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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시’를 결속하며 번져가는 가없는 사유
- 김남조 신작을 읽으며
유성호
1.
김남조金南祚 선생의 신작 열 편을 읽었다. 차분하고 편안하게 선생의 최근 언어를 따라가본다. 60여 년 동안 한순간도 놓침 없이 지속적으로 발화되어온 선생의 언어는 여전히 이완되거나 범람하지 않는다. 정념에 차 있으면서도 생각의 빈터를 늘 예비하는 시인의 두터운 성정이 이번 신작들에서도 어김없이 만져진다. 한 편 한 편이 독자적 권역을 이루면서도 서로를 끌어들여 커다란 의미의 연쇄를 이루고 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시법詩法은 선생이 수미일관하게 지켜온 평생의 시적 기율이자 방법론이었을 것이다. 가령 김남조 초기 시편의 주제가 생명의 존귀함을 기리고 노래하는 것이었다면, 그러한 주제 영역은 시간을 보태가면서 더욱 깊고 견고한 사유로 나아가 때로는 특유의 종교적 상상력으로 때로는 인간 근원을 상상하는 가없는 사랑의 노래로 번져오지 않았던가.
우리가 잘 알듯이, 올해로 회갑을 맞는 기념비적 첫 시집 목숨(1953)의 표제 시편은 잔혹하기 짝이 없는 전쟁에서의 인간 상실을 고발하면서 그 역으로 생에 대한 외경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러한 초기 시편의 생명을 향한 열정이 후기 시편으로 접어들면서부터 좀 더 사색적인 휴머니즘의 차원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렇게 선생이 감당해온 변함없는 지상 명령은 ‘사랑’과 ‘시’를 결속하면서 생명과 인간의 가치를 섬세하게 노래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신작들은 이러한 시적 기둥과 결을 재현하고 심화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존재 증명을 한 차원 깊게 수행하고 있다. 이제 천천히, 세심하게,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 보자.
2.
그동안 김남조 선생이 노래해온 ‘사랑’의 테마는 절묘하게도 에로스적 사랑과 아가페적 사랑이 아스라하게 손을 잡고 있었다는 점에 특징이 있었다. 그것이 연인이든 신神이든 선생의 시편에서 사랑의 대상들은 무심하고 의식 없는 사물이 아니라 시인과 동일한 자의식을 가진 살아 있는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해온 김남조 시편의 ‘사랑’은 자기애自己愛 같은 회귀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상호 소통적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대체로 서정시에서 ‘사랑’이 외로운 목소리들로 나타나는 것이 상례이고, 또한 그 목소리들이 사랑의 결여 형식이라는 비극적 조건 안에서 발생한다고 할 때, 김남조 선생의 사랑 시편은 그 권역을 훌쩍 넘어 따뜻하고 깊은 인생론적 긍정의 속성을 견지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신작들에서도 그러한 사랑의 긍정의 과정이 어김없이 반짝이고 있다.
종이에 성냥 그었을 뿐인데
믿을 수 없는 일,
바람 거들어 불의 풍선 부풀고 부푼다
종이와 성냥과 바람이 작심하여
마른 나무에게 어찌 했기에
이런 무서운 일 생겼나
불의 자식들 여럿 태어나
아이마다
한 찰나도 멈추지 않고
수직으로 곤두서며
펄럭이다니
모닥불 둘레의 사람들도
불에 홀려 이상해져서
먼젓 세상에 다녀 온 듯도 싶고
공연히 눈물겹기도 하는 등
이리 되었다
― 「모닥불 감동」 전문
백석의 「모닥불」에는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었던 모든 존재자들이 어울려 이루어내는 화합의 장이 그려져 있는데, 김남조의 「모닥불」에는 타자를 향해 부풀어가는 사랑의 마음과 그것을 노래하는 시인의 감동이 차분하게 그려져 있다. 종이에 성냥을 그어 생성된 ‘불’이 바람과 만나 “불의 풍선”처럼 부푸는 일은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종이/성냥/바람’이 상호 협력하여 마른 나무로 다가가 이루어낸 ‘모닥불’은, 이제 믿을 수 없는 일을 넘어 ‘무서운 일’로 그 성격을 진화해간다. 이제 ‘모닥불’은 제 힘으로 ‘불의 자식들’을 낳고 그 아이들로 하여금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펄럭이게 한다. 그리고 그 수직의 꿈들이 모닥불 둘레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홀리게도 하고 눈물겹게도 한다. 이처럼 불이 생성하여 그 불을 쬐는 사람들에게까지 옮겨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고스란히 ‘사랑’의 문법을 닮았다. 왜냐하면 ‘사랑’도 믿을 수 없는 일로 시작하여 모든 감각이 협력하여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무서운 일로 나아가지 않는가. 그래서 ‘홀림’이나 ‘눈물겨움’으로 글썽이는 ‘사랑’이 바로 김남조 선생이 ‘모닥불’에서 얻은 ‘감동’의 내질內質인 것이다. 이러한 김남조 버전의 ‘사랑’ 시학은 서서히 그 동심원을 그리면서 퍼져나가는데, 다음 시편은 그러한 사랑의 방식을 ‘결혼’과 ‘연애’로 나누어 노래한 이색적인 작품이다.
