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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順興安氏)의 고문집(古文集)
순흥안씨(順興安氏)의 고문집(古文集)
1. 안경직(安慶稷)-쌍매당집(雙梅堂集)-3派20世-취우정공(諱광윤)파
서지내용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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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매당집 (雙梅堂集) |
저자 |
성명 |
안경직 (安慶稷) |
자 |
덕문 (德文) | |
호 |
쌍매당 (雙梅堂) | |
판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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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活字本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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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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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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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
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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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책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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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32㎝ |
사부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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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집류 |
기타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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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매당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안경직(安慶稷 ; 1721∼1783)의 시문집이다.
안경직의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덕문(德文), 호는 쌍매당(雙梅堂)이다.
김성탁(金聖鐸)의 문인으로, 당쟁이 심한 것을 보고 벼슬에의 뜻을 버리고 학문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이 책은 1846(헌종 12) 족후손(族後孫) 유상(有商)·상욱(商煜)·치중(致重)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문집의 서(書) 가운데「상제산김선생(上霽山金先生)」은 스승인 김성탁에게 보낸 것으로, 학문을 지도해준데 대하여 감사하고 자질이 부족한 관계로 특별지도를 해줄 것을 청하였다.
「여이길룡조증적서(與李吉龍趙增勣書)」는 영남유생들의 허목(許穆)과 조태억(趙泰億)의 변무소(辨誣疏)를 올린 것은 잘한 일이지만 이현일(李玄逸)을 포함시켰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이현일을 두둔한 글이다.
「도림서원강당상량문(道林書院講堂上樑文)」은 도림서원의 강당을 지으면서 옛날 학교의 형태, 서원의 유래, 강당을 짓게 된 동기 등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서원을 지은 뒤에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를 희망한 글이다.
2. 안관 (安灌) - 취우정실록 (聚友亭實錄)-3派13世
서지내용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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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우정실록 (聚友亭實錄) |
저자 |
성명 |
안관 (安灌) |
자 |
관지 (灌之) | |
호 |
취우정 (聚友亭) | |
판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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活版本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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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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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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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
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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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책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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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29cm |
사부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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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집류 |
기타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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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우정실록』은 조선 중기의 문인 안관(安灌 ; 1491∼1652)의 실록이다.
안관의 자는 권지(灌之), 호는 취우정(聚友亭), 본실은 순흥(順興), 아버지는 정도(尊道)이며, 함안(咸安)에 거주하였다. 그는 중종조에 효행과 학문으로써 돈령참봉(敦寧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1517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가례에 따라 여묘살이를 하였고, 1619년에 모친상을 당해서도 전상 때와 같았다.
14세 때 갑자사화를 보고 사문(斯文)의 세상에 회의를 느끼고, 또 을묘사화를 보고 세상의 일에 문을 닫고 고서 연구에 전심하다가,
1523년에 조광조의 제자인 박덕손(朴德孫)과 저자의 형제들과 함께 여항산(艅航山)에 은거하여 산수를 읊으며 세간의 일은 일절 생각지 않았다.
1537년 중종이 공의 행의(行誼)를 높이 사서, 사직(司直)에 제수함에 공은 훈구세신으로서 의리상 사절할 수 없어서 잠시 명에 응했다가 이내 사퇴하였다.
3. 안국장(安國章)-은계선생유집(殷溪先生遺集)-3派19世-취우정공(諱광렬)파
서지내용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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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계선생유집 (殷溪先生遺集) |
저자 |
성명 |
안국장 (安國章) |
자 |
문경(文傾) | |
호 |
은계(殷溪) | |
판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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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活字本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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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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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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渭城[咸陽] : 昇安, 光武 2(1898) |
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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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卷1冊 : 揷畵, 山圖, 四周雙邊 半郭 22.7 x 15.5 cm, 有界, 9行20字 註雙行, 內向2葉花紋魚尾 ; 31.4 x 21.4 cm |
책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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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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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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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5년(숙종 11)∼1733년(영조 9) 4월 12일.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문경(文傾)이고, 호는 은계(殷溪)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경상남도 함안(咸安) 벌은(閥殷)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충의위(忠義衛) 안한(安僩)이고, 아버지는 안시상(安時祥)이다. 외조부는 공훈(孔勳)이고, 처부는 이지창(李枝昌)이다.
어려서 아버지와 족숙(族叔) 희구재(喜懼齋)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이후 목우자(牧牛子) 이창규(李昌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근에 가난하여 혼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땅을 팔아 도와주는 등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이에 1724년(경종 4) 암행어사(暗行御史) 박문수(朴文秀)가 예물을 보내 효우(孝友)를 칭송하였다.
세상을 떠난 뒤 후학들에 의해 은계정사(殷溪精舍)가 지어졌다.
묘는 경상남도 함안군 외대산(外代山) 효사동(孝沙洞) 서쪽 술좌원(戌坐原)에 있다.
문집으로 1898년(광무 2)에 현손 안상인(安相仁)과 안상묵(安相默)이 편집하고 간행한 《은계집(殷溪集)》 3권 1책이 있다.
4. 안당(安瑭)-시산실기(匙山實紀)-1派12世-찬성공파
서지내용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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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성명 |
안당 (安瑭) |
자 |
백진(伯珍) , 언경(彥卿) , 언보(彥寶) | |
호 |
근재(謹齋) , 수은(睡隱) , 영모당(永慕堂) | |
판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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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인본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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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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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손 안봉용(安鳳鎔) |
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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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
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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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1책 |
책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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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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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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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당(安瑭)의 자는 언보(彦寶). 호 영모당(永慕堂). 시호 정민(貞愍)이다.
1480년(성종 11) 성균시(成均試)에, 이듬해 친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사관(史官), 1499년(연산군 5) 사성(司成)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507년(중종 2) 이과(李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려 정난공신 3등이 되고, 호조 ·병조 ·공조 ·이조판서를 거쳐 1518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이때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화를 입게 된 유신(儒臣)들을 구하려다 파직,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아들과 함께 사사(賜死)되었다.
시산실기(匙山實紀)는 조선 중기의 문신 안당(安瑭)의 실기로 1981년 14대손 안봉용(安鳳鎔)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변시연(邊時淵)의 서문, 권말에 봉용, 16대손 동영(東榮)의 발문이 있으며 권1에 유문(遺文)으로 계(啓) 99편, 장(狀)·신도비명·묘표 각 1편, 권2는 부록으로 국조실록초(國朝實錄抄)·신도비명·묘지명·왕비신씨손위복위본말(王妃愼氏遜位復位本末)·기묘화원(己卯禍源)·기묘사화·현량과파복(賢良科罷復)·신사안처겸옥(辛巳安處謙獄)·기묘당적(己卯黨籍)·중종상신(中宗相臣)·안가노안(安家奴案)·유사·행장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
계(啓)는 사직(辭職), 남의 신원(伸寃)과 신구(伸救)에 관한 것, 시사(時事)와 국정 전반에 걸쳐 다양한 내용으로 당시 정치 사정을 살펴보는 데 참고 자료가 된다.
장의 〈안핵홍경주한순장 按劾洪景舟韓恂狀〉은 연산군에게 아부해 비리와 부정을 자행한 간신 한순(韓恂)을 탄핵한 내용이다.
〈국조실록초〉는 1482년(성종 13)부터 1575년(선조 8)까지 조선왕조실록에서 저자와 관련된 기록을 발췌한 것이고,
〈왕비신씨손위복위본말〉은 저자가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인해 폐위된 연산군 비인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한 전말을 ≪연려실기술≫에서 발췌하여 기록한 것이다.
〈기묘화원〉과 〈기묘사화〉는 사화의 전말을 기록한 것이며,
〈현량과파복〉은 1519년 조광조(趙光祖)의 주장에 의해 실시되었던 현량과(賢良科)에 대해 조광조가 참화를 당하자 이 현량과 실시의 존폐 문제를 거론한 내용이다.
〈신사안처겸옥〉은 1521년 저자가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심정(沈貞)·남곤(南袞) 등에 의해 옥사가 일어났을 때 두 아들 처겸(處謙)·처근(處謹)과 함께 참화를 당한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안가노안〉은 ≪패림 稗林≫에서 뽑아낸 것으로 1586년 2월 6일부터 동년 9월 12일까지 장례원(掌隷院) 입안인데, 저자의 집안과 그의 서고종(庶姑從)인 송사련 집안 간의 불화와 갈등을 기술한 것이다. 이 책에는 당시 정치 사정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가 많다.
5. 안도징(安道徵)-점리와선생문집 (點离窩先生文集)-2派17世
서지내용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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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리와선생문집 (點离窩先生文集) |
저자 |
성명 |
안도징 (安道徵) |
자 |
태화 (泰和) | |
호 |
점리와 (點離窩) | |
판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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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版本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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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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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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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
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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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책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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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21.6㎝ |
사부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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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집류 |
기타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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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리와집』은 조선후기 학자인 안도징(安道徵 ; 1616∼1678)의 시문집이다.
안도징의 자는 태화(泰和), 는 점리와(點牢窩),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이 책은 1898년 후손 구진(球鎭)과 10대손인 영일(永一) 등이 수집하여 편집·간행하였다.
문집에 실린 시는 대부분이 차운시와 증시이며, 음양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문답식으로 밝힌 「답홍응도(答洪應圖)」는 역학에 깊은 지식을 가졌던 저자에 관해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안도징은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이황(李滉)을 사숙으로 수학하였으나, 일찍부터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6. 안덕린(安德麟)-사촌집(沙村集)-3派16世-사촌공파
서지내용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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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집 (沙村集) |
저자 |
성명 |
안덕린 (安德麟) |
자 |
인서 (仁瑞) | |
호 |
사촌 (沙村) | |
판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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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活字本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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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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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廷籙, 安煥 |
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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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
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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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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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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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사항 |
안덕린(安德麟, 1563~1609)은 본관 순흥(順興). 자 인서(仁瑞). 호 사촌(沙村).
판서 숭선(崇善)의 6대손, 호군(護軍) 총(聰)의 아들.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 성균관장의(成均館掌議)로 대신들의 실책을 상소하여 조정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160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풍기(豊基)에서 학문을 닦았다. 이황(李滉)의 향약(鄕約)을 수명(修明)하고, 후배와 함께 향풍(鄕風)의 쇄신에 힘썼다. 풍기에 있는 숭현사(崇賢祠)에 배향되었다.
