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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화진포에서
설악산을 오른쪽에 끼고 진부령을 넘는다. 왼쪽 향로봉 자락이 한 해를 거둬들이고 있다. 기초화장을 넘어 노릇노릇 울긋불긋한 기운이 확연하다. 전주들이 간혹 보인다. 저 전주를 따라 향로봉에 가던 일이 새삼스럽다. 산길에서는 미처 몰랐던 모습들이다. 올려다보는 산줄기가 굽이굽이 돌아서며 절벽을 이루듯 불쑥 일어선 봉우리들이 물들어가며 늠름한 위용을 뽐내면서도 곱상하기만 하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고성으로 접어들며 이미 추수가 끝난 곳이 많다. 그러나 아직 햇살이 따스하기만 하다. 이제 간성에서 오른쪽에 동해바다를 두고 북진을 한다. 거진이다. 연이틀 너무 바람이 세차 배들이 내항에 묶였다. 때문인가 흥청거려야 할 포구가 너무 조용하다. 만선의 깃발은 고사하고 드나드는 어선조차 없는데다 오가는 관광객마저 드물다보니 유령의 도시 같다. 어시장에서 회를 떠들고 식당을 찾아들었지만 분위기가 썰렁하니 괜스레 눈치가 보인다. 따지자면 일기 탓에서 시작되는데 순전히 내 잘못인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래도 싱싱한 안주에 소주를 쏟아 넣으니 기분이 업 된다. 흥얼흥얼거리면서 대진으로 향한다. 화진포가 들어온다. 바다를 끼고 야트막한 산자락 끄트머리에 길일성별장을 찾는다. 이곳이 6.25전에는 북한 땅으로 김일성이 하계휴양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문외한이 보아도 주변의 경관이 정말 빼어나다. 해방 이후 조림하였다고는 하지만 금강송이 미끈미끈한 다리에 몸통을 뽐내며 꽉 들어차 있다. 소나무 숲이 무려 500만평 규모다. 바다는 코발트빛에 아주 맑고도 푸르른 물결로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앞쪽은 금빛 모래사장 해수욕장으로 이국적 풍경화를 만든다. 같은 단지 내에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이기붕의 별장도 있다. 좀은 초라해 보이면서 바다를 돌아앉아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는 떡잎 하나 없이 칙칙한 해송보다는 역시 조선소나무로 몸통에 불콰한 빛깔을 띤 금강소나무다. 이파리는 푸르다 못해 검은 빛이 감돈다. 숲은 하늘을 가릴 듯 뒤덮어 햇살마저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한다. 산책로를 따라 거닐어 본다. 깊은 사색에 빠져들듯 싶지만 시간이 많지 않다. 잠시 접고 이웃한 이승만별장으로 향한다. 김일성별장에서 불과 600여m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양쪽이 석호(潟湖)로 둘러싸였다. 석호는 바닷가에 사주(砂洲) 또는 산호초 등에 의해 바다와 분리되어 있어 비교적 낮고 잔잔한 물이 채워진 호수를 말한다. 이곳은 바다에 가까이 있지만 바다보다는 호수를 끼고 역시 금강소나무 숲에 자리를 잡아 새로운 맛이 난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시대에 김일성 이승만 이기붕 3인의 별장이 이곳 화진포에 모여 있는 것만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곳임을 눈치 챌 수 있다. 화진포는 원래 해당화가 많이 피는 곳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절경을 이룬다. 김일성별장이 있는 콘도에 숙소를 정했다. 우측으로 김일성 별장이 있고 좌측으로 이승만 별장에 뒤쪽에는 이기붕별장으로 미끈미끈한 금강소나무 숲이 있고 앞쪽에는 화진포(花津浦) 앞바다로 연신 물결이 들락거리며 으르렁거린다. 하늘에는 8월 그믐에 가까워 달은 없지만 수많은 별들이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리고 있다. 마치 축제라도 즐기고 있지 싶은 밤이다. 그야말로 별의 별 생각에 별의 별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 별 볼 일 없는 요즈음 뭔가 그래도 별 볼 일이 생겨나지 않나 싶어진다. 섬이 하나 떠있다. 거북섬이란다. 거북을 닮았다 한다. 참으로 절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항간에서는 감포 앞바다에 신라의 문무왕능이 있다면 이곳 화진포 앞바다에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능인 거북섬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왈가왈부할 뿐 아직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마련하지 못해 일부에서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세상을 삼킬 듯싶은 파도의 그 억센 저항도 모래밭에서는 약해지나 보다. 모래밭에 타협하듯 매달려 사르르 녹아들고 모래밭은 한 치도 물러남이 없이 그들의 횡포를 거뜬히 막아낸다.
