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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실 스크랩 물리과학사
樂而忘憂 추천 0 조회 73 08.08.27 23:2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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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과학사[history of the physical sc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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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물리세계에 관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의 역사.
[개요]

물리과학은 물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정밀하고도 체계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물리과학은 물리학·화학·천문학·지구과학의 4가지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이중 처음 3가지 과학의 역사와 그 범주·주요관심사·방법을 다루게 되며 지구과학은 독립된 글에서 다룬다(→ 지구과학).

현대적 의미에서의 물리학은 19세기 중엽에 역학·광학·음향학·전기학·자기학·열역학과 같은 몇몇 분야의 종합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 종합은 자연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힘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고 변환될 수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물리학과 화학의 경계는 다소 임의적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물리학이 개별 원자의 구조와 운동에 관심을 가진 반면, 화학은 분자의 특성과 반응을 다루기 시작했다. 물리학자들이 모든 물질에 공통된 일반적인 성질을 다루는 반면, 화학자들은 서로 다른 원소, 화합물의 독특한 특성을 다룬다. 천문학은 지구 이외의 전체 우주에 관한 과학이다. 18세기까지의 천문학은 태양·달·행성·혜성 등을 주로 연구했지만 지난 2세기 동안 별, 은하, 성운, 성간 물질 등에 대한 연구가 중요시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물리학과 천문학은 상대성이론을 바탕으로 한 우주론을 통해 점점 더 밀접히 결합하고 있다.


[고대와 중세의 유산]

물리과학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합리적 유물론까지 거슬러올라간다. BC 6~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애니미즘(자연물·자연현상·우주에 영혼이 있다는 믿음)을 거부하고 세계를 보통의 관찰가능한 자연적 현상으로 설명했다. 이들은 어떻게 혼돈에서 질서가 나왔는가, 이 세계의 다양성의 근원은 무엇인가, 운동과 변화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형상과 질료의 관계는 무엇인가 등 과학의 기초가 되는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설명은 이후 2,000여 년 간 서구과학의 토대가 되었다.

  • 고대 이집트, 서남 아시아, 그리스의 천문학
  • 서양 천문학의 기원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1년을 12달, 365일로 나누어 12달이 있는 달력을 만들었으며, 이는 이후 천문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약 BC 1800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은 천문학적 현상에 대한 정확한 예측에 관심을 두었으나, 기하학의 모형을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다.

    피타고라스주의자들(BC 5세기)은 우주가 본질적으로 수학적이라고 믿었으며, 우주의 중심에 불기둥이 있고 그 주위를 태양·지구와 같은 천체들이 돌고 있다고 믿었다. 이는 우주에 대한 최초의 물리적 모형이었다. 플라톤(BC 4세기)은 천문학자들에게 등속 원운동만을 사용해서 천체의 운동을 정확히 예측하는 이론을 만들라고 종용했다. 에우독소스(BC 4세기)는 동심구(同心球)의 조합으로 우주의 운동을 설명하는 모형을 만들었다. 에우독소스의 체계에서 각 행성은 4개의 동심구를, 태양과 달은 3개의 동심구를 필요로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에우독소스의 구를 천체의 작동을 나타내는 실재로 받아들여서 우주는 지구를 55개의 천구가 마치 양파처럼 둘러싸여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심구 이론은 행성과 지구의 거리가 변하는 것과 최대이각(금성과 태양이 이루는 최대각은 48°, 수성과 태양은 24°라는 것)을 설명하지 못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헤라클레이데스는 금성과 수성은 지구가 아닌 태양의 주위를 돌며, 태양과 나머지 행성은 지구의 주위를 돌고, 지구는 하루에 1번씩 자전을 하는 모델을 만들어냈다. 이는 아리스타르코스의 지동설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 이외의 영향은 미미했다. 히파르코스(BC 130경)는 천문학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춘분점의 이동을 비롯한 수많은 관측을 남겼으며, 지구가 우주의 기하학적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지점에 위치한다고 가정하는 '이심원'(離心圓)이라는 이론적인 도구도 만들었다. 또한 그는 이 이심원이 주전원(周轉圓)이라 하는 기하학적 도형과 수학적으로 동치라는 것도 증명했다. 프톨레마이오스(140경)는 주전원 이론을 그리스 천문학에 체계적으로 적용했다. 그는 행성·태양·달의 운동을 설명하는 정교한 이론체계를 만들었으며, 그의 책 〈알마게스트 Almagest〉는 이를 집대성해서 중세와 르네상스의 천문학자들에게 그리스의 천문학을 전수하는 데 기여를 했다. 이 책은 이후 1,500년 동안의 천문학의 골격을 세웠다.


