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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적 복음을 따르자(갈 1:6~10)
박창진 목사
제가 성경에 나오는 교회들 중에 베뢰아 교회에 호감이 가장 높습니다. 사도행전17:11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다”고 했거든요. 오늘 제 설교에 대해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는지 그러한가?라는 생각을 하시며 들어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아멘은 그렇다는 동의가 되시면 해주시고요.
갈라디아서는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지역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쓴 편지예요. 그들에게 편지하면서 초반부터 아주 강력한 경고를 날려요. 다른 복음요. 천사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거라네요(8절).
대체 다른 복음이 뭐 길래 그렇게 강력하게 경고하는 걸까요? 성도 여러분, 다른 복음을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제까지 설교를 통해 여러 차례 들었을 텐데 다른 복음이 뭔가요?
다른 복음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구원에 있어서 믿음 외에 행함을 더하는 것이에요. 여기에서 구원이란 천국에 들어가는 거죠. 죽음을 앞둔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4:18에서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라고 했거든요. 이 땅에서 삶이 끝난 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거예요. 히브리서5:9에선 영원한 구원이라고 해요. 미래의 천국에 들어가는 것 다르겐 영원한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믿음 외에 행함을 더하는 것이 다른 복음이라는 거예요. 그렇죠?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정말 그런가요? 정말 그럴까요? 좀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다른 복음이라는 표현은 갈라디아서에만 나와요. 갈라디아서는 그렇게 긴 편지는 아니에요. 총 149절이니요. 4장까진 율법과 할례 문제는 다뤘고 5.6장은 그러므로로 시작해서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뤄요. 로마서와 같은 방식이에요. 로마서는 할례에 대한 언급은 없이 율법을 다루고 유대인들에 대해 말한 후 12장에선 그러므로로 시작해서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루거든요.
갈라디아서에서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다루면서 바울 사도는 육체의 일들을 언급하곤 5:21에서 “~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어요. 신자는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엔 이미 들어왔거든요. 유업으로 받는 하나님 나라는 미래의 천국을 가리켜요.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거예요. 정상적인 해석을 한다면요. 글쓴이나 처음 그 글을 받은 이들에게 이는 너무나 분명했어요. 6:8에선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어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것이 영생을 거두는 것이고 받지 못하는 것이 썩어질 것을 거두는 거예요. 이 두 구절은 구원에 있어서 믿음 외의 행함을 진술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거든요.
이 정도면 바울 사도는 정신 이상자예요. 별로 길지도 않은 글을 쓰면서 앞에선 다른 복음을 정죄하고 뒤에서 다른 복음을 말한 것이니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원 저자이신 성령께서 그렇다는 말이 돼요. 다른 복음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지요. 곧 그런 이해를 가진 신학자나 목사들은 사도 바울와 성령을 정신 이상으로 취급하고 있는 거예요. 자신들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로마서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죠.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로마서 8: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11:22). 찍힌다는 것은 둥지를 끊어내는 것으로 뿌리 곧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한 단절을 뜻합니다. 일반적인 이해의 다른 복음에 해당되잖아요?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말도요. 일반적인 이해에 의하면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도 다른 복음을 전파한 것이 되는 거예요.
다른 복음을 정죄하는 바울 사도가 정작 자신은 갈라디아서뿐만 아니라 로마서에서 다른 복음을 전파했다? 여러분은 그렇다고 생각이 드시나요? 정상적인 사고가 된다면 답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거든요. 당연히 답은 아니에요. 바울 사도는 다른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어요. 이 말은 다른 복음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잘못된 것이라는 거예요. 바울 사도가 천사라고 하더라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한 다른 복음은 구원에 있어서 믿음 외에 행함을 더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뭘까요? 이에 대해 살피기 전에 성경의 진술과 관련하여 사전 지식이 조금 필요합니다.
먼저 언약이에요. 구약은 옛 언약의 줄임말이고 신약은 새 언약의 줄임말이잖아요? 성경은 언약서거든요. 그럼 언약이 뭔지 아는 게 필요하겠죠? 언약이 뭘까요? 여러분들은 언약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일반적으로 언약을 약속이라고 이해하더라고요. 여러분들도 보통 그렇게 생각하시죠?
언약은 고대 근동에서 이미 사용되던 개념인데요. 두 당사자의 동맹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었어요.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대하는 방식으로서 상호 동맹이랍니다.
문서화되었는데요. 거기엔 먼저 동맹의 토대가 기술됩니다. 강자 또는 강대국이 약자 또는 약소국에게 베푼 은혜가 그 내용이에요. 그리고 은혜를 베푼 쪽이 제시하는 요구 곧 명령이 뒤따라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요. 이어서 명령을 지킬 때에 뒤따르는 복 곧 약속이 제시되고요. 명령을 지키지 않을 때에 뒤따르는 화 곧 심판도 제시되지요. 약속은 언약의 한 요소이지 언약과 동등한 개념이 아닌 거죠.
성경은 언약서이기에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어요. 출애굽 이후 시내산 언약에서부터 명시화돼요.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토대로 하나님의 명령과 그 반응에 따른 복과 화를 담고 있어요. 출애굽이나 후에 나오는 70년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포로 회복은 동일한 성격의 구속역사랍니다. 복과 화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으로 대별되거든요. 시내산 언약이 체결된 후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 각 여섯 지파씩 나뉘어 각 산에 서서 축복과 저주에 대해 아멘 하여야 했어요(신 27:11~15). 이후에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멸망은 화를 자초한 결과였어요. 포로에서 회복되었는데, 그 후에도 선조들의 길을 따름으로 로마의 포로가 되고 주후 70년에 최종적으로 예루살렘 멸망과 돌 성전 파괴로 언약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오늘날 이스라엘은 성경의 이스라엘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언약 관계가 없는 한 불신 국가일 뿐이거든요. 바울 사도는 로마서11:26에서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어요.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기 전 곧 하나님과 언약 관계였던 상태의 이스라엘이에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새 언약 관계로 부르심을 받는 거고요. 이 진술은 그 시점의 언약 관계에 있던 유대인들 중에서 완성된 새 언약 안으로 부르시고자 하신 모든 이들이 언약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기 전에 다 부르심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에요. 기록 시점에선 미래의 일이고 지금 시점에선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일인 거예요.