저자의 저술은 병란을 거치며 거의 다 없어지고 시문 1권, 「가례」ㆍ「중용」ㆍ「대학」에 대한 箚疑 약간 편이 가장되어 있었으나 그것도 수습할 겨를이 없었다.
저자가 졸한 지 100여 년이 지난 후 현손 安受泰가 소실되고 남아 있던 가장초고를 수습하고 현손 安相尹(1729~1805)과 그의 아들 安炅이 정리 편차하여 成編하였다.
그 후 이것을 가지고 祀孫인 7대손 안정록(安廷籙1769~1830)이 안상윤의 아들 안환安煥(1779~1844) 등과 같이 韓致應(1760~1824)의 서문을 받아 1822년에 목판으로 간행하고 판각을 白臯社에 보관하였다.《초간본》 이때 詠史詩, 陳弊疏 및 여러 편의 釋義 등은 상태가 나빠 간행에서 빠졌다. 이 본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1000),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273, 古3648-62-425), 장서각(D3B-1305),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성균관대학교 존경각(D3B-466) 등에 소장되어 있다.
7. 안덕문(安德文)-의암집 (宜庵集)-탐진안씨(耽津安氏)-20世
서지내용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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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집 (宜庵集) |
저자 |
성명 |
안덕문 (安德文) |
자 |
장중 (章仲) | |
호 |
의암 (宜庵) | |
판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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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活字本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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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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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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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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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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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분류 |
기리문고 | |
기타사항 |
의암 안덕문(宜庵 安德文)은 조선 영조때 선비로 평생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학문과 행실을 흠모해 화공에게 세 선현을 모신 옥산(玉山), 도산(陶山) 덕산(德山) 서원을 그려서 벽에 걸어놓고 이를 본받으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영남의 72주는 산이 웅장하고 물이 좋아 예로부터 인재들의 보고라고 불렀다. 도덕 문장 충효로 이름이 드러난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으니 이분들의 유적지, 사당, 서원들을 남쪽의 사람들이 어찌 예를갖추어 흠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월성(月城)의 옥산, 선성(宣城)의 도산, 진성(晉城)의 덕산은 회재, 퇴계, 남명 선생을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곳이다. 세 선생이 아니면 세 서원이 어찌 우뚝 솟아 있겠는가. 나는 어려서 궁벽한 곳에서 자라 멀리 중국에 가서 공자나 주자의 유적을 보지 못했으나 옥산 도산 덕산서원은 중국의 니구산이나 무이산과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 서원의 정경을 보고 화공에게 그림을 그려 벽에 걸어놓고 세 어진 선비를 흠모하고자 한다.”
의암은 옥산 도산 덕산 서원의 정경을 그리고 ‘삼산도지(三山圖誌)’라는 책을 손수 엮어 회재 퇴계 남명이 중국의 공자나 주자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흠모의 마음을 나타내었다.
의암은 1747년 설산재(雪山齋) 여석(如石)의 아들로 설산리에서 태어났다. 설산리는 지금의 부림면 입산마을이다.
어려서 총명하였다고 전한다. 10세 때 고을 원이 선비를 모아놓고 시험을 한다는 말을 듣고 시험장에 나갔는데, 고을 원이 기특하게 여겨 글을 지으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뛰어난 글을 지어 모인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는 기록이 행장에 전한다.
장성하여서는 부친의 명령으로 과거 공부를 하고 과거장에 한 두번 나갔다. 부친의 뜻을 어길 수 없어 나갔지만, 부귀 영달을 바라지는 않았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오로지 마음을 닦는 공부에 전념을 했다.
당시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이름난 학자들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열중하기 보다 허명을 좇는 경향이 많았다. 의암의 학문을 높이 생각하는 주위 사람들도 그에게 이름난 학자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하라고 권하자 “누구 누구의 문인이란 미명만 구하고 외양만 꾸미는 데 힘쓰는 것을 어찌 같이 참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글을 지어 맹서하고 산속에 자취를 감추어 오로지 경학과 양성으로 일삼고 간혹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것으로 자적하게 세월을 보냈다.
의암은 항상 난계(蘭溪)와 남당(南塘)의 이잠(二箴)과 주자가정(朱子家政) 한 편을 눈으로 보며 몸으로 실천을 했다. 뿐만 아니라 회재 퇴계 남명의 학문도 본받고자 노력했다.
의암은 남명 선생을 모신 덕산서원의 그림을 벽에 걸어놓고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덕산도(德山圖)’라는 글이다.
“지리산 동쪽 우뚝 솟은 덕산서원/기운은 맑고 형상은 우뚝하네/
남쪽지방에 특출하여 동국에 명성 드높였네/도산 옥산 덕산은 니구 무이산과 같아/남명선생 태어나 이곳에서 사셨네/부귀에 의혹되지 않고 기절은 강직했네/도가 전하는 곳에 사당이 성대하니/새롭게 그림을 그려 조그마한 정성으로 예를 올리네.”
남명선생의 정신과 학문을 누구보다도 본받고자 했던 의암은 진주에들러 도동에 있던 남명의 제자 수우당이 살았던 곳도 들러 추모의 정을 시로 나타내기도 했다.
의암은 고향에서 학문을 궁구하면서 또 한편으로 학당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농사를 권장하고 경제에 대한 식견은 모두 조리가 있어 식자들의 칭찬을 받았다. 또한 당대의 이름난 선비인 입재 정종로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의 폭을 넓혀 나가면서 평생을 학문에 전념한 의암은 65세를 일기로 고향에서 생을 마감한다.
의암은 평생 회재 퇴계 남명을 본받기 위해 학문을 궁구하다 고향에서 일생을 보낸 선비라고 할 수 있다.
의암은 3책의 문집을 남겼는데, 이 지역 선비들과 폭넓은 교유를 통해 강우 지역의 학맥을 이어가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 흔적들이 보인다. 특히 그가 남긴 ‘삼산도지(三山圖誌)’는 이 지역 선비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회재 퇴계 남명의 학맥을 이으려는 선비로 인정을 받기도 했다.
8. 안몽징(安夢徵)-송파유고(松坡遺稿)-2派17世
서지내용 | ||
서명 |
송파유고 (松坡遺稿) | |
저자 |
성명 |
안몽징 (安夢徵) |
자 |
천뢰 (天赉) | |
호 |
송파 (松坡) | |
판사항 |
木活字本 |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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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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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1942 | |
권수 |
2 | |
책크기 |
20.5×30㎝ | |
사부분류 |
별집류 | |
기타사항 |
『송파유고』는 조선 중기의 학자 안몽징(安夢徵 ; 1611∼1654)의 시문집이다.
안몽징의 자는 천뢰(天賚), 호는 송파(松坡),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이 책은 1942년 후손 재신(在?)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에는 차운한 것이 많은데, 저자의 원운(原韻)과 차운한 다른 사람의 시도 함께 수록하였다.
「제송파초당(題松坡草堂)」은 이환(李渙) 등 7인이 저자가 지은 송파정의 빼어난 풍광을 묘사한 것이다.
또,「만조호군(挽曺護軍)」등의 만시도 다수 있다. 서(序)의 「계첩서(契帖序)」는 계의 상호부조의 의미를 강조한 글이다.
이 책은 저자 사후에 대개의 저작이 인몰된 상태에서 잔존하는 자료를 수집하여 간행하였기 때문에 내용이 풍부하지는 못하지만,
조선 중기 한문학의 발달을 엿볼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안몽징의 아버지는 안직(安溭)이며, 어머니는 광주김씨(光州金氏)로 찰방 강(堈)의 딸이다.
그는 7세에 시문을 지었고 10세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을 통독하였고, 12세에 대소(大小) 육체(六體)를 모두 짓게 되어 명성이 자자하였다.
또한 부친과 친교가 있던 무주(無住) 홍호(洪鎬),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 호우(湖憂) 이환(李煥) 등에게 종학(從學)하여 많이 계발되었다.
1652년(효종 3) 아우 두징(斗徵)과 함께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부모상을 당한 후로는 부귀 영화에 뜻을 끊고 매일 단정히 앉아 학문에 힘쓸 뿐이었다.
송파(松坡) 위에 작은 정자를 짓고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와 함께 도의를 강론하였다.
9. 안민수(安敏修)-수오재유집(守吾齋遺集)-2派23世
서지내용 | ||
서명 |
수오재유집 (守吾齋遺集) | |
저자 |
성명 |
안민수 (安敏修) |
자 |
눌보 (訥甫) | |
호 |
수오재 (守吾齋) | |
판사항 |
木版本 | |
발행지 |
||
발행자 |
||
발행년 |
1800 | |
권수 |
4 | |
책크기 |
29.2×21.4㎝ | |
사부분류 |
별집류 | |
기타사항 |
『수오재집』은 안민수(安敏修 ; 1724~1795)의 시문집이다. 안민수의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눌보(訥甫), 호는 수오재(守吾齋)이다.
이 책은 아들 이정(爾定)과 장손 원(愿)이 간행하였다. 권1에 시 81수, 권2에 서(書) 31편, 잡저 7편, 잠(箴) 3편, 명(銘) 3편, 권3에 제문 30편, 권4는 부록으로 행장, 만사, 제문 등이 실려 있다. 이 중 시는 매화·국화·소나무·새 등 자연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읊었으며, 초야에 한거하면서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신거잡영(新居雜詠)」은 이미 고인이 된 권경현(權景絢)의 유허(遺墟)로 거주지를 옮기고 나서 감회를 읊은 것인데, 그곳에 잇는 폐당(廢塘)과 옛 우물에 재주가 있어도 등용되지 않아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을 비유하였다. 스승 권구와 친구인 유호원(柳浩源)·하준해(河準海)·이조억(李祚億) 등의 시에 차운(次韻)하였으며, 소서(小序)를 붙여 그 시를 지은 동기를 밝힌 것도 있다. 서(書)는 권명우·김필형·유규 등에게 보낸 것이다.
