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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1] “내가 조선의 여권운동자 시조가 될지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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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2018. 11. 27.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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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현대사 사건과 인물
“내가 조선의 여권운동자 시조가 될지 압니까?”
- 나혜석과 최린
탁암 심국보_편집주간
올해 초 1월 29일, 통영지검의 검사가 법무부장관을 수행하는 검사 안태근에게 성추행당한 사건을 폭로했다. ‘미투’ 운동의 시발점이 된 서지현 검사는 최근(11월 초) 내부고발자 후원 시민단체인 ‘호루라기 재단’이 제작한 팟캐스트 ‘호루라기를 부는 사람들’에 출연해 “검사로 임관한 날부터 거의 매일 성추행과 성희롱에 시달렸다”라고 폭로했다. 같은 팟캐스트에 출연한 임은정 검사도 “하도 성추행 사례가 많아서 일일이 다 문제 삼으면 검찰청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임 검사와 서 검사는 “회식자리는 물론이고 차 마시는 자리 등 일상적인 자리에서도 성추행과 성희롱은 다반사로 일어났다”면서 “정말 참다 참다 못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폭로를 한 것인데 오히려 검찰에 망신을 줬다는 비난만 돌아왔다”고 말한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폭로가 계속되는 것은 내부적으로 희망이 없기 때문이라는 뼈아픈 지적도 계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시작된 미투 운동으로, 시인 고은, 연출가 이윤택, 배우 조민기 등 유명 인사들이 성폭력 가해자로 폭로되었고, 일파만파로 많은 부문에서 ‘미투’가 여전히 확산 중이다. 해월신사 최시형은 여성의 수도를 장려하며 말하였다.
“부인 수도는 우리 도의 근본입니다. 이제로부터 부인 도통이 많이 날 것입니다. 이것은 일남구녀一男九女를 비한 운이니, 지난 때에는 부인을 압박하였으나 지금 이 운을 당하여서는 부인 도통으로 사람 살리는 이가 많을 것입니다.”
일남구녀, 남자 하나에 여자 아홉! 봉건시대 남성들이 축첩하는 것을 이른 말이 아니다. 동학에서의 도통, 즉 도를 통하는 것은 남자 한 사람이 도통할 때 여성은 아홉의 비율로 도통을 한다는 말이다. 동학에서 여성의 지위가 예전과는 달리 높다는 것을 강조한 해월신사의 일남구녀란 말씀은 파격적이지만, 미투 사건을 통해 21세기 대한민국은 여전히 남존여비의 고루한 습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새삼 느끼는 심정은 암담하다.
평등은 동학에서 내세우는 절대가치이다. 평등은 단순히 양반, 상놈 사이의 신분 차별을 없애는 것만이 아니다. 수천 년 이 땅에서 고통받아온 여성을 법적으로 보호하고, 이를 통해 양성평등 사회를 만드는 것도 당연히 평등의 가치에 포함된다. 일남구녀라는 신사의 말씀은 그냥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이글에서는 일제시대에 일어난 나혜석과 최린의 사건을, ‘피해자’인 나혜석을 중심으로 알아본다.
일남구녀一男九女, 나혜석
조선시대에 태어난 나혜석(1896∼1948)은 예술가, 문필가로서 이름을 날렸지만 무엇보다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으로 각인된다. 최초의 여성 화가를 시작으로 최초 여성 소설가, 서울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최초의 화가, 최초 부부동반 세계일주 …. 그에게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특히 나혜석은 폐쇄적인 가부장적 유교 이념이 여성만의 순종적인 삶을 강요하던 시대에서 “정조는 취미다”라고 외친 인물로 유명하다.
수원시에 조성된 나혜석 거리
수원 ‘큰 대문 참판댁’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진명여고 최우등 졸업 사실이 ‘매일신보’에 사진과 함께 실릴 정도로 이미 하이틴 스타였다. 1913년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의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유학 이듬해 동경의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에 기고한 최초의 글 「이상적 부인」에서 ‘양부현부良夫賢父의 교육법’이 없는 ‘양처현모의 교육법’은 ‘여자에 한하여 부속물 된 교육주의’라며 비판하는 것으로 페미니스트의 삶을 시작한다.
