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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현장에서 라이브로만 공연을 하는 걸 하려고 합니다.
왜냐면 모래는 없어지고, 남는 게 아닙니다.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도 물려줄 그림이 없어요.
그런데 보면, 모래는 없어지지만 관객들의 기억 속엔 추억으로 남아요.
바다에서 모래성을 쌓고 나면 다음날 없어지는데 그 안에는 둘만의 과정이나 추억이 있는 것과 같아요.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산화되어 없어지는 그런 것들을 계속 하고 싶습니다.
샌드애니메이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나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가난이었어요.
재료 살 돈도 없고, 그런 와중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 졸작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등의 여러 고민들을 하게 됐죠.
그런 고민을 하는 여름에 비는 주룩주룩 왔고, 음침한 공사판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이, 하나의 사진 작품을 보는듯 했어요. 그 밑에 쓰고 남은 모래들을 보는데, 비닐로 덮지 않고 열어 놓아 버려진 모래들이 비에 씻겨서 하수구로 빠져나갔죠. 그것을 보는 순간, 그때의 나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모래처럼 존재감 없는, 버려진 나.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었고,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나와 닮은 듯 했습니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 태어났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처연히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모래를 플라스틱컵. 테이크아웃컵, 버려진 것들을 주워서 ‘비슷한 팔자구나’하고 생각하며 찬밥과 같은 이 것을 작업의 소재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찬밥끼리 한번 잘해보자는 마음이었고, 모래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거죠..
작업실에서 총 3개월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장수가 11,300장 정도에 이르렀어요.
그 후에 모래와 친해졌죠. 밥을 먹어도 씹히는 건 모래였고, 방바닥도 모래였으며 온통 모래가 내 곁에 있었어요.
당시 교수님들은 니가 뭔데 모래로 그림을 그리느냐. 모래로 그려서 밥 먹고 사냐. 졸업을 안 시키겠다.
하고 지적하시기도 하셨어요. 난 반발심이 들었죠. 결국 내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 주는 것은 교수님들이 아닌 모래라는 것이 느껴졌어요. 모래가 내 평생 함께할 존재라고 생각했죠. 어차피 그때는 죽을 생각을 했기에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없었습니다. 살고픈 생각도 없었고... 오직 믿었던 건 모래로 그리는 것에만 집중할 뿐이었어요.
그러다가 점차 그것을 사람들이, 주변 동료들이 조금씩 인정을 해 주었습니다. 멋있다. 나도 해볼까. 등의 칭찬이 시작되었고, 만들었던 졸작은 상당히 반응이 좋았어요. 그리고 내 작업은 단편영화를 만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죠.
공연마다 각각 주제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담아내고자 하는 점이 있다면?
2003년도에 페카코라는 작가가 내한했어요. 처음엔 그 작가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고, 나중에야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지구 반대편에 있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도 분명 그때의 나처럼 가난했겠구나라고 마음대로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 내 작업에 대하여 누구에게 배웠냐, 유학하여 배워온 게 아니냐. 등등 말들이 많아서 마음속으로 반발심이 들었어요.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할 뿐이었죠.
학교 졸업 후 대학원을 다닐 때 사회생활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SBS에서 2년간 PD로 입사했어요.
그런데 느낀 것은 방송국은 언론사의 느낌이 아닌 거대 기획사같았죠. 출연했던 코리아갓탤런트도 마찬가지였어요.
연예인 발굴해서 그것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마인드가 상당히 강했습니다. 이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이 많이 들었고, 결국 2년만에 퇴사했어요. 나는 우리나라를 생각할 때 마다 많은 문제들을 느껴요.
20대 여성 사망률의 반이 자살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죠. 죽은 여자들의 혼이 있다면, 그녀들의 반은 귀신이란 것인데, 그래서 이게 큰 문제예요. 결혼을 하라고 얘기 하지 말고, 있는 사람이나 잘 보살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애를 낳자고 재촉하지 말고. “지금 존재하는 이들을 살펴라”라고 생각해요. 나는 내 작품 에서 그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내가 출였했던 코리아 갓탤런트에서 주어진 시간은 고작 2분 30초뿐이었고 모두 편집되었습니다. 내 생각에, 예술가는 현시대상황을 펜이 아닌 작품으로 표현하여 승화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마인드로 예술을 해요. 난 우리나라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었고, 코리아갓탤런트에서 상금 3억을 받으면 졸업생들의 장학금으로 쓰겠다고 했으나 그 역시 편집됐습니다. .