결혼은 성문에 들어
성 안의 주민으로 살고
연애는 성 밖의 초막에서
바람옷 젖은 신발로 산다
결혼은 율법의 승인이며
연애는 그리움의 서원이다
결혼은 아름다우나 무겁고
연애는 아름다우나 슬프다
결혼과 연애의 공통점은
완전한 결합의 영원한 반려를 찾기 위해
이 세상에서
약혼을 시도하는 일이다
― 「결혼과 연애」 전문
이 시편에서 ‘결혼/연애’는 마치 ‘완성/미완성’ 혹은 ‘완결형/진행형’처럼 사랑의 속성을 정반대편에서 보여주는 확연한 역상逆像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대조적 비유는 ‘성 안/성 밖’, ‘정착/유목’, ‘율법의 승인/그리움의 서원’ 등으로 그 목록을 늘리면서 계열체를 확장해간다. 그런가 하면 그것은 ‘무거움/슬픔’처럼 딱히 대립쌍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결국 ‘결혼/연애’의 대립은 그 경계에 ‘약혼’이라는 상징적 거소居所를 두게끔 하는데, 그것은 완전하고 영원한 반려를 찾기 위해 자신을 유보하는 상상적 공간이 된다. 이때 ‘사랑’이란 ‘결혼’처럼 안정된 형식을 얻으려는 충동과 ‘연애’처럼 한없이 자유로워지려는 충동을 한몸에 안은 것으로 나타나며, 인간의 욕망 역시 완전하고도 영원한 것을 위해 안과 밖을 통합하고 정착과 유목을 횡단하는 것임을 암시해준다. 그런데 시인은 그 경계적 행위인 ‘약혼’을 천상에서 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하자고 한다. 비록 ‘지상의 사랑’이 불완전하고 순간적일지라도, 그것을 통과하지 않는 어떤 완전함과 영원함도 없다고 시인은 믿고 있는 것이다.
