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신 오지 말라는 女子
권 녕 하
서울 서북쪽 일산지구 개발 초창기였다. 전철역 인근에 아직 역세권이 형성되기 전이었다. 썰렁한 풍경화風景畵 속에 신축 건물 1층 점포는 죄다 부동산 또는 떳다방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분식집이 하나 달랑 있었다.
소설小說 《십우도十牛圖》(백금남) 작가가 아침부터 사무실로 밀고 들어섰다.
사무실은 5개 부서가 건물 한 층을 통으로 쓰는 뻥 뚤린 공간이었다. 와 본다기에, 퇴근 전 쯤 전화하려니 했더니, 조용한 그 공간에 불쑥 들이닥친 그가 대뜸 한다는 말이 “여기서 일해?”였다.
따갑게 쏠리는 직원들의 시선을 적당히 무시하고 “잠깐! 기다려요”하며, 신속하게 시내출장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새를 못 참고 “손님이 왔으면 술 한잔하자! 해야지…”하며 궁시렁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쿡쿡 웃음소리가 번지고 있었다.
서둘러 따라나서며 그가 한다는 말이 “내가 이래야, 잘 빠져나올 수 있다!”였다. 목소리나 작아야지! 세상 사는 방식이 날 것 그대로였다.
하기사, 선禪을 주제로 삼은 그의 소설小說은 장안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까탈스런 평단에서도 ‘글 잘 쓴다’ 인정받을 때였다. 그랬지만, 레슬러 같은 그의 체격을 꼬집으며 “사우나탕, 같이 가잔 소리는… 절대, 하지마!”하면, 그 큰 어깨를 들썩대며 낄낄거리곤 했다.
사우나탕 스토리는 ‘탕 안에 그 큰 덩치가 들어가면, 쓰나미처럼 물이 넘칠 것이고, 그러다 벌떡 일어나 탕 밖으로 나가면, 질량불변의 법칙에 따라 젖꼭지 아래가 다 드러나 보인다’였다. 그리하여 그 다음엔 셋이면? 부부면?으로 발전하곤 했는데, 일명 〈물 빠진 마른 탕〉 스토리라 서로 일렀다.
“일 다 보고… 술은 언제 살 거야?”
“술집이 보여야 사건 말건 하지!”
“여긴, 술집도 안 보이네?”
“저기 분식집에 들어가 양해를 구해 봅시다”
분식집 아줌마는 등을 보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기분 나빠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막걸리라도 두어병 사다 줄 수 있는지, ‘부탁’을 했다. 그리고 “빨리… 가겠다”고 덧붙였다.
대 낮부터 분식집에 들어와서 술을 사다 달라 했으니, 진상 중에도 진상 손님이 돼버린 것이다. 이어서 안주 될 만한 것을 메뉴판에서 찾지 못하고 계란 후라이 몇 개를 ‘부탁’했다.
그런데 막상 막걸리가 상에 놓이자, 그가 웬 삼겹살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 근처에 음식점도 없고 해서∽ 또 ‘부탁’한다”며, 더불어 가능하다면 혹시 집 반찬 하느라고 사다놓은 거라도 있으면, “줄 수 있겠느냐?” 안주 값은 “달라는 대로… 하겠다”고 하며, 남의 집 냉장고 속 재고까지 들먹이기 시작했다.
분식집 아줌마는 좋다, 싫다, 된다, 안 된다, 도통 말이 없었다.
멋쩍어진 그와 나는 막걸리를 분식집 물 컵에 따라 홀짝거리고 있는데, 주방에서 삼겹살 굽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상추, 깻잎, 참기름, 소금에 삼겹살을 내놓는데, 노릇노릇 기가 막히게 잘 구워진 삼겹살 맛이 그야말로 끝내주고 있었다.
대 낮부터, 썰렁한 개발지의 분식집에서, 때 아니게 만족할만한 술안주를 받아놓은 그와 나는 막걸리 한 순배가 돌자, 기세氣勢가 등등해지며 한탄강을 술안주로 삼기 시작했다.
