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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2005/02/18 18:51
가정맹어호 (家政猛於虎)
집(가) 정치(정) 날랠(맹) 어조사(어) 범(호)
이 이야기는 <예기> 단궁 하편에 나오는 공자의 설화의 한 토막이다.
공자가 제자들을 데리고 태산의 한쪽 길을 가고 있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한 부인이 길가에 있는 무덤 앞에 앉아서 슬피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몹시 슬프게 들렸다. 그래서 공자는 수레의 앞채에 몸을 기대고, 그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제자인 자로에게 명하여 묻게 했다.
"부인의 우는 소리를 들으면, 마치 거듭하여 몇 번이나 슬픈 지경을 당하신 것같이 생각되는데,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러자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네, 말씀하신 그 대로 입니다. 옛날에 저의 시아버님 되시는 분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혔는데, 얼마 전에는 저의 남편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혀서 죽었고, 이번에는 저의 자식이 또 호랑이에게 잡혀 죽었나이다."
자로가 이 말을 듣고 물었다.
"그러면 이렇게 무서운 곳이라면 왜 다른 곳으로 이사하지 않는 거지요?
그러자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이곳에 살고 있으면 무거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쳐 일깨웠다.
"너희들도 가슴에 잘 새겨 두어라. 가혹한 정치가 두려운 것은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보다도 더욱 심하다는 것을."
가혹한 정치, 그것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우선 가렴주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세금을 무겁게 거두어들이는 정치의 두려움을, 공자는 죄 없는 한 부인에게서 <가혹한 정치가 없기 때문>이라는 한 마디 말을 듣고, 깊이 느꼈던 것이다.
각주구검 (刻舟求劒)
새길(각) 배(주) 구할(구) 칼(검)
중국 초나라 사람이 강을 건너려고 배를 탔다. 배가 강심(江心)에까지 왔을 때 그는 그만 실수를 하여 들고 있던 칼을 강물 속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당황하던 그는 자신있게 중얼거렸다.
"흥! 여기서 칼을 떨어뜨렸것다.!" 그리고 얼른 뱃전에 표시를 해 두었다. 이윽고 배는 강가에 도착했다. 그는 뱃전에 표시해 놓은 곳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가만있자. 내 칼이 이쪽으로 빠졌는데.....'
그리고 옷을 벗은 그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잃어 버린 칼을 찾으려는 것이었지만 그는 끝내 칼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말은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다.
간담상조 (肝膽相照)
간(간) 쓸개(담) 서로(상) 비출(조)
서로 진심을 터놓고 사귐.
당나라 중기의 유종원은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으로, 그의 고문은 <韓柳>라고 불러질 만큼 한유와 더불어 일컬어지고 있으며, 두 사람은 평생을 통하여 좋은 친구였다.
유종원은 순종때 보수파와 환관들과 충돌하여, 예부의 속관에서 유주자사로 좌천되었다가 11대 왕인 헌종때 일단 중앙의 조정으로 다시 불려졌지만, 또 다시 유주자사로 좌천되었따. 이때 시인의 동료인 유몽득도 변경인 귀주로 좌천되어, 그것을 늙은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유종원은 <자기가 대신 말씀드리겠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동정했다.
한유는 그 우정에 감동되어, 뒤에 유종원을 위하여 쓴<유자후묘지명> 속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아, 선비는 궁지에 섰을 때야말로 그 절의가 나타나는 법이다. 세상 사람들은 항상 마음에도 없이 서로 담소하고, 손을 서로 마주잡고, <간과 쓸개를 내놓고 서로 보이고> 태양을 가리키며 눈물을 흘리고, 살아있는 동안이나 죽은 뒤에까지도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세운다. 그야말로 성실한 모습이지만, 일단, 터럭끝과 같은 작은 이해에 당면하면, 전혀 낮선 사람과 같이 행동하여, 상대방이 함정에 빠졌을 때 손을 내밀어 구원할 생각을 하지 않고, 도리어 상대방을 함정에 밀어넣고, 돌을 집어 던려는 자들 뿐이다.]
<간담상조>란 앞에 있는 글의 "간과 쓸개를 내놓고 서로 보인다"에서 나온 말이다. 이것은 즉 <서로 상대방의 가슴속까지 이해하는 친한 친구>를 말하는 것이다.
난형난제 (難兄難弟)
어려울(난) 맏(형) 어려울(난) 아우(제)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두 사물의 낫고 못함을 분간하기 어려울 때 비유하는 말.
梁上君子(양상군자)라는 고사성어로도 유명한 후한말의 현령 陳寔(진식)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紀(기)와 諶(심)이 그들인데 아버지와 더불어 三君子(삼군자)로 불릴 만큼 덕망이 높았다.
진과 심이 어렸을 적 어느 날 손님이 찾아오자 진식은 두 아들에게 밥을 지으라 해놓고 손님과 토론에 열중하고 있었다.
기와 심 형제는 밥을 짓다가 아버지와 손님의 토론을 듣는데 정신이 팔려 밥이 되는지 죽이 되는지 깜빡 잊어버렸다.
아버지가 『이제 밥이 다 되었느냐』고 묻는 바람에 당황하여 솥뚜껑을 열어보니 죽이 되어 있었다. 기와 심이 무릎을 꿇고 사정을 털어놓자 아버지가 물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우리가 얘기한 것을 기억할 수 있겠느냐』
그러자 두 아들이 『네 알고 있지요』하고는 토론의 내용을 거침없이 말하자 손님은 깜짝 놀랐고 진식은 방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정확하게 말해주었다. 그럼 죽이라도 좋으니 내 오너라』
기의 아들 群(군)과 심의 아들 忠(충)도 아버지를 닮아서 뛰어난 수재였다.
이들이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사촌간인 군과 충은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적과 덕행을 따지면서 優劣(우열)을 다투었다.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자 그들은 할아버지인 진식에게 판정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진식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를 형이라 하기도, 동생이라 하기도 어렵구나(난형난제)』
남가일몽 (南柯一夢)
남녘(남) 가지(가) 한(일) 꿈(몽)
【동의어】남가지몽, 남가몽, 괴몽
【유사어】한단지몽, 무산지몽, 일장춘몽
남쪽 나뭇가지의 꿈이란 뜻, 곧 덧없는 한때의 꿈.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
당나라 9대 황제인 덕종때 광릉땅에 순우분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순우분이 술에 취해 집 앞의 큰 홰나무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자 어디서 남색 관복을 입은 두 사나이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괴안국왕의 명을 받고 대인을 모시러 온 사신이옵니다."
순우분이 사신을 따라 홰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자 국왕이 성문앞에서 반가이 맞이했다. 순우분은 부마가 되어 궁궐에서 영화를 누리다가 남가태수를 제수받고 부임했다. 남가군을 다스린 지 20년, 그는 그간의 치적을 인정받아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침공해 온 단라국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아내까지 병으로 죽자 관직을 버리고 상경했다. 얼마 후 국왕은 '천도해야할 조짐이 보인다'며 순우분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잠에서 깨어나 순우분은 꿈이 하도 이상해서 홰나무 뿌리 부분을 살펴보았다. 과연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을 더듬어 나가자 넓은 공간에 수많은 개미의 무리가 두 마리의 왕개미를 둘러싸고 있었다. 여기가 괴안국이었고, 왕개미는 국왕 내외였던 것이다. 또 거기서 '남쪽으로 뻗은 가지[南柯]' 에 나 있는 구멍에도 개미떼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남가군이었다.
순우분은 개미 구멍을 원상대로 고쳐 놓았지만 그날 밤에 큰 비가 내렸다. 이튿날 아침, 그 구멍을 살펴보니 개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도해야 할 조짐'이란 바로 이 일이었던 것이다.
낭중지추 (囊中之錐)
주머니(낭) 가운데(중) 어조사(지) 송곳(추)
주머니 속의 송곳. 주머니 속에 든 송곳이 끝이 뾰족하여 밖으로 삐져 나오듯이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전국시대 말엽 趙(조)나라 혜문왕의 동생이자 재상인 平原君(평원군)은 식객을 수천명이나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는 제나라의 孟嘗君(맹상군), 위나라의 信陵君(신릉군), 초나라의 春申君(춘신군)과 같이 서로 경쟁하다시피 선비들을 초대하여 후하게 대우하던 시대였다.
어느 해 조나라는 강국인 진나라와 싸워 크게 패했는데 1년 뒤 진나라는 다시 조나라를 침략, 수도 邯鄲(한단)을 포위했다.
조나라는 평원군을 초나라에 보내어 구원병을 요청하기로 했다.
평원군은 식객 중에서 文(문)과 武(무)를 겸비한 20명을 뽑아서 함께 가려고 했다. 그러나 19명까지는 결정되었는데 한 사람이 모자랐다. 그러자 毛遂(모수)라는 사람이 함께 가게 해달라고 자원해 왔다. 그러나 평원군은 그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평원군이 물었다.
『그대는 우리 집에 온지 얼마나 되었소』
『한 3년 됩니다』
『무릇 재능이 있는 자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囊中之錐)처럼 그 예리함이 저절로 드러나게 마련이오. 그런데 그대는 우리 집에 온지 3년이 됐는데도 그대에 대해 들은 바가 없소』
『그건 오늘 처음으로 주머니에 넣어 달라고 원했기 때문입니다. 진작 주머니에 넣어주셨다면 송곳이 아니라 자루까지 나왔을 것입니다』
결국 평원군은 모수의 도움을 받아 초왕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모수가 함께 데려가 달라고 했다는 데서 毛遂自薦(모수자천)이란 고사성어도 있다.
논공행상 (論功行賞)
논할(논) 공(공) 행할(행) 상줄(상)
공적의 크고 작음을 따져 그에 알맞은 상을 준다는 말.
삼국시대의 魏(위)나라 文帝(문제) 曹丕(조비)는 병으로 죽기 며칠 전에 曹叡(조예)를 황태자로 정했다. 이 자리에서 문제는 장군이자 일가가 되는 曹眞(조진)과 曹休(조휴), 유교와 법에 정통한 陳群(진군), 원로인 司馬懿(사마의) 등 네 사람에게 뒷일을 간곡히 부탁했다.
문제의 죽음은 과연 吳(오)나라와 蜀(촉)나라에 위나라를 공격하는 기회를 주었다. 조예가 明帝(명제)로 등극한지 3개월 뒤 오나라의 孫權(손권)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의 江夏郡(강하군)을 공격했다.
태수인 문빙이 공격을 막았다. 조정에서는 응원군을 보내 문빙을 도우려고 했다. 그러나 명제는 조정 중신들의 건의를 듣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오나라는 전통적으로 水戰(수전)에 강하다. 그런데도 그들이 배를 버리고 육상의 싸움에 도전한 것은 우리쪽의 무방비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무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 못가서 지칠 것이다. 지금 문빙의 군대가 잘 버티고 있으니 攻守(공수)의 세력이 뒤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과연 얼마 뒤 손권은 후퇴했다. 오나라 장군 제갈근과 장패도 위나라를 공격해왔지만 대장군 사마의가 善戰(선전), 이들을 격파하고 장패를 목벴다. 용장 조휴도 오나라의 別動隊(별동대)를 격파했다.
삼국지는 싸움이 끝난 뒤 위나라 장병들의 「공에 따라 나누어준 포상은 그 공에 합당하게 각각에 주어졌다(論功行賞各有差·논공행상각유차)」라고 적고 있다.
농단 (壟斷)
언덕(롱) 끊을(단)
(깍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언덕이란 뜻. 곧 재물을 독차지 함. 이익을 독점함.
전국시대, 제나라 선왕때의 일이다.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제국을 순방중이던 맹자는 제나라에서도 수년간 머물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려 했다. 그러자 선왕은 맹자에게 높은 봉록을 줄 테니 제나라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맹자는 거절했다.
"전하 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도 봉록에 달라붙어서 '재물을 독차지' 할 생각은 없나이다."