실바람에도 흐느적이는
헐렁한 단벌옷으로
해 저문 논두렁에 서 있는 허수아비
누군가의 모습 같고
나의 모습 같다
배고파도 허리 곧은 자세
덩그라니 혼자여도
햇빛 향해 두 팔 벌린 점을
나는 닮고 싶고
내 자식도 닮았으면 좋겠다
― 「허수아비」 전문
선생이 노래하는 ‘허수아비’는 무력하고 허망한 존재를 비유하는 상투적인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본연적 속성을 간직한 보편적 존재자로 현상한다. ‘허수아비’의 변함없는 흐느적임과 헐렁함 그리고 하염없이 서 있는 모습이야말로 쉼없이 흔들리며 살아가는 인간의 보편적 모습을 닮은 것이고, 시인으로서는 비록 배고프고 외로워도 허리 곧게 세우고 햇빛 향해 두 팔 벌려 서 있는 그 모습이 한결 미더워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허수아비’가 “내 자식”에게도 그 속성을 옮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되고, ‘허수아비’는 생명 없는 사물에서 고유한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 몸을 바꾼다. 그런데 자기 자식이 ‘허수아비’를 닮았으면 하는 소망은 그대로 ‘사랑’의 마음을 닮은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외롭고 힘들어도 햇빛을 향해 나아가는 일관성과 지속성이 ‘사랑’의 본질을 빼닮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그의 유명한 책 나와 너에서 인간의 관계론적 근원어를 두 가지로 설명한 바 있다. 하나가 ‘나-너’(Ich-Du)라면 다른 하나는 ‘나-그것’(Ich-Es)이다. 이때 ‘나-너’의 관계가 존재 전체를 바쳐서만 이를 수 있다고 말한 부버는, ‘나’라는 것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 가능함을 설명하였다. 김남조의 사랑 시편들은 이처럼 ‘나-너’로 결속하는 근원의 마음을 지향하면서 씌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선생의 사랑 시학을 떠받들고 있는 축이, ‘나-너’가 이루는 상호 소통과 인생론적 긍정의 무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
이렇게 ‘사랑’의 지속성과 일관성을 노래한 김남조 선생은 한편으로 이번 신작들을 통해 ‘시인’으로서 가지게 되는 깊은 자의식을 고백하고 있다. 곧 선생은 ‘시’가 궁극적 자아 탐구와 심미적 욕망의 불가피한 형식임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표현한다. 우리가 잘 알거니와, ‘시’란 언어 자체에 대한 탐색에 그 무게중심을 현저하게 할애하는 예술 양식이다. 그 점에서 ‘시’는 영락없는 ‘언어 예술’이기도 하다. 여기서 시인은 언어적 자의식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는 자기 규정성을 뛰어넘어, 언어를 찾아 헤매고 모든 사물 속에서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려는 존재로 탈바꿈된다. 다시 말해 언어의 도구적 기능을 뛰어넘어, 언어 자체에 대한 메타적 탐색에 공을 들이는 이가 시인이라는 뜻이 된다. 김남조 선생에게 ‘시’란 이러한 시인으로서의 존재론적 발견을 가능하게 하는 편재적遍在的 원리이면서, 동시에 스스로의 삶을 완성하는 원천적 기율이기도 하다. 그렇게 김남조 선생의 시편들은 ‘시’에 대한 생각과 경험을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사물 곳곳에서 ‘시’를 발견하는 양상으로 나아가는데, 다음 시편은 ‘시’를 통해 ‘시’를 발견하는 시인의 감각을 아름답게 담고 있는 실례일 것이다.
출타한 네가
백년 이백년에도 귀가하지 않아
내 순정의 기다림은
기다림의 혼령 되어
세월의 분말을 가르며 날아갔다
달이 한참거리의
흙을 굽어보듯 하는 눈짓…
시여 이제 돌아왔는가
그 사이 실을 꿴 바늘자국을 남기며
어떤 심각한 공부로
동서남북을 떠돌았기에
이리 초췌한 모습인가
하여 이번에도
나는 용서할 입장 그 아니고
용서받을 처지라고
기죽어 머리 끄득이느니
시여 한 평생
나를 이기기만 하는 시여
― 「나의 시에게 · 5」 전문
선생은 ‘시’의 행방을 ‘출타/귀가’의 가파른 반복 속에서 찾는다. 오래 전에 출타한 ‘시’를 기다려 순정의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 기다림은 어느새 혼령이 되어 다시 날아가버렸다. ‘달’이 ‘흙’을 굽어 바라보는 그 눈짓처럼 시인은 “시여 이제 돌아왔는가” 하고 자문해본다. 깊고 애잔하고 쓸쓸한 질문이다. 이때 ‘시’는 실을 꿴 바늘자국을 남기면서 초췌한 모습으로 귀가한다. ‘천의무봉(天衣無縫)’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의 시’에게 시인은 “이번에도/나는 용서할 입장 그 아니고/용서받을 처지”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는 한평생 ‘나’를 이기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편으로는 날아갔다가 한편으로는 돌아오기도 하면서 ‘시’는 시인과 생을 함께한 것이다. 그러니 선생에게 ‘시’란 “온 세상 사람이 아주 오랫동안 퍼내어도/그 수량 다하지 않는 마법의 샘물”(「작가미상」)이지 않겠는가. 따라서 비록 시인이 초췌해진 모습으로 귀가한 ‘시’에 대해 연민을 발화했지만, 그 안에서는 ‘시’가 언제나 ‘시인’을 이길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의 원리와 함께 ‘시’가 양도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론적 천명임을 암시하는 시인의 고백이 함께 담겨 있는 것이다. 그 ‘천명’을 다르게 은유한 형상이 바로 ‘혈서’가 아닐까 한다.
