橫看成嶺側成峰 옆으로 보면 잿마루요 비스듬히 보면 봉우리라
遠近高低各不同 원근과 고저에 따라 모습이 각각 같지 않구나 不識廬山眞面目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으니
只緣身在此山中 이 몸이 이 산 안에 있기 때문이로세
송나라의 대시인 소동파(蘇東坡)는 절경으로 꼽히는 여산(廬山)을
찾았다가 들른 서림사에서 「제서림벽(題西林壁)」 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그는 이 시에서 깊은 철리(哲理)를 보여줬다. 시인은 여산의 봉우리들이
보는 위치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보여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면서 그건 ‘나 자신이 이 산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깨치듯 말한다. 산
안에 있어서 오히려 산을 제대로 볼 수 없으며, 그 전모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안,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를 들려주는 소동파의 시는 한국 사회가 특히 결여하고 있는 한 가지에 대해 새삼 생각게 한다. 한국 사회는 어떤 문제가 있으면
대체로 총체적인 관점을 갖지 못하고 문제의 ‘안’에 갇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소동파의 말처럼 어떤 사안의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그 문제
안으로 들어가서 철저히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대개는 그 안에 머무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 문제 ‘밖’으로 나와 멀리서 바라보고 위에서
내려다봐야 그 문제의 봉우리는 어떠며 골짜기는 어떤지, 그래서 진면목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자기만의 ‘골짜기’에 갇혀 있는 지식인들이 너무 많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전문가 전능주의’와 겹쳐 있다. 한국에서 ‘전문’이라는
것은 성역과도 같다. 전문에 부여되는 절대 권위는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얘기할 때 비전문가들에겐 침묵을 명한다. 전문가가 말하니 다른 이들은
입을 다물고 오로지 경청하라는 것이다.
물론 현대 사회의 복잡다단성이나 초고속으로 이뤄지는 세상의 변화를 생각할 때 전문적인
지식의 중요성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전문’에 대한 숭배와 예찬이 지나치게 과도하다. 어느 사회보다 한국은 전문화를
조장하고 독려하며 찬미한다. 이는 우리 사회의 근대화의 한 특징에서 상당 부분 비롯된 것이기도 한데, 즉 지난 19세기 과학적 전문 지식의
결핍이 우리를 세계 경쟁에서 낙오케 했고 식민화를 불렀다는 것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전문 세분화의 과잉을 부른 한 토양이 됐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잉은 청소년들을 고등학교 때부터 일찌감치 문과와 이과로 나눠 조기에 자기 적성을 발견하도록 하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학과별로
세분된 학제에 의해 전문 분야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전문화의 과잉은 지금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의 폐해로 되돌아오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전문 인력은 그야말로 범람을 이루고 있다. 자기 분야에서 깊은 지식을 갖춘 박사의
숫자는 인구 규모로 본다면 세계에서 최상위권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박사들은 자기 분야를 벗어나면 매우 취약한 안목을 드러낸다. 어찌
보면 많은 경우 박사는 넓은 지식[博識]이 아니라 협소한 지평과 시야에 갇힌 ‘협사(狹士)’일 뿐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유식하나 실은 무식한
함정, 이른바 ‘전문가의 무지’의 덫에 걸려 있는 것이다. 분절주의적이며 파편적 인식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무지를 드러내는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일기 시작한 이른바 ‘통섭’이라든가 ‘융합’은 그 같은 전문화 과잉에 대한 한 반성이며 교정인
셈이다.
부분적인 세부에 갇히는 것의 오류는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볼 수 있지만 정치의 세계에서 그 폐해가 특히 두드러진다.
정치란 하나의 사회를 전체적으로 보면서 자원의 배분과 조정을 하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의 정치의 낙후성은 총체적인 안목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어느 인터뷰에선가 대통령이 갖춰야 할 덕목을 묻는 질문에 대해 말했듯이 “한 사회를, 한 나라를
전체로서 보는 능력”이 매우 모자란다. 그래서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생겨나며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현상과 문제의 진단과 처방이 국부적인 시야에 갇혀 있으니 종합적이며 구조적인 근치(根治)가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 같은 결함은 언론에 대해서도 지적할 수 있거니와 우리는 여기서 언론에서 격언으로 떠받들어지는 ‘사실은 신성하다’는
말에 대해 그런 관점에서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과연 모든 사실은 신성한가. ‘사실’과 ‘진실’이 있다고 할 때, 예컨대 어떤 사안에 100가지의
사실이 있으며 그중 99개의 사실을 얘기했지만 진실이 아닌 경우에도 그 사실은 신성하기만 한 것일까. 오히려 나머지 한 개의 사실에 진실이 담겨
있을 수 있다고 할 때 다른 99개의 사실을 ‘신성한 사실’들로 봐야 할까.