신약은 새 언약인데, 예레미야 31:31에서 얘기된 새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의 구속 역사를 토대로 신자로 부르셔서 성령을 선물로 주심이 은혜의 내용이에요. 신약 성경엔 하나님의 요구와 그 반응에 따른 복과 화를 담고 있어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은 신자의 내면에 자리를 잡고 있고요. 앞에서 언급한 성령을 위하여 심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는 것은 그리심 산이고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어 자기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는 것은 에발 산인 거예요. 신자에게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계속적으로 두 산에서 복과 화의 말씀을 주시지요. 순종을 통한 복과 불순종을 인한 화가 영생을 거두느냐 썩어질 것을 거두느냐로 갈리는 거예요.
다음으로 성경에 사용된 몇 몇 단어의 특수한 용례를 알아야 해요. 한 단어인데, 그 의미가 둘인 경우예요. 성경엔 이런 단어들이 몇 개 있답니다. 문맥에 의해서 단어의 의미가 결정되고요. 언제나 둘 중 하나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어요.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마 8:22). 여기에서 앞의 죽은 자와 뒤의 죽은 자의 의미는 다르잖아요? 이는 죽음이라는 의미가 다른 거거든요. 앞의 죽음은 육신의 생명은 살아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면에서 단절된 상태를 가리키고요. 뒤의 죽음은 육신의 생명이 끝나는 거예요.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이 땅에서 생명이 끝나면 영원한 관계 단절 곧 영원한 죽음으로 나아가게 되고요. 성경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둘 중의 하나를 가리키기에 잘 분별해야 한답니다. 전자의 의미인데, 후자로 이해하는 잘못은 자주 나타나요. 신천지의 교주인 이만희 씨가 초창기에 자신은 죽지 않는다고 했는데, 대표적이에요. 새 하늘과 새 땅과 관련하여 다시는 사망이 없다는 요한계시록21:4의 진술은 관계 단절을 뜻하는데 육체적 생명이 끝나는 것으로 잘못 읽은 거예요.
여러분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들어보셨죠.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어떻게 하든지 간에 한 번 구원과 영원한 구원이라는 두 구원이 있다는 것은 불변이에요. 그렇죠? 성경에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둘 중 하나를 가리키기에 잘 분별하여야 한답니다. 구원의 단어 뜻은 건짐을 받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다루는 구원은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거고요.
한 번 구원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랍니다. 언약은 창세기에서부터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데, 각 시대에 맞는 언약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한 번 구원이에요. 출애굽 후 시내산 언약이 펼쳐질 때나 70년 간 포로되었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시곤 포로 회복 언약을 펼치실 때 그 시점의 언약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한 번 구원인 거예요. 신약에선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새 언약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한 번 구원이고요. 그 시점의 언약과 관계가 맺어지기 전은 관계 단절의 상태 곧 죽음이기에 언약 관계가 맺어진다는 것은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랍니다.
한 번 구원은 믿음으로 얻게 되죠. 이 믿음은 영접하는 것 곧 받아들이는 거예요. 구약에선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출애굽기14:31에서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그 종 모세를 믿었다는 진술과 같이요. 신약에선 요한복음1:12에 나타난 바와 같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는 거예요. 이 믿음은 단회적이에요. 전 생애 가운데 단 한 번 만이에요.
그 결과 구약에서 그 시점의 언약의 백성이 되고 신약에선 신자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요. 죄 용서를 받고 의롭다함을 얻어요. 이를 신학적으로 법정적 칭의라고 해요.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엔 성령을 선물로 받아요. 사도행전2:38이나 고린도전서12:13에 기록된 바와 같아요. 그 시점의 이방인의 경우엔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 곧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상태였다가 회복돼요. 한 번 구원인데, 완성된 새 언약 관계가 맺어지는 것과 동시적이에요.
이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 곧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이루어진답니다. 사도행전 16:14에 나오는 바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예요. 모든 택자들 곧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사랑하셔서 창세전에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주어져요. 전 생애 곧 태중에서부터 임종 직전까지 한 번은 결실을 맺어요. 반드시. 불가항력적 은혜인 거예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한 번 구원을 받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거예요.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여서 빛이 비쳐도 반응하질 못하기 때문에요. 그것을 받을 만한 신자 편의 행위란 없어요. 에베소서2:8~9, 디도서3:5의 기록과 같이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에요. 구약에선 출애굽기14:13의 홍해를 앞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되고요.
영원한 구원은 이 땅의 삶이 끝난 후 미래의 천국에 들어가는 거예요. 영원토록 삼위의 하나님과 교제하게 돼요. 영원한 관계 단절 곧 영원한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거예요.
영원한 구원도 믿음으로 얻어요. 이 믿음은 하나님을 왕으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주님으로, 성령을 전 존재와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거예요. 여리고 정복을 앞둔 가데스바네아에서 열 두 정탐꾼을 여리고에 보내거든요,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하는데, 열 명은 불가능하다고 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능하다고 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 명의 말을 듣고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말리자 그들을 돌로 치려고 하거든요.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고 책망하세요. 민수기14:11요. 여기에서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의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 믿음은 영속적이에요. 언제나 현재인 거죠. 고린도후서12:3에서 얘기된 바와 같이 지금 있는지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해야 하는 거예요. 이 믿음으로 신자는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아요. 관계적 칭의예요.
이는 삼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직결되거든요. 의지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요. 주로 받아들이면 오직 주인의 인도하심을 따르겠죠. 여기에선 믿음과 순종이 동전의 양면이에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었다면 곧 의지했다면 여호수아와 갈렙 같이 여리고 사람들을 밥이라 여기며 기꺼이 정복에 뛰어들었을 거예요. 신약에선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거예요. 그러면 갈라디아서5:16에서와 같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거든요. 그에 대해 하나님께선 의롭다하세요. 관계적 칭의예요. 관계적 칭의는 법정적 칭의와 달리 두 경우예요. 하나님을 의지할 때와 하나님께 순종할 때요. 영원한 구원에 있어선 성령의 인도하심이 은혜의 내용이지요.
믿음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순종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는 말과 동시적이에요. 요한복음3:36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영생 곧 영원한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 성립되고 순종하지 않으면 영생 곧 영원한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말도 성립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빌립보서2:12과 같이 구원 곧 영원한 구원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야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7:13,14의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큰 문,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문을 통과하고 협착한 길을 가는 거예요.
