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맞은 8.15 해방
제 2차 세계전쟁이 연합군이 승리하고 1945년 8월 15일 군국주의 일본이 패망 함으로서 한민족 조선은 일본의 36년간의 식민 통치로 부터 벗어나 광복을 맞는다.나이 5세의 어린이라 실은 별로 아는것이 없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기억이 있어 이야기로 엮기로 한다.당 시대의 주인공으로 살았던 어른들의 이야기를 빌린다면 패망 직전 조선 땅에 진주한 일본의 관리나 민간인들은 최후의 결전이라도 치루듯 마구잡이로 우리 민족을 끝까지 괴롭혔다.특히 직접 독약으로 죽이지는 않았지만 미깡(귤)에 독약을 넣어 직접 연관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지고 있다.그러나 히로시마(1945년 8월 6일),나카사끼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어 패망 직전에 가서는 호랑이가 꼬리을 내리듯 기(氣)가 죽어 몸 둘바를 몰라 안절 부절하면서 쥐 구멍 찾는 쥐 새끼 같았다는 이야기다. 우리 고향은 대부분의 자연 부락과 같이 자원 수탈, 강제 징병, 보국대 강제 차출, 정신대 강제 유도등 식민지의 아픈 상처와 고통으로 부터 벗어 나려고 했으나 일제 강점기엔 인적 물적 토대가 거의 바닥난 황무지 상태였으므로 자생 능력이 없는 미개국으로 자립의 능력이 부족했음을 자인할 수 밖에 없다..그러나 1945년 8월 15일 36년간 일본의 강제 통치을 벗어나 해방이 된것이다.
나는 해방전 식량과 기호식품(설탕등)을 아버지께서 배급 받아온 기억과 항상 배가 곺아 밥 달아고 울었던 기억도 새롭다.밥을 먹고는 방안에 가만히 있어라는 호령에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밖에 나가 뛰어 놀면 근방 배가 곺아 밥 달라고 하니까 부모님들에게는 어쩔수가 었었나 보다.어느날 갓단밖 마을 입구에 미군 찝차가 왔다는 소리을 듣고 한 걸음에 뛰어 갔다.처음 본 자동차라 신기하기도 했지만 미국사람을 보는 것이 처음이라 겁도 나고 생긴 모양이 신기하기도 했다.웃 마을 최기도 형님(당시 중학생)이 "Give me match"하니까 성냥 두갑을 던져 주는것을 보고 아프리카 아이들과 같이 두손을 모아 미군에게로 닦아가니 가락지 모양의 사탕 두줄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처음 먹어 본 사탕이라 얼마나 맛이 좋은지 혀 끝에 사탕을 올려 놓고 조금씩 빨아 먹곤 했다. 마을 어른들 께서는 해방이 되어서도 올것이 왔다는 표정이지 환희의 기쁨은 없었다. 36 년간의 물적 심적 資産(자산)이 너무나 빈약하였고 당장 내일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환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나 보다. 태극기를 가진 가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감히 태극기를 갖고 나와 계양할 사람이 없었다고 생각된다.당시 고향의 똑똑하고 통솔력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군으로 강제 동원 되었거나 돈을 벌기 위하여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마을은 그만큼 침체될 수 밖에 없었다.나는 일본식 교육은 한번도 받아 본적이 없다.해방이라는 분위기만 조금 느꼈은 뿐이다.일본 앞잡이 순사들이 닛본도(일본칼)를 옆에 차고 위협을 주면서 쇠붙이,목화솜등을 탈취해 간 무서운 기억이 있었고 진 갈색 설탕(검은 설탕)을 천황님 하사품의 명목으로 배급받은 기억이 생생하다.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들여 온다.
1950년 6월 25일. 6.25 한국전쟁 일어나다.
6.25 한국전쟁은 6.월 25일 일요일 세벽 4시 경에 탱크,대포등의 막강한 군사 장비를 갖춘 북한의 인민군들이 3.8도선 전 지역을 불법 남침함으로 일어난 민족간의 살상 전쟁이다.또한 스타린, 레린의 공산주의 사상과 체제로 세계를 공산화 하겠다는 세계 공산화 운동으로 동맹 세력 소련과 중공의 시도하에 일어난 것이다.결국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와 체제를 문너 뜨리 겠다는 이념전쟁이다.