또한, 작품 중 “독도는 우리땅”같은 표현도 있는데, 난 그저 내가 느낀 바를 표현한 것 뿐입니다.
다른 존경하는 작가가 있다면?
다른 이들의 작품을 안 봅니다. 샌드애니메이션이란 퍼포먼스 자체는 음악만으로 영감을 듣고 그림을 그리는데 그러다보면 과거에 본 것들이 순간적으로 등장해요. 그리고 그것은 무심결에 나오기에 나는 다른 이들의 작품을 볼 수가 없어요. 순수성을 잃을 수도 있기에. 그렇기에 존경하는 작가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모티브가 된 사람이 있다면, 가상인물이지만 취화선의 최민식 씨가 맡았던 역할입니다. 그러한 예술가가 저는 좋아요.
작품 내에서 미술과 음악과의 공존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내 작품 안에서의 음악은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OST가 흐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에요. 샌드 애니메이션은 단지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걸 뽐내는 게 아닙니다. 가장 장점이면서 가장 잃지 말아야 하는 건 샌드애니메이션은 언어란 것인데, 내 마음을 그려서 어찌 해석하든, 난 이렇게 그렸다라는 사고가 아니라, 이것은 언어고 메시지입니다. 관객 하나하나에게 그 메시지가 꽂혀야 하는 것이기에 언어를 얘기하면서 그것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음악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대사가 없기에, 그 부분을 매칭시키는 것이죠. 클래식연주자들의 느낌은 블랙입니다. 까만 정장의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연주하는데, 샌드애니메이션 역시 콘트라스트가 센 작품이라 블랙 & 화이트입니다. 그것이 제가 봤을 때는, 클래식한 것이 샌드애니메이션에 잘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은 어제 예술의 전당에서의 공연도, 국악과의 접목을 꾀하면서 이쪽 저쪽을 다 넘나드는 중이예요.
내가 어릴 땐, 흙장난을 상당히 많이 했어요.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림을 그리죠. 글을 쓰지 않아도 뭔가를 쓰고 지우는 게 본능과도 같았어요. 펜이나 붓을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그리며, 자연물의 한 부분인 흙모래를 갖고 그림을 그려요. 모래로 그린 그림을 보면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올라요. 샌드애니메이션은 나도 해 볼 수 있을 거 같다는 느낌. 그 친숙함은 본능에 가까운 부분이 있어요. 그걸 다만 현대화된 기술로 인해 보이는 과정을 쉽게 보여주는 것뿐이구요.
모래를 만지시니 손이 거치실 텐데 평소 관리 어떻게 하시나요?
손관리 안합니다. 하하
웃으시는 모습이 굉장히 해맑으세요^^
모래의 종류 중에서 어떤 걸 쓰나요?
서해안 모래를 씁니다. 동해안의 모래는 소나무 숲으로 다 날아가서 모래 입자가 굉장히 굵고, 부서진 조개 껍데기가 많아서 모래가 무겁고 그래요. 제주도의 모래는 현무암으로 되어있다보니까 까만 구멍이 뽕뽕 나있기에 그것들이 많이 섞여서 빛이 올라오지 않구요. 서해안 모래는 불투명하지 않고 게다가 잔잔해요. 사구에 쌓여 있는 게 부드럽고 갯벌과 섞여서 부드럽고 색도 예뻐요. 만과 갯벌이 있는 나라는 세계에 몇 나라 되지 않지요.
아직 대중적이지 않은 샌드 애니메이션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는지?