죽음, 구원, 믿음, 칭의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두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죽음은 관계 단절과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는 것이에요. 관계 단절의 상태에서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영원한 관계 단절을 맞게 되고요. 구원은 건짐을 받는 것인데, 관계 단절에서 건짐을 받는 한 번 구원과 영원한 관계 단절에서 건짐을 받는 영원한 구원이에요. 믿음은 영접하는 것과 의지하는 것이에요. 바울 사도는 로마서1:17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했거든요. 앞의 믿음은 신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믿음이에요. 영접하였기에요. 뒤의 믿음은 이르러야 할 믿음이에요. 의지하는 것이지요. 이는 신자가 매순간 이르러야 하는 거예요. 칭의는 신자가 될 때 얻게 되는 법정적 칭의와 신자가 된 후에 얻게 되는 관계적 칭의가 있어요. 관계적 칭의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얻고 또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얻어요. 은혜는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어요. 신자가 아닐 때에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과 신자가 된 후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신자를 인도하시는 것이에요. 성경에서 각 단어는 문맥에 의해서 한 경우를 취해요. 그러므로 잘 분별하여야 해요.
이런 사전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다른 복음이나 사도적 복음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기 쉬워요.
지금과 상황이 달랐던 그 시점의 이방인 신자들에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물음이 있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는가? 신약 성경을 이미 가지고 있는 지금과는 달리 그 시점에선 절박한 물음이었던 거예요. 그렇겠죠?
이 물음에 어떤 유대인 교사들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답했어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를 하고 절기를 지키는 것을 담고 있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그 당시에 노예도 있었던 이방인 신자들에게 도무지 지킬 수 없는 것일 뿐이니요. 정결 예식과 도덕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최고로 단순화시키면 십계명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라는 거예요. 사도행전15장엔 예루살렘 공의회가 나오거든요. 그때의 의제가 1절에 나온 바와 같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는 것이었어요. 여기에서 구원은 한 번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을 가리켜요. 할례는 언약의 백성이 되는 조건이 아니라 언약의 백성이라는 외형적인 표거든요. 옛 언약에선 그 표가 없으면 언약에서 끊어졌어요. 할례를 받느냐 아니냐는 언약 관계가 유지되느냐 끊어지느냐를 결정하는 요건인 거예요. 끊어지면 영원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고요. 5절에선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도 나와요.
할례 부분은 열외로 하고요. 신약의 신자들이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 십계명을 지켜야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여러분은 이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나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뒷부분엔 뭐가 있죠? 십계명이 있어요. 어떤 교회에선 예배 때에 십계명을 교독하기도 해요. 그 관점에서 볼 때에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겠죠.
초대 교회 이방인 신자들의 입장에선 어떠했을까요? 당연히 마찬가지였겠죠. 그 주장을 좋게 생각해서 즐거이 받아들였어요.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교회만 아니라 로마 교회도 그랬어요.
율법의 강령을 생각하면 더 이해가 됩니다. 율법의 강령에 대해 들어보셨죠? 뭔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거든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22:37,39이에요. 강령이란 613개의 조문으로 이루어진 율법을 버무려 짜면 나오는 진액이거든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거예요. 이는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자주 듣는 말이잖아요?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대답이거든요. 그러니 초대 교회에서 수용되었던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거죠.
바울 사도가 정죄한 다른 복음은 어떤 유대인 교사들의 주장인데요. 이방인 신자들에게 율법 좁히면 십계명을 지켜라.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거예요.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것을 다른 복음이라며 정죄한 거예요,
여러분은 수긍이 되시나요? 지금 시대의 신자들에게도 좋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십계명, 율법의 강령을 지키는 것이 왜 다른 복음, 천사가 전하더라도 저주를 받으리라고 한 다른 복음이라는 걸까요? 바울 사도가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이 좀 집중해서 들어야 할 부분이거든요. 시간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집중하기 힘든 시점이에요. 자 몸을 한 번 풀어주십시다. 좌우로 틀고 손을 위로 올리며 크게 기지개를 펴십시다. 아 소리도 내시면서요.
먼저 다른 복음은 거짓 복음이란 건 아니에요. 복음은 복음이에요. 어떤 유대인 교사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들이에요. 그 당시에 유대 사회에선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자임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들의 주장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구원자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어요.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어서 복음은 맞아요. 아마도 오늘날 신학자나 목사들과 거의 같은 내용을 말했을 거예요.
다른 복음이란 어떤 기준에 비추어 다르다는 거거든요. 뭘까요? 오늘 읽은 본문 8절에 나온 바와 같아요. 사도가 갈라디아 지역의 신자들에게 전한 복음 곧 사도적 복음과 다른 거예요. 복음은 복음인데, 사도적 복음과 다른 복음. 천사라고 하더라도 저주를 받으리라고 정죄를 받았어요. 왜 율법 좁게는 십계명이나 율법의 강령을 지켜서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주장이 다른 복음일까요? 그 당시 유대인 신자들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주장이었는데, 다른 복음이라는 걸까요?
율법은요. 옛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삶의 원리거든요. 로마서7:12에서와 같이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은 다 그래요. 은혜인 거죠. 시편1편에서와 같이 옛 언약 아래에 있던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복이었어요. 로마서3:20 같이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이 있고 갈라디아서3:24 같이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이기도 해요.
<율법이냐 은혜냐>라는 책이 있어요. 저자는 율법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은혜를 그것과 극명하게 대조시키거든요. 율법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거예요. 율법은 은혜예요. 그 책에서 은혜라고 얘기되는 내용은 은혜 위의 은혜인 것이고요. 율법은 나쁜 게 아니라 좋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옛 언약 백성들에게 자신과 교제하는 방편으로 주신 것인데, 나쁜 것일 수가 없어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어찌 나쁜 것일 수 있겠어요? 이 책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학자나 목사들이 많거든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지요.