1916년 첫사랑 최승구가 병사한 빈자리에 다가온 남자가 상처한 기혼남 김우영이었다. 교토제대생 김우영은 도쿄를 오가며 열심히 구애했지만 당시 나혜석의 관심은 남성과의 결혼이 아니라 ‘여성’과 ‘민족’에 있었다. 나혜석은 1917년『학지광』에 게재한 「잡감―K언니에게」라는 글에서 “내가 여자요, 여자가 무엇인지 알아야겠다. 내가 조선 사람이오, 조선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알아야겠다”라고 썼다.
이런 의식을 가진 나혜석이 3·1혁명에 적극 참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3월 5일 이화학당 학생들의 만세 사건에 관계된 혐의로 체포되어 5개월 간 옥고를 치렀는데, 이 사건은 그에게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켰다. 1920년 1월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공제』창간호에 실은 판화 ‘조조早朝’에서 열심히 노동하는 남녀 농부들 위에 떠오르는 태양은 민족 독립에 대한 나혜석의 갈구를 담고 있다.
그러나 나혜석은 민족독립 운동보다는 김우영과 결혼을 택했다. 1920년 4월 그녀는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前室 딸과는 별거하게 해 줄 것,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등의 조건이 받아들여지자 조선을 떠들썩하게 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듬해 1921년 3월 나혜석은 만삭의 몸으로 첫 여성 개인전람회를 열었는데, 매일신보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보도할 만큼 큰 성공을 거뒀다.
같은 해 9월 나혜석은 일본 외무성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는 김우영을 따라 만주로 이주했다. 이듬해 3월부터 안동현 태성의원 내에 ‘안동현 여자야학’을 설립해 교육사업에 나섰다. 당시 만주에서 생활하던 조선인들의 삶, 특히 여성들의 생활은 더욱 열악했으며 교육의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여성들을 상대로 나혜석은 야학을 통해 여성들의 의식을 깨우치는 데 주력했다. 또한 부영사 부인의 직위를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박태원이 「약산(若山)과 의열단」에서 “의열단에 대하여 은근히 동정을 표하여 온 사람의 수가 결코 적지 않으며, 그 가운데 여류화가로 이름이 높던 나혜석이 있다”고 쓴 것이 이를 말해준다.
6년간의 부영사 생활을 마친 나혜석 부부는 1927년 6월 구미일주에 나서는데, 이 소식이 언론에 실릴 정도로 화제의 여행이었고 세계여행이었다. 경성역을 출발해 만주와 시베리아를 거쳐 그녀는 한 달 만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나혜석은 야수파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그림 연구를 하는데, 이 때문에 귀국 후 야수파와 입체파, 후기 인상파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최초의 근대 여성화가로 승승장구했던 나혜석의 인생에서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때는 1927년 그녀 나이 32세 때, 파리에서 만난 최린 때문이었다.
나혜석과 최린의 만남
최린(1878~1958)은 1919년 3.1혁명 무렵 종교계와 교육계 지도자들과 접촉하며 뛰어난 추진력으로 상호갈등을 조정해 가면서 33인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서 서명과 발표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다. 민족대표 33인 중 42살로 최연소였던 최린은 민족의 ‘혜성’으로 부상하였다. 3.1혁명으로 당일 일경에 체포된 최린은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21년 12월 22일 일제의 배려로 가출옥한다.
조선에서는 일제의 정치적 차별 대우를 철폐하고 자치를 실시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최대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최상의 대안이라고 주장했던 최린의 정치노선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3.1혁명 이후 새로 부임한 사이토 총독은 ‘문화정치’의 전위대로 최린을 이용하게 된다. 최린의 자치에 대한 신념은 1926년 몸소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 인사를 상대로 자치운동을 전개할 만큼 확고했다.