잡저의 「서아배일록(書兒輩日錄)」은 당시 많이 결성되고 있는 계(契)에 대하여 쓴 것인데, 도의를 주로 하여 결성되는 것이 아니라 돈과 곡식을 가지고 이자놀이하는 데만 급급한 폐단이 있다고 자손에게 경계하는 내용이다. 「남초계(南草戒)」는 이미 남초(담배)가 널리 보급된 현실을 개탄하면서 그 폐단을 12가지로 지적한 글이다. 이밖에도 저자의 조상이 지은 『고시책(古詩冊)』·『경주촬요(經主撮要)』 등에 붙인 발(跋)이 있다. 제문은 친족을 위하여 지은 것이 많다.
처사로서의 삶을 살았던 저자는 주로 주변 자연물에 의탁해 한가로운 풍경을 시로 남기고 있는 바, 안동지역 처사형 문인들의 시풍과 관련하여 살펴볼 가치가 있다.
안민수는 권구(權口)의 문인으로 영남지방의 남인이며 처사(處士)이다. 유규(柳口)·김필형(金弼衡)·권명우(權明佑) 등과 교유하였다.
10. 안상정(安商正)-성헌집(惺軒集)-3派26世-취우정공(諱광원)파
서지내용 | ||
서명 |
성헌집 (惺軒集) | |
저자 |
성명 |
안상정 (安商正) |
자 |
형윤 (衡允) | |
호 |
惺軒 (惺軒) | |
판사항 |
石版本 |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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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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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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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 |
東裝3卷1冊 | |
책크기 |
21.9 x 18.8 cm | |
사부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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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사항 |
1888년(고종 25)∼1947년. 일제강점기의 유학자로, 자는 형윤(衡允)이고, 호는 성헌(惺軒)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북곡리(北谷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안입중(安立中)이며 어머니는 함양오씨(咸陽吳氏)이다.
어려서부터 총기가 남달라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며,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독서를 즐겼다.
경사(經史)를 모두 섭렵하였으며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여 성현의 도를 좇았다.
자라서는 회봉(晦峰) 하겸진(河謙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문집으로 《성헌집(惺軒集)》 3권이 전한다.
권1에는 시(詩), 권2에는 서(書)·서(序)·발(跋) 등, 권3에는 가장(家狀) 및 행장(行狀) 등이 실려 있다.
11. 안석경(安錫儆)-삽교집(霅橋集)-1派20世-찬성공파
서지내용 | ||
서명 |
삽교집 (霅橋集) | |
저자 |
성명 |
안석경 (安錫儆) |
자 |
숙화 (淑華) | |
호 |
삽교 (霅橋) | |
판사항 |
筆寫本(後寫) |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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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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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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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 |
7卷 4冊 | |
책크기 |
30.3×20.6cm | |
사부분류 |
별집류 | |
기타사항 |
1718(숙종 44)∼1774(영조 50).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숙화(淑華). 호는 완양(完陽)·삽교(霅橋).
아버지는 안중관(安重觀)이다. 안중관은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으로 이병연(李秉淵)·민우수(閔遇洙) 등 당시 노론계 인사 및 홍세태(洪世泰) 같은 중인 출신 시인과도 교유한 노론계 학자였다.
1752년(영조 28)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이곳저곳 아버지의 임소(任所)를 따라 생활하였다.
당시 신흥도회가 형성된 홍천·제천·원주 등이 그곳으로 청년기를 이러한 도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낸다.
이때 그는 자신의 진로에 대하여 명예나 권력을 좇는 무리들이 날뛰는 환로(宦路)에서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과거가 아니고는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사회현실 속에서 심한 갈등을 하게 된다.
결국 세 차례 과거에 응하지만 모두 낙방한다. 출세지향의 공부를 힘쓰지 않았던 그에게 낙방은 오히려 당연하기도 하다.
1752년은 과거에 응한 마지막 해이기도 하지만, 그해 아버지가 죽자 그는 곧 강원도 두메산골인 횡성(霅橋)에 은거한다. 삽교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후반기는 도회적인 생활을 떠나 벼슬을 단념한 채 산중에 은거하는 처사적인 생활이었다.
저서로는 《삽교집》·《삽교만록》이 있다.
12. 안수(安琇)-가구세고(佳邱世稿)-1派14世-판관공파
서지내용 | ||
서명 |
|
가구세고 (佳邱世稿) |
저자 |
성명 |
안수 (安 琇) |
자 |
근부 (瑾夫) | |
호 |
니산 (尼山) | |
판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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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活字本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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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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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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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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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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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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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집류 |
기타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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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수(安琇)는 1489(성종 20, 기유)∼1546(명종 1, 병오).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근부(瑾夫). 호는 니산(尼山).
향(珦)의 10대손으로 처정(處貞)의 자(子)이다.
1525년(중종 20) 문과 급제하고 1537년(중종 32) 사헌부장령으로 재임시 김안로(金安老)의 전횡(專橫)을 탄핵하였으며 1544년 사헌부헌납(司憲府獻納)을 역임.
명종조(明宗朝)에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참극이 빚어지자 독서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13. 안영호(安永鎬)-급산집(岌山集)-1派26世-서파공파(西坡公派)
서지내용 | ||
서명 |
|
급산집 (岌山集) |
저자 |
성명 |
안영호 (安永鎬) |
자 |
경능 (敬能) | |
호 |
급산 (岌山) | |
판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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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活字本 |
발행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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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
|
발행년 |
|
1937 |
권수 |
|
4 |
책크기 |
|
30.5×20.5㎝ |
사부분류 |
|
별집류 |
기타사항 |
|
『급산집』은 조선 말기의 학자 안영호(安永鎬 ; 1854∼1896)의 시문집이다. 안영호의 자는 경능(敬能), 호는 급산(岌山),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이 책은 1937년에 그의 아들인 승윤(承胤)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권말에 정태진(丁泰鎭)의 발문이 있다. 권1, 2는 부(賦),시, 권3은 서(書), 고유문, 제문, 명, 찬(贊), 서(序), 지(識), 권4는 행록, 묘표, 잡저, 부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차백운동부(次白雲洞賦)」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의 「백운동부」를 차운(次韻)하여 지은 것으로 소수서원에 관한 전말을 소상하게 묘사한 명문이다. 시에는 「강사(江詞)」,「청야사(淸夜詞)」,「정사(征詞)」,「전사(田詞)」,「봉래사(蓬萊詞)」,「보패가(寶?歌)」등의 가사가 들어있는데, 각 제목마다 상세한 주석을 붙였다. 「동사잡영 (東史雜詠)」은 사학(史學)에 취미를 가지고 사적을 답사하여 읊은 것으로 단군굴(檀君窟), 기자도(箕子都), 이연비(二連碑), 청성묘(淸聖廟), 신도(薪島), 치술령(?述嶺), 삼성굴(三姓窟), 후직묘(后稷墓), 인박산(咽薄山), 냉림(冷林), 포석정(鮑石亭), 칠불사(七佛寺), 조룡대(釣龍臺), 개골산(皆骨山), 영랑포(永郞浦), 탄금대(彈琴臺), 예성강(禮成江), 선죽교(善竹橋), 운문사(雲門寺), 의기사(義妓祠) 등 각 제목마다 상세한 주석이 붙어 있다.
잡저의 「치도론(治道論)」은 천하를 다스리는 도, 즉 정치의 기본적인 방법을 논한 것으로서 2편이 있다.
그 밖에도 정전설(井田說)에 관한 것 등 흥미있는 논설이 들어 있다.
안영호의 아버지는 호연(浩淵)이며 과문(科文)을 잘 하여 한번에 10여 편을 연독(連讀)하여 미사여구를 점철하였으나 과장(科場)에 들어간 일이 없었다.
고문사(古文辭)에 힘써 더욱 능력을 발휘하였으나 또한 만족하는 바가 없었으며 노친을 섬김에 효를 다하고 조상을 공경함에 정성을 다하였다.
성품이 아졸(雅拙)하여 지나치게 고담(枯淡)한 듯하나 누 위에 달이 떠올라 만상이 고요하면 두건을 비껴 쓰고 가늘게 읊었다.
급산문집 발문
정 태진(丁泰鎭)
아, 이 책은 급산 안공의 유집(遺集)이다. 공은 단정하고 순수하고 남달리 뛰어난 자질을 타고났다. 남계공의 가정에서 시례(詩禮)를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익혔으니 참으로 법도가 있었고 평소 책을 즐겨 읽었으니 이는 천성으로 타고난 것이었다. 일찍이 과거공부를 하여 명성이 자자하여, 영남의 문필가(文筆家)로서 앞설 이가 없었다. 당시 남계공이 아직 급제하지 못하고서 연로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과거에 응시하고 있었으므로 공은 그분의 뜻을 받들어 주선하고 스스로 벼슬길에 나설 계획을 하지 않았다. 평소 글을 좋아하여 육경(六經)의 깊은 뜻을 연구하고 역사서의 정수를 탐색하였으며, 아래로 백가(百家)의 여러 서적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가슴속에 쌓인 것이 마치 창고에 물건이 가득하고 강에 물결이 출렁이는 것과 같았고, 글로 나타난 것이 마치 높은 집 위에서 병을 거꾸로 쏟고 봄날에 꽃이 만발하는 것과 같았다. 바야흐로 푹 익히고 갈고 닦아서 더욱 빛내어, 장차 대가(大家)의 경지에 도달하여 여유롭게 한 시대의 문필을 담당할 참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수명을 재촉하여 책을 저술할 나이가 되기도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 마침내 초야 속에서 자취가 민멸되어 세상에서 일컬을 수 없게 되었다.
