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실의 연도별 발전과정
혹 어릴 때 조그마한 실패의 바퀴부분에 홈(스파이크)을 파고 양초를 완충역할로 고무줄을 매어 탱크처럼 만들어 보신 적이 있는지요? 그 실패에 감겨져 나온 실이 촉사(동경사)라고 하는데 가는 면실이었습니다.
현재 홍콩인들이 쓰는 면실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지는 확인해보아야 하겠습니다.
60년대에는 한명이 실을 풀고 한명은 아교를 끓여 녹인 다음 한손으로 칫솔 뒷 꽁무니로 통과시켜 실에 아교풀을 묻히고 또다른 한손은 헝겊으로 짜면 또 한명은 유리가루로 실을 통과시키고 한명은 감고 하는 것이 마산지방의 사기먹이는 장면입니다. 치자나 유자를 이용해 실에 색을 입히기도 하고요. 아마 모르긴 해도 다른 지방도 비슷했겠지요.
언제부터 나일론2합이나 3합을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시기는 우상욱님께 문의 드려 댓글 달아 주시고요.
제가 입문할 때에는 대체로 나일론 3합을 사용했습니다.(다른 나일론보다 마찰열에 강하다하여 어망 만드는 동백이라는 상표로 나오는 실이었습니다)
민어풀로 사기먹인 명주실을 쓰는 사람도 있고 게브라 실을 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가격의 문제도 있고, (나일론실 1600m정도에 오천원, 후에 올라서 칠천원. 명주 게브라는 800m정도에 삼만원) 그 당시 명주 게브라는 사기먹이는 기술 부족으로 실이 꺾이는 결점이 있어 연의 빠르기외에는 나일론실에 대한 절대적 우위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대부분 나일론을 사용했습니다.
80년대 말에 잠시 낚싯줄이 유행했던 적도 있는데 낚싯줄은 실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고 나일론실에 비해 변칙적인 기술(예를 들어 어떤 연이 다른 연의 위에 얹어 줄 주기를 하다가 승부가 나지 않은 채 연이 많이 가라앉을 때, 명주나 나일론은 연을 살리려 감으면 대부분의 경우 꺾여 끊어지는데 낚싯줄은 살아나는 확률이 월등히 높음)이 통한다 하여 퇴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낚싯줄을 사용하던 분들의 의견을 들어 보면 값도 훨씬 저렴하고 대량 구입하면 매듭없이 길게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반대하던 사람들의 의견은 실이란 (한자로 실사 자를 쓰는)꼬아야 하는데 낚싯줄은 통줄이고 한자로 실사 자를 안 쓰므로 실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좀 설득력이 약한 이론이었습니다. 좀 더 연구하고 발전시켜볼 여지가 많지 않았나 싶군요.
실 사기먹이는 방법은 지금과 같이 스트롱카슈(우레탄)에 광석가루를 입히는 방법은 대동소이 한데 아교에서 스트롱카슈로 넘어오는 시기는 우선생님이나 엄정식님의 고증이 필요하겠습니다.
아마도 실의 재료가 촉사에서 나일론으로 넘어가는 시기와 일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80년대 중반까지는 물사기(접착제에 가루를 버물려 사먹이는 방법)도 있었는데 가루의 접착력은 뛰어나지만 거친 단점이 있어 단절되고 접착제를 헝겊으로 짜서 마른 가루를 묻히는 방법이 지금은 유일한 사먹이는 방법입니다. 지금의 명주실은 접착제를 두 번 통과시킨 후 사포 넘버로 800번, 1000번의 광석가루를 묻히는 데 80~90년대에는 600번으로 코팅하여 만들었습니다.
둥글게 꼬아보아 꺾여지지 않고 맨손으로 긁어보면 사기가 먹지 않은 것 같은 데 장갑을 끼고 통과시켰을 때, 부드러운 마찰력이 느껴지는 실이 최상급의 실입니다.
80년대 말에 서울의 노용섭님이 현재와 같은 명주실 사기먹이는 법을 개발합니다.
꺾여지지 않는 열에 강한 명주실은 마찰력면에서 그야말로 최상의 연실인데요, 투연인들의 실이 급격히 나일론사에서 명주실로 바뀌게됩니다.
그런데 가격면에서 너무 상향조정되니 다른 돌파구를 찾아보기 위해 나일론 4합을, 나일론 6합을, 폴리에스터를 실험해보았지만 결국 명주실만한 대체재를 찾지 못했습니다.
개인이 중국을 통해 저렴한 원사의 도입도 시도해보지만 대량 구매가 문제가 되고 매듭이 다수 있을 수 있는 결점이 있어 성공하지 못합니다.
결국 연실에 소요되는 비용을 낮추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직접 실을 만들어 쓰는 시기가 한동안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서울의 김창훈씨가( 미국으로 이민감) 개인이 쓰기 편리하도록 연실 사기먹이는 기계를 소형화, 자동화하는데 크게 기여를 하였습니다.
과도기를 거쳐 원사가 국산에서 중국산으로 대체되고 원사값 하락으로 실값이 20000원으로 조정되자 전문적으로의 대량 생산은 엄정식, 홍삼창 두 분께서 그 역할을 맡게 됩니다.
