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피 이야기"
지구촌 제1 음료인 커피는 언제, 어디서, 누가 발견했을까?
여기에는 많은 설들이 있으나 최초의 커피 발견자는 6~7세기경 에티오피아 아비시니아 지방에 살았던 목동 '칼디(Kaldi)’ 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달리 성실하였던 '칼디'는 염소를 보살피는 일에는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 염소들의 습관이며 즐겨먹는 목초 등을 세심하게 관찰해 보살펴주어서 칼디의 염소들은 건강하고 성장속도도 빨랐다.
목동으로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칼디는 이상하게 생긴 붉은 열매를 먹고 있는 염소들을 목격하였다.
칼디'는 그 열매가 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염소들이 실컷 먹을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붉은 열매를 먹은 염소들은 모두 힘이나서 활동적으로 되고 흥분하여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칼디'는 염소들이 먹은 열매를 따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물에 끓인 후 마셔 보았더니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칼디'가 이 신기한 사실을 인근 이슬람 수도원의 수도사들에게 알리자 수도사들은 이 열매가 악마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모두 불 속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던져버린 커피 열매가 불에 타면서 특이하고 향기로운 냄새를 내기 시작했고 수도사들은 곧바로 불에 타다 남은 열매를 수거하여 뜨겁고 검은 커피 음료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수도사들은 커피가 잠을 쫓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도 알아내 그때부터 사원의 수도사들은 밤에 기도할 때 졸지 않기 위해 이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커피란 이름은 어디에서 연유된 것일까? 여기에도 몇 가지 주장이 있으나 그 가운데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에티오피아의 지명 ‘카파(Kaffa)’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랍어로 ‘힘’을 의미하는 말로, 이 지역은 에티오피아의 커피나무 자생지이기도 하다.
이 말이 터키로 전파되어 Kahweh,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에서 Cafe, 이탈리아에서 Caffe, 독일에서 Kaffee, 영국과 미국에서 Coffee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처음 마신 사람은 고종황제인데, 1896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당시 처음으로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1902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하우스인 손탁호텔(Sontag Hotel)이 문을 열었으며,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인스턴트 커피가 일반인들 에게도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세계 3대 커피 ㆍ예멘의 모카 (Mocha) ㆍ자메이카의 블루마운틴 (Blue Mountain) ㆍ하와이의 코나 (Kona)
예멘의 '모카'는 한때 세계 최고의 커피 무역항이었던 모카항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커피의 여왕"으로 지칭된다.
지금은 예멘과 에티오피아에서 생산되는 커피를 '모카 커피'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메이카의 '블루마운틴'은 "커피의 황제" 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영국 왕실에 납품되는 최고급 커피다.
'코나' 커피는 하와이 빅 아일랜드의 북쪽과 남쪽 코나 지역의 Hualalai와 Mauna Loa의 경사면에서 재배 된 커피의 시장 이름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되는 커피 중 하나다.
하와이의 '코나'는 파인애플 향의 약간 신맛이 난다.
커피의 꽃말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Always be with you)
사랑은 4가지 종류가 있데요. ㆍ육체적이고 정열적인 에로스 사랑 ㆍ동료적이고 우정적인 필리아 사랑 ㆍ순수하게 정신적인 플라토닉 사랑 ㆍ희생적이고 조건없는 아가페 사랑 한 여인이 한 남자를 그리워하다 죽어서 그 여인의 무덤가에 피어났던 꽃의 열매가 바로 '커피'라 합니다.
커피의 색은 어두운 핏빛인데 그건 그 여인의 눈물 빛깔이고 너무나도 울어서 피 눈물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랍니다.
커피가 쓴 이유는 기다리는 마음 때문이고 커피를 마시면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밤낮으로 그 사람을 기다렸던 그 여인의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커피의 향이 그윽한 이유는 그 여자의 사랑하는 마음이 향기가 되어 흩날리기 때문이랍니다.
