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과 어울리는 삶 속으로
동물의 천국 아프리카 케냐 (1997년)
* 여행 팁
국기 :
위치 : 아프리카 동부해안 시차 : -6시간
수도 : 나이로비 언어 : 스와힐리어, 영어
인구 : 39,002,772명 (2010), 전체 순위 33위
면적 : 580,367㎢, 전체 순위 49위 기후 : 건조성기후,사바나기후
종교 : 개신교 45%, 로마가톨릭 33%, 토착종교
종족 : 키쿠유족 22%, 루야족 14%, 루오족
정체 : 중앙집권공화제 의회형태 : 다당제&단원제
국가원수 : 대통령 정부수반 : 대통령
화폐단위 : 케냐실링(Kenya shilling/K Sh)
공식 이름은 케냐 공화국이며, 아프리카 동부 인도양에 면해 있다. 중부 아프리카의 동해안에서 적도에 걸쳐있으며, 북쪽으로는 에티오피아, 수단과 인접하고, 동쪽으로는 소말리아와 인도양을 경계로 하며, 남쪽으로는 탄자니아, 서쪽으로는 우간다와 접하고 있다.
18세기경 마사이족이 케냐에 들어왔고, 19세기에 아랍인과 스와힐리어 사용자들이 상아를 찾아 케냐에 들어왔다. 1890년에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1920년에는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1963년에 독립하여 1년 후 조모 케냐타를 초대 대통령으로 하고 오깅가 오딩가를 부통령으로 하는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케냐타의 영도하에 정치적 안정과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누렸다. 1978년 케냐타가 죽자 이어 다니엘 아라프 모이가 대통령이 되었다.
케냐는 적도에 인접해 있지만 고도가 높기 때문에 국토가 초원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갖가지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커피농사가 발달되어 있다.
아프리카 케냐로
인도 뭄바이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아프리카 대륙으로 향했다. 인도양의 기류가 험해서인지 비행기의 흔들림이 보통 이상이었다. 비행기가 서쪽으로 날아가기 때문에 시간이 제 자리 걸음을 하면서 먼동이 트는 상태가 한참이나 계속되다가 날이 밝아 왔다. 6시간 정도 나르니 아프리카 대륙에 접어들었다. 아프리카 하면 사막을 먼저 연상했는데 아래로 펼쳐지는 광경은 사막이 아닌 초원의 연속이었다. 비행기는 상쾌한 공기를 가르면서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공항에 안착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트랩을 내리니 밖은 우리의 초가을 날씨같이 서늘했다. 케냐의 위치는 위도 상으로는 적도에서 조금 아래에 있다. 이 나라는 대부분의 지역이 2,000m이상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기후는 쾌적하며, 해변과 고산 지대를 제외하고는 년 평균 기온이 21.C라고 했다.
나이로비 시내로 들어오면서 차창에 비쳐진 풍경들은 자연 속에 인공이 간간이 곁들어 있는 소박한 풍경이었다. 넓은 초원에는 동물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었으며, 간간이 공장들이 눈에 띄었다. 시내에 들어서니 현대식 건물들과 전원풍의 주택가가 여유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여장을 풀고 국립박물관으로 갔다. 케냐의 인문 자연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곳이었다. 건물과 시설들이 거대하고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은 실속 있게 꾸며져 있었다. 특히 자연 생태계의 내용이 풍부하게 꾸며져 있어서 케냐의 자연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초원에서 생활하는 다양한 동물 군의 야생생활상과 희귀종을 포함한 새들을 둥지와 함께 전시해 놓았다.
문화 인류 코너에는 조상들의 옛날 생활상을 진솔하게 묘사해 두어서 이 나라의 조상뿐만 아니라 인류의 발달사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 케냐의 정경 ▲ 보마스 오브 케냐 공연 장면
보마스 오브 케냐 (Bomas of Kenya)
‘보마스 오브 케냐’ 는 케냐의 문화센터가 제공하는 케냐 전통예술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케냐의 16개 종족이 참여하는 교육 프로그램인 동시에 전통음악과 춤 그리고 예술을 곁들인 민속놀이 공연이다. 공연은 나이로비 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의 한적한 숲속에 있는 케냐민속문화원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1부 2부를 합쳐서 약 3시간 동안 계속되는 민속놀이는 케냐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민속의상, 민속악기, 전통음악, 전통춤, 고유풍습 등등 ...
공연이 시작된 후에 도착한 우리에게 특별한 자리를 마련해 주는 배려가 고마웠다. 전통 춤이 절정에 다다를 때에는 장내가 열기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전통을 이으려는 이들의 노력을 느끼면서 민속문화원을 나 왔다.
