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
조장빈
Ⅰ
아침 산책 후 ‘어북장국’을 먹던 평양 조기회 그리고 서울에서는 취운정을 올라 삼청공원으로 내리거나 인왕산 버드나무 약수터를 찾던 이들이 1927년 ‘무레사네’ 모임을 만들어 근교의 사적과 산을 찾았다. 1930년대 중반 점차 산을 찾고 근교 암봉을 등반하는 이들이 늘어나자 버드나무 약수터를 찾았던 몇 몇 인사들도 치마바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백령회의 설립 회원인 양두철은 어릴 적 동네뒷산인 인왕산을 아침마다 오르며 체부동에 살던 엄흥섭, 옥인동에 살던 주형렬과 교류하였고 함께 인왕산에서 암벽등반 연습을 하다가 1년 후 엄흥섭 집에서 정기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그때 산에 다닌다는 것은 대개 하이킹이었는데, 우리는 록클라이밍을 하자고 해서 인왕산에서 연습을 했지. 아침 6시면 모였는데 여기서 공일날 어디 가는 거며 이것저것 상의를 했어. 그렇게 모여서 1년쯤 바위를 같이 하다가 모임을 하나 만들자 하게 됐어. 한국에 그때까지 한국인끼리의 산악회가 없었거든. 모임이 생긴 후 일주일에 한번쯤 체부동에서 모였지. 엄흥섭 씨의 체부동 집이 말하자면 회의 장소이자 사무실이었어. 아침에 만났을 때 오늘 저녁에는 체부동에 모여라 해서 여러 가지를 논의 하고 공부도 했어. 주형렬이, 나, 김정태 모두 바위깨나 했으니 셋이서 만나면 어려울 것이 없었지 뭐.”
회의 설립 연도는 대부분 1937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회원들의 증언은 1937년 또는 1938년으로 각기 다르다. 이는 1937년 연습등반을 시작한 시기를 설립으로 보느냐 또는 정례모임을 갖은 1938년을 기점으로 하느냐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회의 명칭은 금요일 정례모임으로 인해 “금요회”로 일컬은 듯하고 “白嶺會”로 정한 것은 언제인지 명확히 전하는 바가 없다. 양두철은 백령의 본래 뜻이 한복의 깃인 ‘동정’을 의미하는 “白領”이었다고 한다. 김정태는 《登山 50年》에서 “백령(白嶺)의 ‘백(白)’은 백의민족과 백두산, 그리고 순결을 의미한다. ‘령(嶺)’은 높은 뜻과 이상의 산을 지향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양두철과 김정태의 전언은 이광수의 소설 《선도자》의 백령회를 떠올리게 하는데 선도자에서는 백령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백령이란 흰 동정이란 뜻이다. 우리는 흰 동정을 다는 백성이니 흰 동정이 모여 크게 흰 동정의 힘과 빛을 발하자는 뜻이다. 백두산 머리를 영원히 덮은 흰 눈, 조선사람의 목에 영원히 둘린 흰 동정, 이것이 「영원히 순결하여라!」 「영원히 외로워라!」 「영원히 새로워라!」 「영원히 하나이어라!」 하는 우리 민족의 이상을 상징한 것이다.”
금요회가 발족되고 1938년 10월 초 북한산 비봉 집회를 가진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라고 한다. 비봉에는 이 땅의 주인이 우리임을 상징하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져 있다. 국권을 상실한 시기, 발아래 펼쳐진 경복궁의 총독부 건물은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를 떠올리게 했을 터이다.
“白領”의 의미는 ‘백의민족의 영토’라는 해석을 해볼 수도 있어 금요회의 비봉 기념등반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도자의 비밀결사 백령회는 회가 설립되고 1년 후 북한산 비봉(碑峰)에서 “승가결사”라는 설립회원의 기념식이 있었는데, 금요회가 기념식을 비봉에서 한 것은 그즈음 회명을 “白領”으로 염두해 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엄흥섭은 금요회 회원들과 이 땅의 산을 우리의 손과 발로 오르리라는 다짐 속에 승가사로 내렸겠다.
북한산 인수봉 정상석 아래에 모인
백령회의 엄흥섭(주석), 주형렬, 김정태, 양두철
(손경석은 194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Ⅱ
엄흥섭이 백령회를 이끄는 동안에 YMCA의 현동완은 정식적인 후원을 하였다고 한다. 엄흥섭은 자유·평화·사랑의 참세계인 자연으로 나아가라는 그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고 백령회를 주도하여 우리나라 산악운동의 토대를 만들었다.
해방 후 한국산악회 2대 회장에 재임 중이던 현동완은 해방을 두 달 앞두고 요절한 엄흥섭의 추도식을, 김정태 등 백령회 출신의 회원들에게 요청했다. 엄흥섭의 뜻이 잊히지 않길 바랐을 테고 애제자에 대한, “종로의 성자” 현동완의 마지막 배려였으리라.
YMCA 운동부 간사였던 현동완은 선린상업의 농구·배구 선수였던 엄흥섭을 지도하였다. 그는 1926년 4년간의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YMCA 수습간사를 마치고 귀국하여 “평화구락부”를 설립하였다. 매주 금요일에 정기집회를 갖고 평화의 이름 아래 개인적 수양과 사회봉사의 훈련을 받도록 했는데, 수련내용은 금요기도회, 등산, 도보여행, 근로봉사, 구제활동 등이었다.
1928년 여름, 그는 스스로 고안한 삼륜 포장마차를 끌고 서해안 일주를 떠났고 엄흥섭도 이 서해안 일주 여정에 참여했다. 현동완은 서해안 일주 여행의 의미를 자유·평화·사랑의 참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외쳤다.