10년, 20년 하다보면 알겠죠. 매스컴이나 CF에 출연하는 것을 많이 거절했었어요. 뉴스 정도에 나가는 건 허용하는데,
난 연예인이 아니니까요. 전 방송국이나 연예 프로그램의 장난질이 싫고 구역질이 나요. 예술가를 데려다 놓고 상업화
하려 하고... 난 앞으로 이런 프로그램들을 더욱더 고사할 예정입니다. 난 현장에서 라이브로만 공연을 하는 걸 하려고
해요. 왜냐면 모래는 없어지고, 남는 게 아니니까요.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도 물려줄 그림이 없어요. 그런데 보면, 모래는 없어지지만 관객들의 기억 속엔 추억으로 남아요. 바다에서 모래성을 쌓고 나면 다음날 없어지는데 그 안에는 둘만의 과정이나 추억이 있는 것과 같아요.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산화되어 없어지는 그런 것들을 계속 하고 싶습니다.
나는 현실과 작품세계, 이 두 세계를 함께 가는 동시에 양쪽에 걸치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작품 역시 현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제도권(상업성)에 대해 편입하는 요즘 예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중세에도 예술가들의 영감을 끌어내려고 스폰을 해줬습니다. 현실적으로 작가들은 궁핍한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제도권- 기업의 스폰이나 제작지원은 예전과 똑같고, 그 영향력을 부정하진 않지만, 받지 않아도 될 상황이라면 하지 않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견딜 수 있다면, 내 스스로가 만들 수 있다면 기대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어느 정도 기댈 수도 있는 부분이죠.
좋은 작품을 만들면 된다에 있어 나는 다만 전자가 아닌 후자를 택한 것입니다. '나 혼자. 능력껏. 아님 말고? ' 의 마인드로. 홀로 작업을 한다는 것은 곧 홀로 책임을 진다는 것이며 스폰을 받았을 때의 스트레스를 겪지 않아도 됩니다. 난 그 감정들이 싫었어요. 대기업과의 컨택은 싫습니다.
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보다는 해외의 반응이 더 좋아요. 서양인들은 손이 커서 이런 작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공통된 아픔들이 다 있어요. 그 나라만의 이야기들. 중국에서는 삼국지, 731부대의 생태실험들을 이야기할 수 있고 일본에는 원자폭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각 나라마다의 사연과 이야기, 스토리가 있기에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샌드 애니메이션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메세지의 전달”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정적인 그림이 아니라 동적인 그림이지요. 움직이는 예술은 이 시대의 트렌드입니다. 몇 백년 뒤에는 유적이 되고, 유명한 명화가 될 것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공연은?
가장 기억에 남으며, 가장 가슴 아픈 공연이 있습니다. 그때의 공연은 내 오만함의 극치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난 먹고 살만하게 됐을 때, 다른 사람을 도와야 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자 생각해서 4000만원을 들여서 자선공연을 했고 병원에 갔습니다. 병원에 가면 많은 환자들이 있고, 많은 질병들이 있습니다.
환자들을 위해서 공연준비를 했어요. 복도의 불을 다 끄고 인솔을 했는데, 공연이 시작되고 의사들은 못 앉고 간호사들은 서서 보게 했습니다.
불을 켜고 객석을 보았는데, 링겔병들이 사열이 되어 있었습니다. 관객들이 일일이 그것을 끌고 왔어요. 수많은 군대의 창처럼요. 그 순간 내가 실수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환자들을, 먼 길을 오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시간 20분으로 계획한 공연을 20분 공연으로 끊었습니다. 환자들을 오래 앉게 하는 건 아니다라고 생각했어요. 그 후 다리 하나를 건널 때라도 돌다리를 두들겨 보는 심정으로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공연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그 공연을 통해 내가 어떤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우울증과 더불어 자아비판도 하고, 반성을 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변하게 됐어요. 사회가 가진 힘의 논리에 끌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작품에는 혼을 담아야 해요. 혼이 없으면 작품도 아니고, 그건 돈을 받고 그림을 그리는 일러스트에 불과하다고 생각 합니다.
SBS에 입사했다가 2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셨는데, 참 용기 있는 행동 같다고 느껴지는데
이유가 있다면?
회사를 그만둔 건 용기가 아닌 계획입니다. 그때는 "먹고 살만하구나", 세상이 우습냐 등등 별 이야기들을 다 들었습니다.