이렇게 말한 맹자는 '농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농단은 '깍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언덕'이란 뜻인데, 전하여 '재물을 독차지한다' '이익을 독점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된 데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먼 옛날에는 시장에서 물물 교환을 했었다. 그런데 한 교활한 사나이가 나타나 시장의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는 '높은 언덕[壟斷]'에 올라가 좌우를 살펴서 장사함으로써 '이익을 독점'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이 사나이의 비열한 수법을 증오하고 그에게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이 때부터 장사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가 생겼다고 한다.
다기망양 (多岐亡羊)
많을(다) 갈라질(기) 잃을(망) 양(양)
갈림길이 많아서 양을 잃어버리다. 곧 본 뜻이나 목적을 망각하고 지엽적이고 단편적인 것에 집착하게 되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말.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양자(楊子)와 관련된 이야기. 양자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도망쳤다. 이웃집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양자의 집 하인들까지 총동원되어 양을 찾으러 나섰다. 이런 소동을 보고 양자가 물었다.
“양 한 마리를 찾는데 쫓아가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가?”
“워낙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게 하인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모두들 기진맥진해 돌아와서 말했다.
“갈림길을 지나면 또 갈림길이어서 양이 어느 길로 도망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념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양자는 생각에 잠겨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자인 맹손양(孟孫陽)은 스승의 고민을 알지 못하고 선배 제자인 심도자(心都子)에게 양자가 침묵하는 까닭을 물었다.
심도자의 대답은 이랬다.
“큰 길은 갈림길이 많아서 양을 놓쳐 버리고(多岐亡羊) 학문하는 사람은 방법이 많기 때문에 본성을 잃고 마네. 학문이란 원래 근본은 하나였는데 그 끝은 이같이 달라지게 되네. 그러므로 하나인 근본으로 되돌아가게 되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는 게 선생님의 생각이시네.”
근본을 도외시(度外視)하고 지엽적인 것에 몰두하게 되면 아무런 소득이 없거나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다다익선 (多多益善)
많을(다) 많을(다) 더할(익) 좋을(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말.
한고조 유방은 宿敵(숙적)인 항우를 무찌르고 천하를 통일하자 지금까지 자기를 위해 몸바쳐 일해 온 사람들이 모두 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韓信(한신)을 누구보다도 강력한 라이벌로 여겼고 자기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방은 論功行賞(논공행상)에서 楚王(초왕)으로 봉했던 한신을 전에 항우의 부하였던 종리매를 숨겨주었다는 구실로 왕위를 박탈하고 淮陰侯(회음후)로 좌천시켜 도읍에 있게 했다.어느 날 고조는 한신과 여러 장군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고조가 말했다.
『그런데 짐은 대체 어느 정도의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감으로 보이나』
『글쎄요, 폐하께서는 한 십만명쯤은 거느리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 그럼 그대는 얼마나 거느릴 수 있겠는가』
『저는 다다익선으로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한신의 대답에 고조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그대가 어찌하여 짐의 밑에 있단 말인가』
한신이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폐하께서는 군사의 장수는 되실 수 없어도 장수의 장수는 되실 수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신이 폐하를 받들게 된 것입니다』
도외시 (度外視)
법도(도) 바깥(외) 볼(시)
【유사어】치지도외(置之度外)
【반의어】문제시(問題視)
【참조】 오합지중, 정중지와
가욋것으로 봄. 안중에 두지 않고 무시함. 문제삼지 않음. 불문에 붙임.
후한의 시조 광무제때의 일이다. 광무제 유수는 한나라를 빼앗아 신나라를 세운 왕망을 멸하고 유현을 세워 황제로 삼고 한나라를 재흥했다.
대사마가 된 유수는 그 후 동마. 적미. 등의 반란군을 무찌르고 부하들에게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으나 천하통일에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윽고 제땅과 강회땅이 평정되자 중원은 거의 광무제의 세력권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벽지인 진땅에 웅거하는 외효와 역시 산간오지인 촉땅의 성도에 거점을 둔 공손술만은 항복해 오지 않았다.
중신들은 계속 이 두 반군의 토벌을 진언했다. 그러나 광무제는 이렇게 말하며 듣지 않았다.
"이미 중원은 평정되었으니 이제 그들은 '문제시할 것 없소[度外視].'"
광무제는 그간 함께 많은 고생을 한 병사들을 하루 속히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쉬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부작침 (磨斧作針)
갈(마) 도끼(부) 지을(작) 바늘(침)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뜻. 곧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참고 계속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함의 비유. 노력을 거듭해서 목적을 달성함의 비유. 끈기 있게 학문이나 일에 힘씀의 비유.
시선이라 불렸던 당나라의 시인 이백의 어렷을 때 이야기이다. 이백은 아버지의 임지인 촉땅의 성도에서 자랐다. 그때 훌륭한 스승을 찾아 상의산에 들어가 수학했는데 어느날 공부에 싫증이 나자 그는 스승에게 말도 없이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집을 향해 걷고 있던 이백이 계곡을 흐르는 냇가에 이르자 한 노파가 바위에 열심히 도끼(일설에는 쇠공이)를 갈고 있었다.
"할머니, 지금 뭘 하고 계세요?"
"바늘을 만들려고 도끼를 갈고 있다."
"그렇게 큰 도끼가 간다고 바늘이 될까요?"
"그럼, 되고 말고.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이백은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이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여기서 생각을 바꾼 그는 노파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그 후 이백은 마음이 해이해지면 바늘을 만들려고 열심히 도끼를 갈고 있던 그 노파의 모습을 떠올리곤 분발했다고 한다.
맥수지탄 (麥秀之歎)
보리(맥) 빼어날(수) 갈(지) 탄식할(탄)
보리 이삭이 무성함을 탄식한다는 뜻. 곧 고국이 멸망한 탄식.
중국 고대 3왕조의 하나인 은나라 주왕이 음락에 빠져 폭정을 일삼자 이를 지성으로 간한 신하 중 삼인으로 불리던 세 왕족이 있었다. 미자, 기자, 비간이 그들이다.
미자는 주왕의 형으로서 누차 간했으나 듣지 않자 국외로 망명했다. 기자도 망명했다. 그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거짓 미치광이가 되고 또 노예로까지 전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자 비간은 끝까지 간하다가 결국 가슴을 찢기는 극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윽고 주왕은 삼공(三公 : 왕을 보좌하던 세 제후)의 한 사람이었던 서백(西伯 : 훗날의 주문왕)의 아들 발(發)에게 주살(誅殺) 당하고 천하는 주왕조로 바뀌었다. 주나라의 시조가 된 무왕(武王) 발은 은왕조의 봉제사(奉祭祀)를 위해 미자를 송왕(宋王)으로 봉했다.
그리고 기자도 무왕을 보좌하다가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되었다. 이에 앞서 기자가 망명지에서 무왕의 부름을 받고 주나라의 도읍으로 가던 도중 은나라의 옛 도읍지를 지나게 되었다. 번화하던 옛 모습은 간데없고 궁궐터엔 보리와 기장만이 무성했다. 금석지감(今昔之感)을 금치 못한 가자는 시 한 수를 읊었다.
보리 이삭은 무럭무럭 자라나고(麥秀漸漸兮)
벼와 기장도 윤기가 흐르는구나
교활한 저 출부지(주왕)가
내말을 듣지 않았음이 슬프구나
맹모삼천 (孟母三遷)
맏(맹) 어미(모) 석(삼) 옮길(천)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고사.
전국시대, 유학자의 중심 인물로서 성인 공자에 버금가는 아성(亞聖) 맹자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는 당초 묘지 근처에 살았는데 어린 맹자는 묘지파는 흉내만 내며 놀았다. 그래서 교육상 좋지 않다고 생각한 맹자의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건을 팔고 사는 장사꾼 흉내만 내는 것이었다. 이곳 역시 안되겠다고 생각한 맹자의 어머니는 서당 근처로 이사했다.
그러자 맹자는 제구(祭具)를 늘어놓고 제사 지내는 흉내를 냈다. 서당에서는 유교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예절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런 곳이야말로 자식을 기르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모순 (矛盾)
창(모) 방패(순)
창과 방패라는 뜻이나 말이나 행동이 앞뒤가 안맞을 때를 일러 말함.
전국시대때 한 장사치가 시장에서 방패와 창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이 사람은 방패를 선전할 때는 '이 세상에서 이 방패를 당해낼 창이 없다'고 하고 창을 선전할 때는 '이 창을 뚫을 방패는 어디에도 없다'고 떠들어댔다.
구경을 하던 노인네 한명이 이렇게 물었다.
"여보시오. 당신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소. 이 창은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다고 해놓고, 이 방패는 어떤 창도 막을 수 있다고 하니 어디 한번 당신이 들고 있는 창으로 이 방패를 한번 뚫어보시오?' 이 한마디에 장사치는 자기의 말의 모순(矛盾)을 깨닫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 짐꾸러미를 챙겨 슬그머니 사라졌으며 그 주변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됐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무릉도원 (武陵桃源)
굳셀(무) 언덕(릉) 복숭아(도) 근원(원)
이 세상과 따로 떨어진 별천지. 理想鄕(이상향) 즉 유토피아를 말한다.
晋(진)나라 때 무릉이란 마을에 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어부는 배를 저어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었는지 여태까지 한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에 이르렀다.
계곡 양쪽엔 온통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배를 저어가던 어부는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쯤이나 되는 곳인가. 그리고 이 복숭아밭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단 말인가. 호기심에 좀 더 거슬러 올라가니까 내(川)가 그치는 곳에 높다란 산이 앞을 가로막았다.
산에는 작은 굴이 뚫려있어 어부가 배를 버리고 굴에 들어가 얼마를 걷자니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부시는 눈을 겨우 뜨고 보니 바로 앞에 널따란 땅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연하게 들어선 집들과 잘 가꾸어진 밭.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표정으로 밭일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마을 주민들은 옛날 秦(진)나라의 虐政(학정)을 피해 이 絶景(절경)을 찾아 온 사람들의 후손이었다. 그 이후 바깥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살아왔다고 했다.
어부는 환대를 받으며 그곳에서 며칠 묵은 다음 귀로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이곳 이야기를 하지 말고 다시는 찾지말아달라는 당부를 받았으나 어부는 오는 도중 곳곳에 標識(표지)를 해두었다.
어부는 돌아와서 그가 겪은 일을 그 지방 태수에게 보고했다. 태수도 크게 관심을 가지며 사람들을 시켜 그 마을을 찾게 했으나 표지조차 없어져버려 수색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晋나라의 대시인 陶淵明(도연명)의 「도화원기」에 실려있는데 그 신비의 마을 무릉도원은 많은 사람들이 꿈에도 그리는 이상향이 되었다.
문경지교 (刎頸之交)
목 찌를(문) 목(경) 갈(지) 사귈(교)
목을 베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절친한 사귐. 또 그런 벗.
전국시대, 조나라 혜문왕의 신하 유현의 식객에 인상여(藺相如)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나라 소양왕에게 빼앗길 뻔했던 천하 명옥(名玉)인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원상대로 가지고 돌아온 공으로 일약 상대부(上大夫)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3년 후, 소양왕과 혜문왕이 민지라는 곳에서 만났을 때 인상여는 혜문왕을 욕보이려는 소양왕을 가로막고 나서서 오히려 그에게 망신을 주었다. 인상여는 그 공으로 종일품(從一品)의 상경(上卿)에 올랐다.
그리하여 인상여의 지위는 조나라의 명장으로 유명한 염파보다 더 높아졌다. 그러자 염파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싸움터를 누비며 성(城)을 쳐 빼앗고 들에서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그런데 입밖에 놀린 것이 없는 인상여 따위가 나보다 윗자리에 앉다니....내 어찌 그런 놈 밑에 있을 수 있겠는가. 언제든 그 놈을 만나면 망신을 주고 말테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인상여는 염파를 피했다. 그는 병을 핑계대고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길에서도 저 멀리 염파가 보이면 옆길로 돌아가곤 했다. 이같은 인상여의 비겁한 행동에 실망한 부하가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그러자 인상여는 그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염파 장군과 진나라 소양왕과 어느 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는가?"