카렌 브릭센(Kalen Blixen)
숲이 우거진 한적한 거리를 지나 아름답게 다듬어진 넓은 정원의 아담한 저택에 도착했다. 이곳이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의 주요 배경인 주인공 카렌의 실제 저택이었다. 카렌의 집은 지금 그녀의 유품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영화 주인공인 카렌의 억척스러웠던 삶을 생각하면서 정원을 거닐 때에 나 자신이 옛날로 돌아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 지역에는 카렌의 유지(遺志)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카렌유치원, 카렌중등학교, 카렌대학교 등 그녀의 훌륭한 뜻이 이 곳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었다. 카렌이 말년에 고국 덴마크로 돌아갈 때 정성 들여 모은 재산을 모두 그녀를 도와준 하인들에게 나누어주고 갔다고 한다. 그녀의 아름답고 훌륭한 마음이 이곳 사람들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조용한 숲속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 카렌의 생가(카렌박물관) ▲ 암보세리 국립공원
암보세리(Amboseli)국립공원
암보세리 국립공원은 아프리카 최고의 산 킬리만자로산(5,895M)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나이로비에서는 자동차로 약 4시간의 거리에 있다. 암보세리국립공원을 향해서 차를 몰았다. 마사이족들이 살고 있는 동네들을 통과하여 광활하게 펼쳐진 대평원을 한참 동안을 달리니 구름에 봉우리를 숨긴 장대한 킬리만자로 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사이족들은 사진을 찍으면 혼을 빼앗아간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 앞에서는 카메라를 내어놓지 못했다. 그 대신 눈으로만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들과 마주칠 때에는 몇 번을 더 두리번거리면서 살펴보았다. 귓바퀴를 늘려서 볼에까지 늘어뜨리고 있는 사람들, 콧등에 구멍을 내어 장식을 하고 있는 사람들, 등등 ...
광활한 초원에는 얼룩말, 코끼리 등 각종의 동물들이 회오리바람이 일고 있는 초원 위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킬리만자로 산이 가까이 보이는 곳에 있는 방가로식 숙소(lodge)에 여장을 풀었다. 마음은 자꾸 눈앞에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킬리만자로 산으로 향했다. 구름 속에 숨어 있는 봉우리가 금방이라도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아서 신경이 자꾸 그 쪽으로 쏠렸다.
평원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림 같은 숙소는 그 분위기가 보기만 해도 여로에 쌓인 피로를 씻어 주었다. 숙소의 바로 앞에서 갖가지 동물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야외 식당에서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은 원숭이 한 마리가 식탁 위의 빵을 훔쳐서 달아났다. 자연의 생존경쟁 속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싸파리차를 타고 평원을 이리 저리 가로지르면서 기린, 얼룩말, 누(소와 비슷한 동물), 코끼리, 톰슨가젤, 멧돼지, 하마, 그리고 각종의 새들의 생태를 두루 살펴보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뜻하지 않은 장관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저녁노을을 받으면서 눈 덮인 킬리만자로 산의 봉우리가 수줍은 듯이 얼굴을 내밀었다. 봉우리의 하얀 눈은 저녁노을에 반사되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원주민들은 용맹스런 마사이족의 선입견을 넘어서 모두가 친절했으며 인간미가 느껴졌다. 호텔을 떠날 때에 '굿럭(good luck)'하면서 인사를 해주던 마사이 청년들이 잊어지지 않는다.
▲ 암보세리 마사이 청년들 ▲ 나이바샤 컨추리크럽 숙소
나이바샤(Naivasha) 호반
다시 긴 여정이 이어졌다. 암보세리 국립공원을 떠나 숲으로 이어지는 마사이랜드를 거쳐 북쪽으로 약 5시간 정도를 자동차로 달렸다. 다양하게 바뀌는 바깥 풍경은 이 나라의 자연 경치를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동네를 지날 때마다 자주 눈에 띠는 것이 당나귀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린 동물이기 때문에 눈길이 더 갔다. 이솝 우화 속의 꾀 많은 당나귀가 이곳 마사이족들에게는 훌륭한 운반 수단이 되고 있었다.
넓은 호수 변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는 나이바샤 칸추리 클럽에 여장을 풀었다. 숙소의 분위기가 장거리 여행에 지친 몸과 마음을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호반의 숲속에 있는 이 호텔의 정원에는 갖가지 꽃들이 만발했고, 주변의 숲에서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게 흘러나왔다.
잔잔한 호수 위로 보트를 타고 주변을 돌아보니, 호숫가에는 갖가지 동물과 새들이 평화스럽게 노닐고 있었다. 호수 안의 섬에는 페리칸 새들이 떼 지어 있었고, 호수의 안쪽에는 하마 가족들이 곳곳에서 머리를 물위로 들어내 놓고 있었다.
여기가 적도 아래 위치한 지역이라고 생각하니 믿어지지 않았다. 잘 다듬어진 호텔 정원의 잔디밭에는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또 잘 다듬어진 화단에는 이름 모를 예쁜 새들이 이 꽃 저 꽃으로 다니면서 꿀을 따고 있었으며, 꽃나무 아래에는 공작새 한 쌍이 수줍은 듯 숨어 있었다.
식당에서 조용히 봉사를 해주던 할아버지 종업원이 왠지 모르게 강하게 인상에 남았다. 또 친절하게 따라 다니면서 도움을 주고, 자청해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해 주던 붙임성 있던 한 종업원도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 나이바샤 숙소 선인장 꽃 ▲ 나이바샤호수
나쿠루(Nakuru) 국립 공원
공원의 입구에 들어서니 깊숙이 내려앉은 낮은 지대에 호수를 끼고 광활한 초원이 펼쳐졌다. 이 지역은 지중해에서 시작하여 아프리카 중앙부를 통과하는 대협곡이 지나는 지대였다. 입구에 들어서니 초입에서부터 갖가지 야생 동물들이 초원을 누비고 있었다. 다른 곳에 비해서 풀과 나무들이 무성했고, 그래서 그 속에 있는 동물들도 더욱 여유가 있어 보였다. 이렇게 평화스러운 세계를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무분별하게 파괴하고 있는 우리 인간의 행태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보아밥트리’라는 선인장 형태의 커다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나무는 가뭄이 들어 물이 부족해지면 스스로 가지들을 떨어뜨린다고 하니 자연에 적응하는 그 능력이 놀라웠다.