그런데요.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 율법과 관련하여 완전하게 하려 한다고 하셨어요. 마태복음5:17에서요. 이 말은 뭔가요? 율법이 완전하지 못했다 곧 부족했다는 거거든요. 그렇죠?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지만 부족해요. 부족하다는 것은 어떤 기준을 두고서 거기에 비추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거든요. 뭘까요?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말씀에선 확인이 안 돼요. 산상수훈을 수백 번 읽어도 알 수 없어요. 맞죠? 신약 성경 전체를 살피면 어떨까요? 그래도 알 수 없을까요? 그렇다면 문제가 심각해지는데, 감사하게도 신약 성경 전체를 살피면 알 수 있어요. 로마서8:3인데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여기에서 ‘할 수 없는 그것’이 뭐냐면 앞 절에서 기록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거예요. 죄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거예요. 사망이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고요. 법은 힘, 영향력이에요.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어겨서 그 관계가 단절되도록 하는 힘, 영향력에서 해방되는 데엔 완전하지 못했던 거죠. 부족했던 거예요. 율법을 받은 사람들의 연약함과 함께 어우러져서요. 하나님의 뜻을 어겨 그 관계를 단절시키는 힘, 영향력에서 해방되도록 하는 데에 있어서 율법은 완전하질 못했어요.
하나님께선 예수님에 의해 완성된 새 언약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과 교제의 방편으로 율법을 주셨어요. 그 언약의 시점에서 가장 적절한 것이었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더 나은 상태를 품고 계셨어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요. 하나님의 백성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요.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언약의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최종적인 모습이에요.
하나님은 이를 위해 필요한 준비를 하셨어요. 일차적으론 예수님을 통해서요.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시곤 곧바로 그것을 제시하셨어요. 옛 사람에게 말한 바의 내용은 율법이고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의 내용은 완전하게 하려 했다는 율법 곧 완전한 율법이었던 거예요.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이고요. 형제에 대해 노하지 않고 조롱하지 않으며 미련하다 하지 말라는 것은 완전한 율법인 거예요.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이고요. 음욕을 품지 말라는 완전한 율법인 거죠.
제가 완전한 율법이라고 한 내용을 일반적으론 율법의 정신이라고 하거든요. 율법의 정신? 이런 표현이 성경에 있나요? 없어요. 성경에 없다고 쓸 수도 없는 것은.... 아니에요. 쓸 수 있어요. 그런데 꼭 그렇게 써야만 하는가는 별개의 사안이거든요. 산상수훈만 생각하면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신약 성경 전체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기에요.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9:21에서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라고 했어요. 여기에 율법과 대조해서 그리스도의 율법이라는 표현이 나오잖아요. 율법을 모세 율법이라고도 하거든요. 하나님께서 모세의 입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전달하셨기에요. 산상수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셨잖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께 나아온 이들에게 전달된 거예요. 그러니 그리스도의 율법인 거죠. 율법의 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인 거예요.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6:2에서 성취하라고 한 그리스도의 법도 같은 표현이에요. 법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노모스인데, 갈라디아서에서 계속적으로 율법으로 번역되었거든요. 산상수훈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런 개념이 없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성경 전체를 살피면 당연히 나오는 개념인 거예요. 그럼에도 신학자들이 율법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연구하질 않았다는 말이에요. 유감스럽게도요. 그리스도의 율법이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신약 백성의 삶의 원리로 제시한 모든 내용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스도의 율법은 신자로 하여금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간음을 하진 않지만 음욕을 품은 상태일 수 있거든요. 율법에서 그것은 죄가 아니에요. 제사를 통해 용서를 받아야 할 상태는 아닌 거죠. 그렇지만 음욕의 지배 아래에서 있으면 언제든지 간음으로 진행될 여지를 품고 있는 거예요. 죄와 사망의 힘, 영향력 아래 있는 거예요. 음욕을 품지 않으면 아예 그럴 여지 자체가 없어져요. 죄와 사망의 힘, 영향력에서 해방되는 거예요. 음욕이란 이성에 대해 예쁘다, 잘생겼다, 섹시하다, 멋있다 등의 호감을 가지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거죠. 그것을 넘어서서 합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성과 성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는 거예요. 이런 욕망을 품는 것은 신약 시대엔 하나님 앞에서 범죄고요. 음욕을 품지 않는다는 것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거예요.
물론 신자 자신만의 자질이나 능력으로 되는 사안은 아니에요. 내주하시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가능한 사안이지요. 바울 사도가 얘기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함이 신약의 신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받음으로 채워졌어요. 신자 자신만 보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연약한데요.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오늘날의 신자는 성령을 선물로 받았기에 연약함에서 벗어나게 된 거예요. 부족함이 있는 율법이 아니라 완전한 율법을 받았고 그 율법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성령의 다스림이라는 능력을 소유하였어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될 수 있는 거죠.
바울 사도는 로마서8:2에서 성령의 법이라는 표현을 하거든요. 여기에서 법도 율법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요. 율법을 뜻하는 노모스가 쓰였기에요. 서신서에서 신자의 삶의 원리로 제시된 모든 내용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보면 될 거예요. 그리스도의 율법이나 성령의 율법을 칼같이 나눌 필요는 없는데 굳이 나누자면 그렇다는 거죠. 이 둘은 함께 야고보서1:25에서 언급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에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신자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도록 하는 온전한 율법인 거예요. 신자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지켜야 해요. 복 있는 사람이지요.
율법의 강령이라는 표현이 있기에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의 강령이라는 표현도 가능해요.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됩니다. 요한복음13:34에 나오는 새 계명이에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독생자이셨는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람이 되셔서 유대인들을 완성된 새 언약의 시대로 이끄셨어요.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생명의 길을 여셨지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어요. 그 사랑을 본받아 신자들이 서로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이 새 계명이에요. 다른 하나는 유추할 수 있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거예요. 성경엔 없는 표현이지만 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동인이 나에서 예수님으로 바뀌는 거예요.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 사랑이란 빌립보서2:5~8에 잘 나타나 있어요. 자기를 비어 독생자가 사람이 되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요. 여기에서 핵심은 ‘자기를 비어’거든요. 자기의 생각이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지로 채워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는 것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완성된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원리인 거예요.
십계명도 완전하게 되었어요. 유추해서 만들 수 있지요. 1 계명은 성부 성자 성령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가 되겠지요. 6 계명은 형제에게 노하거나 조롱하거나 미련하다 하지 말라가 되고요. 7 계명은 음욕을 품지 말라가 되고요. 이런 방식으로 각 계명을 완전하게 하면 되는 거죠. 성경 뒷장에 기록하거나 오늘날 교회의 예배에서 교독하려면 모세 율법의 십계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의 완전하게 된 십계명을 교회적으로 결정하고 그것을 사용하여야 하는 거예요.
