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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1. 00:31 기록추가
2012.11.21.21:08 기록 추가
2012.12.03. 20:53 기록추가
2012.12.04.13:29. 기록수정(영종34년->영조34년 으로)
2012.12.05.00:47. 장릉지 기록 추가
2012.12.05. 17:23. 영월읍규 기록 추가
2012.12.07. 민충사. 영월군읍지 기록 추가. 기록 발견으로 기록을 추가함 2014년 5월24일 11:41
2015.01.06. 巖花落(낙화암) 암각자 사진기록 추가
2015.03.19. 낙화암 표석 사진기록 추가
2015.07.30.09:10 민충사 내력. 역주 장릉지속편 기록추가
2015.10.10. 15:08 민충사 내력 기록추가. 낙화암.창렬암 기록 추가.
2017.08.19 15:52 한자의 한글화, 한자 한글 병기하여 다시 올리다.
<민충사창건기 愍忠祠刱建記> 홍성보(洪聖輔)
<상용축문 常用祝文>조하망(曺夏望)
<愍忠祠改建告由祭文 민충사개건고유제문> 朴基正(박기정)
민충사(愍忠祠)
● 지정번호 :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7호
● 지정년월일 : 1984.6.2
● 시대 : 조선시대
● 건립 : 영조18년(1742) 어명으로 영월부사 홍성보(洪聖輔) 세움
● 소재지 : 영월읍 영흥7리 77잡. 금강정 옆
단종 임금이 훙서[薨逝]·붕어[崩御]·승하[昇遐]하시게 되자 그 비보를 접하고 강물에 투신하여 순절한 종인과 시녀의 충절을 기린 사당이다.
민충사는 동강 절벽위에 있는 금강정 뒤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당입구에는 윤사국(尹師國)이 쓴 현판이 걸려 있고, 김병선(金柄璇)의 중수기(重修記)와 안구순(安球淳)의 중수기가 현판 뒤쪽에 걸려 있다.
세조 3년(1457) 10월 24일 단종이 승하한 뒤 단종을 모시던 종인(從人)과 시녀가 금강에서 투신하여 죽자, 마을 사람들이 슬프게 여겨 이곳을 ‘낙화암(落花岩)’이라 부르고 단을 설치하여 기도하였다.
영조 18년(1742) 왕명으로 영월부사 홍성보(洪聖輔.1741년 9월15일 부임~1742년6월7일 사망)가 사당을 건립하고 민충사(愍忠祠)라는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왼쪽에는 ‘從人之神位(종인지신위)’, 오른쪽에는 ‘侍女之神位(시녀지신위)’을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영조 22년 부사 조하망(曺夏望)이 낙화암의 이름을 「창열암(彰烈巖)」이라고 바꾸고 영조 25년에는 부사 김응복(金應福)이 사당을 보수하여 「민충(愍忠)」이라 개칭하여 불렀으며, 영조 34년(1758) 민충(愍忠) 사액(賜額)을 받아 중수하였고, 정조 15년(1791)에 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사우(祠宇)를 개건하면서 강원도관찰사 윤사국이 현판을 썼다.
영조 34년(1758 무인년) 10월 4일
장릉을 봉심한 홍상한을 소견하고 창절 서원과 민충사를 개수토록 하다
~낙화암(落花岩)이 있는데, 그때 궁인(宮人)들이 사절(死節)하였기 때문에 ‘낙화암’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토민(土民)들이 사당을 세운 것도 또한 치제(致祭)하는 것이 마땅하였다~
~또 들으니, 그곳에서 약간 몇 리(里)쯤 떨어진 곳에 민충(愍忠)이라고 하는 작은 사(祠)가 있다고 하는데, 또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중건(重建)하도록 하라. 이런 여러 사람들이 이와 같은 절개를 세운 것은 지나간 역사에서는 들어보기가 어려운 것이니, 중건한 뒤에도 도신으로 하여금 수령(守令)을 차정(差定)하여 치제하도록 하라.~
이후 한국전쟁 때 대파된 것을 1956년 군수 남원수(南元壽)가 중수하고, 1986년 영월군수 안구순(安球淳)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한식날과 음력 10월 24일(단종의 기진제 忌辰祭. 승하하신 날)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민충사(愍忠祠) 역주 장릉지속편 162~171쪽
世祖三年 세조3년[정축 1457] 魯山君從人侍女(노산군종인시녀) 노산군의 노복과 시녀가
投死於寧越郡東二里許錦江邊層巖上(투사어영월군동이리허금강변층암상) 영월군에서 동쪽으로 2리쯤 떨어진 금강(錦江)변의 층층바위 위에서 투신하여 죽었다.
邑人憐之名其巖曰 落花(읍인련지명기암왈 낙화) 고을 사람들은 이들을 가엽게 여기며 그 바위를 ‘낙화암(落花巖)’ 이라 명명했고,
以爲祈禱之所(이위기도지소) 그 곁에 제단을 설치하여 기도하는 장소로 삼았다.【『寧越府誌 영월부지』】
英宗十八年【壬戌】영조18년[임술 1742]
寧越府使洪聖輔(영월부사홍성보) 영월부사 홍성보(洪聖輔 1685~1742)가
竪短碣于落花巖上(수단갈우낙화암상) 낙화암 위에 짤막한 갈석(碣石)을 세우고
刻落花巖三字(각낙화암삼자) ‘落花巖(낙화암)’ 세 글자를 새겼으며
就巖前數十步建屋三間(취암전수십보건옥삼간) 낙화암 앞쪽으로 수십 보 떨어진 곳에 3칸 규모의 건물을 지어
以作棲神之所(이작서신지소) 신령이 깃드는 장소로 삼았다.
又置祭田三日耕(우치제전삼일경)그리고 ‘사흘 갈이’의 제전(祭田)을 마련한 뒤,
使府戶長收其稅(사부호장수기세) 영월부 호장으로 하여금 그 세금을 거둬들여,
以每年寒食設祭酹之(이매년한식설제뢰지) 매년 한식 때마다 제사를 설행케 하였다.
仍成義節(仍成義節) 이어서 의례 절목[儀節 의절]을 작성하여
以爲久遠之規式(이위구원지규식) 영구히 준행할 규식으로 삼았다.
祝文曰 그 축문(祝文)은 다음과 같다
維年月日 戶長姓名(유년월일 호장성명) 유 모년 모월 모일에 호장 모는
敢昭告于從人侍女之位(감소고우종인시녀지위) 감히 노복과 시녀의 신위께 밝게 고하나이다.
伏以奧我端廟遜位于越(복이오아단묘손위우월) 엎드려 생각건데 우리 단종께서는 영월에서 왕위를 양보한 뒤,
丁年事變 白馬歸崍(정년사변 백마귀래) 정축년에 변고를 만나 백마를 타고 골짜기로 돌아가셨지요.
花飛玉碎(화비옥쇄) 이때 꽃잎이 흩날리고 아름다운 옥이 부서지자
錦水嗚咽(금수오인) 금강도 목메어 울었습니다.
殺身之仁 爲君之節(살신지인 위군지절) 자신을 죽여 인을 이룬 것은 바로 임금을 위한 절의였지요.
忠魂貞魄 靡所依托(충혼정백 미소의탁) 그러나 충성스럽고 절개가 곧은 혼백들이 의탁할 곳이 없는바,
泉臺冥漠 寃氣莫伸(천대명막 원기막신) 저승세계가 적막했고 원통한 기운을 펼칠 수 없었습니다.
玆値淸明一開祠門(자치청명일개사문)지금 이렇게 청명의 절기를 만났기에 사당 문을 활짝 열고, 삼가 술과 과일, 포와 젓갈을 여러 신위께 공손히 바치나이다【『영월부지』】
<민충사창건기 愍忠祠刱建記> 홍성보(洪聖輔)
歲辛酉之秋(세신유지추) 신유년(1741. 영조17)가을,
余出守于寧越府(여출수우영월부) 나는 영월부의 수령으로 부임(영조17년 8월15일 임명. 승정원일기)하였다.
府東五里許(부동오리허) 영월부에서 동쪽으로 5리쯤 떨어진 곳에
有落花巖(유낙화암) 낙화암(落花巖)이 있는데,
高四五十丈 臨江壁立(고사오십장 임강벽립) 높이가 너댓 길 정도 되는 절벽이 강을 마주한 채 서 있다.
莊陵陟遐後(장릉척하후) 단종께서 승하하신 뒤,
侍女從人登是巖 投江而死(시녀종인등시암 투강이사) 시녀와 노복이 이 바위에 올라 강물에 투신하여 죽자,
邑人憐之 名之曰落花(읍인련지 명지왈낙화) 고을 사람들이 이들을 가엾게 여기며 ‘낙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按『丙子錄』云 (안『병자록』운) 병자록(丙子錄)을 살펴보건데
魯山以天順丁丑十月遇變 是二十四日酉時也(노산이천순정축십월우변 시이십사일유시야) “노산군께서는 천순 정축년(1457, 세조3) 10월에 변고를 만났는데, 바로 24일 유시(酉時 오후 5시~7시)였다.
