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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펠레폰네소스 전쟁
1. 고대 그리스
그리스와 로마는 인류 문명의 기초가 되는 중심적인 국가로서, 그리스와 로마가 만든 정치제도와 법 제도, 사회 시스템 등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로마의 문명은 그리스가 기초가 되었고, 그리스의 문명은 크레타와 페니키아로부터 전수 받았으며, 크레타와 페니키아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문명을 이어 받았다. 즉,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을 계승 발전시킨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실제로 그리스 신화는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와 이집트의 신화를 혼합해 놓은 듯한 면을 보인다.그리스는 다니엘이 본 우상 중 청동으로 된 넓적다리에 해당하고, 로마는 철로 된 다리에 해당한다.
BC 700년대 미케네 문명의 후임은 산맥으로 분단된 평야 마다 언덕 위에 도시국가를 세웠는데 오리엔트의 국가와는 달리 자유로운 시민들이 공동 집합체로서 시민들은 누구든지 ‘아크로폴리스’라는 ‘아고라광장’에 모여 나라 일을 의논 하였다. 당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식민지 활동을 펼쳤으나 정치적인 대제국의 건설은 이뤄지지 않았고, 각 폴리스(도시국가)는 혈연관계를 중시하여 이방인을 시민으로 받지 않았으나 도시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열렬했으며, 때에 따라서 인근 폴리스와 종교적 군사적인 동맹을 맺었다.
. 올림피아 제전
그리스인들은 각 도시국가로 나뉘어 살아도 같은 언어와 종교로 한민족이라 생각하여 여러 곳의 제우스 신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마다 운동경기를 하였는데, 그중에 남부 필레폰네소스 반도의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에서 4년에 한 번씩 갖는 경기가 가장 성대했다. 정확한 시작 시기는 모르며 BC 776년 가장 화려했다는 기록에 의해, 이 때를 시작점으로 보고 있다.
참가자격은 그리스인만 가능하며, 경기는 5종목으로 달리기, 경주, 투창, 원반, 씨름으로 나뉘며, 이를 다시 여러 종류로 나뉘어서, 달리기엔 장거리와 단거리, 씨름엔 내던지기와 잡아 누르기 권투가 있고, 경주엔 경마, 이륜전차, 사륜전차가 있다.
우승한 자에겐 부모가 살아있는 아이가 금으로 만든 칼로 자른 월계수로 만든 관을 제우스 신전에 두었다가 씌워주는 것을 받고 특별잔치에 참석 후, 우승자가 각 도시국가로 귀환하면 크게 환영했으며, 그리스인은 이것을 평생의 영광으로 여겼다.
경기 외에도 시 낭송과 연설을 하여 우승한자에겐 상패가 주어지는 종합문화행사였다. 이후 그리스가 로마제국에 멸망한 후에도 1170년 테오도시오스 황제가 이교도의 종교 행사로 간주하여 금지할 때 까지 지속되었다.
. 스파르타의 군국주의
스파르타는 도리아인이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침입하여 세운 국가로서, 정복자인 시민, 노예가 되어버린 원주민인 헬로트, 반 자유인인 페리오이코의 3계급으로 되어있으며, 정치는 시민만이 참여하는 귀족정치로, 형식상 2명의 왕이 있고 실제로 5명의 감독관이 정권을 잡았다.
입법자인 라코르고스(스파르타 시민 모임)가 정한 법률에 따라서 시민의 행동, 교육, 결혼에 국가가 일일이 간섭하여 절대 복종케 했으며, 허약하거나 장애아는 동굴이나 산속에 버리고 7세가 된 건강한 아이는 부모를 떠나 공동장소에서 글과 음악 및 오랫동안 먹지 않고 마시지 않거나 심한 추위와 더위에 견디기 등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정신교육을 시켰다.
어른들의 식탁에서 음식을 훔쳐 먹게 하고 들켜도 절대 자백하지 않게 했으며, 여자도 마찬가지의 강한 신체 훈련을 시켜 건강한 아이를 낳게 했는데, 30세가 되면 남자는 관리장교가 되었다.
그들은 음식도 적게 먹고 검소하게 살면서 항상 무기를 지녔고, 국가의 명령 없이 시외로 나가면 탈주자로 사형에 처했다.