모세 율법의 십계명을 성경책 뒤에 별도로 기록하고 예배 때에 교독하며 율법의 강령을 오늘날 신자들에게 삶의 원리로 제시하는 것은 다른 복음 전파입니다. 당사자들이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요. 오늘날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을 나아가 완전하게 된 율법의 강령을 신자의 삶의 원리로 제시해야 하는 거예요.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기엔 부족함이 있는 율법과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율법이 있어요. 그럼 전자가 계속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요? 없죠.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2:15에서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라고 한 이유예요. 그는 앞 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언급했어요. 예수님은 베드로전서3:18의 진술과 같이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어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불의한 자였으니 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거예요. 죄 자체에 대한 대가를 십자가에서 지불하신 거죠. 십자가 죽으심으로 율법이 폐해졌어요. 이방인 신자들에게 율법은 십자가에서 폐해진 것이었어요. 유대인 신자들은 아니었고요. 유대인 신자들은 율법을 지켜도 됐어요. 사도행전21;20에서 야고보가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수만 명의 유대인 신자들이 다 율법에 열성적이었다고 한 이유예요. 물론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지켜도 됐고요. 율법 준수는 선택 사항이었고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 준수는 필수 사항이었지요. 바울 사도는 유대인이었기에 여기에 해당되었어요. 유대인들을 대할 때엔 율법 아래 있는 자였어요. 예루살렘에 갔을 때 제사가 있는 나실인의 결례 만기 식에 돈을 대고 참석한 것과 같아요. 사도행전21:26요. 이방인들을 대할 때엔 율법 아래 있지 않는 자였어요. 정결 예식을 따르지 않았어요. 그가 갈라디아서2:11에서 이방인 신자들과 식사 중에 유대인들이 온다는 말을 듣고 자리를 떠나는 베드로 사도를 책망한 것은 그와 같은 이유예요. 절기가 되어도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어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따르면서요. 이는 율법이 중심인 옛 언약이 공식적으로 파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이에요. 옛 언약의 공식적인 파기는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멸망과 돌 성전 파괴를 통하여 되거든요. 돌 성전 파괴는 제사 등 성전과 관련된 율법 준수를 불가능하게 하죠. 안식일 준수도 마찬가지고요. 그 일은 모세 율법이 중심인 언약이 공식적으로 폐해졌다는 의미였어요.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하여 공적으로 파기하셨던 거죠. 그 이전엔 남 유다가 멸망하며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었던 사건이 시내산 언약의 공적 파기였던 것과 같아요. 그래서 주후 70년 이후엔 유대인 신자들도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았어요. 유대인 신자들에게도 율법이 실질적으로 폐해진 거예요. 곧 그 시점 이후론 유대인 신자들도 율법을 지키려고 해선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삶을 사는 신자를 원하셨어요. 이를 위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내셨고 그분과 성령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삶의 원리를 준비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이에 대해 알았어요. 반면에 어떤 유대인 교사들은 몰랐고요. 사도들은 알았기에 그것을 전했는데, 어떤 유대인 교사들은 그것과 다른 주장을 펼쳤지요. 그들의 주장을 따르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삶을 사는 신자들이란 물 건너가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다른 복음이라며 천사라도 그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정죄한 거고요. 우리는 사도적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여 따라야 하는 거죠.
다른 복음을 일반화하면요. 하나님의 언약이 역사적으로 변화하는데, 이전 언약의 내용을 이후 언약의 시대에 접목하는 것이 되거든요. 오늘날은 완성된 새 언약의 시대인데, 이전 언약 시대에 적용되던 것을 접목하는 것은 다른 복음이 되는 거죠. 예를 들면 삼박자 축복이 대표적이에요.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된다는 것요. 구약 시대엔 맞아요. 야곱이 자주 언급되잖아요? 신약 시대엔 아니에요. 요한3서에 나오는 가이오를 위한 기도는 삼박자 축복이 아니에요. 영혼이 잘된 가이오가 지체들을 섬기는데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고 건강하기를 바라며 기도한 것이지요. 기도대로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든지 안 들어주시든지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과 교제하는 삶이 지속되어야 해요. 오늘날 영혼이 잘됨의 결과는 범사가 잘 될 수도 있고 박해를 받아 힘들게 살아야 할 수도 있어요. 영혼이 잘되어 건강할 수 있고 질병에 걸려 고통을 겪거나 죽음을 맞을 수도 있고요. 어떤 경우이든지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며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이 신약 시대의 복이랍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복음에 해당되는 삼박자 축복이 아니라 매 순간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과 교제 가운데 감사하며 기쁨과 신앙적 즐거움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3:1엔 더 큰 심판을 받기에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해요. 선생은 오늘날 말씀사역자인 신학자와 목사에 해당되거든요. 이어서 2절에선 말의 실수를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다른 주장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거예요. 더 큰 심판을 받는 원인이에요. 저주를 받으리라고 한 다른 복음이 여기에 해당되죠. 구약의 선지서에서 하나님이 계시기에 이스라엘은 멸망하지 않는다고 한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도 그렇고요. 언약의 복과 언약의 화가 함께 주어졌는데, 복만 앞세워 나온 주장이거든요. 오늘날도 더 큰 심판에 해당되는 주장을 하면서도 나는 괜찮다, 우리는 괜찮다는 신학자와 목사들이 있어요. 자기들 전통을 성경보다 더 높이며 사는 거예요. 전 굉장히 위험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삼박자 축복을 포함해서 잘못된 전통은 속히 버리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랍니다. 베뢰아 교회와 같이 그러한가? 라는 의식을 가지고 성경의 진술과 비교하는 태도를 지속하면 결코 어렵지 않은 일이에요.
사도적 복음은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신자들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복된 소식입니다. 스스로는 연약하지만 성령을 선물로 받아 연약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신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율법 곧 성령의 율법 곧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지켜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거예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얘기되는 믿음이란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하는 거거든요. 이미 영접한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믿음은 의지하는 거예요. 율법 준수론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거예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삶의 방식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거죠. 이는 하박국2:4의 인용에서도 확인되는 거예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수긍했지만 이스라엘보다 더 악한 이방국가를 통한 심판에 대해선 받아들일 수가 없어 하나님께 따지다가 바뀌었어요. 자기 생각으론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것이 선이라고 하나님을 의지한 거예요. 로마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도 그래야 했죠. 율법 준수로 의롭다함을 받으라는 어떤 유대인 교사들의 주장이 마음에 와 닿지만 그것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는 거예요. 더 나은 길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는 거죠. 당장 눈앞에 잡히는 것이 없지만 하박국과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것이었어요.