"그야 물론 소양왕이지요."
"나는 그 소양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신하들 앞에서 혼내 준 사람이야. 그런 내가 어찌 염파 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강국인 진나라가 쳐들어오지 않는 것은 염파장군과 내가 버티고 있기 때문일세. 이 두 호랑이가 싸우면 결국 모두 죽게 돼. 그래서 나라의 위기를 생각하고 염파 장군을 피하는 거야."
이 말을 전해 들은 염파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그는 곧 '웃통을 벗은 다음 태형(笞刑)에 쓰이는 형장을 짊어지고[사죄를 나타내는 행위] 인상여를 찾아가 섬돌 아래 무릎을 꿇었다.
"내가 미욱해서 대감의 높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어서 나에게 벌을 주시고."
염파는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날부터 두사람은 '문경지교'를 맺었다고 한다.
미봉 (彌縫)
두루(미) 꿰멜(봉)
터진 곳을 임시로 얽어맨다는 뜻. 빈구석이나 잘못된 것을 임시변통으로 이리저리 주선하여 꾸며대는 것을 말한다.
춘추시대 때, 주나라 환왕은 쇠약해진 주나라의 세력을 복구하고 실추된 위신을 挽回(만회)하기 위해 정나라를 치기로 했다. 그무렵 정나라 莊公(장공)은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어 천자인 환왕을 우습게 여기는 등 눈에 거슬리는 처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왕의 명을 받고 괵 채 진 위나라가 군대를 내놓았다. 환왕은 스스로 연합군의 우두머리가 되어군사를 총지휘하게 되었다.
정나라의 장공도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앉아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應戰(응전)태세를 갖춰놓고 연합군을 맞아 공격하기로 했다.
兩軍(양군)은 정나라 땅인 수갈에서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다.이때 정나라 공자 元(원)은 장공에게 진언했다.
『진나라는 국내정세가 어수선해서 左軍(좌군)인 진군은 싸울 기력이 없습니다. 먼저 진군을 공격한다면 반드시 敗走(패주)할 것입니다. 그러면 中軍(중군)은 흩어지고 채와 위의 右軍(우군)도 버티지 못하고 퇴각할 것입니다』
이때 정나라는 魚麗(어려)의 진을 쳤는데 兵車(병거)를 앞세워 보병을 뒤따르게 하고 병거와 병거사이는 보병으로 미봉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미봉이란 말을 쓰게 되었는데 이 싸움에서 정나라는 대승을 거두었다.
방약무인 (傍若無人)
의지할(방) 같을(약) 없을(무) 사람(인)
곁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이 여긴다는 뜻으로, 주위의 다른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채 제 멋대로 마구 행동함을 이르는 말.
전국 시대도 거의 막을 내릴 무렵, 즉 진왕 정(政 : 훗날의 시황제)이 천사를 통일하기 직전의 일이다. 당시 포학 무도한 진왕을 암살하려다 실피한 자객 중에 형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위나라 사람이엇으나 위나라 원군이 써주지 않자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연나라에서 축(筑 : 거문고와 비슷한 악기)의 명수인 고점리를 만났다. 형가와 고점리는 곧 의기투압하여 매일 자자에서 술을 마셨다. 추기가 돌면 고점리는 축을 연주하고 형가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감회가 복받치면 함께 엉엉 울었다. 마치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傍若無人]'....
배수진 (背水陣)
등(배) 물(수) 진칠(진)
강 호수 바다 같은 물을 등지고 치는 진. 물러가면 물에 빠지게 되므로 이기지 않으면 죽을 각오로 친 진지. 이처럼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곳에서 결사적으로 싸우는 것을 배수진을 치고 싸운다고 말한다.
한나라의 韓信(한신)은 위나라를 격파한 여세를 몰아 趙(조)나라를 치기로 했다. 조나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정형이라는 좁은 길목을 지나야 한다.
한신이 쳐들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나라는 정형입구에 대군을 집결시켜 적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신은 첩자로부터 조나라의 군략가 李左車(이좌거)의 『한나라 군사가 정형에 도달하는 순간 단숨에 격멸해야 한다』는 작전이 채택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좁은 길목을 무사히 통과한 한신은 어둠을 틈타서 부대를 둘로 나누어 경기병 2천명을 조나라 성 바로 뒷산에 감추어 두기로 했다. 그리고 각자 붉은 기를 한자루씩 들게 했다. 한신이 명령했다.
『본대는 내일 싸움에서 거짓으로 패한 척 도망을 친다. 적은 패주하는 우리 본대를 쫓으려고 성을 비울테니 그때 성을 점령하고 깃발을 세워라』
다음 날 조나라 군사가 성을 나와보니 이게 웬 일인가. 한나라 군사가 강을 뒤에 두고 진을 치고 있는 게 아닌가. 조나라 군대는 「병법의 기본도 모르는 놈들」이라고 마음껏 비웃으며 돌격했으나 한나라 군사는 뜻밖에도 강했다. 그러는 동안 조나라 성에는 한나라의 깃발이 올랐다. 결과는 한나라의 대승리였다.
싸움이 끝난 뒤 한신은 말했다.
『우리 군대는 원정을 거듭하는 동안 태반이 보충병으로 되어있소. 이들을 생지에다 놓고 싸우게 하기보다 사지에도 몰아넣어야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거요』
백년하청 (百年河淸)
일백(백) 해(년) 강(하) 맑을(청)
중국의 黃河(황하)는 언제나 흐려 백년을 기다린다해도 맑아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아무리 오래되어도 사물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일컫는 말이다.
春秋(춘추)시대의 鄭(정)나라는 晉(진)나라와 楚(초)나라 등 강국 사이에 끼여있어 간신히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처지였다.
가만히 있었으면 괜찮을 것인데 정나라가 초나라의 속국이었던 蔡(채)나라를 공격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곧바로 초나라가 공격을 해왔기 때문이다.
정나라 重臣(중신)들이 대책을 논의했으나 항복을 하자는 측과 진나라의 구원을 기다려 저항을 해야한다는 측이 맞서 좀처럼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이때 항복을 주장하는 측의 子駟(자사)가 말했다.
『周(주)나라 詩(시)에 이르기를 「황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한이 없어 사람의 짧은 목숨으로는 불가능하다. 점쳐서 꾀하는 일이 많으면 새가 그물에 얽히듯 움직일 수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희생물과 비단을 갖추어 초나라와 진나라의 국경에서 기다렸다가 강한 쪽에 붙어 백성을 지킵시다. 적이 해로운 일을 하지않고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백면서생 (白面書生)
흰(백) 얼굴(면) 글(서) 날(생)
오로지 글만 읽고 세상 일에 경험이 없는 젊은이를 이르는 말.
남북조 시대, 남조인 송나라 3대 황제인 문제때 오(吳 : 절강성) 땅에 심경지 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힘써 무예를 닦아 그 기량이 뛰어났다. 전(前) 왕조인 동진의 유신(遺臣) 손은 장군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불과 10세의 어린 나이에 일단(一團)의 사병(私兵)을 이끌고 반란군과 싸워 번번이 승리하여 무명(武名)을 떨쳤다.
그의 나이 40세 때 이민족(異民族)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장군에 임명되었다. 문제에 이어 즉위한 효무제때는 도읍인 건강(建康 : 南京)을 지키는 방위 책임자로 승진했다. 그 후 또 많은 공을 세워 건무장군에 임명되어 변경 수비군의 총수로 부임했다.
어느날 효무제는 심경지가 배석한 자리에 문신들을 불러 놓고 숙적인 북위(北魏 : 386∼534)를 치기 위한 출병을 논의했다. 먼저 심경지는 북벌(北伐) 실패의 전례를 들어 출병을 반대하고 이렇게 말했다.
"폐하, 밭갈이는 농부에게 맡기고, 바느질은 아낙에게 맡겨야 하옵니다. 하온데 폐하께서는 어찌 북벌 출병을 '백면서생'과 논의하려 하시나이까?"
그러나 효무제는 심경지의 의견을 듣지 않고 문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출병하였다가 크게 패하고 말았다.
백미 (白眉)
흰(백) 눈섭(미)
글자풀이로는 하얀 눈썹. 여럿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가장 훌륭한 물건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魏(위) 吳(오) 蜀(촉) 3국이 정립하여 패권을 다투고 있던 삼국시대의 일이다. 촉의 劉備(유비)는 적벽대전이후에 형주 양양 남군을 손에 넣어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군신을 모아서 앞으로의 계책을 물었다. 이 자리에서 이적이 말했다.
『새로 얻은 땅들을 오래 지키려면 무엇보다 어진 선비를 구하는게 급선무입니다』
『어진 선비가 어디 있단 말이오』라고 물은 유비의 말을 받아 이적은 이렇게 말했다.
『형양 땅에 馬良(마량)의 5형제가 모두 슬기롭고 학문이 높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은 양 눈썹 사이에 흰털(백미)이 난 良(양)입니다』
이리하여 발탁된 마량은 나중에 유비가 昭烈帝(소열제)가 되면서 侍中(시중)에 임명될 정도로 유비를 따라 출진하여 거듭 큰 공을 세운 명참모였다.
泣斬馬謖(읍참마속)의 마속은 그의 아우. 마량의 뒤를 이어 제갈공명이 유비에게 가담하자 촉의 위세는 오와 위를 압도했다. 그러나 유비에게도 실수는 있었다. 무협(사천성)에서 오군과 대치하고 있던 유비는 軍師(군사)인 공명과 상의도 없이 군사를 출동시켰다가 대패한 것이다. 이 싸움에서 마량도 전사하고 말았다.
마량이 태어났을 때부터 눈썹이 희었기 때문에 붙은 백미라는 별명이 수많은 것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예술 작품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백아절현 (伯牙絶鉉)
맏(백) 어금니(아) 끊을(절) 악기 줄(현)
백아가 거문고의 줄을 끊엇다는 뜻. 곧 서로 마음이 통하는 절친한 벗의 죽음을 이르는 말. 친한 멋을 읽은 슬픔.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로 이름 높은 백아(伯牙)에게는 그 소리를 누구보다 잘 감상해 주는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있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며 높은 산과 큰 강의 분위기를 그려 내려고 시도하면 옆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종자기의 입에서는 탄성이 연발한다.
"아, 멋지다. 하늘 높이 우뚝 솟는 그 느낌은 마치 태산(泰山)같군."
"응, 훌륭해. 넘칠 듯이 흘러 가는 그 느낌은 마침 황하(黃河)같군."
두 사람든 그토록 마음이 통하는 연주자였고 청취자였으나 불행히도 종자기는 병으로 죽고 말앗다. 그러자 백아는 절망한 나머지 거문고의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기(知己)를 가리켜 지음(知音)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백안시 (白眼視)
흰(백) 눈(안) 볼(시)
남을 엄신여기거나 냉대하여(눈알의 흰자로) 흘겨 봄. 노려 봄.
위진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노장의 철학에 심취하여 대나무숲 속에 은거하던 죽림칠현의 한 사람에 완적이있었다. 그는 예의범절에 얽매인 지식인을 보면 속물이라 하여 '백안시'했다고 한다.
어느날 역시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혜강의 형 혜희가 찾아왔다. 완적이 냉대하여 흘겨 보자 혜희는 불쾌하여 물러가고 말았다. 혜강이 이 이야기를 듣고 완적이 좋아하는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가자 완적은 크게 기뻐하며 청안(靑眼)으로 맞이했다.