---------- ♧호남 예찬 ♡!(湖南禮讚)♧ 💌💌💌💌💌💌💌 ☆《♡松香 ,宋昌鎬 ♡》☆ 💌💌💌💌💌💌💌
호남(湖南) : 그곳은 자연환경이 아름답고, 풍요(豊饒)하여, 축복(祝稫)받은 땅으로서 예술(藝術)의 고장이며 또한 정의(正義)로운 고장이기도 하다. 첫째 :자연 환경이 아름답고 풍요(豊饒)하다.
1) 산 (山) 한반도의 등줄기 태백산맥(太白山脈)에서 분기(分岐)하여 서쪽으로 나아가다 다시 남쪽을 향해 푸른 남해 바다와 다도해(多島诲)를 집어 삼킬듯 내리 뻗다 멈춰선 소백산맥(小白山脈).
그리고, 국토를 횡단하여 저 거대한 중원대륙(中原大陸 )을 향해 힘차게 뻗어 나아가다 멈춰선 노령산맥(蘆嶺山脈).
호남은 그 우람하지만 모나지 않은 양대 산맥의 자락안에 다소곳하게 자리잡고 있어 기후가 따뜻하고 땅이 풍요하여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마음을 온화하고 너그럽게 만들어 주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그 양대 산맥의 전체적인 형세를 우리 인체(人体)에 비유(比喻)해 보면, 머리 위치에는, 어리석은자도 그곳에 머물면 스스로 지혜로워 진다는 "지리산((智異山),,
오른쪽 가슴 위치에는, 거친 사람도 그곳에 머물면 덕이 쌓이고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는 "덕유산(德裕山),, 왼쪽 가슴 위치에는, 겉은 비록 평범 하지만 그 내면이 화려하고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는 "내장산(内藏山),,
발끝 위치엔 하얀 구름위에 신선(神仙)이 머문다는 왼쪽 발끝 위치에는 "백운산((白雲山 ),, 오른쪽 발끝 위치에는 "운장산(雲長山),, 이 자리잡고 있다. 구름위를 걷듯 조심스러우면서도 신선(神仙)처럼 우아하게 행보 하라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끝 위치엔 상대를 대하고 나눔에 있어 차등(次等)을 두지 말고 모두에게 평등(平等)하게 대하라는 "무등산(無等山),,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렇듯 자연 산세가 머리에는 지혜(智慧)를, 가슴속엔 덕(德)과 여유로움(裕)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행보(行步) 할때는 구름위를 걷듯 조심스러우면서도 신선(神仙)처럼 우아하게 행보 하며, 사람을 대하는 손끝엔 누구에게나 차등을 두지 말고, 모두에게 평등하게 대하라는 어진 현자(賢者)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이렇듯, 신선이나 어진 현자가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풍수지리(風水地理)의 형세가 또 어디에 있을까요?
2) 들 (野) 포근하고 따뜻한 어머니의 젖가슴과 같은 들녁. 오른쪽 젖가슴 위치에는 끝자락이 보이지 않게 펼쳐진 넓고 비옥한 호남평야(湖南平野). 왼쪽 젖가슴 위치에는 따뜻한 기후와 기름진 나주평야(羅州平野).
그 비옥한 땅에서 생산되는 풍성한 곡식들은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무한 식량의 보고(食糧寶庫)였다. 산악 지방에서 생산되는 거친 곡식에 비해 기름진 땅에서 생산되는 쌀과 오곡백과(五穀百果)는 우리 인간의 심성을 부드럽고 너그럽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런 따뜻한 마음을 서로 나누고 베풀어 훈훈하고 정이 넘치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왔다. 그리하여 일찍이 선사시대(先史時代) 부터 인류문화가 이곳으로 부터 먼저 발달하여 대부분의 청동기시대 유물(青銅器遺物)과 고인돌 등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옛부터 산세가 험한 주변의 국가들은 식량이 풍부한 이곳 (백제:白濟)을 호시탐탐 노리고 침략 찬탈(侵略篡奪) 하고픈 선망의 영지(羨望靈地)였다. 하지만 옛 백제는 그런 주변국들을 그렇게 욕심을 내거나 넘보지 않고 반면으로 학문과 문화 그리고 문물을 발전시켜 멀리 일본(日本)에 전파하고 당(唐)나라 와도 교류 하였다. 3) 내(江) 오른쪽 가슴 위치에는, 서해를 향해 흐르면서 곡창(穀倉) 호남평야(湖南平野)의 모든 곡식들은 풍성하게 자라고 알찬 열매를 맺게 해주는 젖줄 "금강(錦江 ),, "만경강(萬項江 ),, "동진강(東津江 ),,.
