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 [162.11]
탐방
“나인협 선생 흉상 제작, 표지석 복원에 최선을 다하겠다.”
- 박재범 부산 남구청장 대담
부산을 상징하는 대표적 장소인
부산남구 소재 오륙도 바닷가인 이기대에서
10월 28일 오후 3시 30분
박재범 부산남구청장과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때마침 박 구청장은 이날 오후 2시부터
오륙도 인근의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서 열린
‘일제강제동원 희생자 전국합동 위령제’에 참여하고
바로 오륙도 이기대 카페로 이동하여
인터뷰에 응해 주셨다.
이곳은 동해와 남해가 갈리는 곳으로
남해안을 걷는 남파랑길과
동해 쪽을 걷는 해파랑길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인터뷰 후 남구청 직원들의 안내로
나인협 선생 흉상이 들어설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둘러보았다.
박재범 남구청과의 대담과
나인협 선생의 삶에 대해 알아보았다./편집실
문: 부산남구청에서는 10월 1일부터 11월 3일까지
나인협 선생 전시회를 하고 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신 나인협 선생은
부산 남구에는 환원하셨는데,
구청장님께서는
부산 대동교구(옛.대연교구)도 방문하셔서
파손된 묘지비석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전시회 추진과정과 성과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재범 구청장: 나인협 선생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고향이 이북이신데요.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 오셨다가
1952년에 돌아가셔서 대연동에 안장되셨습니다.
이후에 홍암 나인협선생의 묘지가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면서 남겨진 묘 표지석이
대연동 지역 재개발 사업과 관리 소홀로
3조각으로 훼손되었고요
현재는 천도교 대동교구에서 보관 중입니다.
우리 남구는
나인협 선생의 애국 독립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흉상을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10월 1일에는
박인준 종무원장님께서도 참석해주신
나인협 선생 특별 전시회가 열렸는데,
나인협 선생의 생애와 사진, 신문기사 등을 통해
선생의 삶과 애국독립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문: 나인협 선생 흉상을 제작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평안도 성천 사람인 나인협 선생이
부산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요,
나인협 선생 흉상 제작에 대해
상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박재범 구청장: 홍암 나인협 선생은
암울했던 일제식민지 시기
3․1운동에 천도교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참여하여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우리 남구는 홍암 나인협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묘지가 있었던 대연동의 당곡공원에
연말까지 9천 6백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선생의 흉상 및 파손된 묘 표지석 복원합니다.
이러한 사업과
주변에 있는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연계하여
선생의 애국 독립정신을 기리고
관람객 및 탐방객이 머물고 싶어하는
역사문화의 구역으로도 활용하고자 합니다.
문: 부산 천도교에서도
해마다 3.1절 행사 등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인들이 부산 남구청에서의
3.1운동이나 독립운동 등 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남구청에서 진행하고 있는 행사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박재범 구청장: 천도교는
수운 최제우 선생이 창시한
동학에서 유래한 민족종교인데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과 3․1운동을 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천도교에 관심이 있어서
경주 용담정에도 다녀왔습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에 대해서 관심이 생기며,
공부하고 싶어졌는데…
가보니 가슴이 굿연해지고
무언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잠시 중단되고는 있지만
3.1절과 8.15 광복절에
부산시 주관으로 기념행사가 매년 열리고 있습니다.
남구도 일제시기 독립운동에 대한 시민홍보,
3.1절과 8.15 광복절
가정에 국기달기 운동, 독립유공자 지원 및
기념식 초청장 전달 등 예우를 다하고 있고요.
남구는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나인협 선생 흉상 제작 및
표지석 복원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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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가의 자주민족이 되는 것이 기쁘기 때문이다”
- 홍암 나인협의 생애
홍암 나인협은
1872년 10월 8일 평남 성천에서 태어났다.
포덕 47년(1906) 11월 30일
의암성사로부터 홍암(泓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19세인 1892년 동학에 들어
동학혁명에도 참여하였다.
나인협은 의암성사를 비롯하여
권병덕, 나용환, 박준승, 이종훈, 임예한, 홍기조,
홍병기와 함께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동학혁명에도 참여한 9명 중 한 분이다.
동학혁명 이후
동학의 포덕 바람은 서북지방에 집중되었다.
포덕 37년(1896)
평안도 도인 홍기조, 홍기억, 임복언 등이
상주은척원으로 해월신사를 찾아오자
해월신사는
도운이 점차 북방으로 흘러감을 알고 기뻐하면서
“여러분의 수련할 바는 오직 대성대천(大性大天)이요
실행할 바는 오직 성경신(誠敬信)이니
영고화복(榮枯禍福)은 흉중에 두지 말라” 하셨다.
이듬해 7월
특히 황해도와 평안도에 포덕이 늘어
두목들의 왕래가 많았다.
이때 나인협도 신사를 방문하였다.
포덕 41년(1900) 8월
영변군 용추동의 도인 강성택은
관찰사 이도재의 회유를 거절하고
철룡성밖 미륵모루 형장에 나가서
“몸은 죽어도 마음은 죽지 않고
세상은 망해도 도는 망하지 않는다
(身死心不死 世亡道不亡)”라는 시를 부르고
장렬하게 순도하였다.