루터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는 죄에 대해 매우 예민했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죄를 자백하고 또 자백했지요. 그래도 평안은 없었고 고통스러웠어요. 그러다가 로마서를 읽고 완전히 달라졌어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 이신칭의. 그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고 한 행위가 신자의 모든 행위라고 생각한 거예요. 신자의 행위와 무관하게 얻게 되는 이신칭의는 법정적 칭의거든요. 로마서는 관계적 칭의를 진술했는데, 법정적 칭의를 말한다고 잘못 이해한 거예요. 앞에서 언급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로마서 8:13)를 바르게 읽기만 해도 법정적 칭의일 수가 없어요. 로마서의 기록 배경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죠.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어떤 유대인 교사들의 잘못된 답변을 바로잡는 것이기에 관계적 칭의일 수밖에 없어요. 루터를 따라 칼뱅이나 이후의 신학자들도 그렇게 잘못 이해하였고요. 로마서의 행위는 신자의 모든 행위가 아니라 이방인 신자들이 율법을 지키는 거예요. 다른 복음인 거죠. 당연히 다른 복음을 따르면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요.
이어서 바울 사도는 신자의 삶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거든요. 로마서에선 12:1에서 그러므로라면서요. 갈라디아서에선 5:1에서 그러므로라며요.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원리를 받아들이고 따르겠죠. 순종하는 거예요. 여리고 정탐에 참여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이 여리고 사람들이 어떠하든지 우리의 밥이니 정복할 수 있다며 정복하러 가자고 한 것과 같아요. 순종하면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는 거고요.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은 거예요. 순종하면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표현 자체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없지만 성경 전체에선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거예요. 야고보서에선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고 하거든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
로마서, 갈라디아서와 야고보서는 문자적으로 모순이거든요. 전자는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고 해요. 후자는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고 해요. 행위, 행함은 같은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에 뒤따르는 행함이라는 말로 모순을 해소하려고 해요. 로마서에 대입하면 믿음에 뒤따르는 행함으론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되거든요. 해소가 안 되죠. 그런데도 그렇게 해서 해소된 것으로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 좀 어이가 없어요.
행위, 행함은 내용적으론 둘로 나뉘어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행함과 부합되지 않는 행함요. 전자는 순종이고 후자는 불순종이에요. 행위, 행함은 이처럼 순종인 경우와 불순종인 경우로 나뉩니다. 이방인 신자들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유대인 신자들과는 달리 불순종이에요. 그러니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하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율법, 성령의 율법,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순종이에요.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아요. 야고보서에서 얘기되는 바예요. 여기에서 행함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지키는 것이거든요.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바르게 해석하기만 하면 내용적으로 같은 거예요. 로마서는 불순종으론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곧 의지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거고요. 야고보서는 순종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라는 거예요. 순종과 믿음 곧 의지하는 것 둘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순종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에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하고요. 야고보서2:17요. 루터는 행함을 강조한다고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어요. 그렇지만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거예요. 로마서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어요. 루터의 야고보서 평가는 엉터리로 해석한 결과인 거예요. 로마서를 법정적 칭의에 관한 진술로 잘못 봤기에 야고보서가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한 거죠.
사도적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신자가 되는 것과 함께 신자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복된 소식입니다. 율법 준수 곧 나를 요인으로 하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 준수 곧 예수님을 요인으로 하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에요. 구체적으로 신약 성경에 신자의 삶의 원리로 제시된 모든 내용들이지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 지킬 수 있어요.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아요(갈 5:16). 삼위의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생명의 교제를 가지며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누리는 영생이지요. 예수님이 요한복음17:3에서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했을 때의 의미예요. 안다는 것은 체험적 앎 곧 사랑하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이 땅에서 삶이 끝난 후에도 영원한 생명을 거두게 되죠, 천국에 들어가서 삼위의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것요. 영원한 구원을 얻는 거예요.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는 신자가 미래의 천국에서도 영생을 누리는 것이지요.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여러분께 양해를 구할께요. 구체적인 몇 가지를 언급하려고 하거든요.
좀 힘드실 시간이니 지금도 몸을 한 번 풀어주시면 좋겠네요. 아까처럼 몸을 흔들고 아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펴십시다.
고린도전서 5장엔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신자에 대한 애기가 있어요. 바울 사도는 그를 쫓아내라면서 5절에서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해요. 여기에서 육신은 사람의 몸이 아니에요. 헬라어가 완전히 달라요. 몸을 가리키는 헬라어는 소마인데, 여기선 사륵스가 쓰였어요. 하나님을 반역한 존재 전체예요.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신자를 가리켜요. 영은 그 신자의 영이 아니에요. 그의 영이 아니라 정관사가 사용된 그 영이에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는 고전 6:17의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이 된 신자들을 가리켜요. 바울 사도의 말은 하나님께서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죄를 범한 신자를 쫓아내라 곧 출교시키라는 거예요. 출교는 몸에서 한 지체를 끊어내는 거거든요. 그렇게 되면 머리로부터 주어지는 생명에서 끊어지게 되죠. 지체의 모양은 유지될 지라도 멸망인 거예요. 그래야 그로 인해 교회가 더럽혀지지 않아요. 그런 범죄자를 교회가 끌어안고 있으면 오염되고 그와 같이 범죄하는 신자들이 계속 생겨날 수 있거든요.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과 같이요. 그런 범죄자를 출교시켜서 교회가 오염되지 않아야 그 영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이 된 신자들이 마지막 심판 때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거죠.
