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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노래
1
이윽고 우리는 추운 어둠 속에 빠져 들리니
너무나 짧은 여름날의 강렬한 밝음이여, 안녕!
이미 나는 불길한 충격을 주면서 안마당 돌바닥에
장작 던지는 소리를 듣고 놀란다.
겨울의 모든 것 - 분노와 증오, 전율과 공포
또한 강제된 고역은 내 몸 속에 되돌아 온다.
북극의 지옥의 날에다 비유할 것인가
내 마음은 얼어붙은 쇳조각이다.
나는 몸서리쳐짐을 느끼며 장작 던지는 소리 듣노니
세워진 단두대의 소리없는 울림조차 이렇지 않다.
내 가슴은 무거운 쇠망치를 얻어맞고
허물어지는 성탑과도 같다.
이 단조로운 충격에 내 몸은 흔들려
어디선가 관에다 서둘러 못질하고 있는 듯하다.
누굴 위해? - 어제는 여름이었으나 이제는 가을?
흡사 죽은 자를 매장하는 종소리와도 같다.
2
나는 그대 지긋한 눈의 푸른 빛이 좋아,
다사론 미녀여, 나 오늘은 모두가 쓰디써,
그대 사랑도, 침실의 즐거움도, 화끈한 난로도,
그 어느 것도 바다의 눈부신 태양만 못해.
하지만 사랑해주오, 다정한 그대여!
박정하고 심술은 놈일지라도 어머니 되어 주오.
애인이건, 누님이건, 가을 영롱한 하늘 또는
낙조의 한 순간 그 따스한 정을 베풀어주오.
잠깐의 수고를! 무덤 기다리니, 그 탐욕한 무덤이
아! 내 이마 그대 포근한 무릎에 얹고,
백열의 지난 여름 그리며, 이 늦가을의
따스하고 누른 햇살 맛보게 해주오!
요점 정리
작자 : 보들레르
내용 연구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악의 꽃' 재판에 수록되어 있는데, '처녀와 같은 순진성'을 지닌 여배우 마리 부뤄노에게 바쳐진 작품이라고 한다. 초조하고 불안한 가을의 상념을 노래한 시이다. 1부는 닥쳐올 겨울의 음울함과 음향이 갖는 불길한 예감을 보여주고 2부에는 인생의 늦가을에 따뜻한 사랑의 정을 애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제 2부에서 "낙조의 한 순간, 그 따스한 정을 베풀어주오"라고 노래한 대목은 그의 실연을 암시한인 듯하다.
심화 자료
보들레르 (Baudelaire, Charles-Pierre) [1821.4.9~1867.8.31]
파리 출생. 아버지는 62세의원로원(元老院)사무국 고관이었고, 어머니는 후처로 28세였다. 이러한부모의 연령 불균형이 이상신경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없다. 6세 때 아버지가 죽고, 이듬해에 어머니는 육군 소령 자크 오피크와재혼하였다. 의붓아버지가 대령으로 승진하여 리옹에 부임하자, 11세된 그는 리옹의 사립학교에 들어갔고, 이어 리옹 왕립중학교의 기숙생이되었다. 다음으로 군인 아버지의 파리 전근에 따라 루이 르 그랑 중학교로전학했는데, 최고학년이 된 18세 때 품행관계로 퇴학처분을 당했다. 그러나 대학 입학 자격시험(리세)에는 단번에 합격하였다. 그 후 문학지망을표명하여 양친을 실망시키고, 카르테 라탱을 방랑하며 방종한 생활을하였다.
보다 못해 내려진 친족회의의결의로 캘커타행 기선을 탔으나, 인도양의 모리스섬(모리셔스 本島)과부르봉섬(프랑스령 레위니옹섬)에 체재하였을 뿐, 9개월 후에는 파리로되돌아갔다. 이윽고 성년이 되어 의붓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상속하여, 센강(江)의 생 루이섬[島]에 거처를 두고 댄디슴의 이상을 추구, 호화판탐미생활에 빠졌다. 흑백혼혈의 무명 여배우 잔 뒤발과 알게 되자, 관능적인시흥(詩興)의 원천으로 삼았고, 평생의 악연(惡緣)을 맺은 것도 이 무렵의일이었다. 2년 동안에 유산을 거의다 낭비해 버리자 법정후견인이 딸린준금치산자(準禁治産者)가 되었다. 24세 때 《1845년의 살롱》을 출판하여미술평론가로서 데뷔하였으며, 문예비평 ·시 ·단편소설등을 잇달아 발표하여 문단에서 활약하는 한편, 1848년 의붓아버지에대한 반항으로 2월혁명의 폭동에도 가담하였다. 또 E.A.포의 작품을번역 ·소개하였고 만년에 이르기까지 17년 간에 5권의 뛰어난번역을 완성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배우마리 도브륀과 연애관계를 가졌으며, 또 사바티에 부인의 살롱의 단골이되어 그녀를 성모처럼 추키면서 많은 연애시를 썼다. 1857년, 청년시절부터심혈을 기울여 다듬어 온 시를 정리하여 시집 《악의 꽃 Les Fleursdu Mal》을 출판하였으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벌금과 시 6편의삭제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해 의붓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는 센강(江) 어귀의 옹푸루르 별장으로 옮겨 살았다. 1860년에 《인공낙원(人工樂園)》을출판하고, 1861년에 《악의 꽃》의 재판을 간행하였다. 이 무렵부터문학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1864년, 벨기에의 브뤼셀에가서 궁색한 생활을 면하기 위한 강연여행을 가졌으나 건강이 악화되었다.