이처럼 상대가 친지의 형일지라도 완적은 그가 속세의 지식인인이상 청안시(靑眼視)하지 않고 '백안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조야(朝野)의 지식인들은 완적을 마치 원수를 대하듯 몹시미워했다고 한다.
※ 청안 : 남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대하는 눈초리. 호의에 찬 눈.
불혹 (不惑)
아니(불) 미혹할(혹)
미혹하지 아니함. 나이 마흔 살의 일컬음.
공자는 일생을 회고하며 자신의 학문 수양의 발전 과정에 대해 《논어》<위정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열 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吾十有五而志于學(오십유오이지우학) - 志學]
서른 살에 자립했다.
[三十而立(삼십이립) - 而立]
마흔 살에는 미혹하지 않게 되었고
[四十而不惑(사십이불혹) - 不惑]
쉰 살에 하늘의 명을 알게 되었다.
[五十而知天命(오십이지천명) - 知命]
예순 살에는 남의 말을 순순히 이해하게 되었고
[六十而耳順(육십이이순) - 耳順]
일흔 살이 되니 마음 내키는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 - 從心]
사면초가 (四面楚歌)
넉(사) 얼굴(면) 초나라(초) 노래(가)
사방에서 楚(초)나라 노래가 들려온다는 말로 궁지에 몰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킨다.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벌인 5년전쟁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전쟁 초기와는 반대로 형세는 이미 항우에게 아주 불리하게 되어 있었다. 항우는 유방에게 강화를 청하여 鴻口(홍구)를 기점으로 천하를 兩分(양분)했다. 홍구의 서쪽은 한나라가 차지하고 동쪽을 초나라가 차지하기로 한 것이다.
강화가 성립되자 항우는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갔다.유방도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자 참모인 장량과 진평이 진언했다.
『지금이야말로 한나라와 초나라 세력의 優劣(우열)은 분명합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리하여 유방은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하게 되었다.해하까지 쫓겨온 항우의 군사는 여기에 성벽을 쌓은 다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미 군량도 거의 바닥이 난데다가 병력마저 반으로 줄어 있었다. 게다가 한나라 군사는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한 상태였다. 그런데 밤이 되자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들리는 것이었다. 항우는 크게 당황해하면서 말했다.
『한나라 군사가 이미 초나라를 정복했단 말인가. 초나라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많은가』
이것은 한나라에 항복한 초나라 병사들에게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해 항우와 그의 군사들의 戰意(전의)를 잃게 하려고 한 장량의 술책이었다. 여기에서 사면초가란 주변에는 적군뿐이어서 고립상태에 빠진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사이비 (似而非)
같을(사) 어조사(이) 아닐(비)
겉은 제법 비슷하나 속은 전혀 다름. 진짜같이 보이나 실은 가짜임. 선량해 보이나 실은 악질임.
전국시대, 아성으로 불리던 맹자에게 어느 날 만장이라는 제자가 물었다.
"한 마을 사람들이 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한다면 그런 사람은 어디를 가든 훌륭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그들을 가리켜 '향원[鄕源 : 사이비 군자]은 덕(德)을 해치는 도둑'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을 비난하려 해도 들어서 비난할 것이 없고, 공격하려 해도 공격할 구실이 없으나 세속에 아첨하고 더러운 세상에 합류한다. 또 집에 있으면 충심과 신의가 있는 척하고, 나아가 행하면 청렴결백한 척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스스로도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들과는 더불어 요순(堯舜)의 도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공자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느니라.
'사이비한 것[似而非者]을 미워한다.....말 잘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정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말 많은 것을 미워하는 것은 신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며, 정(鄭)나라 음악을 미워하는 것은 아악(雅樂)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향원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덕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
사족 (蛇足)
뱀(사) 다리(족)
뱀의 발. 뱀을 그리고 발을 그려 넣다. 있어도 쓸모없는 것 또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공연스레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 畵蛇添足(화사첨족)이라고도 한다.
楚(초)나라의 令尹(영윤·재상) 昭陽(소양)은 魏(위)나라를 치고 나서 다시 齊(제)나라를공격하려고했다.겁이 난 제나라 왕이 때마침 秦(진)나라의 사신으로 와있던 陳軫(진진)에게 소양의 야심을 꺾어 달라고 부탁했다.
진진은 곧 소양을 찾아가 말했다.“초나라에서는 적군을 격파하고 敵將(적장)을 죽인 자에게 어떤 恩賞(은상)을 내립니까.” “上柱國(상주국)이란 벼슬을 주고 작위는 上執珪(상집규)에 해당하지요.”
“상주국보다 더 높은 벼슬은 뭡니까.” “오직 영윤이 있을 뿐이오.” “그렇지요. 영윤은 둘일 수가 없지요. 영윤인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겠소. 어떤 사람이 하인들에게 큰 잔에 따른 술을 내렸답니다.
그것은 여럿이 마시기에는 모자라고 혼자서 마시기에는 넉넉했습니다. 하인들은 의논끝에 땅바닥에 뱀을 그려서 가장 먼저 그린 사람이 그 술을 다 마시기로 했지요. 그래서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윽고 한 사람이 ‘내가 뱀을 가장 먼저 그렸다’고 외치고는 술잔을 집어들더니 ‘나는 발도 그릴 수 있지’하면서 그린 뱀에 발을 덧붙여 그렸답니다.
그러자 그제사 뱀을 다 그린 자가 술잔을 뺏어 마시면서 ‘뱀에 무슨 발이 있어. 자네가 그린 발 달린 뱀은 뱀이 아니야’했다는 군요. 당신은 위나라를 치고 제나라를 두려워하게 만들어 이미 충분히 공을 세웠소. 영윤인 당신이 더이상 받을 官爵(관작)은 없소. 더 욕심을 내다가 목숨이라도 잃는다면 뱀의 발을 그렸다가 술잔을 빼앗긴 자와 무엇이 다르겠소.” 진진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던 소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군사를 거두었다.
삼고초려 (三顧草廬)
석(삼) 돌아볼(고) 풀(초) 풀집(려)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는 뜻. 곧 사람을 맞이함에 있어 진심으로 예를 다함의 비유. 윗사람으로부터 후히 대우받음의 비유.
후한 말엽, 유비는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한실 부흥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을 통솔한 군사(軍師)가 없어 늘 조조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느날 유비가 은사(隱士)인 사마휘에게 군사를 천거해 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룡이나 봉추 중 한 사람만 얻으시오."
"대체 복룡은 누구고, 봉추는 누구입니까?"
그러나 사마휘는 말을 흐린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후 제갈량의 별명이 복룡이란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싣고 양양땅에 있는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
"전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그 자는 아직 나이도 젊다던데..."
"그까짓 제갈 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오."
마침내 동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길에 나섰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가 되어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유비는 그후 제갈량의 헌책에 따라 위나라의 조조, 오나라의 손권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하고 한실의 맥을 잇는 촉한을 세워 황제를 일컬었으며, 지략과 식견이 뛰어나고 충의심이 강한 제갈량은 재상이 되었다.
삼십육계주위상계 (三十六計走爲上計)
석(삼) 열(십) 여섯(육) 꾀할(계) 달아날(주) 할(위) 윗(상) 꾀할(계)
서른 여섯가지 계책중에서 피하는 것이 제일 좋은 계책이란 뜻으로, 일의 형편이 불리할 때는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
남북조 시대, 제나라 5대 황제인 명제때의 일이다. 명제는 송나라를 멸하고 즉위한 고제 소도성의 從姪(종질:사촌형제의 아들)로서 고제의 증손인 3대4대 황제를 차례로 시해하고 제위를 찬탈한 황제이다. 그는 즉위 후에도 고제의 직손(直孫)들은 물론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잡아 죽였다.
이처럼 피의 숙청이 계속되자 고조 이후의 옛 신하들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개국 공신인 회계 태구 왕경측의 불안은 날로 심해졌다. 불안하기는 명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대부 장괴를 평동장군에 임하여 회계와 인접한 오군으로 파견했다. 그러자 왕경측은 1만여 군사를 이끌로 도읍 건강을 향해 진군하여 불과 10여일만에 건강과 가까운 홍성성을 점령했다. 도중에 농민들이 가세함에 따라 병력도 10여만으로 늘어났다.
한편 병석의 명제를 대신하여 국정을 돌보던 태자 소보권은 패전 보고를 받자 피난 준비를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경측은 껄껄 웃으면 이렇게 말했다.
"단장군의 '서른 여섯 가지 계책 중 도망가는 것이 제일 좋은 계책[三十六計走爲上計]이라고 하더라. 이제 너희 부자에게 남은 건 도망가는 길밖에 없느니라."
이 말은 '단장군이 위나라 군사와 싸울 때 도망친 것을 비방한 것이다.' 라고 주석을 붙인 책도 있다.
그 후 관군에게 포위당한 왕경측은 난전중에 목이 잘려 죽었다.
상가지구 (喪家之狗)
초상(상) 집(가) 어조사(지) 개(구)
상갓집 개(주인없는 개)란 뜻으로, 여위고 기운 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이곳 저곳 기웃거리며 얻어먹을 것만 찾아다니는 사람을 빈정거리는 말.
춘추시대 말엽의 대철학자, 사상가로 유교의 비조인 공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노나라 정공때 대사구(법무장관)오서 재상의 직무를 대행하고 있던 공자는 왕족인 삼환(三桓)씨에게 배척을 당하여 노나라를 떠나고 말았다. 그 후 공자는 십수년간 자신이 이상으로 삼는 도덕정치를 펼 수 있는 나라를 찾아서 6,7개국을 순방하였으나 받아주는 군주가 없었다.
56세 때 정나라에 간 공자는 어쩌다가 제자들을 놓치고 홀로 동문옆에 서서 그들이 찾아오기만 기다렸다. 스승을 찾아나서 자공이 한 행인에게 공자의 인상 착의를 대면서 묻자 그 행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동문옆에 웬 노인이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마는 요임금과 같았고, 목은 순우 임금때의 현상 고요와 같았으며, 어깨는 명재상 자산과 같았소. 그러나 허리 아래로는 우 임금에게 세 치쯤 미치지 못했고, 그 지친 모습은 마치 '상갓집 개[喪家之狗]' 같습디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동문으로 달려간 자공은 공자를 만나자 방금 행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고했다. 이야기를 듣고난 공자는 웃으며 말했다.
"용모에 대한 형용은 들어맞는다고 하기 어려우나 상깃집 개와 같다는 표현은 과연 딱 들어맞는 말이다."
정나라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한 공자는 그야말로 상갓집 개와 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기운 없이 노나라로 돌아갔다.
새옹지마 (塞翁之馬)
변방(새) 늙은이(옹) 어조사(지) 말(마)
세상 모든 것이 變轉無常(변전무상)하여 인생살이도 항시 바뀌므로 예측할 수 없다는 말.
옛날 중국 북방 오랑캐들이 사는 胡地(호지)와의 국경 要塞(요새)근처에 한 늙은이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 늙은이의 말이 아무 까닭도 없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늙은이는 전혀 아까워 하는 기색 없이 예사롭게 말했다.
『누가 알겠소. 이것이 복이 될는지』
몇달이 지난 어느 날, 그 말이 오랑캐의 駿馬(준마) 한 마리를 데리고 돌아왔다. 사람들이 축하하러 몰려들었다.
『누가 알겠소. 이것이 禍根(화근)이 될는지』
늙은이는 조금도 기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지 얼마 지나서 늙은이의 아들이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또 다시 위로하러 왔다.
『누가 알겠소. 이것이 복이 될는지』
늙은이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태연히 말하는 것이었다.
1년이 지난 뒤 오랑캐가 쳐들어와서 마을의 젊은이들은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가 거의 모두 戰死(전사)했다. 그러나 늙은이의 아들은 절름발이였기 때문에 무사했다.