아버지의 아내와 음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범죄예요. 요한 사도가 요한일서5:16에서 진술한 구하라고 하지 않는다고 한 사망에 이르는 죄인 거죠. 배교와 같이요. 구할 수 없는 사망에 이르는 죄에 해당되는 윤리적 범죄가 있어요. 다른 어떤 것이 있는 진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아내와 음행하는 것은 그것에 해당됩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분쟁, 당 짓는 것, 분열함, 술 취함 등의 육체의 일들은 구하여야 할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고요. 그 죄들은 돌이키면 살 수 있지만 사망에 이르는 죄는 돌이킬 여지 자체가 없는 죄예요. 신자는 윤리적 범죄에 있어서도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는 윤리적 종교가 아니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성경 어디에 근거한 예긴지 모르겠어요. 기독교는 편의 상 종교의 하나로 얘기하지만 종교라기보다는 특별한 삶의 체계예요.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는 삶의 체계인 거예요. 여기엔 윤리가 포함되어 있어요. 그것도 매우 고차원의 윤리죠. 간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음욕을 품지 않는 것요. 누군가를 살인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미워하거나 업신여기거나 조롱하지 않는 것요. 윤리적 범죄는 돌이킬 기회가 주어지는데, 돌이키지 않고 지속하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고 하였어요.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어요. 마태복음5:20이에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거고요. 더 나은 의는 그리스도의 율법을 지킴으로 얻는 거예요. 산상수훈의 끝자락인 마태복음7:21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어요. 여기에서 아버지의 뜻이란 앞에서 예수님께서 신자의 삶의 원리로 얘기하신 내용들이에요. 그리스도의 율법이지요. 그것을 지키느냐 아니냐가 천국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를 결정합니다. 정상적으로 본문을 읽는다면 이는 너무나 분명한 거예요.
고린도전서3:15엔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 받은 것 같으니라”고 하거든요. 고린도교회는 파가 있었어요. 바울 파, 게바 곧 베드로 파, 아볼로 파, 그리스도 파였지요. 파는 신자들을 한 몸으로 세우신 그리스도 예수의 뜻을 저버린 범죄거든요. 그 시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면 어떻게 되느냐? 구원 곧 영원한 구원은 받아요. 다만 불 가운데 받은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예기되죠. 뭐 부끄럽더라도 영원한 구원은 받으니 괜찮네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이어지는 바울 사도의 진술을 생각해야 한답니다. 교회와 신자가 성령의 전이라고 하고선 17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했거든요.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은 문맥에 의하면 파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는 거예요. 파의 단계에선 한 몸이 유지되고 있는데, 더 나아가면 갈라서서 한 몸이 찢어지는 거죠. 한 몸을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워 찢는 것이 더럽히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멸하신다는 거예요.
교회 내의 파라는 것은요.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어요. 사람마다 다 자기 생각이 있으니요.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 곧 파의 형성도 자연스러운 모습이긴 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매우 심각한 잘못이라고 보세요. 신자들이 자기를 비우지 않아서 나타난 결과거든요. 예수님은 자기를 비어 사람이 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그분을 통해 단절된 관계가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선 자기를 비우지 않고 자기를 자신으로 채운 결과라는 거예요. 언제든지 교회를 찢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고요. 그 시점에서 심판이 집행되면 영원한 구원을 받긴 해요. 그렇지만 심판이 집행되진 않거든요. 실제적인 심판은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후 최후의 심판대에서 이루어져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그런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 생이 끝날 때까지 계속 유지한다면? 바울 사도는 그것을 육체의 일이라고 했고 그런 삶을 지속하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했어요. 부끄러운 영원한 구원이라도 받으면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야 합니다.
옳고 그름의 사안으로 나뉘었다면 당연히 옳음을 끝까지 붙잡아야 해요. 그름을 고집하는 신자에 대해선 돌이킬 것을 권면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치리를 시행해야 하고요. 경우에 따라선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출교해야 하죠.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는 이것도 되고 저것도 괜찮은 다양성의 사안으로 나뉘어요. 내가 너보다 더 낫다는 의식의 결과물인 거죠. 이 경우임에도 내가 더 낫다는 생각으로 내 관점을 상대에게 관철시키려고 하는 결과물이 파예요. 정말 어리석은 거예요. 육체의 일들에 해당되고 지속되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되니요. 그냥 내 관점을 유보하고 상대방의 관점을 수용하곤 다음에 또 그런 경우가 생기면 당신이 양보하라고 하는 것이 좋아요. 지혜인 것이지요. 에베소서4:3의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의 실천이고요. 히브리서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죠. 교회 내에서 파를 형성하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과 자신이 가진 힘을 과시하는 태도는 하나님 앞에선 정말 위험한 것이랍니다. 혹시라도 그런 모습이 있다면 즉시로 끝내는 것이 스스로를 위하는 최고의 선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인간관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기도 하답니다. 부부, 부모와 자녀, 친구, 직장인 관계 등에서요. 다양성의 사안으로 싸우고 갈라서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거든요. 각자의 관점을 용인하고 간섭하지 않든가 아니면 더 성숙한 쪽에서 자기 관점을 포기하는 것이 필요해요. 덜 성숙한 쪽에서 더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며요. 지혜로운 태도인 거죠.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2:3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는 표현을 하거든요.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여야 하겠지요. 어떤 신자를 가리킬까요?
예수님은 마태복음6:33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어요. 먼저.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잠자는 데 필요한 것을 구하기보다 앞서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것이고요. 하나님의 다스림은 신자의 전 존재 곧 전 인격과 전 삶에 관계된 거예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 보시기에 옳음을 추구하는 거예요. 각각의 분야에 자리를 잡은 신자들이 그 분야에서 세상적인 원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원리를 따르는 거예요. 전 인격과 전 삶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추구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마태복음5:13,14에서 신자가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고 하셨어요. 사회의 부패를 방지하고 살 맛 나게 하며 어두움을 밝히고 생명의 빛을 비추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신자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다는 거예요. 그 존재에 걸 맞는 역할을 감당하면 사회인들이 신자들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착한 행실이에요. 그렇지 않으면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아서 밖에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밟히고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기독교는 어느 쪽일까요? 아무리 양보하더라도 전자는 아니에요. 솔직히 후자라고 보여요. 개독교라는 비난과 머리에서 뇌를 꺼내놓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조롱을 받고 있으니요. 왜 그럴까요? 종교적 행위에 있어선 그 어느 나라보다 열정적이고 열심인 데요. 이것이 착한 행실은 아니었던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기독교의 일반적인 모습은 착한 행실이 아니라는 거예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하나님 보시기에 옳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리 어렵지 않은 유추잖아요?