. 아테네의 민주정치
그리스 남동부 아티카 반도에 BC 600년대에 왕이 없어지고 귀족들이 국가의 주요관직을 차지하여 귀족 중에 9명의 최고행정관인 아르콘을 뽑아서 나라를 통치하고, 임기 후엔 사법정책을 세우는 아레오파고스라는 회의에 나가고 사법정책을 세웠다.
아레오파고스 외에 민회가 있었으나 중요 권한이 없었다.
아테네는 식민지 무역으로 상공업이 발달했고, 소아시아의 리디아 처럼 화폐도 사용하여 평민 중에도 부자가 나타났다.
BC 621년 귀족들에게 구전되어오던 법률을 드라콘이 성문화로 제정하여 공정하게 하려고 했지만, 귀족과 평민 간에 대립되어 민중의 지도자가 폭력으로 귀족정치를 무너뜨리고 독재 정권을 세워 참주가 되었는데, 이를 막기 위해 솔론이 농민의 빚을 없애고 재산에 따라 정치권리를 나눠주는 개혁을 시도했지만, 농민과 귀족 양측의 반발로 실패했다.
그 후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참주가 귀족을 누르고 국가제전인 아테나이아와 디오니시아를 통해 범시민적 단결을 꾀하고, 농민을 지원하고 흑해연안으로 나가는 상공업을 장려하여 번영케 했으나 귀족은 반대했다.
BC 500년대 말 정치적으로 크게 자란 민중은 클레이스테네스가 이끄는 대개혁으로 확고한 민주정치를 하게 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혈연으로 맺어진 10개의 시민단을 만들어서 귀족들의 세력기반을 약하게 하고, 시민들의 총회인 민회가 최종결정권을 갖게 하고, 여기서 뽑힌 대표로 평의회를 만들어 정치에 참여케 해서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이뤘으나, 외국인과 노예는 제외시켰다.
2.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 제국은 BC 500년대 후반 첫 번째 왕인 고레스(키루스)가 바벨론, 리디아, 페니키아와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다스려 아케메네스왕조를 이루어, 세 번째 왕 다리우스1세는 더 넓은 세계를 정복하여 인더스 강에 이르렀다. 또 스키티아인의 본거지인 러시아 남부를 정복키 위해 다뉴브강을 건넜지만 기병의 스키티아군에 패하여, 다리우스1세는 그의 군대를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에 남기고 자신은 수산으로 왔는데, 스키티아에서 페르시아의 실패를 보게 된 소아시아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그리스 본토는 이에 동조를 하게 되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세력에 눌려 무역활동에 제한을 받고 있었는데, 그 때 그리스의 식민도시였던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진압되자 그리스에 응원군을 요청하여 스파르타는 불응했지만 아테네는 군함 20척을 보내 주었는데, 이것을 구실로 삼아 BC 492년 다리우스 1세의 사위 마르도니우스를 총사령관으로 육지와 바다를 통해 그리스 본토를 공격하여 트라키아 해안을 점령했다.
그러나 폭풍으로 300척의 함대가 부서지고 1만 명의 군사가 죽음으로 원정이 일시 중지 되었다가 2년 뒤 다리우스1세는 2차 원정군을 직접 이끌고 에레트리아를 점령 후 아테네를 공격키 위해 밀티아데스 평원에 상륙했다.
.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
페르시아 군대를 맞이한 아테네는 처음에 항복하자는 쪽과 싸우자는 의견이 나뉘어졌으나, 정치가이며 장군인 테미스토클레스의 강력한 주장으로 싸우는 쪽으로 결정한 후, 페르시아의 2만 군대에 아테네 주민의 총동원령으로 이뤄진 1만의 군대가 대치하였다.
아테네의 밀티아네스는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의 배수가 되는 페르시아 기병과 싸우면 불리함을 알고, 마라톤에서 아테네로 통하는 골짜기에 진을 치고 적은 군사를 보내어 페르시아군을 건드리자, 아테네 군을 얕잡아 본 페르시아군이 뒤 쫒아 골짜기에 이를 때에 뒤돌아서 부딪혀, 아테네의 전군이 양쪽에서 달려들어 페르시아군 6400명이 전사하고 아테네는 고작 192명이 전사하는 승리를 거뒀다.