1866년, 나뮈르시(市)의생 루 교회를 구경하던 중 졸도하여, 뇌연화증(腦軟化症)의 징후로 브뤼셀에서응급치료를 받은 다음, 어머니를 따라 파리로 돌아와서 입원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여름, 실어증으로 46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파리 몽파르나스묘지에 있는 오피크가(家)의 무덤에 묻혔다. 그의 사후,1868~1869년에간행된 전집 속에는 고티에가 서문을 쓴 《악의 꽃》(제3판) 《소산문시 Petits po憙mes en prose》, 만년의 작품인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이 수록되었으며, 또 들라크루아 ·바그너 ·고티에 등을 논한 평론은 《심미섭렵(審美涉獵) Curiosit暴sesth暴tiques》(1869) 《낭만파 예술 L’art romantique》(1868)이라는총제목하에 수록되었다. 또한 만년의 수기인 《화전(火箭)》 《벌거벗은마음》은 《내심(內心)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보들레르의 서정시는 다음세대인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 상징파 시인들에게큰 영향을 끼쳤으며, 죽은 지 10여 년이 지나서야 그의 문학적 가치가높이 평가되었다. 발레리는 “그보다 위대하고 재능이 풍부한 시인들은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중요한 시인은 없다”라고 절찬하였다. E.A.포의지적 세계에 감동하여 낭만파 ·고답파의 구폐(舊弊)에서 벗어났으며명석한 분석력과 논리와 상상력을 동원하여 인간심리의 심층을 탐구하고, 고도의 비평정신을 추상적인 관능과 음악성이 넘치는 시에 결부한 점에그의 위대성이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보들레르의 다른 시
상응(相應) - 교감(交感)
자연(自然)은 하나의 사원(寺院), 그 살아 있는 기둥들
때로 혼돈한 말을 새어 보내니,
사람은 친밀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간다.
암야(暗夜)처럼, 광명(光明)처럼 광활하며,
컴컴하고도 심오한 통합(統合)속에,
머얼리서 혼합되는 긴 메아리인 양
향(香)과 색(色)과 음(音)이 서로 화답(和答)한다.
어린이 살결처럼 신선한 향기, 목적(木笛)처럼
은은한 향기, 초원(草原)처럼 푸른 향기 있고,
- 그 밖에도 썩은 냄새, 풍성하고 기승한 냄새들,
정신과 감각의 앙양(昻揚)을 노래하는
용연향(龍涎香), 사향(麝香), 안식향(安息香), 훈향(薰香)처럼
무한한 것들의 확산력을 지닌 향기도 있다. (김붕구옮김)
자연은 사원이니 거기서 살아 있는 기둥들
때때로 모호한 말들을 새어 보내며,
사람은 친근한 눈길로 자기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그 곳으로 들어간다.
어둠처럼 빛처럼 드넓으며
컴컴하고도 그윽한 통일 속에서
긴 메아리 멀리서 섞이어 들 듯
색과 향과 소리가 서로 화답하네.
어린 아기 살갗인 양 싱그러운 내음,
오보에처럼 아늑한 향내, 초원처럼 푸르른 것 있고,
또 그밖에도 썩고 풍성하고 기승스러운 것들 있어
한없는 사물의 확산력 가졌으니
보아라 용현향, 사향, 안식향, 훈향 들
노래하도다, 정신과 감각들이 하나 된 감격을. (유평근옮김)
자연(自然)은 하나의 사원(寺院)이니 거기서
산기둥들이 때로 혼돈한 말을 새어 보내니,
사람은 친밀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간다.
암야(暗夜)처럼, 광명(光明)처럼 광활하며
컴컴하고도 심오한 통일(統一) 속에,
멀리서 혼합되는 긴 메아리들처럼
향(香)과 색(色)과 음향이 서로 응답한다.
어린이 살처럼 싱싱한 향기, 목적(木笛)처럼
은은한 향기, 목장(牧場)처럼 초록의 향기 있고,
― 그 밖에도 썩은 풍성하고 기승(氣勝)한 냄새들,
정신과 육감의 앙양( 揚)을 노래하는
용연향(龍涎香), 사향(麝香), 안식향(安息香), 훈향(薰香)처럼
무한한 것들의 확산력을 지닌 향기도 있다.
자연은 신전, 그 살아 있는 기둥들에서
이따금 어렴풋한 말들이 새어 나오고,
사람은 상징의 숲들을 거쳐 거기를 지나가고,
숲은 다정한 눈매로 사람을 지켜본다.
멀리서 아련히 어울리는 메아리처럼
밤처럼 광명처럼 한없이 드넓은
어둡고도 깊은 조화의 품안에서
향기와 색채와 음향은 서로 화합한다.
어린애의 살결처럼 신선스럽고
오보에처럼 보들하며, 목장처럼 푸른 향이 어리고
--- 또 한편엔 썩고 푸짐한 승리의 향기가 있어,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스런 것으로 번져 나가서
정신과 감각의 환희를 노래한다.
요점 정리
작자 : 보들레르(Charles Pierre,Baudelaire) / 김붕구 옮김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상징적. 직관적. 탐미적. 신비적. 감각적
어조 : 사물의 이면 세계를 직관적으로 보고 느끼는 듯한 어조
심상 : 상징적. 감각적. 공감각적
표현 : 감정이 절제됨. 시어가 매우함축적임
구성 :
1연 인생의 상징으로서의 자연(상징으로 가득찬 자연)
2연 삶의 깊이와 넓이, 다양성(색과 향과 소리의 상응)
3연 세상의 아름다움과 추함(여러 가지 감각의 뒤섞임)
4연 통일적 인식의 추구(모든 감각의 통일성)
제재 : 자연
주제 : 상응과 통일적 인식의 추구. 우주의 여러 차원에 걸친 상응(교감)들
출전 : <악의 꽃>
내용 연구
목적(木笛) : 나무피리
기승(氣勝) : 억척스럽고 굳세어서 좀처럼 남에게 굴하지 아니함
앙양(昻揚) : 높이쳐들어서 드러냄. 높이고 북돋움
용연향(龍涎香) : 고래로부터 채취하는 송진 비슷한 향료. 사향과 비슷한 향기가 있음.