  • 그리스의 물리학
  • 자연에 존재하는 다양성과 그것에 내재하는 단일성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레우키포스(BC 5세기)·데모크리토스(BC 5세기 후반)·에피쿠로스(BC 4세기 후반에서 3세기초)와 같은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들은 자연은 진공 속에서 운동하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원자론에 대항해서 스토아학파(제논[BC 4~3세기]·크리시포스[BC 3세기]·포세이도니오스[BC 100경])는 자연을 활동적인 정신인 프네우마(pneuma)가 가득한 공간과 물질의 연속체로 파악했다. 그렇지만 원자론자나 스토아 학파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을 이겨내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운동에 원인이 필요하다고 가정했으며, 매질에서의 물체의 운동은 가해진 힘에 비례하고 저항에 반비례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주를 달의 천구 이하의 지상계와 그 이상의 천상계로 나누었으며, 지상계에서는 수직의 낙하운동과 상승운동을, 천상계에서는 등속 원운동을 원인이 필요없는 자연스러운 운동으로 구분했다. 이외의 다른 모든 운동은 외부의 원인이 필요한 자연스럽지 못한 운동, 또는 강제된 운동으로 여겼다. 아르키메데스(BC 3세기)는 수학을 정역학·수역학과 같은 물리 문제에 적용했으며, 지레의 법칙을 유도했고, 부체(浮體)의 문제를 다루었다.


  • 이슬람과 중세의 과학
  • 그리스 과학은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가 정점이었다. 로마 제국은 이론적인 문제에 관심이 적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의 압박은 과학자들을 동방으로 쫓아냈다. 이들은 이슬람에 정착해서, 그리스 원전을 번역하고 그것을 발전시켰다. 이슬람 과학은 12~13세기에 서유럽으로 유입되었다. 후기 중세의 과학자들은 이슬람으로부터 유입된 그리스 과학의 체계 속에서 16~17세기 과학 혁명의 발판이 되는 수준 높은 과학을 발전시켰다.

    역학은 중세에 가장 발전했던 분야였다(→ 물리학). 사람의 손을 떠난 투사체를 계속 운동하게 하는 원인에 대해 중세 초기의 필로포노스이븐 시나(라틴 이름은 아비케나) 같은 이슬람 과학자들은 투사체에 주어지는 비물질적인 힘을 상정했다. 프랑스 철학자 장 뷔리당은 이를 발전시켜 임페투스(impetus:지상과 우주의 운동이 임페투스와 저항 사이의 투쟁의 결과라고 생각했음)라는 양을 도입하는데, 이는 투사체의 초기 속도와 물질의 양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중세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식을 실험적으로 검증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자연에 존재하는 실제 운동에도 관심이 없었다. 중세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권 아래 있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1277년 교황 요한네스 21세는 신학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219가지 명제를 금지시켰다. 이 명제 중에는 "최초 원인(신)은 여러 세계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금지령은 여러 세계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낳았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과학혁명]

    15~17세기까지 과학적 사고는 혁명을 겪었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을 대신하는 새로운 자연관이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 그 자체가 독자적 분야로 등장했다. 이 시기 과학의 특징으로는 추상적 사고, 정량화의 중시, 기계적 자연관, 실험적 방법의 도입, '왜'가 아닌 '어떻게'의 추구 등을 들 수 있다.