수주대토 (守株待兎)
지킬(수) 그루터기(주) 기다릴(대) 토끼(토)
그루터기를 지켜보며 토끼를 기다리다 요행으로 힘들이지 않고 토끼 한마리를 잡고는 그것을 또 기대한다는 뜻.앉아서 일이 성취되기만을 기다리는 어리석음을 비웃는말이다. 또 낡은 습관이나 방법에 얽매여서 時勢(시세)에 대응하는 능력이 없음을 비유하는말이기도 하다.
春秋(춘추)시대 宋(송)나라에 부지런한 한 농부가 있었다.그 날도 여느날처럼 밭에서 일을 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풀숲에서 튀어나온 토끼 한 마리가 밭 가운데에 있는 그루터기에 머리를 들이받고 목이 부러져 죽는 것을 보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니. 다른 짐승에게 쫓기던 토끼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달아나다가 미처 그루터기를 보지 못하고 부딪혀 죽은 것일까.
아무튼 橫財(횡재)한 농부는 토끼를 집어들고 좋아했다.농부는 일손을 놓고 앉았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얼마나 바보였던가. 토끼가 이렇게 저절로 쫓아와서 죽어주는데 날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일만 해왔으니.’그날부터 농부는 농사일을 팽개치고 밭두둑에 앉아 그루터기를 지켜보며 토끼가 달려와서 부딪혀 죽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토끼는 두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밭은 황폐해지고 농사만 망치게 되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비자의 五두篇(오두편)이 전하는 이야기다.
여기서 韓非(한비)는 “지금 先王(선왕)들의 정치를 가지고 當世(당세)의 백성을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마치 그루터기를 지키며(守株) 토끼를 기다리는 것(待兎)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짓고 있다.
순망치한 (脣亡齒寒)
입술(순) 잃을(망) 이(치) 찰(한)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 곧 利害(이해)관계가 밀접해서 한쪽이 망하면 다른 쪽도 위태로워진다는 뜻.
춘추시대의 대국이었던 晋(진)나라는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차례로 쳐부수며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진나라 獻公(헌공)은 괵나라도 정복하려고 했는데 이 나라를 치려면 虞(우)나라를 지나가야만 했다.
그래서 헌공은 우나라 虞公(우공)에게 名馬(명마)와 구슬을 禮物(예물)로 보내고 형제의 우의를 약속하며 길을 빌려달라고 간청했다. 우공은 값진 예물과 감언이설에 솔깃하여 제의를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진나라의 속셈을 알고 있는 宮之奇(궁지기)라는 賢臣(현신)이 이를 말리며 간했다.
『괵나라는 우나라의 표면입니다.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반드시 따라서 망할 것입니다. 진나라에 길을 열어주어서는 안됩니다. 속담에 수레의 덧방나무와 바퀴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보거상의)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순망치한)」고 했는데 이는 바로 우나라와 괵나라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하지만 진나라의 뇌물에 눈이 어두워진 우공은 궁지기의 말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진나라와 우나라는 모두 周(주)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뿌리가 같은 나라가 아니오. 진나라가 우리를 해칠 리는 없소』
결국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궁지기는 가족을 이끌고 우나라를 떠났다. 그때 그는 이렇게 예언했다.
『우나라는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과연 그 해 12월 진나라는 괵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도 공격하여 멸망시켜 버렸다.
양금택목 (良禽擇木)
어질(량) 새(금) 가릴(택) 나무(목)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는 뜻으로, 현명한 사람은 자기 재능을 키워 줄 훌륭한 사람을 가려서 섬김의 비유.
춘추시대, 유가의 비조인 공자가 치국의 도를 유세하기 위해 위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공문자(孔文子)가 대숙질(大叔疾)을 공격하기 위해 공자에게 상의하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사 지내는 일에 대해선 배운 일이 있습니다만, 전쟁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물러나온 공자는 제자에게 서둘러 수레에 말을 매라고 일렀다. 제자가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한시라도 빨리 위나라를 떠나야겠다' 며 이렇게 대답했다.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良禽擇木]고 했다. 마찬가지로 신하가 되려면 마땅히 훌륭한 군주를 가려서 섬겨야 하느니라."
이말을 전해 들은 공문자는 황급히 객사로 달려와 공자의 귀국을 만류했다.
"나는 결코 딴 뜻이 있어서 물었던 것이 아니오. 다만 위나라의 대사에 대해 물어 보고 싶었을 뿐이니 언짢게 생각말고 좀 더 머물도록 하시오."
공자는 기분이 풀리어 위나라에 머룰려고 했으니 때마침 노나라에서 사람이 찾아와서 귀국을 간청했다. 그래서 고국을 떠난 지 오래인 공자는 노구(老軀)에 스미는 고향 생각에 사로잡혀 서둘러 노나라로 돌아갔다.
양두구육 (羊頭狗肉)
양(양) 머리(두) 개(구) 고기(육)
양대가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판다(懸羊頭賣狗肉)는 말을 줄인 것으로 겉은 그럴 듯하고 보기 좋지만 속은 허술하고 변변찮다는 뜻이다.
춘추시대의 제나라 靈公(영공)은 좀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다름아니라 예쁜 여자에게 남자 옷을 입혀놓고 觀賞(관상)하는 일인데 궁중에 있는 미인들을 붙잡아 男裝(남장)을 시키곤 좋아했다. 이같은 작태는 궁중에만 머물지 않고 민간에까지 퍼져 제나라 거리 거리에는 남장한 미녀들로 넘쳐났다. 이에 놀란 영공이 궁중밖에서는 여자가 남장을 못하도록 엄한 禁令(금령)을 내렸다. 그러나 자신은 여전히 남장여인을 보며 즐겼으니 금령은 있으나 마나였다. 그런데도 영공은 금령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답답해진 영공은 그 이유를 재상인 晏子(안자)에게 물어보았다. 안자의 대답은 이러했다.
『전하께서는 궁중에서만 여자에게 남장을 하게 허락하시면서 백성들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양의 대가리를 문에다 내걸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파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째서 궁중에서만 남장하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까. 궁중에서도 금한다면 밖에서 남장하는 여자는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영공은 안자의 말을 듣고 궁중에서도 남장을 못하도록 했다.그러자 금세 제나라 전국에서 남장하는 여자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양상군자 (梁上君子)
대들보(량) 위(상) 군자(군) 아들(자)
대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으로 도둑을 일컫는 말. 천장의 쥐를 말할 때도 쓴다.
後漢(후한) 말엽, 陳寔(진식)이란 사람이 태구현의 현감으로 있을때의 일이다. 진식은 학문을 좋아할 뿐 아니라 매사를 공정하고 관대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현민들한테서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흉년이 들어 현민들이 몹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어느 날 밤 진식이 책을 읽고 있는데 도둑이 살며시 들어와 대들보 위에 숨었다. 그는 짐짓 모르는 척하고 책읽기를 끝내고는 아들과 손자들을 불러들여 訓戒(훈계)를 했다.
『사람들은 모름지기 스스로 힘써야만 한다. 악을 행하는 사람도 본래는 악한 사람이 아니다. 나쁜 습관이 성품이 되어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梁上君子)도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니라』
도둑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대들보에서 뛰어내려와 이마를 방바닥에 조아리며 사죄했다. 진식은 도둑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렇게 깨우쳐 주었다.
『너의 얼굴 모습을 보아하니 악한 사람 같지는 않구나. 깊이 반성하여 사사로운 마음을 이기면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죽 살기에 힘겨웠으면 이런 짓을 했겠나』
진식은 도둑에게 비단 두 필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 일이 알려지자 태구현에는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한다.
어부지리 (漁父之利)
고기잡을(어) 아비(부) 어조사(지) 이로울(리)
어부의 이득. 도요새와 민물조개의 일종인 방합이 싸우는 틈을 타서 어부가 둘 다 잡았다는 故事(고사)에서 나온 말. 곧 쌍방이 다투는 틈을 이용해 제삼자가 애쓰지 않고 가로챈 이득을 말한다.
전국시대의 어느 해 趙(조)나라는 이웃 燕(연)나라에 흉년이 들자 이 틈을 노려 쳐들어가기로 했다. 연나라 왕은 많은 군사를 제나라에 출정시키고 있는 참이어서 조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蘇代(소대)에게 조나라 왕을 설득하도록 부탁했다.
소대는 합종책으로 유명한 蘇秦(소진)의 아우인데 그 역시 說客(세객)으로 연나라를 위해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가 조나라 혜문왕을 찾아가 말했다.
『제가 오늘 귀국으로 오면서 易水(역수)를 건너다가 민물조개인 방합이 강변에서 입을 벌리고 햇볕을 쬐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때 마침 도요새 한 마리가 날아와 방합의 속살을 쪼았습니다. 질겁을 한 방합이 황급히 입을 다물어 도요새의 부리를 물고 놓지 않았습니다. 도요새가 말했습니다. 「오늘도 비가 오지 않고 내일도 비가 오지 않고 이대로 있으면 넌 말라 죽는다」. 조개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오늘도 놓아주지 않고 내일도 놓아주지 않으면 네놈은 굶어 죽을 걸」. 둘은 조금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어부가 힘 안들이고 둘 다 잡아 버렸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연나라를 공격하려 하십니다. 그래선 안됩니다. 조나라와 연나라가 아웅다웅하는
동안 강대한 秦(진)나라가 어부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조나라의 혜문왕은 그럴싸하게 여겨 침공계획을 중지하고 말았다
연목구어 (緣木求魚)
인연(연) 나무(목) 구할(구) 고기(어)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한다는 뜻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굳이 하려 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전국시대 제나라의 宣王(선왕)이 맹자에게 춘추시대의 覇者(패자)였던 제의 桓公(환공)과 晋(진)의 文公(문공)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선왕의 야심을 꿰뚫어 보고 있던 맹자가 반문했다.
『상감께서는 전쟁을 일으켜 신하와 병사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이웃나라와 원수가 되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아니오. 좋아하지는 않으나 그것을 구태여 하려는 것은 나에게 큰 뜻이 있기 때문이오』
맹자가 그 큰 뜻이 무엇인지를 물었으나 선왕이 대답대신에 웃음으로 얼버무리려 하자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상감의 욕망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영토를 확장하여 秦(진)나라나 초나라 같은 나라로부터 문안을 받고 사방의 오랑캐도 따르도록 하고 싶지요. 그러나 그런 일을 무력으로 이루려고 하신다면 그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연목구어)과 같습니다』
『그게 그렇게 무리한 일일까요』
깜짝 놀라서 묻는 선왕의 물음에 맹자의 대답은 이랬다.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보다 무리라 할 것입니다.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다가 물고기를 얻지 못한다 해도 뒤따르는 재난은 없습니다. 그러나 무력으로 큰 뜻을 이루려고 하시면 백성을 잃고 나라를 망치는 재난이 닥칠 뿐 결코 좋은 결과는 얻지 못합니다』
오리무중 (五里霧中)
다섯(오) 마을(리) 안개(무) 가운데(중)
5리나 되는 짙은 안개 속에 있다는 뜻. 짙은 안개 속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무슨 일에 대해 갈피를 못잡고 알 길이 없음을 일컫는 말이다.
後漢(후한)때 장해라는 碩學(석학)이 있었다. 제자도 많고 학자나 귀족들 중에서도 교제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 그의 居所(거소)는 저자를 이루었다고 한다. 벼슬살이를 권하자 그걸 피하느라 산중에 隱居(은거)해버렸다.
장해의 아버지 장패도 지조와 절개가 굳어서 어떤 권세와도 야합하려 하지 않은 뼈대 있는 학자였다. 장해는 이런 아버지의 기개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다.
장해가 산중에 은거한 뒤에 새로 즉위한 순제는 이렇게 칭찬한 적이 있다.
『장해의 행실은 원헌(공자의 제자)을 따르고 그 지조는 백이와 숙제에 못지 않다』
이렇게 장해의 인품과 학문을 높이 평가한 순제가 벼슬을 권했으나 그는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다.
