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쌍문근린공원에서
김 종 훤
푸른 숲, 맑은 공기, 흐르는 물소리는 산이 우리에게 베푸는 값없는 혜택이다. 산은 또 만고에 변함없는 넓고 푸른 가슴과 맑은 물줄기로 만물을 포용하는 미덕이 있다. 사람들이 산을 즐겨 찾는 이유도 이 혜택과 미덕 때문이다.
오염된 공기와 숨 막힐 듯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푸른 숲, 맑은 공기, 흐르는 물소리에 심신을 맡기는 것만으로도 건강의 저해 요인들을 어느 정도 털어버릴 수 있다. 땀 흘려 산에 오르고 나면 몸의 불순물들이 빠져나가 심신이 상쾌해지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산은 멀고 높아서 자주 접하기가 쉽지 않다. 짬을 내야 하고 준비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이런 번거로움이 없으면서 바로 주변에서 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근린공원이다. 평지에 조성해 놓은 근린공원도 없는 곳보다 낫지만 자연의 산을 지정하여 가꾸어 놓은 근린공원이라야 산의 정취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과 나란히 이웃한 도봉산 자락이 남동쪽으로 길게 뻗어내려 자그마한 산등성이를 이룬 곳이 쌍문근린공원이다. 작은 등성이와 조금 큰 등성이가 말등처럼 이어져 여기에 오르면 말(馬)의 등을 타고 걷는 기분이다. 약수터가 다섯 군데나 있고 배드민턴장과 생활체조장이 각각 너덧 군데여서 이른 아침이면 운동하면서 지른 고함소리가 여기저기서 명랑한 음향으로 메아리친다. 그밖에 개인적으로 산책하는 사람, 조깅하는 사람, 운동기구에서 운동하는 사람 등 나름대로 열심히 건강을 가꾸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침 산을 활기로 그득히 채운다.
아침 일찍 이 공원에 오르면 푸른 숲길과 흙을 밟는 감촉이 좋고 쾌적한 공기 속에서 약간 헐떡거리는 내 숨소리를 듣는 것도 좋다. 내가 지금 살아 있고 아직 건강한 내 숨소리를 내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무상한 인생살이에서 아직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과학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어 가는 자연환경 속에 살면서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자체가 기적이라면 기적이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각자의 인생관이나 가치관, 종교관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지만 최소한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건강을 가꾸어야 한다. 국민 개인의 건강은 곧 국력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뜻을 이루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도 건강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공원의 산책길에서 아직 창창한 젊은 나이에 풍을 맞아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열심히 재활운동을 하는 걸 가끔 본다. 한편 가상하면서도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지 못했구나 하는 안스러운 마음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저 사람의 처지와 형편이었더라면 나인들 건강을 지켜낼 수 있었을는지 모를 일이다.
흔히 쓰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말은 건강을 지키는 경우에도 되새겨 볼 명언임을 새삼 깨닫는다. <서경(書經> 열명편(說命篇)에 나오는 이 말은, 오로지 모든 일은 일마다 세심히 갖추어야 할 것이 있는 법이니 미리 준비하고 갖추어야만 근심이 없다(惟事事乃其有備 有備無患), 즉 준비가 잘 되어 있으면 뒷걱정이 없다는 뜻이다.
운동은 저축이 안 되니 꾸준히 생활하듯 해야 하며 나이 들수록 가장 좋은 보약은 제 몸에 맞는 운동이라고 한다. 바른 식사(正食), 바른 운동(正動), 바른 숨쉬기(正息), 바른 마음(正心), 바른 믿음(正信)은 어디선가 귀동냥한 건강 오계로서, 평생 건강치 못한 몸으로 비실대며 사는 나 자신의 건강 좌우명이기도 하지만 실천하는 데는 역시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다.
숲이 지구의 허파라면 인가가 밀집된 도시 한가운데의 숲이야말로 보화보다도 귀하고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허파 중의 건강한 허파인 것이다. 쌍문 네 개 동과 방학동 일대의 허파 구실을 하는 쌍문근린공원에는 세심천(洗心泉)과 청심천(淸心泉)이라는 약수터가 있어 예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넉넉한 생수를 공급해 왔다. 세심천은 마음을 깨끗이 씻는 샘이라는 뜻이고 청심천은 마음을 맑게 하는 샘이라는 뜻이니, 이 곳 사람들의 생활관이 참으로 건실하고 경건했음을 엿보게 한다.
도봉산 맑은 정기를 받아 사는 이곳 사람들의 여유로운 마음과 정서, 그리고 멋스러운 풍류까지도 느껴지는 명칭들이다. 나는 세심천의 생수를 받으러 올 때마다 낭만적이기도 한 이 의미 깊고 그럴싸한 명칭을 되새기며 즐거운 마음에 젖곤 한다.
세심천에 대한 내 감흥을 이렇게 그려본 적이 있다.
세상 죄 마음의 때 덕자덕지 쌓인 세월
세심천 물을 길어 지성감천 씻고 닦아
하늘이 비추일 만큼 맑은 마음 되려네
연륜이 쌓일수록 남루해진 양심 자락
세심천 물에 헹궈 흰눈처럼 씻고 나서
생명수 흐르는 물로 다시 씻길 바라고
마음 씻는 고마운 샘 물맛 또한 변치 말고
물긷는 사람들의 건강까지 지켜 주어
영원히 마르지 않은 생명샘이 되소서. (2001. 도봉문화)
첫댓글 연륜이 쌓일수록 남루해진 양심자락
멋진 시어속에 머물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