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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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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합창 |
혼성합창 |
2부 합창 |
테너, 베이스 |
소프라노, 알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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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합창 |
제1테너, 제2테너, 베이스 |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알토 |
'소프라노, 알토, 베이스'또는 '소프라노, 테너, 베이스' |
4부 합창 |
제1테너, 제2테너,제1베이스, 제2베이스 |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
④. 우리나라의 전통 성악곡과 판소리
우리나라에도 여러 종류의 성악곡이 있다. 선비들을 중심으로 발달한 가곡, 가사, 시조와 서민들을 중심으로 발달한 민요, 판소리, 잡가가 바로 우리 전통의 성악곡이다.
2. 칸타타 [ cantata ]
이탈리아어의 cantare(노래하다)가 어원이며, 기악곡을 뜻하는 소나타의 대칭어로서, 일련의 이야기풍 가사를 바탕으로 한 바로크 시대의 다악장 성악곡을 가리키며, 독창, 중창, 합창 등으로 이루어진다. 바흐 이후는 내용과 형식 모두 광범위 해졌으며 오라토리오와 구별하기가 어렵다. 세속 칸타타와 교회 칸타타의 2종류로 분류된다. 세속 칸타타는 17세기 초에서 18세기 전반(前半)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발전했다. 모체가 된 것은 피렌체의 카메라타에 의한 모노디로서, 그 전형적 형식은 동일 저음 위에 전개되는 아리아의 변주곡이다.
17세기 중엽 아리아 및 레치타티보에 의한 다악장 형식의 독창 칸타타가 확립되었고, 18세기 전반 나폴리파 오페라에 이르러, 정형화되고 완성되었다. 중심적 작곡가는 A. 스카를랏티로서, 그의 칸타타는 콜로라투라를 수반하는 다 카포 형식에 의한 몇 개의 아리아로 이루어진다(이 종류의 칸타타는 18세기초의 프랑스에서도 약간 볼 수 있다.). 한편, 교회 칸타타는 17~18세기 독일 프로테스탄트의 교회음악으로서 확립되었다.
코랄 등의 종교적 가사, 합창, 관현악 반주 등을 특색으로 하며, 특히 코랄의 선율과 가사를 사용한 코랄 칸타타가 중요하다. 교회 칸타타를 대성한 바흐의 작품은, 다성적인 합창으로 시작해서 레치타티보, 아리아를 삽입하고 코랄로 끝나는 형식이 많다. 바흐 이후에도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에는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생상스, 댕디, 프로코피에프, 본=윌리엄즈 등이 칸타타를 작곡하고 있다.
-. 칸타타에는 종교적인 내용의 칸타타인 교회 칸타타sacred cantatas)와, 세속적인 내용의 세속 칸타타secular cantatas)가 있는데, 커피 마시는 즐거움을 노래한 바흐의 ‘커피 칸타타’는 후자에 속한다. ‘칸타타(cantata)’라는 단어의 어원은 이탈리아어의 칸타레(cantare, 노래하다)로 원래는 그저 ‘성악곡’이라는 뜻이며, ‘기악곡’을 뜻하는 ‘소나타(sonata)’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칸타타는 가사가 있는 바로크 시대의 다악장 성악곡을 가리키는데, 독창(레치타티보+아리아), 중창, 합창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는 오페라나 오라토리오와 차이가 없다. 탄생한 시기 역시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의 탄생기인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로서, 르네상스 시대가 막을 내리고 바로크 시대로 옮겨간 이 문화적 격동기에 음악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발전은 바로 오페라와 칸타타, 오라토리오 장르의 탄생이다.
1). 이탈리아 세속 칸타타
세속 칸타타는 17세기 초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이탈리아에서 발전했고, 그 기초가 된 것은 피렌체의 ‘카메라타’(최초의 오페라를 탄생시킨 연구/작곡/연주 단체)에 의한 모노디(단선율)로, 일반적 형식은 같은 저음 위에 전개되는 아리아의 변주곡이었다. 이 모노디는 후에 마드리갈이나 칸초네 같은 세속가곡의 다성악 형식이 등장하면서 해체된다. 최초의 칸타타 작곡가들 이름을 보면 최초의 오페라 작곡가들과 동일하다. 카치니의 ‘누오보 무지케’(1601), 페리의 ‘바리에 무지케’(1609) 등이 초기 세속 칸타타의 대표작이다. 칸타타는 종교적, 세속적 소재를 노래하는 대규모의 합창음악이다.
이탈리아의 초기 종교적 칸타타는 비아다나의 ‘첸토 콘체르티 에클레시아스티치’(1602) 같은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칸타데(Cantade)라는 제목이 최초로 쓰인 곡은 1620년 그란디의 작품이었다. 이 초창기 이탈리아의 솔로 칸타타는 몇 개의 절로 나뉘었고, 바소 오스티나토(basso ostinato. ‘집요한 베이스’라는 뜻. 같은 음형을 같은 음높이로 연속 반복하는 최저성부)가 매 절마다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멜로디는 절마다 새로웠다. 칸타타가 초기 아리아와 달랐던 부분은 바로 이 점이었다. 아리아는 여러 절로 나뉘어도 매 절마다 멜로디가 같았다.