그럼에도 동학의 포덕은 늘어
‘가가동학(家家東學)이요 인인송주(人人誦呪)’의
큰 세력을 이루었다.
나인협은 포덕 44년(1903) 2월 의암성사로부터
1만 명 이상의 교인을 거느린 대접주로서
이겸수·박영구·문학수와 함께
의창대령에 임명되었다.
이때 1천 명 이상 포덕에 대접주를 두었는데
대접주는
나용환, 이종훈, 홍기억, 홍기조, 오응선, 노석기 등
200여 명이었다.
포덕 45년(1904) 의암성사는
박인호 이종훈 나인협 등 40여 명을
일본 동경으로 불러 정치결사체 조직을 당부했고,
민회운동 방식의 진보회 조직으로 구체화 되었다.
나인협은 귀국 후 1904년 9월 초
나용환, 오영창, 임예환, 홍기조, 홍기억,
황학도 등과 함께 평양의 영문 포정사 앞에서
약 1만3천여 명의 동학교도들과 함께
진보회를 개회하고
일제히 상투를 자르는 단발식을 거행했다.
또한 '동학 차회장 나인협'의 명의로
각처에 광고문을 보냈다.
내용은 조선팔도의 인민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한·일·청 3국이 동양평화를 견고히 하자는 것이었다.
을사늑약 직후인 포덕 46년(1905) 12월 1일
의암성사는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하고,
포덕 47년(1906) 1월 귀국하여
서울에
천도교중앙총부를 설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이해 3월 전국 각지에 72개의 대교구를 설치했다.
교구는 교인 10만 명 이상을 기준으로 하였는데
나인협은 14교구장에 임명되었다.
3·1혁명 발발 직전 나인협은
성천에서 도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나인협은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하여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마치고 체포되었다.
일제가 “어째서
독립국이 되려는 희망을 갖고 있는가.”하고 묻자,
나인협은 “그것은
자주국가의 자주민족이 되는 것이 기쁘기 때문”
이라 답하였다.(1919.4.16., 경성지방법원에서)
천도교 혁신운동이 한창이던
포덕 62년(1921) 11월 4일
이종훈·홍병기·나용환·박준승·임예환·홍기조·
권병덕·김완규 등과 함께 만기출옥하였다.
이때부터 천도교중앙총부에서 공직을 맡으며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포덕 62년(1921) 12월
중앙총부 임시대종사장을 맡았다.
포덕 63년(1922) 종리사에 의한
집단지도체제를 담은 ‘천도교교헌’이 제정되고,
이어 9월 4일의 교구대표의원회의 종리사 선거에서
나인협은 권동진·최린·이인숙·오세창·오영창·
나용환·권병덕·박준승 등과 함께 당선되었다.
포덕64년(1923) 이후 평양에 거주하며
평안도의 천도교를 이끌었다.
홍암 선생의 손자되는 나일선(1935-2021) 선도사는
포덕 142년(2001)
조부의 유품 50여 점을 총부에 기증하였고,
유품은 3.1운동100주년 전시회 등에
소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해방 후 홍암은
평남 성천에 머무르면서 교회 원로로서 활동하였다.
김달현 등은 포덕 87년(1946) 2월
천도교청우당을 결성하여 김일성과 손잡고
사회주의국가 수립에 주력하였다.
나인협은 이에 반대하였고
6개월간 평양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포덕 91년(1950) 한국전쟁이 터지자
1·4후퇴 때 월남하였다.
월남 후 나인협은
부산 피난민촌에서 어렵게 생활하였다.
홍암의 딱한 사정을 듣고 당시 관재청에서
적산가옥 한 채를 알선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집에 살고있는 사람이
쫓겨나야 하는 처지라는 걸 알고는
이마저도 포기하였다.
환원 일주일 전 나인협은
서울에 사는 교인들을 찾아보겠다며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서울을 다녀왔다.
포덕 93년(1952) 4월 16일 새벽,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하더니
오전 9시 25분경 조용히 환원하였다.
향년 81세였다. 임종에 앞서 시 한 수를 남겼다.
畏神聖之法訓 當殺我而生他
內有定而外變 道自遠而渠我
신성을 두려워함은 법훈이요/
나를 죽여 타인을 살림은 마땅하다/
안은 정해져 있지만 외부는 변하니/
도는 먼 곳에서부터 나와 통하노라.
나인협의 빈소는 천도교부산시교구에 마련되었다.
장의위원장은 오세창, 부위원장은 이갑성, 이명룡 등
민족대표 33인 동지들이 맡았다.
4월 20일 오전
초량역전 광장에서 영결식을 갖고
유해는 부산 대연동 산 중턱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200만 원을 장의비로 지원했고,
국회의원들은 세비의 1할을 거둬 조위금으로 냈다.
포덕 103년(1962) 8월 묘비 제막식을 가졌고,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포덕 114년(1973) 10월 31일
서울현충원으로 묘지는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