사향(麝香) : 사향노루, 사향고양이 등의 수컷의 배꼽과 불두덩을 싸고 있는 향낭을 쪼개어 말린향료
안식향(安息香) : 때죽나무과에 딸린 갈잎큰키나무. 그 나무의 진에서 나는 향은 훈향료, 방부제, 소독제 등으로 쓰임
훈향(薰香) : 태워서 향기를 내는 향료, 훈훈한 향기
자연은 하나의 사원(寺院)이니 : 자연은 인간의 온갖 상징을 만들어 내는 사원이니, 인간의 모든 상징 행위란 자연에 대한 교감으로부터 나온다는 시인의 상징관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은 인간의 정신세계와 교섭을 갖게 되는 물질적인 장소로온갖 상징을 만들어 낸다. 인간은 이 사원에서 자연의 실체와 만나게 된다. 자연을 인생의 깨우침을 얻는 곳으로 인식한 표현.
기둥들 : 나무들
혼돈한 말 : 잎가지의 살랑거리는 소리로 신탁을 내리던 그리스의 떡갈나무들을 연상시킨다. 시인이란 바로 이 숨은 뜻을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언어의 통역가이다.
상징의 숲 : 자연은 인생의 원리를 상징적으로 다양하게 표상하고 있다.
어둠처럼 광명(光明)처럼 광활하며 : 속인(俗人)에게는 어둠처럼 컴컴하지만, 시인에게는 광명처럼 깊은 것으로 나타난다.
통일 : 마지막 종합으로서 반대되는 것들을 결합시키는 것
향(香)과 색(色)과 음향이 서로 응답한다. : 후각과 시각과 청각은 각기 다른 감각이 아니라 상징의 숲 속에서는 대등하게상호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상징주의가 많은 성과를 이끌어낸 '공감각 표현'과 유사한 표현이다. 이상 야릇한 것은 내 귀가 그 빛깔을 분별하고 내 눈이 소리를 듣는 일이다.
어린이 살처럼 - 풍성하고 기승한 냄새들 : 향기, 즉 후각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후각으로부터 무언가 다른 것을 상상하게 되는 인간의 감각 사이의 상호 작용을 말하고 있다.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 곧, 인생의 긍극적 측면을 가리킨다.
정신과 육감의 앙양(昻揚)을 노래하는 - 확산력 지닌 향기도 있다. : 정신과육감의 공존 대립은 보들레르적 시의 원천이며 두 원동력에서 똑같이 만족을 얻는다. 썩은 냄새와 용연향, 사향은 육감을 앙양하고 싱싱한, 아늑한 초록의 향기들과 안식향, 훈향은 정신을 앙양하며 풍성하고 기승한냄새는 어느 쪽에도 해당될 수 있는 것이다.
썩고 풍성하고 기승스러운 것 : 자연의 추한 모습. 곧, 인생의 부정적 측면
정신과 감각들이 하나된 감격 : 인생의 여러 요소를 포용하여 통일적으로 인식한 데 따른 감격을 가리킨다.
이해와 감상
상응이란 물질 세계와 영혼의 세계가 소리와 메아리처럼 서로 화답한다는 생각을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물질계(자연)가 우리에게 마련해 두는 상징을통하여 우리는 영혼계에 접근할 수 있는데 우리의 모든 감각은 자연의신비를 드러내기 위하여 서로 합쳐서 협력한다. 그리고 자연이라는 신전이마련해 주는 상징의 수수께끼를 푸는 일을 맡아 보는 것이 바로 시인이다.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 사이는 서로 상응하고 시인은 만상이 숨기고있는 뜻을 해독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럴 때 사물은 곧 상징이며, 시인은 친근한 시선으로 그것을 지켜본다. 즉 물질과 영혼, 인간과 자연, 자연의 상징을 통한 인간(시인)과 영혼의 세계가 서로 상응하고 있다는것이다. 그 결과 시인은 상징의 숲을 거쳐 미의 절대적인 경지에 이르게되는 것으로 본다. 이런 관점을 토대로 감상하면 작품의 의미를 깊게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보들레르는 외부의 세계와인간 사이에, 혹은 자연 세계와 정신 세계 사이에는 상응 관계가 있다는것을 발견한 시인이다. 이 시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자연은 '모호한말'들을 흘러 내보내는 '사원(寺院)'처럼 나타나며, 사원이라는 상징의숲에서 인간은 관찰하면서 동시에 관찰당하는 것을 느끼면서, 향기와색깔과 소리가 서로 응답하는 신비의 체험을 한다. 이질적인 감각들이상호 침투하여 섞이며 또한 동시적으로 체험되고 모든 사물들이 상호적인유추에 의해 표현되는 세계에서 시인은 가시적이며 물질적인 대상 뒤에감추어져 있는 본질적인 의미를 판독한다. 보들레르가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 상징주의 시인들의 선구자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이런 점들 때문이다.
이 시는 <악의 꽃>의 제1부,"우울한 이상"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서, 보들레르 시의이론과 미학의 기초를 확립시킨 작품이다. 이 시에서 물질 세계와 정신세계는 서로 교감을 나눈다. 정신 세계에 접근하게 해 주는 상징들을제공하는 것이 바로 물질 세계이며, 물질 세계를 포착하는 우리의 모든감각들은 서로 뒤섞여 자연의 신비를 밝혀 내는 데 협력한다. 이 세상의일체는 상형 문자이고, 시인이란 다름 아닌 번역자이며 암호 해독자이다. 상상력은 시인으로 하여금 즉각적인 현실의 대상들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주어서 다른 세계, 즉 관념의 세계와 이 현실의 대상들이 맺고 있는관계를 내부로부터 느끼게 해 준다. 이렇게 구상된 예술은 일종의 마법적기능을 지니는데 현실과 그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적 세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말과 사물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모해야 한다. 시인은 상상력을 통하여 현실 세계와 관념 세계를 접합시키는 자이며, 이것이 바로 '상응(相應)' 이론이다. 이 상응은 상징적 외관과 정신적실재를 마술적으로 하나의 감각 기호로 결합시킨다.