17세기 중엽, 아리아 및 레치타티보에 의한 다악장 형식의 솔로 칸타타가 확립되었다. 1630년대에 페라리는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를 병치시키는 이런 형식으로 이탈리아 칸타타를 바소 오스티나토에서 독립시켰다.
카리시미와 로시 등의 작곡가를 거친 뒤 18세기 전반 나폴리 악파에 이르러 이탈리아 칸타타 형식은 정형화되고 완성되었지요. 핵심적인 작곡가는 6백여 곡의 칸타타를 작곡한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인데, 그의 칸타타는 콜로라투라를 수반하는 다 카포(da capo) 아리아들과 레치타티보로 이루어진다. 레오, 빈치, 하세, 헨델 등의 작곡가가 이 당시 칸타타를 작곡했고, 이 시대에는 프랑스에서도 같은 형식의 칸타타를 볼 수 있다.
2). 독일 교회 칸타타
이탈리아 성악 문화가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17세기 세속 칸타타 분야에서는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이탈리아를 따를 수 없다. 유일하게 이탈리아 밖에서 탁월한 칸타타를 찾는다면, 독일 최초의 칸타타 작곡가로 불리는 카스파 키텔의 ‘아리아와 칸타타’(1638)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키텔의 이 작품들은 이탈리아 양식을 따른 솔로 가곡들로, 독일어로 작곡되었지만 이후의 독일 교회음악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키텔에게 모범이 된 비슷한 형식의 작품으로는 하인리히 쉬츠의 ‘교회 협주곡’이나 ‘심포니에 사크레’를 들 수 있다. 독일 교회음악 분야에서는 당시 아리아, 모테트, 협주곡 등의 장르가 발전했고, 오늘날 이 장르들은 ‘구 교회 칸타타(ältere Kirchenkantate)’로 불린다. 이런 칸타타들은 성서 텍스트, 코랄(옛 성가), 새로운 교회가곡을 토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각각 성서 칸타타, 코랄 칸타타, 솔로 칸타타, 대화체 칸타타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1700년경, 바이센펠스의 목회자 에르트만 노이마이스터는 연중 모든 주일과 축일에 행해지는 설교 내용을 담은 칸타타 텍스트를 썼습니다. 오페라 형식을 본받아 레치타티보와 다 카포 아리아에 쓸 자유시들을 창작하면서 그는, 레치타티보에는 설교조 그리고 아리아에는 완전히 주관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이 노이마이스터의 텍스트에는 크리거, 텔레만, 바흐 같은 작곡가들이 곡을 붙였다.
3). 바흐 칸타타
18세기 독일 교회 칸타타를 탁월한 음악형식으로 끌어올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 작품은 다성적 합창으로 시작해 레치타티보, 아리아를 노래하고 코랄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바흐의 칸타타들은 대체로 노이마이스터 유형을 따랐지만 그럼에도 그 형식이 상당히 다양하고 다채롭다. 예를 들어 칸타타 4번(1708년경)은 코랄 파르티타 형식인가 하면, 칸타타 38번은 코랄 선율들을 사용한 노이마이어 유형의 칸타타, 56번은 이탈리아식 솔로 칸타타, 79번은 성서 구절을 토대로 도입부 합창이 붙어 있는 후기 노이마이어 유형의 칸타타, 140번은 라이프치히 시절 후기에 작곡된 자유로운 형식의 코랄 칸타타 등이다.
교회 칸타타는 그 해 교회력의 사이클에 따라 그 내용이 결정되며, 교회전례 시간 중 설교 전과 설교 후에 연주된다. 그래서 두 부분으로 나뉜 칸타타가 많다. 바흐는 2백 편이 넘는 칸타타를 작곡했고, 그 가운데 대다수의 악보가 남아 있다. 바흐 작품번호(BWV)를 부여할 때 볼프강 슈미더는 1~200번까지 교회 칸타타로, 또 201~216번은 세속 칸타타로 분류했다. 그리고 바흐가 작곡한 것인지의 진위가 명확하지 않은 작품들은 217~224번에 분류되었다. 그러나 슈미더가 바흐의 진본으로 굳게 믿었던 여러 작품들까지도 훗날 위조본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도 그 칸타타들은 여전히 바흐 작품번호를 달고 있다. 수많은 걸작 칸타타를 작곡한 ‘음악의 아버지’ 바흐, 그의 칸타타의 일반적인 순서는 합창-레치타티보-아리아-레치타티보(또는 아리오소)-아리아-코랄 순이다.
오프닝 합창은 대개 다성악으로 이루어지며, 아리아 대부분은 다 카포 형식이어서, 중반 이후 첫 멜로디가 되풀이된다. 피날레의 코랄은 보통 호모포니로 연주된다. 바흐는 자신의 칸타타에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 솔로 성악가들을 기용했고, 합창단 역시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의 4성부 합창을 노래하게 했다. 소프라노는 순수함을 상징하고 알토는 어머니 같은 느낌을 전달한다. 베이스 가수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담당했다. 초기 칸타타에서 바흐는 비올라 다 감바나 리코더 같은 구식 악기도 많이 사용했는데, 리코더는 겸손이나 가난을 표현하는 데 유용했다.
전통적인 코랄 모테트와 이탈리아 칸타타를 협주적인 방식을 사용해 통합하고 한 차원 높인 것이 바흐 칸타타의 특징이며 바흐의 업적 가운데 하나다. 초기 작품으로는 ‘깊은 곳에서 주님, 당신께 부르짖고’, 라이프치히 시절의 작품으로는 ‘새로운 노래를 주님께 불러드려라’, ‘주님, 고요한 중에 당신을 찬미합니다’,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 등이 대표적이다.