나무 사이 풀 사이로 갖가지 동물들이 낯선 이방인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는 듯 그들의 생활에 몰두하고 있었다. 숲을 빠져나와 초원의 중앙을 지나는데 안내자가 갑자기 차의 속력을 낮추면서 주의 신호를 했다. 길옆 풀숲에 사자 두 마리가 머리끝만 내어놓고 엎드려 있었다. 주위의 작은 짐승들은 백수의 왕이 부근에 숨어 있음을 알아차리고, 동작을 멈추고 그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연의 먹이사슬을 실감하면서 넓게 펼쳐진 초원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저만큼 앞쪽에서 목을 길게 뽑은 기린 한 쌍이 초원의 신사답게 점잔을 빼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기린들은 우리를 의식했는지 갑자기 서로가 빙글빙글 돌더니 서로의 목이 교차되는 멎진 포즈를 취해 주고 유유히 초원으로 사라졌다.
이번에는 코뿔소가 산다는 숲으로 갔다. 코 뿔이 특효약이라고 그 코 뿔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 지금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한참을 헤맨 끝에 겨우 찾기는 했는데 워낙 멀리 있어서 자세한 모습은 관찰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비디오카메라의 배율을 최대로 하여 가까스로 관찰을 하였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에 나쿠루 국립공원의 진수(眞髓)인 홍학 무리를 보기 위해 호수로 향했다. 호수가 가까워지자 넓은 호수의 수면이 홍학의 무리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비디오카메라로 장면을 모두 잡으려고 하니 카메라를 한참 동안 이동시켜야 했다. 홍학의 무리가 날라 오르면 붉은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고 하는데 그 장면을 포착하지 못해 안타까웠다.
▲ 나쿠루 국립공원 ▲ 홍학호수(뒷편 하얀 줄이 홍학)
마사이 마라(Masai Mara) 국립공원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 정확히 말하면 옛날에 포장했던 도로가 움푹 움푹 파여서 차들이 한쪽 바퀴는 도로 옆 땅에다 맞추어서 가야 하는 길을 꼬박 한나절을 가서 케냐에서 가장 큰 야생 동물 보호지 마사이 마라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가는 길 곳곳에는 마사이족들의 전통 마을들이 눈에 띠었다. 진흙으로 만든 움막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마을 옆 나무 아래에는 그들의 전통의상을 입은 노인들이 무언가 열심히 이야기하면서 쉬고 있었고, 옆에서는 아이들이 흙바닥에서 놀고 있었다.
숲 속의 숙소(lodge)에 짐을 풀었다. 숙소 주변에는 온갖 열대식물과 꽃들이 가득한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숙소의 주위에는 맹수 출현에 대한 경고 표시가 붙어 있어서 혼자서 주변을 돌아볼 때는 무척 신경이 쓰였다. 한낮에는 동물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싸파리 탐험 대신 숙소 주위를 다니면서 그곳의 생활상을 살펴보았다.
햇볕의 열기가 수그러진 오후 4시쯤에 싸파리차를 타고 광활하게 펼쳐진 초원으로 갔다. 이 나라 최대의 동물 보호지역답게 갖가지 동물들의 무리가 끝이 보이지 않도록 이어졌다. 여기저기에서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것은 누(소와 비슷한 동물) 떼들과 얼룩말 무리들이었다. 길게 이어지는 누 떼들의 끝없는 이동행렬의 광경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초원의 장관(壯觀)이었다. 이 누 떼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풀을 찾아 케냐와 탄자니아의 국경을 넘나든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인간이 그어 놓은 국경선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에 초원의 왕인 사자 두 마리가 영역을 살피면서 쉬고 있었다. 여유가 있어 보이면서도 위엄이 넘쳐흐르는 그 모습은 초원의 지배자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싸파리차들이 모여들어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사람들을 내려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사자를 구경하는 것인지 사자가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인지 구별이 애매했다.
마사이 마라의 초원에 석양이 물들 무렵, 숲 속에서 초원의 명 사냥꾼인 치타 한 마리가 여유 있게 걸어 나왔다. 저녁사냥을 하려는 것 같이 보였다. 싸파리차들이 뒤를 따르니, 이것을 알아차린 치타는 사냥하는 것은 급하지 않다고 생각 했는지,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처럼 재롱을 부리기 시작했다. 풀밭 위에서 뒹굴기도 하고, 나무에 영역 표시도 해 가면서 풀밭을 한 바퀴 돌았다. 그 때에는 초원의 명사냥꾼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재롱을 부리는 귀여운 고양이 같았다.
▲ 싸파리차를 타고 ▲ 초원의 왕 사자
아쉬움을 뒤로하고
조금은 생소한 대륙 아프리카, 그 아프리카의 적도 아래에서 보낸 값진 시간들, 추억 속에 간직될 수많은 일들, 이제는 모든 것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다시 올 기약도 없이 떠나야 할 날이 다가 왔다. 나이로비로 돌아오는 길은 마사이 마라를 찾아가던 덜컹거리던 그 길이었지만, 그날은 왠지 그 길이 아쉽기만 했다. 어려운 도로 사정에도 불구하고 일주일간을 성심껏 안내해 준 현지인 운전기사가 그날에는 더욱 고맙게 느껴졌다.