은밀한 혈서 몇 줄은
누구의 가슴에나 필연 있으리
시간의 시냇물 흐르는 동안
글씨들 어른 되고 늙었으리
적멸의 집 한 채엔
고요가 꽉 찼으리
너무 늦었다거나
아직 아니라거라
그런 말소리도 잦아들었으리
사람의 음성은
핏자국보다 단명하기에
― 「혈서」 전문
비장한 각오를 다지거나 강력한 항의를 수행할 때 등장하는 ‘혈서血書’는, 누구나의 가슴에 담겨 있는 잠재적 열정의 표상일 것이다. 물론 가슴에 들어 있는 “은밀한 혈서 몇 줄”은 김남조 선생에겐 ‘시’의 적실한 은유로 나타난 것일 터이다. 시간이 흘러 그 은밀했던 글씨들도 늙어갔지만 그 글씨들이 이룬 “적멸의 집 한 채”에는 고요가 꽉 들어차 이른바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만 가득하게 되었다. 비록 사람의 목소리는 감각적이고 유한한 것이지만, 이렇게 핏자국으로 새긴 “적멸의 집 한 채”는 그 수명이 훨씬 긴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불붙은 숯을 입 안에 넣은 채/순교한 소년 성인이 있다/유 베드로, 그는 열네 살이었다/나는 팔십 년 이상을 살면서/연달아 무슨 말이건 지껄이기만 한다”(「말 많음에 관하여」)에서처럼 ‘말 없음/말 많음’의 대위對位를 통한 ‘말’에 대한 반성적 사유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마법의 샘물’을 그 안에 가졌고, 고요의 궁극에까지 나아간 선생의 ‘시’는 과연 어떤 미래를 그려갈까. 다음 작품에 그 행방이 시사되어 있다.
미래의 시는 어디에 있나
미래의 시인은 어디쯤 오고 있나
이 시대엔 못다 짚은 사념
못 듣고 못 본 불사가의
신이 내놓지 않은 천둥번개
지구의 끝날까지
시인은 오고 시는 쓰여지리니
희노애락의 사슬
천재들의 예지
해부도로 밝혀 낼 인간의 진정성
시여
절망적인 희망이여
― 「미래의 시」 전문
선생이 그리는 ‘미래의 시’는 우리 시대에 못다 한 것들을 이루기 위해 서서히 오고 있다. 그것은 아직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신이 내놓지 않은 천둥번개”로 은유된다. 그렇게 지구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시인은 다가오고 시는 계속 씌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불가사의한 “희노애락의 사슬”이야말로 “천재들의 예지”이고 “인간의 진정성”이 가 닿은 극점이 될 것이다. 이렇게 절망과 희망이 반쯤 섞인 ‘시’의 운명이 선생에게는 “내 시린 어깨를 보듬어 주는/노숙한 연민”(「축원」)일 것이고 “내 삐꺽이는 뼈마디 어이 알고 짚어”(「축원」)주는 평생의 도반道伴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듯 김남조 선생은 이번 신작 곳곳에서 ‘시’에 대한 예민하고도 깊은 자의식을 토로하면서 ‘시(말)’ 자체에 대한 메타적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모든 사물이 일정한 시공간에 존재하다가 그 물리적 유한성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사라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시 말해 그 어떤 사물도 그저 어떤 곳에 순간적으로 존재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항용 말하는 ‘영원성’이 시간적 구속 자체가 없는 지속성을 뜻하는 것이라 할 때,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는 셈이 된다. 그만큼 ‘영원성’이란, 오로지 ‘그리움’의 대상이 될 만한 것에 대해 부여하는 상상적 존재 형식일 뿐이다. 김남조 선생은 이러한 ‘영원성’과 ‘그리움’의 원리를 ‘시’ 안에서 통합하고 그 안에 담긴 ‘그리움’의 형식을 통해 인간 존재를 사유하고 있다. 이때 선생의 시편들은 서정시가 본래적으로 가지는 ‘영원성’ 혹은 ‘근원성’에 대한 탐구 의지를 지속적으로 선보인 범례가 될 만한 것이다. 특별히 김남조 선생은 그 근원성을 직접적으로 추구하지 않고, 구체적 사물이나 그 사물이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통해 탐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이 선생의 시편으로 하여금 구체성과 형이상성을 통합하게 하는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4.
