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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2일 주일대예배 설교문 / 고전 13장 / 사랑의 예수님
할렐루야!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도구와 지체:보통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는다고 하면 주님의 도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 유명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문>에도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기도하고, 도구로 쓰임 받는다는 느낌이 들 때 주님께 감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요... 성경 어디를 봐도 주님은 우리를 도구로 쓰신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도구는 쓰다가 필요 없으면 창고에 집어넣든지 버리든지 하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우리가 주님과 한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 자신의 주님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라는 것입니다.
필요 없다고 버릴 수 없습니다. 다 썼다고 이제 그만이 아닙니다. 영원히 주님과 붙어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요즘 와서 제 다리에게 감사할 때가 많습니다. “이 무거운 몸 벌써 50년 동안 들고 다녔으니 니가 고생이 많다.” 그러면 이 다리가 말합니다. “이 몸에 붙어 있으니 그냥 살아야죠.”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떨어져 나가서 저도 머릿속이 하얗습니다. 그래도 이 만큼 붙어있는 것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발톱이 중요한 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제 아들이 내성발톱으로 앓았는데 같이 병원을 다니면서 발톱하나도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습니다. 내성발톱은 발톱이 옆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장판을 레이저로 죽이는데 수술의 90%가 실패랍니다. 레이저로 죽여도 또 살아나고 또 살아나는 것이 내성발톱입니다.
모든 지체가 다 소중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도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소중한 지체다.
주님이 이렇게 우리 인생보고 지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누구도, 인간이라는 생명을 가진 자는 아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다른 말은 아낀다는 것.
즉 죄인인 인간을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책에서 가장 중요한 한 구절을 뽑으라면 모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요한복음 3:16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세상은 구체적으로 우리 인간존재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냐면 천사가 부러워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천사는 수종드는 종일 뿐이고요... 사탄은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 악신일 뿐입니다. 사탄도 천사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중 자유를 가진 온전한 인격체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사랑을 받을 권위를 가졌습니다. 비록 죄가 인간에게 들어와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였더라도 저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구원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를 친구로 여기시고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기까지 사랑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읽었습니다. 사랑장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 사랑장을 ‘예수님의 초상화’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초상화. 참 고급진 표현입니다. 성경과 깊은 교제를 나누면 이렇게 과감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상화. 즉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으면 예수님의 얼굴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5절에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보세요. 어린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옵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안드레가 이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어린아이가 가지고 온 귀한 선물을 이렇게 폄하합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에게 잘못했다고 성내지 않습니다. 그저 보잘 것 없는 것 같지만 그 정성스러운 선물에 축복하십니다. 5천명이 다 먹고 12바구니에 남았습니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요한복음 8장에 음행하다 잡힌 여인입니다. 모두다 사람을 죽이려고 돌을 들었을 때, 예수님은 땅 바닥에 글을 쓰십니다. 지금 사람들은 그 여인을 정죄하면서 돌로 사람을 쳐 죽이려 하는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이 여인만 잘못입니까? 남자는 어디 갔습니까? 저들은 시대가 암울하니 한 마리의 희생양을 만들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저들은 폭도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들을 바라보고 곧 바로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하시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까요? 사람을 죽이려는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이 돌을 예수님에게 던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폭도가 되어 성내는 사람들에게 맞짱을 뜨지 않으시고 대신 땅바닥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글을 쓰고 계셨습니다. 뭐라고 썼을까요?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죽이려하는 폭도들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기 자신을 볼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돌을 들고 높아진 마음을 낮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낮아졌을 때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싸움이 일어나는 원인은 자기가 옳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안 보일 때 숨 한번 크게 쉬기만 해도 싸움이 잦아들 것입니다. 예수님은 폭도들에게 불쌍하다는 연민의 마음으로 대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의 예수님이 이제 죄인, 간음한 여인을 바라봅니다. 잘못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여인을 받아주시면서 정죄치 않으시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용서하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십자가상에서 온갖 수모와 고난을 다 당하시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셨습니다.