아, 애석하도다. 공의 사자 승윤(承胤) 씨가 그의 족숙 철호(哲鎬)와 함께 묵은 상자 속에서 약간의 시문(詩文)을 수습하고, 그 글이 혹시라도 없어져 세상에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사문(斯文) 권상규(權相圭) 에게 누차 교정을 받아 상하 2권으로 편집하였다. 지금에 곧 간행하려 하면서 나에게 권말(卷末)의 발문(跋文)을 짓도록 요청하였다. 나는 공의 내력과 공의 평소 행적에 대하여 익히 들은 바가 있다. 지금에 그 시를 보니, 담박하고 소탈하며 속기(俗氣)를 완전히 끊어 초연히 물외(物外)의 취미가 있고, 산문도 종횡으로 논리를 전개하여 마침내 전칙(典則)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가어(家語)》와 예양(豫讓)을 논한 글은 그 말은 간단하면서도 엄정하고 의리의 바름을 얻고 있다. 이것을 미루어 공이 평소 힘을 기울인 것을 찾아보면 문장의 기교와 화려함에 치중하였을 뿐만이 아니고 수양한 실질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문집이야말로 비록 분량이 적기는 하지만 무궁한 후세까지 공의 실체를 거의 비추어볼 수 자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후세에 이 글을 읽는 자들 중에 재능과 뜻은 뛰어나고서 수명이 길지 못하였던 점을 생각하고서 반드시 책을 어루만지면서 탄식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개탄을 금치못하면서 위와 같이 마음속에 느끼는 바를 기록하는 바이다. 병자년 동짓날에 금성(錦城) 정태진(丁泰鎭) 삼가 쓰다.
[嗚乎 此 山安公遺集也 公生而有端粹超越之資 趨楠溪公詩禮之庭 自幼服習 固其有方 而嗜於書 蓋天性然也 嘗治工令文 聲名籍蔚 嶠下之號爲宏匠巨擘無與右者 時楠溪公屈於時 雖老矣猶 勉場屋 公承意周旋 不自以進取爲圖 居常以文章自好 究六經之奧 探左史之髓 下至百家 籍 莫不涉獵而旁通 蘊于中者若武庫之充積而江河之涵渟也 發於詞者若高屋之建 而春華之敷燁也 方且浸淫 礪 益肆以光 將 然大家之風 而優優乎執一代之牛耳矣 天不假壽 不及著書之年而遽爾云歿 卒沈 於草萊之中 而世無得以稱焉 惜哉 公之嗣子承胤甫與其族叔哲鎬發巾衍之藏 收拾詩文若干 懼其 遂 然不章 屢訂于權斯文相圭 編摩爲上下二卷 將 諸梓 責余以券尾之言 余晩生尙及公之世矣 稔聞公平日 而今觀其詩 沖淡蕭灑 絶 脫纖埃 超然有物外之趣 文亦縱橫百出而終歸於典則 若其論家語豫讓數篇 其辭簡而嚴 又深得義理之正 推此以求公之平昔所用力者 不直文辭之工麗而已 其所養之實 亦可知也 然則是集也 雖若零星乎 猶可作公之七分寫照於無窮也 後之讀者想見其才志之長而賻命之短 必有撫卷而增 者矣 仰慨歎 遂書所感于中者 如右云 柔兆困敦長至日 錦城丁泰鎭謹跋]
14. 안일리(安日履)-낙애집(洛厓集)-2派19世
서지내용 | ||
서명 |
|
낙애집 (洛厓集) |
저자 |
성명 |
안일리 (安日履) |
자 |
길보 (吉甫) | |
호 |
낙애 (洛厓) | |
판사항 |
|
木活字本 |
발행지 |
|
|
발행자 |
|
|
발행년 |
|
1890 |
권수 |
|
6 |
책크기 |
|
30.4×20.5㎝ |
사부분류 |
|
별집류 |
기타사항 |
|
『낙애문집』은 조선후기의 문신 안일리(安日履 ; 1661∼1731)의 시문집이다.
안일리의 자는 길보(吉甫), 호는 낙애(洛厓), 본관은 순흥(順興), 아버지는 한소(漢召)이다.
이 책은 1890년(고종 27)경 간행되었다. 권두에 권연하(權璉夏)의 서문이 있다.
글 가운데 소의 「척향소(斥享疏)」는 1694년에 올린 것으로, 이이, 성혼등이 1635년(인조 13) 문묘에서 출향되었다가 숙종연간 복향되자 이를 반대한 것이다.
특히 한나라·송나라 등의 전례를 들어 격렬한 문투로 가기의 주장을 폈다.
기의 「북정일기(北征日記)」는 1694년 위의 상소로 유배의 길을 떠나던 노정기(路程記)인데 함경북도 부령에서 먼저 유배갔던 배정휘(裵正徽)를 만나 경학과 『장자』, 『주서절요』등을 서로 강론하면서 학문연구에 주력하던 사실을 적은 것들이다.
17세 때 김태기(金泰基)에게 수업하였으며, 1690년(숙종 1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1694년 문묘에서 출향(黜享)된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복향을 반대하는 상소로 부령(富寧)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717년에 세자(경종)에게 대리청정의 하교가 있자, 안동, 상주 등의 시소(試所)에 가서 유생들에게 세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상소를 올릴 것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15. 안응창(安應昌)-백암집(柏巖集)-1派18世-참판공파
서지내용 | ||
서명 |
|
백암집 (柏巖集) |
저자 |
성명 |
안응창 (安應昌) |
자 |
우졸재(愚拙齋), 흥숙(興叔) | |
호 |
백암 (柏巖) | |
판사항 |
|
木活字本 |
발행지 |
|
|
발행자 |
|
|
발행년 |
|
1925 |
권수 |
|
5권 2책 |
책크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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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분류 |
|
별집류 |
기타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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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柏巖) 안응창(安應昌, 1593∼1673)은 조선말기에 매우 잘 알려진 학자이다.
순흥안씨 1파 참판공파의 후손으로서 안향(安珦)의 14세손으로 아버지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증우의정(贈右議政) 안몽윤(安夢尹)이며, 순흥안씨 두 번째 족보인 기해보(1659)를 주관하여 간행하였다.
순흥안씨 두 번째 족보인 기해보(1659)를 주관하여 간행할 때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보첩(譜牒)들을 포괄적으로 수집하여 잘못되어 있는 부분들을 수정하여 기록했으며 많은 묘지명을 남겼다.
이 목판본은 1925년에 활자판으로 인쇄되었다. 모두 5권 2책으로 되어 있다.
자암집(自庵集)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김구(金絿:1488~1534)의 시문집으로 2권 1책(목판본).
시문이 전란(戰亂)으로 많이 없어진 채, 외증손인 안몽윤이 남아 있는 시문을 모아 가지고 있던 것을 1659년(효종 10)에 외현손 안응창(安應昌)이 간행했다.
책머리에 정두경의 서문과 자암기년론(自菴紀年錄), 책 끝에 안응창의 발문이 있으며 권1은 시, 권2는 부(賦)·표(表)·송(頌)·책(策)·의(疑)·옥중상소·망운산 기우문·묘갈음기(墓碣陰記)·〈왜구수토록 倭寇搜討錄〉·서(書)·별곡(別曲)·단가(短歌), 부록에는 〈기묘명현록 己卯名賢錄〉 유찬조(流竄條)의 관련기사, 윤근수가 쓴 〈제자암시첩 題自庵詩帖〉, 김세겸이 지은 묘비명, 안응창이 지은 묘지가 실려 있다.
시 가운데 〈석류〉는 6세 때 지은 것으로 천부적인 자질을 보였다고 하며, 〈오작교〉는 8세 때에 지은 것이다. 책은 술을 경계한 글로서 술은 오륜(五倫)을 해치고 모든 일을 그르칠 수 있으므로 삼가해야 한다고 했다. 〈옥중상소〉는 기유년에 올린 글로서 감정의 글이라고도 한다. 〈왜구수토록〉은 1522년(중종 17) 7월의 기록으로 남해안에 자주 나타나 인명을 살상하고,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을 대대적으로 소탕한 내용이다. 〈화전별곡 花田別曲〉은 기묘사화에 관련되어 해남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지은 작품이다. 고난에 처한 상황이었지만 산수를 즐기는 풍류가 나타나 있다. 어디서나 찾아볼수 있는 즐거움을 노래하면서 서울의 번화함과 풍족함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조선 전기 경기체가의 변화 양상을 파악하는 데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규장각,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6. 안유상(安有商)-도천선생문집(陶川先生文集)-3派26世-취우정공(諱광원)파
서지내용 | ||
서명 |
|
도천선생문집 (陶川先生文集) |
저자 |
성명 |
안유상 (安有商) |
자 |
여형 (汝衡) | |
호 |
도천 (陶川) | |
판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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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본/영인본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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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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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상(安有商)· 안풍상(安風商) |
발행년 |
|
1910년 |
권수 |
|
|
책크기 |
|
|
사부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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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집류 |
기타사항 |
|
안유상(安有商:1857~1929) 본(本) 순흥(順興) 자(字) 여형(汝衡) 호(號) 도천(陶川)이다.
1910년 안유상(安有商)· 안풍상(安風商) 형제가 순종(純宗) 4년 경술년(1910년)에 문경공(文敬公) 안종원(安宗源)의 유고(遺稿)등을 합하여 4권으로 함안에서 근재문집(謹齋文集)을 간행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이후로는 안정현(安鼎鉉 , 이정호(李正浩)와 더불어 산 속에 들어가서 강론하였다. 남명학파(南冥學派)
17. 안정려(安鼎呂)-회산집(晦山集)-3派24세-취우정공(諱광세)파
서지내용 | ||
서명 |
|
회산집 (晦山集) |
저자 |
성명 |
안정려 (安鼎呂) |
자 |
국중 (國重) | |
호 |
회산 (晦山) | |
판사항 |
|
木活字本 |
발행지 |
|
|
발행자 |
|
|
발행년 |
|
20세기 |
권수 |
|
9 |
책크기 |
|
19×30cm |
사부분류 |
|
별집류 |
기타사항 |
|
『회산집』은 조선 말기의 학자, 안정려(安鼎呂 ; 1871∼1939)의 시문집이다.
안정려의 자는 국중(國重), 호는 회산(晦山), 본관은 순흥(順興), 아버지는 상기(相琦)로 함안(咸安)에 거주했으며, 허훈(許薰), 곽종석(郭種錫), 이승희(李承熙) 세분 선생에게 종학하여 주리학설(主理學說)의 종지를 듣게 되었다.
1912년에 가족을 거느리고 함안군(咸安郡)의 기동(基洞)에서 산청군(山淸郡)의 서하(西河)로 이주하여 엄천강(嚴川江) 가에 재실을 짓고 후학의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학도들이 분집하여, 그 재질에 따라 가르침을 달리하였다.