    과학혁명은 천문학에서 시작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 등속 원운동의 원칙에 위배되며, 조화와 단일성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이를 포기했다. 대신 코페르니쿠스는 태양과 지구의 위치를 바꾸어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지구를 그 주위를 도는 행성으로 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1543년 출판된 코페르니쿠스의 책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는 천문학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16세기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모두 거부했지만 새로운 천문학의 수용에 결정적 역할을 한 천문 관측을 수행했다. 1609년 독일의 천문학자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의 자료에 근거해서 행성의 궤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2가지 법칙을 발표했다. 즉 ① 행성은 태양을 1초점으로 하는 타원운동을 한다. ② 태양으로부터 행성에 그은 선분은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을 그린다. 이로 인해 등속 원운동이라는 오래된 관념이 깨지게 되었지만, 케플러의 법칙은 왜 행성이 타원 운동을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1618년 케플러는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태양으로부터의 평균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그의 3번째 법칙을 발표했다.

    한편 1610년 갈릴레오망원경을 사용해 달의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목성이 지구처럼 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관측했다. 그는 또한 금성의 위상 변화로부터 금성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의 주위를 공전함을 증명했다. 이러한 관측 결과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체계를 지지해주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지구를 운동하는 행성으로 바꾸었으며, 그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는 양립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갈릴레오는 임페투스 역학에서 출발했지만, 곧 이를 버리고 새로운 우주체계에 잘 맞는 수학적인 근대 물리학의 기초를 발전시켰다. 그는 자유낙하법칙(낙하한 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을 얻어내고, 이를 초기 형태의 관성의 법칙과 결합시켜 투사체 운동이 포물선을 그린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한 그는 관성의 법칙을 사용해서 지구의 운동과 관련된 물리적 문제인 "왜 쏘아올린 화살은 제자리에 떨어지나", "사람은 왜 지구가 도는 것을 느끼지 못하나" 등을 설명했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자연현상을 물질과 그것의 운동으로 설명하는 기계적 철학을 제창했다. 그는 힘이 진공을 가로질러 다른 물질에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했으며, 공간을 채우는 물질적 실체인 에테르를 통해서만 전파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물체가 관성운동에 따라 직선운동을 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한 물체가 또다른 물체가 차지한 공간을 점유할 수 없기 때문에, 실제 가능한 운동은 소용돌이 운동이라고 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모든 자연현상은 물체의 충돌에서 기인하며, 따라서 정량적인 충돌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호이헨스는 이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아이작 뉴턴은 그의 기념비적인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1687, 〈프린키피아 Principia〉라고도 함)에서 과학혁명기의 역학과 천문학 분야에서 제기된 주요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과학혁명을 완결했다. 이 책은 케플러의 법칙에 물리적 근거를 제공했으며, 일련의 법칙으로 천체 물리와 지구상의 역학을 통합했다. 또한 뉴턴의 의 개념은 기계적 철학과 수학적 전통을 종합했다. 뉴턴은 이 모든 결과를 다음의 3법칙에서 밝혀냈다. 첫째, 모든 물체는 그 물체에 가해진 힘에 의해 그 상태를 바꾸도록 강요받지 않는 한 정지 상태나 직선 운동의 상태를 계속하려 한다. 둘째, 운동의 변화는 주어진 힘에 비례하며 그 변화의 방향은 힘이 주어진 방향과 같다. 셋째, 모든 작용에 대해 항상 반대 방향의 같은 크기의 반작용이 존재한다. 이중 2번째 법칙은 1750년 스위스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에 의해 "힘은 질량에 가속도를 곱한 값(F=ma)"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뉴턴은 임의의 두 물체 사이에 중력이 작용하며 이 중력이 진공을 통해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두 물체의 중심간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중력을 사용해서 행성에 대한 케플러의 법칙과 갈릴레오의 자유낙하법칙을 유도했다.