바흐 이후에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그리고 19-20세기에는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생상스, 댕디, 프로코피예프, 본 윌리엄스 등이 칸타타를 작곡했다. 모차르트의 ‘엑술타테’, 멘델스존, 브람스, 쇤베르크 등의 발라드, 송가, 랩소디 등도 칸타타 범주에 포함되기도 한다.
3. 오페라 [ opera ]
opera는 원래 라틴어 opus(작품이라는 뜻)의 복수형, 오페라의 요람기에서는 dramma in musica 또는 dramma per musica라고 했으나, 후에 opera in musica로 되었으며, 줄여서 단순히 opera라고 하게 되었다.
1). 오페라의 본질
오페라는 대개 그 작품 전체가 통작(通作)된 노래의 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페라와 다른 극 형태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위의 정의는 오페라를 너무 넓게 해석한 경우인데, 실제로는 여러 가지 점에서 오페라라는 말의 사용범위는 제약을 받는다.
① 역사적으로는 ‘다프네’나 ‘에우리디체’ 계통이 전개된 것으로서, 그 이전의 음악극은 오페라라고 하지 않는다.
② 오페레타와 구별해서 사용된다. 오페레타는 음악이 붙어 있지 않은 지문(地文) 대사가 많이 삽입되어 있는 점이 오페라와 다르다. 따라서 오페라는 원래 지문 대사가 들어 있지 않으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꺼번에 작곡되는(durchkomponiert) 것이 본래이다. 그러나 지문 대사가 들어간 것도 있는데, 거기에는 징시필 계통에서 발생한 ‘마적’, ‘피델리오’, ‘자유의 사수’ 등이 있으며, 또 민속적인 오페라로서 ‘팔려간 신부’ 등이 있고, 오페라 코미크로서 ‘카르멘’ 등도 지문 대사가 들어 있다. 그리고 바그너와 그 계통의 악극에 대립하는 개념으로서의 오페라는 좁은 의미로 해석한 것으로서 일반적 사용법은 아니다.
오페라는 복잡한 종합예술이다. 음악적 요소는 물론 문학적이고 시적인 요소(대사), 연극적 요소(극으로서의 구성, 연기), 미술적 요소(무대장치, 의상), 무용적 요소 등이 합성된 것으로서 그것만으로도 매력이 크지만, 작품으로서는 자칫하면 통일성을 잃기 쉬우며, 또 연출 형태로서도 곤란해진다. 더욱이 극적인 것과 음악적인 것을 어떻게 조화시키고, 또는 어느 것에 중점을 두는가가 항상 오페라의 예술적 문제점이었다.
2). 오페라의 구성
오페라는 대사에 음악을 붙인 것이다. 음악은 독창자와 합창, 관현악으로 구성된다. 독창자는 등장인물을 맡아 행하고, 배역에 따라 소프라노, 메조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베이스 등으로 나뉜다. 그들은 독창하거나 함께한다.
전통적인 오페라에서 부르는 노래는 각각 완결된 독창곡이 많고, 극 중의 차례를 따라 번호를 붙인 것이 많다. 이 독창자들이 부르는 것은 대개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로 나뉘어지고, 그 결합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밖에 극 중에서 노래하는 장면에서는 카바티나, 로만스, 세레나데 등이 불려진다. 합창은 오페라 속의 군중역으로 등장한다. 합창만의 노래인 경우도 독창자들과 함께 부르는 경우가 있다.
관현악은 노래의 반주를 하고, 등장인물의 감정이나 성격, 행동 등을 묘사, 강조하고, 무대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등 여러 가지 기능을 하는데, 관현악만으로 연주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페라 전체 중 처음에는 서곡 또는 전주곡이 붙어 있는 것이 많지만, 이러한 곡이 없이 관현악의 짧은 도입부만으로 직접 오페라 자체로 흘러 들어가면서 막을 올리는 오페라도 많다. 또 전주곡은 제2막이나 제3막 처음에 오는 경우도 있다. 또 오페라의 처음이 아니라면 간주곡도 연주되는 일이 있다.
오페라 중에 삽입되는 발레 음악도 오케스트라가 연주한다. 그리고 음악은 지도동기에서처럼 이야기 줄거리를 말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오페라의 대본은 작곡을 위해 특별히 쓰여지는 것으로서, 옛날에는 오페라 대본을 전문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통 운문으로 쓰여 지며, 막, 장, 경등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일반 희곡과 마찬가지이다. 작곡을 위한 대본이 아니라, 완성된 희곡에 음악을 붙인 것으로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살로메’ 등의 예외적인 작품이 있다. 바그너는 대본도 스스로 작성했는데, 그 이후 특히 현대에서는 작곡자 스스로 대본을 쓰는 경우도 있다.
3). 오페라 극장
구미의 대도시에서는 오페라 전문의 극장이 적어도 하나는 있으며, 시즌 중에는 대개 매일 저녁 오페라를 상연하고 있으며, 옛날 유럽에서는 왕후의 소유였으나, 오늘날에는 국가, 주(州), 도시 등의 공적 재정 위원을 받아 소속 단원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밀라노의 스칼라, 로마의 국민 오페라(구 왕립), 나폴리의 산 카를로, 빈의 국립, 서베를린의 독일 오페라, 동베를린의 국립, 뮌헨의 국립, 파리의 오페라좌,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등의 가극장이다. 또 축전극장으로는 독일의 바이로이트 바그너 극장, 영국의 그라인드 본 극장 등이 있다.