“할 수만 잇스면 놉흔山에 올라서 喇叺을 입에 대고 힘ㅅ것 외치고 십습니다. 우리는 참自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自由를 求하는이여 自然으로 나오라. 自然에선 自由롭게 準備하리라...오즉 사랑과 平和, 아! 自然으로!”
현동완과 엄흥섭
그는 1930년 영국 보이스카웃 길웰 지도자 훈련소 교육을 마치고 소년척후대(少年斥候隊) 활동에도 앞장서 왔으며, 1936년 YMCA의 “적극신앙단” 사태를 수습하고자 한 방편으로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특별회원반과 탐승·등산을 주요 종목으로 한 등산반을 새로 조직하여 회원층의 확대와 운동 종목의 다양화를 시도하였다. 이즈음 등산반을 이끌고 백두산 등반을 한 것으로 추정되며 엄흥섭이 금요회를 설립한 것도 이 때다.
엄흥섭은 스포츠인으로 1940년 도봉산 주봉 K크랙 초등과 1941년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제2봉(S2) 등 선구적 등반활동을 한 클라이머다. 백령회의 주석으로 “항상 민족의 자결과 자립을 부르짖었고 사업과 산악운동을 통하여 싸우고 실천했다”고 전한다. 그는 민족자결에 따른 ‘독립’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을 백령회 회원들과 도모해보고자 하는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그가 기획한 1940년 11월 3일의 한인 클라이머들의 ‘인수봉대등반’에서도 기저에 ‘민족의식의 표출’을 짐작해 볼 수 있고 당시 개별적인 등반이 쉽지 않았던 금강산 집선봉 원정등반, 1941~42년 마천령 종주 백두산 등행단 참여, 1943년 백령회원의 일본 스키 연수 파견 등 일련의 백령회 등반에 직접 참여하거나 후원을 하며 회를 주도한 그 자체가, 우리의 국토를 우리의 손과 발로 오르고자 했던 그의 일념이었다고 여겨진다.
1943년 12월의 백령회 연말 월례회인 “반성회”에서 그가 피력한 “혈맹단식 단결”그리고 일련의 단파방송 청취와 관련한 양정고보 산악부 고희성의 증언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반성회 끝머리에 이와코시(岩越, 엄흥섭 주석) 씨가 사적(史的) 민족성을 설명하고, 향후의 방향을 암시했던 점. 크게 여러 가지 시사가 되어 흥미 깊었다. 그러나 이와코시(岩越) 씨의 혈맹단식적 단결에 있어서는 무조건 승복은 할 수 없는 일. 그의 인격을 존경하여 신뢰할 뿐(反省会, 梢頭岩盛氏の史的民族性を設いて今後の方向と暗示....然し, 同氏, 血盟團式の團結においては無條件承服は出来ないO, 皮氏の人格尊敬...)”
해방 후 그를 아는 많은 산악인들은 엄흥섭이 살아있었다면 우리나라 산악운동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애석해 했다고 하면서도 그가 품은 뜻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 알피니즘이 백령회에서 비롯됐다고 하면서도 그 회를 이끈 엄흥섭에 대해 조사·연구나 예우가 너무 미흡한 것이 아닌가도 한다. 그의 몇 줄의 글이나 한두 장의 등반사진이라도 더 남아있기를 바래본다. (이어서)
註:
1.현진오, 〈한국 최초의 클라이머 모임 백령회 리더 양두철〉, 《사람과 山》(1995. 4), p.134
2.김정태는 《登山 50年》(1976) 등 여러 기록에서 1937년 백령회 설립 회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본인이 작성한 《라테르네》(1953)의 〈白嶺會 回顧錄〉과 《김정태 선생 유고집》의 일기에도 1940년 11월 3일 ‘인수봉 대등반’ 이후 백령회 활동을 기록하고 있고 양두철과 방현 등 당시 한인 클라이머들도 김정태는 설립 회원이 아니고 회의 설립 몇 년 후에 가입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다만 김정태는 1937년 이후 엄흥섭(제화 기술자)과 자일파트너로 등반을 하면서 1937년 양두철PTY와 북한산 노적봉, 1937년 또는 1938년 주형렬PTY와 금강산에서 중요 등반을 하는 등 회의 설립 이전에 금요회원들과 교류와 등반이 있었다.
3.오영훈은 백령회가 이광수의 소설 《선도자》(1923)의 백령회와 유사성이 있음을 언급했고(〈일제강점기 전문등반 정착과 전개 과정 연구〉(2022. 11), 동아시아문화연구 제3집), 김진덕은 백령회 설립 회원인 양두철이 백령의 의미가 한복의 깃을 뜻하는 ‘白領’이라는 증언을 제시하며 《선도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백령회 창립 당시 명칭에 대한 시론〉(2023. 6), 한국산악학회)
4.白嶺會’ 명칭은 《김정태 선생 유고집》의 1941년 9월 27일 “白嶺會 役員會”라고 확인된다. 〈조장빈, 《김정태 선생 유고집》의 일제강점기 등반기록 개관〉, https://cafe.daum.net/peakbook/Nhol/1 한국산서회 다음카페 참조. 이 기록은 ‘백령회’가 기록된 최초의 문헌자료이나 김정태는 1940년 11월 3일 ‘인수봉대등반’ 이후 백령회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여, 이 기록이 ‘백령회’를 회의 명칭으로 사용한 시기로 추정하는데 확정적인 근거일 수는 없다.
5.앞 김정태 유고집 일기(1943. 11. 5)의 백령회 월례회(연말 반성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