서정시의 근본적 전제는 본질적으로 ‘자기 발언’(Selbstaussprache)이라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 서정시의 수신자는 발화자 자신이다. 물론 공적 담론의 주체로서 발화자가 세계에 개입하는 방식의 언술이 서정시의 권역을 넓힌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원적 의미에서 서정시의 자기 탐색적 의미는 반감되지 않는다. 그렇게 시인은 스스로 화자와 청자가 되어 ‘시(말)’에 대한 깊은 자의식을 토로함으로써, 자기 탐색의 공을 지속적으로 축적해간다. 김남조 선생은 ‘사랑’의 긍정과 ‘시(말)’에 대한 사유를 통해 자신이 여전히 우리 시단의 “현역 병사”이고 자신이 오랫동안 맡아온 “병무는 삶”(「노병」)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 삶을 옮겨적고 영속화하는 것이 말하자면 선생이 ‘시작(詩作)’인 것이다.
우리 시대는 이른바 ‘원초적 통일성’을 지닌 ‘존재’(Sein)가 숨어버린, 폐허와 결핍의 시간을 가파르게 건너가고 있다. 이런 난경難境의 때에, 가장 어수룩해 보이는 ‘시’를 우리가 지속적으로 쓰고 읽는 까닭은 아마도 ‘시’가 그 잃어버린 감각들을 순간적으로 탈환하고, 궁극에는 원초적 통일성을 상상적으로 회복하게 하는 가장 유력한 언어 형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시’가 근원적 감각과 원초적 통일성을 회복하려 한다는 것은, 주체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는 경험으로부터 그것의 통합을 꾀하려는 성격이 ‘시’에 본질적으로 들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김남조 선생은 이러한 ‘시’의 창조적이고 생성적인 직능을 깊이 신뢰하고 노래한다.
선생이 가장 최근에 펴낸 시선집 가슴들아 쉬자(시인생각, 2012)에는 “논리를 접고 사람의 허약함을/서로 측은히 여겨주자.”(「시인의 말」)라는 전언이 실려 있는데, 이번 신작들은 이러한 전언의 충실한 예증이라 할 수 있다. 가령 그것은 허약하고 유한한 존재에 대한 연민과 측은함 속에서 피어난 사랑의 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쉬는 가슴’을 위하여 김남조 선생은 오늘도 ‘사랑’과 ‘시’를 결속하며 그 안에 가없는 사유를 얹어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선생의 이러한 세계가 오랫동안 우리 시단을 따뜻하게 감싸면서 커다란 의미의 연쇄를 이루기를, 그리고 ‘삶’이라는 병무를 오늘도 치러내고 있는 모든 ‘시의 병사’들을 세심하게 돌보아주기를, 마음 깊이 소망해보는 것이다.
<평론 부문 수상소감>
최근 공공연한 수사가 되어버린 문학의 위기 국면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비평적 주체들은 자기 자신만의 독자적인 문채文彩와 해석력으로, 상업주의와 문학의 평균적 비속성에 저항해왔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비평의 정예성과 미학성은 꾸준히 지속, 심화되면서 우리 문학의 위의威儀를 지켜갈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저 역시 좋은 비평의 한 축을 적극 담당함으로써 이러한 비평의 기율의 확산과 심화 과정을 세상에 보태가고자 합니다.