유럽의 지방 소도시에서는 시립극장이 하나이기 때문에 연극, 오페라, 오페레타가 교체해서 상연된다. 오페라 극장은 특히 무대가 넓고, 무대 앞에 오케스트라 박스가 있으며, 객석이 호화롭고, 부속 건물도 연습에 충분할 만큼 넓은 것 등의 특색이 있다. 영국 및 미국에는 수많은 사립 가극단이 있다.
오페라 상연에 관계하는 사람들이나 인기 있는 오페라 가수는 오늘날 스타적인 존재로서 높은 전속료나 출연료를 받고 있으며, 목소리의 높이와 종류(리릭, 드라마틱 등)에 따라 배역이 정해진다.
극의 중심적인 애인역은 소프라노와 테너인 경우가 많다. 관현악은 대개 오페라 극장에 전속되며, 대규모 오페라에서는 100인 또는 그 이상의 연주자가 필요하게 된다.
오페라의 관현악단은 따로 교향악 연주회를 개최하는 경우도 많다. 일류 오페라 극장은 전속 발레단도 가지고 있으며, 그 극장에서는 발레만을 상연하는 일도 있다. 오페라 상연의 최고 지도자는 지휘자로서, 가수, 합창자, 무용자 모두 그의 지휘에 따른다. 합창 지휘자는 이를테면 지휘자의 조수로서 특히 합창 훈련에 임한다. 극적 연출은 연출자가 담당하며, 연기를 비롯한 중요한 지도를 한다. 무용이 있을 때는 무용 지도자가 안무나 무용 지도를 한다. 그 밖에 소도구, 의상, 조명, 프롬프터 등 다른 연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페라 상연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다.
4). 오페라의 국민 양식과 여러 형태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가 특히 가창면에서 뛰어나며, 작품도 가창 기술을 발휘한 것이 많고, 벨 칸토라고 하는 가창 기술이 발달했다.
초기의 베네치아 오페라에서 막간에 익살스런 짧은 연극을 넣어 인테르메조라고 했는데, 이것이 인기를 얻어 후에 독립된 오페라가 되었으며, 이것을 오페라 부파라고 했다. 이에 대해 비극적인 내용의 오페라를 오페라 세리아라고 했으며, 이 두 가지가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적 형식이 되었다.
오페라 전체에 있어서 가창을 우위에 둔 것은 베르디나 풋치니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독일에서는 헨델이나 모차르트 등의 작곡가가 이탈리아 오페라의 형식에 입각했으나, 민속적인 오페라로서는 징시필이 있으며, 이것은 모차르트에게서도 ‘후궁으로부터의 유괴’나 ‘마적’에 그 형식이 남겨졌다. 그러나 베버 이후 낭만적 오페라가 전통적 형식이 되면서,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바그너의 악극에 의해 오페라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것은 프피쯔너나 시트라우스의 교향악적 오페라에 이어지고 있다.
독일의 오페라는 음악형식에 복잡성을 주어 사상 · 내용을 심화하고, 관현악의 역할을 확대시킨 점에 특징이 있으며, 프랑스는 19세기 초부터 그랜드 오페라가 융성해졌으며, 장엄한 장면과 강렬한 극적 효과를 특색으로 하여, 프랑스인이 좋아하는 발레가 널리 도입되었다.
오페라 코미크는 지문 대사가 군데군데 나오는 것이 특징이었으며, 반드시 희극적 내용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프랑스의 오페라는 레시타티프(레치타티보)의 음악적 성질을 높이고, 전체적으로 프랑스어의 데클라마시옹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것이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에서 현대적인 특성으로까지 높여졌다. 독일 태생의 오펜박은 파리에서 많은 오페레타를 작곡해서 인기를 얻었다. 또 프랑스의 오페라로부터 오페라 모음곡이 태어났다. 구노, 그리고 마스네에 이르러 프랑스 오페라는 우아하고 감미로운 서정가극의 작풍을 형성했는데, 이것은 풋치니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러시아도 뛰어난 몇 개의 국민 가극을 발표했는데, 내용, 음악 모두 독특한 러시아 양식을 나타낸다.
5). 오페라의 역사
오페라는 마치 사람의 생일처럼 그 발생 시기와 장소가 뚜렷이 정해져 있다. 발생 장소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바르디 백작 궁정이고, 시기는 1597년, 즉 르네상스 말기였다. 당시 귀족이나 풍류객들이 고대 그리스의 극을 상연하자고 하여, 시인 리눗치니와 작곡가 야노포 페리 및 캇치니 등이 협동해서 그리스 신화에서 취재한 ‘다프네’라는 음악극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오페라의 탄생으로서, 이들은 그리스의 극의 본질이 독창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다프네’도 독창을 주로 하고 악기 반주를 붙였다. 이 악보는 일부밖에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 가장 오랜 오페라는 1600년에 상연된 ‘에우리디체’로서, 대개 앞의 ‘다프네’와 같은 사람들이 창작에 임했다. 이 두 작품이 성공하자 같은 종류의 작품이 속출되었고, 피렌체에서 전 이탈리아로 보급되었으며, 오늘날 오페라의 근원을 이루었다. 이 발생기 오페라의 역사적 의의는
ⓐ 독창 중심이며, 당시 모노디가 점차 세력을 얻어 가던 풍조에 부합된 점,
ⓑ 르네상스의 시대적 경향을 대표했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오페라는 처음부터 시대적이고 세속적이었다는 점,
ⓒ 노래의 나라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점,
ⓓ 한 무리의 지식인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며, 이론적으로는 여러 가지 모순이 있다. 그 후 오페라는 베네치아로 옮겨져서 번영하게 되었다.