고향에서 내가 겪은 6.25의 참상을 이야기 하기 전에 포괄적으로 전쟁의 참상을 알아 보기로 한다.
막강한 전력과 잘 훈련된 인민군에 한국군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220 km 떨어진 대전을 25일 만에,40일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고 만다.당시의 인민군 병력은 국군의 2 배였으며 그만도 절반의 병력은 빨치산 소탕 작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실제 침략 인민군을 방어하기에는 불가능 했다.정든집을 뒤로하고 피난의 행열이 대책도 없이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밀려간다. 7월 초 스미스 미군 부대가 참여했으나 큰 성과을 얻지 못하고 인민군의 사기만 살려주었다. 김일성은 미군의 참전은 침략이라 규정 짓고 8월 15일 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린다.낙동강까지 밀린 우리는 학생,해외동포, 특히 여학생까지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자연 발생적으로 유격대(강원도 경찰 등)가 조직되 최후의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는데 온 몸을 던진다. 군번 없는 용사가 탄생했지만 후일 적령기가 되면 군대에 두번 참전하는 결과을 낳기도 한다. UN 에서는 소련이 비록 거부권을 행사 했지만 침략 전쟁으로 약소국을 돕겠다는 자유의사로 UN 군 16개국이 참전하게 되고 의료 봉사국까지 합치면 40 여개국이 6.25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이른다. 미처 피난가지 못한 시민들의 고통은 강제 노력 동원,전쟁 참여,특히 중학생까지 의용군의 명목으로 전쟁터까지 몰고 간다.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총뿌리을 겨누어야 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1950년 9월 15일 멕아더 장군의 인천 작전 20분 만에 월미도가,오후에는 인천이 완전 탈환 되었으며 9월 20일에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울 탈환을 시도한다.한미합동군으로 편성된 아군은 연희전투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1950년 9월 26일 낮에는 한국군 해병대가 중앙청 꼭대기에 감격의 태극기를 꼿는다.계속 전진하는 상황에서 3.8도 분계선을 넘어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이 벌러 지지만 투루만 미국 대통령의 북진이 결정된다.1950년 10월 26일 평양을 함락시키고 압록강까지 11월 두만강까지 진격한 한국군과 UN군은 조국 통일의 문턱에서 50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강력한 저지를 받게 된다.1950년 4월에 김일성과 모택동의 사전 합의에 따라 국경선 근처에 수십만의 중공군이 집결해 있어 병력 투입이 신속히 이루어 진다.한국군과 UN군은 후퇴를 거듭하게 된다.12월의 흥남 부두 철수는 민족의 대 작전이다.아군 15만명 피난민 10만명이 LST 군합으로 철수를 한다.LST 군함이 부산항에 안전하게 도착함으로 흥남 부두 철수 작전의 막을 내린다. "굳세어라 금순아" 가수 현인(고인)의 노래소리가 심금을 울린다. 밀리고 밀린 전투 상황에서 북한군은 전쟁에 자신을 잃고 소련을 통하여 휴전 제의를 한다.UN군과 한국군은 북진을 계속하지만 미군은 휴전에 앞서 38선에서 전선이 고착되기를 원하지만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의 3차 인해전술(군인을 총받이로 삼아 밀고 들어 오는 원시적인 전술)로 서울 탈환 3 개월 만인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빼앗기고 만다.그 유면항 1.4 후퇴로 서울 시민은 고난의 피난길에 다시 오른다.중공군의 총 사령관 펑떠화이는 모택동의 승인하에 연합사령부를 설치해 인민군의 지휘권을 확보한 후 멕아더 장군과 맛상대하여 서울 점령을 하기 위해 진격 진격이다.1.4후퇴의 피난길은 아비규환이다.객차 화물차 구분없이 인산인해 피난민의 짐짝들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최후의 발악이며 몸부림이다.기적 소리가 칙칙 폭폭 울리면 식구들을 확인 하지만 이미 때가 늦은 것을 어찌하리.부산 영도 다리 난간위에서나 만날까..." "이별의 부산 정거장" 노래가 들여 온다.기차를 놓힌 피난민들은 임시교량을 이용해 갈곳도 없으면서 머너먼 피난길에 오른다.1 시간뒤 텅빈 서울을 중공군이 무혈입성한다. 미군과 한국군은 중부 지역을 사수하면서 반격을 위해 재 정비하여 북진을 시도하지만 전쟁은 답보상태로 밀리고 밀리는 상황이 계속된다.1953년 7월 27일 미국,중국,소련,북한과의 협정으로 휴전선이 고착화 되어 영구 분단의 역사가 계속된다.