왼쪽 가슴 위치에는, 남서쪽을 향해 흐르면서 곡창 나주평야(羅州平野)를 옥토로 만들어 주는 젖줄 "영산강(榮山江 ),,.
그리고 동남쪽을 향해 흐르는 "섬진강(蟾津江 ),, 1급수 에서만 서식 한다는 은어가 뛰놀고 하구에서는 우리 입맛을 돋우어 주는 제첩 조개와 벚굴(벚꽃이 필때 최상의 맛을 낸다는 어른 손바닥 보다 더 큰 민물굴) 그리고 민물참게의 서식지로 유명한 물맑은 강이다.
4) 개펄 과 해안(诲岸) 서해바다(중국명:黃诲 ): 북쪽으로 부터는 75만 평방 km 이상의 중국 대륙을 휩쓸고 5500km 이상을 달려 내려와 연간 15억톤 이상의 황토와 부유물(浮遊物)을 서해바다로 쏟아내는 백년하청(百年河清)의 "황하강(黃河江),, 남쪽으로 부터는 중국 제일의 강 "양쯔강(揚子江),,으로 부터 또한 막대한 부유물을 수천,수만년 동안 서해로 쏟아 부어 그 모든것을 바닥에 퇴적(堆積) 시키고 또 그 위에 우리나라에서 서해바다로 흐르는 수많은 강들, 그 강물에 섞여 흘러내리는 부유물들을 그위에 쏟아부어 비옥하기 비할데 없는 서해안 개펄.
그 비옥한 개펄과 바다에서 생산되는 맛좋고 영양이 풍부한 각종 조개류 그리고 낙지, 쭈꾸미 등의 연체어류(軟體魚類), 그밖에도 꽃게,새우 그리고 또 조기(다습한 해풍에 말리면 굴비),홍어, 등등.
그리고, 서해안 평균 수심이 40미터 밖에 되지 않은 관계로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커 간석지(干潟地:썰물때 드러나는 지역)가 많이 드러나기 때문에 소금을 생산 하기에 최적의 조건이 형성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질 좋은 소금 또한 이곳에서 생산된다. 그리고 강 어귀 습지는 모든 바다 생물이 알을 낳고 자라기에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그리고 서남 해안과 다도해에서 생산되는 김, 미역, 다시마 등의 해조류(诲藻類) 및 멍게, 홍합, 해삼 등... 그 어느것 하나 우리에게 없어서는 절대 않되는 중요한 천연의 바다 식량 자원이다.
둘째 : 호남은 문화(文化)와 예술(藝術), 그리고 가락의 고장이다 .
온화하고 풍요로운 자연 환경과 넉넉하고 훈훈한 인심에 힘입어 옛부터 호남 지역에서는 유명 화가,문인, 예능인, 명창 소리꾼들이 많이 나왔고 각 지역별로는 관련된 축제, 행사 등이 많이 열리고 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명한 문학작품으로 "송강 정철(松江 鄭澈),, 의 "송강가사(松江歌辭),,의 대부분,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의 "어부 사시사(漁父四時詞),,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의 "목민심서(牧民心書),, 이러한 이조시대 3대 장르(詩, 歌辭, 訓書)를 대표하는 불후의 명작들이 다 이곳 호남 지역에서 귀양(流配) 살이중 또는 귀향(歸鄉)중에 만들어진 작품 들이다. (* 송강 정철은 당시 우의정으로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서인의 영수로서 대개 호남인으로 주축이된 동인 사람들을 무수하게 죽이고 귀양보낸 당사자로서 호남 사람들 에게는 원수와 같은 인물 이지만 이곳에서 쓰여진 그의 문학적 가치만은 높이 평가된다).
