 8:2).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자유를 누리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나와 같은 죄인을 구하시려고 자기 아들을 내놓으셨습니까? 하나님의 크고 신비스러운 사랑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십자가의 그 큰 은혜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아낌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그를 위해 우리의 모든 삶을 아낌없이 바침으로 그 사랑에 화답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절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복되신 말씀 따르려고 주께로 갑니다
실망한 이 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 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갑니다
3절은 교만한 맘 버리고 말씀 순종할 때 하늘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게 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설교합니다. 설교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거주민들을 몰아내고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 주신 것은, 그들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세울 의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첫걸음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함으로 주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신명기 9:1~2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크고 많은 백성은 네가 아는 아낙 자손이라. 그에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가나안과 그곳 백성들은 장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오합지졸의 병사들은 그들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거민들을 몰아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의로움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으로 생각하거나 자기들의 능력으로 가나안 땅을 점령한 것이라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행위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범죄가 됩니다.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며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세의 설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에게도 교만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과거를 기억하라고, 하나님을 격노케 만들었던 일들을 기억하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잠언 16:18이 가르치고 있듯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마음을 내 버리고 예수께로 나갑시다. 그리고 복 되신 말씀을 따르려고 주께로 나갑시다. 그리하면 “실망한 이 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며”(찬송가 3절) 은혜가운데 축복가운데 이 땅을 정복하며 다스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자들로 권세 자들로 살게 될 것입니다.
4절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갑니다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주께로 갑니다
멸망의 포구 헤어 나와 평화의 나라 다다라서
영광의 주를 뵈오려고 주께로 갑니다
4절은 멸망의 포구와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집에서 기쁨을 나누자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추석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습니다. 고향이 그리워도 갈 수 없는 실향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실향민들이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것 이상으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15~16에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했더라면 그거야 언제나 다시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4:2~3에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하나님이 마련한 천국입니다. 그곳에 우리가 영원히 거처할 집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세상에서도 자기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 일입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집을 마련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육신의 고향은 영원한 집이 되지 못합니다. 몇 년간 살다가 떠나야할 집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육신의 삶을 <나그네>와 <행인>에 비유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낡아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뿐입니다. 여름날의 녹음이 영원할 것 같이 푸르렀지만, 가을이 되니 모두 시들어 낙엽이 되어 떨어져 버리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언제 가는 이 땅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 본향에 처소가 마련되어 있지 못하면 우리는 음부에 떨어져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준비하며 사는 지혜로운 인생들”이 되어야 합니다. “멸망의 포구 헤어 나와 평화의 나라 다다라서 영광의 주를 뵙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4절). 바울 역시 빌립보서 3:20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말씀하며, 하늘의 시민권과 하늘의 집을 소망하며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늘나라 영원한 집에 들어갈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6에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내 아버지 집에 올 자가 없다"고 하였으며,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고통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죄의 짐을 덜어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유와 기쁨 맛보며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늘나라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작은 집에서 살고 있다 해도, 하늘의 있는 영원한 집을 바라보면서 낙심하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 해결책이 예수 안에 있음을 믿고 지금부터라도 “영원한 집을 바라보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하늘나라 백성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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