베네치아 악파 최대의 작곡가는 몬테베르디로서, 극적 효과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17세기 말에는 베네치아에 오페라를 위한 약 15개의 극장이 있을 만큼 오페라가 번영했다. 18세기에 이르러 오페라는 나폴리에서 번성하게 되었으며, 알렛산드로 스카를랏티나 페르골레시 같은 뛰어난 작곡가가 나타났다. 후자의 ‘마님이 된 하녀’는 오페라 부파의 걸작으로서 가장 오랜 것으로 생각된다.
로마에서도 번성했으나, 교황의 소재지였기 때문에 세속적 오페라는 압박을 받았다. 베네치아에서는 오페라의 악기면이, 그리고 나폴리에서는 벨 칸토가 발전한 것에 대해, 로마에서는 합창의 표현이 깊어졌다. 점차 오페라는 각국으로 옮겨졌는데, 프랑스에서는 륄리, 라모 등이 나타나고, 오페라의 프랑스 양식을 확립했다.
영국에서는 퍼셀이, 순수 오페라로서는 하나뿐이지만 ‘디도와 에네아스’라는 걸작을 남겼다. 독일에서는 쉬쯔가 ‘다프네’에 작곡을 시도했으나, 일반은 이탈리아 오페라에 젖어 있었으며, 다만 함부르크에서만 독일 오페라가 번성했다. 헨델의 천재성은 오라토리오에 있다고 보는데, 오페라도 다분히 오라토리오적이며, 40편 이상의 오페라를 남겼다. 글룩은 오페라에 있어 극과 직접 관계가 없는, 가수의 목청을 울리게 할 뿐인 불필요한 장식을 없애고, 극과 음악의 통일성이라는 점에서 대개혁을 단행했다.
'오르페우스’(1762) 이후의 작품 ‘알체스테’,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 등은 그의 개혁 정신을 실현한 훌륭한 것이다. 모차르트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테두리 안에 독일 음악의 정신을 넣어 뛰어난 오페라를 수많이 남겼다. ‘피가로의 결혼’, ‘돈지오반니’, ‘여자는 다 이런 것’ 등은 대개 오페라 부파의 형식을 밟았고,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마적’은 징시필에 속한다. 베토벤은 단 하나의 오페라인 ‘피델리오’가 있다.
베버의 ‘자유의 사수’에 의해 독일 낭만파 오페라가 시작된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파이지엘로나 치마로자(‘비밀 결혼’)같은 나폴리 악파의 작곡가들이 명성을 떨쳤다. 19세기로 들어서 롯시니의 ‘세빌랴의 이발사’, 도니젯티의 ‘루치아’, 벨리니의 ‘몽유병에 걸린 여자’, ‘노르마’의 3대 거성이 현대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양식을 완성시켰다.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전반부터 그랜드 오페라 양식이 성행하고 마이어베어가 활약했다. 또 오페라 부파 계통에서는 오페라 코미크가 생겼으며, 보옐디외나 오베르의 프라 디아볼로‘가 사랑스런 작품을 남겼다.
독일에서는 로르찡, 니콜라이의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 플로토의 ‘마르타’ 같은 낭만파 오페라의 뒤를 이어 바그너가 과거의 오페라 양식과는 다른 악극을 대성했다. 그는 그 때까지와 같은 번호 오페라를 배척하고 무한선율을 사용해서 음의 흐름을 일관시켰으며, 지도동기(=라이트모티프)를 사용해서 음악에도 극의 발전을 깊게 도울 수 있도록 했다. 그의 대표작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니벨룽겐의 반지’, ‘파르지팔’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바그너와 같은 해에 태어난 베르디가 수많은 걸작 ‘리골레토’, ‘트라비아타’, ‘트로바토레’, ‘아이다’, ‘오텔로’, ‘팔스타프’을 남겼다.
프랑스에서는 19세기 후반에 구노의 ‘파우스트’나 토마의 ‘미뇽’ 등의 우아한 오페라를 남겼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신선미가 결여된 오페라가 많았는데, 이 침체 분위기를 깨뜨린 것이 비제이며, ‘카르멘’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음악은 직설적이고 참신했다. 마스네는 우아하고 서정적인 작풍을 보였다.
19세기 중엽부터는 러시아에도 뛰어나 오페라가 나타났는데, 글린카의 ‘황제에게 바친 목숨’, 다르고므 이시스키, 차이코프스키의 ‘에브게니 오네긴’, 보로딘의 ‘이고르공’,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등이 우수한 오페라를 썼다. 또 체코슬로바키아의 스메타나 작품 ‘팔려간 신부’나 야나첵의 예누파 등은 국내외도 널리 알려져 있다.