侍女從人爭投郡之東江(시녀종인쟁투군지동강) 시녀와 노복이 영월군 동강(東江)에 다투어 몸을 던지니,
浮屍滿江(부시만강) 수면에 뜬 시체가 온 강에 가득했다.
是日雷雨大作(시일뇌우대작) 이날 천둥과 소나기가 크게 일어나더니
烈風拔木(열풍발목) 사나운 바람이 나무를 뿌리째 뽑았고,
黑霧彌空 終夜不散(흑무미공 종야불산) 허공을 뒤덮은 시커먼 안개가 밤새도록 개지 않았다.” 라 하였다.
噫(희)아!
此等是當日使令於王前者也(차등시당일사령어왕전자야) 이들은 당시 임금 앞에서 시중을 들던 자들이다.
士君子盡分所事之義 非有素講於平昔(사군자진분소사지의 비유소강어평석) 이들은 직분을 다해 한 사람을 섬겨야 하는 사군자(士君子)의 의리에 대해 한 번도 강론한 적이 없는데도,
而皆能委命於變故之際(이개능위명어변고지제) 변고가 일어나자마자 모두 목숨을 바쳤다.
其志有足以悽愴感動(기지유족이처창감동) 그 뜻이 족히 사람으로 하여금 슬픔과 감동을 느끼게 하는바,
而雖謂之不在五百義士之下 不爲過笑(이수위지불재오백의사지하 불위과소) 이들의 행동이 500명의 의사(義士)보다 못하지 않다고 말하더라도, 결코 과장은 아니다.
歷觀前後(역관전후) 전후 사적을 두루 살펴보건대,
凡所以爲莊陵立節者(범소이위장릉립절자) 무릇 단종을 위해 절의를 세운 자들은
無論其死生(무론기사생) 그 생사를 막론하여
靡不崇奉而尸祝之(미불숭봉이시축지) 높이 떠받들며 배향하지 않음이 없었다.
獨此等尙闕一區壇宇以報其誠節(독차등상궐일구단우이보기성절)그러나 유독 이들에게는 그 충성과 절의에 보답하기 위한 자그마한 제단이나 사당조차 베풀지 않았다.
羈魂餒鬼 啾啾棲遑(기혼뇌귀 추추서황) 이에 굶주린 채 떠도는 혼백들이 구슬피 흐느끼며
於錦水 · 淸泠之間 曾不若無祀鬼有春秋一孟之薦(어금수 · 청령지간 증불야무사귀유춘추일맹지천) 금강(錦江)과 청령포(淸泠浦) 사이에서 배회하고 있거늘, 무사귀(無祀鬼)처럼 봄가을로 한 그릇의 제수(祭需)조차 올린 적이 없다.
豈其人微地卑賤(기기인미지비천) 어찌 그 사람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不屑於表章(불설어표장) 표창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며 천양(闡揚)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未有能闡發乎否 觀人 當觀其所成就 不當以人而發之(미유능천발호부 관인 당관기소성취 부당이인이발지) 사람을 살필 때에는 마땅히 그가 성취한 바를 살펴야지, 신분의 미천함 때문에 그 사람의 성취를 폐기해서는 안 된다.
撫跡興想之際(무적흥상지제) 자취를 어루만지며 감흥에 젖을 때마다,
竊懼其因 湮沒無傳(절구기인 인몰무전) 이들의 행적이 끝내 인멸되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웠다.
遂就巖之稍西(수취암지초서) 마침내 낙화암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나아가
擇一淨區(택일정구) 정결한 땅을 고른 뒤,
建三架屋子(건삼가옥자) 3칸 규모의 건물을 지어
以作棲神之所(이작서신지소) 신령들이 깃드는 장소로 삼았다.
東一間 屬諸從人(동일간 속제종인) 동쪽 1칸은 노복들의 공간으로 정하고,
次西一間 屬諸侍女(차서일간 속제시녀) 그 다음 서쪽 1칸은 시녀들의 공간으로 정했는데,
以倣男左女右之義(이방남좌여우지의) 이는 남좌여우(男左女右)의 뜻을 따른 것이다.
最西一間(최서일간) 그리고 가장 서쪽의 1칸은
則用備祀夜(칙용비사야) 제삿날 밤
供饌之廚(공찬지주) 제찬(제찬)을 이바지하는 부엌의 용도로 사용하였다.
又置田三日耕(우치전삼일경) 또한 사흘갈이 밭을 마련하여,
付諸府之戶長(부제부지호장) 영월부 호장으로 하여금
歲收其稅(세수기세)그 세금을 해마다 거둬들여
以每年寒食設祭以酹之(이매년한식설제이뢰지)매년 한식제향을 설행케 하였다.
祀需品式(사수품식)제수의 품식(品食)은
從節目設行(종절목설행) 절목에 따라 거행하되,
俾永久無廢(비영구무폐)영원히 그만두지 않게끔 하였다.
且書落花巖三字刻之石 以昭後人之觀焉(차서낙화암삼자각지석 이소후인지관언) 아울러 후인들이 살 필 수 있도록 ‘낙화암’ 세글자를 써서 바위에 새겨 넣었다.
仍念往在乙丑(잉념왕재을축) 아! 옛날 을축년(1685년, 숙종11)
先王考按東營(선왕고안동영) 우리 조부께서는 강원도 감영을 안핵하며
刱祀六臣(창사육신) 육신사(六臣祠)를 창건하고,
以嚴戶長興道配食之(이엄호장흥도배식지) 호장 엄흥도를 함께 배향하였다.
聖輔生於是年(성보생어시년) 나는 이 해에 태어났거늘
而令爲知府(이령위지부) 지금은 영월부 수령이 되어,
又擧前人未遑之事(우거전인미황지사) 이전 사람들이 미처 손대지 못한 일을 거행하였다.
有可而不幸(유가이불행) 자고로 세상일 중에는 마땅히 거행해야 하나 손대지 못한 일이 있고,
待時以後行者(대시이후행자) 때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거행하는 일이 있다.
自古己然 而玆二事之必待吾祖孫而行之(자고기연 이자이사지필대오조손이행지) 이 두 가지 일이 우리 조부와 나를 기다린 뒤에 이렇게 거행되었으니
抑似有不偶然者在焉(억사유불우연자재언) 또한 우연치 않은 무언가가 존재하는 듯하다.
遂感而爲之記云爾(수감이위지기운이) 이에 느꺼워하며 이상과 같이 그 기문을 짓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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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二年【丙寅】영조22년【병인 1746】
寧越府使曺夏望(영월부사조하망) 영월부사 조하망(曺夏望 1682~1747)이
改製常用祝文(개제상용축문) 상용축문을 고쳐짓고,
以每年寒食及十月二十四日(이매년한식급십월이십사일) 매년 한식 및 10월24일에
一體行祭(일체행제) 한꺼번에 제사 지내게 하였다.
又改落花巖明 曰彰烈(우개낙화암명 왈창렬) 또한 낙화암이라는 이름을 ‘彰烈巖 창렬암’으로 바꾸었는데
而未及鐫石(이미급전석) 바위에 새기지는 않았다.
祝文曰(축문왈) 그 축문은 다음과 같다.
<상용축문 常用祝文>조하망(曺夏望)
端廟至德(단묘지덕) 단종의 성덕은
在周奉伯(재주봉백) 주나라 태백과 같거늘
蓁蓁百粤(진진백월) 초목 무성한 영월 땅에서
事變罔極(사변망극) 망극한 변고 일어났지.
嗟惟絳幘(차유강책) 아 붉은 두건 쓴 병사와
爰曁紅袖(원기홍수) 붉은 소매 저고리 입은 시녀는
間關絶峽(간관절협) 험준한 골짜기까지 힘겹게 따라와
昕夕左右(흔석좌우) 조석으로 곁에서 모셨다네.
仙馭莫追(선어막추) 선왕의 수레 따르지 못했으니
奚惜一死(해석일사) 한 번의 죽음 어찌 아끼겠는가!
拚得分明(변득분명) 결연히 목숨을 버린 것은
固自有所(고자유소)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게지.
嵯峨鐵壁(차아철벽) 깍아지른 절벽에서
其水淵淵(기수연연) 깊디깊은 강물 속으로
爭赴如歸(쟁부여귀) 집으로 돌아가듯 대수롭지 않게
孰後孰先(숙후숙선) 나린히 다투어 뛰어드니
烈氣天咷(열기천도) 매서운 기상에 하늘도 흐느끼고
寃氣嶽坼(원기악탁) 원통한 기운에 저 산도 무너졌지.
江山不老(강산불노) 강산은 언제나 옛 모습 그대로요
月星永晣(월성영절) 일월성신은 영원히 빛나건만
人情自激(인정자격) 사람 마음은 절로 격렬하도다!