이때 승전보를 아테네 시민에게 전하려고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간 병사가 아테네의 아고라 광장에서 초조하게 전쟁소식을 기다리던 시민들에게 ‘우리가 이겼다’는 한마디 말만하고 죽었는데, 이것을 기념하여 근대의 마라톤이 생겼다고 한다.
마라톤 전투에서 패한 페르시아군은 배를 타고 수니온 곳을 돌아서 다시 공격하려 했지만, 아테네군의 철통같은 방어태세를 보고 뱃머리를 돌렸다. 또한 살라미스 해안에서도 페르시아군이 아테네에게 패함으로 다리우스1세는 물러갔으나 육군은 완전히 물러가지 않고, 그리스 동북부의 뎃살리아 지방에 머물렀다.
* 마라톤의 유래 : 마라톤의 아테네군이 격전 끝에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후 이 기쁜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라는 병사가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려서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기뻐하라, 우리가 정복했다.”는 한마디를 전하고 쓰러져 죽었는데, 이때 달린 거리가 42.195km라서 이를 기리기 위해 마라톤 거리로 정해졌다고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전설에 불과하다.
마라톤 전투를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인 헤로도토스의 ‘역사’ 책은 물론, 플루타르크가 기록한 마라톤 전투에도 승전보를 전달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이 전설은 BC 2세기 때의 작가 루키아노스에 의해 처음 언급됐는데, 아테네까지 달려간 병사가 '페이디피데스'라는 것도 의문이다.
페이디피데스는 원래 페르시아군이 마라톤 평원 근처 해안에 상륙하자, 아테네군 사령부가 241.4km 떨어진 스파르타에 긴급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보낸 병사의 이름이다. 그는 꼬박 이틀 동안 달려 원병을 요청했지만 스파르타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틀 동안 241.4km를 달려도 끄떡없던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40km를 달린 뒤 쓰러졌다는 것도 의문인 것이다.
일부는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 평원에서 스파르타까지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달렸던 내용이 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아무튼 아테네에서 열린 제 1회 근대 올림픽에서는 이 마라톤 전쟁의 이야기를 스포츠로 승화시켜 마라톤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마라톤 경기의 첫 우승자는 그리스의 목동 스피리돈 루이스(Spiridon Louis)였다. 국왕은 루이스에게 금메달과 우승자의 증서, 그리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루이스는 물을 나르는 데 필요한 좀 더 좋은 마차와 힘센 말만 받겠다고 했을 뿐이다. 한 초콜릿 공장에서는 그에게 평생 무료로 초콜릿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으며, 결혼하자는 청혼도 많이 받았다. 그 만큼 당시 마라톤 우승자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마라톤 거리가 현재의 42.195km로 결정된 과정을 보면, 우선 1908년에 열린 제 4회 런던 올림픽에서부터다. 처음에는 출발 지점을 주경기장으로 해서 총 42km를 달리기로 정했지만, 호기심 많은 영국 왕실에서 “마라톤의 출발 모습을 보고 싶으니 출발선을 윈저궁 황실 육아실의 창 아래로 옮겨 달라”고 요청했다. 이로써 195m의 거리가 더 늘어나 42.195km가 되었다.
그러나 1912년 스톡홀롬 올림픽 마라톤 거리는 40.2km였고,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 땐 42.75km나 됐다. 이렇게 올림픽 마라톤 코스 길이는 주최 측의 사정에 따라 달라졌다가 1924년 파리 올림픽 때 ‘1908년 런던 올림픽 때를 기준으로 하자’는 의견이 채택돼, 현재의 42.195m로 확정됐다. 이는 당시 영국이 모든 분야에서 영향력이 가장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 플라타이아이의 전투와 델로스 동맹
마라톤과 살라미스에서 연패한 페르시아는 다리우스1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때에 다시 대군을 이끌고 아테네 북쪽의 플라타이아이 평원에 진을 쳤으며, 그리스는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를 총사령관으로한 3만 명의 연합군이 기병대와 궁수대의 페르시아군에 긴 창과 방패의 중무장한 보병과 가벼운 무장을 한 보병이 양쪽에서 지원하여 맞서 싸워 물리쳤다. 또한 이오니아 해안의 마칼레 해전에서도 승리하여 20년간 3회에 걸친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언제 다시 침략할지 몰라서 그리스의 폴리스 들은 보호할 조직의 필요성을 느껴 플라타이아이 전투에 승리를 거둔 후 행동이 거만하고 성품이 포악한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 대신 아테네에 연합함대를 부탁하였다.