    그리스의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 BC 300)로부터 다루어지기 시작한 광학은 이슬람의 알하젠을 거쳐, 13세기에 이르면 로저 베이컨, 로버트 그로스테스트에 의해 발전했다. 17세기 케플러는 맺힌 상의 한 점이 물체의 한 점과 대응한다는 이론을 내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렌즈의 기하학적 이론을 주장했다. 데카르트는 을 기계적 철학의 연구 주제로 포함시켰으며, 이로부터 반사·굴절의 법칙과 같은 수학적 법칙을 유도했다. 17세기의 광학, 특히 색깔의 문제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업적은 뉴턴이 발견했다. 데카르트는 빛 입자의 회전 속도의 차이로 의 차이를 설명했음에 반해, 뉴턴은 실험을 통해 백색광이 서로 다른 색깔을 갖는 광선의 혼합임을 보였고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왜 서로 다른 색깔의 광선으로 나누어지는가를 설명했다. 또 '뉴턴의 원무늬'라 부르는 간섭 현상도 설명했다. 뉴턴은 빛을 입자로 보았지만 반면에 공간을 채우고 있는 에테르의 가상적 진동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반면 호이헨스는 빛을 매질의 진동으로 간주하고, 파면(波面)이라는 개념을 정립해 이로부터 반사와 굴절, 그리고 당시 새롭게 발견된 복굴절을 설명했다.


    화학은 철학·연금술·야금학·의학이라는 다양한 근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연금술은 많은 화학 물질에 대한 오래된 경험을 화학에 제공했다. 화학은 17세기 기계적 철학의 등장과 더불어 다른 분야와 용어를 공유하게 됐다. 기계적 철학은 다른 과학 분야에 성공적으로 적용되었고, 이러한 성공은 화학자들로 하여금 화학을 기계적 철학의 용어로 재해석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로버트 보일은 모든 화학적 성질을 기계적 철학의 용어로 설명함으로써, 기계적 철학에 실험적 증거를 부여하려 했다.


    [계몽사조에서 20세기까지]

    뉴턴의 〈프린키피아〉의 수학적 엄밀함과 〈광학〉의 실험적 방법은 18, 19세기 과학의 모형이 되었다. 천체역학은 〈프린키피아〉를 따라 발전했으며, 광학·전기학·자기학·화학에는 〈광학〉의 영향이 컸다.

  • 천체역학과 천문학
  • 뉴턴의 이론은 1759년 목성과 토성의 중력이 핼리 혜성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예측함으로써 천체 현상과 관련된 그 위력을 검증받았다. 그렇지만 태양-지구-달과 같은 천체의 운동을 기술하고 설명하는 3체문제는 18세기를 통해 풀리지 않는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결국 3체문제는 라플라스에 의해 어느 정도 해결되었는데, 그의 〈천체역학개론 Traité de mécanique céleste〉(5권, 1798~1827)에는 이 3체문제를 비롯해, 태양계의 안정성을 뉴턴의 중력체계를 바탕으로 설명한 결과가 수록되었다. 뉴턴의 이론은 새로운 행성의 발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천왕성의 불규칙한 운동이 천왕성보다 더 멀리 있는 다른 행성의 중력에 의한 결과라는 예측이 대두 되었으며, 이는 1846년 해왕성이 발견됨으로써 입증되었다. 1915년 천왕성의 운동중에 해왕성의 원인만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요소가 있음이 밝혀졌으며, 이는 다시 1930년 정밀한 관측을 통한 명왕성의 발견을 낳았다. 19세기 후반기 수성의 궤도에서 뉴턴의 중력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오차가 관측되었고, 천문학자들은 또다른 행성의 존재를 예견했지만, 관찰되지 않았다. 이는 1915년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설명되었다.

    18, 19세기의 천문학이 뉴턴 학설의 일색은 아니었다. 독일 천문학자 요한 엘레르트 보데는 행성 궤도의 평균반경을 나타내는 간단한 수열을 만들었는데(r=(n-1)×3+4, n=1,2,3……), 보데의 법칙에 따르면 이 수열의 9번째 수인 28에 해당하는 행성이 화성과 목성 사이에 존재해야 했다. 이후의 계산은 이 자리에 세레스라는 소행성이 존재함을 보임으로써 확증됐다.