저는 낱낱 시편들의 전언을 적출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안목이 결여된 ‘좋은 비평’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시인들의 생각과 경험의 언어적 결실인 시의 리듬이나 숨결 같은 미세한 장치들을 새로운 언어로 읽어내는 데 비평가의 일차적인 자질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비평의 최종 심급은 시를 ‘보아(읽어)내는 능력’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점에서 저는 저의 비평 행위를 텍스트에 이론적 체계를 부여하려는 ‘랑그’가 아니고, 스스로 텍스트가 되려는 자의식을 숨기지 않는 ‘빠롤’이 되게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갈수록 시 비평에 담론 추수적 속성이 점증漸增하고 있는 즈음에, 시를 더 정확하고 풍부하게 읽어내는 안목이 비평에서 더없이 중요하다고 스스로에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저의 비평적 지남指南은 “시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스승의 말씀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설익은 논쟁적 면모보다는 충실한 독해와 예각적 해석을 겸비한 필치가 비평의 핵심이고, 엄정하고도 단정한 시선과 필치가 비평적 요체요 궁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믿음에 기초하여, 비평이 문학에 대한 자의식이자 반성적 행위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늘 충만한 자의식을 잃지 않고 반성 의식이 결여된 맹목적 수사들과 힘겹게 싸우겠습니다.
제게 문학의 ‘힘’과 ‘꿈’을 가르쳐주셨고 지금은 거의 학교를 떠나신 모교의 은사님들께, 다시 한 번 비평의 의미와 역할을 근원적으로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현대불교문학상의 정신과 위상을 깊이 간직하면서, 열심히 긴장하며 읽고 쓰겠습니다.
제 꿈인 가족들과 이 기쁨을 같이 하렵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도 선명하게 제 문학의 도반이 되어버린 우리 한양대학교 국문과 선생님들과 학생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사랑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유성호/ 1964년 경기 여주 출생.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현재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지은 책 『한국 현대시의 형상과 논리』 『침묵의 파문』 외. 대산창작기금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편운문학상 수상.
<평론 부문 심사평>
유성호는 1964년 경기 여주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9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분에 당선한 뒤 활발히 현장비평 활동을 전개하여 김달진문학상·편운문학상(이상 평론부문) 등을 수상하였다. 2002년 교원대학교에 부임하였다가 2007년 한양대 국문과로 옮겨 제자를 양성하는 한편 다수의 문예지 편집위원 및 시평론가로 활약하고 있다.
유성호는 가장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시 평론을 하는 비평가다. 그의 글은 중앙의 유력한 월·계간 문예지에 거의 매호마다 게재되고 있으며, 한 달에 수십 권씩 발간되는 중앙과 지역의 개인시집 해설에서도 그의 글을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비평가로서의 그의 관심은 갓 등단한 신인이나 처녀시집을 상재한 시인, 그리고 중앙에 잘 알려지지 않는 지방 시인부터 한국 시단의 중진·원로에 이르기까지 현대 한국서정시를 총망라한다. 그는 현대시 위기 담론이 횡행하는 현실에 일정 부분 공감하면서, 서정시의 새로운 의미와 역할에 대한 고민을 자신의 문학적 화두로 삼아 전통적 서정시 개념을 극복하고 보다 유연한 확장을 위한 이론적 모색을 지속한다. 그가 엄청난 양의 비평적 글쓰기를 소화하는 것도 한국서정시에 대한 애정과 책임의식이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제19회 현대불교문학상 평론부문 수상작 「‘사랑’과 ‘시’를 결속하며 번져가는 가없는 사유」는 김남조 선생의 신작시에 대한 간단한 리뷰다. 그는 이 비평문에서 김남조 시세계를 관통하는 기본 정조를 ‘사랑’으로 규정하고 그것은 “타자와의 상호소통적 성격을 지닌 따뜻하고 깊은 인생론적 긍정”의 정신으로 해석하는 한편, 최근의 시는 “궁극적 자아 탐구와 심미적 욕망의 불가피한 형식임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표현”함으로써 서정시의 근본정신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처럼 유성호의 비평은 원로시인의 근작시 몇 편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통시적 통찰과 공시적 분석을 적절히 아우르는 균형감각을 특징으로 한다. 그의 비평문이 많은 시인의 관심과 존중을 받는 까닭도 시작품의 내밀한 정신과 언어적 특질 등을 날카롭고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하여 그것에 가장 적합한 해석을 부여하는 능력과 함께 좋은 시를 발굴하여 독자에게 널리 알리려는 문학적 욕망이 적절한 균형감각을 항상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성호 교수의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그의 건강과 문운이 오래 지속되어 한국시의 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권영민, 장영우(심사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