百歲如昨(백세여작) 그 옛날이 마치 어제 일인 양
是日芬苾(시일분필) 오늘 향기로운 제수 마련하여
爰有禮式(원유예식) 이렇게 제향 의식 설행하노니
英靈洋洋(영령양양) 성대한 혼령이시여!
庶幾來格(서기래격) 내려와 흠향하시길. 【『영월부지』】
二十五年【己巳】영조25년【기사 1749】
寧越府使金應福 重修祠堂(영월부사김응복 중수사당) 영월부사 김응복(金應福 1683~ ? )이 사당을 중수한 뒤
楬號曰愍忠(갈호왈민충) ‘민충(愍忠)’ 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又建典香廳二間(우건전향청이간) 그리고 전향청(典香廳) 2칸을 건립하였다.【『寧越府誌 영월부지』】
三十四年【戊寅】十月 영조34년[무인 1758] 10월,
以莊陵復位回甲(이장릉복위회갑) 장릉(莊陵)을 복위한 지 60년이 지났으므로
命遣大臣行祭于莊陵(명견대신행제우장릉) 대신을 보내 장릉에 제사 지낼 것을 명하셨다.
又命六臣贈職賜諡(우명육신증직사시) 또한 육신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시호를 하사하며
致祭于寧越彰節書院(치제우영월창절서원)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에 치제하도록 명하셨다.
仍敎曰(잉교왈) 이어서 전교하시기를(전교내용은 승정원일기 영조34년 10월4일 조에 자세하다)
又聞若于里許(우문야우리허) “듣건대 이곳에서 몇 리쯤 떨어진 곳에
有愍忠小祠云(유민충소사운) 민충 이라는 작은 사당이 있다고 한다.
赤令道臣重建(적령도신중건) 이 또한 관찰사에게 명하여 중건토록 하여라.
此等微人(차등미인) 이처럼 미천한 자들이
此等立節 往牒罕聞(차등립절 왕첩한문)이처럼 절의를 세운 경우는 옛날 문헌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重建後(중건후) 중건을 마치고 나서는
令道臣差定守令致祭(령도신차정수령치제) 관찰사에게 명하여 수령을 차정(差定)한 뒤 치제케 하여라.” 라 하였다.
仍以愍忠賜祠額(잉이민충사사액)그리고 ‘민충’이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本道觀察使沈鏽(본도관찰사심수) 본도 관찰사 심수(沈鏽 1707~ ? )가
依下敎 改建祠宇(의하교 개건사우) 하교에 의거하여 사당 건물을 개건하였다.【『政院日記 정원일기』】
同月十五日 始後(동월십오일 시후)동월15일에 공역을 시작하여
二十七日 告訖(이십칠일 고흘) 동월27일에 끝마쳤다.
上又命以彰節書院(상우명이창절서원) 주상께서 다시 명하시기를 “창절서원(彰節書院)으로
下去禮官(하거예관) 내려간 예관(禮官)들은
兼爲致祭於愍忠祠乃於二十八日 致祭揭額(겸위치제어민충사내어이십팔일 치제게액) 민충사에도 겸하여 치제하여라.” 라 하였다. 이에 28일에 치제하고 편액을 걸었다.
賜額致祭以後(사액치제이후) 편액을 하사하고 치제한 이후,
使本府鄕任(사본부향임) 본부의 향임(鄕任)으로 하여금
行每年兩度享禮(행매년양도향례) 매년 두 차례의 제향을 거행케 하였다.
【『寧越府誌』祭文不傳】【『영월부지』제문은 전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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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宗十五年【辛亥】二月十五日(정종십오년【신해】이월십오일) 정조15년[신해 1791] 2월15일,
敎曰(교왈) 전교하시기를
寧越府所在愍忠祠刱建在於何年(영월부소재민충사창건재어하년) “본도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영월부에 위치한 민충사의 창건 연대와
殉節人之列食於本祠者幾人(순절인지열식어본사자기인)본 사당에 배향된 순절한 자들의 규모,
而其姓名皆有籍 記興否(이기성명개유적 기흥부) 그들의 성명을 기록한 문헌의 유무를
發關本道 詳細知入(발관본도 상세지입)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여라.” 하였다.
【『政院日記』】【『정원일기』】
四月十七日 4월17일,
寧越府使朴基正報內閣曰(영월부사박기정보내각왈)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규장각에 보고하기를
本府愍忠祠在於落花巖傍(본부민충사재어낙화암방) “본부의 민충사는 낙화암 옆에 있는데
卽端廟從人侍女滚薦之所也(즉단묘종인시녀곤천지소야) 바로 단종의 노복과 시녀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입니다.
刱建年條(창건년조) 창건한 연대와
享祠人姓名 本無記籍(향사인성명 본무기적) 배향된 자들의 성명에 대한 기록은 본래부터 없습니다.
而年久頹廢(이년구퇴폐) 한편 연대가 오래되어 기울고 무너진 탓에
殆不成樣(태불성양) 거의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는바,
赤爲次第修改計料(적위차제수개계료) 이곳 역시 차례대로 수개(修改)할 계획입니다.” 라 하였다.
筵臣以聞(연신이문) 연신이 이러한 내용을 아뢰자
上可之(상가지) 주상께서 옳게 여기셨다.【『政院日記』】【『정원일기』】
<愍忠祠改建告由祭文 민충사개건고유제문> 朴基正(박기정)
在昔丁丑(재석정축) 옛날 정축년 일은
事有難言(사유난언) 차마 말하기 어려워라!
白馬翩翩(백마편편) 백마 타고 너풀너풀 떠나시고
地覆天翻(지복천번) 땅이 뒤집히자
從人侍女(종인시녀) 노복과 시녀들
左右蒼黃(좌우창황) 좌우에서 허둥대다가
爭捐一死(쟁연일사) 다투어 목숨을 버렸나니
祇今留芳(기금류방) 지금까지 그 명성 전해지네.
先朝起感(선조기감) 감흥을 느끼신 선왕께서
十行絲綸(십행사륜) 열 줄의 전교를 내리시어
賜祭宣額(사제선액) 치제하고 편액을 하사하니
幽鬱畢伸(유울필신) 근심과 원통함 모두 풀렸도다.
矗立危巖(촉립위암) 우뚝 솟은 가파른 절벽은
錦江之西(금강지서) 금강 서쪽에 있고
遺風烈烈(유풍열열) 그들의 기풍 여전히 뜨겁거늘
汀草萋萋(정초처처) 강가 잡초는 어찌나 무성한지.
舊祠將傾(구사장경) 옛 사당 무너질 듯하기에
爰謀改建(원모개건) 이에 새로이 고쳐짓고자
虔告厥由(건고궐유) 정성껏 그 이유를 고하며
用伸奠獻(용신전헌) 제수를 바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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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序(시서)
愍忠祠(민충사) / 黃胤錫(황윤석)
【卽端廟宮女內官報祀處(즉단묘궁녀내관보사처)】
【바로 단종의 궁녀와 환관에게 보답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按『莊陵志』(안『장릉지』) 장릉지의 기록을 살펴보니
記上王東遜也(기상왕동손야) 상왕께서 양위하고 동쪽으로 가실 때,
有二別室許陪(유이별실허배) 두 명의 별실(別室)이 상왕을 모시고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蓋宮女有爵(개궁녀유작) 대개 궁녀에게는 작위가 있는 법인데,
而降稱別室也(이강칭별실야) 낮추어서 ‘별실’이라 부른 것이다.
獨無姓氏(독무성씨) 그런데 유독 이들의 성씨가 전하지 않기에
余攷諸家譜(여고제가보) 여러 가문의 족보를 고찰해보니,
有曰端宗後宮權氏 完女也 見南原尹譜(유왈단종후궁권씨 완녀야 견남원윤보)
남원윤씨(남원윤씨) 족보에는 단종 후궁 권씨(權氏)는 완(完)의 딸이라 적혀 있고,
有曰端宗淑儀金氏 兵曹判書師禹女 見尙山金譜(유왈단종숙의김씨 병조판서사우녀 견상산김보)
상산김씨(商山金氏) 족보에는 단종 숙의(淑儀) 김씨(金氏)는 병조판서 사우(師禹)의 딸이라 적혀 있었다.
此其二別室投江(차기이별실투강) 이들이 바로 강물에 투신했던 두 별실이다.
惟內官姓名無留(유내관성명무유) 반면 내관(內官)의 성명은 전하는 바 없으니,
赤可悲也(적가비야) 또한 슬퍼할 만한 일이다.
詩
(愍忠祠)
江上沿崖松徑微(강상연애송경미)강벼랑 따라 소나무 오솔길 희미한데
幽幽祀屋對斜暉(유유사옥대사휘)적막한 사당이 석양을 마주하고 있네.
當時狐鼠應羞死(당시호서응수사)당시의 쥐와 여우는 수치심에 죽어야 하리니
莫作尋常婦寺譏(막작심상부사기)대수롭지 않게 아녀자와 내시라고 기롱치 마시오.