그곳 사람들을 처음 대할 때에는 피부색이 달라서인지 그들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접근하는 것이 신경이 쓰였지만, 막상 접근해 보니 의외로 친절하고 순진한 마음이 포근하게 전해져 왔다. 자연에 어울리며 살아가는 순수한 마음이 경쟁적인 현대사회에서 점점 퇴색해가고 있었지만, 아직은 그들의 순수한 인간미가 가슴속에 와 닿았다.
현실은 냉혹하여 욕심 없이 살려는 그들에게 부(富)라는 행운은 허락되지 않고 있었다. 아침 출근시간이 되면 일터로 가는 사람들이 길을 메웠다. 버스비 절약을 위해서 걸어서 출근을 한다고 했다. 식민지 시절 노동자로 와서 정착한 인도인들에게 이 나라 경제권이 넘겨져 있다는 말을 듣고 안타까웠다.
떠나오던 날까지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친지들이 지금도 한없이 고맙게 생각된다.
▲ 마사이족 마을을 지나면서 ▲ 나이로비 공항에서
불교 나라 스리랑카 (1998년)
* 여행 팁
위치 : 인도남쪽 인도양 시차 : 한국과 -3시간 30분차
수도 : 콜롬보(행정),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입법, 사법)
인구 : 21,675,648명 (2013), 전체순위 58위
면적 : 65,610㎢, 전체순위 122위 언어 : 신할리어, 영어, 타밀어
기후 : 열대성기후 종교 : 불교 69%, 이슬람교 8%, 힌두교
종족 : 신할리족 74%, 무어인 7%, 인도 타밀인
정체 : 중앙집권공화제 의회형태 : 다당제&단원제
국가원수 : 대통령 정부수반 : 대통령 화폐 : 스리랑카 루피(LKR)
공식명칭은 스리랑카민주사회주의공화국이다. 싱할라어로는 Lankā 이고 옛 이름은 Ceylon이다. BC 5세기 무렵에 인도 북부에서 싱할라족과 타밀족이 이주해왔다. BC 3세기에 불교가 들어왔고, 종족 간에 지배권 다툼이 계속되다가 1200∼1505년에 스리랑카 남서부지역까지 싱할라족의 지배가 확대되었고, 인도 남부지역의 한 왕조가 실론 북부지역을 지배하면서 14세기에 타밀왕국을 세웠다.
1505년 포르투갈 함대가 실론에 도착해 1518년에 요새를 세우고 교역허가권을 얻어냈다. 1619년에 포르투갈인들이 섬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캔디왕국은 포르투갈인들을 내쫓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을 끌어들여 1796년까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받았다. 1802년 영국 직할식민지가 되었다. 1880년대에 차 재배실험에 성공한 후 차가 주요재배작물이 되었다.
싱할라족과 타밀족 간에 1981년 폭동이 일어났고, 타밀족은 영토 분리를 주장하며 게릴라전과 폭력사태를 계속했지만 평정되었다.
아름다운 섬나라 스리랑카로
햇볕이 따가운 여름날 남쪽 나라 스리랑카로 향했다. 인도양에 떠 있는 불교의 나라 스리랑카, 사회주의 체제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아직도 민족분쟁에 시달리고 있는 곳이다. 서울을 출발해서 타이베이와 싱가포르를 거쳐서 10여 시간을 비행한 후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공항에 도착했다. 좀 덥기는 했지만 밤이어서 우리의 여름 기후와 큰 차이는 없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 밤공기를 헤치며 서둘러 시내로 향했다.
남국의 아침 눈부시도록 싱그러웠다. 약간 따갑지만 그렇게 강하지 않은 햇살, 멀리 대양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 은빛을 발하면서 밀려와 세차게 부서지는 파도..., 항구 도시 콜롬보의 아침은 찬란하게 열리기 시작했다. 인종분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해안과 관공서 건물 주변에는 무장 경찰과 군인이 경계를 서 있었지만, 도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평온해 보였다. 다만 전통적인 생활 풍습에 의해 간간이 신발을 신지 않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이색적이었다.
시원하게 트인 콜롬보 해변을 산책한 후, 시내 탐방을 나섰다. 열대기후에 속하는 이곳은 햇볕은 따가웠지만 그렇게 무덥지는 않았고, 줄지어 서 있는 열대성 나무들이 남국의 정취를 한껏 풍겨 주었다. 시내 중심가는 영국 풍의 옛 건물들과 현대식 고층빌딩들이 어우러져 있었고, 중심가를 벗어나니 곧 수수한 시골 풍경이 전개되었다. 도시, 농촌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 것이 불교문화의 흔적이었다. 시내 중심의 빅토리아 공원에는 입구부터 커다란 불상이 입장객들을 맞이했고, 시내의 어떤 연못 가운데는 불상으로 가득한 조그마한 절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시내의 큰길가에는 우뚝 선 대리석 바위의 조각 석불, 집안에서는 불상들이 담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콜롬보 외곽에 있는 동물원은 시설이 빈약해서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자연적인 맛이 있어서 좋았다. 유감스러웠던 것은 입장료가 외국인에게는 내국인의 다섯 배를 더 받았고, 또 카메라를 휴대할 때에는 상당한 액수의 돈을 받았다.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길가의 곳곳에 불상과 기반이 둥근 스리랑카식 불탑들이 있었고, 절에 있는 거대한 불상은 멀리에서도 절이 있음을 쉽게 알아 볼 수 있게 했다. 절 안에는 누어있는 불상들이 주위에 많은 불상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산꼭대기를 덮고 있는 커다란 바위 밑 굴들에는 많은 와불상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 콜롬보 시내 불상 앞에서 ▲스리랑카 해변에서
절에 들어갈 때에는 입구에서부터 맨발로 들어가야 했는데, 익숙지 못해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다. 나를 안내하던 운전기사도 마당에서부터 신발을 벗어야 하는 것에 머뭇거리는 나를 보고 자기가 미안스러워 했다.
