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복희 시 읽기>
문복희 시인의 사랑이야기
최 종 문
전주대학교 문화관광대 교수
음악칼럼니스트
나는 시인도 아니고 평론가도 아니다. 따라서 나같은 사람이 시와 시인을
이야기 하거나 이러쿵저러쿵 토를 다는 건 전혀 가당치 않다. 다만 시 읽기를
즐기고, 그 시를 읊은 시인이 누구인가를 상상하는 걸 즐기는 내 오랜 습관이
만들어낸 용기에 힘입어 어느 시인의 이야기를 써 보기로 한다. 이름하여
‘문복희 시인의 사랑 이야기’.
나는 문복희 시인을 자주 보는 편이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본다.
같은 교회를 섬기기 때문이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아주 드물지만
그냥 먼발치에서 스쳐 지나기도 한다. ‘자주 만난다’기 보다는 ‘자주 본다’라고
쓰는 이유다. 어느덧 15년을 훌쩍 넘어 20년이 돼 간다. 그래서 나는 진작부터
그에 관해서 아는 게 제법 많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내 착각이었다. 약간이나마 내가 아는 건 그의 다양한 프로필가운데서 유능한
문학박사/교수로서의 그와, 독실한 크리스쳔으로서의 그에 관한 것뿐이었다.
정작 그의 인간적 측면은 아는 게 별로 없었다. 하기야 수십 년간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도 자기 짝의 진짜 속내를 잘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문 권사님’,
‘최 장로님’이라는 점잖은 호칭에 익숙한 ‘믿음안의 형제’일 뿐인 우리 사이가
아닌가.
그런데 최근 3-4년 전부터 ‘인간 문복희’에 관해서도 조금씩 알게 됐다.
그가 쓴 세 권의 시집 덕이었다. 그가 생산한 주옥같은 시어들이 내게는
‘문복희는 누구인가’를 풀어 낼 결정적 키워드였던 셈이다.
다음은 그렇게 해서 알게 된 문복희 시인에 관한 이야기.
먼저 그는 매우 솔직하고 천진난만한 사람이다. 그런데 천진난만한
사람들의 공통적 특징은 일은 잘 저지르는데 수습을 잘 못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문복희 시인은 일을 잘 저지르면서도 수습의 능력이 빼어나다.
그의 시에는 이를테면 성과 속, 순수와 허위 또는 가식의 대립과 모순,
그리고 그가 겪은 갈등의 내력이 비교적 또렷한 잔상으로 남아 있는데
수줍어 하는 기색도 역연하다. 그 수줍음과 쑥스러움 때문일까 국면을 전환하고
상황을 수습해 보려는 기민한 행동도 날렵하다. 그 과정이 예쁘고 아름다워서
적잖은 감동을 주거니와 만만치 않은 품격이 그의 시어들의 영롱한 광채
틈사이로 읽혀지는 이유다.
예컨대 너무나 아름답고 고결한 나머지 강한 유혹까지 느끼게 하는 백목련의
‘40대 여인의 잔잔한 눈웃음’ 은 ‘차갑게 핀 지등(紙燈)’ 으로 슬쩍 쿨다운 되고,
‘물에도 젖지 않는 얼음꽃’ 의 카리스마는 ‘출렁이는 찻잔(茶盞)’ 이라는
낭만의 옷에 휘감겨 상당한 이미지 변신이 이루어진다. 심지어 꽃이 진
그 자리마저 ’부활‘ 과 ’침묵’ 으로 채워진다. <백목련>
그뿐 아니다. 트롯트 가요나 신세대 랩뮤직의 가사로 써도 좋을 감성적 시어들,
예컨데 ‘수줍은 여린 어깨’, ‘속살 고운’ ‘손가락에 맺은 인연’ 류의 시어들이
천박함의 혐의를 능히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지고’ 와 ‘지순’ 따위의 품격
시어들과의 화학적 블렌딩 효과 때문이 아닐는지<치자꽃>.
이 같은 블렌딩 효과는 그의 적지 않은 작품에서 쉬 발견되는데 상호모순
또는 상충되는 개념의 시어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솜씨 또한 섬세하고
능수능란하다.
둘째로 그는 사랑의 아름다움과 그 놀라운 힘을 믿는 사람이다.