19세기 말에는 이탈리아에 베리즈모*의 경향이 나타났으며,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나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가 대표적인 작품을 썼다. 그러나 ‘보엠’, ‘토스카’, ‘나비 부인’ 등의 풋치니가 인기 있는 작품을 가장 많이 썼다.
볼프=페라리는 오페라 부파를 근대적으로 부활시켰다. 독일에서는 리햐르트 시트라우스의 ‘살로메’, ‘엘렉트라’, ‘장미의 기사’가 근대에 있어 가장 커다란 존재이다.
현대 오페라의 정신은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로 시작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라벨의 ‘스페인의 때’나 뒤카스의 ‘아리아느와 푸른 수염’은 프랑스 오페라의 레퍼터리가 되었다.
독일에서는 반낭만주의 아래 일어난 여러 가지 경향의 음악이 많은 오페라 작품을 창조해 냈는데, 그 중에서는 베르크의 ‘보쩨크’와 힌데미트의 ‘화가 마티스’가 유명하다. 독일의 에크, 오르프, 헨쩨, 오스트리아의 아이넴, 스위스의 주터마이스터(H. Sutermeister, 1910∼ )가 오페라 작가로 주목된다.
러시아에는 프로코피에프의 ‘3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이나 정치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쇼스타코비치의 ‘무첸스크의 마크베스 부인’이 있으며, 미국에 있던 스트라빈스키도 오페라를 썼다. 영국에는 브리튼의 ‘피터 그라임즈’이 유수한 현대 오페라 작가로 주목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거시윈의 ‘포기와 베스’ 이후 많은 오페라가 작곡되었는데, 현재는 이탈리아 태생의 장 카를로 메놋티의 ‘도둑과 노처녀’, ‘영사’가 무대 효과가 높은 오페라를 쓰고 있다.
4. 팝페라 [ Popera ]
대중 음악을 지칭하는 팝(pop)과 고전 음악의 대표적인 형식인 오페라(opera)의 합성어.
음악 전문가들은 재즈와 팝, 팝과 고전 음악, 록밴드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등 이전에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음악 장르가 공통점을 찾아 새로운 음악 형식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퓨전 음악'의 흐름이 2000년대 들어서는 '팝페라'를 태통시켰다는 분석을 하고 있다.
이 용어는 1997년 미국의 워싱턴포스트가 음악 리뷰란을 통해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기존 오페라 곡을 팝가수가 자신의 음역에 맞게 편곡해 불렀는데 요즘에는 팝과 오페라의 장점만을 응축시켜 새로운 제 3의 음악을 시도하고 있다.
유럽 음악계에서는 이탈리아 시에나 태생으로 피렌체 음악원에서 성악을 공부한 후 오페라 무대에서 경력을 쌓았던 테너 알렉산드로 사피나가 프로듀서 겸 작곡가 로마노 무수마라의 도움을 받아 소프트 팝을 가미한 오페라풍의 칸초네앨범 '사피나'를 2000년에 발매했는데 음반 시장에서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어내면서 '팝페라'의 선두 주자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리스 국민 성악가로 칭송을 받고 있는 마리오 프라굴리스, 시각 장애를 딛고 테너 가수로 독보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안드레아 보첼리나, 선반공 출신 영국 가수 러셀 왓슨이 모두 팝페라의 보급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가수들이다.
유럽의 음악사가들은 '현대에 들어와서 언급되고 있는 팝페라는 '19세기 이탈리아에서 성악가들이 대중들의 구미에 맞게 오페라 아리아를 불러 주었던 것에서 유래가 됐다'고 밝히면서 '당시 3~4분짜리 오페라 아리아는 행인들이 휘파람으로 불고 다닐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현재 오페라와 뮤지컬, 팝 무대를 넘나들면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팝페라 가수들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 마이크를 쓰는 동시에 피아노, 바이올린 등 어쿠스틱 악기로 편성된 오케스트라의 협연 지원을 받고 있다.
5. 뮤지컬[ Musicals ]
뮤지컬 코메디 또는 뮤지컬 플레이의 약칭이다.
뮤지컬은 19세기 미국에서 탄생하였는데, 그 근원은 유럽의 대중연극, 오페라· 오페레타· 발라드 오페라(俗謠歌劇) 등이다. 1728년 이와 형식이 비슷한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가 런던에서 상연되었는데, G.에드워드가 제작한 '거리에서'(1892년 초연)를 첫 뮤지컬로 본다.
미국은 최초의 뮤지컬 코메디를 탄생시켰다. 19세기 미국에서 성행한 벌레스크(해학적인) 희극에다, 유럽에서 발달한 오페레타를 조화시킨 것이다. 작곡가 제롬 칸, 대본에 리처드 로저스, 작사자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 등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미국인의 꿈과 향수를 제재로, 미국의 민요와 흑인음악의 멜로디, 그리고 리듬을 적극 수용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 일환으로 미시시피강(江)을 내왕하는 쇼보트를 무대로 인생의 애환을 그렸는데, 바로 '쇼보트'(1927)다. 이것은 오늘의 뮤지컬의 기초를 다졌다.