콜롬보를 떠나 남쪽 해안선을 타고 계속 달릴 때 눈앞에 펼쳐지는 해안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해안선을 따라가면서 촌락과 도시들이 계속 이어졌고, 간간이 아름다운 해안 경치를 배경으로 특급 호텔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호텔의 해변 쪽 뜰에는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남국의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일광욕에 여념이 없었다. 해변에는 커다란 파도들이 하얀 거품을 일으키면서 밀려들고 있었다.
▲ 절 언에 있는 거대불상들
해변의 숲들은 야자나무들로 덮여 있었고, 나무마다 코코넛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대로변 길거리에는 열대 과일 간이판매대가 설치되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안의 천연적 요새에 있는 포르투갈 성이라는 곳에 들렀다. 옛날에 포르투갈인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는데, 바다 쪽은 약 100여m 앞까지 암초 군이 길게 둘러싸여 있어서 바다로부터 접근하는 군함의 침입을 막았다고 한다. 이를 보면서 강국들의 분쟁 지역이었던 이 나라의 과거를 생각해 보았다.
해안을 따라 한참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눈에 익은 풍경이 나타났다. 동네 아낙네들이 물 항아리를 옆구리에 끼고 걸어가고 있어서 우리나라 제주도의 옛날 풍경이 연상되었다. 큰길가 중간 중간에 있는 공동수도는 옛날 우리의 마을 앞 공동우물을 생각나게 했다. 거리를 가다 보니 여러 가지 다양한 풍경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사람과 동물들이 어울려 있는 시골의 큰 길, 간간이 나타나는 원두막형의 열대과일 판매소, 어린 소녀들이 빠른 손놀림으로 직물을 짜고 있는 가게, 코끼리를 타고 대로를 활보하는 모습, 짐을 가득 싣고 삐걱거리며 큰길을 가는 우마차 등이 시선을 끌었다.
스리랑카는 전통적인 풍습과 현대적인 생활양식이 어우러져 있는 곳이었다. 수도인 콜롬보 시내에도 간간이 소들이 복잡한 대로를 활보하고 있었고, 초특급 호텔 앞에서는 트리휠러(three wheeler)라는 세 발 자동차 기사들이 관광객을 보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어떤 곳에서는 구걸하는 사람들이 방문객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시골길로 접어들면 이곳이 정말 동물들의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대로상에는 소, 염소. 개, 물소들이 자동차의 통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로를 활보하고 있었으며, 어떤 곳에는 코끼리가 육중한 거구로 도로의 한 가운데를 당당히 걸어가고 있었다.
시골로 접어들수록 한길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포장된 길이 맨발로 걷기에 편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맨발로 찻길을 걷고 있었고, 간간이 남자들이 전통 의상인 샤론이라는 치마 모양의 하의를 입고 길을 가고 있었다. 동물들과 어우러져 있는 도로 상황이 답답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연과 어울리는 순수한 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해변 포르투갈 요새 ▲암부란고다 호수
암부란고다 호수
스리랑카의 신비경을 보러 가자는 친구를 따라 모터보트 탐험을 떠났다. 시골 도시 암부란고다 부근에 있는 수생 관목으로 둘러싸인 바다 같은 호수였다. 호수의 한쪽 끝이 좁은 통로로 바다와 맞대고 있었다. 물살을 가르며 보트는 수생 나무들이 우거진 숲 사이로 미끄러져 나갔다. 언제 나타났는지 ‘보아’ 라는 도마뱀같이 생긴 커다란 파충류가 보트의 주의에 나타나서 영역이라도 주장하듯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햇볕이 따가워서 가리개를 쳤다가, 늪을 빠져나와서는 볕 가리개를 걷고 잔잔한 수면 위를 쾌속 질주했다.
따가운 햇볕은 살갗을 자극했지만 시원한 바람은 마음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호수 안의 바위 위에는 갈매기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고, 조그마한 바위섬 위에는 불상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그 옆의 조금 큰 바위섬에는 사원 하나가 섬 전체에 자리 잡고 있었고, 사원의 담 너머로 동자승이 수줍은 듯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호수의 가장자리에는 통나무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어떤 사람은 낚시를 하면서 담배를 청했고, 또 어떤 아이는 이상한 짐승을 안고 조그마한 통나무배를 타고 접근하여 사진 모델을 해주고 돈을 청하기도 했다. 호수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손을 흔들었다.