아테네의 아리스티데스는 BC 478년 에게해 일대의 도시국가와 동맹을 결성하여, 가입 국가들이 담당하는 공납금을 에게해 중앙 델로스 섬의 아폴로 신전에 보관하고 동맹회의 등을 여기서 개최하여, 이 동맹을 ‘델로스 동맹’이라 하였다.
. 테미스토클레스-키몬-페리클레스의 아테네 전성기
페르시아의 첫 침략에서부터 전쟁을 주장했던 아테네의 전쟁영웅 테미스토클레스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성벽건축으로 아테네 시민에게 중노동에 시달리게 하여 민회에서 페르시아와 내통한다는 죄목으로 체포를 결의하여 추방 명령을 받았다. 이에 페르시아로 도망간 테미스토클레스는 거기서 후한 대접을 받았지만 3년 뒤에 자살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후임으로 마라톤 전투의 지휘자로 아테네의 영웅이 된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은 아테네와 대립한 스파르타에 호감을 가져, 스파르타의 최하층민인 헬로트가 지진이 일어난 혼란 중에 일으킨 반란 진압에 지원군을 보내어 진압했다. 그런데 다른 동맹군은 여기에 동조하지 않았고, 정작 스파르타 시민들도 아테네군이 빨리 떠나주길 바라므로 아테네에 돌아온 후 테미스토클레스 처럼 추방당했다.
보수파인 키몬이 스파르타 원정을 간 사이에 페리클레스는 민주파 수뇌인 에피알데스와 함께 귀족을 제압하고 에피알데스가 암살되자 민주파 최고지도자가 되어 안전을 핑계로 델로스 동맹의 금고를 아테네로 옮겼다.
하지만 페르시아 육군은 이오니아 도시들을 차지하되 해군은 에게해를 침범하지 않는 화해조약을 하여 델로스 동맹이 필요 없게 되었다. 그래도 동맹국의 공납금을 계속 거둬들이자, 국내의 보수파가 비난했지만 무시하였고, 반대하는 다른 도시국가에는 무력으로 제압하여 풍부한 재물을 모아서 파르테논신전 건립 등 아테네의 전성기를 구가하여, 아테네의 민주정치가 주변의 폴리스에 전파되고 학자들이 아테네로 모여들어 아테네 문화를 꽃피웠다.
3. 펠로폰네소스 전쟁
. 스파르타, 테베로 이어지는 권력 이동
델로스 동맹으로 강국이 된 아테네의 민주정치와 예전부터 강국이면서 군국주의인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 후에 아테네의 지배를 받던 코린토스가 스파르타에 원조를 청하므로 전쟁에 돌입하였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지휘로 성안에서 농성하였으나 BC 430년 페스트로 인구의 3/4이 죽고 페리클레스도 죽자, 강화를 하자는 귀족파와 전쟁하자는 민주파의 다툼이 있다가 민주파의 지도자인 소크라테스의 제자 알키비아데스가 정권을 잡으면서 전쟁을 분명히 하고,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으려는 시라쿠사를 3년간 공격했으나 실패하여 쫒겨나, 스파르타에 망명하면서 이적행위로 아테네의 식량 보급로인 데켈레아를 점령케 했다.
이후 아테네의 동맹국이 떨어져 나가고 페르시아는 스파르타 해군에게 자금을 보내자, 아테네는 대사면령을 내려서 알키비아데스 등이 돌아와 몇 차례 해전에서 승리했으나 노티움 해전에서 패하자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를 떠나 버렸다.
아테네는 배와 시민을 총동원하여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스파르타를 이겼으나 폭풍우를 만나 대부분의 군함과 병사를 잃고 지휘관은 책임을 물어 사형에 처해졌다.
해전에서 진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강화조약을 맺자고 했으나 거절당하여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가 아테네 해군을 격파하고 육군도 아테네를 점령하여 27년의 전쟁이 끝나고,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은 12척의 배만 남기고 스파르타가 세운 30인의 참주정에 지배를 받고 적정은 대량 살육 당했다.