전쟁 발발 3년1개월 만에 한반도 전체가 페허화 되었으며 남북 군인,민간인 합처 250만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으며 1,000 만명의 이산가족중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가족의 아픔이 언제나 끝날지....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은 6.25의 처참한 페허를 딛고 원조을 받는 국가에서 원조을 주는 13 위의 경제 강국을 이루었지만 애석하게도 6.25를 경험하지 못한 대다수 세대들이 그 참상과 원인을 거의 알고 있지 못하고 이날은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으니 대단히 유감스럽다.
6.25 난리(한국전쟁)는 11세의 어린 나에게도 충격이다.동네 어른들 모두가 피난 가야 되는데 처음 당하는 일이라 당황 스럽기만하다.그러나 인민군이 따발총으로 밀여들어 오면 어떻해던 살기위해 피난을 가야 한다.소문은 머리와 꼬리가 없어 적군이 대구,부산을 함락해 빨갱들의 세상이 됐다는 유언비어가 여기저기에서 들여 온다.전쟁에는 첩보요원이 후방에 깊숙히 침투하여 혼란에 빠진 주민들을 상대로 심리전을 전개하기 때문에 이미 적군의 첩보요원이 경주 지역에도 침투했다고 볼수 있다.앞산에 올라 안강 사방에서는 UN 군의 비행기가 높은 산 중턱에 수많은 폭탄을 투하된다.포항 안강 전투에서는 대전까지 진격한 북한군이 호남지역,대구 왜관(낙동강)지구,포항 안강지구로 나누어 침투작전이 전개된다.모든 방어선이 문어지면 대한민국의 전 영토는 공산 치하의 손으로 넘어 가기 때문에 모든 아군은 최후의 결전으로 막아 낸다.특히 포항 안강 전투에서는 모든 병력을 투입하는 과정에서 대대적인 군번 없는 학도병이 최전선까지 투입한다.매년 6월 6일 현충일에는 경주고 학생으로 안강 전선에서 작렬하게 산화한 60 여명의 위령탑 앞에서 선배님의 넋을 위로한다.특히 우리의 친척인 박병조(대구 거주)씨는 경주 공고 학생으로 적군의 따발총 세례을 받아 갈비뼈에 총알 두개가 밝혀 있었지만 후에 정식으로 군에 입대하기도 한다.보문어른(당숙)께서도 오른쪽 팔에 총상을 입고 지금까지도 고통이 많으시다.6.25 한국 전쟁 중에 직접 참전한 사람은 박씨 5명,최씨 3명,고씨 1명 으로 사망 1명, 부상 1명(당숙)이다.코메디 같은 실화 한가지을 삽입하자면 최형도씨는 이미 제대한지가 오래되었는데 본인의 백골을 전달 받고는 백골을 던져 버렸다는 것이다.1953년 7월 17일 휴전 이후 입대한 사람은 상당이 많은데 각종 안전 사고로 당숙 2명 외 1명이 순직한 것으로 기억된다.당시 영장이 나오면 문중에서 씩씩한 군인이 되어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숙연한 자리를 마련한다,정각(요수재)에 집안 어른들이 모인 가운데 몸조심을 거듭 강조하면 마음 약한 징병자(거의 우리의 핏줄)는 눈물을 흘리며 방 바닥만 응시한다.