바울 사도는 로마서13:1에서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했거든요. 그 시점의 위에 있는 권세는 왕, 군주들이에요. 입법, 사법, 행정권을 다 가진 존재지요. 오늘날엔 이런 존재는 없어요. 대통령도 행정부의 수반일 뿐이에요. 국가 권력 서열 1위이어서 많은 권한이 주어졌지만 위에 있는 권세는 아닌 거예요. 삼권분립은 헌법에 기초하고 있지요. 헌법엔 삼권이 다 담겨 있어요. 권력의 토대가 헌법이라는 거예요. 저는 집단지성의 결과물인 헌법이 위에 있는 권세라고 생각합니다. 신자는 헌법을 지켜야 합니다. 헌법엔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에서 실현되기를 원하시는 가치들이 담겨 있거든요. 자유, 평등, 평화, 정의, 인권, 복지, 생태라는 가치들이에요. 헌법을 지킨다는 것은 이 가치들을 지킨다는 것이기도 해요. 하나님의 다스림이 실현되는 곳에선 이 가치들이 더 온전해진다고 보면 됩니다. 집단지성의 결과물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실현될 때에 더 온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신자에겐 그 가치들을 헌법에 담긴 바대로 지키는 것은 기본이고요. 그 가치들이 헌법에 담긴 바보다 더 온전하게 하는 삶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어요. 지키는 정도를 넘어서서 더 온전하게 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며 착한 행실인 것이지요. 그렇게 사는 신자들로 인하여 사회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요.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엔 자신이 속한 곳에서 발생하는 불의와 불법에 대해 대처하는 한 신자의 얘기가 나와요. 그의 고민과 선택 그로 인해 맞게 되는 어려움, 그런 상황에서도 그 길을 가는 신자. 이런 신자를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나요? 잘 없죠. 이런 신자에 대한 설교를 들을 수 있나요? 거의 없어요. 신학교는 가르치나요? 아니요.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양성될 수 있는 토양이 갖추어지지 않은 거예요.
솔직히 이런 내용을 말하기엔 부담이 큽니다. 말하기는 쉬운데, 현실에서 실행하는 일은 너무 큰 어려움을 직면해야 하니요. 그나마 토양이 갖추어져 있으면 시도해볼 순 있겠죠.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들로 세워지면 그러한 선택으로 어려움을 겪는 지체에 대해 짐을 나누어져요. 내게 주어진 물질을 기꺼이 내어놓고 지체가 겪는 경제적 어려움을 최소한으로 만들어요. 마음의 아픔에 대해 듣고 공감하며 낙심하지 않도록 격려하고요. 그러한 고통을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위하여 기도하며 함께 나아가는 거예요. 갈라디아서6:2에서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하라고 바울 사도의 권면을 실천하는 것이지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불법, 구조악에 대해 폭력 없이 저항하며 그로 인한 어려움을 기꺼이 감수하는 신자들. 과거에 일제 강점과 독재에 항거하며 박해를 받았던 신자들이 여기에 해당되죠. 오늘날은 직장이나 어떤 조직, 사회에서 발생하는 상황과 관련될 것이고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삶의 각 영역에서도요. 옳고 그름의 사안에 대해 옳음을 선택하는 거예요.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면요. 대한민국에서 검찰은 국가 공인 조폭에 다름 아니에요. 기소권을 독점하고선 가진 자에겐 관대하고 없는 자에겐 엄격해요. 필요하다 싶으면 있는 죄를 없애주고 없는 죄를 만들고요. 업무 시간이 끝나면 영감님이라는 별칭으로 접대를 받는 것이 예사죠. 은퇴할 때엔 공무원의 급여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재산을 소유합니다. 뒷돈을 챙긴 거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검사동일체라며 자기들끼리는 범죄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봐주거나 꼬리 자르기로 끝내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그런 관행에 저항하는 신자인 검사 얘기는 없어요. 신자인 검사 수가 결코 적지 않을 텐데도 들을 수 없어요. 이는 다른 영역 곧 판사, 기자, 공무원 등에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 앞에선 그런 삶의 태도가 범죄인 데도요. 그것을 범죄라고 말하는 설교도 들을 수 없지요. 안타까움을 넘어 슬픈 현실이에요.
신자여서 옳음을 선택하지만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을 접할 수 있고 접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 길을 걷는 신자들. 제가 생각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들이에요. 기독교가 그런 군사들로 채워지면 사회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님이 언급한 착한 행실이거든요.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셨다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물론 박해를 받기도 하지만요. 디모데후서3:12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한 것과 같이요. 경건은 종교적 행위에 있어서 진지함 내지 엄숙함을 가리키진 않아요. 그로 인해 박해를 받을 일은 없어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힘들고 고통 받는 이들을 돌보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 경건이에요. 세속에 물들지 않기에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는 것이고요.
오늘날은 사회적으로 과거에 비해 더 나은 환경이 형성되어 있긴 해요. 익명으로 내부 고발이 가능하고요. 내부 고발자에 대해 임의로 해고할 수도 없으니요. 법적인 보호를 받기까지 하니 부정과 불법, 부조리와 구조적인 악에 대해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삶에 힘을 쏟아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자유, 평등, 평화, 정의, 인권, 복지, 생태라는 가치를 헌법보다 더 온전히 하는 삶에 힘쓰면서요.
요한계시록21,22장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대한 진술이 있거든요. 미래의 천국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교회에 관한 얘기예요. 하늘 영광 가득한 영광스러운 교회에 관한 것이지요. 주후 70년에 옛 언약은 공적으로 파기되었어요. 이방인 신자만이 아니라 유대인 신자들도 율법이 아닌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만 앞에 놓였지요. 그 율법을 따르는 신자들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삶을 살아요. 그렇게 사는 신자들인 교회, 사도적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안에 거하며 따르는 교회, 사회인들보다 훨씬 높은 윤리 의식을 가지고 실천하는 교회, 자기를 비어 지체들과 나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도 화평함을 좇는 교회,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들로 세워지는 교회. 그 교회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하늘 영광 가득한 영광스러운 교회인 거예요. 그 교회엔 만국이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요한계시록21:24요.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들어오고요. 26절요. 길거리로 나가서 선물 공세하며 예수 믿으라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요.
오늘 설교를 들은 여러분들이 그 교회를 꿈꾸며 그 교회로 나아가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성도들의 모임)라 분별합니다. !!
[에베소서 2:20-22]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