*1767년 9월8일
- 頤齋遺藁卷之三 詩(이재유고권지삼 시)ⓒ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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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충사중수기(1986년 군수 안구순)
1457년[세조3년]10월24일 단종이 관풍헌에서 승하하자
낙화암에서 순절한 궁녀1인 관비2인 무녀(무당)3인의 넋을 모신 사당으로서
1742년[영조18년] 홍영보(洪英補) 창건 - *洪聖輔(홍성보)의 오기
1791년 부사 박기정(朴基正) 개축
1956년 11대 군수 남원수(南元壽)가 6.25사변으로 대파된 것을 중수
1973년 28대 군수 김명한(金明漢)이 개수
1975년 2월5일 강원도지정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
1986년 38대 군수 안구순(安球淳)이 전면해체 보수하여 원형을 보존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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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淸冷浦禁標·落花巖 청냉포금표·낙화암
저자 : 尹陽來(朝鮮) 書. 윤양래(조선) 서
청구기호 : 奎10258
책수 : 1帖(12折 22面) 1첩(12절 22면)
판본 : 拓本 탁본
치수 : 31×18cm.
간행년대 : 英祖18年(1742) 以後 영조18년(1742) 이후
文首 : 府使尹陽來書石立標 부사 윤양래 서 석립 표
文末 : 崇禎紀元後再壬戌(1742)七月日 숭정 기원후 재임술(1742)7월 일
자료소개 : 영월군에 있는 端宗 關係 두 碑文, 즉 1726년(英祖 2)에 세운 〈淸冷浦禁標〉와 1742年(英祖 18)에 세운 〈落花巖〉의 碑文을 拓本한 것
본문
영월군에 있는 端宗(단종) 관계 두 비문의 탁본으로 연대는 미상이다.
<淸冷浦禁標 청냉포금표>는 1726년(英祖 2)에 당시 府使(부사)인 尹陽來(윤양래)가 端宗(단종)의 遺址(유지)에 민간의 출입을 금하기 위하여 禁標(금표)를 설치한 것이다.
碑題(비제)는 楷書體(해서체)로 <淸冷浦禁標청냉포금표>이며‚ 11cm×3cm의 크기이다.
本文(본문)은 역시 楷書體(해서체)로 4.5cm×7cm의 크기이다.
내용은 이 지역에 동서로 300尺(척) 남북으로 490尺(척) 내에 출입을 금한다는 것이다.
撰書者(찬서자)인 尹陽來(윤양래)는 글씨를 빨리 쓰고 또한 잘 쓰기로도 저명한 사람이다.
落花巖(낙화암)은
端宗(단종)의 궁녀들이 투신한 곳으로 1742년에 碑(비)를 세웠던 것이다.
碑題(비제)는 <落花巖 낙화암>으로 楷書體(해서체)로 21cm×22cm의 크기이다. 碑를 세운 연대만 표시되어 있다.
낙화암(落化巖)·창렬암(彰烈巖)· 순절비(殉節碑)
영월읍 영흥7리 산38-3임. 금강정 옆
낙화암(落花巖)
(전면)落花巖
(후면) 碑文
端廟朝諸侍女及諸從人 同日投水殉節 英宗戊寅 愍忠祠賜額 英宗壬戌知府洪聖輔 始立碑刻落花巖三字 隆熙庚戌夏 碑頭半落沉水 同年冬有何不良之人 投碑于水忍不可言 今玆本郡守李錫僖·保勝會長池昌永 詢謀僉同 上報李王 特蒙激勸之恩允 不日告功 立于舊址爾
甲子 參月 日
本郡守 李錫僖 石工
保勝會長 池昌永 李聖心
낙화암 후면
단종을 모시던 여러 시녀(侍女) 및 종인(從人)이 같은 날 (동강)물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영종 무인(영조 34년, 1758)년에 ‘민충사’란 편액이 내려졌으며, 이보다 앞선 영종 임술(영조 18년, 1742)년에 영월부사 홍성보가 처음으로 비를 세우고 ‘낙화암’ 3자를 새겨 넣었다.
융희 경술(1910)년 여름에 비석 머리 부분 절반이 떨어져 물에 가라앉았는데, 동년 겨울 어떤 못된 부랑자가 나머지 비석도 강물에 던져 버렸으니, 차마 입으로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에 본 군수 이석희(李錫僖) ‧ 보승회장 지창영(池昌永)이 비를 세우기로 뜻을 모아, 이왕(李王)에게 보고를 올리고, 특별히 격려하는 윤허를 받은바 힘입어, 얼마 아니 되어, 일을 모두 마치고, (낙화암)옛터에 비를 세우게 되다.
갑자(1924년) 三月 日
본 군수 이석희
보승회장 지창영
석공 이성심
殉節碑
(전면)殉節碑
(후면)
李朝 端廟 駐蹕寧越 丁丑十月 二十四日 天命不休 奄遭昇遐 侍從侍嬪 九十餘人 一體殉節 花落成仁 忠貫日月 哀拯江山 名登靑史 千秋不朽 舊址不變 立碑表忠
寧越面長金南圭
面議員一同
檀紀四二八八年十一月 日 建立
순절비 후면
조선조 단종께서 영월에 머무시다가 정축년 10월 24일 천명이 불휴(不休불휴·불순)하여 갑자기 승하하시니, 시종(侍從) ‧ 시빈(侍嬪) 90여 인이 모두 한 몸처럼 순절하였도다. 낙화처럼 몸 던져 인(仁)을 이루니, 충절은 해와 달을 관통하고, 슬픔은 강산을 흔들었네. 이름은 청사에 올라 천추를 두고 없어지지 않으리. 구지(舊址: 옛터)에 변함이 없도록 비를 새워 충절을 표지(表識)하노라.
영월면장 김남규
면의원 일동
단기4288년(1955) 11월 일 건립
<장릉지>시녀와 종인들이 다투어 고을의 동강에 몸을 던져 죽으니 강에 뜬 시체가 가득하였으며, 이날 뇌우가 크게 일어나고 강한 바람으로 나무가 뽑혀지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하여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병자록)
[영월부읍지·영월읍규(寧越府邑誌·寧越邑規)]
민충사에서 매년 한식과 10월24일에 제를 올릴 때에는 제수로 전미2석 2두 5승 8합씩을 원회곡(元會穀)에서 지급한다.
彰烈巖記 洪直弼
梅山先生文集卷之二十八
記
彰烈巖記
人皆有一死。死得其所難矣。苟得其所。則死有榮於生者。以所惡之甚於所欲也。然死生之於人大矣。在男子猶然。况于婦人乎。在冠冕珮玉之君子猶然。况充後宮下陳之類乎。三代之制。世婦以下。自稱曰婢子。婢之言卑也。未必皆敦詩禮之敎。著柔靜之德。彼引羊車得蝶幸者。固是貽羞彤管。而寄情邊衣。題詩紅葉。用紓其幽怨者。亦豈女史內官之道哉。以故歷代革國之際。未聞有宮婢殉國者。豈秉彝之性爾殊哉。積欝之氣。因變故而發之。所以不志于死也。當百濟之亡。宮人爭投於白馬江。故名之曰落花巖。花巖之名。將與天地同其悠久。而扶蘇屋社。猶有一段生氣者。賴有是耳。粤若端廟之遜荒于越也。舊宮人隨侍于淸泠浦觀風軒。調護其飮食起居。備經百罹於霧露之中。而玉體無愆者。左右服勤之功。與爲多焉耳。逮端廟陟遐。咸赴越之錦障江而死。浮屍蔽江。是日也雷雨大作。烈風拔木。黑霧彌天。經夜不散。卽丁丑十月二十四日也。邑人憐之。名其地曰落花巖。襲白江也。設壇于巖上。有事則禱。知府洪聖輔樹三字碑。卽巖西十數武。建祠而祭之。愍忠祠是也。後知府曹夏望。改落花曰彰烈。鑱巖壁而銘之。余來越中。遊錦江亭。自亭而上。歷愍忠祠撫花巖碑。泛舟錦江。摩挲彰烈巖。徘徊久之。不忍去。守祠者爲言月夜環珮怳惚。往來於祠巖之間。若有覩焉云。苟其然者。芳魂貞魄。尙有不泯者存歟。不與大化同其冥漠歟。嗚呼。婦寺之忠。惟服事宮闈。趨走唯諾而已。不遑講君臣之大義。辨熊魚之取舍。而臨難致命。視死如歸。無一人苟免。若斯人之爲者。歷選千古。靡與倫匹。詎不奇哉。當是時。背恩喪義。賣國販君者。咸出於赤芾蔥珩。而蹈節輕生。乃在於紫衣紅袖何哉。所謂卿士。利害亂其中。禍福奪其外。而巧於趨避。故瞞天讕人。至於斯極。若婢子者。全理義之良心。不爲怵疚。靡所計較。故决性命於危迫之際。而有所不避也。端廟聖德罔愆。不以冲齡而或忽貫魚之戒。以故無內寵。斯人者皆非承恩之類也。特以眞誠所發。與共患難。義不可以苟活耳。豈欲與殉名之烈士。爭不朽於竹帛哉。昔田橫之客五百。重峯之士七百。而咸同日幷命者。是乃男子之身衣冠之族。氣義相感。至百死而不貳者固也。若至廁椒掖之側。侍巾屣之末者。豈知泰山鴻毛之重輕哉。用能殺身成仁如此。比兩者又加難矣。是所謂侍御僕從。罔非正人者耶。嗚呼。目見天地崩坼。人物消盡。而鼎湖之弓劒莫攀。蒼梧之廵狩未追。劫火餘焰。炎炎來逼。亦何忍無死哉。是豈可以已者乎。苟使若人。老死帷閫之內。孰知其純忠姱節。與日月爭光乎。然有知無知。亦何與當人分上哉。只是天理當然。吾不得不然耳。嗚呼。天憂無疆。無往不返。端廟復九五之位。備千乘之禮。黃流玉瓚。饗于淸廟。珠丘花欄。煥乎喬陵。死事之宗英文武。咸配食于仙寢之傍。而侍女寺人。亦與於其間。列朝追遠之誠崇報之典。殆無虧欠。於是焉神理人情。各安其正矣。沉江化碧之血。其將怡渙而無憾乎。抑亦凝結不散。與盂山錦水。同其崩絶乎。吾不得以知之。故述以文而志之。
彰烈巖記 / 洪直弼
창렬암기 / 홍직필
彰烈巖記 洪直弼
梅山先生文集卷之二十八
記
彰烈巖記 / 洪直弼 창렬암기 / 홍직필
人皆有一死。인개유일사。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나,
死得其所難矣。사득기소난의。마땅한 곳에서 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苟得其所。구득기소。만약 마땅한 곳에서 죽을 수 있다면,
則死有榮於生者。칙사유영어생자。죽어도 사는 것보다 영예로운 것이니,
以所惡之甚於所欲也。이소악지심어소욕야。무엇인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삶을 원하는 마음보다 크기 때문이다.