1930년에 함안에 돌아와 취우정(聚友亭)에 거처하면서 후진을 교도하여 한때 문풍이 진흥되었고 수업하여 성취된 사람이 많았다.
경의(經義)와 예학에 특히 정심하여 경의(經義)에는『오서집의(五書釋義)』를 예설(禮說)에는 『상변요의(常變要義)』등의 저술을 남겼다.
18. 안정택(安鼎宅)-노천집(老川集)-3派24世-취우정공(諱광보)파
서지내용 | ||
서명 |
|
노천집 (老川集) |
저자 |
성명 |
안정택 (安鼎宅) |
자 |
처인 (處仁) | |
호 |
노천 (老川) | |
판사항 |
|
목활자본 |
발행지 |
|
|
발행자 |
|
安鼎呂,·安達中 |
발행년 |
|
1909년 |
권수 |
|
4권 2책 |
책크기 |
|
29×18.5cm. |
사부분류 |
|
|
기타사항 |
|
조선 말기의 학자 安鼎宅(1842-1901)의 시문집이다. 안정택의 본관은 順興이고‚ 자는 處仁이며‚ 호는 道庵 또는 老川이다. 李敦禹(1807-1884)의 문인이다.
본 문집은 저자의 族弟인 安鼎呂·安達中 등이 1909년(隆熙 3)에 편집‚ 간행한 것이다. 권두에 金道和의 서문과 권말에 郭鍾錫(1864-1917)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60수‚ 誄辭 1편‚ 권2에 스승인 이돈우 등에게 보낸 書 19편‚ <派譜序>·<養士齋學契序>·<三九契序> 등 序 3편‚ <題竹溪誌圖後>(竹溪誌에 이황이 그린 安軸의 세계도를 실은데 대해 논함) 1편‚ <朞三百註解>(年月의 주기 및 閏年에 대해 설명함)·<自警帖> ·<呈本邑狀>(의병장 郭再祐의 비각 중건에 대해 본 읍에 올린 장계)·<孺人載寧李氏表烈狀> 등 잡저 3편‚ 권3에 상량문 2편‚ 스승 이돈우 등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 6편‚ 14대조 安崇孝‚ 11대조 安灌‚ 朴德孫 등의 행장 7편‚ 8대조 安光輔의 묘갈명 1편‚ 安瑜의 처 烈婦 姜氏 및 安宅柱의 遺事 2편‚ 권4에 부록으로 스승인 이돈우가 소학으로부터 대학에 이르는 공부 순서에 대해 논한 <贈言序>‚ 안정려가 지은 저자의 家狀‚ 李重明이 지은 행장‚ 趙昺奎가 지은 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字는處仁이고號는老川肯菴李敦禹門人이다一八四二年憲廟壬寅生이며一九○一年辛丑十一月九日에卒하다
ㅇ墓는新村考墓右方酉坐이다行狀韓山李重明撰碣銘進士趙昺奎撰文集序拓菴金道和撰跋면字郭도撰己酉板刊文集
配는密陽朴氏이고父는履洽이다一八四七年丁未生이고忌는八月二日이다ㅇ墓는餘航面別川共有山權폄이다
19. 안정한(安鼎漢)-지강집(芝岡集)-3派24世-의우정공파
서지내용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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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강집 (芝岡集) |
저자 |
성명 |
안정한 (安鼎漢) |
자 |
원가 (元可) | |
호 |
지강 (芝岡) | |
판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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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活字本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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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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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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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
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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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책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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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31㎝ |
사부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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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집류 |
기타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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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강집』은 조선말기의 학자 안정한(安鼎漢 ; 1840~1914)의 시문집이다.
안정한의 자는 원가(元可), 호는 지강(芝岡),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택반(宅磐)의 아들로 의령(宜寧)에서 살았다. 그는 약관에 과거에 응시하여 여러번 실패하자 과거의 뜻을 버리고 이돈우(李敦禹)의 문하에 들어가서 학문에 전념하여 크게 성취된 바 있었다. 그는 특히 심학(心學)연구에 정열을 쏟았는데, 뒷날 `양심정(養心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향리의 후진들을 모아 교육하였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인 박치복(朴致馥), 이근옥(李根玉), 강치화(姜致華)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였다.
20. 안정현(安鼎鉉)-정와유고(靜窩遺稿)-3派24世-취우정공(諱광우)파
서지내용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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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와유고 (靜窩遺稿) |
저자 |
성명 |
안정현 (安鼎鉉) |
자 |
자옥 (子玉) | |
호 |
정와 (靜窩) | |
판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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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版本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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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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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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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
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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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책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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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
사부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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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집류 |
기타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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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와유고』는 안정현(安鼎鉉 ; 1871~1928)의 시문집이다. 안정현의 자는 자옥(子玉), 호는 정와(靜窩),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성주(聖柱)의 아들로 함안(咸安)에서 살았다. 그는 처음 조정규(趙貞奎)에게서 7~8년 동안 수학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요지를 알았으며, 그 후에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 나아가서 경서(經書)를 논변(論辨)하고 예(禮)에 대한 가르침을 얻었다. 50세가넘어서 모친이 별세했는데, 추위와 더위에도 아랑곳없이 성묘를 거르지 않았으며, 백형(伯兄)을 섬기되 부모를 섬기듯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이후로는 항상 상심하여 안유상(安有商), 이정호(李正浩)와 더불어 산 속에 들어가서 『춘추(春秋)』를 강론하였다.
21. 안종희(安宗熙)-회운유고(晦雲遺稿)-1派28世-서파공파
서지내용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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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운유고 (晦雲遺稿) |
저자 |
성명 |
안종희 (安宗熙) |
자 |
한여 (漢汝) | |
호 |
회운 (晦雲) | |
판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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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版本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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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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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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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 |
2卷1冊 | |
책크기 |
28.4x19cm. | |
사부분류 |
별집류 | |
기타사항 |
안종희(安宗熙 : 1878∼1937)의 자(字)는 한여(漢汝), 호(號)는 회운(晦雲),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안종희는 이(理)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상린(相麟)이며 어머니는 무안박씨로 진익(進翼)의 딸이다.
서문은 권일섭(權一燮)이 발문은 안용호(安龍鎬)가 썼으며 卷之1에는 詩. 書 , 祭文, 遺事, 附錄으로 이뤄졌으며 卷之 2는 祭文, 遺事, 行狀, 墓碣銘(幷序), 墓誌銘(幷序)으로 되어있다.
22. 안중관(安重觀)-회와집(悔窩集)-1派19世-찬성공파
서지내용 | ||
서명 |
회와집 (悔窩集) | |
저자 |
성명 |
안중관 (安重觀) |
자 |
국빈(國賓) | |
호 |
회와(悔窩) | |
판사항 |
古活字本 |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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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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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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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 |
8卷 4冊 | |
책크기 |
30×18cm | |
사부분류 |
별집류 | |
기타사항 |
안중관 (安重觀 : 1683~1752)은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국빈(國賓), 호는 회와(悔窩)·가주(可洲).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에 문과 응시는 포기하였다. 뒤에 유일(遺逸)로 천거받아 세자익위사위수(世子翊衛司衛率)가 되었고, 공조좌랑을 거쳐, 홍천·제천의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벼슬보다는 성리학에 침잠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그는 유학을 비롯하여 문학·경세학(經世學)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시문은 그의 6대손 종학(鍾學) 및 종필(鍾弼) 등이 편집한 《회와집 悔窩集》에 수록되었는데 책머리에 남정철(南廷哲)의 서문과 책끝에 종학·이종원(李鍾元)의 발문이 있으며 권1∼3은 시, 권4는 서(序)·제발(題跋), 권5는 제발·기(記), 권6은 기·논(論), 권7은 설(說), 권8은 찬(贊)·명송(銘頌)·서(書)·상량문·제문·애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6의 <양만춘론(楊萬春論)>에서는 당(唐)나라의 침입을 격퇴한 양만춘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 침입 목표가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아니고 신라 공격에 있었으므로 당나라에 대항하였다고 논하고 있다.
8권 4책. 목활자본. 규장각도서·장서각도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23. 안창렬(安昌烈)-동려문집(東旅文集)-2派26世
서지내용 | ||
서명 |
동려문집 (東旅文集) | |
저자 |
성명 |
안창렬 (安昌烈) |
자 |
순가 (順可) | |
호 |
동려 (東旅) | |
판사항 |
木版本 | |
발행지 |
醴泉 | |
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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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景烈 |
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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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
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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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3책 |
책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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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25.5㎝ |
사부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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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집류 |
기타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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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렬(安昌烈 : 1847~1925)의 자는 순가(順可), 본관은 순흥(順興), 부친은 병례(秉禮), 모친은 동래정씨(東萊鄭氏) 관묵(觀?)의 딸이다. 안동(安東)에서 태어나 8세에 종조(從祖)인 치재(恥齋) 안윤시(安潤蓍)에게 수학하고 1863년 유계당(柳溪堂)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마하였으며, 성재(性齋) 허전(許傳), 소정(韶亭) 조성교(趙性敎), 석산(石山) 김익용(金益容) 등에게 강학하기도 하였다. 1868년 순흥으로 이거하여 과거공부에 힘썼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포의(布衣)로서 고종(高宗)의 구언(求言)에 응해 10조의 시무를 상소하였으며, 이듬해 친군좌우영(親軍左右營)이 설치되자 문안(文案)으로 추천받아 관직에 올랐다. 갑신정변 때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한 공로로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가 되었고, 이후 문경(聞慶), 영천(榮川), 하양(河陽), 이천(伊川), 인제(麟蹄), 흡곡(?谷) 등지의 수령을 지냈다. 1894년 부친상을 마치고 다시 괴산군수(槐山郡守)로 부임하여 선정을 펼쳤으며 동학난(東學亂)의 와중에 고을을 지켜내었다. 이후 공무의 여가에 감로재(感露齋), 옥호정(玉壺亭), 하정(荷亭) 등을 짓고 산수간에 소요하다가 1925년 향년 79세로 졸(卒)하였다. 동생 경렬(景烈)의 주도하에 김세락(金世洛), 이중균(李中均) 등이 유고를 교정하여 1927년 판각에 착수하였으며, 문집이 간행된 것은 1932년의 일이다.