그 뒤 BC 402년 트라시블루스의 지도로 잠시 민주정치가 되 살아났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지배자가 되어 페르시아의 혼란기에 공격을 감행했으나, 페르시아가 스파르타에 압박받는 해안도시에 뇌물을 주어 코린토스 동맹을 맺게 하여 대항하므로 BC 387년 스파르타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를 페르시아에 넘기기로 하고, 코린토스 동맹국과의 사이를 조정하는 페르시아와의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그 뒤 스파르타의 강요로 귀족정치를 하던 테베는 아테네의 원조를 받아 스파르타와 전쟁하여 이겼고, 전투에서도 강한 부대를 오른 쪽에 두고 적의 왼쪽을 공격하던 진법을 버리고 적의 왼쪽을 타파하는 사선진을 개발하고 병력도 기병을 훈련시켜 보병을 보조하게 했다.
테베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쳐들어가서 스파르타군을 크게 이겼으나 이때 지휘자 에파미논다스가 죽었다. 이 일 후에 그리스에서 북방 오랑케로 여기는 마케도니아의 세력이 출현했다.
4. 그리스의 신화와 사회문화
그리스 인들은 신을 죽지만 않을 뿐 미워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똑같이 보았다.
하늘을 다스리는 제우스를 중심으로 각기 다른 일과 능력을 갖고 있으며, 사회적 윤리적 문제로 신들의 뜻을 묻는 신탁이 행해져 신탁에 따라서 결정했다.
그리스 인들은 지구가 편평하고 둥근 원반으로 그 가운데 그리스가 있고, 그리스의 중심에 신들이 사는 올림푸스산과 델포이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둥근 땅은 바다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데 그들은 지중해와 흑해 밖에는 몰랐다.
북쪽 끝에는 히페르보레이오스라는 행복한 인종이 살며 이곳은 절대로 갈 수 없는 곳으로, 그곳에 있는 동굴에서 북풍이 불어오며, 남쪽에도 행복한 사람이 있어서 신들이 그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하여 잔치를 베풀어 주며, 서쪽 끝에는 ‘극락의 뜰’, ‘복 받은 자의 섬’이 있어서 그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산다고 생각했다.
또 지중해 서쪽엔 괴물과 요술쟁이가 살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신으로 생각하고 해가 뜨는 것은 아폴론 신이 두 바퀴의 황금 마차를 타고 하늘을 달리는 것으로, 폭풍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화를 내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 신화는 로마로 옮겨가 로마는 자기들의 신화를 버리고 그리스의 것에 이야기를 덧붙이고 이름을 로마식으로 고쳐 자기 것으로 하여, 그리스 신화를 그리스·로마 신화라고 하게 되었다.
. 올림푸스의 12신과 신들의 생활
올림푸스 12신은 우두머리인 제우스, 그의 아내 헤라, 포세이돈, 아테네,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프로디테, 헤파이스토스, 아레스, 헤르메스, 데메테르, 헤스티아이다.
제우스는 올림푸스 산꼭대기에서 적이나 나쁜 사람에게 번개를 던지며, 헤라는 여신들의 우두머리로서 결혼과 가정생활의 수호신이다.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포세이돈은 제우스의 동생으로 바다, 강, 샘을 다스리는 신으로 황금 갈기의 말을 타고 바다를 건너며 세 갈래의 창으로 바다와 육지를 들어 올려 지진을 일으킨다.
아테네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무장을 하고 태어나 사람에게 실을 잦고 베 짜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지혜, 전쟁, 학예의 신이다.
아폴론은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 태어나 시, 음악, 의술, 목촉을 다스리는 태양신으로 그의 예언은 델피의 신탁으로 받들어졌다.
아르테미스는 제우스의 딸로서 들짐승과 가축을 보호하며 말과 사냥의 여신으로 여성을 보호하는 처녀신이다.
아프로디테는 모든 여신 중에 가장 아름다운 미의 여신으로 많은 예술작품에 쓰였으며, 헤파이스토스는 아프로디테의 남편으로 얼굴이 못생긴 절름발이로 불과 대장장이의 신이다.
아레스는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서 태어난 싸움의 신으로 군인의 수호신이다.