가슴에는 남북통일,무운장구,무사귀환등의 글귀가 큼직하게 쓴 가슴 띠가 가는이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빈다.아버지는 흰 바지 저고리와 두루막, 흰 고무신,중절모을 쓰고 아들을 앞세운다.갓안 밖에는 동네 어른들,어머니,아지매,손녀 딸래,동생등 많은 사람들이 씩씩한 장정에게 무시하기를 빌면서 눈물을 흘린다.동구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면 배웅이 끝난다.3년 후에 돌아 오겠노라고 소리없는 메아리가 멀리서 들여 온다.피난민의 행열은 끝이 보이지 않은다.집집 마다 모든 공간은 피난민의 숙소가 되고 큰 무쇠 솥에는 보리밥이 가득하다.피난민 끼리는 공동 취사로 서로 협조적이다.양식 구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배푸는 량이 점점 적어진다.배푸는 대사(큰일)는 나가 담당인데 너무 많이 준다고 어머니로 부터 꾸중이 대단하다.어느 때는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한다고....나는 무척 피난을 가고 싶어 했는데 아버지는 꼼짝도 않은다.온 식구가 불평을 하니까 장맛비를 맞으며 겨우 시부자리 우리 논을 휭하니 한 바꿰 돌고는 되 돌아 왔다.소 등에 실은 피난 봇따리는 비을 맞아 천근이다.우리 집에 새 주인이 입주하고 있다.한시간여 사이에 피난민이 무단으로 점령해 버린 것이다.옥신 각신 끝에 우리 집을 도로 찾는다. 장맛비는 주루룩 주루룩 계속 내린다.
전선은 소강 상태로 휴전선을 두고 공방이 장기전의 형상이다.휴전후 어느 겨울에 사상 최대의 폭설이 내려 최 전방의 임시 막사가 눈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문어져 수많은 군인이 죽었다는 보도를 접한다 전국의 부머님들의 가슴을 조이게 한다. 혹시 우리 아들이.... 아니 우리 조카가.... 어디서 구했는지 고씨 어머니가 신문을 갖고 와서 우리 아들 고현기 이름 있는냐고 찾아 보라는 것이다.무소식이 희 소식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이름이 없으니 고현길 형님은 살아 있는 것이다. 팔주어른(당숙) 이 휴가 오는 날에는 동네가 웃음 바다다.갓안으로 의기 양양한 당숙 어른은 개선 장군 모양이시다.날신한 몸매 였으나 지금은 아니였다.과장된 언어로 표현하자면 바지,웃도리를 몆벌씩 입고 휴가를 왔다는 것이다.휴가 갈 때 보자기에 싸서 가지는 못해도 몇벌은 입고 갈수있다니 알수 없는 일이다.친척들이 저녁이면 한방에 둘러 앉아 군대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기압 받은 이야기는 조금 하면서도 쫄병들 혼냈다는 이야기를 하고서는 옆 사람을 보고 피씩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단히 순진하고 솔직한 당숙(고인)에게 존경으로 답하고 싶다.