『동려집(東旅集)』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권두에 이명익(李明翊)의 서문과 목차가 있다. 권1에 사(辭) 1수, 부(賦) 1수, 시(詩) 166수, 권2에 시(詩) 191수, 권3에 소(疏) 2편, 서(書) 74편, 권4에 서(序) 3편, 기(記) 8편, 발(跋) 5편, 잡저(雜著)로 해산기행록(海山紀行錄), 명(銘) 1편, 자전(自傳) 1편, 상량문(上樑文) 3편, 권5에 축문(祝文) 2편, 제문(祭文) 14편, 묘갈명(墓碣銘) 3편, 묘지명(墓地銘) 7편, 행장(行狀) 5편, 권6은 부록으로 김세락(金世洛)의 행장, 안경렬(安景烈)의 가장, 권상대(權相大)의 묘갈명, 권상규(權相圭)의 고유문이 수록되어 있다. 권말에 이중균의 발문과 권상규의 후지(後識)가 있다.
편지의 수신자 중 저명한 인물로 김윤식(金允植), 한경원(韓敬源) 등이 있으며, 「해산기행록(海山紀行錄)」은 1889년 흡곡현령에 임명된 저자가 이 해 4월 7일부터 5월 6일까지 정창시(鄭昌時), 이석지(李晳知), 정동시(鄭東時) 등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한 기록이다.
24. 안처순(安處順)-사재선생실기(思齋先生實記)-1派13世-참찬공파
서지내용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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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재선생실기 (思齋先生實記) |
저자 |
성명 |
안처순 (安處順) |
자 |
순지(順之) | |
호 |
기재(幾齋), 사재당(思齋堂) | |
판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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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版本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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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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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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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 |
6卷 3冊 | |
책크기 |
28.8×20.6cm | |
사부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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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사항 |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후손으로 안처순의 字는 順之, 號는 思齋이다. 본관은 順興이고 安子美의 13세 孫이며 安璣의 아들이다.
1492년 (성종23) 廣州에서 태어났다. 1497년 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仲父인 판서 琛의 집에서 자랐다.
1513년 22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承文院副正字를 지냈다.
이후 藝文館 檢閱, 弘文館正字兼經筵春秋館記事官과 弘文館博士를 역임하였다.
1518년 27세에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특별히 求禮縣監을 제수받았다.
구례현감을 지내는 동안 《近思錄》을 간행하고 宣聖廟를 건립하였다.
이해 기묘사화가 발생하여 평소에 친분이 깊었던 靜庵 趙光祖와 自庵 金絿가 유배되자 謫所로 방문하였고 이듬해에는 벼슬을 버리고 南原으로 돌아갔다.
1521년 思齋堂을 짓고 思齋라 自號하였으며 이해에 경전 중에 격언을 모아 〈思齋篇〉을 지었다.
42세에 다시 벼슬에 나아가 成均學官과 奉常寺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南原에 서원을 세우고 위판을 봉안하였으며, 1686(숙종12)에는 寧川이라 사액하였다.
사재선생실기(思齋先生實記)는 思齋 安處順(1492∼1534)의 遺文集이다. 세월이 감에 따라 殘缺되어 가므로 후손인 安克孝가 1761년(英祖 37)에 遺文에다 世系, 年譜 및 附錄을 덧붙여 편집하고 廣巖 朴聖源의 序文, 渼湖 金元行의 교정을 받아 목판까지 새겼으나 끝내 문집을 간행하지는 못하고 先祖의 서원에 藏版만 하였었다. 그 후 후손인 思訥 등이 이미 썩어 훼손된 版을 다시 새겨 1820년(純祖 20)에야 간행하였는데, 本集은 그것을 臺本으로 하여 후에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권두에 1761년 朴聖源이 쓴 서문이 있다. {권1}의 〈世係〉와 〈年譜〉, {권2}에서 {권4}까지는 著述이다. {권2}에는 〈思齋堂元韻〉, 〈遊雙溪寺〉, 〈訪金大人墓〉, 〈訪金大柔于海島〉(大柔는 自庵 金絿의 字이다. 기묘사화 후 謫所에 방문했을 때 쓴 글이다. ), 〈次大柔〉, 〈祭伯氏文〉, 〈祭金進士文〉 등이 실려있다. {권3}과 {권4}는 〈思齋篇〉을 싣고 있다. 사재편은 《近思錄》의 예를 따라 경전 중에 格語를 집성하여 지은 것으로 《論語》, 《孟子》, 《中庸》, 《詩經》 등의 경전을 인용하고 뒤에 諸學의 주석을 붙였다. {권3}의 思齋篇上은 爲學이라는 소제목 아래 관련된 내용을 실었다. {권4}의 思齋篇下에는 孝親, 事君, 事師, 夫婦, 兄弟, 朋友, 祭祀, 居鄕, 衣服, 哀有喪, 毁譽, 正巳, 守身, 待小人, 素患難, 尙友 등의 내용이 실려있다. {권5}에는 〈求禮別章〉과 〈諸賢簡牘〉, 〈思齋堂題詠〉이 있다. 먼저 〈求禮別章〉은 1518년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구례로 떠나는 안처순을 송별하는 글로 당시의 명유들과의 교유 사실을 알 수 있다. 차례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送安順之赴求禮縣序(柳庸謹 1485∼1550, 孫洙, 成世昌 1481∼1548), 奉別順之之任求禮(宋之翰, 張玉, 鄭應 1490∼1522), 贈順之還鄕(朴世煦 1493∼1550), 贈送安順之南行(金淨 1468∼1521), 送順之南行(趙光祖 1482∼1519), 奉別安順之使君赴任 (鄭士龍 1491∼1570), 送安博士順之歸養湖南(申光漢), 安君順之歸養南原(尹殷弼), 奉送安順之宰求禮(李忠楗 ?∼1521), 友人安順之以弘文博士歸養特除求禮縣諸友皆歌詠其行予亦述懷以贈(奇遵 1492∼1521), 送順之爲親出補求禮行(安處明), 送順之赴任(金익 1486∼1548), 奉贈安順之歸養南原(崔山斗 1483∼?), 別順之赴任(尹自任1488∼1519), 謹書前宵所話奉別(閔壽千), 別安順之略述荒句 行(李文楗1494∼1567) 등이다. 諸賢簡牘에는 1517년에 鄭應(1490∼1522)이 보낸 大柔順之奉復頭流菊巖, 又奉復(己卯士禍로 靖國功臣이 파직되고 賢良科가 혁파되는 상황을 적어보냄), 朴祥(1474∼1530)의 서간문 3편, 奇遵 2편, 趙光祖, 金淨 5편, 崔山斗 7편, 李延慶(1488∼1522) 2편, 成守琮(1528∼1598) 1편, 金絿 2편, 崔山斗 2편, 南추, 韓忠 2편, 柳庸謹, 朴祥, 崔山斗 2편 순으로 실려 있다. 시기는 주로 안처순이 구례에 있던 1518년에서 기묘사화 이후 정국이 어수선한 1521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崔山斗가 보낸 1531년의 간독까지 확인된다. 〈思齋堂題詠〉은 宋麟壽(1487∼1547), 申潛(1480∼1545), 安珽(1494∼?), 羅世纘(1498∼1551), 梁彭孫(1480∼1545), 金麟厚(1510∼1560), 安瑋(1491∼1572), 奇大升(1527∼1572) , 鄭澈(1536∼1593), 林希茂, 丁煥(1494∼1540), 尹卓然, 林悌(1491∼1554), 李圖南, 鄭沼, 申健, 愼喜男(1523∼1597), 楊士衡(1547∼?), 韓浚謙(1557∼1627), 姜大遂(1591∼1658), 宋純(1493∼1583) 등 안처순 당시인과 후인들이 쓴 思齋堂에 대한 題詠을 모아놓은 것이다. {권6}에는 盧色(1518∼1578)이 찬한 〈行狀〉과 朴世煦, 元壽長, 閔瑄, 鄭仁雄, 金 , 趙溥, 丁煥, 盧色 등의 〈祭文〉, 鄭萬鐘, 李龜齡, 沈彦光, 申健, 金遂性, 沈彦慶, 李文楗(1494∼?), 權應挺(1498∼1564), 丁應斗(1508∼1572), 崔山斗, 曺禧, 金彦 , 宋 , 任弼亨, 金綱, 李 山+夔, 崔輔漢(?∼1546), 尹安仁, 金希說, 吳世佑, 李塘, 鄭承周, 金麟厚 등의 〈輓詩〉, 그리고 〈院享〉이라 하여 안처순의 서원인 寧川書院에 관계된 기록으로 院宇上樑文, 請院額疏, 禮曹回啓, 賜額致祭文, 春秋享祀祭文 등이 실려 있다. 권말에 1820년에 쓴 宋穉圭의 〈思齋先生實記跋〉이 있다.
기묘제현수첩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 때를 전후하여 친구들로부터 안처순(安處順;1492~1534)에게 보내진 편지글을 묶어 만든 수첩(手帖). 1첩. 보물 제1198호. 소유자 순흥안씨종중(順興安氏宗中).
기묘제현수첩(己卯諸賢手帖)은 대체로 사화(士禍)가 일어난 기묘년(己卯年)을 전후하여 동료(同僚) ·붕우(朋友)로 부터 안처순(安處順)에게 보내진 서신(書信)을 묶어 만든 것으로 거의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관련(關聯)된 인물(人物)들의 글이다. 이 수첩(手帖)은 수록(收錄)된 39통(通)의 서찰(書札)은 장옥(張玉), 조광조(趙光祖), 성수완(成守琓), 남주 등 4명(名)이 각(各) 1통(通), 정응, 한충(韓忠), 유용근(柳庸謹), 3명이 각 2통(通), 이정경(李廷慶) 3통(通), 박상(朴祥), 김구(金絿) 각 4통(通), 김정(金淨) 5통(通), 최산두(崔山斗) 11통(通)으로 최산두(崔山斗)의 서찰(書札)이 가장 많다. 이들 서간문(書簡文) 서첩(書帖)은 그가 생존시(生存時)인 정축(丁丑)(1517, 중종 12)에서 신묘(辛卯)(1531, 중종 26)에 이르는 15년간(年間) 그의 동료(同僚)인 기묘제현(己卯諸賢) 12명으로 부터 받은 서신(書信) 39통(通)을 수습(收拾), 한 첩(帖)으로 장정(裝訂)한 것으로 면수(面數)는 3면(面)부터 72면(面)에 걸쳐 수록(收錄)되어 있다. 수첩(手帖)의 첫장에는 한준겸(韓浚謙)의 지문(識文)이 실려 있고 첩말면(帖末面)에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11대손(代孫)이 되는 조성교(趙性敎)가 이곳 도순찰사(都巡察使)로 부임(赴任)하여 이 서첩(書帖)을 보고 완영(完營)에서 보수(補修) 개장(改粧)토록 하고 이어 이 첩(帖)에 대한 감회(感懷) 및 경위(經緯) 등을 서술(敍述)하는 발문(跋文)이 있다.