    라플라스는 태양계 형성론에 관해서도 중요한 가설을 발표했다. 그는 태양계가 뜨겁게 팽창해서 회전하는 대기였다가 식어서 수축하면서 그중 일부가 떨어져나가 식으면서 행성으로 변했다는 가설을 제창했다. 영국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성운은 별로 응축된다고 밝힌 이후 라플라스의 이론은 '성운설'로 불렸다. 이외에도 1728년 제임스 브래들리는 빛의 광행차를 발견했으며, 1838년 프리드리히 베셀은 지구의 공전에 의한 '별의 시차' 효과를 최초로 관측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체계를 입증했다.


    마이컬슨-몰리 실험
    18세기의 광학은 뉴턴의 이론이 지배했다(→ 물리학). 그렇지만 18세기 중엽 오일러는 빛을 에테르 매질의 진동으로 파악하는 이론을 제창하기도 했다. 이후 19세기초 영국의 토머스 은 빛의 파동이론을 제창했으며, 이에 의해 간섭 효과와 다양한 색깔 효과를 설명했다. 파동이론은 1815년 프랑스의 오귀스탱 장 프레넬에 의해 발전했다. 프레넬의 정교한 파동이론은 빛의 입자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반대에 직면했으며, 특히 반사에 의한 빛의 편광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프레넬은 1817년 빛을 종파가 아닌 횡파로 가정하면 편광이 설명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빛이 횡파이기 위해서는 그 빛이 통과하는 에테르가 몇 가지 독특한 성질을 지녀야 했다. 프레넬은 지구 위에서 운동하는 투명한 물체가 에테르의 일부를 '끌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이후의 실험(특히 1887년 마이컬슨-몰리 실험)에서는 에테르가 운동한다면 나타날 수 있는 운동의 효과가 관찰되지 않음을 보였으며, 조지 F. 피츠제럴드와 핸드리크 A. 로렌츠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운동하는 물체가 운동의 방향으로 길이가 수축된다는 로렌츠-피츠제럴드 수축 가설을 제안했다. 이 가설은 이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대체되었다.


  • 전기학과 자기학
  • 18세기말 프랑스 과학자 샤를 A. 드 쿨롱은 전기력·자기력도 뉴턴의 중력처럼 역제곱 법칙을 만족시킨다는 것을 보였다(→ 전자기학). 1820년 한스 C. 외르스데드는 전류의 자기효과를 발견했고, 이는 1827년 앙드레 M. 앙페르에 의해 자기력이 전류의 효과임이 밝혀짐으로써 설명되었다. 1831년 마이클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1843년 제임스 P. 의 열의 일해당량을 비롯한 일련의 발견은 자연계의 힘들이 근본적으로 단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앙페르는 전자기 작용을 중력과 같은 원거리 작용으로 파악했지만 패러데이는 힘이 전달되는 역선(力線)을 강조했다. 독일의 빌헬름 E. 베버와 루돌프 콜라우슈는 원거리 작용을 선호했고, 스코틀랜드 과학자 제임스 C. 맥스웰은 패러데이의 역선 개념을 수학화시켜 장론을 완성했다.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은 빛이 전자기현상이며, 가시광선 이외의 파장을 가지는 전자기파가 존재하거나 또는 인공적으로 발생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이는 1887년 독일의 하인리히 헤르츠에 의해 검출되었다.


    17세기 기체에 대한 연구는 스웨덴의 예오리 E. 슈탈에 의해플로지스톤 이론으로 정리되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플로지스톤이 물체에 포함되어 있다가 그 물체가 연소하거나 하소( 燒)할 때 빠져나오게 된다. 프랑스의 화학자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 이론을 거부하고 연소는 물체와 산소가 결합하는 것임을 주장했다. 이 새로운 산소이론은 명명법의 혁신과 더불어 화학의 혁명을 이룩했다.