이런 유명한 작품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주변 환경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온화하고 아름다운 주변의 자연 환경과 훈훈한 인심에서 비롯된것 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전라도가 한곳의 귀양지로 정해진 배경에는 아마도 죄인이 그곳에 가서 주변의 자연 환경과 주변 인심에 감화( 感化)되어 마음을 다스리고 반성(友省)하고 정화(淨化) 시키라는 어느 어진 임금의 신하를 사랑하고 아끼는 현명(賢明)하고 속깊은 배려(配慮)가 아니었을까 나름대로 생각한다. 근대에 이곳 출신의 유명 화가 로는 "소치 허련(小癡 許鍊),, "의제 허백련(毅齊 許百鍊),, "남농 허건(南農 許件),, 등으로 이어지는 남종화(南宗畫) 의 대가들, 그리고, "오지호(吳之湖),, "김환기(金煥基),, "천경자(千鏡子),, 등의 유명 서양 화가등이 모두 이고장 출신이다.
그리고, 시인으로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의 "김영랑(金永郎),, "떠나가는 배,, 의 "박용철(朴龍喆),, 을 비롯하여 "고은(高銀),, "문병란(文丙蘭),, 군부 독재 시대의 저항시인 "김지하(金芝河),, 노동자들의 대변 시인 "박노해(朴勞解),, 등이 있고 , 소설가로는 "백화,, 의 "박화성(朴花城),, "태백산맥(太白山脈),, 의 "조정래(趙廷來),, "서편제(西便制),, 의 "이청준(李清俊),, 을 비롯하여 "김승옥(金承鈺),,"송기숙(宋基淑),,연출가 "차범석(車凡錫),, 등도 모두 이고장 출신이다.
그리고, 특히나 이 고장은 일찍부터 가락과 소리가 조화롭게 잘 발달 되어 온 고장이다. 이고장 사람들이 즐겨 불러왔던 노래를 들으면 그들만의 정서와 감정이 노랫가락에 잘 어우러져 있다. 함께 즐거워 하고 함께 슬퍼했던 흥과 한이 노랫가락에 절절하게 베어있다. 우리나라 3대 "아리랑,,중 으뜸인 "진도 아리랑,,이 그렇고 "서편제,, "동편제,, 등의 대부분의 가락이 그렇다. 흥겨운 대목의 노랫가락에서는 절로 어깨춤이 들썩여 지고 한 서린 대목에서는 가슴을 후비고 애간장을 녹이는 애절한 감정이 그대로 가슴에 깊이 전해진다.
그래서 특히 이 고장에서는 유명한 소리꾼들이 수없이 배출 되었다. 근,현대 유명 소리꾼들로는, "박유전(朴裕全),, "정응민(鄭應民),, "임방울(林芳蔚),, "조상현(趙相腎),, "성창순(成昌順),, 등의 서편제 판소리의 명창들... 남원 지역을 중심으로 동편제 판소리의 거장 "송흥록(宋興祿),, "송만갑(宋萬甲),, 을 비롯하여 "박초월(朴初月),, "안숙선(安淑善),, 등의 판소리 명창들... 그리고, 가야금 병창의 거장 "심상건(沈相建),, "오태석(吳太石),, 을 비롯하여 "강도근(姜道根),, "강순영(姜順令),, "오갑순(吳甲順),, "이영희(李英姫),, 등의 국보급 가야금 병창들... 또한 대중가요 가수의 큰별 "이난영,, 을 비롯한 "남진,, "송대관,, "하춘화,, "김연자,, 등의 유명 대중가요 가수들도 이고장 출신들이다.