보트가 속력을 내면서 호수변의 숲으로 숨어들어 갔다. 보트는 정글 속의 비밀 통로를 헤치면서 신비의 세계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마치 내가 탐험가나 된 것처럼 비디오와 카메라를 교대해 가면서 열심히 신비경을 담았다. 보트는 숲을 빠져나와서 조그마한 수로를 통해 조심스럽게 늪 길을 가다가, 다시 정글 통로를 지나니 훤하게 펼쳐 있는 광활한 호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트는 정글을 통과할 때의 조심스러웠던 운항에서 벗어나 최고의 속력으로 바다 같은 호수의 수면 위로 물살을 가르면서 쾌속 질주했다. 돌아 올 때에는 호수의 반대쪽 물가의 조용한 뱃길을 택해서 호수의 경치를 마음껏 음미하면서 돌아 왔다.
▲호수안의 섬에서 ▲ 바다같은 호수 속으로
산간 휴양지 누와라엘리야
다음날에는 스리랑카 중부의 고원지대로 길을 재촉했다. 내륙으로 향하는 길 주변에 전개되는 풍치는 남부의 해안지역과는 달랐다. 아직도 개간되지 않은 광활한 대지에는 야자나무 숲이 울창하게 형성되어 있었고, 대지의 군데군데에는 움막 형태의 전통적인 가옥들이 숲 속에 숨어 있었다. 북쪽의 분쟁 지역에 가까워질수록 군인들의 검문은 잦아졌고, 인적이 뜸한 곳은 약간 으스스한 느낌마저 들었다.
고산 지대로 접어드니 기후는 서늘해지고, 주종을 이루던 야자나무 숲은 고산지대의 숲으로 바뀌어졌다. 산마루 고개 위에 형성된 열대과일 판매대에서 과일의 황제라는 두리안 과 여왕이라는 맹고스틱을 사서 열대 과일의 진가를 음미해 보았다. 고산지대를 달리면서 차밭에서 찻잎을 따는 여인들의 눈인사를 받으면서 계속 달렸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 고산지역의 조용한 호숫가에 자리 잡고 있는 어느 아담한 호텔에 일박의 여장을 풀었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동행해 준 친구가 그지없이 고마웠다. 호텔 야외 라운지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우정의 꽃을 피우던 그 순간이 지금도 가슴 시리도록 그리워진다.
고산 지대에서 맞이한 두 번째 날에는 산간 지역의 유적과 명소들을 둘러보면서 스리랑카의 유명한 산간 휴양지 누와라엘리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간간이 눈에 띄는 시골의 학교 앞에 차를 세우고 검은 피부에 하얀 교복이 유난히도 희게 보이는 천진스러운 학생들과 함께하기도 했다. 순진한 학생들은 비디오카메라 앞으로 앞 다투어 뛰어나왔다. 가는 도중 학교에서 뛰노는 학생들만 보이면 차를 세우고 그들과 잠간이라도 어울렸다. 계속 높아지는 고도에 따라 산의 형태가 바뀌기 시작했다. 꾸불꾸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멀리 보이는 산의 형태가 이상하게도 정돈되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이 광활한 산들이 모두 그 유명한 스리랑카 차(茶)밭이었다. 차밭 사이로 간간이 집들이 숨은 듯이 자리 잡고 있었고, 또 차밭에서는 전통적인 의상을 입은 현지인들이 찻잎을 따고 있었다.
찻잎을 따는 그들의 얼굴에는 어쩌면 운명적인 직업의식이 서려 있는 것같이 보였다. 대부분 맨발에다, 비를 피하기 위해 비닐을 둘러쓰고, 남루한 옷차림에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접근을 하려 해도 외부인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차밭으로 들어가서 같이 차를 따면서 한데 어울리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웃음을 띠면서 접근해 왔다.
차밭으로 정돈된 2,000m 이상의 산허리를 넘으니 아담한 휴양 도시 누와라엘리야가 나타났다. 영국 통치시절에 개발된 도시로서 영국 풍의 고색창연한 아름다운 도시였다. 가로수를 이루고 있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지나간 날들의 역사를 말해 주는 듯 했다. 기후는 우리나라의 초가을을 연상케 했는데, 고산 지대의 예고 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니 몸이 약간 움추려 들면서 마치 가을비에 젖어 드는 기분이 들었다. 비가 내려서 그곳에서의 일박 예정을 취소하고 밤길을 각오하며 콜롬보로 향했다. 산허리를 감돌면서 끝없이 펼쳐지는 차밭 사이의 비탈길 도로를 따라서 조심스럽게 길을 재촉했다. 간간이 눈에 띄는 건너편 산허리의 폭포를 이루며 길게 내리는 하얀 물줄기들도 이곳의 경관을 한층 돋보이게 해 주었다.
▲ 차잎 따는 여인들 ▲ 친구와 함께
호기심을 가득 안고 찾아갔던 스리랑카 방문은 너무나도 빨리 그리고 아쉽게 지나갔다. 가는 곳마다 진심으로 대해 준 친구들과 현지인들, 헤어질 때에 언제 또 올 것인지 아쉽게 물어 보던 현지인들의 진심어린 눈빛이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다.