    19세기초 존 돌턴원자론을 제창했다. 이는 물질이 왜 일정한 비례로 결합하는가를 설명해주었다. 돌턴은 수소원자 하나와 산소원자 하나가 결합해서 물을 만드는 것으로 가정했다. 그렇지만 프랑스 화학자 게이 뤼삭은 2부피의 수소가 1부피의 산소와 결합해서 1부피의 물을 만든다는 돌턴의 원자론과 잘 부합되지 않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1811년 이탈리아 화학자 아메데오 아보가드로는 돌턴의 원자가 실제로는 '분자'라는 가설을 이끌어내 돌턴의 원자론과 게이 뤼삭의 부피 실험을 통합했다. 아보가드로의 가설은 1860년에 이르러서야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1810~60년에 이르는 시기에 험프리 데이비를 비롯한 많은 화학자들의 실험에 의해 화학적 결합력이 본질적으로 전기력임을 알게 되었고, 새로운 원소들이 발견됐다. 러시아의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는 원소의 주기율표를 만들었다.


    [20세기의 발전]

    20세기 천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은하계 바깥쪽에 존재하는 우주에 대한 연구이다. 18세기말 윌리엄 허셜이 관측한 성운에 대해 은하계 안에 있는 가스 구름인지, 은하계 밖에 있으며 은하계에 필적하는 또다른 천체인지를 놓고 논쟁이 있었다. 1925년까지 미국의 천문학자 베스토 멜빈 슬라이퍼는 40여 개의 성운의 도플러 효과를 관측했는데 모두가 적색편이(관찰자에서 멀어지는 물체에서 나타나는 효과)를 보임을 발견했다. 1923년 에드윈 허블은 성운까지의 거리를 케페우스 변광성을 이용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계산했다. 허블은 안드로메다 성운이 약 90만 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성운이 우리 은하 밖에 있는 또다른 은하계임을 보였다. 1929년 허블은 슬라이퍼의 관측을 바탕으로 이 은하들이 지구로부터의 거리에 비례하는 속도로 멀어져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속도와 거리를 계산한 결과 우주의 팽창은 약 20억 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됐다. 1950년대에 이르러 이 '허블 나이'는 약 100억 년으로 늘어났다.

    소련 천문학자 게오르기 가모브는 팽창하는 우주에 기초를 두고 고온·고밀도의 상태로 시작한 우주가 폭발했다는 소위 '대폭발이론'을 우주의 시작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내놓았다. 천문학자들은 대폭발 당시 복사된 복사선이 현재는 0 K보다 조금 더 높은 값임을 예측했으며, 이 우주배경복사가 1965년 벨 연구소의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W. 윌슨에 의해 검출되었다. 이 발견에 의해 우주는 약 100~200억 년 전에 고온·고밀도 상태였음이 판명되었다.

    의 진화와 원소의 형성

    19세기 열역학은 태양의 나이를 약 2,000만 년으로 계산했음에 반해, 방사능을 이용한 지질학적 증거는 지구의 나이가 수십억 년임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태양과 같은 별이 계속해서 빛을 내는 원인은 20세기 천체·물리학자들의 주요관심사가 되었다. 별의 스펙트럼 분석은 별이 수소·헬륨과 같은 원소로 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1938년 독일 물리학자 한스 베테는 양성자가 헬륨이나 더 무거운 원소를 만들기 위해 융합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가설을 발표했다. 베테의 이론은 몇몇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현재 가장 타당한 이론으로 인정받고 있다.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의 별의 진화에 대한 이론에 의하면 별은 대부분의 수소가 헬륨으로 변환된 이후에 급속하게 팽창·수축한다. 만일 별이 태양보다 더 무거우면 그 별은 폭발해서 초신성이 되며, 그후 별의 중심핵은 중성자별이 된다. 이 중성자별은 1930년대에 예측되었는데, 1967년에 발견된 펄서(빠르고 매우 규칙적인 전파 펄스들의 발생원)가 중성자별임이 판명되었다. 더욱 무거운 별은 중성자별의 단계를 넘어서 검은구멍(black hole)이 된다. 검은구멍의 존재는 1916년 독일 천문학자 카를 슈바르츠실트에 의해 예측되었는데, 1980년대에 X선원과 일부 은하계의 중심에 검은구멍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태양계 천문학