그리고 학문을 중시하고 예술을 사랑했던 이고장 에서는 전주(全州) 지역을 중심으로 질 좋은 한지(漢紙)의 생산과 강진(康津) 지역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도자기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가 그곳에 "사스마 도가,,를 만들어 그 후손 대대로 지금까지 15대에 걸쳐 420여년 동안 일본 도예의 명가 "심수관 가(沈壽官家),, 를 이루어 일본 도예계를 이끌고 세계에 그 위상을 세운 그들의 선조 "심당길(沈當吉),, 또한 이고장 남원 출신이다.(*참고로 그들은 지금까지도 創氏改名을 하지 않고 조선 이름을 고집하여 조선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살아 간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고장 출신의 사회적, 정치적 유명 인물로는 우리나라 개화기 민족지도자요,독립운동가이자,정치가인 "송제 서재필(松齊 徐載弼)박사,, "고하 송진우(古下 宋鎮禹),,선생 그리고 교육자이자 언론인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 말년에 친일 운동가로 변절해 지탄을 받았지만...),, 등이 있다. 끝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평화 주의자(平化主義者) 요, 인본주의자(人本主義者) 이신 우리나라 제 15대 대통령 "김대중(金大中),, 평생을 역경의 가시밭길을 걸으면서도, 엄동설한(嚴冬雪寒)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자라는 "인동초(忍冬草),, 의 삶은 꿋꿋하게 살아오신 인간 승리의 표상, 한국의 민주주의 와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쳐 살아 오신분, 정치적으로는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시고 우리나라의 국제금융위기(I. M.F.) 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노벨 평화상,, 을 수상하여 세계에 그의 이름과 우리나라를 빛나게 하신분, 그분 또한 이고장 출신이라는게 자랑스럽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는 각 지역별로 지역 특성에 걸맞은 축제와 행사들이 많이 열리고 있다. ""대 사습놀이,, "춘향 선발대회,, "판소리 경연대회,, "소리 축제,, "꽃 축제,, "차(茶) 축제,, "유자 축제,, 등등... 그 밖에도 각 지역별로 각종 특산물 축제들이 많이 열리고 있다.
셋째 : 호남은 민중 항쟁(民衆抗爭)의 정의(正義)로운 고장이다.
임진왜란 (壬辰倭亂)당시 모든 조선인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을때, 그 두려움과 공포를 용기와 희망으로 바꾼 원동력은, 바로 전라 좌수군(全羅左水軍)의 해상전력(海上戰力)과, 육상 의병(義兵)들의 정신전력(精神戰力)이 합쳐저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업적이 되었다. 곧, 거기에는 일본장수들 까지도 존경심을 갖게 했다는 세계 인류역사상 해상전투의 최강자 "성웅 이순신 (聖雄 李舜臣),,. 그 이순신 장군을 도와 임진왜란 7년 전쟁을 백전백승 (百戰百勝)으로 이끈 4명의 위대한 참모들, 영암(靈巖) 출신의 녹도만호(鹿島萬户) "정운(鄭運),, 거북선 개발 및 제작의 총 책임자, 나주(羅州) 출신의 "나대용(羅大用),, 이순신 장군 보다 31살이나 연상이며,선배 수군절도사 였던, 고흥(高興) 출신의 "정걸(丁傑),, 이순신 장군의 직계수하 핵심 참모, 고흥(高興) 출신의 "송희립(宋希立),, 아마도, 이 네 사람이 없었다면 이순신도, 조선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육지에서는 호남의 곳곳에서 들풀처럼 일어난 의병(義兵)들, 그들의 중심에는, 광주(光州) 출신의 "고경명(高敬命),, 나주(羅州) 출신의 "김천일(金千鎰),, 광주(光州) 출신의 "김덕령(金德齡),, 화순(和順) 출신의 "최경회(崔慶會),, 그리고, 신무기 "화차(火車),,를 만들어, 육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성(長城) 출신의 "변이중(邊以中),, 등- 만약에 이들과 이들을 따르는 의병들이 없었다면 전라 좌수군의 전력 만으론 호남도 조선도 구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왜군은 조선의 북쪽 끝까지 다 점령 했지만 끝내 호남만은 다 점령하지 못한채 물러가고 말았다.