회사 근무를 미루면서까지 시간을 같이해 주던 종범이 친구, 현지 탐방에 세심한 배려를 하면서 일일이 안내해 주던 현지인 운전기사들, 숙소에서의 생활에 조금이라도 더 도와주려고 애쓰던 현지인들, 모두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떠나오던 날, 국내 분쟁 때문에 환송인의 공항청사 입장이 제한되어 친구와 청사입구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고 몇 번을 뒤돌아보며 출국문으로 향했다. 공항을 이륙한 후 조용히 눈을 감았을 때에 고마운 얼굴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파도가 넘실대던 아름다운 해변, 무표정한 얼굴에서 순진한 웃음이 터져 나오던 찻잎 따던 여인들, 그리고 다정했던 많은 사람들,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필리핀 바나우에 계단논 (2001년)
* 여행 팁
국기 :
위치 : 아시아 대륙 남동 해안 시차 : -1시간차
수도 : 마닐라 언어 : 필리핀어, 영어 화폐 : 페소(PESO)
인구 : 97,976,603명 (2010), 전체 순위 12위
면적 : 300,000㎢, 전체 순위 73위 기후 : 아열대성기후
종족 : 말레이인 96%, 기타, 인도네시아인
국가원수 : 대통령 정부수반 : 대통령
아시아 대륙 남동 해안에 7,10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1000년경부터 중국 상인들이 건너와서 거주했고, 1521년 페르난두 마젤란에 의해 유럽인들에게 알려졌다. 16세기 말엽 민다나오 섬을 중심으로 이슬람교가 소개되었고 이 무렵 필리핀 북부와 중부 지역은 스페인 식민지가 되어 모든 주민들은 명목상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뒤 필리핀 제도는 미국에 할양되었으나 필리핀 내 독립운동은 1906년까지 계속되었다. 1944~45년 미군에 의해 해방된 후, 1946년 7월 4일 필리핀 공화국을 수립하고 초대 대통령으로는 마누엘 로하스가 선출되었다. 1965년 페르디난드 E.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1969년에는 최초로 필리핀의 재선 대통령이 되었다.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속 집권했으며, 계엄령을 공식 해제한 1981년부터는 대통령령으로 통치했다. 1983년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S. 아키노 2세가 귀국길에 마닐라 공항에서 피살되자 마르코스 정권에 대항해온 반(反)정부 세력의 저항이 더욱 격렬해졌다. 난국 모면을 위해 1986년 대통령 선거에서 마르코스는 야당후보이자 베니그노 미망인 코라손 아키노를 누르고 승자로 선포되었지만 부정선거는 폭동을 야기시켜 그는 물러나고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섬나라 필리핀으로
필리핀 산간마을 이푸가오족생활 탐방
바나우에(Banaue)
첩첩산중으로 접어드니 필리핀 특유의 계단식 논이 산비탈을 메우면서 분위기를 자연 속으로 끌어갔다. 산간 마을 어귀에는 다산(多産)이 미덕인지 천진스러운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동네의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10여 시간의 버스여행 끝에 '이푸가오'족의 중심 동네 '바나우에'에 있는 '바나우에'호텔에 도착했다. 산중 동네의 모습이 정겨웠고 만나는 사람들도 순수했다.
▲ 바나우에 호텔 ▲ 바나우에 계단 논
산간 부족 이푸가오족의 생활 탐방
아침에 일어나니 스며드는 산간의 아침 공기가 여로의 피곤을 녹여 내렸다. 동쪽 하늘이 점점 밝아오면서 산속의 집들에서 들려오는 닭의 울음소리는 태고의 신비스러움을 안겨주는 듯했다. 오늘은 이푸가오족의 생활에 접해보기 위해서 그들이 사는 곳을 찾았다. 책에서만 보았던 유명한 필리핀 ‘계단논’도 볼 수 있었다.
▲ 산간지역 탐방 지프니 ▲ 필리핀 계단논
첩첩산중 산길이라서 지프니(미군들이 쓰던 낡은 지프차의 엔진으로 만든 차)를 타고 꾸불꾸불 산길을 터덜거리면서 달렸다. 산비탈의 계단논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이 필리핀의 산촌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푸가오족의 생활은 그자체가 자연의 일부였다. 마을까지는 벼랑길을 넓혀서 ‘지프니’만 아슬아슬하게 다닐 수 있었다. 자연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산비탈 계단논에서 그들의 소박한 삶의 지혜를 배웠고, 천연 동굴 에 관을 안치해 두는 매장문화는 우리 매장문화와 비교가 되었다.
▲ 필리핀 바나우에 산간 마을 ▲ 동굴 매장 문화
산간 도시 본톡(Bontoc), 사가단(Sagadan)
산간의 중심도시 '본톡에 도착했다. 박물관에 가서 이푸가오족의 삶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박물관 옆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는 것을 보고 사라져가는 필리핀의 전통문화를 생각해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산간 고지마을 '사가단'(Sagadan)으로 갔다. 그들의 삶에 접해보면서 속세를 잊은 듯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그들을 볼 때 안정을 찾지 못하는 필리핀의 정정(政情)이 안타까웠다.
방아안(Bangaan) 원주민 마을
다음날에도 역시 덜컹대는 지프니를 타고 원주민 마을 방아안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원주민 아이들의 순진함을 느껴보면서 속세와 떨어져 있는 이색 지역을 찾아갔다.
추수가 한창이었다. 우리와는 다른 특이한 방법의 추수문화를 체험해보기도 했다. 그들도 이제 문명의 침투에 조금씩 물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원두막식 2층 가옥에서 가족이 공동생활을 하는 주거문화, 한 집의 추수를 기념해서 동네잔치를 하는 공동체 문화, 특이한 술을 맛보라고 권하는 순수한 인정... 그들의 순수함이 그곳에 머무는 동안 줄곧 가슴에 와 닿았다.