1927년 ‘약소 민족의 현황을 살핀다’는 명목으로 1년여에 걸친 외유를 떠났던 최린은 프랑스에서 나혜석과 만나 염문을 뿌리게 된다. 파리에서 최린과 만남은 나혜석의 삶을 풍랑으로 몰고 갔다. 최린과 친형제처럼 가까웠던 김우영은 법률공부를 위해 베를린으로 떠나면서 나혜석을 돌봐줄 것을 부탁하는데, 두 명사는 통역을 대동한 채 자유와 낭만의 도시 파리를 쏘다녀 파리 한인 사회에 화제를 뿌렸다. 1928년 천도교인의 성대한 영접을 받으며 귀국한 최린은 강력한 1인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천도교 ‘도령’에 취임하게 된다.
1년 반에 걸친 러시아·유럽·미국 여행은 화려했던 나혜석 인생의 종지부를 의미했다. 나혜석이 1929년『별건곤』과 인터뷰에서 “(최린을)…나도 퍽 흠선欽羨했다”고 밝힌 것은 의혹을 증폭시키고 김우영과 관계를 악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나혜석은 유럽 일부에서 유행하던 ‘실험 결혼론’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조선은 유럽이 아니었다.
나혜석과 자녀들
마침내 1930년 11월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이혼만은 하지 말자”고 애원하는 나혜석의 간청도 소용없이, 김우영은 간통죄로 고발하겠다고 위협했고 나혜석은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다.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에서 자신에게 귀책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혜석은 재산분할을 요구하였다. 일반적으로 이혼 과정에서 여성들이 위자료를 요구하는 경우는 심심찮게 볼 수 있었지만 이는 대부분 남성에게 귀책사유가 있어 이혼하는 경우로, 이때 여성들이 요구하는 위자료는 피해보상의 성격이 강했다. 이에 반해 나혜석은 엄연히 자신의 불륜 때문에 이혼을 ‘당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재산형성에 있어 자신이 기여한 바를 주장하며 이에 합당한 재산분할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혼 즉시 나혜석은 아무것도 없이 몸만 달랑 집에서 쫓겨났다. 결혼 후 모은 재산에 대해서도 아무런 권리도 행사할 수 없었다. 3남 1녀의 어머니였건만 아이들조차 만날 수 없었다. 나혜석이 챙긴 것은 ‘2년 후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와 500원짜리 논뿐이었는데, 김우영은 이혼 4개월 만인 1931년 3월 재혼함으로써 서약서를 비웃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모든 것을 빼앗긴 상태에서 이제 나혜석에게 남은 것은 그림밖에 없었다. 그 동아줄을 잡기 위해 나혜석은 금강산 해금강까지 가서 30~40점의 그림을 ‘전투적으로’ 그렸다. 그는 1931년 제10회 조선미전에서 특선하고, 이 작품이 다시 일본의 제12회 제국미전에서 입선하는 등 당당히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으나 생활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1932년의「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라는 글에서 사람과 돈과 세상의 세 가지가 무섭다고 쓸 정도였다. 1933년 2월에는 종로구 수송동에 ‘여자미술학사’를 열어 생활타개책으로 삼으려 했으나 이 역시 쉽지 않았다.
집에 불이 나 10여점밖에 건지지 못하는 불행도 닥쳤고 이때의 충격으로 병이 나 왼팔에 수전증이 생겼다. 화가에게 수전증은 치명적이다. 병 때문인지 ‘스캔들과 그로 인한 이혼’이라는 사회적 질시 때문이었는지 나혜석은 1933년에 열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처음으로 낙선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의 공격이 점점 더 심해졌던 이때에도 나혜석은 여전히 씩씩했다. 1934년 여름 이혼한 김우영 앞으로 띄운 ‘이혼 고백서’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혼 고백서를 통해 나혜석은 자신의 반생과 특히 연애·결혼·이혼 과정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 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에게 정조를 유인誘引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愛好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이혼고백서’는 격렬한 비난을 불러왔다. 전근대적인 남성중심사회에 길들여진 남녀 모두가 나혜석에 대한 비난에 가세했다.