그리고, 조선 말기의 "동학 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일제강점기 "광주 항일 학생운동(光州坑日學生運動),, 군부 독재 시대의 "광주 민주화 운동(光州民主化運動),, 이 모두가 민중이 봉기(民衆蜂起)하여 분연히 일어섰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욕망과 정치적 권력의 탐심(貪心)이 아닌 순수한 민초(民草)들의 항쟁이 었다. 그들은 한없이 온화하고 순박한 농사꾼 이었고, 학생들, 그리고 소시민들 이었다. 하지만 불의를 보고는 죽음을 불사하고 거대한 바위와 같은 불의의 집단 앞에 피 흘리고, 찢기고, 목숨까지 바쳐 항쟁 하였다.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며, "의향호남(義鄉湖南),,의 정신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시드니에서 松香 --
------------ 토요 역사 <미국 월턴 워커 장군 이야기>
출생ㅡ사망1889 ~ 1950 국적ㅡ미국 활동분야ㅡ군사 출생지ㅡ미국 텍사스주 미국의 군인. 텍사스주 출생.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때에는 패튼 장군 휘하에 있으면서 유럽의 여러 전선에서 공을 세웠다. 1950년 6 ·25전쟁이 발발하자 미 제 8군 사령관 으로서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낙동강전투 등을 지휘하였다.
그의 전사지를 찾아서 1950년 8월 낙동강 전투 ! 사수냐, 죽음이냐 ! 금방이라도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북한군의 공세 앞에 낙동강 방어선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 였다. 대한민국은 제주도나 서사모아의 어느 섬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때 미 8군 사령관 워커(Walton Harris Walker) 장군은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고 이상 더 물러설 곳도 없다.'고 하며 낙동강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였다. 1950년 7월 29일 그가 예하 사단에 하달한 제 8군 사령부의 작전 명령 일부를 소개한다. “사수 아니면 죽음(stand or die)" -.우리는 시간과 싸우고 있다. 더 이상 후퇴, 철수, 방어선 재조정은 없을 것이다. 더 이상 퇴각할 곳은 없다.- 부산으로의 후퇴는 역사에 남을 대학살이 될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 . 우리는 함께 싸울 것이다. 만약 우리 중 일부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면, 우리는 모두 함께 싸우다 죽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이 방어선을 지킬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이해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잊혀진 전쟁, 잊혀진 영웅에게 우리는 이제 기억해야 할 전쟁, 잊지 말아야 영웅이 워커 장군이다. 그는 1912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세계 1차 대전 때 기관총대대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은성훈장을 받았다. 제 2차 세계대전 때는 조지 패튼 장군 휘하에서 군단장을 맡아 연합군의 선봉에 서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급파 되었다. 그는 평소에는 조용한 성격이었으나 전장에 나서면 그의 애칭인 '불독'처럼 집념과 투지가 넘치는 군인이었다. 지프와 경비행기로 최전방을 쉴 새 없이 누비던 그의 집념은 마침내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게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국가존망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구축한 대한민국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아군은 한때 영산, 다부동, 영천, 포항을 동시 돌파 당하는 백척간두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45일간의 사투 끝에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최대 위기를 극복하고,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어 서울 수복을 거쳐 평양 탈환, 압록강까지 북진을 끝까지 지휘한 워커 사령관 ! 