심화 자료
보들레르의 작품 세계
보들레르는 당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고유의 영역을 발견하고 고수하여 현대시의 원천을 이루었다. 그의 시적 특징은 다음 4가지로 나누어 생각할수 있다.
첫째, 미학, 미감각의 선구적 현대성의 시이다. 그의 시집은 모든 미학을 포용하는, 그 방면의무진장의 보고(寶庫)인데, 특히 미감각과 심미 의식의 예리함과 참신함, 그리고 시대를 앞서는 선구적 현대성은 놀라운 일이다.
둘째, 다의성및 모순·대립의 포용과 통일의 시이다. 보들레르의 이원성은신의 전락(轉落)에서 비롯된 근원적, 보편적 현상이다. 즉 완전무결한유일자인 아버지로부터 그 불완전한 반신(半神)으로서의 개체 남녀가태어난 것부터가 전락의 시초며, 보편적 모순과 대립의 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합쳐짐으로써 하나의 유일체가 될 수 있는 모순이다. 즉, 통일의 모순이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그는 사회, 삶, 자연 만물, 미학에 이르기까지 모순, 대립을 당연한 것으로 포용된다.
셋째, 시의 탁마(琢磨)와언어의 힘이다. 극히 예외적인 몇 편을 빼고는 그의 시작(詩作)과 발표사이에 대개 몇 해 이상의 기간이 격해 있는데, 이는 완벽한 탁마를위해서였다. 완벽하게 가다듬어진 어구 속에 선택된 시어의 힘과 그것이담는 이미지의 약동이 합쳐져, 당대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긴 생명을지닌 시가 만들어졌다.
넷째, 짜여진건축물과 같은 시이다. (악의 꽃0에서 볼 수 있듯이, 각각의 독립된시편들은 하나의 건축물처럼 구성되어 있다. 한 작품으로서 서사시 속에흡수되는 동시에, 거꾸로 그 전체 구조에서 새로운 뜻을 부여받으며, 언의 역점(力點)들이 이동되어 심화되는 유래 드문 현상을 일으킨다.
보들레르(Charles(-Pierre)Baudelaire)
1821. 4. 9 파리~1867.8. 31 파리. 프랑스의 시인.
에드거 앨런 포의프랑스어 번역자이기도 하다. 외설과 신성모독으로 기소당했고, 죽은지 오래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중의 마음 속에서 타락과 악덕의 존재로동일시되는 보들레르는 19세기보다는 20세기 사람들에게 직접 이야기하고있는 듯 여겨질 만큼 당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현대 문명에 가까이 접근한시인이었다. 그는 낭만주의의 부자연스러운 꾸밈을 거부하고, 대부분내성적인 시 속에서 종교적 믿음 없이 신을 추구하는 탐구자로 모습을드러냈다. 그는 생명의 모든 징후(한 송이 꽃의 빛깔, 창녀의 찡그린얼굴)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했다.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그는 현대세계의 인간 조건에 호소하고 있으며, 주제 선택의 제약을 거부하고상징의 시적 힘을 강력히 주장한 점에서도 역시 현대적이다.
젊은시절
보들레르의 아버지프랑수아 보들레르는 나이 많은 홀아비로서 1819년에 지참금이 없는젊은 여자와 결혼했다. 결혼을 통해 사치와 안정을 얻기 원했던 이 여자는그 꿈을 단념하고 프랑수아 보들레르와 결혼한 것이다. 보들레르는 그들의유일한 자식이었고, 어머니는 타고난 열정적 기질로 외아들에게 헌신적애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하여 상당한연금을 받게 된 아버지는 교양있는 사람이었고, 상당히 우수한 아마추어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4~5세밖에 안 된 아들에게 형태와 선의 아름다움을감상하는 법을 가르쳤는데, 이때 쌓은 미적 취향이 나중에 보들레르가 19세기의 가장 주목받는 예술 비평가로 성장한 요인이 되었다.
1827년 2월 아버지프랑수아 보들레르가 죽자 어머니는 1828년 11월에 자크 오피크라는군인과 재혼했는데, 재혼할 당시 이미 계급 높은 장교였던 오피크는그후 장군까지 승진했고, 외국 대사와 상원의원을 지냈다. 오피크는의붓아들이 규율을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에, 1832년 그를 리옹에 있는왕립 중학교의 기숙 학생으로 들여보냈다. 학교 생활은 엄격한 군대식일과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이곳에서 그는 행복했던 듯하며 몇 개의상을 타기도 했다. 그는 또한 언어에 대한 감수성을 보이기 시작했고, 자신의 문학적 표현 양식을 개발했다. 1836년 의붓아버지가 파리로 전근하자그는 루이르그랑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아버지는 그가 '학교에 명예를가져올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소망을 실현하는 대신걸핏하면 규율을 어기는 불량 학생이 되었다. 선생들이 보기에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허세'를 부리고 엉뚱한 역설의 재능을 개발하는조숙하고 타락한 비행 청소년의 표본이었다. 그는 심한 우울증 증세를보였고, 자신이 천성적으로 고독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1839년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한 뒤, 그는 의붓아버지가 마련해준 외교관자리를 마다하고, 글을 써서 살아갈 작정이라고 발표하여 어머니를 놀라게했다. 그가 가장 간절히 원한 것은 자유, 즉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고라탱 구역의 대학생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유였다. 미래의 많은 작가들과마찬가지로 그는 법과대학에 등록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1840년까지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가 아편과 대마초를 탐닉하고, 훗날 죽음의원인이 된 성병에 걸린 것도 이무렵이었을 것이다.