바로 여기에 전체를 놓치고 부분에 갇히는 것의
위험이 있고, 사실이 진실과 충돌하는 역설이 있으며, 세부에 충실함으로써 전체를 부실케 하는 함정이 있다. 사실은 진실의 빛에 비춰봐야 하며,
부분은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한다. 지엽을 근원에 의거해서 봐야 하고, 말단을 본질에 비춰서 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세부와 부분만을
전체인 양, 진실인 양 내세운다면 결과적으로 사실까지 왜곡시키는 것이 돼버릴 것이다. 우리 언론이 드러내고 있는 많은 문제의 뿌리에는 이같이
사실에 충실하긴 하지만 진실을 놓치고 마는 오류가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게 어디 정치인이나 언론에만 해당하는 얘기이겠는가.
어떤 사물이든, 어떤 현상이든, 어떤 사안이든 총체로서 바라볼 때 그 대상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 사회엔 우리의
옛 선비들이 추구한 전인(全人)적 인간형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조선의 개국 공신이자 대학자인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은 ‘진유(眞儒)’,
즉 진짜 선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진유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하며, 윤리 도덕의 실천가여야 하며, 역사가여야 하며,
계몽적인 성리철학자여야 하며 교육자 또는 저술가가 돼야 한다.”(한영우, '정도전 평전')
말하자면 종횡적 지식과 품성과
덕성을 두루 갖춘 종합적 지성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大學)』에서 말한 격물(格物)에서부터 평천하(平天下)까지의 안목과 역량을 함께
갖춘(갖추려는) 군자상(君子像)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이런 지식인은 두 개의 ‘전’을 겸비한 이라 할 수 있다. 즉 전(全)과
전(專), ‘양 전’이다. 전체상을 내려다보는 조감적 시야와 함께 현미경적 세밀함까지 함께 아우르는 것이다. 우리가 고전에서 배우고 새겨야 할
중요한 교훈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논어(論語)』에서 말한 것처럼 ‘박학(博學)’과 ‘근사(近思)’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즉 넓은
안목을 가지면서 자기 주변의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주변의 문제를 절실하게 묻고 궁구하되 작은 것에 붙들리지 않고 전체적인 시야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고전을 읽는 독서법 자체에서도 매우 필요하다. 고전은 그걸 떠받들기 위해, 그 책 속
옛사람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떠받들기 위해 읽는 것이어선 안 된다. 고전 ‘속’에 들어가면서도 고전 ‘밖’에서 그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고전 속 선인들의 얘기에 질문을 던지면서, 지금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서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고전을 오히려 죽이는
것이 될 뿐이며, 고전을 과거의 유물로 만들게 될 뿐이다. 그건 고전을 고립시켜 ‘고(孤)전’으로 만드는 것이며, ‘고루(孤陋)한 고전’으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은 흔히 옛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쌓는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 말을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읽자면 옛것을 제대로 읽을 때 그 안에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옛것을 데울[溫故] 정도로 깊이
파고들어라. 그러나 또한 그 안에만 머무르지 말라. 그러면 거기에서 새로운 깨달음[知新]이 나온다.’
‘새로운 것’은 실은
대상의 새로움이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이의 관점과 시야의 새로움이다. 시야와 안목의 넓이와 깊이의 문제다. 결국 낡고 진부한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두 번 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오래된 것을 넓게 보고 깊게 보는 것이며, 지금의 관점에서
새롭게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 같은 온고지신으로 고전을 만날 때 고전은 옛 고전(古典)이 아닌 오늘의 ‘신전(新典)’이 된다. 고전이면서 신전이
된다. 그렇게 고전을 읽을 때 우리는 진짜 온고지신에 이르게 될 것이다. 고(古)와 금(今)이 한데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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