然死生之於人大矣。연사생지어인대의。그러나 삶과 죽음이란 사람에게 있어 중대한 문제다.
在男子猶然。재남자유연。남자에게도 그러하거늘,
况于婦人乎。황우부인호。하물며 부인의 경우야!
在冠冕珮玉之君子猶然。재관면패옥지군자유연。관을 쓰고 패옥을 친 군자에게도 그러하거늘,
况充後宮下陳之類乎。황충후궁하진지류호。하물며 후궁과 희첩의 경우야!
三代之制。삼대지제。삼대의 제도를 살펴보면,
世婦以下。세부이하。세부(世婦) 이하의 여인들은
自稱曰婢子。자칭왈비자。스스로를 비자(婢子)라고 칭했는데,
婢之言卑也。비지언비야。비(婢)는 비천하다는 의미다.
未必皆敦詩禮之敎。미필개돈시례지교。이들 모두가 시경(詩經)과 삼례(三禮)의 교화에 익숙한 것은 아니었고,
著柔靜之德。저유정지덕。온유하고 정숙한 덕행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彼引羊車得蝶幸者。피인양차득접행자。양이 끄는 임금의 수례를 유인하여 총애를 얻는 것은
固是貽羞彤管。고시이수동관。진실로 동관(彤管)에 수치를 남겼다.
而寄情邊衣。이기정변의。변방을 지키는 남편에게 옷을 보내 마음을 전하거나,
題詩紅葉。제시홍엽。붉게 물든 나뭇잎에 시를 적어
用紓其幽怨者。용서기유원자。마음속에 서린 원망을 펼치는 것이
亦豈女史內官之道哉。역기녀사내관지도재。어찌 여사(女史)와 내궁(內宮)의 도리이리오!
以故歷代革國之際。이고력대혁국지제。그러므로 역대로 나라가 바뀔 즈음에
未聞有宮婢殉國者。미문유궁비순국자。궁비(宮婢)가 순국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豈秉彝之性爾殊哉。기병이지성이수재。하지만 어찌 하늘이 내려준 떳떳한 성품이 달라서 그런 것이겠는가!
積欝之氣。적울지기。켜켜이 쌓인 울분이
因變故而發之。인변고이발지。변고로 인하여 표출된바,
所以不志于死也。소이불지우사야。죽음에 뜻을 두지 않은 것이다.
當百濟之亡。당백제지망。백제(百濟)가 망할 무렵,
宮人爭投於白馬江。궁인쟁투어백마강。궁인들이 다투어 백마강(白馬江)에 몸을 던졌기 때문에
故名之曰落花巖。고명지왈락화암。 ‘낙화암(落花巖)’이라 명명했다.
花巖之名。화암지명。낙화암이라는 이름은
將與天地同其悠久。장여천지동기유구。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而扶蘇屋社。이부소옥사。그리고 부소산(扶蘇山)의 옥사(屋社)에
猶有一段生氣者。유유일단생기자。한 토막의 생기라도 남아 있는 것은
賴有是耳。뢰유시이。오직 낙화암이 있기 때문이다.
粤若端廟之遜荒于越也。월약단묘지손황우월야。아! 단종께서 저 황량한 영월로 은둔하셨을 때,
舊宮人隨侍于淸泠浦觀風軒。구궁인수시우청령포관풍헌。옛 궁인들이 수행하여 청령포와 관풍헌에서,
調護其飮食起居。조호기음식기거。시종하며 음식과 일상생활을 조호(調護)하였다.
備經百罹於霧露之中。비경백리어무로지중。안개와 이슬 속에서 온갖 환난을 겪으면서도
而玉體無愆者。이옥체무건자。옥체가 무탈했던 것은
左右服勤之功。좌우복근지공。與爲多焉耳。여위다언이。
좌우에서 근실하게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 공로가 크기 때문이다.
逮端廟陟遐。체단묘척하。단종께서 승하하시자,
咸赴越之錦障江而死。함부월지금장강이사。모두들 영월 금장강(錦障江)에 나아가 목숨을 버렸는데,
浮屍蔽江。부시폐강。강물에 뜬 시체가 온 강을 가릴 지경이었다.
是日也雷雨大作。시일야뢰우대작。바로 그날, 비와 천둥이 크게 몰아쳤고
烈風拔木。렬풍발목。사납게 이는 바람에 나무가 뿌리째 뽑혔으며
黑霧彌天。흑무미천。經夜不散。경야불산。하늘을 뒤덮은 시커먼 안개가 밤새도록 개지 않았다.
卽丁丑十月二十四日也。즉정축십월이십사일야。이날이 바로 정축년(丁丑年 1457. 세조 3) 10월24일이다.
邑人憐之。읍인련지。고을 사람들은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며
名其地曰落花巖。명기지왈락화암。그곳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襲白江也。습백강야。백마강의 전례를 계승한 것이다.
設壇于巖上。설단우암상。그리고 낙화암 위에 제단(祭壇)을 설치한 뒤,
有事則禱。유사칙도。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그들의 신명에게 기도하였다.
知府洪聖輔樹三字碑。지부홍성보수삼자비。영월부사 홍성보(洪聖輔)는 ‘낙화암(落花巖)’ 세 글자를 새긴 비석을 세운 뒤,
卽巖西十數武。즉암서십수무。낙화암 서쪽으로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
建祠而祭之。건사이제지。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愍忠祠是也。민충사시야。이곳이 바로 민충사(愍忠祠)다.
後知府曹夏望。후지부조하망。훗날 영월부사 조하망(曹夏望)은
改落花曰彰烈。개락화왈창렬。 ‘낙화(落花)’라는 이름을 ‘창렬(彰烈)’로 고치고는
鑱巖壁而銘之。참암벽이명지。절벽 위에 새겨 넣었다.
余來越中。여래월중。나는 영월에 와서
遊錦江亭。유금강정。금강정(錦江亭)에서 노닐다가,
自亭而上。자정이상。위로 올라가
歷愍忠祠撫花巖碑。력민충사무화암비。민충사(愍忠祠)를 경유하여 낙화암(落花巖) 비석을 더듬어보았다.
泛舟錦江。범주금강。그리고 금강(錦江)에 배를 띄운 채
摩挲彰烈巖。마사창렬암。창렬암(彰烈巖)을 어루만졌고
徘徊久之。배회구지。한참동안 배회하며
不忍去。불인거。차마 이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守祠者爲言月夜環珮怳惚。수사자위언월야환패황홀。사당을 지키는 자의 말에 의하면,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패옥 소리가
往來於祠巖之間。왕래어사암지간。사당과 낙화암 사이를 어렴풋이 왕래하는데,
若有覩焉云。약유도언운。 실제 두 눈으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苟其然者。구기연자。만약 그러한 일이 사실이라면
芳魂貞魄。방혼정백。곧고 아름다운 혼백이
不與大化同其冥漠歟。불여대화동기명막여。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인가!
여태껏 죽은 귀신이 되어 적막한 세계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인가!