이 기묘제현수첩(己卯諸賢手帖)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관련(關聯)된 명현(名賢)들의 글과 필적(筆蹟)이 집결(集結)되어 있는 것으로 조선전기 서화(書畵)는 물론, 기묘사화(己卯士禍) 연구(硏究)에 더할 나위 없는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씨첩은 안처순이 살아 있을 당시 1517년(중종 12)에서 1531년(중종 26)에 이르는 15년간 그의 친구 12명으로부터 받은 편지 39통을 모아 하나의 첩으로 만든 것으로 3면부터 72면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수첩의 첫머리는 한준겸(韓浚謙)의 식문(識文)이 실려 있고, 수첩 끝에는 조광조(趙光祖)의 후손인 조성교(趙性敎)가 이 수첩에 대한 감회와 경위 등을 서술한 발문(跋文)이 있다. 이 수첩은 기묘사화와 관련된 명현들의 글과 필적이 모여 있는 것으로, 조선 전기 서화(書畵)는 물론 기묘사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25. 안처택(安處宅)-동오집(桐塢集)-1派23世-참판공파
서지내용 | ||
서명 |
동오집 (桐塢集) | |
저자 |
성명 |
안처택 (安處宅) |
자 |
인백 (仁伯) | |
호 |
동오 (桐塢) | |
판사항 |
木活字本 | |
발행지 |
||
발행자 |
||
발행년 |
1935 | |
권수 |
4 | |
책크기 |
19.5×28㎝ | |
사부분류 |
별집류 | |
기타사항 |
『동오문집』은 조선 중기의 학자 안처택(安處宅 ; 1705∼1775)의 시문집이다. 안처택의 자는 인백(仁伯), 호는 동오(桐塢), 본관은 순흥(順興), 아버지는 천보(天輔)이다.
이 책은 1935년에 그의 5세손 구련(龜鍊)의 편집을 거쳐, 안용락(安庸洛)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문집 가운데 시는 기상이 뛰어나면서도 평이하고 조금도 아로새긴 태가 없다. 대부분이 교훈적인 면에 치중하였으며 자연을 읊은 것으로, 특히 매·난·국·죽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 또한 진주 촉석루(矗石樓)에 올라 삼장사(三壯士)의 넋을 위로한 시에는 우국충정이 담겨져 있다.
21세에 정만양(鄭萬陽), 정규양(鄭葵陽) 형제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매산 정중기(梅山 鄭重器), 명고 정간(鳴皐 鄭幹) 등과 학문을 강마하여 경전의 뜻과 성리학의 요체에 정통하였다. 여러 번 향시에 뽑혔으나 회시에 실패하였는데, 양친상을 당한 후에는 과거에 뜻을 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정규양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26. 안축 (安軸) - 근재집 (謹齋集)
서지내용 | ||
서명 |
근재집 (謹齋集) | |
저자 |
성명 |
안축 (安軸) |
자 |
당지 (堂之) | |
호 |
근재 (謹齋) | |
판사항 |
木版本 | |
발행지 |
||
발행자 |
||
발행년 |
1680 | |
권수 |
4 | |
책크기 |
15×28.2㎝ | |
사부분류 |
별집류 | |
기타사항 |
『근재집』은 고려 말 문신 안축(安軸 ; 1282∼1348)의 일고이다. 안축의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아버지는 석(碩)이다.
고향 순흥의 죽계(竹溪:지금의 豊基)에서 세력기반을 가지고 중앙에 진출한 신흥 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탁월한 재질로 학문에 힘써 글을 잘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사헌규정(司憲糾正)·단양부주부(丹陽府注簿)를 지내고, 1324년(충숙왕 11)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그곳 요양로(遼陽路) 개주판관(蓋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서 성균학정(成均學正)·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거쳐, 충혜왕 때 왕명으로 강원도존무사(江原道存撫使)로 파견되었다. 이때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거기에는 충군애민(忠君愛民)의 뜻이 담겨 있다. 1332년(충숙왕 복위 1)에 판전교지전법사(判典校知典法事)에서 파면당하였다가 전법판사(典法判書)로 복직되었으나 내시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다시 전법판서·감찰대부(監察大夫) 등에 등용되고, 이어 교검교평리(校檢校評理)로서 상주목사를 지내고,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차례로 지내고 1347년에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어, 양전(量田)행정에 참여하였다. 그 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이제현(李齊賢) 등과 개찬하였고, 또 충렬·충선·충숙 3조(朝)의 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흥녕군(興寧君)에 봉하여진 뒤 죽었다.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27. 안치권 (安致權) - 내옹유고 (乃翁遺稿)
서지내용 | ||
서명 |
내옹유고 (乃翁遺稿) | |
저자 |
성명 |
안치권 (安致權) |
자 |
윤야 (允若) | |
호 |
내옹 (乃翁) | |
판사항 |
木活字本 |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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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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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1934년 | |
권수 |
3권 1책 | |
책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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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분류 |
오림문고 | |
기타사항 |
안치권(安致權ㆍ1745~1813)은 자는 윤야(允若), 호는 내옹(乃翁),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선대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함안에 거주하였으며, 5세조 안광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을 따라 창의하였다. 이산(夷山) 황후헌의 문인으로 1934년 5대손인 상욱(商煜)과 택주(宅柱)ㆍ태중(泰中) 등에 의해 편집ㆍ간행된 ‘내옹유고(乃翁遺稿)’가 전한다
조선 후기의 학자 안치권(安致權)의 시문집. 3권 1책. 목활자본. 1934년 5대손인 상욱(商煜)과 택주(宅柱)·태중(泰中) 등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권두에 하겸진(河謙鎭)의 서문과 권말에 상욱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시 78수, 권2는 서(書) 3편, 잡저 2편, 서(序) 1편, 문(文) 6편, 권3은 부록으로 행장·묘갈명 각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에는 명승고적을 탐방하고 읊은 것이 많다. 〈알남명조선생사우 謁南冥曺先生祠宇〉는 조식(曺植)의 사당을 참배하고 감회를 읊은 것으로 선현을 존경하는 생각과 학문적인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송경회고 松京懷古〉는 송도를 둘러보고 느낀 쓸쓸한 심정을 묘사한 역사적 감회시이다. 이밖에 〈등두류상봉 登頭流上峯〉·〈한양성 漢陽城〉 등도 서경시로 돋보이는 작품이다.
잡저의 〈대덕산성묘일기 大德山省墓日記〉는 1796년(정조 20) 서울에 왔다가 장단의 대덕산에 있는 그의 15대조인 문정공(文貞公) 축(軸)의 묘소에 성묘한 일과 선죽교(善竹橋)·만월대(滿月臺)·임진강 등을 관광한 여행일기이다. 〈두류록 頭流錄〉은 1807년(순조 7) 지리산을 등람한 뒤 덕산(德山)에 들러 조식의 사당을 참배하고 돌아온 기록이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28. 안치묵 (安致默) - 죽남문집(竹南文集)
서지내용 | ||
서명 |
죽남문집(竹南文集) | |
저자 |
성명 |
안치묵 (安致默) |
자 |
사휴(士休) | |
호 |
죽남(竹南) | |
판사항 |
木版本 |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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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安承元 | |
발행년 |
1937 | |
권수 |
4卷2冊 | |
책크기 |
四周雙邊 半郭 19.5 x 15.5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內向2葉花紋魚尾 ; 30.5 x 20.2 cm | |
사부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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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사항 |
내용: 冊1 : 卷1-2, 詩·疏 -- 冊2 : 卷3-4, 書-附錄 |
나라의 病弊를 慨歎 과감한 刷新策을 陳疏
- 漢陽歌에 버금할 長篇歌辭<海東漫話>남기고 -
자는 사휴(士休). 호는 죽남(竹南). 정진(廷震)의 아들. 서파(西坡) 이(理)의 후손. 純祖26년(1826)~高宗4년(1867).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슬기로와, 겨우 말을 배우면서 문자를 깨달았다. 6세 때 어느날, 산책하는 그 아버지를 따라, 마을 앞 시냇가에 거닐면서, 그 아버지가 풍경을 보고 詩를 지으라 하매,
老石全苔面, 垂楊半沈水.
(늙은 돌은 온통 이끼에 덮였고,
늘어진 버들은 반쯤 물에 잠겼네.)
라고 읊어 그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 한다.
뛰어난 재주에 글읽기를 좋아하여, 여남은 살에 이미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제자서(諸子書)를 두루 섭렵했으며, 역학(易學) 역상(歷象)에까지 널리 탐구(探究)했다.
哲宗1년(1850) 25세로 文科에 급제, 哲宗5년 (1854)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용되어, 正字, 부사과(副司果)등을 거쳐, 동10년(1859) 성균전적(成均典籍)이 되고, 이듬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高宗2년(1865) 사헌부장령(掌令)을 거쳐, 그 이듬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哲宗5년 벼슬에 올라, 高宗4년(1867) 42세의 한창 나이로 생애를 마치기까지 13년 동안에 걸친 그의 벼슬경력이다.
그는 준수한 생김에 효성이 도타왔고, 성품이 곧고 맑으면서도 너그럽고 순후하여 포용(包容)하는 도량이 있었으며, 온화하고, 삼가면서도 뜻이 굳세었다.