1841년 의붓아버지는그를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인도로 보냈다. 그는 아들을 적어도 2년 동안 인도에 머물게 할 작정이었다. 보들레르는 6월 9일에 출항했지만, 항해가 따분해지자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행동으로다른 승객들을 아연실색하게 하면서 즐거워했고, 배가 풍랑을 만난 뒤(이때보들레르는 놀랄 만큼 용감하게 행동했음) 수리하기 위해 모리셔스 섬에입항하자 더이상 배를 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사람들의 설득으로레위니옹 섬까지 갔지만, 거기서 다시 고국으로 가는 다음 배를 타겠다고고집을 부렸고, 결국 1842년 2월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항해와모리셔스 섬에서 3주일 동안 머문 경험은 그의 상상력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해주었으며, 그는 이때 얻은 이미지를 시에서 끌어내곤 했다. 그는 동양에대한 이 유일한 체험을 결코 잊지 않았고,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적 동경을간직했으며, 이런 동경은 그의 시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항해를떠날 때 그는 아직도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는 소년이었으나,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상상력에는불이 붙었고,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1842년 4월에 성년이 되어 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자, 그는 타고난 낭비벽을 만끽하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좋은 옷을 사들이고 생루이 섬의 로죙 호텔에 있는 아파트를 값비싼가구로 꾸미느라 무분별하게 돈을 썼으며, 그당시의 전형적인 '멋쟁이'(당디) 생활을 시작했다. 사업이나 경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그는 아버지한테서물려받은 유산을 큰 재산으로 생각했고, 사기꾼과 고리대금업자의 먹이가되어 이후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힐 빚더미에 올라앉을 준비를 했다. 그가괴짜이고 허풍쟁이이며 부도덕하다는 평판이 난 곳은 로죙 호텔에 살고있을 때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어했다는 점에서는 그당시파리에 살고 있던 대다수 시인이나 예술가들도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1844년 보들레르는장차 그에게 수많은 불행을 가져다줄 혼혈 여인 잔 뒤발과 관계를 맺었다. 한때 그는 잔을 열렬히 사랑했고, 잔의 잔인함과 배신 및 어리석음에절망하여 자살을 기도한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떤 면으로는 여전히 잔에게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잔은 그의 첫번째 연시 〈검은 비너스〉 연작에영감을 불어넣어주었는데, 이 시들은 프랑스어로 된 성애시(性愛詩)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에 속한다.
시간 여유가 충분하고걱정거리가 없었던 이 초기 시절에 보들레르는 〈악의 꽃 Les Fleursdu mal〉을 이루게 될 거의 대부분의 시들을 썼다. 이 시집은 레즈비언에관한 시, 반항과 퇴폐에 관한 시, 그리고 노골적인 성애시로 이루어져있었다. 그는 이때 들라크루아와 쿠르베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을 알게되어 그림에 대한 지식을 얻었는데, 이런 지식은 장차 그의 예술 비평에탁월함과 독창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가 2년 만에 유산의 절반을 탕진하자그의 가족은 1844년초에 그의 나머지 재산을 신탁하라는 법원의 판결을받아냈고, 그는 매달 들어오는 신탁수익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의자유를 끝장내는 이런 조치에 어머니가 동의했다는 사실은 보들레르에게큰 상처를 주었다. 그의 가족은 보들레르의 사정도 잘 알지 못한 채, 그의 장래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그가 독립성을 회복하는 것을막았다. 아직도 빚더미에 짓눌려 있는 보들레르는 자신에게 허용된 연간수입 75파운드로는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었으므로 빚을 갚기 위해 다시돈을 빌려야 했다. 상황이 이처럼 갑자기 변하자 그의 사치스럽고 무사태평한생활도 막을 내렸다. 그의 운명은 제한된 수입에 얽매인 채 궁핍과 고난으로얼룩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작가가되고 싶은 아들의 소망을 막으려고 애쓰는 부모가 어쩌면 옳을지도 모른다는생각 때문에 가족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더욱 깊어졌다. 사춘기에 겪었던조울증이 되살아났고, 그가 '우울'이라고 부른 기분이 더 자주 그를덮치게 되었다. 위대한 우울의 시 가운데 첫번째 작품을 쓴 것도 바로이무렵이었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불행한 사람도 많았기때문에, 그는 고통받는 인류에 대한 동정심을 키우게 되었다. 많은 친구들의혁명적 이상주의에 매혹된 그는 1848년 2월혁명에 가담했고, 이 혁명은성공하여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편 그는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로 결심하고 직업작가가 되었다. 그가 처음 발표한 작품은 1845년 파리 현대 미술전에 대한 평론이었다. 이 예술비평은 날카로운 판단력과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이미 현대 예술의 방향에 대해 예견하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그의 예술비평인 〈1846년 현대미술전 Salon de 1846〉은 미학적 비평의 이정표이다. 이 평론에서 그는 단순히 전시회를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독창적인이론을 제시하는 한편, 그림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명암으로 이루어진고유한 화음을 가지며 자연의 색깔에는 음악적인 가락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그가 나중에 확립하게 될 자연과 예술의 '조응'(照應 correspondances)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1845, 1846년에는 몇 편의 시가 아방가르드 잡지들에 발표되었고, 그는 이런 잡지에 논설과 평론도 기고했다. 1847년그는 유일한 장편소설이며 자전적 작품 〈허풍선이 La Fanfarlo〉를발표했다. 훨씬 오래 전에 쓰기 시작한 이 작품은 자신이 로죙 호텔에서사치스럽게 살고 있었을 때의 인간 됨됨이를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다. 보들레르가 1848년 6월혁명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맡은 뒤 1849년 12월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고, 그가 왜 1849년 12월에 디종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곳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도 확실하지않다. 어쨌든 1850년에는 여느 때처럼 가난하고 불행한 모습으로 파리에돌아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개심한 증거를 보일 때까지 아들에게편지를 쓰는 것조차 거부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자극하여 정규적인 직업을갖게 할 작정이었다. 보들레르도 얼마 동안은 열심히 일했지만 이것은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버렸고, 그는 어머니의 엄격함때문에 더욱 용기를 잃었다. 그는 많은 논설을 구상했지만 1편도 쓰지못했고, 쓰기 시작한 것은 많았지만 1편도 끝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경험과 고통의 세월 속에서 그는 위대한 창조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그의 본성은 더욱 풍부해졌고,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51년 12월에 쿠데타를 일으킨 뒤로는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잃어버리고 원숙기의 개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포의 번역과 〈악의 꽃〉
그의 원숙기는그가 1852년초에 에드거 앨런 포의 글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당장 포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가 포에 대해 쓴 첫번째 평론(이글은 영어가 아닌 외국어로 씌어진 포에 대한 첫번째 평론임)은 〈르뷔드 파리 Revue de Paris〉지 3·4월호에 발표되었고, 그후 그는포의 작품을 번역한 여러 편의 글을 평론지에 실었다. 그중 하나인 〈까마귀 The Raven〉는 그가 번역한 유일한 시였다. 1852~65년 그는 포의 작품을번역하고 그에 대한 평론을 쓰는 일에 몰두했다. 〈기담(奇談) Histoiresextraordinaires〉은 1856년에, 〈새로운 기담 Nouvelles Histoiresextraordinaires〉은 1857년에, 〈아서 고던 핌의 모험 Aventures d'ArthurGordon Pym〉은 1858년에, 〈외레카 Eureka〉는 1864년에, 그리고 〈괴기담 Histoires grotesques et serieuses〉은 1865년에 나왔다. 처음 두 작품에는포를 해설한 긴 서문이 딸려 있다.