장해는 道術(도술)에도 능해 곧잘 5리나 이어지는 안개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때 배우라는 사람도 도술을 써서 3리에 걸치는 안개를 일으킬 수 있었는데 그는 장해에는 실력이 미치지 못함을 알고 제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장해는 모습을 감추고 만나주지 않았다.
배우는 뒤에 안개를 일으켜 못된 짓을 하다 붙잡히자 장해로부터 도술을 배웠다고 진술하는 바람에 죄없는 장해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고.
오십보백보 (五十步百步)
다섯(오) 열(십) 걸음(보) 일백(백) 걸음(보)
인, 의의 도를 널리 깨우쳐 주기 위해 유세하고 다니던 맹자가 위나라 혜왕의 초청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혜왕은 그 서울을 양으로 옮겼기 때문에 양혜왕이라고도 한다.
위나라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위세를 떨치던 서쪽 진나라에게 부단한 압력을 받아왔으므로 동쪽 양으로 천도를 했다. 또 동쪽 제나라와의 싸움에 있어서도 몇 번이나 큰 패전을 거듭하여 역경에 빠져 있었다. 혜왕은 이름 높은 명사들을 데리고 의견을 들어 벼슬을 주는 등 역경을 극복하고, 애써 위나라의 국운을 돌이켜 보려고 노력했다.
맹자는 그러한 목적에서 초정을 받은 사람이었다.
"선생! 이렇게 불원천리하고 찾아와주니 고맙소.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나라가 부강하게 되겠는지 선생의 견해를 듣고 싶어서..."
"왕의 나라가 부강해 지느냐 안되느냐 하는 문제는 둘째로 하고 이 사람은 먼저 인과 의에 대한 말씀부터 올릴까 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들은 장시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맹자는 당분간 머물게 되었다.
혜왕은 크게 기대했던 맹자가 도무지 속시원한 의견이나 묘안을 일러주지 않아서 기분이 언짢았지만 꾹 참고 있었다.
며칠이 지난 뒤였다.
"선생 그대가 가르쳐 주는 가운데 '백성을 사랑하라'는 일에 대해서는 나도 상당히 인식하고 노력할 것으로 압니다. 예를 들면 내 나라의 하내 지방이 흉년을 만났을 때 젊은이들을 하동으로 옮겨주고 나머지 노인과 아녀자들에게는 하동지방의 곡식을 실어다가 굶주리지 않도록 했으며 다른 지방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도 그런 식으로 해서 나로서는 극력 민생문제를 해결하느라고 무던히 노력을 했소. 내가 이웃 나라 정책을 조사해 본 결과 나만큼 선정을 베푼 군주가 없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른 나라 백성이 더 줄지도 않고 우리 나라 백성 또한 늘지를 않았으니 이 무슨 까닭이요?"
"왕은 무척 전쟁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한 가지 비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참 격전이 벌어지고 마지막 백병적으로 돌입하라는 군호가 울렸습니다. 이 때 어느 병사가 겁을 집어먹고 갑옷을 멋어 던진 채 칼을 질질 끌며 도망질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백보를 달아나서 숨을 돌리려니까 또 한 사람의 병사가 그 뒤를 쫓아서 도망질을 쳐 오다가 50보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백보를 달아난 병사를 보고 '야 이 비겁한 놈아' 하고 비웃었습니다.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혜왕은 싱겁다는 듯이 대꾸했다.
"어리석은 녀석 아닌가? 오십보거나 백보거나 달아나기는 마찬가지니..."
"됐습니다. 왕께서 그것을 아신다면 나라 백성이 다른 나라보다 많아지는 것을 바랄 필요가 없습니다."
맹자는 이렇게 핵심을 찌른 다음 자기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는 근본 즉 왕도에 대한 설명과 교훈을 펼치기 시작했다.
오월동주 (吳越同舟)
오나라(오) 월나라(월) 같을(동) 배(주)
사이가 나쁜 吳(오)나라와 越(월)나라가 한배에 타다. 서로 敵意(적의)를 품은 사람이 한자리나 같은 처지에 있음을 가리키는 말. 아무리 원수지간이라도 같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면 서로 협력하게 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춘추시대 오나라의 孫武(손무)는 병법에 통달한 명장이었다.
유명한 兵法書(병법서)인 「孫子(손자)」는 바로 그가 쓴 것이다.
「손자」의 九地篇(구지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군사를 통솔하는 데에는 아홉 가지의 地(지)가 있다. 구지 가운데 마지막 地를 死地(사지)라 한다. 두려움없이 나가 싸우면 살 길이 있고 겁내어 나가지 않으면 망하는 必死(필사)의 地이다. 그러니까 사지에 있을 때에는 싸워라. 그래야 길이 열린다. 사지에서는 모든 군사가 한마음 한뜻으로 싸워야 한다.
用兵術(용병술)에 능한 장수는 군사가 率然(솔연)을 닮게 해야 한다. 솔연은 常山(상산)에 있는 큰 뱀인데 대가리를 치면 꼬리로 대들고 꼬리를 치면 대가리로 덤벼들며 몸통을 치면 대가리와 꼬리가 함께 덮친다. 이처럼 세력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서로 미워하고 있다. 하지만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吳越同舟) 강을 건넌다고 하자. 도중에 큰 바람을 만나 배가 뒤집히려고 한다면 두 사람은 평소의 敵愾心(적개심)을 잊고 서로 왼손과 오른손이 되어 도울 것이다. 이처럼 戰車(전차)의 말들을 붙들어매고 전차바퀴를 땅에 파묻어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도움이 되는 것은 필사적으로 뭉친 군사들의 마음이다』
와신상담 (臥薪嘗擔)
누울(와) 섶(신) 맛볼(상) 쓸개(담)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고 쓸개를 핥으며 보복을 다짐한다는 말로 마음 먹은 일을 이루기 위해 온갖 괴로움을 무릅쓴다는 뜻.
춘추시대, 오나라 왕 합려는 월나라를 공격했다가 월왕 구천에게 크게 패했다. 이 싸움에서 부상한 합려는 목숨까지 잃게 된다. 임종 때 합려는 태자인 부차에게 반드시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는 유언을 했다.
부차는 복수심을 다지기 위해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자고 방을 드나드는 신하들에게 『부차여, 너는 월나라 군대가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잊었는가』라는 말을 외치게 했다. 이렇게 하는 한편 군사를 훈련시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런 소문을 들은 구천은 참모인 범려가 말리는 것을 듣지 않고 선수를 쳐 오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大敗(대패)한 구천은 회계산으로 도망갔다.
進退(진퇴)가 궁해진 구천은 신하가 되겠다며 부차에게 항복을 받아달라고 했다. 이때 부차는 중신인 오자서의 諫言(간언)을 뿌리치고 구천을 놓아주었다.
살아난 구천은 자기 곁에 쓸개를 놓아두고 수시로 쓸개를 핥아 그 쓴 맛을 맛보며 「회계의 치욕」을 상기하면서 병력을 키웠다. 구천이 오나라를 격파하여 부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그로부터 약 20년이 흐른 뒤였다.
용두사미 (龍頭蛇尾)
용(용) 머리(두) 뱀(사) 꼬리(미)
용의 머리에 뱀의 꼬리. 처음은 旺盛(왕성)하지만 끝이 부진한 형상을 비유한 말이다.
용은 實在(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로 거대한 파충류인데 몸통은 뱀과 비슷하며 비늘이 있고 네개의 발을 가진 것으로 되어 있다. 뿔은 사슴에, 눈은 귀신에, 귀는 소에 가깝고 깊은 못이나 바다에 거처하며 때로는 자유로이 공중을 날아 구름과 비를 몰아 風雲(풍운)조화를 부린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기린 봉황 거북과 함께 상서로운 四靈(사령)의 하나로 치고 있다.
宋(송)나라에 陳尊者(진존자)라는 스님이 있었다.
龍興寺(용흥사)란 절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 절에서 나와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짚신을 삼아서 길 가는 나그네들이 주워 신도록 길에다 놓아두곤 했다고 한다.
이 진존자가 老年(노년)에 접어들었을 때의 일이다. 어떤 중을 만나 禪問答(선문답)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 중이 느닷없이 『에잇』하고 奇聲(기성)을 질렀다.
진존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중을 쳐다보자 그 중은 또 다시 『에잇』하고 호통치듯 큰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상당한 경지에 든 스님인 것같기도 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어쩐지 수상쩍었다.
진존자는 「이 중이 그럴 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진짜는 아닌 것같다. 용의 머리에 뱀의 꼬리(龍頭蛇尾)가 분명해」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보시오. 큰 소리는 그만 지르고 하던 선문답이나 계속합시다』라면서 그 중을 다그쳤으나 밑천이 다 드러난 중은 입을 다물어버려 마침내 뱀꼬리를 내보이는 것이었다.
자포자기 (自暴自棄)
스스로(자) 사나울(포) 스스로(자) 버릴(기)
마음에 불만이 있어 행동을 되는 대로 마구 취하고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음을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은 원래 孟子(맹자)의 離婁篇(이루편) 上(상)에 나오는데 오늘날의 쓰임새와는 좀 달랐다. 요즘에는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하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지만 당초에는 격이 더 높은 말로 쓰였다. 이 말의 원래의 뜻을 「맹자」에 써 있는 대로 따라 읽어보자.
맹자가 말했다.
『스스로 자신을 해치는 사람과는 더불어 말할 수가 없다. 또 스스로 자신을 버리는 사람과도 더불어 행동할 것이 못된다.
입만 열면 예의도덕을 헐뜯는 것을 「자포」라 하고 仁(인)이나 義(의)를 인정하면서도 그런 것은 도저히 자기 손에는 닿지 않는 것이라 하는 것을 「자기」라고 한다.
도덕의 근본 이념인 「인」은 편안히 살 수 있는 집과 같은 것이며 「의」는 사람이 걸어야 할 올바른 길이다. 세상 사람들이 편안한 집을 비워두고 살지 않으며 올바른 길을 두고도 걷지 않으려 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로다』
「이루편 상」에는 이같은 맹자의 말만 나열되어 있을 뿐 이것이 언제 누구에게 한 말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맹자는 자포와 자기를 구별해서 쓴 것 같지만 요즘에는 자포자기라하여 좌절하거나 실의에 빠졌을 때 자기자신을 아무렇게나 해버리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조삼모사 (朝三暮四)
아침(조) 석(삼) 저물(모) 넉(사)
눈 앞에 당장 나타나는 차별만을 알고 그 결과가 같음을 모르는 것을 비유한 말. 또 간사한 꾀로 사람을 속여 희롱함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춘추시대의 宋(송)나라에 狙公(저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狙(저)란 원숭이라는 말이다. 그는 그 이름에 값할 만큼 많은 원숭이를 길렀는데 집안 식구들의 식량을 줄여가면서까지 원숭이를 먹일 정도로 원숭이를 좋아했다. 그러다보니 저공은 원숭이의 마음을 훤히 알 수 있었고 원숭이 또한 저공의 마음을 잘 알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공의 가세가 기울어 먹을 것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원숭이의 먹이를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저공은 애써 길들여놓은 원숭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걱정하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다.
『너희들에게 주는 도토리를 이제부터는 아침에 셋, 저녁에 넷으로 할텐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니까 원숭이들은 모두 일어나서 화를 내었다. 이 광경을 본 저공은 원숭이들에게 고쳐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아침에 도토리 넷, 저녁에 셋으로 하면 되겠지』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삼모사나 조사모삼이나 합쳐보면 하루에 도토리 일곱개씩으로 두 경우 똑같은데 원숭이들은 아침의 먹이가 세개에서 네개로 늘었다는데 만족한 것이다.