지금 보문다지 남쪽(개울 남쪽 고터)에는 엑스포 행사가 열리고 있는 곳에 미군 부대가 진지를 구축한다.차량, 군 막사 ,훈련장, 각종 무기등을 갖춘 부대로 대 규모다.겨울 방학이면 형들 따라 거지와 같이 막사 주변이나 쓰레기장 등을 배회하면서 갖고 싶은것 모구 보자기에 담아 집으로 가져 온다.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M1 탄창에 실탄이 삽입된 것과 소고기 켄등이다.실탄을 덕화어른(당숙)에 가져가면 직접 제작한 총에 실탄을 장진해 방아쇄을 당기면 탕 소리을 내면서 총알이 하늘로 날아가는 재미가 솔솔했고 맨땅에 실탄을 밖아 넣고 철갑탄속에 있는 뾰족한 것을 돌로 내리 치면 땅속에서 쾅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푹꺼지면서 연기가 무럭 무럭 올라 오는 놀이가 재미가 좋았다.미군 진지를 돌아 다니면서 빈캉통을 슬슬 차면 그 중에서 진짜 쇠고기 켄을 발견할 수 있다.아버지 어머니는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꾸중 하셨지만 쇠고기 켄을 잡수실 때는 아무 말씀도 없었다.하루는 수류탄을 주어와서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났지만 몇일 후 형들과 터트려 보겠다고 한수골 입구 개울 낭떠리지에 수차례 던저 보았으나 결국 터트리지 못한다.핀을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형들 중 군대에 한사람만 이라도 단녀 왔다면 멋있는 전쟁 놀이가 되었을 것인데..... 죽지 않아 다행이다.당시의 어린이들은 주로 짚단 풀어 깔아 놓고 고생받기(레스링의 원조)와 재기 차기,떼기 따먹기,마때 치기,몽둥이 들고 편 갈라 전쟁하기,눈온뒤 토끼 사냥하기등 놀이 문화가 있었으나 미군이 들어온 후 부터는 놀이 문화가 큰 변화가 온다.위험한 장난감이 전부다.정말 죽을 번했던 사건은 M1총알을 논둑에 올려 놓고 불을 피우면 총알이 터지는 것인데 펑 소리와 함께 논바닥에 곤두박질한 적이 있다.그놈의 총알이 앞으로만 가는 줄 알았는데 뒤로 나의 오른쪽 앞 어께를 친 것이다.뇌관의 파편에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맞은 어께에 엽전만한 자욱에 피멍이 있었지만 부모님 모르게 오래토록 아픔을 견디느라 고생이 많았다.박청일(7촌)아재는 앞에서 총알 터지는 것을 보는 순간 내가 논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는 뛰어 왔지만 아재는 더 가관이다.바지 가랑에 총알이 스쳐 바지에 구멍이 난 것이다.바지 태워 먹었다고 꾸중 많이 들었지만 총알 을 맞았다면 생명이.....
"Wash Wash Ok" GMC 한대 세차하는데 미국 담배 말보루 10 갑.세차를 할줄 모르지만 형님 아제들이 같이 하자기에 물만 마구 뿌리는 것으로 Ok 다. "아버지 한 갑은 내가 할래요" "이놈아 뼈가 녹아 않된다"
우리집 나의 비밀 창고에는 각종 총알 껍대기와 탄창통등 희귀한 물품들이 태산이다.총알 껍대기 따 먹기에 해가 지는줄 모른다.미군 참전 이후 병기로 인한 안전 사고가 곳곳에 빈번히 발생한다. 불량품 섞유를 사용하다가 화상을 입은 나의 6촌 여동생은 우울한 세상를 원망하고 생을 마감한다.당시 고향 아지매들과 누나들은 빨강 치마나 색갈있는 옷은 입지 말라고 문중 어른들의 말씀이다.껌둥이들이 왔어 덮치면 큰일 난다고 몸조심하라는 것이다그러나 우리 문중에 까맣아기는 한명도 태어난적이 없다.
광복과 한국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한일간에 국제적 무역전쟁이나 외교 전쟁은 그렇다 치드라도 독도 영토 문제와 정신대 문제는 원인이나 과정을 보면 비록 광복은 했지만 해결점은 지금도 진행형이다.독도의 영토문제는 지역 분쟁을 일으켜 국제 여론까지 끌고 가자는 속셈이다.정신대 문제는 인륜의 문제인데도 가슴에 와닫는 진정한 사과는 켜녕 정권이 바뀔 때 마다 내용에 차이가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한국전쟁은 휴전 상태이지 전쟁이 완전 끝난 것이 아니다.언제 어디서 뇌관이 터질지 알수 없다.휴전후 북측은 수많은 국지적 침략을 감행하여 민간인과 군인의 수많은 아까운 생명을 았아갔다. 또한 북한은 사회를 혼란 시켜 적화통일 하겠다는 것이 그네들의 속샘이니 안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작금의 우리 해군함정 폭파 사건과 연평도 주민에 대한 포격 사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우리 자식들을 위해 기성 세대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첫댓글 실감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요새 신세대들이 실감이 나야 할긴데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야기라고 치부 할 테지요. 그런 고비고비를 이겨내고 오늘이 있은게 아닙니까
형님이 장교 출신이시라 안보관에 대한 말씀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