이때 왜 뜬금없이 한탄강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삼겹살이 원인인 것은 분명했다.
한탄강을 이 잡듯 쑤시며 다니기 시작했다. 포대경으로, 원산으로 향한 철길을 더듬어 시선을 따라가면, 연기만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죽은 도시, 평강이 있었다. 그보다 멀리, 금강산 초입의 삼방이 어렴풋이 짐작되는 지점에서부터 추가령지구대 협곡이 아련하게 이어지고, 절개된 협곡을 따라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내륙의 물길이 설핏 햇살에 반짝이기도 했다.
문득 지나간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지표면 보다 낮은 협곡을 따라, 숨어 흐르는 물줄기, 한탄강이 탄식하고 있었다.《숨어 흐르는 江》(권녕하 시집).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면, 지친 몸을 끌고 찾아가던 그녀에게서 맛 볼 수 있었던, 늘 차려 내놓던 삼겹살 안주. 그녀는 삼겹살을 기가 막힐 정도로 맛있게 구워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만들어내는 음식, 반찬 맛은 충무로 진고개집, 무교동 남포집, 피맛골 남도집을 떠올리게 하는 탁월한 솜씨였다. ‘여자는 살림을 잘 해야 돼!’라는 말에는 ‘음식솜씨도 포함된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은 것은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마장동에 데려다 줘요”
그녀는 이 말을 다짐을 받듯, 만날 때마다 번번이, 그것도 똑같이 반복하곤 했다. 더욱이 이 말을 할 때마다 그녀는 귓바퀴에 입술을 바싹 붙인 채 속살거리곤 하여, 이 말은 마치 둘 사이에 맺은 극비사항인 것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서울 등 외지로 나가다 검문소에서 걸리거나 감시자에게 들켜 다시 끌려오면 또 다른 낯선 곳 전방부대 인근의 다방, 술집 또는 여관 등으로 고리채 빗을 떠안은 채, 또 팔려간다고 했다. 그래서 남성 동반자가 함께 부부처럼 위장하여 탈출한다면 가능하다 했고 성공한 경우도 꽤 있다고 했다. 다만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날’까지 추적해 온 감시자에게 붙잡혀 또 끌려가지 않도록 아예 더 멀리 달아나 새 생활을 꾸려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피폐하고 열악한 환경 때문에 늘 무기력증에 빠져있었다. 풀기 죽은 말투, 매사 소극적인 행동, 여리디 여린 상처 난 꽃잎 같았다. 주민등록증도 빼앗긴 채, 희망이라곤 오직 현실에서의 탈출만이 소원이었다.
그녀는 날이 가면 갈수록 신앙信仰처럼 매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를 생각하면 할수록 수컷이 갖춘 보호본능과 동정심 그리고 정의감이 뜨겁게 달아오르곤 하였다.
그 시절, 소설小說 《별들의 고향》(최인호)이 낭만으로 회자되던 때이기도 했다.
“빨리… 가세요!”
등 만 보이며, 말 한마디 안 하던 분식집 아줌마가 얼굴을 드러냈다.
“애 올 때 됐어요!”
애라니? 그는 급작스럽게 전개되는 상황에 어리둥절 놀라고 있었다. 기가 막히고 이상하고 신기한 극적인 해후 장면을 목격하고만 그는, 그럴 수 있냐는 둥, 감쪽같이 속았다는 둥,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른 척 했다는 둥, 응큼하다는 둥, 대단한 사랑이라는 둥, 한동안 정신없이 상황 분석을 하더니 놀라움과 의혹을 버무려 아예 본격적으로 소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의혹과 놀라움을 해명할 방법도 생각도 아예 없었다. 까닭은 그 이후의 과정과 그 결과를 확인한 것이 방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동안 단단하게 움켜쥐고 있던 지난 시간들이… 그녀와 마주친 순간! 손아귀 밖으로 맹렬하게 튕겨나가고 있었다.
“……!”
“들어 설 때부터… 알았어요”
“얼굴은 변해도… 목소리는 변하지 않아요”
“이젠… 다신 오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