죽마고우 (竹馬故友)
대(죽) 말(마) 예(고) 벗(우)
어릴 때 같이 죽마(대말)를 타고 놀던 벗이란 뜻. 곧 어렸을 때의 벗. 소꿉친구. 오랜친구
【동의어】죽마지우(竹馬之友), 죽마구우(竹馬舊友)
【유사어】기죽지교(騎竹之交), 죽마지호(竹馬之好)
【출 전】 《世說新語(세설신어)》<品藻篇(품조펴)> 《晉書(진서)》<殷浩傳(은호전)>
진나라 12대 황제인 간문제때의 일이다. 촉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환온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간문제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은호라는 은사를 건무장군 양주자사에 임명했다. 그는 환온의 어릴 때 친구로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재였다. 은호가 벼슬길에 나아가는 그날부터 두 사람은 정적이 되어 반목(反目)했다. 왕희지가 화해시키려고 했으나 은호가 듣지 않았다.
그 무렵, 오호 십육국 중 하나인 후조의 왕석계룡이 죽고 호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진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중원 땅을 회복하기 위해 은호를 중원장군에 임명했다. 은호는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으나 도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결국 대패하고 돌아왔다. 환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호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 그를 변방으로 귀양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환온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호는 나와 '어릴 때 같이 죽마를 타고 놀던 친구[竹馬故友]'였지만 내가 죽마를 버리면 은호가 늘 가져가곤 했지. 그러니 그가 내 밑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환온이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음으로 해서 은호는 결국 변방의 귀양지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지음 (知音)
알(지) 소리(음)
상대방이타는 거문고소리만 듣고도 그 사람의 속마음까지 알수 있을정도로 서로 뜻이 통했다는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
지기지우(知己之友)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임
이 이야기는 <열자> 탕문편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타고, 종자기는 타는 소리의 뜻을 잘 알았다. 백아가 거문고를 들고 높은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으로 타고 있으면, 종자기는 옆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가 막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산이 눈 앞에 나타나 있구나."
또 백아가 흐르는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또
"참으로 좋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 눈 앞을 지나고 있는것 같다" 하고 감탄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백아의 속마음을 꼭 알아주는 것이 항상 이런정도였다.
또 <여씨춘추>에도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은 다음, 평생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이 세상에 다시 자기 거문고 소리를 들려 줄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속마음을 알아주는 지기지우를 '지음(知音)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록위마 (指鹿爲馬)
가리킬(지) 사슴(록) 할(위) 말(마)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우기다. 고의로 진상을 가리고 억지를 써서 시비를 뒤바꾸는 것을 비유하는 말.
秦(진)나라 始皇帝(시황제)는 죽기에 앞서 북쪽 변방을 지키고 있던 장자 扶蘇(부소)를 불러 장례식을 치르게 하라는 詔書(조서)를 남겼다. 그것은 바로 후계자로 지명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조서를 맡고 있던 환관 趙高(조고)는 거짓 조서를 꾸며 부소를 죽이고 후궁 소생인 胡亥(호해)를 세워 2세 황제로 삼았다.
똑똑한 부소보다 어리석은 호해가 다루기 쉬울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고는 호해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경쟁자이자 승상인 李斯(이사)를 죽인 다음 자신이 승상의 자리에 앉아 권력을 한 손에 쥐고 흔들었다. 조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황제의 자리마저 노렸다.
그러나 막상 擧事(거사)를 도모하려니 조정 대신들이 얼마나 자기를 따라줄지 궁금했고 그걸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어느날 조고는 호해에게 사슴 한마리를 바치면서 “폐하께 말을 헌상하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호해는 웃으며 “승상은 농담을 좀 심하게 하는 구려. ‘사슴을 가지고 말이라고 하다니(指鹿爲馬)’”하면서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 보았다.
조고는 정색을 하고 나섰다. “이건 분명히 말입니다. 믿지 못하시겠으면 여기 있는 대신들에게 물어보십시오.” 호해의 물음에 조고를 두려워하는 대신들은 말이 맞다고 했고 몇몇은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분명하게 사슴이라고 대답하는 용기있는 신하도 더러 있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사람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터무니없는 죄를 씌워 모두 죽여버렸다. 그러자 조정에는 조고의 뜻에 거스르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게 되었다.
지어지앙 (池魚之殃)
못(지) 고기(어) 갈(지) 재앙(앙)
연못 속 물고기의 재앙이란 뜻. 곧 화가 어뚱한 곳에 미침. 상관없는 일의 재난에 휩쓸려 듦의 비유.
【동의어】앙급지어(殃及池魚)
【출 전】《呂氏春秋》<必己篇>
춘추시대 송나라에 있었던 일이다. 사마(司馬 : 大臣) 벼슬에 있는 환퇴라는 사람이 천하에 진귀한 보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죄를 지어 처벌을 받게 되자 보석을 가지고 종적을 감춰 버렸다. 그러자 환퇴의 보석 이야기를 듣고 탐이 난 왕은 어떻게든 그 보석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은 측근 환관에게 속히 환퇴를 찾아내어 보석을 감춰둔 장소를 알아보라고 명했다. 환관이 어렵사리 찾아가자 환퇴는 서슴없이 말했다.
"아, 그 보석 말인가? 그건 내가 도망칠 때 궁궐 앞 연못 속에 던져 버렸네."
환관이 그대로 보고하자 왕은 당장 신하에게 그물로 연못 바닥을 훑어 보라고 명했다. 그러자 보석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연못의 물을 다 퍼낸 다음 바닥을 샅샅이 뒤졌으나 보석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연못의 물을 퍼 없애는 바람에 결국 애꿏은 물고기들만 다 말라 죽고 말았다.
청출어람 (靑出於藍)
푸를(청) 날(출) 어조사(어) 쪽빛(남)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음을 이르는 말이다. 쪽은 잎을 물감으로 쓰는 한해살이 풀.
이 말은 孟子(맹자)와 더불어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맹자의 性善說(성선설)에 대해 性惡說(성악설)을 주장한 荀子(순자)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에서 생겨났다.
「배움은 중지하지 말아야 한다. 청색은 남(쪽)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남보다 더 푸르고(靑出於藍而靑於藍)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되는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
학문이란 그만둘 수 없는 것이므로 결코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며 학문의 기초를 만들어준 스승보다 훨씬 깊은 학문을 쌓아올린 제자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남북조시대 이야기다. 北朝(북조)의 공번이란 선비에게 李謐(이밀)이란 제자가 있었다. 비상한 재주를 가졌던 이밀의 실력은 日就月將(일취월장), 몇년이 흐르자 공번은 이밀이 자기를 앞섰다면서 스스로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청출어람이란 말을 처음 쓴 순자의 제자 중에서도 韓非子(한비자) 李斯(이사)같은 쟁쟁한 사상가나 정치가가 배출되었지만 그들은 청출어람하고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칠보지재 (七步之才)
일곱(칠) 걸음(보) 갈(지) 재주(재)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시를 지을 수 있는 재주라는 뜻으로, 아주 뛰어난 글재주를 이르는 말.
【동의어】칠보재(七步才), 철보시(七步詩)
【유사어】의마지재(倚馬之才), 오보시(五步詩)
【출 전】《世說新語》<文學篇>
삼국시대의 영웅이었던 위왕 조조는 무장 출신이었지만 건안 문학의 융성을 가져왔을 정도로 시문을 애호하여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맏아들인 비(丕)와 셋깨 아들인 식(植)도 글재주가 출중했다. 특히 식의 시재(詩才)는 당대의 대가들로부터도 칭송이 자자했다. 그래서 식을 더욱 총애하게 된 조조는 한때 비를 제쳐 놓고 식으로 하여금 후사(後事)를 잇게 할 생각까지 했었다.
비는 어릴 때부터 식의 글재주를 늘 시기해 오던 차에 후사 문제까지 불리하게 돌아간 적도 있고 해서 식에 대한 증오심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조조가 죽은 뒤 위왕을 세습한 비는 후한의 헌제를 폐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문제라 일컫고 위라고 했다.
어느날, 문제는 동아왕(東阿王)으로 책봉된 조식을 불러 이렇게 하명했다.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시를 짓도록 하라. 짓지 못할 땐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
조식은 걸음을 옮기면 이렇게 읊었다.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煮豆燃豆箕(자두연두기)]
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어쩌하여 이다지도 급히 삶아대는가[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부모를 같이하는 친형제인데 어째서 이다지도 심히 핍박하는가' 라는 뜻의 칠보시를 듣자 문제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칠종칠금 (七縱七擒)
일곱(칠) 놓을(종) 일곱(칠) 사로잡을(금)
일곱 번 풀어주었다가 일곱 번 사로잡다. 상대를 제압하되 강압적이기보다는 마음으로 굴복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관우와 장비도 죽고 昭烈帝(소열제) 유비마저 세상을 뜬 蜀漢(촉한)의 운명은 이제 諸葛亮(제갈량)의 두 어깨에 매달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제갈량은 한마음 한뜻으로 後主(후주) 유선을 보필하면서 천하통일의 대업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남쪽 운남지방에서 蠻族(만족) 추장 孟獲(맹획)이 들고 일어났다. 맹획은 용맹한 데다 만족사이에서는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위협을 느낀 제갈량은 먼저 남방을 평정한 뒤 北伐(북벌)을 하기로 하고 南征(남정)의 길에 올랐다.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瀘水(노수)를 건너 맹획을 추격하면서 그를 생포하려고 했다. 산 중턱에서 촉한군을 맞은 맹획은 진두에서 용감히 싸웠는데 얼마가 지나자 촉한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맹획은 퇴각하는 촉한군을 뒤쫓았다. 유인작전에 말려든 맹획은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항복을 권하는 제갈량의 말에 맹획은 이렇게 큰소리쳤다.
“내가 진게 아니고 비겁한 책략에 말려들었기 때문이다. 촉한군 진영이 이 정도라면 대단할 것도 없다. 정면으로 대결한다면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제갈량은 웃으며 맹획을 놓아주었다. 맹획을 죽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만족의 원한을 사서 오히려 반항세력이 더 커질 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맹획은 진용을 가다듬어 다시 공격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생포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일이 거듭되었다. 제갈량은 결국 ‘일곱번 놓아주고 일곱번 붙잡았다(七縱七擒)’. 또 한번 풀어주려고 했지만 맹획은 투구를 벗어 버리고 제갈량 앞에 엎드렸다. 동시에 운남지방도 평정되었다.
파부침선 (破釜沈船)
깨트릴(파) 솥뚜경(부) 잠길(침) 배(선)
밥 짓는 가마솥을 때려 부수고 돌아갈 배도 가라앉히다. 決死(결사)의 각오로 싸움터에 나서거나 최후의 결단을 내림을 비유하는 말.
秦(진)나라가 말기 증세를 보이자 각지에서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가 하면 제후들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초나라 때부터 장군의 전통을 이어온 項羽(항우)와 그의 삼촌 項梁(항량)도 반기를 들었다. 호응하는 사람들로 세력을 크게 불린 항량과 항우는 곳곳에서 진나라 군대를 무찔렀다. 그러나 봉기군은 定陶(정도·지금의 산둥성 서쪽)에서 진나라 장군 章邯(장한)에게 크게 패해 봉기군 총수 항량도 목숨을 잃었다.
장한은 승세를 몰아 조나라의 수도였던 한단을 격파하고 조왕이 있는 鉅鹿(거록·허베이성 남쪽)을 포위했다. 조왕의 구원 요청을 받은 초왕은 宋義(송의)를 상장, 항우를 차장으로 앉혀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송의는 군대를 安陽(안양·허베이성과 허난성의 경계지점)까지 진격시키고는 40여일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작전상 그렇게 했지만 몇번이나 진군을 재촉해도 송의가 듣지 않자 항우는 송의의 목을 베었다. 상장이 된 항우는 전군을 이끌고 黃河(황하)를 건넜다. 전군이 강을 건너자 항우는 ‘타고 온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가마솥과 시루를 부수고(皆沈船 破釜甑·개침선 파부증)’ 진영을 불태운 뒤 사흘분 군량만을 지급함으로써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지시했다.