이 책들은 번역서로서프랑스 산문의 고전이다. 보들레르의 어머니는 영국에서 망명자의 딸로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 영어를 배웠다. 그는 포한테서 자신과똑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 그리고 그가 추구하고 있던 결론에 이미 독자적으로도달한 사람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포를 통하여 자신의미학 이론과 시의 이상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1852년 4월에 보들레르는잔 뒤발을 떠났다(실제로는 끝내 그 여자한테서 벗어나지 못했음), 그러나그는 여자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할 여자를 찾다가 여배우마리 도브룅에게 접근했다. 마리가 그를 거부하자 유명한 미인이며 일찍이화가의 모델이었던 아폴로니 아글라에 사바티에에게 구애했다. 사바티에는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의 친구로서 보들레르와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사이였다. 사바티에는 그의 〈하얀 비너스〉 연작에 영감을 주었다. 1854년 그는 다시 마리 도브룅과 관계를 맺었고, 그녀로부터 영감을얻어 〈초록빛 눈의 비너스〉 연작을 썼다. 이 두 연작에 포함된 시는대부분 그의 예술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한 작품들이다.
포의 작품 번역가로또한 예술비평가로서 차츰 명성이 높아지자, 마침내 그는 자신의 시를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1855년 6월 보수적 낭만주의의 요새인 〈르뷔데 되 몽드 Revue des Deux Mondes〉지는 보들레르가 자신의 대표작으로제출한 18편의 시를 발표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보들레르가 이 시들을고른 이유는 그 표현 방식과 주제가 독창적이고 놀랄 만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들이 발표되자 그는 악명을 얻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설적이라는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1857년 봄에 다시 9편의 시가 〈르뷔 프랑세즈 La Revue Francaise〉지에 실렸고 〈아르티스트 L'Artiste〉지에도 3편이실렸다. 그리고 6월에는 〈악의 꽃〉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시집때문에 보들레르와 그의 친구인 출판업자 풀레 말라시스 및 인쇄업자들은외설과 신성모독죄로 모두 기소당했다. 이 유명한 재판에서 그들은 유죄선고를 받고 벌금을 물었으며, 6편의 시가 발표 금지되었다. 이 조치는 1949년에야 겨우 해제되었다. 몇몇 독자들은 보들레르의 의도와 완전한예술성을 이해하고 높이 평가했지만, 몇 세대 동안 〈악의 꽃〉은 여전히타락과 불건전 및 외설의 표본으로 남아 있었다. 보들레르는 1861년 〈악의 꽃〉을 대폭 증보한 개정판을 출판했지만, 금지된 시는 삭제했다. 이 금지된 시들은 1866년 벨기에에서 출판된 〈유실물 Les Epaves〉이라는시집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개정판을 더 증보한 제3판을 준비하고있던 1866년에 보들레르는 온 몸이 마비되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뒤친구인 샤를 아슬리노가 출판했지만, 그것은 아마 보들레르가 구상했던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보들레르가 시집에 넣으려고 계획하지않았던 몇 편의 시와 1866년 〈현대의 파르나스 Le Parnasse Contemporain〉에처음 발표되었던 6편의 〈새로운 악의 꽃〉도 포함되어 있다.
말년
그가 큰 기대를걸었던 〈악의 꽃〉이 실패한 것은 보들레르에게 쓰라린 충격이었고, 그의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은 갈수록 커지는 좌절감과 환멸 및 절망으로어두워졌다. 사바티에와의 정신적 사랑은 슬프게 끝나버렸고, 1861년마지막으로 헤어진 잔 뒤발은 여전히 그에게 부담과 걱정을 안겨주었다.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이 시기에 씌어졌지만, 책의형태로 출판된 것은 거의 없었다. 일부는 정기간행물에 발표되었다. 〈1859년 현대미술전 Salon de 1859〉은 〈르뷔 프랑세즈〉에, 〈리하르트바그너와 파리에서 공연된 탄호이저 Richard Wagner et Tannhauser aParis〉는 〈르뷔 외로펜 La Revue Europeene〉(1861)에, 〈현대 생활을그리는 화가 Le Peintre de la vie moderne〉(데생 화가인 콩스탕탱기)는 〈피가로 Le Figaro〉(1863)에, 그리고 시집 〈파리의 우울 LeSpleen de Paris〉을 엮기 위해 쓰고 있던 산문시들은 여러 신문에 나뉘어발표되었다. 이 마지막 산문시는 보들레르가 유독 아꼈고 오랫동안 손질해온작품이었다. 그는 마지막 쓰러지기 직전에도 여전히 이 시를 다듬고있었다.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의 〈밤의 가스파르 Gaspard de la nuit〉에서착상을 얻었지만, 주제는 같은 시기에 쓴 그의 운문시 주제와 같고, 작품의 분위기는 나이들고 깊은 우울증에 빠진 보들레르의 만성적인염세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이 산문시들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근대도시 파리에 대한 그의 감정, 그리고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낙오자들과버림받은 부랑자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악의 꽃〉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표현하고 있다.