공산주의 앞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던 대한민국에 희망을 안겨준 구국의 영웅 워커 장군이었다. 그러나 1950년 12월 23일 성탄절을 이틀 앞두고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워커 장군의 외아들 샘 워커 대위는 한국전 최전방의 소총 중대장으로 참전, 중공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하였다. 이 공로로 은성무공훈장을 받게 되었고, 워커 장군은 전방 시찰과 함께 이를 축하하기 위해 가던 중 지금의 서울 도봉동 596-5번지 현장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날 오전 10시경 워커 장군 일행이 탑승한 두 대의 지프차가 의정부 근처에 있는 미 제9군단 예하 24사단 전투지휘소를 향해 이동하던 중이었다. 그 때 한국군 제6사단 2연대 수송부 정비대 민간 수리공(문관) 박경례 (27세,무면허)가 수리를 마친 닷치 쓰리쿼터(4/3톤)의 시험주행을 위해 트럭을 출발시키던 중 마주오던 워커 중장과 부관, 운전병, 호위병 네 사람이 타고 있던 지프의 측면을 들이받아 지프가 균형을 잃고 전복되었다. 워커 장군은 앞 유리창 밖으로 튕겨나가 땅바닥에 부딪치면서 즉사하고 말았다. 사고 운전자는 과실치사로 3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현재 1호선 도봉역 2번 출구 맞은편 아파트 대로변에 워커 장군 전사지(戰死址)라는 초라한 표지석이 놓여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그 어느 누구도 눈길 조차 주지 않는다. 실제로 사망한 장소인 도봉동 596-5 번지는 이곳에서 140여 미터 떨어진 이면 도로변 조그마한 2층 상가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위대한 전쟁 영웅의 전사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하고 쓸쓸하다. 바로 옆에 두고도 늦게 찾은 나의 잘못을 꾸짖어본다. 아버지의 유해는 의전부대에 맡기고 바로 전장으로 돌아가 싸우겠다는 아들 샘 워커에게 맥아더는 직접 알링턴 묘지에 가서 안장시키도록 명령했다. 워커 장군은 대장으로 추서되었고, 아들 샘 워커 대위는 훗날 미군 역사상 최연소 대장이 되었다. 아버지를 머나먼 한국 땅에서 잃고도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샘 워커, 참된 군인의 길을 보여준 아버지와 아들, 이들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표상이었다. 워커 장군이 아들과 함께 했던 6.25 전쟁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인 곳도 많이 있다. 서울 워커힐 호텔, 서울 워커힐 아파트, 캠프워커, 대구시 남구에 있는 주한 미군 육군 비행장 캠프 워커, 미국 육군이 워커 장군을 기리어 명명한 M41경전차 워커 불독, 6.25 전쟁 초기 미8군 사령부였던 워커하우스(부산부경대학교 내), 워커 장군 전사지 표지석(서울 도봉동) 등등이다. 워커힐 호텔은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그 워커힐이 워커 장군이라는 군인을 기리어 지어진 명칭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워커는 맥아더와 비교하면 철저하게 잊혀진 인물이다. 북한군의 화마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한 특급 소방수 워커 장군 ! 인천상륙작전에 많은 병력이 동원되고 열세한 병력으로 한쪽이 터지면 다른 쪽의 병력을 빼서 틀어막는 전략을 쓰다보니 특급 소방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나마 방호산이 지휘하던 인민군 6사단이 마산 쪽으로 측면 기습을 시도하는 바람에 이 전략도 무너질 뻔했다. 어렵고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2013년 10월 워커 장군의 손자인 월튼 워커 2세와 샘 워커 2세가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에 위치한 할아버지의 추모비에 헌화했다. 제 1회 한미 동맹상 시상식에 할아버지를 대신한 손자들은 워커 장군을 기억하고자 애쓰는 한국인 에게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6.25 전쟁 속에서 꽃피운 혈맹의 기억을 후세에 물려주기 위해 새긴 워커 장군의 추모비. 이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낸 오오 워커 장군 ! 그 이름은 대한민국과 함께 영원히 빛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