과연 전장병은 결사의 각오로 싸웠다. 이 싸움에서 항우군은 一當百(일당백)의 용맹을 떨쳐 조왕을 구원하러 온 다른 제후들의 군사들은 그저 입을 딱 벌리고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이 끝나자 제후의 장군들이 항우의 진영에 모였는데 모두 머리를 숙이고 무릎걸음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 싸움으로 反秦(반진) 연합군 가운데서 항우는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파죽지세 (破竹之勢)
깨트릴(파) 대(죽) 갈(지) 기세(세)
글자풀이는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인데 세력이 강대하여 大敵(대적)을 거침없이 물리치고 쳐들어 가는 기세를 말한다.
삼국 가운데 蜀漢(촉한)이 맨먼저 망하고 천하는 魏(위)의 뒤를 이은 晋(진)과 남방의 吳(오)가 對峙(대치)하게 되었다.진나라의 장군 양호는 오나라를 칠 것을 몇차례나 상소했지만 북쪽 흉노의 南下(남하)를 우려한 重臣(중신)들의 반대로 宿願(숙원)을 이룰 수가 없었다. 뒷날 양호는 죽으면서 두예를 武帝(무제)에게 천거했다. 양호는 자기의 꿈을 두예에게 위탁했던 것이다.
장군이 된 두예도 오나라 정벌을 역설했고 마침내 무제는 두예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윽고 진나라의 대군이 南征(남정)을 개시, 형주를 쳐서 점령했다.
여기서 장군들이 모여 작전회의를 열었는데 한 장군은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지금 단번에 승리를 거두기는 어렵소. 게다가 지금은 봄철이어서 비가 많이 내리고 질병도 발생하기 쉽소.여기서 일단 작전을 중지하고 다음 겨울까지 기다리는 게 좋지 않겠소』
그러자 두예가 단호히 말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되오. 지금 우리 군대의 사기는 크게 높아져 있소. 이것을 비유해서 말하면 대나무를 쪼개는 것(파죽지세)과 같소. 두 마디 세 마디 마디를 쪼개다 보면 나중에는 칼만 대면 저절로 쪼개져서 힘을 들일 필요가 없소. 그러니까 지금이 절호의 기회요』
풍수지탄 (風樹之嘆)
바람(풍) 나무(수) 어조사(지) 탄식할(탄)
'나무는 조용하고자 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는 樹欲靜而風不止(수욕정이풍부지)에서 따온 말로 효도를 하려 해도 이미 부모가 죽고 없어 효행을 다할 수 없는 슬픔. 부모가 살아 있을 때 효도하지 않으면 뒤에 한탄하게 된다는 말.
孔子(공자)가 자기의 뜻을 펴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고 있을 때였다. 그날도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몹시 슬피 우는 소리가 공자의 귀에 들려왔다. 울음 소리를 따라가 보니 哭聲(곡성)의 張本人(장본인)은 고어라는 사람이었다.
공자가 우는 까닭을 물어보았다.울음을 그친 고어가 입을 열었다.“저에게는 세가지 恨(한)이 되는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공부를 한답시고 집을 떠나있다가 고향에 돌아가보니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둘째는 저의 經綸(경륜)을 받아들이려는 君主(군주)를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셋째는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친구와 사이가 멀어진 것입니다.”
고어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리 나무가 조용히 있고 싶어도 불어온 바람이 멎지 않으니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樹欲靜而風不止). 마찬가지로 자식이 효도를 다하려고 해도 그때까지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子欲養而親不待也·자욕양이친부대야). 돌아가시고 나면 다시는 뵙지 못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저는 이제 이대로 서서 말라 죽으려고 합니다.”
고어의 말이 끝나자 공자는 제자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명심해 두어라. 훈계로 삼을 만하지 않은가.” 이날 충격과 함께 깊은 감명을 받은 공자의 제자중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를 섬긴 사람이 열세명이나 되었다.
형설지공 (螢雪之功)
반딧불(형) 눈(설) 어조사(지) 공(공)
여름 밤에는 반딧불로, 겨울 밤에는 눈빛으로 글을 읽는 등 고생하면서 공부하여 얻은 보람.
東晋(동진)의 車胤(차윤)이라는 사람은 책 읽고 공부하기를 좋아했지만 집이 가난하여 등잔의 기름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차윤은 여름밤이면 명주 주머니에 수십마리의 반딧불이를 잡아넣어 그 불빛으로 책을 비추어 가면서 읽고 또 읽었다.
마침내 그는 尙書郎(상서랑)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이 직책은 황제의 측근에서 詔書(조서)를 다루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리였다.
같은 무렵 동진에는 孫康(손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도 집안이 가난하기는 차윤과 같았다.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친구도 좋은 사람만을 골라 사귀었다. 공부는 해야겠는데 기름 살 돈이 없어 밤에는 책을 덮어 두어야 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겨울이 되어 눈이 쌓이면 창문의 눈에 책을 비추어 읽었던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덕택에 뒷날 御史大夫(어사대부)가 되었다. 오늘날 검찰총장이나 감사원장쯤 되는 자리였다. ‘진서’에 나오는 차윤과 ‘몽구’에 있는 손강의 이야기가 합해져서 螢雪之功이란 成語(성어)가 생긴 것이다.
공부를 지독하게 파고듦의 비유로 懸頭刺股(현두자고)란 말도 있다. 漢(한)나라의 孫敬(손경)은 洛陽(낙양)의 대학에 있을 때 공부에만 매달렸다. 공부하다가 졸음이 와서 고개가 숙여지지 못하도록 ‘자신의 머리를 대들보에 끈으로 매달아 놓고’(懸頭) 책을 읽었다.
전국시대 遊說家(유세가)로 유명한 蘇秦(소진)은 책을 읽는데 졸음이 오면 송곳을 가져다가 자신의 넓적다리를 찔렀다(刺股). 어떨 때는 흘러내린 피가 발뒤꿈치까지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호가호위 (狐假虎威)
여우(호) 거짓(가) 범(호) 위엄(위)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으스댄다는 뜻으로 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리는 것을 말한다.
楚(초)나라 宣王(선왕)은 魏(위)나라 출신인 江乙(강을)이란 신하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위나라를 비롯한 북방의 여러나라가 우리 초나라 재상 昭奚恤(소해휼)을 두려워하고 있다는데 그게 정말이오?』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그들이 일개 재상에 지나지 않는 소해휼을 두려워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막강한 초나라의 힘때문이죠』
이렇게 말을 받은 강은은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겨온 소해휼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호가호위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생긴 연유는 이렇습니다. 어느날 호랑이가 여우를 잡았는데 잡아먹히게 된 여우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대가 나를 잡아먹으면 나를 온갖 짐승의 왕으로 삼으신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 된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내가 앞장서서 갈테니까 뒤를 따라와 봐라. 그 어떤 짐승도 나만 보게 되면 위엄에 눌려 모두 도망치고 말 것이다」그래서 호랑이는 여우를 따라가 보았더니 과연 모든 짐승들은 그들을 보기가 무섭게 달아났습니다. 짐승들이 달아난 것은 여우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여우 뒤를 따라온 호랑이 때문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호랑이는 그걸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소해휼은 왕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는 여우가 되고, 선왕은 소해휼이 훌륭해서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는 줄로 알고 있는 어리석은 호랑이가 되고 만 셈이었다.
호연지기 (浩然之氣)
넓을(호) 그럴(연) 어조사(지) 기운(기)
하늘과 땅 사이에 넘치게 가득찬 넓고도 큰 원기. 도의에 뿌리를 박고 공명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바 없는 도덕적 용기.사물에서 해방되어 자유스럽고 유쾌한 마음.
孟子(맹자)의 제자 公孫丑(공손추)는 齊(제)나라 사람이었다. 어느날 스승에게 이렇게 물었다.“선생님께서 제나라의 재상이 되시어 도를 행하신다면 제나라를 천하의 覇者(패자)로 만드실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마음을 한번 움직여 보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마흔을 넘기고는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없다네.”
“그러시다면 어떻게 하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됩니까.”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不動心·부동심)은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네. 용기가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요체가 되지.”
“그렇다면 선생님의 부동심과 告子(고자)의 그것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고자는 제나라의 사상가로 맹자가 性善說(성선설)을 주창한데 반해 성악설을 내세운 사람이다.
“고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억지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했어. 그러니까 신경을 쓰지 않음으로써 부동심을 얻으려고 했다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소극적이지. 그런데 나는 남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네. 그러니까 고자와 나의 부동심은 다르지. 게다가 나는
浩然之氣(호연지기)를 기르고 있다네.”
“그럼 호연지기란 무엇입니까.”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네.그 氣는 더없이 광대하고 강건하며 그것을 곧게 길러서 해되게 하지 않는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게 된다네. 그리고 그 기는 道(도)와 義(의)를 따라 길러지며 이것을 잃으면 기는 시들어 버리고 만다네.”
홍일점 (紅一點)
붉을(홍) 한(일) 점(점)
송(宋)나라 신종을 섬기면서, 이른 바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만들어 일거에 부국강병의 나라를 이룩해보고자 했다가, 사마광, 구양수, 정이천, 소식 등 유명한 학자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마침내 중도에서 좌절한 사람이 있다. 왕안석(王安石)이라는 이 사람은 그만 번민 끝에 68세를 일기로 하여 세상을 떠났는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드는 문장가(文章家)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 왕안석이 지은 <석류시(石榴詩)>속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만록총중(萬綠叢中)에 홍일점(紅一點) 있도다.
사람을 움직이게하는 춘색(春色)은 많은들 무엇하리.
온통 녹색이 우거진 속에 피어있는 빨간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과 예쁨은 춘색의 으뜸이라고 추켜세운 내용의 시이다.
여기에 나온말이 <홍일점>이다. 당초에는 식물에 비유했던 것인데 요즈음에는 '많은 남성들 속에 섞인 한 명의 여성' 이란 뜻으로 흔히 쓰이고 있다.
화룡점정 (畵龍點睛)
그림(화) 용(룡) 점찍을(점) 눈동자(정)
그림을 그린 뒤 눈동자에 점을 찍다. 사물의 가장 요긴한 곳 또는 무슨 일을 함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끝내어 완성시킴을 이르는 말.
南北朝(남북조)시대 梁(양)나라의 張僧繇(장승요)는 東晋(동진)의 顧愷之(고개지), 吳(오)의 陸探微(육탐미)와 더불어 남북조 3대가의 한사람으로 꼽힐 만큼 유명한 화가다.
장승요는 모든 사물을 살아있는 것처럼 그려냈는데 특히 그의 걸작중에는 佛畵(불화)가 많다.어느날 그는 安樂寺(안락사)란 절의 주지로부터 용그림을 벽화로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으나 주지의 끈덕진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장승요는 마침내 절간의 벽에 네마리의 용을 그렸다. 용들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치솟아 오를 듯 생동감이 넘쳐흘러 그림을 보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사람들이 용의 눈에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다가 깜빡했는지, 아니면 무슨 깊은 뜻이라도 있는지 사람들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승요는 그 이유를 따지는 물음에 시달리다가 겨우 입을 뗐다.
“눈동자는 그려 넣을 수가 없소. 그것을 그려 넣으면 용은 당장 벽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만단 말이오.”이 말을 사람들이 믿을 턱이 있는가. 눈동자를 그려 넣으라는 독촉을 견디다 못한 장승요는 마침내 먹물을 푹 찍은 붓을 두마리 용의 눈에 갖다 대고 점을 찍었다.
이윽고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번쩍하더니 벽이 무너지고 눈동자를 그려 넣은 두마리의 용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 버렸다. 물론 장승요의 그림솜씨를 과장한 이야기겠지. 그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신라의 率居(솔거)가 황룡사 벽에 老松圖(노송도)를 그렸더니 뭇새가 날아와 부딪쳐 떨어졌다는 說話(설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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