嗚呼。아아!
婦寺之忠。부사지충。부시(婦寺)의 충성스러움은
惟服事宮闈。유복사궁위。오직 궁궐에서 시종하며
趨走唯諾而已。추주유낙이이。경건히 걸음을 옮기고 공손히 순종하는 것뿐이다.
不遑講君臣之大義。불황강군신지대의。군신 간의 커다란 절의를 강론하거나
辨熊魚之取舍。변웅어지취사。곰발바닥과 물고기를 취사하는 의리에 대해 변론할 겨를조차 없었다.
而臨難致命。이림난치명。그러나 위난(危難)에 맞닥뜨리자 목숨을 버리는 것을
視死如歸。시사여귀。마치 집으로 돌아가듯 아무렇지 않게 여겼고,
無一人苟免。무일인구면。若斯人之爲者。약사인지위자。단 한 사람도 구차하게 죽음을 회피한 자가 없었다.
歷選千古。력선천고。이들이 실천한 것은 천고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아도
靡與倫匹。미여륜필。필적한 만한 경우가 없으니,
詎不奇哉。거불기재。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當是時。당시시。당시
背恩喪義。배은상의。배은망덕하고 의리를 저버리며
賣國販君者。매국판군자。나라와 임금을 팔아먹은 자들은
咸出於赤芾蔥珩。함출어적불총형。모두 붉은 슬갑과 푸른 패옥을 착용한 고관대작 중에 나온 반면,
而蹈節輕生。이도절경생。절의를 지키며 목숨을 가볍게 여긴 자는
乃在於紫衣紅袖何哉。내재어자의홍수하재。자주색 저고리와 붉은 소매를 착용한 미천한 사람들이었다.
所謂卿士。소위경사。그 까닭은 무엇인가?
利害亂其中。리해란기중。이른바 벼슬아치들은 이해관계가 그 마음을 어지럽히고
禍福奪其外。화복탈기외。화복이 그 행실을 좌우하므로,
而巧於趨避。이교어추피。약삭빠르게 이익을 추구하고 재앙을 회피한다.
故瞞天讕人。고만천란인。그러므로 사람과 하늘을 기만하는 것이
至於斯極。지어사극。이 지경까지 이르는 것이다.
若婢子者。약비자자。궁녀의 경우는
全理義之良心。전리의지량심。의리를 변별하는 선한 마음을 온전히 지켰으므로
不爲怵疚。불위출구。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않았고
靡所計較。미소계교。요모조모 따지지도 않았다.
故决性命於危迫之際。고결성명어위박지제。그러므로 급박하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목숨을 내던지며
而有所不避也。이유소불피야。죽음조차 회피하지 않은 것이다.
端廟聖德罔愆。단묘성덕망건。단종의 성스러운 덕은 허물이 없다.
不以冲齡而或忽貫魚之戒。불이충령이혹홀관어지계。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행여 관어(貫魚)의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은바,
以故無內寵。이고무내총。딱히 총애하는 궁녀가 없었다.
斯人者皆非承恩之類也。사인자개비승은지류야。이들은 모두 임금의 승은을 입은 자가 아니다.
特以眞誠所發。특이진성소발。다만 진실한 정성이 발로하여
與共患難。여공환난。임금과 환난을 함께한 것이요,
義不可以苟活耳。의불가이구활이。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豈欲與殉名之烈士。기욕여순명지렬사。어찌 명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烈士)들과 더불어
爭不朽於竹帛哉。쟁불후어죽백재。사책에 남길 불후한 명성을 다투겠는가!
昔田橫之客五百。석전횡지객오백。옛날 전횡(田橫)의 식객 500명과
重峯之士七百。중봉지사칠백。중봉(重峯)의 병사 700명은
而咸同日幷命者。이함동일병명자。모두 같은 날에 죽음을 맞았다.
是乃男子之身衣冠之族。시내남자지신의관지족。이들은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거니와 의관을 갖춰 입은 사대부 출신이었다.
氣義相感。기의상감。그러니 의기(義氣)가 감별하여
至百死而不貳者固也。지백사이불이자고야。백 번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은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
若至廁椒掖之側。약지측초액지측。그러나 초액(椒掖)의 곁에 끼어들어서
侍巾屣之末者。시건사지말자。두건과 신발 따위를 시중드는 말단의 사람들이
豈知泰山鴻毛之重輕哉。기지태산홍모지중경재。어찌 태산(泰山)과 홍모(鴻毛)의 경중을 알아
用能殺身成仁如此。용능살신성인여차。이처럼 살신성인했겠는가!
比兩者又加難矣。비량자우가난의。이들의 살신성인은 전횡이나 중봉의 경우보다 한층 더 어려운 일이다.
是所謂侍御僕從。시소위시어복종。이른바 “시종하며 수레를 모는 복종(僕從)들이
罔非正人者耶。망비정인자야。 올바른 사람이 아닌 이가 없었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嗚呼。오호。아아!
目見天地崩坼。목견천지붕탁。이들은 하늘과 땅이 무너지고
人物消盡。인물소진。수많은 인물이 죽어가는 상황을 두 눈으로 목도했다.
而鼎湖之弓劒莫攀。이정호지궁검막반。게다가 정호(鼎湖)의 궁검(弓劒)을 더위잡을 수 없거니와
蒼梧之廵狩未追。창오지순수미추。창오(蒼梧)의 순수(廵狩)를 뒤따르지 못했는데,
劫火餘焰。겁화여염。겁화(劫火)의 남은 불길마저
炎炎來逼。염염래핍。 맹렬하게 핍박해 오니,
亦何忍無死哉。역하인무사재。어찌 차마 죽지 않을 수 있겠으며,
是豈可以已者乎。苟使若人。시기가이이자호。구사약인。또한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老死帷閫之內。로사유곤지내。만약 그들이 궁궐 안에서 늙어 죽었다면,
孰知其純忠姱節。숙지기순충과절。어느 누가 그들의 순수한 충정과 아름다운 절개가
與日月爭光乎。여일월쟁광호。일월(日月)과 더불어 빛을 다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리오!
然有知無知。연유지무지。그러나 알아주거나 혹은 알아주지 않는 것이
亦何與當人分上哉。역하여당인분상재。그 사람의 직분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只是天理當然。지시천리당연。그저 천리상 마땅하므로
吾不得不然耳。오불득불연이。부득불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嗚呼。오호。
天憂無疆。천우무강。끝없는 우환일지라도
無往不返。무왕불반。언젠가는 회복되기 마련이다.
端廟復九五之位。단묘복구오지위。단종께서는 구오(九五)의 자리를 회복하셨고,
備千乘之禮。비천승지례。천승(千乘)의 예법이 구비되었으며,
黃流玉瓚。황류옥찬。옥찬(玉瓚)으로 울창주를 따라
饗于淸廟。향우청묘。종묘에 모셔졌고,
珠丘花欄。煥乎喬陵。주구화란。환호교릉。능침의 아름다운 난간이 높다란 언덕에서 환히 빛나게 되었다.
死事之宗英文武。사사지종영문무。그리고 나랏일로 목숨을 바친 종친과 문`무반은
咸配食于仙寢之傍。함배식우선침지방。모두 능침 곁에 배향되었고,
而侍女寺人。이시녀사인。시녀와 환관도 그 사이에 끼게 되었으니,
亦與於其間。역여어기간。여러 임금께서
列朝追遠之誠崇報之典。렬조추원지성숭보지전。현인을 추모하는 정성과 융숭히 보답하는 전례가
殆無虧欠。태무휴흠。거의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於是焉神理人情。어시언신리인정。이에 신리(神理)와 인정(仁情)이
各安其正矣。각안기정의。각각 올바른 명분에 안주했으니,
沉江化碧之血。침강화벽지혈。강물 속에 가라앉아 푸른 옥으로 변한 피가
其將怡渙而無憾乎。기장이환이무감호。장차 흔쾌히 풀리며 더 이상 유감이 없을까?
抑亦凝結不散。억역응결불산。아니면 여전히 응결되어 흩어지지 않은 채
與盂山錦水。여우산금수。 우산(盂山)`금장강(錦障江)과 더불어
同其崩絶乎。동기붕절호。운명을 같이하여 무너지고 끊어질까?
吾不得以知之。오불득이지지。이것은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故述以文而志之。고술이문이지지。그러므로 기문을 찬술하여 기록하는 바이다.
- 역주 장릉지속편 장릉지보유 288~292쪽
창렬암기 / 홍직필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나, 마땅한 곳에서 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만약 마땅한 곳에서 죽을 수 있다면, 죽어도 사는 것보다 영예로운 것이니,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삶을 원하는 마음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란 사람에게 있어 중대한 문제다.
남자에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부인의 경우야!
관을 쓰고 패옥을 친 군자에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후궁과 희첩의 경우야!
삼대의 제도를 살펴보면, 세부(世婦) 이하의 여인들은 스스로를 비자(婢子)라고 칭했는데, 비(婢)는 비천하다는 의미다.