헤르메스는 날개달린 모자와 뱀이 감긴 짧은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목축, 상업, 여행, 경기, 행운, 음악, 웅변의 신이며, 데메테르는 대지의 신으로 곡물의 수확을 다스린다.
헤스티아는 부뚜막과 아궁이를 맡아서 가정생활을 다스리는 처녀신이다.
그 외에도 많은 신들이 있으며 신들은 올림푸스의 산꼭대기에 궁전을 짖고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 그리스의 문학과 예술
호메로스가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아킬레스의 분노와 트로이의 멸망을 그린 ‘일리아드’ 와 트로이 원정에 성공한 오디세우스와 그의 아내 페넬로페의 이야기인 ‘오딧세이’는 서양문학의 으뜸이다.
또다른 서사시인 헤시오도스는 ‘일과 달력’을 서정시인인 사포, 아나크레온, 핀다로스의 사랑과 증오를 주제로 한 작품이 있고, 아이스킬루스, 비극시인인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신과 인간을 소재로 사실적이고 우아한 조각으로 생동감 넘치는 라오콘 군상과 우아한 파르테논 신전이 있으며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 소아시아를 여행한 후 저서로 ‘역사’ 9권을 썼다.
. 그리스의 철학
소아시아의 이오니아는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아티카로 피했다가 돌아와서 소아시아 연안 일대에 섬들에 자리 잡은 사람으로 여기서 철학이 시작 되었는데 그 중에 밀레투스는 학문과 예술이 번성하여 이오니아 학파 또는 밀레투스 학파로 불리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등의 철학자가 나왔다.
이들은 서양 최초로 우주의 문제를 이성으로 생각해 보려하였다.
탈레스는 이집트를 여행하며 기하학을 배워 두 관측 지점의 거리로 바다에 떠있는 배의 거리나 피라미드의 높이를 계산하는 법을 그리스에 전수하면서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했다.
BC 400년경 그리스 신화에서 벗어나 자연적인 현상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려는 자연철학자와 인간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철학사상가들이 나타났다.
. 아테네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BC 400년대에 아테네에는 자유인으로 필요한 교양, 학예, 변론술을 가르치던 지자, 현인이란 뜻의 ‘소피스트’라는 철학자가 많았는데, 그 중에 고르기아스, 프로타고라스가 있으며 후기에는 변론술을 나쁘게 이용하는 궤변가를 뜻하게 되었다.
. 소크라테스
BC 469년 아테네에서 출생한 소크라테스는 당시 그리스는 100여개의 도시국가가 있었다.
벗겨진 머리, 툭 튀어나온 눈, 넓적코와 늘어진 양 볼에 어릴 적엔 오리처럼 뒤뚱 거리는 걸음으로 그리스에서 산과 들을 다스리는 괴상한 늙은이 신인 실레누스를 빗대어 “실레누스야 어디가니?”하고 아이들이 놀렸지만 ‘사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생각에 골몰했다.
18세 때에 당시 현자로 알려진 아르케라오스에게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자, 평범치 않은 그를 보고 가르치는 대신 말벗이 되어 주겠다고 하여, 25세 까지 아르케오스의 집에 머물렀다가 펠레폰네소스 전투에 참전 후 사람들을 만나 연구하기 시작하여 모든 사람을 빼놓지 않고 만나서 그냥 사귀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문답식으로 대화하면서 그들의 내면에 대하여 알고자 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친구이자 제자인 카이레폰이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을 찾아가 아테네의 현인이 누구냐고 묻자 ‘그 사람은 오직 소크라테스’라고 들었다 하자, 소크라테스는 깜짝 놀라 자기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믿고 있었고, 또한 자기보다 훌륭한 정치인 예술가들이 많은데 신이 그렇게 말한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기뻐하기보다 큰 의문에 싸였다. 소크라테스는 이 의문을 풀어보려고 당시 뛰어나고 유명한 사람들을 찾아가 대화를 하면서, 모든 사람이 자기의 명예와 이익에만 신경을 쓰고 있고 오히려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 더 현명한 것을 보게 되어, 자신을 그들과 비교해 볼 때 다른 점을 알 수가 없어서 자기가 직접 물어보려고 델포이 신전에 찾아갔다.
소크라테스는 델포이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네 자신을 알라’라는 글귀가 쓰여 진 것을 보고 자기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자기가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것이다.