    이 분야는 1960년 미·소의 우주경쟁이 불붙으면서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가지 예로, 인간이 1969년 에 착륙하기 이전에는 달의 생성에 대해서, 지구와의 동시 생성설,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서 지구에 붙잡혔다는 설, 지구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는 설 등의 3가지 가설이 있었다. 그렇지만 달에서 가져온 암석을 분석함으로써 이 3가지 가설이 모두 충분치 못함이 드러났다. 그결과 최근에는 화성 크기의 천체가 지구에 충돌해서 생긴 가스가 응축되어 달이 되었다는 새로운 가설이 가장 설득력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20세기의 물리학 분야를 보면, 1896~1932년의 기간은 16~17세기의 과학혁명에 비견할 만한 혁명적 결과를 이루었으므로 가히 20세기 과학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18, 19세기 뉴턴 물리학에 의해 정립된 공간·시간·질량·에너지·원자·빛·힘·결정론·인과율 등의 개념에 변화가 생겼다. 새 이론은 물리적 세계가 인간의 관찰과는 무관한 객관적 실재를 가진다는 믿음을 뒤흔들었다.

    방사능과 원소의 변환

    1896년 프랑스 물리학자 앙리 베크렐에 의한 방사능의 발견과 이후 퀴리 부부(→ 마리 퀴리, 피에르 퀴리)의 연구는 방사능 연구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방사능이 알파 선과 베타 선의 2종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이중 알파 선은 헬륨핵과, 베타 선은 전자와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러더퍼드는 방사능이 한 원소에서 다른 원소로의 변화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이 이론은 물질이 변하지 않는 92가지 원소로 되어 있다는 19세기 화학자들의 믿음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었다.

    1911년 러더퍼드는 얇은 금박에서 알파 입자들이 산란되는 실험결과를 바탕으로 원자가 핵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핵 모형을 제시했다. 1920년대를 통해 과학자들은 양성자와 전자가 핵을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1932년 제임스 채드윅이 양성자와 같은 무게를 지니지만 전하가 없는 중성자를 발견했으며, 카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핵이 궁극적으로는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1938년 독일의 물리학자 오토 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우라늄 핵을 중성자로 타격했을 때 바륨과 크립톤이 생성되는 것을 발견했다. 이후 계속되는 연구 결과로 우라늄에 의한 핵분열로 큰 에너지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결과는 원자탄의 제조와 직결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중 미국은 맨해튼 계획으로 원자탄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아인슈타인의 1905년

    뉴턴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1665~66년에 빛의 본질, 중력의 작용, 미적분학의 기본개념을 발견했다고 한다. 과학의 역사를 통해 이에 필적할 만한 일을 1년 동안 한 사람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뿐이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1년 동안 특수상대성이론, 복사에 대한 양자이론, 브라운 운동에 대한 이론 등을 발표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이 '정지한' 물체를 기술할 때와 '운동하는' 물체를 기술할 때 방정식의 형태는 다르지만 그 결과는 동일해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했다. 그는 이 모순의 근원을 절대 공간이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찾았으며, 그 대안으로 첫째, 자연의 법칙은 모든 관성 좌표계에서 동일하며, 둘째, 빛의 속력은 모든 관찰자에게 동일하다는 2가지 가정을 세웠다. 아인슈타인은 이 2가지 가정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유도했다. 첫째, 한 좌표계에 있는 물체의 길이는 다른 좌표계의 관찰자에게 로렌츠-피츠제럴드의 수축 법칙의 결과만큼 수축되어 관측된다. 둘째, 각 관찰자는 다른 좌표계의 시계가 더 천천히 감을 관찰한다. 셋째, 절대적인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넷째, 물체의 속력이 커지면 그 질량은 증가한다. 이중 마지막의 질량의 증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식은 에너지와 질량의 상호 변환을 나타내는 E=mc2이다. 빛의 생성과 변환에 대한 논문(흔히 '광전 효과에 대한 논문'이라 불리는)에서 아인슈타인은 빛과 전자기 복사가 마치 입자와 같은 광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빛이 파동이라는 전통적인 주장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지만, 빛에 입자의 성질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보완했다.