나혜석은 이런 비난에 개의치 않고 1934년 9월 변호사 소완규를 통해 최린을 고소한다. 최린이 파리에서 강제로 정조를 빼앗았으며 김우영과 이혼할 때 일체 생활을 돌보아주겠다는 약속을 이행치 않고 있다는 고소였고, ‘위자료 청구소송’을 공개적으로 낸 것이었다.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나혜석의 이 같은 행동은 남성중심사회를 향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되었다. 당연히 그는 거센 사회의 비난에 직면했고 결국 점차 사회로부터 소외당했다. 소 취하의 조건으로 최린에게 수천 원을 받은 것도 당한 여자가 오히려 쉬쉬하던 당시에는 획기적인 사례였을 뿐이었다. 화가로서의 재기를 꿈꾸며 어렵게 열었던 1935년 10월의 개인 전람회가 별 반향을 얻지 못했다. 이후 나혜석의 삶은 극도의 신경쇠약과 외로움, 그로 인한 건강악화로 점철됐다. 집안 망신이라며 친정가족에게도 버림받고 사회에서도 강제로 밀려난 나혜석이 의탁할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나혜석의 작품, 해인사 석탑(1938년 작)
설상가상으로 첫 아들이 폐렴으로 열두 살 나이로 요절했는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승진한 김우영은 다른 자녀들을 만나려는 나혜석을 경찰을 시켜 막았다. 이에 대한 분노와 심신의 고달픔이 겹친 나혜석은 김우영이 믿던 기독교를 버리고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듬해 예산 수덕사 아래 수덕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1944년 수덕사를 떠나 서울로 온 나혜석은 오빠 나경석의 주선으로 서울 인왕산 청운양로원에 맡겨졌다가, 1948년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했다.
‘근대인’ 나혜석
재능있고 거침없던 여성 나혜석을 파멸로 외로운 죽음으로 빠져들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우리 사회의 제도와 인습, 그리고 편견이었을까? 공교롭게도 천도교의 최고지도자를 지낸 최린과 얽히며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나혜석의 평가는 조선에서 여권을 주장한 신여성이다.
“나혜석은 여성의 삶과 권리를 이야기한 만큼이나 부모와 자녀의 동등한 관계, 신분을 초월한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였고,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개인의 선의와 양심에 호소하는 전통적 방식이 아니라 언론을 통해 문제를 공론화하고 법과 제도를 이용해 해결하고자 하는 모습 등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다른 남성 지식인들의 행보와도 다를 바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이기까지 하다.”
우리는 나혜석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인 평가를 보며 최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최린은 한때 천도교의 최고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해월신사의 말씀을 어기고 말았다. 남녀를 엄하게 분별하라는 말씀이다. 황현은『오하기문』에서 ‘동학하는 사람은 서학하는 사람과 달리 남녀가 문란한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최린은 김우영의 신의를 저버리고 자녀가 있는 나혜석과 바람이 났다. 그의 가벼운 행동이 재능 있고 유망한 한 여성은 물론 그들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것은, 신앙을 하는 우리에게 다시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최린의 인생행로는 어떠했던가?
참고자료
『나혜석전집』(태학사, 2000)
김경민, 「근대인 나혜석의 경험과 사상」, 『한민족어문학 제79집』
이유리, 「신여성 나혜석의 폭풍 같은 삶, 그리고 <해인사 석탑>」 매일노동뉴스(2015.4.27)
고영득, 「첫사랑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간 그녀」, 경향신문(2008.11.14.)
김정인, 「친일보다 변절이 더 밉다」, 한국역사연구회
김진, 「나혜석 둘째아들 김진 전 서울대 교수가 띄우는 고백」, 여성동아(2009.5.21.)
조선일보(2002.9.11.), 오마이뉴스(2004.8.24.), 경향신문(2009.4.2.), 아시아경제(2018.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