이들 모두가 시경(詩經)과 삼례(三禮)의 교화에 익숙한 것은 아니었고, 온유하고 정숙한 덕행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양이 끄는 임금의 수례를 유인하여 총애를 얻는 것은 진실로 동관(彤管)에 수치를 남겼다.
변방을 지키는 남편에게 옷을 보내 마음을 전하거나, 붉게 물든 나뭇잎에 시를 적어 마음속에 서린 원망을 펼치는 것이 어찌 여사(女史)와 내궁(內宮)의 도리이리오!
그러므로 역대로 나라가 바뀔 즈음에 궁비(宮婢)가 순국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어찌 하늘이 내려준 떳떳한 성품이 달라서 그런 것이겠는가!
켜켜이 쌓인 울분이 변고로 인하여 표출된바, 죽음에 뜻을 두지 않은 것이다.
백제(百濟)가 망할 무렵, 궁인들이 다투어 백마강(白馬江)에 몸을 던졌기 때문에 ‘낙화암(落花巖)’이라 명명했다.
낙화암이라는 이름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부소산(扶蘇山)의 옥사(屋社)에 한 토막의 생기라도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낙화암이 있기 때문이다.
아!
단종께서 저 황량한 영월로 은둔하셨을 때, 옛 궁인들이 수행하여 청령포와 관풍헌에서, 시종하며 음식과 일상생활을 조호(調護)하였다.
안개와 이슬 속에서 온갖 환난을 겪으면서도 옥체가 무탈했던 것은 좌우에서 근실하게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 공로가 크기 때문이다.
단종께서 승하하시자, 모두들 영월 금장강(錦障江)에 나아가 목숨을 버렸는데, 강물에 뜬 시체가 온 강을 가릴 지경이었다.
바로 그날, 비와 천둥이 크게 몰아쳤고 사납게 이는 바람에 나무가 뿌리째 뽑혔으며 하늘을 뒤덮은 시커먼 안개가 밤새도록 개지 않았다.
이날이 바로 정축년(丁丑年 1457. 세조 3) 10월24일이다.
고을 사람들은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며 그곳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백마강의 전례를 계승한 것이다.
그리고 낙화암 위에 제단(祭壇)을 설치한 뒤,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그들의 신명에게 기도하였다.
영월부사 홍성보(洪聖輔)는 ‘낙화암(落花巖)’ 세 글자를 새긴 비석을 세운 뒤, 낙화암 서쪽으로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곳이 바로 민충사(愍忠祠)다.
훗날 영월부사 조하망(曹夏望)은 ‘낙화(落花)’라는 이름을 ‘창렬(彰烈)’로 고치고는 절벽 위에 새겨 넣었다.
나는 영월에 와서 금강정(錦江亭)에서 노닐다가, 위로 올라가 민충사(愍忠祠)를 경유하여 낙화암(落花巖) 비석을 더듬어보았다.
그리고 금강(錦江)에 배를 띄운 채 창렬암(彰烈巖)을 어루만졌고 한참동안 배회하며 차마 이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사당을 지키는 자의 말에 의하면,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패옥 소리가 사당과 낙화암 사이를 어렴풋이 왕래하는데, 실제 두 눈으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만약 그러한 일이 사실이라면 곧고 아름다운 혼백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인가!
여태껏 죽은 귀신이 되어 적막한 세계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인가!
아아!
부시(婦寺)의 충성스러움은 오직 궁궐에서 시종하며 경건히 걸음을 옮기고 공손히 순종하는 것뿐이다.
군신 간의 커다란 절의를 강론하거나 곰발바닥과 물고기를 취사하는 의리에 대해 변론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나 위난(危難)에 맞닥뜨리자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마치 집으로 돌아가듯 아무렇지 않게 여겼고, 단 한 사람도 구차하게 죽음을 회피한 자가 없었다.
이들이 실천한 것은 천고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아도 필적한 만한 경우가 없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당시 배은망덕하고 의리를 저버리며 나라와 임금을 팔아먹은 자들은 모두 붉은 슬갑과 푸른 패옥을 착용한 고관대작 중에 나온 반면, 절의를 지키며 목숨을 가볍게 여긴 자는 자주색 저고리와 붉은 소매를 착용한 미천한 사람들이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른바 벼슬아치들은 이해관계가 그 마음을 어지럽히고 화복이 그 행실을 좌우하므로, 약삭빠르게 이익을 추구하고 재앙을 회피한다.
그러므로 사람과 하늘을 기만하는 것이 이 지경까지 이르는 것이다.
궁녀의 경우는 의리를 변별하는 선한 마음을 온전히 지켰으므로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않았고 묘모조모 따지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급박하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목숨을 내던지며 죽음조차 회피하지 않은 것이다.
단종의 성스러운 덕은 허물이 없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행여 관어(貫魚)의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은바, 딱히 총애하는 궁녀가 없었다.
이들은 모두 임금의 승은을 입은 자가 아니다.
다만 진실한 정성이 발로하여 임금과 환난을 함께한 것이요,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 명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烈士)들과 더불어 사책에 남길 불후한 명성을 다투겠는가!
옛날 전횡(田橫)의 식객 500명과 중봉(重峯)의 병사 700명은 모두 같은 날에 죽음을 맞았다.
이들은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거니와 의관을 갖춰 입은 사대부 출신이었다.
그러니 의기(義氣)가 감별하여 백 번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은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
그러나 초액(椒掖)의 곁에 끼어들어서 두건과 신발 따위를 시중드는 말단의 사람들이 어찌 태산(泰山)과 홍모(鴻毛)의 경중을 알아 이처럼 살신성인했겠는가!
이들의 살신성인은 전횡이나 중봉의 경우보다 한층 더 어려운 일이다.
이른바 “시종하며 수레를 모는 복종(僕從)들이 올바른 사람이 아닌 이가 없었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이들은 하늘과 땅이 무너지고 수많은 인물이 죽어가는 상황을 두 눈으로 목도했다.
게다가 정호(鼎湖)의 궁검(弓劒)을 더위잡을 수 없거니와 창오(蒼梧)의 순수(廵狩)를 뒤따르지 못했는데, 겁화(劫火)의 남은 불길마저 맹렬하게 핍박해 오니, 어지 차마 죽지 않을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만약 그들이 궁궐 안에서 늙어 죽었다면, 어느 누가 그들의 순수한 충정과 아름다운 절개가 일월(日月)과 더불어 빛을 다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리오!
그러나 알아주거나 혹은 알아주지 않는 것이 그 사람의 직분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저 천리상 마땅하므로 부득불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아아!
끝없는 우환일지라도 언젠가는 회복되기 마련이다.
단종께서는 구오(九五)의 자리를 회복하셨고, 천승(千乘)의 예법이 구비되었으며, 옥찬(玉瓚)으로 울창주를 따라 종묘에 모셔졌고, 능침의 아름다운 난간이 높다란 언덕에서 환히 빛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랏일로 목숨을 바친 종친과 문`무반은 모두 능침 곁에 배향되었고, 시녀와 환관도 그 사이에 끼게 되었으니, 여러 임금께서 현인을 추모하는 정성과 융숭히 보답하는 전례가 거의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이에 신리(神理)와 인정(仁情)이 각각 올바른 명분에 안주했으니, 강물 속에 가라앉아 푸른 옥으로 변한 피가 장차 흔쾌히 풀리며 더 이상 유감이 없을까?
아니면 여전히 응결되어 흩어지지 않은 채 우산(盂山)`금장강(錦障江)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하여 무너지고 끊어질까?
이것은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문을 찬술하여 기록하는 바이다.
- 역주 장릉지속편 장릉지보유 288~292쪽
• 홍직필 洪直弼
• 생년 1776년(영조 52) • 몰년 1852년(철종 3)
• 본관 남양(南陽) • 저서(작품) 매산집 52권
[정의]1776(영조 52)∼1852(철종 3). 조선 후기의 학자.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긍필(兢弼). 자는 백응(伯應)·백림(伯臨), 호는 매산(梅山). 서울 출신. 병마절도위 상언(尙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선양(善養)이고, 아버지는 판서 이간(履簡)이다.
[생애]
재능이 뛰어나 7세 때 이미 한자로 문장을 지었다. 그리고 17세에는 이학(理學)에 밝아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으로부터 오도유탁(吾道有托 : 올바른 도를 맡길 만함.)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801년(순조 1) 부모의 권유로 사마시에 응시해 초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서 실패하였다. 이로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원로 명사인 송환기(宋煥箕)·이직보(李直輔)·임로(任魯) 등과 연령을 초월해 교유하였다. 특히 오희상(吳熙常)과 가장 오래 교유했는데, 그로부터 유종(儒宗 : 유학자의 으뜸)이라 일컬어졌다. 또한 이봉수(李鳳秀)로부터는 학문이 가장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다.