내가 젊은이들에게 하고픈 말은 후회와 걱정은 하지 말란 것입니다. 걱정은 대개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들에 대한 생각들이에요. 걱정 대신 계획을 세우십시오.
나는 작품 속에서 현실을 사는 사람들을 유화시킬 수 있는, 아동적이고 유치하지만, 누구나 하고 싶어하는 걸 해줄 수
있게 하는, 지극히 평범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입니다. 샌드애니메이션은 그림이 어둡고 무겁다고 생각되곤 하는데,
까만 화면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리는 자의 입장에서는 까만 화면을 밝게 닦으면서, 밝은 면을 봅니다.
그래서 그 면이 달라요. 까맣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밝은 면, 빛을 봅니다. 어두운 터널, 동굴에서 땅을 팠는데 빛이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죠. 마치 쥐구멍에서도 볕 뜰 날 있다의 느낌이라고 할까. 난 작품 속에서 희망을 말합니다.
샌드 아트를 평면적으로 풀어가시는데 입체적으로 만들고 싶은 의향도 있으시나요?
우리가 보는 건 모두 2D입니다. 나는 지금 그대로를 믿고, 3D 입체로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클래식한 면을 계속 고수할 것이고, 여기에 조금 더 기술적인 걸 가미할 계획은 있습니다.
예술이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예술만이 가능합니다. 예술을 접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순화가 되지 않습니다. 좋은 공연, 좋은 예술을 널리 보급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 직장인들은 연극 공연을 많이 보지 못할 수밖에 없어요. 조선시대의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농사가 끝나면 품앗이 등을 하면서 해 떨어질 무렵이면 놀면서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것이 없어졌어요. 전세계적으로. 그래서 사람들이 일을 으르렁 거리면서 하게 되었고, 삶의 재미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분명한건 예술만이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을 순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새 가장 좋은 프로그램은 개인적으로 ‘나는 가수다’라고 생각해요. 이윤이나 저작권료의 목적이 되었던 것을 비판하기보다 사람들에겐 많은 감동을 준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그것이 밥그릇 싸움이라고 해도, 경쟁 속에서 스트레스를 감내하면서 공연을 하는 가수들을 보면 대단한 느낌이 듭니다. 30대 이상의 사람들은 그것이 낙이고, 일요일을 기다립니다. 그것이 삶에 영향을 끼치는 예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후배 작가들을 양성하고 있다고 한 인터뷰에서 언급하셨는데 국내 샌디스트 1세대로서
후배 작가들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면?
내가 안 때리게 해달라 (장난) 직접적인 폭력을 쓰진 않지만 실망을 하게 되면 쓴 소리를 하게 될 텐데, 본인 스스로가 알아서 잘 했으면 좋겠어요. 길은 닦아 놓았으니 거기에 풍성히 사과와 배나무를 심어줬으면 하는거죠. 날 뛰어넘고, 김하준 작가 후배, 아류 이런 것 말고 ‘그보다 낫네’라는 말을 들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굉장히 뿌듯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공연계획과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가방에 장비를 다 싣고 전 세계 투어를 하고 싶어요. 길거리 공연도 하고 싶구요. 북한산암벽이나 바닷가의 크레인 바닷가 해변 등등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 장소, 아무 곳에서든지 할 수 있기에 좋습니다. 뉴욕 한복판에 그림을 그려도 어떤 이들에게 많은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문화의 밤에 참여하시게 된 이유 그리고, 서울문화의 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난 서울문화의 밤도 잘 모릅니다. 다만 20명의 관객들, 알든 모르든 오셨으면 그분들에게 주어야할 부분들이 있으니까 그걸 전달하고자 합니다. 서울문화데이트와 같은 프로그램이 관객들과의 장을 만들어줬다는 점이 좋습니다. 관객과의 소통을 할 수 있는 기회여서 좋아요. 나처럼 공연장이 따로 없는 이들에겐 사람들과 함께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봅니다.
서울문화의 밤에서 샌디스트 김하준씨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나도 섰으니까, 관객들 역시 앞에 나와서 설수 있다. 당신들도 할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든 그들을 즐겁게 만들어 주고자 합니다.
사진 /최은하_오프너
편집 / 인턴 이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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