열에 강한 폴리에스터도 나왔다는데, 또 매스컴을 통해 탄소섬유의 개발도 듣게 되는데 그것들을 연실로 사용하려는 노력이 따라야 하는데 개인이 실을 사기먹이지 않으니 가장 연구가 중단된 부분이기도 합니다. 나일론에서 명주로 전이되는 시기에는 접착제로 에폭시를 사용해보기도 하는 등 많은 변화를 시도했었거던요
7. 고 박만호 선생님의 흑단 얼레가 완성되어 나간 역사
연날리기에 입문하기위해 동네 목공소에 가서 얼레 한 개를 만들어 달랬더니 대수롭지 않게 승낙했던 목수는 3,4일을 굴대 만드느라 헤매다가 우산대를 쫑대로 끼워 굴대와 쫑대가 고정되지 않은 얼레를 완성시켜주었습니다.
서울팀이 여의도 마포대교 밑에서 연날릴 때인데 입문 첫날 김진동님으로부터 담뱃갑을 접어 설명한 연만들기를 배우고 부운 박만호님께 낙관에 약간의 흠집이 생긴 얼레를 할인하여 이만삼천원에 구입한 것이 첫 만남이었습니다. 덤으로 흑단 쫑대도 한 개 선물로 받았습니다. 홀로 키우는 갓 초등학교를 들어간 따님이 아빠를 따라 연 터에 와 차에 있었는데 10년도 훨씬 전에 그 따님이 대학에 들어갔다고 자랑했으니 아마 지금쯤은 결혼하여 새로운 세대를 이어가고 있겠지요. 부운님은 떠나갔지만...
시합 때만 되면 “오늘 나한테 걸린 사람 재수 없어!!” 하며 남의 연에, 평소 연습도 안된 실력에, 100m도 안되는 실이 감긴 얼레로 큰소리 뻥뻥 쳤지만 이기는 경우를 거의 본 적도 없습니다. 나중엔 시합에 참가도 않으면서 전국의 연시합장은 빠지지 않고 찾기에 시합장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기인 같은 삶을 살았던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술 좋아하고 무릇 아티스트들이 그렇듯 성격 예민하여 날카로운 시선으로 연계를 꿰고 있었으며 본인 나름의 정의에 어긋난다 생각되면 말을 거르지 않고 직선적으로 하는 성격이고 한 고집하는 까닭에 아마 안티팬도 꽤나 있는 걸로 압니다.
남해 시합 때, 천막이며 잡다한 것의 운송을 부탁했을 때, 약속시간에 서울에서 남해까지 즐거이 운반해주던 그 때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얼레 틀어지지 않게 만들 수 없냐고 어필하니 할 수는 있지만 하나 사서 계속 쓰면 뭘 먹고 사냐고 하던 그 모습...
얼레 만드느라 다른 직업을 팽개치는 어리석은(?)결정을 했다는 얘기도 얼핏 들었는데요 박만호님이 얼레로 연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로와 역할은 연 역사에 반드시 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만호님이 얼레를 만드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듣고 추정하고 한 것이 전부이므로 눈으로 본 내용은 김형인님이 고증하는 글을 한 번 남겨주시면 좋겠습니다.
님의 도움으로 서오능에 공장을 이전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마 기술적으로 가장 완성된 형태의 얼레 만드는 모습을 옆에서 관찰하시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2000년대 초에 김형인님이 연에 입문하실 때, 부운님이 제게 좋은 사람이 연날리기를 시작했다면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저는 이미 연계에서 발이 반쯤 빠져있던 때라 난색을 표했지요. 그런데 왜 나냐고 했더니 너희는(연합회) 그래도 깨끗하잖아 하던 그 한마디를 저는 가슴에 훈장처럼 새기고 있습니다. 아부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니까요. 김형인님과 저는 님은 모르시는 그런 인연이 있습니다.
박만호님은 80년대 말까지 거의 한 종류의 나무를 사용했었는데 사꾸라 나무라고 했는지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이때만 해도 흑단얼레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요. 흑단 쫑대를 만든걸 보면 80년대 중반부터 흑단을 다루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물푸레나무로도 만들고 한 것을 보면 여러 가지 시험 중인 단계라고 추정됩니다. 이 때 수작업으로 얼레를 만들던 다른 회원들은 목공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왕종류인 부빙가로 만들었는데 외관상 품위가 떨어져 보이는 단점이 있었고 90년대 이후에는 당구장에서 큐대 부서진 것을 구해 수작업 얼레의 맥을 이어 갔는데요
볼링장 레인과 같은 북미산 단풍나무라 잘 건조되어 있고 결이 일정하고 부드러워 가볍고 만들기도 좋은 재료라고 합니다.
80년대 중반에 서울의 이명호님은 박만호님께 나무를 주어 다량의 얼레를 만들었는데 일제시대 건물을 해체할 때 나오는 기둥이나 서까레에 화류라는 나무가 있는데 최고의 얼레재료라고 했습니다. 저도 운좋게 몇 개를 구입했는데 통의 지름이 21cm밖에 되지 않아 저는 좀작다고 생각해 죄송하게도 되팔았습니다. 검색하니 모과나무라네요. 지금도 최고의 목공재료라 하는군요
80년대 말부터 얼레의 크기가 커졌다 작아졌다하며 그 위치를 잡는 과정에서 박만호님께 다량의 얼레를 주문하게 되는데 이때 유행처럼 만들던 것이 자단이라고 보라색을 띠던 나무인데 장미목이라고 했거던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자단이면 보라색 단풍이라는 뜻 같은데... 같은 나무인가요? 그 유행이 한 번 지나고 90년대 중반부터 흑단으로 얼레를 만드는 바람이 불면서 연꾼이라면 흑단 얼레 한 개 쯤은 가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