그는 오랜 외척(外戚)의 전횡과 기강의 해이(解弛), 탐관오리(貪官汚吏)의 횡포 착취 등으로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탄식, 여러 차례 간절한 우국(憂國)의 상소를 올렸으니, 대개 기강의 문란, 국용(國用)의 낭비, 풍속의 퇴폐 등 뿌리깊은 병폐를 통론(痛論)하고, 그 쇄신책(刷新策)으로, ◇ 성학(聖學)을 힘써, 다스림의 근원을 밝힐 것. ◇ 문란한 인사행정을 바로잡아, 인재를 바르게 쓸 것, ◇ 유능 청직(淸直)한 수령(守令)을 뽑아 피폐한 민생을 건질 것, ◇ 언론의 길을 열어 민중의 여론을 수렴할 것, ◇ 왕실이며 상류층의 사치와 낭비풍조를 억제할 것 등으로, 시급히 과감한 시책을 건의했다.
이에 대하여 哲宗임금은
「매우 좋은 말이니, 마땅히 체념(體念)하리라」
는 비답(批答)을 내렸고, 高宗 즉위초에 올린 우국충정(憂國衷情)이 넘치는 절실한 진소(陳疏)는 대원군(大院君)의 혁신정책에도 다소나마 반영되지 않았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저서로 <죽남집(竹南集)> 4권이 있고, <해동만화(海東漫話)>라는 장편 가사(歌辭) 1편이 전한다. (歌辭편 참조)
29. 안택주 (安宅柱) - 도와일고 (道窩逸稿)
서지내용 | ||
서명 |
도와일고 (道窩逸稿) | |
저자 |
성명 |
안택주 (安宅柱) |
자 |
백인(伯仁) | |
호 |
도와(道窩) | |
판사항 |
木板本(朝鮮) |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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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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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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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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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크기 |
2卷1冊 : 四周雙邊 半郭 18.5 ×15.6 cm, 有界, 10行18字, 白口, 上下向2葉花紋魚尾 ; 30.3 ×20.3 cm | |
사부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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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사항 |
순조때 사람으로 자는 백인(伯仁), 호는 도와(道窩)로 취우정선생의 후손이다.
성품이 온아하고 뜻이 돈독하여 국기(國忌)에 행소(行素)하니 문인들이 비를 세웠다.
族祖 棄翁錫魯門人이다
30. 안향 (安珦) - 회헌선생실기 (晦軒先生實紀)
서지내용 | ||
서명 |
회헌선생실기 (晦軒先生實紀) | |
저자 |
성명 |
안향 (安珦) |
자 |
사온 (士蘊) | |
호 |
회헌 (晦軒) | |
판사항 |
木版本 | |
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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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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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19세기 | |
권수 |
5 | |
책크기 |
29.8×19.4㎝ | |
사부분류 |
별집류 | |
기타사항 |
『회헌선생실기』는 안향(安珦 ; 1243~1306)에 대한 사적(事蹟)을 모은 책이다. 안향의 초명은 유(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인데, 이는 그가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이책은 모두 네 차례 간행되었다. 제1차로는 1763년 17대손 극권(克權)이 유집사실(遺什事實)과 세계비지(世系碑誌) 및 제현기술(諸賢記述) 등을 편집하여 1766년에 간행. 판각사업을 도동사(道東祠)에서 하였기 때문에 안자연보(安子年譜)에서는 이것을 ‘도동본실기(道東本實記)’라 부르기도 한다. 책머리에는 대제학 이정보(李鼎輔)를 비롯하여 박성원(朴聖源)·송명흠(宋明欽) 등의 서문이 있으며, 안향의 16대손 석근(錫謹)의 발기(跋記)가 있다. 제2차로는 1816년 안재묵(安在口) 등이 증보하였으며, 홍석주(洪奭周)의 서문이 있다. 이때 안향의 연보도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제3차로는 안명렬(安明烈) 등이 1883년~1884년 사이에 간행하였으며, 민영목(閔泳穆)의 서문이 있다. 모두 4권 2책으로 되어 있으며, 안자 연보에서는 이를 ‘태학본실기(太學本實記)’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4차로는 1909년 후손과 사림이 합의하여 간행한 것으로, 경상남도 진주의 연산(硯山) 소장의 목판본에 의한 것이므로, 이를 ‘연산본실기’라고 부른다. 5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이만도(李晩燾)의 서문이 있다. 권1은 관향사실(貫鄕事實)·진상(眞像)·세계(世系), 권2는 시문(詩文), 권3은 연보·부록, 권4는 제문류(祭文類), 권5는 여사열전(麗史列傳)·언행록·묘지·비명·서(書), 권6은 기(記), 권7은 보유록(保宥錄)·소수서원전답안(紹修書院田畓案), 권8은 발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향에 대한 연구 자료로는 이 실기와 안자연보 등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회헌실기』에 대하여 윤용균(尹瑢均)은 그의 『윤문학사유고(尹文學史遺藁)』에서 그 역사적 가치와 신빙도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으나, 김병구(金柄九)는 그의 『회헌사상연구』에서 대체로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기록과 일치하므로 이 실기의 자료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추정하였다.
안향은 밀직부사 부(孚)의 아들로 지금의 경북 풍기의 죽계(竹溪) 상평리(上坪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주우씨(剛州禹氏)이다. 1260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탈출로 인하여 그는 새삼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275년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 민풍(民風)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고,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고려는 충렬왕대에 와서는 원나라의 완전한 속국이 되어 관제도 고쳤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을 고려에 두었는데, 1289년 2월에 그는 이 정동행성의 원외랑(員外郞)을 제수받았다. 얼마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고, 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고,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가지고 이듬해 돌아왔으며, 3월에 부지밀직사사가되었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하였고, 이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같은 해 12월에 지밀직사사, 다시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12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 당시 원나라의 간섭에 의하여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를 세우니, 그가 바로 충선왕인데, 즉위하자 관제를 개혁하여 그는 집현전태학사겸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兼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같은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바로 이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었는데, 이듬해 수국사가 되고, 이어 1300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오르고, 얼마 뒤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 인재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5월에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그리고 같은 해 6월에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 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口)·이진(李口)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1306년 9월 12일 64세로 죽었다.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하여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는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그곳에 세웠는데, 1549년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643년 장단의 유생들이 봉잠산(鳳岑山) 아래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임강서원(臨江書院)이다. 이 두 서원과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31. 안호연 (安浩淵) - 남계집 (楠溪集)
서지내용 | ||
서명 |
남계집 (楠溪集) | |
저자 |
성명 |
안호연 (安浩淵) |
자 |
맹연(孟然) | |
호 |
남계 (藍溪) | |
판사항 |
木版本 | |
발행지 |
||
발행자 |
||
발행년 |
1936 | |
권수 |
4 | |
책크기 |
21×31㎝ | |
사부분류 |
별집류 | |
기타사항 |
『남계집』은 조선말기의 학자인 안호연(安浩淵 ; 1827∼1898)의 시문집이다. 안호연의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맹연(孟然), 호는 남계(楠溪)이다.
이 책은 1936년 아들 영호(永鎬)가 편집하고, 손자 승윤(承胤)이 간행하였다. 문집은 권1·2에 시 191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 중「춘일(春日)」·「매화(梅花)」·「조춘(早春)」등 경치를 읊은 것이 많으며, 소백산 등 산천을 유람하면서 김원수(金遠銖)·권세연(權世淵) 등 당시의 선비들과 주고받은 것이 상당수에 달한다. 특히, 「기김석규덕척적중(寄金碩奎德川謫中)」과 「기김조영안변적중(寄金祖永安邊謫中)」은 모두 귀양살이를 위로한 시로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작품이다. 시의 흐름이 청신하고 미려하며 격조가 높다.
서(書) 중에는 시사를 논한 것이 있는데, 그 중 권조연(權祖淵)에게 준 글에서는 기울어져가는 국사를 개탄하고 외세로 인하여 받는 치욕을 분하게 여기면서, 곳곳에서 일어나는 의병활동을 찬양하고 있다. 또한, 잡저의 「족보서(族譜序)」에서는 관향이 같은 사람은 비록 분파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같은 뿌리의 나무와 근원이 같은 물과 같으니 서로 친근 돈목하여야 한다고 족보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기 가운데 「죽포기(竹포記)」와 「일와기(逸窩記」는 그 문장이 뛰어나다.
아버지는 도묵(道默)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통덕랑 벽도(璧度)의 딸이다. 장성함에 따라 과거문을 공부하여 명성이 높았으나 부화한 병려문이 선비의 속된 습속임을 깨닫고 과거는 단념했다. 경사(經史)와 고문(古文)에 전념하여 깊은 이치를 담론하였다. 세도가 날로 흐트러지자 명리를 초개처럼 등한시하고 원근의 명사들과 함께 서로 학문을 강론하고 선찰과 유현의 고적을 찾아 놀며 시를 지었다.
32. 안희 (安憙) - 죽계집 (竹溪集)
서지내용 | ||
서명 |
죽계집 (竹溪集) | |
저자 |
성명 |
안희 (安憙) |
자 |
언우 (彦優) | |
호 |
죽계 (竹溪) | |
판사항 |
木活字本 | |
발행지 |
||
발행자 |
||
발행년 |
1890 | |
권수 |
4 | |
책크기 |
20×30.5㎝ | |
사부분류 |
별집류 | |
기타사항 |
『죽계집』은 조선중기의 학자 안희(安憙 ; 1551~1613)의 시문집이다. 안희의 자는 언우(彦優), 호는 죽계(竹溪),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이 책은 1890년(고종 27) 후손 돈섭(暾燮)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이 중 사(辭)의 「애동방사(哀東方辭)」에서는 우리나라의 지리적 여건상 육지와 바다로 침입해 오는 적으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참상을 입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야로문답(野老問答)」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임진왜란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문답식으로 기술하였다. 이 두 글에서 임진왜란을 전후한 국내외의 정세를살필 수 있다. 이 밖에 「기분사(寄憤辭)」와 「천마로능행부(天馬老能行賦)」에는 왜적을 섬멸하지 못한 울분이 적혀 있다.
안희는 공진(公軫)의 아들로 함안(咸安)에서 살았다. 그는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로부터 전적(典籍)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김해(金海)에서 창의(倡義)하였다. 1599년 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쳐 이천부사(利川府使)가 되었고, 1600년에는 장단부사(長湍府使)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608년에 단양군수(丹陽郡守)를 거쳐 대구부윤(大丘府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