그 후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 못하고 교만과 부패와 명예와 권력과 사치와 허영에 잡혀있는 아테네 인들에게 자신을 알라고 외쳤다.
소크라테스는 51세에 크산티페라는 여자와 결혼했는데, 크산테페의 많은 악담들은 몹시 가난한 살림살이로 자주 바가지를 긁는데서 원래 다소 급한 성격이 더하여 화를 억누르지 못한 것이라고 했으며, 누가 결혼을 해야 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고 묻자, 결혼을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고 대답했다.
그 후로 소크라테스는 못난 사람들은 잘난 척하고, 무식한 사람은 아는 척 하는 걸 보고 호되게 꾸짖고 다녔는데, 특히 존귀한 귀족 청년이나 정치가들에게도 그리하자, 소크라테스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BC 399년 봄에 아테네 법정에 고소하였다.
시인 엘레투스, 정치가 에니투스, 연설가 리우콘이 나서서, 첫째는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믿지 않고 다이모니온이라는 신령적인 것을 만들어 국가의 신을 모독하였고, 둘째는 청년들을 부추겨 헛된 생각을 가르친다는 것으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으로 가는 도종에 신전의 관리인 에우티우프론을 만나 명랑하게 대화를 나누고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이 기회에 시민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고자 하여, “나는 아무 죄도 없으나 나를 시기하고 해치려는 자들에 의해 이 법정에 섰습니다. 그들이 어째서 나를 해치려고 하는지 그 까닭은 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악을 행하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고 말했다.
소크라테스의 진술 후 투표에서 280대 220으로 사형선고가 내려져 당시의 법에 따라 24시간 내에 사형을 집행하였는데, 그때 매년 델로스 섬에 배를 보내어 아폴로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배가 돌아올 때 까지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관례의 시기에 겹쳐서, 마침 그 배가 출발하여 한달 뒤로 사형이 미루어져 그 동안 제자인 플라톤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탈옥하라고 했지만, “그대들의 성의는 고맙지만 탈옥하지 않겠네, 법은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인데 나더러 어찌 그 법을 어기라는 것인가? 나는 법의 결정을 기꺼이 받겠네.” 하고는 71세의 나이로 친구들과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독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 플라톤
BC 427년 아테네의 마지막 왕인 코드로스의 후손인 아리스톤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어렸을 때에 죽었으며, 어릴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19세부터 희곡을 쓰기 시작하여 어느 날 자신이 쓴 작품을 갖고 디오니소스 극장을 가던 중에 맨발에 허름한 옷을 입은 소크라테스가 군중들을 향하여 사람답게 살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야 된다는 열변을 듣고 감동하여, 자신이 쓴 원고를 찢어버리고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배우기로 작정하고, 며칠 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9년간 소크라테스를 따라 다니다가 플라톤의 나이 38세가 되었을 때에 소크라테스가 모함으로 사형을 당하자, 정치에 실망하여 철학만을 하기로 결심했지만, 소크라테스를 죽인 자들이 제자들도 죽이려하자, 아테네를 떠나 메가라로 갔다가 북아프리카의 고대도시 퀴레네에 가서 수학자와 철학자를 만나고, 이어 이탈리아, 이집트, 소아시아를 다니면서 거의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30권의 책을 썼다.
1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플라톤은 쇠약해진 국력을 보고 한탄하다가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가르칠 필요를 느껴 땅을 사서 ‘아카데메이아’라는 오늘날의 대학을 세웠는데, 많은 사람들의 후원으로 수업료를 전혀 받지 않고 철학을 가르치고 자신도 철학을 연구했다.
플라톤은 학생들에게 서로 대화를 통해 생각하고 탐구하여 깨닫게 하는 공부를 하게 했다. 아카데이아는 유명새로 외국에서도 공부하러 왔는데, 그 중엔 18세의 나이로 그리스의 다른 도시에서 유학하여 플라톤의 수제자가 된 아리스토텔레스도 있다.
플라톤은 평생 독신으로 학문에 전념하여 위대한 철학자가 왕이 되어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바램으로 44세에 쓴 ‘국가론’과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한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트’, ‘향연’등이 있으며, BC347년 글을 쓰다가 붓을 쥔 채 80세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