1860년 풀레 말라시스는대마초와 아편의 효과에 대한 보들레르의 연구 논문 2편을 〈인공 천국 Les Paradis artificiel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고, 1861년에는 〈악의꽃〉 개정판을 냈다. 1862년 그는 파산을 선고받았다. 보들레르는 그의출판업자의 실패에 말려들었고, 경제 사정은 절망적일 만큼 어려워졌다. 빚쟁이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리고 출판을 준비하고 있던 작품들의판권을 팔기 위해 1864년 벨기에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 여행은실패로 끝났고, 그는 한 건의 출판계약도 맺지 못했다. 특히 미학이론을규정한 평론집을 출판하고 싶어했는데, 이 책의 출판계약에 실패하자그는 몹시 낙담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 간주했기때문에 평론도 시 못지 않게 중요했다. 그의 시를 충분히 음미하려면예술의 본질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해해야 한다. 그의 시는 모두 그의견해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결정체이며, 평론은 예술 작품의 본질과 그저변에 깔려 있는 원리에 대한 명상이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창조적예술가라면 결국 모두 비평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즉 예술가는평론을 통해 자신의 시를 해설하고, 자신의 미학을 연장하여 시에 적용한다는것이다.
벨기에의 나무르에머물고 있던 1866년 2월 보들레르는 병세가 악화되었다. 파리로 돌아온그는 1867년 8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에서 추모연설을 해달라고 부탁받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부탁을 받아들인 사람은아슬리노와 시인인 테오도르 드 방빌뿐이었다. 이 두 사람은 그의 가장오랜 친구였다. 보들레르는 인정받지 못한 채 죽었고, 그의 글은 대부분출판되지 않았으며, 이전에 출판된 것들도 절판되었다. 그러나 시인들사이에서는 곧 의견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미래상징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은 이미 그의 추종자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그는 19세기 프랑스 시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숭배자들은 그가 서유럽 전역의 감수성과사고방식 및 글 쓰는 방식에 혁명을 일으켰고, 그의 미학이론이 형성된시기는 시의 역사와 예술의 역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선언하기까지했다. 상징주의 운동은 바로 이 이론에서 원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En. Starkie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상징주의운동(象徵主義運動, Symbolist movement)
19세기말 일군의프랑스 시인들이 시작한 문학 및 예술 운동.
회화와 연극으로확대되었고, 20세기 유럽과 미국 문학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상징주의예술가들은 지극히 상징적인 언어를 암시적으로 사용해 개인의 정서적체험을 표현하고자 했다.
상징주의문학
주요 상징파 시인으로는프랑스의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쥘 라포르그, 앙리 드 레니에, 르네 길, 귀스타브 칸, 벨기에의 에밀 베르하렌과 조르주로덴바흐, 그리스 태생인 장 모레아스, 미국 태생인 프랜시스 비엘레그리팽과 스튜어트 메릴 등이 있다. 가장 중요한 상징주의 비평가는레미 드 구르몽이었지만, 상징주의의 원칙을 소설에 가장 성공적으로적용한 사람은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였고, 희곡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용한사람은 벨기에 태생의 모리스 메테를링크였다. 20세기 프랑스의 시인인폴 발레리와 폴 클로델은 상징파 시인들의 직계 후손으로 간주되기도한다.
전통적인 프랑스시의 기법과 주제는 고답파 시의 정확하고 세밀한 묘사에 뚜렷이 드러나있듯이 완고한 관습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상징주의는 이런 관습에대항하여 일부 프랑스 시인들이 일으킨 반란에서 시작되었다. 상징파시인들은 인간의 내면생활과 경험의 덧없고 순간적인 감각을 묘사하기위해 시를 설명적인 기능과 형식적인 미사여구에서 해방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인간의 내면 생활에 대한 감각적 인상과 형언할 수 없는 직관을환기하고자 했으며, 정확한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시인의 정신상태를 전하고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난해하고 혼란된 통일체'를암시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은유와 상징을 사용하여 존재의 근본적인신비를 전달하려 했다.
베를렌이나 랭보같은 상징주의의 선구자들은 샤를 보들레르의 시와 사상, 특히 〈악의꽃 Les Fleurs du mal〉(1857)에 수록된 시들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감각들간의 '조응'(照應 correspondances)이라는 보들레르의개념을 받아들였고, 이것을 바그너가 이상으로 삼은 여러 예술의 종합이라는개념과 결합하여 시의 음악성이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만들었다. 그리하여상징주의자들은 조심스럽게 선택한 낱말들의 고유한 화성과 음조 및색채를 섬세하게 다루어서 시의 주제를 전개하고 조정할 수 있었다. 시의 표현 수단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특성을 강조하려는 상징주의자들의노력은 예술이 다른 어떤 표현 수단이나 지식보다 우월하다는 확신에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은 또한 물질 세계의 유형성과 개별성밑에는 또 하나의 현실이 놓여 있다는 유심론적인 확신에 일부 바탕을두고 있었다. 그들은 이 또 하나의 현실의 본질은 예술 작품을 낳는데 이바지하는 주관적 감정의 반응과 예술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주관적감정의 반응을 통해 가장 잘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베를렌의 〈무언가 Romances sans paroles〉(1874)와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 L'Apres-midid'un faune〉(1876) 같은 걸작들은 출발한 지 얼마 안 되는 프랑스의진보적 시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장 모아레스는 1886년 9월 18일자 〈피가로 Le Figaro〉지에 상징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여기서그는 사실주의 연극과 자연주의 소설 및 고답파 시의 묘사적인 경향을비난하고, 보들레르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퇴폐'(decadent)라는용어를 '상징파'와 '상징주의'라는 용어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1880년대말에는상징주의를 지지하는 평론지와 잡지가 수없이 생겨나, 상징파 작가들은이 운동에 적대적인 비평가들의 공격에서 비롯된 논쟁에 자유롭게 참여했다. 말라르메는 상징파 시인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여담 Divagations〉(1897)은지금도 이 운동의 미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설서이다. 고정된 운율에서벗어나 좀더 자유로운 시의 운율을 얻기 위해, 많은 상징파 시인들은산문시를 쓰고 자유시(vers libre)를 사용했다. 자유시는 이제 현대시의기본 형식이 되었다.
