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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지맥이 뻗어가는 산릉에서 단연 빼어난 산이 벽방산(碧芳山)이다. 더불어 통영, 고성, 거제지역에서 해발고도가 제일 높은 산이면서 통영의 주산(主山)이요, 조산(祖山)이라 할 수 있다. 옛 <통영지>에는 ‘산세가 마치 거대한 뱀이 꿈틀거리는 위세를 하였으며, 그 중 한 산맥이 굳세게 옆으로 뻗치다가 곧장 바다 속으로 들어가 터전을 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산을 불가에서는 벽발산(碧鉢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산세가 석가모니의 상좌(제자)인 가섭존자가 공양할 때 쓰는 바리때(그릇)를 들고 미래에 올 미륵부처를 기다리고 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벽방산이 일제강점기에 개명된 이름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성현조에 벽산(碧山)으로, <경상남도여지집성>에는 벽방산(碧芳山)으로 기록돼 있다. 또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중 1594년(갑오년) 6월 28일(을해)의 기록에 ‘… 진무성(陳武晟)이 벽방(碧方)의 망보는 곳을 조사하고 와서는 적선이 없다고 보고했다’는 내용이 있다.
아무튼 이름 그대로 푸르고(碧) 꽃다운(芳) 벽방산의 매력은 장쾌한 조망에 있다. 산이면 산, 바다면 바다, 들이면 들, 섬이면 섬, 이 모두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그러다보니 신년에는 해돋이 명소로, 또 경남의 산악단체들이 시산제 장소로 찾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봄철 산등성이를 분홍색으로 물들이는 진달래와 가을을 수놓는 단풍은 이 산의 또 다른 모습이다.
산행은 일반적으로 안정사를 기준으로 원점회귀가 보편적이다. 이번 산행안내는 안정사와 그에 딸린 산내 암자를 둘러보는 것은 물론이다. 아울러 ‘벽방 8경’도 훑으면서 남해의 그림 같은 풍경을 감상하는 여유를 부려보자. 등로는 시내버스 정류소~안정사~가섭암~의상암~벽방산 정상~안정치~천개산~대당산~386m봉(천년송)~매바위~노산리 광도면사무소로 내려서는 종주코스다.
버스정류장에서 벽방초등학교 담벽을 끼고 안정사로 향한다. 안정사 주차장에 이어 절집으로 들어선다. 안정사(安靜寺) 주변을 싸고 있는 아름드리 적송은 벽방 8경 중 ‘한산무송’으로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를 일컫는다. 이곳 소나무의 빼어남은 조선조 고종황제가 금송패(禁松牌)를 하사하여 보호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또 왕실에 송홧가루를 공급하던 소나무 숲은 송화봉산(松花封山)으로 지정돼 안정사는 그 봉산을 지켜 온 산막 같은 사찰이었다. 안정사는 신라 태종 무열왕 원년(654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한때 14방소 1,000여 명의 승려가 수도한 대사찰이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옛날의 번성했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쓸쓸하고 초라하기만 하다.
절집에서 오른편으로 빠져나와 임도를 따라 10분이면 가섭암에 닿는다. 부처의 제자 가운데 가섭존자를 기려 신라 문무왕 9년(669년) 봉진(奉眞)이 창건했다는 암자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암자는 붕괴 직전에 직면, 다시 해체 복원 불사 중이다. 가섭암의 저녁 종소리는 그 소리가 은은하고 아름다워 벽방 8경 중 ‘가섭모종’이라 했다. 의상암(義湘庵)까지는 20여 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이 암자의 법당 건물은 돌보는 손길이 없는지 많이 퇴색되어 ‘남도제일의 도량(南道第一道場)’이라는 입간판이 무색할 정도다. 칠성각 뒤편으로 5분 정도 오르면 만나는 ‘의상선대’는 의상대사가 천공(天供)을 받으며 좌선했다는 벽방 8경 중 하나.