그러므로 4-7절 말씀에서 사랑을 빼고 예수님을 읽어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예수님으로 바꿔서 함께 읽어봅시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3절의 사랑의 우월성, 4-7절의 사랑의 본질, 8-13절의 사랑의 영원성
놀라운 것은 성경과 관계없는 세상의 많은 학자들까지도 성경의 사랑장인 본문이 사랑의 근본개념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떠난 사랑은 유사사랑이다, 변질되고 부패된 변태적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우월성인 1-3절에 한 걸음 더 나가보겠습니다.
먼저 사랑에 동그라미를 쳐봅시다. 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어떠한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것만 깨달아도 이미 예수님처럼 사랑의 사람이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합시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 하나만 깨닫는다면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임하므로, 자기의 삶에 아주 작은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저 머리로만이 아니라 이 말씀을 가슴으로 마음으로 깨달아지는 은혜가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마가복음 10장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만난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 앞에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사람은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옳은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선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갑자기 그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답하십니다.
마가복음 10: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이것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렇게 계명을 지키며 사랑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청년은 자신 있게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이 계명들은 다 지켰습니다.” 청년은 자신이 영생을 얻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마가복음 10:21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라고 하시며 이웃을 향한 그의 사랑을 시험하셨습니다. 결과는 어떠했나요? 안타깝게도 그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마가복음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는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에게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이웃보다 돈을 더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부자 청년이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요? 부자 청년과 우리는 모두 ‘사랑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그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참으로 부끄럽기만 합니다. 저는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를 평생토록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이유가 있었지요? 제가 얼마나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는지 저희 아버지께서 하루는 순욱아 기독교는 사랑아니냐? 왜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저도 모르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기독교는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예요. 능력도 있고, 전도도 있고... 순교도 있습니다. 말씀도 있고 정의도 있습니다.
저는 당시만 해도 큰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여러 은사와 능력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껏 저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제 안에 사랑이 없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사랑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항상 사랑을 잊어버리고 사랑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붙잡고 살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한다는 것은 정말 특별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는 일들... 남을 도울 정도의 능력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순교도 생각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사실, 사랑이 아닌 다른 것들이 엄청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안에 사랑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아 정말 내 안에 사랑이 없구나. 아버지의 내민 손을 뿌리치면서...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저는 사랑하지 못한 것에 참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 사랑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너무 혼란스러웠습니다. 사랑이 없다는 것을 문제로 인식했다고 해서 제게 갑자기 사랑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다 저의 사랑 없음에 대해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성장과정 속에서 부모님과의 관계, 가정환경이나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대안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내 안에 사랑이 없는 이유를 찾는다고 사랑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바로 죄인 된 저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다른 사람보다 보다 더 사랑이 많은 것 같은 사람과 사랑이 부족한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우리 안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 안에 사랑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주님 앞에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시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우리의 삶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랑 외에 다른 것을 계속 얻으려고 애쓰는 것이 또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함께 이 질문 앞에 서보기를 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믿는가?’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이 없으면’ 이라는 말 대신 ‘예수님이 없으면’이라는 말을 넣어도 말씀은 그 의미가 같습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아무 것도 아니지요. 결국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부자 청년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마가복음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을 사랑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이 자기가 가진 재물과 사랑 중 재물을 택하여서 예수님을 떠나줄 아셨습니다. 그에게 사랑이 없음을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없는 죄인’, 정말 조건적으로 밖에 사랑할 줄 모르고 자기 밖에 모르는 우리를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사랑 없음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적인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 없는 죄인이기에 우리 스스로에게는 그럴 수 있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사랑의 주님이 우리 안에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렇기에 이제 그리스도인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분명한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고린도후서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그분의 사랑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오를 새롭게 합시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로다.” 우리의 삶에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을 하시기 원합니다.
4-7절 말씀은 사랑의 본질입니다. 이 구절에서 ‘사랑은’에 내 이름으로 바꾸어봅시다. 말씀처럼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을 다하셔서 예수님의 사랑이 가득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동문감리교회 강순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