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고 하셨다.
尹氏曰: “君子求在我者, 故不患人之不己知. 不知人, 則是非邪正或不能辨, 故以爲患也.” 윤씨가 말하길, “군자는 내 안에 있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않는다. 남을 알지 못하면, 곧 옳고 그름과 간사함과 올바름을 간혹 분별할 수 없는데, 그래서 근심으로 여긴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若宰相不能知人 則用捨之際 不能進賢退不肖 若學者不能知人 則處朋友之際 不能辨益友損友 又曰 論語上如此言者有三 不病人之不己知 病其不能也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聖人之言 雖若同而其意皆別 病其不能者 言病我有所不能於道 求爲可知者 當自求可知之實 然後人自知之 雖然如此亦不是爲昭灼之行以蘄人之必知 주자가 말하길, “만약 재상이 남을 알지 못한다면, 쓰고 버리는 즈음에 어진 사람을 들이고 불초한 자를 물러나게 할 수 없으며, 만약 배우는 자가 남을 알 수 없다면, 벗에 대처하는 즈음에 이익되는 벗과 손해 되는 벗을 구분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말하길, “논어 위에서 이와 같이 말한 것은 3곳이 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걱정하라!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알아줄 만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라! 성인의 말씀은 비록 같은 것 같지만 그 뜻은 모두 구별된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걱정하라는 것은 나에게 道에 있어서 할 수 없는 바가 있음을 걱정하라고 말한 것이고, 알아줄 만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라는 것은 마땅히 알아줄 만한 실질을 스스로 추구한 연후에 남들이 저절로 이를 알아줄 것이라는 말이다. 비록 이와 같이 할지라도, 역시 환하게 드러나는 행동을 함으로써 남들이 반드시 알아줌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見得道理明 自然知人 自家不識得道理破 如何知得他人賢否 道理(이치)를 밝게 터득해야만 자연히 남을 알 수 있다. 자기 스스로 이치를 알아서 깨우치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타인이 현명한지 아닌지 알 수 있겠는가?
問知人是隆師親友 曰 小事皆然 然學做工夫到知人地位 已甚高 누군가 묻기를, “사람을 안다는 것은 스승을 높이고 벗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작은 일도 모두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배움에 있어 사람을 아는 경지까지 공부를 했다면, 이미 매우 높은 단계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人不知己 其病在人 己不知人 其病在己 君子之學爲己 不暇病人之病 而病己之病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은 그 병폐가 남에게 있는 것이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 병폐가 나에게 있는 것이다. 군자의 학문은 자신을 위한 것이므로, 남의 병폐까지 걱정할 겨를이 없으니, 자기의 병폐를 걱정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蔡氏曰 學而末章與首章 人不知而不慍 意實相關 里仁憲問衛靈篇 又三致意焉 學必專求在己 庶無所慕於人也 채씨가 말하길, “學而 편의 끝 장은 첫 장의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는 구절과 그 뜻이 실제로 서로 관련 있는데, 里仁 편과 憲問 편, 그리고 衛靈公 편에서 또다시 이러한 뜻을 세 번 드러냈다. 학문이란 반드시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오로지 추구해야 하는 것이니, 남에게 바랄 것은 거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始以不知不慍 終以無以爲君子也 始則結以患不知人 終則結以不知言無以知人 論語一書終始也 門人紀次 豈無意歟 운봉호씨가 말하길, “논어는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는 것으로 시작하고, (천명을 모르면) 군자로 여길 수 없다는 것으로 끝냈다. 처음에는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는 구절로 끝맺음을 하였고, 마지막에는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는 말로써 끝맺음을 하였으니, 이것이 논어라는 책 한권의 처음과 끝이다. 공자의 門人들이 논어를 편차할 적에 어찌 아무런 뜻이 없었겠는가?”라고 하였다.
東陽許氏曰 此兩句平說 只是不必欲人知我 我却要知人 但兩知字不同 上知只欲知己之善 下知却欲知人之善惡 專就學者言 則上句不患人不己知 便自可也 後章患其不能之意在其中 便當明理修身自加精進使有可知之實 則雖不求人知 而人必知之矣 下句則凡尊師取友 與人交際往來 須知其善惡而趨避之 然後無損而有益 然此專以學者言 聖人則未嘗指定也 若推而言之 則上下皆可通 上句論其極 則雖居高位 其處己應事 唯循天理 上不欺其君 下不病其民 內無愧於心 何必欲人盡知吾心也 否則有違道干譽之失矣 下句論其極 則仕而擇可宗之人 有位而擧賢才爲用 爲宰補而進退百官 非知人之明 其可乎 否則賢愚混淆 分朋傾軋而亂亡至矣 동양허씨가 말하길, “여기의 두 구절은 평범하게 말하자면, 그저 반드시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나는 도리어 남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만 두 개의 知자는 의미가 같지 않다. 위에 있는 知자는 그저 자기의 善한 일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고, 아래의 知자는 도리어 남의 선악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오로지 배우는 자에 나아가 말한다면, 윗 구절의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저절로 괜찮은 것이다. 뒷 장의 자기가 잘하지 못함을 걱정한다는 뜻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니, 마땅히 이치를 밝히고 몸을 수양하여 스스로 精進하기를 더함으로써 (남이 나를) 알아줄 만한 실질이 있도록 한다면, 비록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을지라도, 남들은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아래 구절은 무릇 스승을 높이고 벗을 취하며 남들과 교제하고 왕래함에 있어, 모름지기 그 善惡을 알아서 그에게 나아가거나 그를 피한 연후에, 비로소 손해가 없고 유익함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로지 배우는 자를 가지고 말한 것일 뿐, 성인이라면 일찍이 指定한 적이 없다. 만약 미루어서 말하자면, 상하에 모두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윗 구절을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비록 높은 지위에 있을지라도, 자기에게 처신하고 일에 대응함에 있어 오직 天理를 따르고, 위로는 제 임금을 속이지 않고, 아래로는 제 백성을 괴롭히지 않아서, 안으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니, 어찌 반드시 남이 내 마음을 전부 다 알아주기를 바랄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道에 어긋나고 칭찬을 바라 구하는 잘못이 있게 될 것이다. 아래 구절을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벼슬을 하면서 주군으로 삼을만한 사람을 가려 택하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어진 인재를 천거하여 기용하게 하며, 재상이 되어 百官을 들이고 물러나게 함에 있어, 사람을 아는 명철함이 아니고서야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진 인재와 어리석은 자가 뒤섞이고, 붕당이 쪼개져(分朋) 서로 모함함으로써 어지러워지고 망함에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