G.거슈윈은 G.S.카프만과 리스킨드의 대본으로 '나는 너를 위해 노래한다'(1931)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문학적 가치가 높은 뮤지컬을 시도하였다. 거슈윈은 만년에 흑인생활을 리얼하게 그린 '포기와 베스'(1935)를 만들었는데, 경쾌한 리듬과 나른한 멜로디를 특징으로 하는 노래를 썼다. 작사와 작곡의 귀재(鬼才) 콜 포터는 복잡한 각운(脚韻)과 도시적인 기지가 특징이며, 뮤지컬 작자로는 세련된 인물이다. '키스 미 케이트'(1948) 등이 그 대표작이다.
로저스는 해머슈타인 2세와 손잡고 '오클라호마!'(1943)를 비롯, '회전목마'(1945), '남태평양'(1949), '왕과 나'(1951), '사운드 오브 뮤직'(1959) 등을 발표하였다. 이 무렵 '마이 페어 레이디'(1956)의 대본·작사자 A.J. 러너와 작곡자 F.로가 등장한다. 또 인종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57), 유대민족의 애환을 그린 '지붕 위의 바이올린'(1964), '라만차의 사나이'(1965), 베트남전쟁을 반영하여 히피의 생태를 그린 록 뮤지컬 '헤어'(1967)가 있다.
1970년대에 들어와 줄거리다운 줄거리가 없는 '코러스 라인'(1975), 로큰롤에 의한 '그리스' 등이 뮤지컬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으며,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1970), '에비타'(1978), '캐츠'(1981),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1984), '오페라의 유령'(1986) 등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1) 한국의 뮤지컬
한국의 뮤지컬은 1950년대 말 드라마센터에서 막을 연 '포기와 베스'가 첫 시도라고 볼 수 있지만 컷이 많고 음악이 제대로 살지 못하여 본격적인 뮤지컬이라 할 수 없었다. . 그 후 1961년 예그린악단이 설립되어 '삼천만의 향연'(1962)과 '흥부와 놀부'(1963)를 공연함으로써 일반에게 알려졌고, 1966년 본격적인 뮤지컬이라 할 수 있는 '살짜기 옵서예'를 공연,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 후 '꽃님이 꽃님이 꽃님이'(1967), '바다여 말하라'(1971) 등을 공연하다가 명칭이 여러 번 바뀌고, 또 많은 극단들이 창작 뮤지컬 '시집가는 날'(1974) 등을 공연하였다.
그 후 많은 극단들이 '빠담,빠담,빠담'(1979), '피터 팬'(1979),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1980), '사운드 오브 뮤직'(1981), '캐츠'(1990), '레미제라블'(1993) 등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수입· 공연하였다. 그 중 1983년의 '아가씨와 건달들'은 1991년까지 9년 동안 반복 재공연 되기도 하였다. 창작 뮤지컬로는 '번데기', '마지막춤은 나와 함께', '명성황후', '쇼코미디' 등이 있으며, 소형 뮤지컬로 '넌센스', '지하철 1호선' 등이 장기 공연을 하고 있다
2) 뮤지컬과 영화
최초의 토키 영화인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1927)는 할리우드에 첫선을 보인 뮤지컬이라는 기록을 동시에 수립한 매우 뜻 깊은 작품이다.
당시 이 영화는 사운드 혁명을 일으킨 것에 평가가 집중되는 바람에 뮤지컬의 태동이란 점은 소홀히 됐다. 이런 이유로 <재즈 싱어> 이후 각 영화사들이 자사 작품에 대해 '올 토킹, 올 싱잉, 올 댄싱(All Talking, All Singing, All Dancing)'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해도 관객들은 새로운 음향기술에만 관심을 보냈다. 이런 결과로 몇 편의 뮤지컬은 평균 이하의 관심을 받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뮤지컬이 '싱잉 뮤지컬(Singing Musical)'과 '댄싱 뮤지컬(Dancing Musical)'로 분화되면서 서서히 그 존재를 과시하기 시작한다.
초창기에는 댄서의 부족으로 인해 노래를 강조한 뮤지컬이 강세를 나타냈는데 그중 에른스트 루비치(Ernst Lubitsch) 감독의 <러브 퍼레이드 The Love Parade>(1929) <몬테 카를로 Monte Carlo>(1930) <메리 위도우 The Merry Widow>(1934), 루벤 마물리언 감독의 <러브 미 투나잇 Love Me Tonight>(1932), 넬슨 에디, 자넷 맥도널드 콤비 주연의 <너티 마리에타 Naughty Marietta>(1935), <로즈 마리 Rose Marie> 등이 뮤지컬의 토대를 탄탄하게 해 준 작품들이었다.
코미디언들도 노래와 춤을 곁들여 '노래하는 뮤지컬(Singing Musicals)'의 한 부류로 평가됐고 에디 칸터, 막스 브러더스, 애보트와 코스텔로, 마틴과 루이스, 대니 케이 등의 영화들은 뮤지컬의 인식을 넓혀주는 데 한몫 했다.
아울러 서부극 스타 진 어트리(Gene Autry)와 로이 로저스(Roy Rogers)도 1930~1940년대 노래하는 카우보이의 이미지를 펼쳐 주어 '노래하는 뮤지컬' 스타임을 과시했다. 또한 이때의 힐빌리 음악(Hillbilly Music)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 이후 로커빌리 (Rockabilly)와 로큰롤 뮤지컬로 계승된다.
