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양친과 자식의 관계입니다.
넓은 의미로는, 부모 자식의 관계는,
반드시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관계에 절대 어긋남은 없는 것이지만,
그 약속은, 단수(單數=한사람)는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은 복수(複數)로서 성립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A(父)와 B(母)와의 사이에 C(子)가
가장 이상적인 관계라고 합시다.
그런데 현세에 나온 A와 B는,
A는 B' (다른 여성)과,
B는 A'(다른 남성)과 결혼하고 말았다.
이때문에, C는 그 이상적인 환경을 희망하고 싶어도,
희망대로 되지 않는 경우는, 어쩔 수 없이,
A'와 B(어머니)의 양친을 선택해서 나옵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되는 혼에게 있어서,
성인이 될 때까지의 과정은,
아버지보다 어머니쪽이 보다 가깝고,
저세상에서 약속을 한 어머니는,
그 아이를 소중히 키워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개는 이처럼, 어머니쪽으로 속해서 태어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버지쪽으로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보통은 어머니쪽입니다.
또 A와 B' 의 결혼생활이 잘되지 않고,
A는B'' 와, B는A''와 결혼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부부생활이 정상을 잃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혼도 그것에 맞는 것을 끌어넣는 것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부모 자식의 관계는,
복수(複數)라고 하는 입장에서 약속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복수(複數)의 범위는 무제한으로 넓은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의 일정한 틀 안에서 한정되어 있습니다.
요(要)는, 각자의 혼이 좀 더 수행하기 쉬운 환경과,
양친을 골라 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양친의 혼과 그 자식의 혼이 닮은 경우도 있지만,
양친의 혼이 높고, 자식의 혼이 낮은 경우도 있고,
반대로, 자식의 혼이 대단히 높은 경우도 있습니다.
육체주(肉體舟)는 부모로부터 받고는 있지만,
혼은 전연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현상계에 나와 있는 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기의 상념행위는,
이제부터 태어나올 아이의 정신과 육체에 대해서,
큰 영향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부부의 교제는 아름다운 꽃을 보고 정신을 안정하고 나서라든가,
좋은 음악을 듣는다든가, 여러가지를 듣고,
플라토닉한 사랑의 마음을 원해 왔다든가,,,,,
이러한 것은 보다 좋은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한 것입니다.
현상계에 나와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 저하되면,
그것에 유사한 혼이 끌리어 와서,
이 현상계는 점점 혼란하여 갑니다.
현상계가 혼란하면, 저 세상도 시끄러워지게 됩니다.
현상계의 혼란은 그대로 지옥의 모습이 나오고 있는 것이며,
지옥으로 떨어져 간 사람이 많으면,
이 세상도 또 그것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 악순환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악순환을 끊으려면,
현상계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항상 선(善)한 의식,
적극적으로 자비와 사랑의 상넘행위를
일상생활에 살려 가는 것입니다.
저 세상의 지옥은
이 세상의 선(善)한 모습을 보고 배우는 것에 의해,
정화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현상계는 저 세상의 투영이라고 말합니다.
그 의미는, 현상계에 있는 자의 의식이
저 세상으로 즉시 콘텍트되어, 투영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要)는, 현상계의 사람들의 의식의 높고 낮음이
가장 큰 문제가 되어 중요하게 되어갑니다.
그건 그렇고, 양친의 조화에 의해
사람은 이 세상에 생을 받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어떤 환경에 있다해도,
각자는 그 양친을 골라서 이 세상에 태어나오는 것이니까.
양친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갖고 대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태어나오기 위해서는,
인간은 최저 천년에서 이천년은 걸리고 있습니다.
저 세상에 있어서는,
혼의 진화는 느리고 더뎌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혼의 진화는 이 세상에 나와서 비로소 달성하게 됩니다.
혼의 진화는,
인간으로서, 신의 자식으로서 완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의무입니다.
10%의 표면의식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어도,
90%의 잠재의식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잊고,
‘왜 나를 낳았담.
나는 이런 세상 속으로 태어나는 따위,
생각하지 않았다’
고, 혹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며,
자기자신의 혼의 진화를 스스로 막고 마는 것입니다.
저 세상은 파동이 세밀한 세계,
이 세상은 거친 세계입니다.
이 세상은 파동이 거칠기 때문에,
원인-결과의 템포가 느리고,
그것만으로 인간은 저 세상에서 배운 것을 잊어서,
현실적 상념에 번롱당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각자가 갖고 있는 의식의 양 100% 중에,
겨우 10% 갖고 이 세상의 인생항로를 건너가려고 하는 것이니까.
무리라면 무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수행인 것입니다.
만약 그 의식량이 30%~50%나 있다고 하면,
저 세상으로부터 이 세상으로 나온 의미는 반감되고 맙니다.
사실을 말해서, 1년 후, 5년 후의 자기자신의 운명을 알게 되면,
수행의 정도도 적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10%의 의식량에 대해서 스프링을 예로 설명해 봅시다.
여기에 한 개의 스프링이 있는데,
스프링이 완전히 늘어난 길이를 가령 100㎝라고 합시다.
즉 탄성의 한계라고 합시다.
그 스프링을 50㎝까지 압력을 가해서 늘이면,
그 신장율은 50%로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90㎝까지 압력을 가해서 늘이면,
그 신장율은 90%가 됩니다.
즉, 그 신장율은,
압력을 많이 가한 쪽이, 보다 높은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우리의 인생항로는,
이 스프링의 신장율과 같이 90㎝까지 압력을 가해,
90%의 신장율을 기대하고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 수행은 혹독하고 괴로운 것이 됩니다만,
혼의 향상에 있어서는,
다시 없는 기회가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10년의 수행은,
저세상의 6배, 10배에 필적한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하루하루를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파동이 거칠고 둔한 것은,
우리의 의식의 양만이 아니고,
대자연 자체가, 그것에 적합한 모습으로 구성되어,
우리가 수행할 수 있도록,
신(神)이 그러한 환경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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