그는 사랑은 이유 없이, 조건 없이 아름답다고 본다. 이루지 못할 사랑,
짝사랑도 충분히 아름다우며 심지어 유치찬란하거나 지나치게 관능적이고
농염한 사랑에게도 따뜻한 눈길을 보낸다. 이처럼 사랑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적극적 수용 자세는 요즘처럼 사랑이 있다고 해도 감동 스토리가 없어 무척
드라이하고 썰렁한 ‘사랑 결핍시대’ 에는 매우 요긴하게 쓰일 덕목이 아닐까 한다.
그러면 문복희표 사랑의 구체적 실체는 무엇일까. 그는 반듯하고 착하기
이를 데 없는 ‘바른 생활파 범생’은 아니다. 그리고 느끼하기 짝이 없는
‘닭살과 출신 우등생’도 아니다. ‘이중인격적 내숭파’도 아니다. 오히려 긍정적
‘적극적 행동파’에 더 가깝다. 생각뿐인 소극적 사랑을 그는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에서 간혹 발견되는 남성으로의 성역할 전환도
자신의 사랑에 관한 적극적 생각을 보다 효과적으로 들어내 보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 아닐는지.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전략적 의도는 제대로 맞아
떨어져서 이미 톡톡하게 재미를 보지 않았나 싶다. ‘발등만 바라봐도 눈물나는
내 사랑‘<여인4>으로 시작하여 ’속되게 말할 수 없는 그리운 나의 아내‘<아내>를
거쳐 ’내 몸속에 살고 있는 들꽃같은 아내’<꽃같은 아내>에 이르기 까지
남성이 아니고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절절한 사랑 고백이 그 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발견한 것이 바로 ‘마침내 아랫도리 벗고 익어가는
아내의 방’이요, ‘죽어도 내 곁에 남을 고향 같은 아내의 섬‘이라면 지나친
견강부회일까? <작은 요강> 그 뿐 아니다. ’그대 몸 한 조각이 내 몸의 전체되고
무념으로 꿀범벅되어 젖어드는 눈물사랑‘ <꽃 같은 아내>에게 그는 마침내
’아내여 여기서 머리칼 부비며 끝끝내 함께 살자‘고 우직스럽게 외치는데,
그 모습은 영낙없는 영화 <변강쇠>의 이대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세속적
신파조 사랑의 무조건적인 지지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의 사랑은 매우
똑똑하고 이지적이다. 맺고 끊음이 분명하고 단호해서 그야말로 칼이다.
사랑의 징표인 반지를 ‘마지막 한 방울 피까지 불로 태울지라도 그대를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지는 말자는 약속 그대의 영혼이 내 살점으로 굳어져도 끝끝내
내 작은 심장의 주변에서 테두리로만 남겠다는 고백의 꽃’ <반지>으로
보고 있으니 그야말로 똑 소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셋째, 그는 잘못된 세상풍조와 비틀어진 트렌드에는 진짜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순수와 원칙의 사람이다. 그의 시작품들을 찬찬히 뜯어보면 거친 시어들은
단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다. 정치판과 일부 문화예술계의 막말 풍조에 비견될만한
공격적 전투적 시어들, 그리고 인터넷공간을 휘젓는 일부 지성인들의 말장난 투
시어들의 흔적이 터럭만큼도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시대야말로 인권, 환경,
교육 등 거대담론에 관한 시대의식과 특정 이념의 과잉 노출시대이기에 그의
따뜻하고 순수하며 아름다운 시어가 더욱 돋보이지 않을까 한다.
그는 긍정의 힘을 믿고 금도와 절제의 미학을 실천하는 사람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뜨거운 기독교 신앙의 소유자이자 그 믿음의 실천자이다.
그가 그리는 참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 완전한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진다. 그가 쓴 3권의 시집은 각 권별로 짧은 머릿말이
실려 있는데 모두가 하나님에 대한 절절한 신앙고백이다.
제1권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을 갈망하며‘<첫눈이 오면>,
제2권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숲속이야기>
제3권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페루의 숲>로
채워져 있다.
끝으로 문복희 시인이 15년전 쓴 간증문 ‘믿음 위에 굳게 서는 삶’
(은평 통권 47호, 은평감리교회)의 일부를 공개하면서 글을 마친다.
내가 퍽 오래된 그의 글을 굳이 인용하는 까닭은 그의 요즈음 삶이 그 때의 고백과
신통하게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수없이 많은 역경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첫째 하나님의 믿음위에 굳게 서서 좌절하지 아니하며 나의 꿈(비전)을 키워온 것입니다. 둘째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나의 사랑을 입을 것이라‘는 말씀 위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사랑받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에 우선 내 마음을 써보자는 노력이 작게나마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