    1905년 무렵, 오귀스트 콩트, 에른스트 마흐, 빌헬름 오스트발트, 피에르 뒤엠, 앙리 푸앵카레와 같은 실증주의 철학자나 과학자 사이에는 원자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가 널리 퍼져 있었다. 브라운 운동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논문은 과학자 사회에서 원자의 존재를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닐스 보어는 러더퍼드의 핵 모형을 받아들여, 마치 태양계처럼 핵 주위를 전자가 회전하는 원자모형을 제시했다. 그는 여기에 양자가설을 사용해서 2가지 제한을 했는데, 첫째, 전자가 특정한 궤도 위에만 존재할 수 있고, 둘째, 전자가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전이할 때 복사선의 형태로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것이었다.

    빛이 파동인가 입자인가에 대해, 2가지 새로운 실험 결과가 입자론을 지지했다. 미국의 로버트 A. 밀리컨이 광전효과를 실험적으로 검증했으며, 아서 H. 콤프턴은 X선이 전자와 충돌할 때 마치 입자와 같은 성질을 보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드 브로이는 파동-입자 이중성이 빛 이외의 전자나 다른 모든 입자에 적용된다고 제안했다. 1926년 에르빈 슈뢰딩거는 이러한 제안을 바탕으로 '파동역학'을 만들었다. 이 파동역학은 어떤 계(系)의 파동함수도 만족시키는 방정식을 그 구성요소의 질량·전하로 얻어냄으로써, 계의 에너지 준위를 구하는 것이었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양자역학이라 부르는 일반적인 이론의 가장 편리한 형태이며, 독일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막스 보른도 양자역학에 기여했다. 양자역학을 만든 과학자들은 이 새로운 이론의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 의견을 달리했다. 보른은 파동 함수를 전자 위치의 확률 분포로 해석했으며, 하이젠베르크는 "위치를 더 정확하게 측정할수록 속도는 불분명해진다"는 불확정성의 원리로 보른의 해석을 분명히 뒷받침했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통해 보른과 하이젠베르크의 해석에 반대했다. 보어는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과 같은 양자물리학의 특성이 고전 물리학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보완하는 것이며, 파동과 입자의 성질은 우리가 무엇을 측정하는가에 의존한다는 '상보성원리'를 제안했다. 코펜하겐 해석으로 알려진 보어의 관점은 물리적 실재가 측정에 의해 결정된다는 원리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양자물리학에 대한 정통 해석으로 받아들여졌다. 1970, 1980년대의 실험은 이러한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하고 있다.


    양자 물리학의 발전과 함께 화학 결합의 본질을 양자역학을 응용해서 설명하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1927년 독일의 발터 하이틀러와 프리츠 론돈은 2수소원자계의 파동함수를(스핀을 포함해서) 근사적으로 구했는데 비대칭적인 파동함수는 인력을 낳았고 대칭적인 파동함수는 척력을 낳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전자의 스핀이 반평행일 때 2수소원자계는 분자를 형성할 수 있다. 하이틀러-론돈 방법은 미국의 존 C. 슬레이터와 라이너스 C. 폴링에 의해 발전되었다. 특히 폴링은 공유결합 방법을 제창했는데, 이는 2원자가 각각 전자를 하나씩 내놓아 공유한다는 가정하에 전자쌍에 대한 파동함수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과학자 로버트 S. 멀리컨은 분자 궤도함수에 근거한 분자 구조이론을 제창했다. 이 이론에서는 전자가 특정 원자에 귀속해 있지 않고 전체 분자에 걸쳐 있는 양자(量子) 상태를 점하는 것으로 다루어졌다. 1930년대의 양자화학은 공유결합 이론이 지배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분자궤도함수 이론이 더 강력한 이론으로 대두되고 있다.

    S.G. Brush 글 | 洪成旭 참조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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