특히 엘비스는 33편의 영화에 출연해 춤과 노래를 겸비한 뮤지컬 스타로 주가를 높였고 총 1억5천만 달러의 영화 흥행수익을 기록했다. 이후 뮤지컬 스타들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가 다수 제작됐는데 <양키 두들 댄디 Yankee Doodle Dandy>(1942), <워즈 앤 뮤직 Words And Music>(1948), <위대한 카루소 The Great Caruso>(1951) <헬렌 모건 스토리 The Helen Morgan Story>(1957) <라 밤바 La Bamba>(1987) 등이 있다.
댄스 뮤지컬은 <할리우드 레뷔 The Hollywood Revue of 1929>(1929) <파라마운트 온 퍼레이드 Paramount on Parade>(1930) 등으로 스타트를 끊은 뒤 <골드 디거 1933 Gold Diggers of 1933>(1933) 그리고 <42번가 42nd Street>(1933) 등이 활기 넘치고 시원한 화면을 보여 주었다. 이 가운데 버클리 감독의 <골드 디거스>는 매년 시리즈로 선보일 정도로 호응을 받아 제작사인 워너 브러더스가 <재즈 싱어> 이후 뮤지컬 전문영화사가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후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의 등장으로 뮤지컬은 기고만장한 인기전선을 형성하는데 <즐거운 이혼 The Gay Divorcee>(1934) <탑 햇 Top Hat>(1935) <스윙 타임 Swing Time>(1936) 등은 댄스영화를 친숙하게 만들어 준 대표작이 됐다.
이 영화의 주역인 프레드 아스테어는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근 30여년 동안 맹활약, 할리우드의 최고 댄스 뮤지컬 스타로 영화발전에 큰 공헌을 세운다. 이처럼 뮤지컬이 다양한 반응을 불러 모으며 호응을 얻자 각 영화사들은 치열하게 이 장르의 몫을 차지하기 위해 전력투구를 했고 알리스 페이, 베티 그레이블, 셜리 템플, 디아나 더빈, 딕 파월, 빙 크로스비 등의 대형 뮤지컬 스타가 이런 과열된 분위기에서 또 다른 스타로 부각되었다.
MGM은 이 같은 이전투구 상황 속에서 <오즈의 마법사>(1939) <베이비 인 암스 Babes In Arms>(1939) 등의 블록버스터를 탄생시키며 여타 영화사의 추적을 따돌렸다.
MGM 스타 중의 한 명인 진 켈리는 흡사 공중에서 외줄을 타는 듯한 아슬아슬한 춤 솜씨를 과시했고 <해적 The Pirate> <온 더 타운 On The Town>(1949) <사랑은 비를 타고 Singin In The Rain>(1952) 등에서는 프레드 아스테어와 완벽한 팀웍을 보여 주었다. 이후 주디 갈란드, 미키 루니, 마리오 란자, 시드 차리시 등은 작곡가 겸 프로듀서인 아서 프리드(Arthur Freed)의 협조로 주옥같은 뮤지컬을 다수 발표했다.
이외 빈센트 미넬리, 스탠리 도넨 감독도 프리드와 호흡을 맞춰 <미트 미 인 세인트루이스 Meet Me In St.Louis>(1944) <쇼 보트 Show Boat>(1951) 등을 흥행가에 선보인다.
1950년대에는 TV라는 강적에 대항하기 위해 뮤지컬에 서사적 스토리를 가미한 대형 뮤지컬이 속속 공개됐다. 그중 <7인의 신부 Seven Brides For Seven Brothers>(1954) <오클라호마 Oklahoma>(1955)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 등은 이런 위급한 상황을 극복시켜준 대표적 공신 뮤지컬이었다. 이들 작품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서로 영역을 구분하려 했던 노래와 춤을 함께 결합한 뮤지컬이 속속 제작됐는데 <사운드 오브 뮤직>(1965) <화니 걸 Funny Girl>(1968) <닥터 두리틀 Doctor Dolittle>(1967) <스타 Star>(1968) 등은 이 같은 영역을 허문 대표적 작품들이다.
이후 봅 포시 감독은 <부드러운 자비 Sweet Charity>(1968) <카바레 Cabaret>(1972) <올 댓 재즈 All That Jazz>(1979) 등으로 뮤지컬의 영광을 재현시켰고 존 트래볼타 주연의 <토요일 밤의 열기 Saturday Night Fever>(1977)는 댄스 뮤지컬의 도래를 재촉해 <플래시댄스>(1983) <풋루즈 Foot- loose>(1984) <더티 댄싱>(1987) 등의 후속작이 탄생되는 자극제를 제공한다.
오늘날에 와서는 막대한 시간과 다양한 재능이 요구되는 관계로 유명 연기인들이 이 장르 출연을 꺼리고 있다. 이런 관계로 1970년대 후반부터는 연출자 개인의 성향이 강조된 뮤지컬이 제작되고 있는데 이것은 허버트 로스 감독의 <터닝 포인트 The Turning Point>(1977) <화니 레이디 Funny Lady>(1975) <니진스키 Nijinsky>(1980) <댄서 Dancer>(1987),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감독, 주연의 <옌틀 Yentl>(1983) 등에서 이런 추세를 엿볼 수 있다. 아울러 <탭 Tab>(1989)처럼 소규모 형식으로 전통적인 뮤지컬 장르의 존재를 이어가려는 영화인들의 꾸준한 몸짓이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