시 분야에서 극단적인상징주의 운동은 1890년경 절정에 이르렀다가 1900년 무렵부터 갑자기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뚜렷한 초점도 없이 분위기만 느껴지는 상징파시의 수사적 표현은 결국 지나치게 기교적이고 가식적인 것으로 간주되기에이르렀고, 상징파 시인들이 한때 자랑스럽게 내세웠던 '퇴폐'라는 용어는단순히 세기말의 퇴폐적인 풍조와 부자연스러운 겉치레를 비웃는 용어가되어버렸다. 그러나 상징주의 작품들은 20세기에 대부분의 영국 문학과미국 문학에 강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실험적 기법은현대시의 기법을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상징주의 이론은 W.B. 예이츠와 T.S. 엘리엇의 시,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가 대표하는현대소설로 열매를 맺었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낱말의 음악적 조화와이미지 유형이 줄거리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상징주의 소설로성공한 몇몇 작품 가운데 하나는 J.K. 위스망스의 〈역행 A rebours〉(1884)이다. 이 책은 권태에 빠진 한 귀족이 퇴폐적인 미학을 추구하여 놀라운 임기응변의재주로 다양한 실험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20세기 미국의 비평가 에드먼드윌슨이 상징주의 운동을 개관한 책 〈악셀의 성 Axel's Castle〉(1931)은현대 문학 분석의 고전이며 상징주의 운동에 대한 권위있는 연구서로평가받고 있다.
한국 문학에 있어서의상징주의는 1910년대에 백대진· 김억 등이 발표한 글에서 비롯되었다. 백대진은 〈20세기 초두 구주 제 대문학가를 추억함〉(신문학, 1916.6)에서 레니에·보들레르·모레아스 등의 상징파 시인들을소개했고, 〈최근의 태서문단〉(태서문예신보, 1918. 11. 30)에서 말라르메계열의 지적 상징주의를 소개했다. 반면 김억은 〈요구와 회한〉(신문계, 1916. 9)·〈프랑스 시단〉(태서문예신보, 1918. 12)에서 베를렌계열의 감상적 상징주의를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그는 〈태서문예신보〉 6호에 베를렌의 시 〈거리에 내리는 비〉·〈검은 끝없는 잠은〉·〈아름다운밤〉 등과 11호에 베를렌의 〈작시론 作詩論〉을 번역해서 실었고, 상징주의시가 곧 자유시임을 보여주는 역시집 〈오뇌의 무도〉(1921)를 펴냈다. 그러나 베를렌의 영향을 받은 그는 내면의식의 섬세한 음영(陰影)이나외부세계와 자아와의 교감이라는 상징주의의 본질적 측면을 간과하고, 기분의 시학으로서만 이해했다는 점에서 한국 상징주의 시의 오류와한계를 드러냈다. 이어 1920년대 후반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에이르러 감각과 사상이 결합된 한국적 상징주의 시로 발전했다. 1950년대이후 상징주의 시는 김춘수의 존재론적 순수시, 전봉건의 언어의 마술적암시성, '현대시'동인들의 내면의식의 추구라는 형태로 변모했다.
상징주의연극
극작가들도 역시프랑스의 상징파 시인들, 특히 말라르메의 영향을 받았다. 말라르메는 1870년대에 〈데르니에르 모드 La Derniere Mode〉지에 연극평을 쓰면서, 그 당시 연극계를 지배하고 있던 사실주의극에 반대하고 인간과 우주의숨은 신비를 재현하는 시적인 연극을 제창했다. 연극은 시인-극작가가자신의 시적 언어가 지닌 암시적인 힘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와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의 조응을 드러내는 신성한 의식이 되어야한다고 말라르메는 주장했다. 상징파 극작가들은 본능적이거나 직관적으로알아낸 존재의 심오한 진실을 언어로는 직접 표현할 수 없으며, 오직상징과 신화 및 분위기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밝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요한 상징파 극작가는 벨기에의 모리스 메테를링크와 프랑스의 빌리에드 릴 아당, 폴 클로델이다.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역시 상징주의신념의 영향을 받았다.
상징파 연극의유명한 보기로는 릴 아당의 〈악셀 Axel〉(1884 초연, 1890 결정판),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메테를링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Pelleaset Melisande〉(1892), 알프레드 자리의 풍자적인 작품 〈위비 왕 Uburoi〉(1896) 등이 있다.
1890년에 프랑스의시인 폴 포르는 '예술 극장'을 세우고, 고대와 현대의 시를 낭독하는한편 상징파 연극을 상연했다. 1892년 포르가 은퇴하자, 오렐리앵 마리뤼녜 포가 자신의 외브르 극장에서 20세기까지 상징파 연극을 계속 상연했다. 상징파 연극은 통합된 하나의 운동으로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환상과분위기 및 기분에 의존하고, 사실주의 전통과 분명하게 단절한 것이 20세기 극작가들과 연극 공연에 영향을 미쳤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