1810년 돈녕부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814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로 제배되었다. 이 때 동궁(東宮 : 뒤의 翼宗)이 새로 세자에 올라 당시의 유명인사들을 뽑아 매일 서연(書筵)을 열 때 발탁되었다. 1822년 장흥고봉사에 임명되었으나 물리쳤다.
1838년(헌종 4)에 이조에 재학(才學)으로 천거되어, 이듬해 장악원주부·황해도도사에 임명되고, 1840년에는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다음해 경연관(經筵官)에 천거되고, 이어 지평을 거쳐 집의에 이르렀다.
1844년 특별히 당상관으로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다시 동부승지에 제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성균관좨주를 비롯해 1851년(철종 2) 대사헌에 전후 두 차례나 특배되고, 이듬해에는 지돈녕부사에 승배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해 7월 형조판서에 제수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졸하였다.
[활동사항]
그의 학문은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육경(六經)은 물론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그리고 천지음양귀신(天地陰陽鬼神)의 묘와 역대흥망치란(歷代興亡治亂)의 자취와 산천풍토인물족계(山川風土人物族系)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하였다.
성리학에서 정자(程子)의 심본설(心本說)을 극력 지지하고, 한원진(韓元震)의 심선악설(心善惡說)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임성주(任聖周)의 “성선(性善)은 곧 기질(氣質)이다.”고 한 주장에도 반대하였다. 따라서 주리파(主理派)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개천의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매산집≫ 52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헌종실록(憲宗實錄)』『철종실록(哲宗實錄)』『숙재집(肅齋集)』
『매산집(梅山集)』『조선유교연원』(장지연, 회동서관, 1922)
『한국유교사』(배종호, 연세대학교출판부, 1974)
落花巖 낙화암 / 김학성(金學性)• 조영하(趙寧夏)
落花巖
落花花泛泛。香塚吊何山。淚爲龍髯盡。魂因蝶夢閒。
락화화범범。향총적하산。루위룡염진。혼인접몽한。
一春風雨後。五夜月星間。莫向東君怨。榮枯有數關。
일춘풍우후。오야월성간。막향동군원。영고유수관。
-雲石遺稿卷之三 詩
운석유고 雲石遺稿
〇시대 : 조선 〇성격 : 시문집 〇유형 : 문헌 〇수량 : 20권 10책
〇소장/전승 : 규장각 도서,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
〇창작/발표시기 : 1868년 〇간행/발행처 : 김학성, 조영하
〇요약 :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조인영(趙寅永)의 시문집.
〇[편찬/발간 경위] 1868년(고종 5)조인영의 사위 김학성(金學性)과 손자 조영하(趙寧夏)에 의해 간행되었다. 권두에 윤정현(尹定鉉)·김학성의 서문, 권말에 조영하의 발문이 있다.
〇[서지적 사항] 20권 10책. 전사자본(全史字本). 규장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잇다.
〇[내용] 권1∼4에 시 609수, 권5∼7에 소차 75편, 권8에 계(啓) 17편, 주(奏) 11편, 의(議) 11편, 권9에 서(序) 23편, 권10에 기(記) 19편, 잡저 7편, 권11에 응제문 31편, 권12에 제문 15편, 비명 6편, 묘갈 4편, 권13에 묘갈 9편, 묘표 10편, 권14에 지문(誌文) 1편, 행장 3편, 권15에 가장 2편, 권16∼20에 시장(諡狀) 2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 김학성金學性
• 생년 1807년(순조 7) • 몰년 1875년(고종 12) • 본관 청풍(淸風)
• 저서(작품) 청풍김씨세보 • 대표관직(경력) 우빈객|우참찬|광주부유수
[정의]1807(순조 7)∼1875(고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경도(景道), 호는 송석(松石). 종정(鍾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명연(命淵)이고, 아버지는 참판 동헌(東獻)이며, 어머니는 이의곤(李義坤)의 딸이다.
[내용]1828년(순조 28) 진사가 되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33년 대교(待敎), 1841년(헌종 7) 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홍문관부제학·이조참의·예방승지·이조참판을 지냈다. 1848년 한성부판윤·규장각제학에 이어 1849년 철종 즉위 후는 호조·예조·형조·공조의 판서와 광주부유수·우참찬 등 요직을 거쳤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뒤에도 계속 중용되어 1864년 판의금부사·규장각제학·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상호군(上護軍)·좌찬성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맡아 강관(講官)과 실록편찬 등의 제술관(製述官)을 겸하였다.
또, 예조판서·평안도관찰사·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시강원의 우빈객(右賓客)으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편서로는 『청풍김씨세보(淸風金氏世譜)』가 있다.
[참고문헌]『순조실록(純祖實錄)』『철종실록(哲宗實錄)』『고종실록(高宗實錄)』
『기년편고(紀年便攷)』『국조방목(國朝榜目)』『청풍김씨세보(淸風金氏世譜)』
• 조영하 趙寧夏
• 생년 1845년(헌종 11) • 몰년 1884년(고종 21)
• 본관 풍양(豊壤 :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 • 관련사건 갑신정변
• 대표관직(경력) 통리기무아문당상|독판군국사무|공조판서|지중추부사
[정의]1845(헌종 11)∼1884(고종 21). 조선 말기의 문신.
[개설]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기삼(箕三), 호는 혜인(惠人). 서울 출신. 현령 병석(秉錫)의 아들로 병기(秉虁)에게 입양되었으며, 신정왕후(神貞王后) 조대비의 조카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1863년(철종 1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규장각대교를 거쳐,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가 당시 섭정하고 있던 조대비의 총애를 받아 승정원 동부승지에 특별 임명되었다.
1865년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고, 1867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같은 해 개성부유수에 임명되고 1869년 동지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1873년 민승호(閔升鎬) 등 민씨일족과 결탁하여 당시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탄핵한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대원군세력 축출에 앞장섰다.
1874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이 선포되자 금위대장에 발탁되고, 이어 우포도대장·동지삼군부사(同知三軍府事)가 되어 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를 겸하였다. 1875년 훈련대장이 되고 1876년 지경연사(知經筵事)·공조판서, 1877년 예조판서, 1878년 다시 공조판서를 지내고, 1880년 이조판서·한성부판윤·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신설되자 상호군으로 통리기무아문당상이 되고, 이듬해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사대교린당상(事大交隣堂上)·전선어학사당상(典選語學司堂上)·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82년 전권대관(全權大官)으로 일본의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花房義質)와 그리고 한미수호조약체결 예비교섭차 인천에 도착한 마건충(馬建忠)과도 접견하였다. 한편, 한영(韓英)·한독(韓獨) 수호조약을 각각 체결하였다.
그 뒤 같은 해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자 지삼군부사로 좌천되었다가, 접견대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파병을 요청함으로써 군란주동자의 색출과 대원군의 납거를 실현하는 등, 대청외교의 사무를 전담함으로써 국왕과 민씨척족의 신임을 받고 사대보수세력의 수령급 인물이 되었다.
그 해 다시 사은사 겸 진주사(謝恩使兼陳奏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기계·무기 등을 수입하였다. 그리고 관세·외교 담당고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Mollendorf, P. G. von)를 초빙, 입국하게 하였고, 청나라와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였다.
그 뒤 판리통리기무아문사(辦理統理機務衙門事)·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등을 역임하고, 1883년 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공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갑신정변 때 피살당하였다.
[상훈과 추모]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참고문헌]『고종실록(高宗實錄)』『순종실록(純宗實錄)』『고종기사(高宗紀事)』
『일성록(日省錄)』『갑신일록(甲申日錄)』『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매천야록(梅泉野錄)』
첫댓글 낙화암 표석은 1742년 누가 세웟는가?
윤양래 탁본첩에 낙화암 표석 탁본이 왜 있는가?
연대의 차이 1726년 영월부사 윤양래~그리고 16년이 지난 1742년 낙화암 표석이 세워졌는데~
영월부사 윤양래 1725.07.24~1727.04
영월부사 홍성보 1741.09.15~1742.06.07
홍성보 洪聖輔 : 조선후기 문신, 본관은 풍산, 자는 유량 幼亮이다. 1685년 출생. 1721년 문과급제
영월부사로 재임 중 별세
순절비 비문에 정축년 10월24일=1457년 10월24일.
조선조 단종께서 영월에 머무시다가 정축년 10월 24일 천명이 불휴(不休불휴·불순)하여 갑자기 승하하시니, 시종(侍從) ? 시빈(侍嬪) 90여 인이 모두 한 몸처럼 순절하였도다. 낙화처럼 몸 던져 인(仁)을 이루니, 충절은 해와 달을 관통하고, 슬픔은 강산을 흔들었네, 이름은 청사에 올라 천추를 두고 없어지지 않으리. 구지(舊址: 옛터)에 변함이 없도록 비를 새워 충절을 표지(表識)하노라.
李朝 端廟 駐蹕寧越 丁丑十月 二十四日 天命不休 奄遭昇遐 侍從侍嬪 九十餘人 一體殉節 花落成仁 忠貫日月 哀拯江山 名登靑史 千秋不朽 舊址不變 立碑表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