저토록 소란을 떠는 바다는 하얀 거품을 물고 무슨 하소연이라도 하는 것일까. 때로는 수십 수백 명씩 겹겹이 어깨동무에 스크럼을 짜고 뭍으로 돌진하며 시위하느라 거품을 토해내지 싶다. 그러나 금세 덮칠 듯 그 당당하고도 위엄 넘치던 기세는 거짓처럼 눈 깜짝할 틈도 없이 고꾸라져 사그라진다. 하지만 중단 없는 전진처럼 지칠 줄을 모르고 끈질기고도 집요하게 다시 달려들기를 반복한다. 밤이 깊어갈수록 말 달리는 소리에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전쟁터 아비규환까지 온갖 저들의 한마당 축제다. 그런데 하늘에는 한눈에도 큰 별 작은 별 좀은 흐릿하니 보일락 말락 한 것들까지 쏟아져 나와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너른 하늘이 빈틈없이 별들로 들어찼지 싶다. 저 모래밭에 모래만큼이나 많은 것일까. 저토록 많은 별들은 깜빡거리며 무슨 의사소통을 하자는 것일까. 하지만 바다와는 달리 차분하면서 아주 조용하다. 바다가 시끄러울수록 하늘은 더 고요하지 싶다. 그런데 뒤쪽 소나무 숲이 뾰족한 이파리를 매개로 별바라기라도 하는가 보다. 가끔 감로수라도 내려주면 대롱대롱 옥구슬을 만든다. 식수는 비무장지대 계곡에서 끌어온 청정수라고 한다. 꿀꺽꿀꺽 시원하니 아주 물맛이 좋지 싶다. 통일전망대까지는 불과 15km로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아주 가까운 곳이지만 그런 느낌은 전혀 없다. 여기에 50~70년 공간을 넘어서 남북의 저명인사가 누웠던 곳 바로 이웃에 내가 누워있는 것이다. 물론 생각은 다르겠지만 그들이 보았던 바다를 보고 그들이 들었을 바닷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보고 숲을 보고 있는 것이다. 출렁이는 바다와 생각이 깊어지는 고요가 공존하며 밤은 자꾸만 깊어 간다. 아침이 밝았다. 그 많은 별들은 하나도 남음 없이 잽싸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해안에서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 돌아온다. 바다는 저녁보다 파도가 잔잔해졌지 싶다. 저 멀리 시퍼런 바다를 건너 수평선이 그려졌다. 그곳에서 하늘이 바다에 몸을 기대고 있지 싶다. 해산이 임박하면서 점점 붉어진 동녘하늘이다. 수평선에서 새빨간 혓바닥 끝이 날름거리듯 내민다. 조금씩 밀어 올린다. 잠시 구름이 가리는가 싶더니 아주 큼직한 둥근 불덩어리가 솟아올랐다. 잠시 후 부신 햇살이 쏟아지며 하루를 열었다. 출렁거리는 물결 위에 금빛 징검다리를 놓고 햇살이 나를 향해 강한 조명을 비추듯 성큼성큼 건너온다. 모래밭을 걸어가면 그 징검다리도 따라오면서 비추지 싶다. 저마다 축복의 아침이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이슬을 머금은 소나무 숲은 더 푸름에 젖어있다. 김일성별장 옆으로 많은 고깃배들이 조업하고 엊저녁 등대처럼 멀리 보이던 경비정인가 큰 배도 보인다. V자가 왼쪽으로 기운 형태로 새들이 부지런히 날아간다. 생기가 감도는 화진포의 아침이다.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곳도 있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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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여행으로도 너무나 좋은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