▲ 원주민 마을에서 추수
3박의 바나우에 탐방,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던 그 식당, 항상 웃으며 대해주던 그 종업원, 등등 잊을 수 없는 바나우에의 3일이었다. 이곳 사람들의 모습은 서양인의 모습에서부터 순수한 원주민 모습을 한 사람들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었고, 또 눈에 띠는 간판들은 대부분이 자국어를 제치고 영어가 점하고 있었다. 또 초등학교 수업이 완전히 영어로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고 이 나라의 변화상을 어렵지 않게 점쳐보기도 했다.
마닐라로 귀환
속세를 떠났던 3일을 영원의 시간으로 간직하면서 다시 마닐라로 향했다. 필리핀의 시골 풍경에 한껏 젖어보면서 늦은 오후에 마닐라에 도착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왔지만 중간 중간 머물면서 그들의 생활을 좀 더 심도 있게 체험해 보았다.
속세로 회귀한 기분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마닐라의 문화탐방에 나섰다. 마닐라 거리를 돌아보니 필리핀의 역사도 순탄치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쉽게 들었다. 마닐라는 동서가 혼재되어 있고, 빈부가 엉켜 있는 도시였다. 화려한 네온불빛이 밤의 분위기를 제압하는 마닐라의 밤거리, 휘황찬란한 네온불빛을 조명 삼아 대로변의 건물 벽 옆에는 가족단위의 노숙자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띠였다.
남국의 정취를 품어내는 마닐라항의 아름다운 임해공원의 아침, 공원의 야자수 숲에는 산책 나온 시민들과 노숙자의 가족들이 섞여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공원의 나무 위에 새처럼 둥지를 틀어서 잠자리를 마련한 노숙자도 있었다. 마닐라의 극명한 2중성을 실감하면서 풍성한 자연의 선물을 가지고 있는 이 나라에 이러한 어두운 그늘이 짖게 드리워져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천혜의 풍요한 국토에, 열대의 풍부한 자연조건, 분명 삶의 자원이 부족해서가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잘못된 정치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나긴 세월을 외세의 시달림 속에서 지내오다가 가까스로 독립을 얻었지만 이 나라의 정치는 오늘날에도 호족집단의 보수적인 정치가 이어져서 항상 기득권의 고수에 방향을 맞출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고통은 서민들의 몫이 되어 서민생활은 계속 궁핍의 길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휘황찬란한 네온의 불빛, 흥에 취해 밤의 열기 더해주는 거리의 인파, 어려움에 찌든 부분이 어둠에 가려진 마닐라의 밤, 그러나 마닐라의 밤은 아름다웠다. 우리는 마닐라의 밤을 음미해보고 싶어서 술잔을 기우리며 이국의 정취에 젖어보았다.
▲ 바나우에 우정의 시간 ▲ 마닐라항의 아침
팍상한(Pagsanjan)폭포
마닐라에서 버스로 1시간정도를 달려서 절경 팍상한 폭포에 도착했다. 여분의 옷으로 갈아입은 후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방카라는 보트에 올랐다. 건장한 원주민 2명이 앞뒤에서 방카를 끌고 밀면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급류를 거슬러 방카를 끌고 올라가는 것을 보니 방카에 앉아있기가 민망스러울 정도였지만 스릴이 있었다.
계곡의 양 옆은 절경의 극치였다. 영화의 배경이 되고도 남음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올라가니 굉음과 한께 폭포가 나왔다. 뗏목을 타고 폭포속으로 들어가서 물을 맞으니 속세를 떠난 느낌이 들었다. 폭포를 돌아 나와서 다시 래프팅이 시작되었다. 급류를 거슬러 올라갈 때의 어려움을 보상이라도 해 주듯이 내려올 때에는 기분 좋은 급류타기였다.
▲ 팍상한 폭포 ▲ 리잘공원 스페인시대 성곽
마닐라 시티투어(city tour)
마닐라 시내 탐방에 나섰다. 일찍 숙소를 출발해서 번화가를 거쳐서 필리핀의 독립영웅 리잘(Rizal)을 기리기 위해 만든 리잘공원으로 갔다. 일상적인 공원과 다를 바 없지만 리잘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생각하니 경건함이 울어났다. 다음에는 스페인시대에 요쇄였던 포트 산티아고(Fort Santiago)로 갔다. 지금은 관광지가 되었지만 스페인 식민시대에는 서슬이 시퍼런 지배자들의 눈빛이 번뜩거리던 곳이라 생각하니 건물, 정원 할 것 없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독립영웅 리잘이 수감되어 있던 감옥 건물과 리잘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길에 발자국을 동(銅)으로 재연해 놓은 것을 볼 때에 가슴이 뭉클해 졌다. 또 마음이 섬찢했던 곳은 해수면 아래로 굴을 파서 바닷물로 사형을 집행했던 지하 감옥이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성 오거스틴 (St. Augustin)성당으로 갔다. 식민지 시대의 유물이지만 보존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웅장한 규모에다 조화로운 내부가 잘 어울리는 건물이었으며, 지금도 사용되고 있어서 그 가치가 더욱 돋보였다.
시내탐방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도중 재래시장에 들려서 시장도 구경하면서 아직 준비하지 못한 선물도 샀다. 재래시장은 전문 선물상점보다 선택의 폭도 다양하고 값도 저렴하기 때문에 외국여행에서는 한번 들려볼만한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