암자 정문을 나서서 정면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잠시 후 오른편으로 꺾어져 주능선 잘록이(안부)에 닿는다. 이정표(벽방산 0.7km, 의상암 0.2km, 무애암 0.4km)에 평상까지 놓인 이곳 산중 쉼터는 산행 중 여유를 부리기에 안성맞춤이다. 주능선을 따라 15분이면 산마루에 서게 된다. 벽방산은 산 전체가 육산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정상 주변은 거대한 암반으로 형성된 골산(骨山)이다. 낮은 봉우리 두어 굽이를 넘어서면 바윗길. 곧이어 왼편 급경사의 낭떠러지 위로 다소 거친 암릉을 오르면 정상이다.
산정에는 정상 표석과 삼각점(충무 22, 1992 재설), 이정표, 조망안내도가 있다. 사방이 툭 트인 산정에 서면 말 그대로 아무것도 거칠 게 없다. 북쪽으로 옛 소가야의 고성 들판은 황금물결을 이루고, 평야지대 가장자리에 위치한 거류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시계 방향으로 눈을 돌리면 구절산, 앞쪽의 면화산 오른편으로 온통 쪽빛 바다에 연꽃처럼 떠 있는 섬들이 현란하게 다가온다.
가깝게는 진해만에서부터 그 너머 가덕도를 비롯해 오는 12월에 개통 예정인 거가대교의 교각도 보인다. 거제도와 그에 딸린 섬들과 산, 한산도, 멀리 해무에 아스라한 욕지도, 사량도, 남해도에 이르기까지 한려해상국립공원이 품고 있는 유·무인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고성의 자란만 뒤로 삼천포의 와룡산, 향로봉, 수태산, 무이산 등도 조망된다.
이제부터 능선 따라 이어지는 작은 봉우리들을 짧게 오르내려야 하지만 산길은 전반적으로 내려가는 코스라 그다지 힘들지는 않다. 비암(뱀)바위를 지나 내려가면 한퇴골 농원이 표시된 갈림길을 만나고 곧 쉼터가 나온다. 뒤이어 암봉으로 이어진 철계단을 돌아 오르면 384m봉에 닿는다. 돌탑과 이정표(안정재 2.8km, 노산 3.7km)가 서 있는 이 바위 봉우리는 주변 전망이 뛰어나지만 무엇보다도 동쪽으로 20m 지점에 ‘천년송’이라는 소나무가 걸작이다. 거대한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리고 지탱해 온 그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사람 누구인가? 천년송이라! 누가 붙인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켰으면 한다.
남쪽의 가파른 비탈길로 내려서면 안부에 자리한 쉼터다. 정면의 바위봉은 왼편을 에돌아 철계단으로 오른다. 한없이 펼쳐지는 조망에 넋이 나갈 지경이다. 335m봉을 지나 능선 길은 왼편으로 휘어진다. 짧은 오르막을 넘어서면 거대한 바위로 오르는 철계단이 놓여 있다. 이 바위가 매바위다. 등줄기에 밴 땀을 식히고 다시 철계단을 내려서서 나아가면 갈림길(안정재 5.4km, 전두마을 0.8km, 노산 1.2km)이 나타나는 217m봉이다. 어김없이 돌탑과 나무 벤치 6개가 마련돼 있는 마지막 쉼터다.
광도면사무소가 있는 노산리까지는 쉬엄쉬엄 걸어도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능선을 넘나들며 시원하게 불어주는 솔바람이 정겹다. 고도가 낮아지면서 시골집 뒤의 야산 같은 산록에는 드문드문 자리한 묘지가 있다. 능선 끝자락을 벗어나면 등산 안내도가 서있고, 오른편에 가락종친회 건물이 있다. 충혼교를 건너 마을 골목길을 통과하면 광도초등학교와 광도면사무소 사이의 시내버스 정류장이다.
산행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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